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흑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6
스탕달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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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의도는 이 글에 잘 나타납니다.

 "당신은 당신의 시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코라소프 공이라는 사람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항상  남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행동하라. 이것이 진정 이 시대의 유일한 종교인 것입니다. 열광과 허식을 버리시오.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은 당신에게서 열광과 허식을 기대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계율을 완수할 수 없을 테니까요." (26페이지)

바로 뒤에 작가는 냉소적인 자신의 글을 다시 한번 나타냅니다. 즉 복권판매소장 자리와 측량 기사 이야기입니다. (31페이지) 사실 이는 뒤에 나오는 마틸드의 줄리앙에 대한 애정(?)을 도입하기 위해 제시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드 레날 부인과의 이야기도 이 범주를 벗어나진 못합니다.

그리고 수없이 반복되는 변심은 다음의 문장을 실감나게 합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다"

혹자는 이것을 두고 섬세한 감정의 기술이라고 했지만, 저는 혼자 상상하느라 지친 작가의 발악이라고 생각합니다.(좀 과한 면이 있지만 제 생각입니다)

아무튼 위에 언급한 코라소프의 조언으로 쥘리앙은 마틸드의 사랑을 얻지만 드 레날 부인의 편지 한장으로 파국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해탈한 것처럼 변호도 상소도 포기하고 사형을 당합니다.

제가 왜 이 작품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곰곰히 생각한 결과 이러한 변덕에 질렸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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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5
스탕달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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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도 30년 만에 읽는 것인데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호감은 없습니다.

 
2부로 나누어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1부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저자는 전지적 시점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나'가 가끔 등장하지만 대부분은 등장인물(쥘리앙 소렐, 드 레날 부인, 드 레날 등)의 관점에서 생각이 진행되고 또 말이 나타납니다. 관찰자 시점이 대세인 요즘과 비교하면 혼동이 오는 것이고 또 짜증이 일어나는 것인데, TV 드라마에서는 이 시점을 사용하므로 TV 세대는 별다른 감정이 없을 것입니다. 제가 짜증이 나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상상의 비약이 심하게 나타나면서 온갖 오해와 시기와 질투가 판을 치는 것을 다시 책에서 보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시종일관 저자는 몇 미녀에 대한 주인공(쥘리앙)의 태도(어떤 리뷰어는 화려한 문장으로 작가의 의도를 설명하고 있지만 저는 소설류에서는 그러한 관점보다는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는 게 더 사실에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와 생각에 대한 기술도 저로 하여금 짜증나게 하는 것입니다. 1830년이 이 소설이 발표된 시점인데, 비슷한 시기의 다른 책들에서도 유사한 것이 자주 관찰되므로 저자만의 결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점 때문에 이 작품이 특별하다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30년이 지났음에도 동일한 작품에 대해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른 책에서는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전혀 다른 느낌을 새로 읽을 때 받았었는데, 이 작품은 아닙니다.
 
2부는 오래 전에 읽을 때 더 불쾌했었는데, 자세한 것은 2권에 쓸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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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나의 피난처
코리 텐 붐 / 생명의말씀사 / 199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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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코리 텐 붐이 구술하고 서문에 나오는 존 및 엘리자베드 슈릴이 쓴 것인가 봅니다. 71년이면 아마 78-9세였을 테니 말입니다.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길로 많이 새나가는 편입니다. 노인네의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지요. 처음에는 잦은 오타와 맞춤법에 어긋나는 단어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뒤로 가면서 그런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유태인을 도운 홀랜드 사람이기에 그들보다는 덜 가혹한 운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록은 살아남은 자들이 남길 수 있으므로 좀더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경험했던 것이기에 (44년-45년의 경험담을 26년이 지난 71년에 기술했으니까요) 아픔은 많이 가라않고 담담하게 적어내려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은 자를 통해 전해지는 죽은 자의 모습이 더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특히 코리의 언니 뱃시는 뭐라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과연 저도 이러한 입장에 섰을 때 그리 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도 읽을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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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크놀프 일신서적 세계명작100선 49
헤르만 헤세 지음 / 일신서적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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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은 중편(본문 151면)이고 [크눌프]는 3부작(합하면 역시 중편 - 본문 80면)이며 [매르헨]은 동화집(아우구스투스, 시인, 피리의 꿈, 이상한 별 이야기, 험한 길, 파르듐(연시와 산), 붓꽃 등 7편을 수록, 본문 99면)입니다.

 
저가 출판답게 3편을 묶어 출간했습니다.
 
[데미안]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과 느낌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에 나오는 아담의 아들 카인에게서 동기를 얻은 작품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거창한 해석은 지나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크눌프]는 여러 분들이 방랑자적 기질을 잘 설명하였다든지 시초와 돌아감 드을 묘사했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까지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번역상의 문제인지 아니면 원래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이 모순되는 게 많은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매르헨]은 위에서 언급한 단편 7개를 묶은 것입니다. 그리고 동화책이라고 되어 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포괄적으로 보면 그냥 읽혀지는 내용들이므로 잘 쓰여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면서 읽어야 하는 것일까하는 차원으로 간다면 개개인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어쩌다 보니 지난 달에 본 것을 포함하여 헤세의 작품 여러개를 짧은 시간 안에 보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제 관점으로서는 특이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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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시 일신서적 세계명작100선 9
콘스탄틴 버질 게오르규 지음, 김양순 엮음 / 일신서적 / 199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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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오르규는 소설 [25시] 내에서 몇번 25시라는 주제에 대해 직접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의 의견을 적어보겠습니다. 52페이지에서 사제의 아들이면서 시인인 트라이안 코루가가 친구 조르주 다미앙 검사에게 자신의 새로운 소설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습니다.

 "우리 개인은 기술 노예의 사슬에 얽매인 채 죽을 거야. 내 소설은 그러한 에필로그를 실은 작품이 될 거고"
 "제목은 뭐라고 붙이나?"
 "<25시>"하고 트라이안이 말했다.
 " 이것은 모든 구제(救濟)의 시도가 무효가 된 시간이야. 메시아의 왕림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시간이야. 이건 최후의 시간이 아니고 최후의 시간에서 한 시간 후니까. 이것은 서구 사회의 정확한 시간, 다시 말하면 현재의 시간이며 정확한 시간을 뜻하고 있지."

 그리고 100여 페이지 뒤에서 헝가리 정보국 국장인  바르토리 백작이 그의 아들 루시안과 대화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 시계가 섰군요, 몇 시입니까? 아버지!"
 "지금 25시다!"
 "무슨 말씀이세요?" 루시안이 물었다.
 "모르겠지.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지금은 25시다. 유럽 문명의 시간이야."

 동시에 작가는 바르토리 백작의 입을 통하여 인류가 가진(전해 받은) 3가지 유산(인간, 미, 법) 중 가장 중요한 인간을 상실하였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 상실로 말미암아 나머지 둘도 함께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또한 그 아들 루시안의 입을 통하여는 희망을 남겨 둡니다. '과거에는 현재보다 더한 시대가 있었다고.'

 모리츠의 인생유전은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기술되고 있습니다.

 "1938년에 저는 루마니아의 유태인 수용소에 있었습니다. 1940년에는 헝가리의 루마니아인 수용소에, 1941년에는 독일에 있는 헝가리인 수용소에, 1945년에는 미국인 수용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틀 전에 다하우에서 석방되었습니다. 수용소 생활 13년이 끝난 나는 열여덟 시간 동안 자유스럽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또 이곳으로 끌려왔습니다......"

 이는 작가의 직간접적인 경험을 말해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인간들의 평균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길을 쓴 시점(발표한 때)은 1949년이므로 아직 미래가 불투명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리츠 일가가 사진을 찍으면서 이야기는 중단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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