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다 - 2014년 제1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이동원 지음 / 나무옆의자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고 싶다]군대 자살문제, 이젠 사회가 관심을 쏟을 때...

 

부대를 뒤흔드는 사고는 이병보다 병장이, 사병보다 장교가 친다. 별이라도 달면 나라를 뒤집어놓는 사고를 치는 것도 가능하다. (중략) 소대장 노트에 적힌 내 이름 앞엔 관심사병이란 글자가 붙어 있다. 사고를 쳐서 직속상관의 경력을 망칠 가능성이 높은 위험인물이란 뜻이다.(책에서)

 

기묘한 일이다. 관심병사의 총기사건으로 시끄러운 때에 관심병사였던 병장의 자살문제를 다룬 소설을 만나다니. 어쩌면 군대 내부적으로 이런 문제들이 많이 잠재되어 있지 않을까. 아니면 군 외부적인 개인사가 군에 와서 터져 버린 걸까.

 

자살하고 싶다는 이면에는 살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이가 어디 있으랴. 삶을 사랑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으랴. 하지만 군대라는 폐쇄성, 남자들끼리라는 특수성, 명령과 복종의 상명하복 체계에서 갑과 을의 관계는 영원할 것이다.

 

주인공인 이필립은 다리를 다쳐 국군광주통합병원(광통)에 장기입원하게 되면서 정선한을 사귀게 된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필립과 그림그리기와 시 쓰기를 좋아하는 선한은 서로의 공통분모에 호감을 느끼며 친구가 된다.

 

완쾌 후 자대로 돌아간 필립은 곧 선한의 자살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의문의 사람에게서 선한의 자살에 대해 조사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공식적인 업무가 아니라 개인적인 용무에서 떨어진 명령이다. 필립은 선한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수록 많은 이들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병원의 실세, 병실장, 병실 도우미 등 관련 군인들이 선한의 죽음에 관련된 것을 알게 된다.

병실 도우미 이지용의 정신 불안과 그의 영혼의 상처를 알아차린 선한, 인간의 이기심과 질투, 분노는 선량한 병사를 애꿎은 자살로 몰아넣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선한에게 누명을 씌워 자살하게 만든 이들은 결국 군사 재판에 회부되고...

 

그 과정에서 선한이 좋아했던 간호장교 이소윤 소위마저 자살 시도를 하게 되고, 후임을 쥐어짜 고참을 섬긴다는 사악한 권중현마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필립이 찾아낸 선한의 노트에서는 얼굴도 모른다는 아버지의 자화상, 아버지 친구와의 만남, 천상병 시인의 시, 자작시, 살고 싶다는 글귀 등이 채워져 있는데......

내가 살고 나라가 살기 위해 적을 죽여야만 하는 논리. 그 살벌한 가치 속에서 무조건 명령에 복종할 수 있는 사람이 요즘 현실에 얼마나 될까.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낸 오래된 관습과 문화들이 목숨을 죄어 온다면......자신의 내면적인 갈등과 군 상관의 억압이 만난다면, 가정의 문제와 군에서의 비리나 따돌림과 만난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군대에서의 자살이 군내에서 생긴 문제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가지고 있던 가정의 문제, 내면적인 갈등과도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군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움을 바랄 수는 없지만 전시가 아닌 만큼 따뜻한 인간성과 배려, 개인적인 아픔에 대한 공감을 기대한다면 무리일까.

 

군대도 하나의 조직이고 사회인만큼 이기심과 질투, 분노, 비리가 있을 것이다. 그런 문제들을 유쾌하고 세밀하게 그렸기에 몰입해서 읽은 소설이다.

제1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글답게 잘 빠진 매력적인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신 북로드 세계문학 컬렉션
프란츠 카프카 지음, 북트랜스 옮김 / 북로드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변신]프란츠 카프카의 대표작, 실존주의 소설!

 

프란츠 카프카(1883~1924)

체코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자수성가한 다혈질의 아버지보다 조용하고 사색적인 어머니의 유전자를 많이 받았다. 어린 시절 형제들이 죽으면서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도록 강하게 키우고 싶었던 아버지와 마찰을 빚으면서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그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 널 생선 토막 내 버릴 거다." 라는 아버지의 말은 병약하고 감상적인 그를 더욱 우울하게 했을 텐데…….

독선적이고 다혈질의 폭군이었던 아버지 아래에서 대항하지 못하던 자신이 비루한 벌레로 느껴졌을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문학 대신 법학을 배우고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쓰기 대신 노동자재해보험국에 취직해서 샐러리맨의 삶을 살아야 했던 카프카. 그가 자신의 삶을 투영한 이 작품은 타성에 젖어 만족도 없는 샐러리맨의 생활의 비루한 종말을 그리고 있다.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찾아서 하고 싶었던 내면적 갈등을 드러낸 실존적인 소설이다.

어느 날 아침 어지러운 꿈속을 헤매다 눈을 뜬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의 몸이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딱딱한 등껍질을 침대에 대고 벌러덩 드러누워 있었다. 머리를 조금 쳐들자 활 모양으로 불룩하게 휘고 마디진 갈색 배가 보였다. 배 위에는 금방이라도 미끄러져 내릴 듯 이불 한 귀퉁이가 간신히 걸쳐 있었다. 그리고 몸뚱이 다른 부분에 비해 형편없이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들이 눈앞에서 한들거렸다. (중략) 분명 꿈은 아니었다. 조금 작기는 해도 사람 사는 방임에 틀림없는 그의 방은 낯익은 벽으로 아늑하게 둘러싸여 있었다. (책에서)

 

샐러리맨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바퀴벌레 같은 해충으로 변신한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가족을 부양하던 그는 여전히 출근생각을 하고 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타성에 젖은 사고방식은 벌레로 변신한 지금도 자신을 조종하고 있다. 회사의 일, 가족의 부양문제가 그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아침을 깨우려던 식구들은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 있는 그의 모습에 놀라서 기겁을 한다. 이상한 소리를 내는, 바퀴벌레를 닮은, 쇠똥구리를 닮은 벌레가 자신들의 아들이고 오빠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그레고르는 자신의 방에 갇혀서 여동생이 주는 음식으로만 배를 채우거나 벽을 기고, 천장을 기고, 바닥을 기면서 해충의 삶에 적응해 나간다. 그리고 아버지가 의도적으로 던진 사과에 맞아 상처가 나기도 한다. 결국 자신이 사라져야 가족이 행복할 수 있음을 알고 시계탑의 종소리와 함께 죽음을 맞게 된다. 스스로 선택한 최후의 삶이다.

 

마지막까지 가족들에게 그의 존재는 의미가 없었던 걸까. 그의 죽음을 확인한 가족들은 개운한 기분으로 피크닉을 떠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딸의 성숙해진 모습을 새삼 느끼며 좋은 짝을 찾아 결혼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아들의 죽음보다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기대로 잔뜩 부풀어 있는 모습이 소설의 끝 장면이다.

 

식구들을 부양하는 밥벌이 신세인 주인공은 외계인이 된 듯 가족들의 무관심과 냉대를 받아 왔다. 그런 대우가 자신을 버러지만도 못하다고 느끼게 한 걸까.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던 자신의 모습이 결국 바퀴벌레로 변신했다니.

100여 년 전에 쓴 소설이 지금 현실과 맞닿아 있음이 놀랍다. 밥벌이의 설움 등 속마음을 털어 놓을 수 없는 현실이라면 벌레만도 못한 생활, 버러지 같은 생활이라는 생각이 들 텐데…….

 

알고 보니, 예전에 읽었던 소설이다. 아마 여고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밥벌이의 설움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실존의 의미, 작가의 생활을 잘 알지 못했기에 그저 기묘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월이 흐른 뒤에 읽으니 일상과 환상의 조화를 꾀하고 불가사의한 상황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들을 했다는 평가가 이해가 된다. 고전의 힘은 세월이 흐를수록 주는 메시지가 더욱 강력하다는 것 아닐까. 일상과 감정적인 흐름에 대한 세세한 묘사에 빨려 드는 책이다.

 

만약 실존의 삶이 된다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삶이 된다면 그는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걸까. 자신의 존재는 없고 자신을 돈 버는 기계로 도구화하는 삶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보고 싶은 실존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밥벌이로 타성에 젖어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작품이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버러지 같은 그의 삶을 녹인 소설이다. 자신의 현실과 내면의 갈등이 투영된 소설이다.

 

 

  해당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속죄나무 1
존 그리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속죄나무 1,2]의뢰인의 존 그리샴 신작, 시커모어 로!

 

 

오랜만에 존 그리샴의 소설을 만났다.

<펠리컨 브리프>,<의뢰인>, <타임 투 킬>의 저자인 존 그리샴은 법정 스릴러의 대가다. 1981년 미시시피 법대를 졸업 한 뒤 사우스헤븐 법률사무소에서 10년 간 근무하면서 범죄 변호와 개인 상해 소송을 전담하였다고 한다. 그런 법학적 지식과 법정 경험들을 녹여낸 그의 소설들은 언제나 긴박하고 생동감 있는 범죄소설이 되었고 영화화되기도 했다.

 

속죄나무 sycamore row.

제목에서도 법정소설임을 예측할 수 있다. 무엇이 그토록 속죄를 갈구케 했을까. 시커모어 로 (sycamore row 줄지어 선 플라타너스 나무들)는 속죄의 매개체 같은데…….

 

어느 날 세스 후버드라는 백인 부자가 자신의 땅에 있는 시커모어 나무에서 계획적인 자살 을 하게 된다. 세스는 죽기 바로 직전에 안면이 전혀 없던 변호사 제이크에게 단지 정직하다는 이유만으로 유언장을 처리해 달라는 편지를 남긴다. 편지에는 이혼한 전처, 아들, 손자에게는 이미 이혼 과정에서 주었기에 그들에게 한 푼도 주지 말고 자신의 유산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쓰여 있다. 폐암 말기였던 71세의 세스는 거액의 유산(2400만 달러, 약 250억 원) 중에서 90%는 흑인 가정부인 레티 랭에게, 5%는 몇 년 간 연락두절인 자신의 남동생 앤실에게, 남은 5%는 교회에 기부하라는 내용도 자세하게 남겼다. 장례절차까지도 간단하게 하도록 남기고......

 

세스의 유언장은 완벽한 자필 유언, 최신 유언이었지만 피붙이가 아닌 흑인 가정부에게 거액의 재산을 남김으로써 수수께끼 같은 유언장이 되어 버린다. 돈 냄새를 맡은 가족들과 변호사, 주변인들은 흡혈귀처럼 몰려들었고, 세스를 유언 능력이 없는 정신병자로 만들려고 작당 모의도 하는데…….

 

세스의 유언장에는 어렸을 때 남동생 앤실과 함께 본 장면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그게 유언장에 대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은 허름한 술집에서 일하는 늙은 앤실이 어릴 적 나무에 숨어서 본 것은 무엇일까. 세스가 소유한 땅의 옛 주인 린즈씨가 세스 아버지에게 땅을 넘기고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 더구나 가정부 레트는 린즈 가문이라는데......

 

백인 부자의 계획적인 자살, 그가 남긴 거액의 유산, 가족이 아닌 흑인 가정부에게 유산을 남긴 이유, 아들들의 법정 소송 등 미스터리한 내용들을 풀어가느라 빨려 읽게 되는 이야기다. 돈에 대한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 흑인에 대한 백인들의 인종차별, 과거의 죄로부터 속죄하고자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백인의 이야기가 속도감 있게 읽히는 소설이다.

하얀 복면을 쓰는 KKK단 이야기, 미국 남부의 끔찍하고 잔학한 인종차별, 흑인에 대한 착취와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분위기, 흑인에 대한 사죄의 문제, 백인이 흑인에게 저지른 죄에 대한 속죄, 생생한 법정공방들까지 오랜만에 읽은 법정 스릴러,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은 책이다. 영화로도 나올까.

재판과정 중에 나오는 인종차별적인 분위기는 아직도 흑인에 대한 차별적 정서가 있음을 고발하는 듯하다. 죄를 죽음을 통해, 유산을 통해 속죄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그렇게 해서라도 속죄 받고 싶었던 걸까. 아직도 흑인에 대한 정서적인 차별, 감정적 차별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이 소설은 뉴욕타임스 30주 연속 베스트셀러, 아마존 선정 최고의 범죄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역시 존 그리샴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인 수술 보고서 시공 청소년 문학 56
송미경 지음 / 시공사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광인수술 보고서]광인수술을 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

 

전혀 색다른 소설이다. 광인수술 보고서. 미친 사람을 수술하는 장면을 환자가 직접 기록했다는 설정이 그로테스크 하다. 자신의 의식과정을 고스란히 적은 듯 세세한 사고과정들이 너무나 진짜 같고 사실적인 느낌이 든다. 광인이라면 정신분열증일 테고 평범하지 않은 사고의 흐름을 지녔을 것이다. 그런 미세한 흐름들을 놓치지 않고 그려낸 소설이 청소년 문학이라니! 읽을수록 작가의 세심한 관찰이 놀랍도록 섬뜩해지는데…….

 

본보고서는 환자 이연희가 직접 작성한 수술 후기를 집도의인 본인 김광호가 각주와 주석으로 보충한 것임을 밝힙니다. 한 군데도 빠짐없이 함께 읽어 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책에서)

소설은 신경정신과 전문의 김광호와 그의 환자인 광인 이연희가 아직 검증되지 않은 광인수술에 동참하면서 그 과정들을 기록한 것이라는 설명으로 시작한다.

환자 이연희는 정상인과 광인의 경계를 뛰어넘어 광인의 경지에 거의 다다른 '광기말기'다. 광기의 종말은 짐승의 단계이다. 잘 모르지만 이후로는 짐승처럼 뛰어다니거나 들판의 풀을 뜯어 먹거나 하지 않을까.

 

사실 나는 내가 언제부터 광인이었고 언제부터 다른 사람들과 달랐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의사가 내게 광인이라고 말한 날부터 나는 내가 광인이라고 믿었어요.(책에서)

 

이연희에게는 특이한 것들이 있다. 남들과 달리,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보고,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세밀하게 기억하는 증상이 있다. 이야기를 하면서 동공의 움직임을 보는 것을 즐기고, 얼굴에 난 점의 움직임이 신기해서 볼 뿐이지만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옆길로 새거나 엉뚱한 곳에 집착하는 증상이 심하다.

의사는 정상인이 동영상으로 뇌에 저장하면 이연희는 사진으로 저장한다는 차이일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연희의 시간 흐름에 따른 기억들은 분명 남들과 달랐고 독특했으며 소위 정신분열 증세였던 것이다.

 

초록색 스웨터에 관한 기억, 발톱이 빠진 추억, 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자르고 뿌리째 뽑고 싶은 충동이 일던 것, 친구들의 놀림에 개 짖는 소리를 내며 울부짖던 일 등은 남들의 눈에는 미친 사람으로 보였을 테니.

이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평상적인 일이지만 남들은 집착이며 광기로 보았다. 그래서 가족들의 동의하에 광인수술을 하게 된 것이다. 담당 의사인 김광호는 환자가 기억할 수 있게 국소마취를 하면서 수술을 시작하게 된다.

환자를 딱딱한 책상에 눕혀 수술을 하다가 수술 중에 다투기도 하는 의료진들. 다시 노래를 부르며 의기투합하는 모습에 누가 광인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아이들에 의해 연희는 학교에서 네발 달리 개처럼 기었다. 아이들이 던져주는 과자 부스러기를 먹고 개소리를 내면서 아이들의 애완견 푸들이 되어갔다. 그렇게 개판 같은 학교에서도 연희는 비웃음거리가 될지언정 남을 비난하진 않았는데……. 어쨌든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연희는 이제 남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개 짖는 소리도 내지 않고, 같은 단어를 반복하지도 않는다. 의사는 수술이 성공적이라고 하고 연희는 뇌의 주름이 지워지고, 기억이 지워지고, 과거의 시간들이 지워졌음에 만족한다. 더구나 수술을 이겨낸 용감하고 특별한 아이라며 스스로 뿌듯해 하는데……. 마지막에 나오는 연희의 외침이 인상적이다.

 

도대체 이 수술은 어떤 사람이 받아야 하는 거지요? 누가 광인이고 누가 정상인이라는 걸까요? 수술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 자신이 아니라, 그런 나를 보고 즐거워한 우리 반 아이들이 아닌가요? (책에서)

 

광인수술이 아직 검증되지 않은 환상적이고 실험적인 수술이라니! 충격이다. 수술이 치료의 한 방법이기에 광인수술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광인수술이 가능할까. 광인의 뇌를 열어 수술한다는 것이 더 미친 짓 같은데……. 광인이라는 기준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개 같은 세상, 제 정신으로 살기 힘든 세상이기도 하기에 이 소설의 메시지가 의미 있지 않을까. 끔찍하고 섬뜩하지만 시사 하는 바가 큰 소설이다. 누가 미친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누스 - 한국과 베트남의 비극적 만남과 위대한 반전
김연정 지음 / 매직하우스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야누스]두 얼굴을 가진 사회, 선과 악의 양면성을 들춰내는 소설!

 

 

개개인에게도 야누스적인 면이 있지만 기업이나 국가에도 야누스적인 면이 있을 것이다. 선과 악, 전쟁과 평화, 천사와 악마의 탈을 쓴 양면성은 늘 정체를 알 수 없게 하기에 논란의 여지를 남기는데......

이 소설은 우리사회의 현재와 과거를 관통하며 야누스적인 자화상, 양면적인 민낯을 끄집어내고 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우리의 야누스도 다룬다. 다문화 정책의 양면성, 그들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영면성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황상이 주는 달콤한 꿈과 꿈을 짓누르는 현실과의 괴리는 그대로 절망감을 선물할 텐데......

소설의 내용처럼 외국인 노동자, 특히 불법 체류노동자를 고용해, 그들의 약점을 잡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악덕 기업주들이 아직도 많을까. 불쌍한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유린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닐 텐데…….부끄러운 우리의 민낯이다. 같은 인간으로 대할 수는 없는 걸까.

 

 

한국이 미국의 요청으로 최초의 해외파병을 했던 월남전 파병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의 야누스는 도대체 무엇일까. 만주군 전력에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박정희의 야누스는 무엇일까. 남베트남 대통령인 응오딘지엠 대통령의 야누스적인 면은 무엇일까.

 

소설은 베트남전에 파병한 대한민국의 야누스도 밀도 있게 짚어낸다. 남베트남 응오딘지엠 대통령의 죽음에 얽힌 양면성도 이야기한다. 미국의 보호와 응원을 받으며 남대통령으로 세워진 그는 느닷없이 죽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베트남 전쟁을 위한 미국의 자작극이라는 설도 있고, 자신의 잇속만 챙긴 부패 정치인에 대한 국민적 응징이라는 설도 있다.

 

1차 베트남전은 종교를 둘러싼 프랑스와 베트남과의 싸움이었다. 프랑스의 무력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베트남은 강력히 싸웠지만 프랑스의 식민지가 전락하게 되는데......그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로부터 경제수탈, 전통문화 파괴 등의 굴욕을 당해야 했다.

2차 베트남전은 통킹 만에서 미국 해군 구축함 매독스 호를 북베트남이 공격함으로써 일어났다. 이를 빌미로 미국은 군사개입을 하면서 제2차 베트남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내가 이전에 알았던 베트남전에 대한 진실은 공산화를 막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이었고, 경제적 이득을 챙기고 국위선양을 하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카이스트를 세우고, 미국의 원조를 받아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일부가 쓰이기도 하고 군수물자 납품, 군장비의 현대화를 낳기도 했다. 베트남전을 치른 후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5배로 향상했고 경제발전의 토대를 세우는데 약간이나마 기여했다. 하지만 전쟁 중 양민학살 등은 베트남과 한국의 비극일 텐데…….

자유 수호를 위해, 경제발전을 위해 파병했다는 이면에는 국군의 목숨을 담보로 한 값싼 용병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공산화의 도미노 현상을 우려해 베트남파병을 요청했다는 미국도 알고 보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달러패권주의를 확장시키기 위한 미국의 자작극이었다는데……. 자국의 군수산업을 육성하고 강대국임을 입증하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어느 나라든 자국의 이익이 없으면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 모든 전쟁에 앞서 가치 지향 국가가 아닌 패권 국가들은 더욱 자국의 이익을 따질 것이다. 미국의 베트남전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의 양면성, 정치 지도자의 양면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우리의 양면성, 일상에서의 나의 양면성도 생각해 보게 된다. 혼란과 오해를 초래하는 양면성, 누구에게나 있고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어느 면이 진실일까. 아니면 둘 다 진실일까.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한국과 세계를 아우르는 양면성에 대한 소설을 읽으니 박식해지는 느낌이다. 기자들이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소설이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