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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장애재활클리닉
한차현 지음 / 박하 / 2014년 5월
평점 :
[슬픔장애재활클리닉]슬픔장애증후군에 대처하는 소설~
기쁨을 나누면 두 배가 된다고 한다. 슬픔을 나누면 반으로 준다고 한다. 하지만 기쁨 바이러스처럼, 슬픔 바이러스도 전염성이 강해서 더 확산되는 건 아닐까. 세월호의 참사를 보며 전 국민이 우울 모드에 빠지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도 슬픔을 나누어 작은 위로가 된다면 기꺼이 나누고 싶다. 우린 이웃이니까.
어쩌면 일생동안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하지 않을까. 삶이란 축복이면서도 고통이기도 하니까. 행복이면서도 슬픔이기도 하니까. 각본 없는 드라마기에 하루에도 여러 번 기쁨과 슬픔이 교차 한다.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고, 타인을 위로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린 인생을 살고 있다.
만약 오랜 슬픔을 간직한 슬픔장애인이 있다면 어떤 위로가 필요할까. 어디에 전화를 해서 비상위로든 긴급위로든 받아야 할까. 소설에서처럼, 애위사.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4/0513/pimg_7269711951010608.jpg)
애위사. 애도와 위안의 사람들. 슬픔을 넘어서는 마음의 힘. 명함에 있는 이름은 한차연. 작가랑 닮았다. 훗~ 작가의 의도일까. 나중에 한차현도 등장한다. ㅋㅋ
사랑하는 이를 갑자기 잃었을 때,
그 슬픔 그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세상 누가 우리의 고통을 위로해줄 수 있을까요?
슬픔을 넘어서는 마음의 힘.
애도와 위안의 사람들.(책에서)
애위사가 하는 일은 이런 거다. 6살 민서가 유치원 승합차를 탔다가 교통사고로 죽게 되자 그 가족들에게 민서를 위한 진혼의식을 치러주는 일이다. 장례식장에서 밤샘을 해주는 아르바이트는 기본이다. 우울증으로 자살한 부인을 위한 위로제를 하기도 하고, 유명 아나운서의 자살의 원인이 된 야구선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첫 부분이 눈길을 끈다. 손예진을 닮은 문상객…….<클래식>의 손예진이 아니고, <아내가 결혼했다>의 손예진을 닮았다. <오싹한 연예>의 손예진이 아니고 <무방비도시>의 손예진을 닮았다. 그렇다면 소설의 분위기도 그렇다는 얘기다.
장례식장 103호의 31세 남성은 차에 연탄불을 피워 자살했고 개인 부채가 8천만 원이라는데……. 남색치마에 하얀 이마, 손예진을 닮은 문상객은 혼자서 밤을 새는 이유가 무엇일까.
애위사 명예를 걸고 장례식장 투어를 하고 있는 차연은 104호에서 밤샘을 한다. 병원을 나오면서 손예진을 닮은 여자를 쫓아 아침을 함께하게 된다.
손예진을 닮은 여자는 누구일까, 차연의 직업적인 애도와 위로가 슬픔을 가진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슬픔은 삭히는 게 아니라 떠나보내는 거라고.(62쪽)
네일 아티스트 원형과 애위사 직원 차연의 만남.
카페 페이스에서 만난 슬픔장애재활클리닉 멤버들.
원형이 간직하고 있는 보석함이 든 상자와 구형의 은색 애니콜 폴더 전화기.
죽은 이들을 위로하고 싶다는 의뢰인 성이연. 하지만 정작 위로가 필요한 건 그녀였으니……. 진정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그녀 자신이라니! 죽은 이보다 더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남은 자들이었다니! 죽음은 삶의 완성인가 아니면 또 다른 시작인가. 성이연과 원형은 동일 인물일까.
자살 안내자들의 이야기, 자살 클럽 이야기가 섬뜩하게 다가온다. 자살은 클리닉의 한 방법이 아닐 텐데…….
마지막에 펼쳐지는 차연과 성이연, 흰 와이셔츠 남자 이야기는 그대로 스릴러다. 죽음을 막기 위한 숨 막히는 접전! 이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마주하는 이야기가 무슨 미스터리 같다.
깊은 슬픔도 오래가다 보면 슬픔장애가 된다. 치유가 힘들거나, 헤어나기 힘들거나……. 그래서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4/0513/pimg_7269711951010610.jpg)
애위사. 이런 직업이 실제 있을까. 일본에서는 인생응원단이 있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인생응원단은 은퇴 노인들이 주축이 되어 기운 잃고 힘든 이들에게 힘찬 응원을 보내는 일을 한다.
모두가 위로가 필요한 세상. 누가 누구에게 위로를 해야 할까. 누구나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죽음은 늘 곁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담담하게 맞을 수밖에.
삶이 호락하지 않듯, 죽음 또한 호락하지 않다. 생도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죽음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법이다. 물론 더불어 함께하는 위로하는 이가 있다면 더욱 힘이 되겠지. 그래도 애초에 생을 사는 동안 결국 슬픔도 오롯이 홀로 견딜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죽은 이의 넋을 위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남은 자들의 슬픔도 위로해야 하는데…….
과학이 해결해 줄 것인가. 종교가 해결해 줄 것인가. 우린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방황하다 삶을 완성한다. 과학이 좀 더 발전한다면 이생과 저승을 연결하는 화상통화가 가능해질까. 아니면 웜홀을 타고 이승과 저승을 왕복할 수 있을까.
슬픔장애에 대처하는 소설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게 한다. 밥 잘 먹고 잘 자고 마음껏 웃자. 억지로라도......
처음 읽는 저자의 소설이지만 글맛이 있다. 다음 소설도 기대가 된다.
** 한우리 북카페 서평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