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그마
김성령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에니그마]절대로 약점을 잡히지 마라, 그리고 암호를 해독하라!

 

표지그림이 예사롭지 않다. 뿔 달린 사슴이 겁도 없이 우아하게 정면을 직시하고 있다. 왼쪽에는 기숙사 같은 3층짜리 고풍스런 건물이 있고 뒤쪽으로는 숲으로 이어진 듯 활엽수가 무성하다.

 

에니그마(enigma)는 수수께끼라는 뜻이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암호 기계였다고 한다. 연합군이 독일에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 중에는 에니그마의 해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블레츨리 파크의 영국 천재 과학자들이 일궈낸 쾌거였다.

이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9년, 유럽 각국 부유층 학생들이 모인 영국 사립 기숙학교 세인트 커스버트 남자 고등학교가 배경이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10대 남자 아이들이 권력욕, 그에 다른 일탈과 왕따를 보고 있으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주인공인 클로드는 조용해서 비밀스럽기까지 한 소년이다.  낮은 자존심에 풀 죽어 있는 예민하고 선량한 소년 정도랄까, 어쨌든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아이다. 클로드는 제임스의 잔인하고 무자비한 괴롭힘을 받는 일에 이젠 내성이 생겼을 정도다. 구타를 당하거나 모욕을 당해서 기분이 상하지만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하루에도 여러 번 제임스 일당의 폭력을 겪다보니 익숙해진 걸까. 클로드는 자신의 흥미를 억누르고 감정을 조절하고 그렇게 속마음을 숨기는 일에 편하기까지 하다.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같은 방을 쓰는 독일인 요한이다. 요한 역시 다른 친구들에게 왕따를 받는 중 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인이니까.

 

하지만 3명의 전학생이 오면서 분위기가 바뀌게 된다. 영국 총사령관을 아버지로 둔 리처드, 영국 해군 장교의 아들인 프레드릭, 폴란드 정보부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둔 데클런이 오면서 반전이 시작된다. 전학생 중에서 리처드는 아버지의 권세를 등에 업고 금세 학교의 독재자로 등극하게 된다. 리처드는 자신의 신분만큼이나 말과 행동에서 절대적인 위엄을 풍겼고, 위풍당당하고 논리 정연한 말투까지 지녔다. 모두들 그와 친하고 싶어 하지만 악동 제임스는 굴욕을 당하면서까지 리처드 곁에 있고 싶어 한다. 하지만 리처드는 클로드를 옆자리에 앉게 되는데…….

클로드가 리처드의 관심을 받은 이후 친구 요한에겐 더욱 가혹한 왕따가 가해진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인의 피를 지닌 대가로 결국 요한은 학교를 떠나게 되고…….

 

절친 마저 사라진 학교에서 다시 클로드를 향한 제임스의 폭력은 시작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 리처드는 구원의 손길을 보내온다. 제임스 아버지의 비리를 담은 봉투를 건네주면서 제임스를 궁지로 빠뜨리라는 것이다.

그 이후 클로드에게는 천국 같은 학교생활이 이어진다. 하지만 프레드릭이 밝힌 독재자 리처드의 속셈을 알고 경악하게 되는데……. 리처드는 친구들을 궁지에 몰았다가 구해주면서 절대 복종을 받아내거나, 집안 비리를 캐내어 자신의 권력 유지에 이용한다는 것이다.

 

전쟁과 함께 학교 역시 혼란하고 비참하고 무분별하고 비이성이 휘말아 치는 모습이 세상의 축소판 같다. 전쟁의 공포는 어린 학생들도 피할 수 없는 것일까. 각기 국적이 달라서일까. 소년들 사이에서도 어른들의 탐욕만큼이나 전쟁의 광기, 권력에의 탐욕이 서서히 지배해 가는 것을 보면 소름이 돋는다.

 

이유 없는 괴롭힘, 장난감처럼 갖고 놀리는 존재. 왕따의 이야기, 학교 내 권력의 속성을 그려낸 이야기에서 어른들을 흉내 내는 아이들의 모습이 잔인함 그 이상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상이다. 반전에 반전, 용기 있는 저항 정신을 만나게 되는 소설이다. 파워게임에 재미를 붙인 독재자들의 잔인함이 어떤 희생을 낳게 하는지, 그런 권력에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의 캐릭터에 불안정한 사회를 투영시키거나 전쟁의 광기를 덧입히기도 하고, 전쟁과 갈등 상황을 왕따와 자살, 학교폭력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주제의식과 문제의식을 보면 십대 소녀 작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짜임새 있고 예리하며 깊이가 있다.

 

작가는 십대 작가 김성령이다. 십대 작가라니! 15살에 첫 장편소설 <바이슬시티>를 썼고 17살에 두 번째 장편소설 <에니그마>를 썼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그녀의 작품에서는 역사의식, 문제의식, 심리묘사가 치밀하다는 점이다.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면 약점을 잡히지 마라, 아니면 독재자의 속셈을 읽어라. 암호를 해독하고 용기를 내어 역공하라. 뭐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이다. 잘 쓴 소설, 읽는 맛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혈류
이립 지음 / 새움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혈류]대통령의 기억을 가진 남자로  복제된 평범한 가장 이야기!

 

죽은 사람의 배아줄기세포를 가지고 복제 인간을 만들 수 있다면, 혈액을 투여해 다른 사람의 기억을 주입할 수 있다면, 더구나 무한 복제가 가능하기에 복제된 인간을 이용한 뒤에 소각해도 전혀 소문이 나지 않는다면, 그런 세상이 온다면……. 정말 무섭고 끔찍하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가치는 사라질 것이고,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건처럼 인간을 복제해 버릴 테니까.

제목부터 끔찍한 기운이 도는 소설이다. 피를 흐르게 하다니, 단순한 수혈이 아니기에 읽으면서 충격에 충격을 받게 되는 이야기다.

소설의 시작은 서울대 생명공학부 김현철 교수의 공개 라이브 실험으로 시작한다.

드디어 마지막 127번째 생쥐까지, 모두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같은 길을 선택했다. 기존의 생쥐가 가지고 있던 미로 통과에 대한 정보가 혈액을 통해 다른 생쥐들에게 전달된 것이다.(7쪽)

 

김 교수의 공개실험에서는 혈액을 통한 정보의 전달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비록 동물 실험이자만 지식과 경험이 혈액을 통해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 새로 개발된 최신형 열차인 기차 TF호 첫 시승에서 열차 테러로 대통령이 사망하게 된다. 열차 테러 결과 단 한명의 생존자도 없고 테러 배후엔 일본 극우세력의 테러임이 밝혀지게 된다.

 

하지만 국가위기관리위원회에서는 분주하게 움직인다. 국가 위기관리 12조 8항의 인간복제에 관한 내용에는 국가위기상황에서 인면 손실에 대비한 인간 백업 프로그램이 있었고, 국가안보 핵심인물인 사망 시 복제가 허용된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전 세계최초로 준공된 합법적인 인간 복제 시설, 복제물은 이용이 끝나면 제거되는 것이었다.

위기관리 프로젝트 수석 매니저인 민중현 박사는 매뉴얼대로 열차 폭발 시 물품 보관용 수납공간에서 발견된 김종훈의 시체를 복제하게 된다. 배아줄기세포로 복제를 시작하면 배아에서 신생아 어린이, 사춘기, 청년, 성인이 되기까지의 33년의 시간이 3시간 만에 재탄생한다. 복제와 동시에 노화의 단계를 거치는 것이다. 하지만 복제 인간은 담배연기에 급성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사망하거나 초고주파 음파에 노출되면 뇌간이 녹을 수도 있는 불완전한 복제라고 한다.

 

김종훈씨, 당신은 죽은 김종훈씨의 복제물입니다. (116쪽)

이 인간 복제는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열차 테러의 원인을 밝히고 나면 김종훈은 소각하면 그만이었다. 이미 김종훈은 사망처리 되었기에. 하지만 대통령의 제1대변인 서인국이 김종훈을 살려주면서 문제가 복잡해져 간다. 죽었던 사람이 도시에, 가정에, 직장에 나타난 것이다. 더구나 김종훈의 기억에는 죽은 대통령의 기억이 심어진 것으로 밝혀지는데...... 누가 왜 이런 짓을 벌인 걸까. 한 개인일까, 집단일까. 비밀은 비밀스럽게 번져가면서 대통령의 비자금 조성에 대한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탐욕스런 인간들의 배신과 음모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데......

 

증폭복제단계에서 회사원 김중현과 대통령의 혈액이 섞였다는데……. 김중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격도 바뀌게 된다. 민첩하고 대범해지고 말이 유창해지고 유머감각까지 대통령의 기억을 가진 남자로 복제된 것이다. 대통령의 혈액을 주입한 것이 민중현으로 밝혀지면서 사태는 점점 수렁으로 빠져든다. 민중현의 의도에는 치밀한 계산과 속셈이 숨어 있는데......

 

인간 복제의 일반화, 실존 자체가 기억 단백질로 존재하는 사회라니. 영혼 없는 복제 인간, 계속되는 복제로 똑같은 사람이 여럿 존재할 수도 있다니.

스스로를 복제하는 의사, 기억단백질의 시간차 확산 문제, 동의 없는 인간 복제, 복제 후 증인 제거, 기업과의 협착, 의사들의 권력남용, 대통령 비자금을 둘러싼 탐욕 등이 숨가쁘게 전개된다.

인간 복제가 합법화되어 김종훈처럼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 돌아다닌다면 어떨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면 복제 인간에 대한 수요가 늘지 않을까. 자신의 냉동된 죽은 시체를 보며 또 다른 복제인간을 무한 복제하는 현실이 된다면…….

 

기억 상실 효소, 기억 성형, 몸 성형이 만능줄기세포와 혈액의 주입으로 이뤄질 수 있다니, 줄기세포 이용에 대한 윤리적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소설이 아닐까. 소설이지만 현실의 일, 아니면 근미래 사회의 일 같아서 섬뜩한 소설이다.

유전공학의 윤리성, 해악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이다. 비현실적인 내용, 공상과학영화에나 있을 법한 내용이 아니라 어디에선가 실제로 일어나진 않을까, 두려워지는데......

 

인간 복제는 현재 기술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분명한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으며 기억의 재생은 지금의 과학기술로는 불가능하다. 소설에서 묘사한 인간 복제 및 기억과 관련된 부분은 많은 부분이 허구다. (작가의 말에서)

현재 연구에서는 단백질이 기억 형성에 중요한 메커니즘으로 생각된다는 연구도 발표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많은 국가에서 복제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을 텐데......

현직 마취과 전문의가 쓴 소설, 그래서 더 실감이 나고 빨려들게 되는 걸까. 무섭지만 흥미로운 소설인 것만은 틀림없다.

 

** 한우리북카페 서평단입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버즈 안데르스 데 라 모테 3부작
안데르스 데 라 모테 지음, 전은경 옮김 / 밝은세상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버즈]진실은 조작되었다! 아무도 믿지 마라!

 

이젠 스웨덴 범죄소설이다.

<버즈>는 <게임>의 후속작이다. 총 3부작인 이 소설의 마지막 편은 <버블>이다.

무시무시한 범죄소설이지만 피비린내 흥건한 액션 느와르가 아니다. 인터넷의 잘못된 버즈 마케팅을 둘러싼 지능형 범죄소설이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인터넷의 정보들을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조작은 없을까. 기업이나 정부가 고객이나 국민에 맞춰 정보를 컨트롤하지는 않을까. 일부 파워블로거의 뒤에서 알게 모르게 정보를 조작하는 것은 아닐까.

소설의 시작은 회사 게임의 은행 계좌를 털어 편안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헨리크 페테르손 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128번 게이머다. 한 때는 최고의 인기 게이머였다. 하지만 인생은 늘 꼬이는 법이다. 화사 게임의 수백만 달러를 훔쳐 스웨덴을 떠나 태국과 인도를 돌아다니는 그는 뱅상의 전화를 받게 된다. 해외도피 생활 중인 그는 가짜 여권, 차명의 신용카드, 게다가 여자와 늘 함께 하며 자유를 누리지만, 늘 게임의 추적을 받는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레베카는 스웨덴 보안 경찰국 경호원이다. 페테르손의 누나인 그녀는 경호팀 팀장이다. 사려 깊은 남자 친구까지 있기에 모든 것이 완벽할 정도다. 하지만 사고를 치고 잠적 중인 동생 페테르손이 늘 걸리는데…….

 

사막에서 본 사막 까마귀가 불행을 가져온 걸까.

뱅상의 제의로 인도에서 만난 안나 아르구스와 사막 여행을 즐기던 중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안나가 피살되면서 자신이 누명을 쓰게 된 것이다.

페테르손은 여자를 죽인 살인범으로 몰리지만 증거와 증인들의 진술이 이상하리만치 완벽하다. 증거도 명확하고 모든 정황이 100% 완벽하게 맞춰져 있다. 결국 외운 듯이 읊조리는 진술들이 거짓이라는 사실과 뱅상이 인터폴이 쫓던 청부살인자임이 밝혀지면서 스웨덴으로 추방되는 페테르손. 누군가 안나를 청부살해했고 그 죄를 자신이 뒤집어썼다니!

회사 게임에서 필립의 음모로 안나의 제거가 이뤄진 것을 알게 되는데……. 게다가 누나 레베카의 개입까지! 필립과 누나의 관계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게임 같은 현실. 현실 같은 게임 그럴듯해 보이는 위장전술들, 인터넷 회사의 욕망과 그 배후에 가려진 내밀한 음모는 서스펜스와 긴박감을 준다.

전혀 예상 밖의 빠른 전개와 놀라운 스토리, 충격적 반전까지 곁들여 있다.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 상상을 초월한 음모는 흥미롭기까지 하다.

 

이 소설에서는 인터넷의 잘못된 버즈 마케팅의 문제를 제기한다. 버즈 마케팅은 기업이나 정부가 고객이나 국민에 맞춰 정보의 흐름을 컨트롤하는 것이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요즘이다. 인터넷의 영향과 문제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어떤 정보가 진짜일까. 무엇을 믿어야 할까.

 

이 책은 스웨덴 범죄소설작가 아카데니 '신인작가상' 을 수상한 작품이다.

 

참고로 버즈의 뜻은.......

자극하다 흥분하다 선동하다

어떤 일에 대한 일반적인 동요

인위적으로 과장하다

프로파간다

효력을 강화하기 위해 미디어나 광고에서 사용하는, 기발하거나 미심쩍은 방식

어떤 제품을 꼭 사야한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는 영리한 마케팅전략

자격도 없는 어떤 특정 인물들에게 엄청난 관심이 집중되도록 만들기

사기, 실망, 속임수 (책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소한 풍경]그해 겨울, 상처를 안고 침묵으로 통하던 영혼들…….

 

제목이 소소한 풍경이어서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삶 또는 도시인의 평범한 하루를 이야기하나 싶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옛 도시의 외곽이어서 전원적인 풍경은 있지만 마음을 무겁게 하는 영혼들의 슬픈 이야기라서 말이다. 상처 없는 해맑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몸에 흉터 하나 없는 말간 몸뚱이가 어디 있으랴. 같은 시대, 하나의 공간에 산다지만 역사적 시점에 따라 공간적 좌표에 따라 겪어야 할 경험들은 각기 다른 법인데…….

나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얼마나 공감하며 살까. 과연 침묵으로도 통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이름이 없다. 이니셜도 아니다. 그저 ㄱ, ㄴ, ㄷ 일 뿐이다. 이름이 없는 무명씨들. 어디에서도 있으나 없으나 존재감이 없는 자들. 어리거나, 사회적 약자이거나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 그래서 작가는 이름을 붙이지 않은 걸까. 이름을 불러줘야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로 와 닿을 텐데……. 이름이 없어서 더욱 외롭고 슬픈 존재들이다.

소설은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를 ㄱ의 집터에서 발견되었다는 전화가 걸려오면서 시작한다. 한 때 ㄱ의 교수이기도 했던 소설가는 ㄱ의 전화를 받는 순간, 작가로서의 직감이 작동하게 된다.

 

대학시절 자신의 소설수업에서 악평을 받던 ㄱ의 소설은 <우물>이었다.

지금 ㄱ의 집 안에 있던 우물에서 무표정의 우울이 깃든 데스마스크, 즉 해골바가지가 발견되었고 경찰의 조사가 시작되었다는데……. 우물은 이 소설의 처음과 끝을 아우르는 굵직한 줄기가 된다. 대학시절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걸까.

 

죽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선인장을 기르던 ㄱ은 선인장에 집착한다.

가시는 선인장의 잎이다. 물이 없어도 살아가기 위한 스스로의 생존전략인데, 선인장의 가시는 자신을 만지려는 이들에게 빨간 피의 고통을 주는 잎이다. 그녀가 선인장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는 가시 같은 존재일까.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일찍 깨쳤기에 선인장과 동류의식을 느낀 건 아닐까.

말더듬이 오빠의 이른 죽음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을 불러온다. ㄱ이 여고 2학년 때 일이다.

아픈 기억은 최종적으로 가시가 된다.(51쪽)

 

ㄱ은 결혼도 순탄치 못했다.

대학시절 만난 남자1은 ㄱ과 똑 같이 흰 운동화를 신었던 남자다. 졸업을 하면서 ㄱ은 남자1의 아내가 되고, ㄱ은 남자1의 독점적 지배권 앞에서 좌절하게 된다. 남자1은 뒷정리를 모르는 남자였다. 섬유회사 회장님을 아버지로 둔 탓일까. 부리는 일에 익숙한 남자다. 내 아내잖아! 이 한마디로 모든 걸 해결하려한 남자였다. 아내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행사하거나 독재적이고 폭압적이기까지 한 남편이었다. ㄱ의 평화롭지 않은 결혼생활은 경제적 독점과도 같은 욕망의 독점이 빚어낸 결과였으리라. 모든 게 경제논리에 맞춰진 탓이다.

고귀한 '소유의 적합성'을 결혼이 '비천한 지배에의 욕망'으로 조금씩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53쪽)

 

혼자 사니 참 좋아!(60)

결국 남자1과 이혼한 ㄱ은 혼자 살게 된다.

 

혼자만의 자유를 누리던 그녀 집에 더플 백을 지닌 남루하지만 홀림을 가진 방랑자가 등장한다. 바로 ㄴ이다.

둘이 함께 사니 더 좋아.

부드러운 미소로 자신을 감춘 남자. 얼굴 주름들 사이로 바람의 길이 생겨난 알 수 없는 얼굴을 지닌 남자의 등장은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는다. 하루만 신세지겠다는 남자는 마당청소를 하고 우물을 파면서 장기간 거주하게 된다. 그리고 왠지 모를 위안을 받게 된다.

남자1이 지배적 욕망을 과시하며 주인 행세를 했다면 ㄴ은 분명 차이가 나는 남자다. 배려와 보호본능을 가진 머슴 스타일이었으니까.

 

어느 날 이들의 삶에 조선족 불법 체류자 ㄷ이 끼어든다.

셋이 사니 진짜 좋아.

ㄱ은 왜 셋이 사니 더 좋다고 했을까.

분명 ㄴ이 들어와 마당이 정돈되고 ㄷ이 들어와 집안에 반짝반짝 윤이 난 점은 있다. 하지만 한 남자를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불편하기도 했을 텐데…….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사랑, 두 여자 끼리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된다.

 

행복이란 말은 너무도 범속해서 우리들 언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때로 침묵으로 수평을 이루었고 우리는 때로 육체를 통해 원시로 돌아가기도 했어요. 우리가 경험했던 감정의 수평과 세계의 시원을 미적분 문제처럼 설명할 수는 없어요.(책에서)

 

ㄴ의 죽음으로 셋은 흩어지게 되고 ㄱ은 경찰의 조사를 받으면서 ㄴ과 ㄷ의 과거를 비로소 알게 된다.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비밀은 하나씩 있는 걸까. 하지만 너무나 어둡고 쓰라린 과거 뿐이다.

계엄령에 의해 죽은 형과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ㄴ의 기억은 차디찬 아픔이었으리라. 그 아픔을 달래려 유랑하며 방랑하며 기타를 배우며 운명에 젖어 살았으리라. 그렇게 일용직이 되고, 그렇게 인디밴드의 기타리스트가 되고…….

조선족 처녀로 위장한 탈북처녀 ㄷ, 몸을 팔아 번 돈을 엄마에게 부칠 때 희망이라곤 가졌을까. 북한을 탈출해 중국으로 왔지만 버겁고 힘든 삶뿐이었을 텐데...... ㄷ에게 실낱같은 희망은 있었을까.

 

우리……. 메아리 같아요.……. 어느 날 그가 한 말이다. 지나가고 나면 메아리는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해 겨울 우리를 살렸던 숨은, 메아리다. (116~117쪽)

 

ㄱ의 집은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휴식처였으리라. 상처가 깊어 사랑에 두려움을 갖는 세 사람이 통할 수 있는 안식처였으리라.

 

그러므로 사랑은, 두려워요.

모든 사랑에는 그런 위험이 다 깃들어 있어요. 훼손하기 위해 욕망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 적도 많아요. (179)

 

기계실 냉방설비 보수업체가 대형 아울렛 매장의 누출된 냉매가스 질식사 이야기는 대형마트 아르바이트 대학생의 가슴 먹먹한 현실이다. 나비도감을 빌리러 친구 집에 가다가 계엄군의 총에 맞은 ㄴ의 형, 세탁기를 돌리듯 자신의 우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ㄴ, 탈북자로서 호소할 길 없는 ㄷ의 피해는 절망가득하다.

사회로부터 외면 받는 아웃사이더들의 과거도 미래도 없는 삶. 현재라도 있기는 한 걸까. 결국 스스로의 우물, 자기 묘를 팔수밖에 없었던 ㄴ의 현실을 누구에게 호소해야 하나. 죽어 시멘트에 자신의 부조를 남긴 ㄴ, 그의 죽음은 분노였을까, 저항이었을까. 아니면 포기였을까.

 

셋이 모여 온전한 하나를 이룬 세 사람. 가족을 잃으면서 자신의 세계까지 잃은 세 사람의 이야기에 헛헛한 기분이 든다. 이들이 침묵으로도 서로에게 스며들던 시간과 공간들이 그저 소소한 풍경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의 심연, 생의 의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철학적인 질문들을 하게 된다. 왜 세상은 공평하지 못한가, 왜 누구는 더 억울해야 하나는 사회적인 문제까지 생각하게 된다.

 

상처를 입고 방황하는 어린 영혼들, 청춘들의 이야기가 묵직하게 메아리쳐 온다. '이런 삶, 이해할 수 있나요. 이런 고통 공감할 수 있나요.' 라고……. 이건 그저 소소한 풍경이 아니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 프롬 홈 - 전쟁에 찢기고 운명에 내던져진 두 소녀 한우리 청소년 문학 3
나이마 비 로버트 지음, 김양미 옮김 / 한우리북스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파 프롬 홈]아프리카 짐바브웨 식민지 역사를 담은 충격적인 진실!

 

 

파 프롬 홈.

아프리카 남부의 짐바브웨의 기구한 역사를 담은 소설이다. 제목에서도 슬픔과 아픔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짐바브웨에서는 어떤 아픈 역사가 숨어 있을까.

 

짐바브웨는 1888년 영국인 세실 로즈가 은데벨레 족의 왕 로벤굴라로부터 채굴권을 획득했다는 조약서를 발표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영국의 일방적인 조약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금광, 다이아몬드 광산까지 탐욕적으로 채굴했고 농장주가 되어 원주민들의 영토까지 마음대로 빼앗아 가는데...... 분노한 원주민들은 해방전쟁을 펼치며 고향을 찾으려 했으나 영국의 자치 정부 식민지로 전락될 뿐이었다. 그리고 원주민 토지 관리법이 통과되면서 원주민들은 보호구역으로 쫓겨나게 되는데…….

1965년 이언 스미스 총리가 영국을 상대로 일방적인 독립선언을 했다. 하지만 흑인들은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동맹과 짐바브웨 아프리카인민 동맹을 결성해서 백인들에 맞서며 진정한 해방전쟁을 벌이게 된다.

2000년에 와서야 정부는 백인 농장을 몰수한다는 내용의 '토지 수용법'을 발표했고 이를 세 번째 해방전쟁이라고 한다.

책에서는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땅과 고향을 지키기 위해 자유의 전사자가 된 파라이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그는 포트빅토리아 족장의 아들이었지만 백인들에 대항하다가 결국 테러리스트라는 명목으로 공개적인 죽임을 당한 것이다.

파라이의 이복동생인 타리로. 타리로는 불행이라는 뜻이다. 이름이 그녀의 운명을 좌우했을까. 그녀의 아버지는 카랑가 족의 족장이다. 아버지는 매사에 조용하고 진지하며 갈등을 피하는 성격이다.

 

조용하던 아프리카 마을이 갑자기 영국 국왕의 땅이 되고 영국인 세실 로즈가 총독으로 오게 된다. 백인들은 금광, 다이아몬드 광산 채굴권을 행사하며 카랑가 족의 땅마저 넘보게 된다. 급기야 백인들은 식민지 지배자가 되어 원주민들에게 가옥세를 붙인다. 그리고 원주민 토지 관리법에 따라 마을 사람들을 모두 내쫓아 버리는데…….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쫓겨나기 싫었던 삼촌과 마을 청년들은 이들에 맞서 싸울 결심을 하지만 마을의 원로회의 족장인 아버지는 무기력하게 그들을 설득하려고만 한다.

 

-변화는 반드시 일어날 거야. 그게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야. 때로는 변화를 위해 눈물이 필요해. 가끔은 새로운 삶을 위해 희생이 필요할 때도 있어.(73쪽)

 

-우리가 백인들에게 맞서 싸우지 않으면 우리와 우리 가족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는 거나 다름없어요. (103쪽)

 

고향을 지키려는 젊은이들은 백인과 맞서 싸우지만 무자비한 그들에게 희생만 당할 뿐이었다. 총과 칼을 앞세운 백인들에게 마을마저 무참히 무너지고 폐허가 된다.

타리로는 이완 왓슨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면서 푸른 눈동자를 가진 딸 타오나를 낳기에 이른다. 백인들의 횡포는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자행되는데…….

 

책에서는 1964년 짐바브웨에서 타리로가 땅을 뺏기는 이야기, 2000년 백인 농장주 이완 왓슨의 딸 케이티가 겪는 해방전쟁, 2001년 짐바브웨를 떠나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돌아온 타리로가 케이티를 만나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영국 선조들이 저지른 약탈로 인해 후대들이 겪는 고통, 원래의 짐바브웨 주인들에게 고향이 되돌려지는 과정들이 눈시울을 붉게 만든다.

 

자신들의 조상이 물려준 땅을 찾으려 20년 이상 싸운 용감한 타로리의 이야기는 아프리카의 슬픈 역사다. 프랑스인, 영국인, 보어인, 포르투갈인……. 모두 자신들의 나라를 잘 살게 하려는 욕심으로 아프리카 원주민을 몰아내는 이야기에 소름이 돋는다. 아프리카인이 직접 쓴 아프리카 이야기이기에 더 절절하게 와 닿는 걸까.

길고도 지루한 목숨을 건 싸움 끝에 자신들의 땅을 되찾기 위한  짐바브웨 원주민들, 하지만 아직도 혼란기이고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예전처럼 자신들의 땅에서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일이 빨리 왔으면......

 

** 한우리 북카페 서평단입니다.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미 2015-02-09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집에도 그책있는데
저도 많이 읽어밨어엽

봄덕 2015-02-09 18:53   좋아요 0 | URL
자신의 땅을 유럽에 빼앗긴 아프리카는 아직도 신음하고 있죠.... 마음 아픈 아프리카 이야기죠.

sdfsdf 2015-03-01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asdsadf

봄덕 2015-03-01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러게요;;그런데 아프리카에 대한 너무나도 숱한 편견을 갖고 아프리카를 대하면 아프리카의 부강한 나라들은 일어 설수 없고, 국제 무대에서 자립성을 갖을 수 없게 되겠죠. 아프리카가 아닌 세부적인 나라를 대상으로 하는 광고와 홍보가 더욱 효과적이고 이미지 회복에 좋은 영향을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원조가 필요한 나라`가 아닌 예전의 `신비로운 매력의 나라`와 같은 긍정적인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봄에 먹는떡 2015-03-01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ㅇㅈ합니다.

롤선생 2015-03-01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kissday 아프리카 많은 시청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