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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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여기 소설의 여주인공 강진희라는 인물이 있다. 직업은 대학교수. 시간과 돈이 남아도는 인물. 소설속에서 그녀가 경제적으로 고통받는 건 도통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시간에 쪼들려 사느냐. 그렇지도 않다. 3명의 애인을 만나고 다닐정도로 시간이 남아돈다. 시간에 쪼들릴 때는 학생들 레포트와 시험 채점을 하는 순간 뿐이다. 전형적인 도시의 인텔리이다.

소설은 강진희라는 여자의 부조리한 내면적 불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절절하기 까지 하다. 하지만 나는 이 여자를 위로하고 픈 마음이 조금도 없다. 그 이유는 그녀가 택한 삶의 태도 때문이다. 그녀는 계속 삶의 한 쪽 면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단면의 우울함을 삶 전체로 확대시킨다. 우울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가볍게 살자는 것'.

가볍게 사는 그녀에게 믿어야 할 대상은 전혀 없었다. 아니, 어떤 것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사랑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웃기는 건 사랑에 대한 그녀의 신조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사랑은 배신으로 완성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허망한 말이다. 왜냐하면 배신은 믿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믿지 않는 그녀에게 있어 배신으로 완성되는 사랑이란 완전한 모순이다. (사랑을 어떻게 정의 내리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은희경은 사랑이 자기애의 표현이라 했다.)

그녀의 삶이 멋있어 보일지는 모르지만 결론적으로 그녀의 삶은 부조리하다. 항상 3명이 애인이 그녀의 주위에 있지 않을 것이다. 40대가 오고 50대가 올것이다. 아름다움이 꺼진 때가 왔을 때 여전히 그녀 옆에서 애인이 되어줄 남자가 있다는 건 불확실 한 일이다. 불확실한 일에 하루하루를 걸며 살아가는 것은 부조리한 삶이 아닐 수 없다.

강진희는 <행복한 죽음>의 주인공 뫼르소와 닮아있다. 넘쳐나는 시간에 질식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 순간의 허망함을 타게하기 위해 일시적 사랑에 목메는 모습이 비슷하다. 두 인물 모두 부조리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뫼르소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행복한 삶이었으며 행복하게 죽는 것이 그가 꿈꾸는 것이었다. 뫼르소의 삶의 과정은 부조리했지만, 그는 '바라는 것'을 죽음으로써 얻을 수 있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자각하는 순간 뫼르소는 이미 행복한 사람이 된 것이다.

반면에 강진희는 인생의 목표가 없었다. 뫼르소와 똑같이 방황하는 삶이었지만 뫼르소처럼 인생에 있어서 바라는 바가 없었다. 행복해 지고 싶지 않았고 어떤 것을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문제의 본질로부터 도망가려고 했다. 그녀는 시간이 가는대로 기분 가는 대로 살 뿐이었다. 삶의 목표가 행복하게 죽고 싶은 사람과 아무 목표도 없이 사는 사람의 차이는 지극히 크다. 목표를 이루는 삶은 죽는 순간에도 행복할 수 있지만 목표 자체가 없는 삶은 인생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구원받을 수 없다. 끝없이 방황하다가 거꾸로 지는 인생.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 있을까.

허망한 강진희의 삶. 그 어떤 것도 강진희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없어보인다. 자신이 만든 굴레를 끊임없이 도는 악순환의 업을 깨뜨릴 만한 내면적 의지 같은 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술과 담배와 섹스에서 삶의 위안을 찾는다. 부조리한 삶이 아니라고 어떻게 항변할 수 있겠는가. 이런 여자는 피곤하다. 그 어떤 것에도 설득되지 않는다.

교수면 충분히 멋지게 살 수도 있다. 더군다나 3명의 애인을 쉽게 만들 수 있는 여자라면 더욱 그렇다. 시간도 넉넉하고 물질적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교수가 사랑에 실패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믿지 않으려는 태도는 유아론적이다. 그녀는 남아 도는 시간에 자기가 추구하는 삶이 뭔지 충분히 성찰하지 못했다. 그랬다면 가볍게 살고 싶다는 소리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볍게 산다는 건, 전경린이 말한대로 창녀가 아니면서 결혼한 유부남을 사랑임네하고 주장하는 그런 여자의 삶을 산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가볍게 사는 게 삶의 목표인가? 이것처럼 부조리하고도 허망한게 또 있을까. 넘어져 무릎에 피를 흘려도 그녀가 전혀 안쓰러워 보이지 않다. 아무리 개인적인 삶의 원칙을 존중해주고 싶어도 강진희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그녀가 갖고 있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누리기 위해 모든 시간을 다 바쳐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것들이 무의미하다고 하는 그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 지 난감하다.  

뭐,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내팽게치고 삶이 무의미하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강진희의 삶은 사랑 때문에 귀중한 것들이 무의미하다고 일갈하는 게 아니지 않는가. 그 무의미한 그것을 얻기 위해 시간을 채우는 나의 행위는 또 무엇이란 말인지...

강진희는 말한다. “나는 희망 을 갖는 게 두려워...희망을 갖는다라는 건 뭔가를 믿는다는 거야.....그 결과가 무엇이라 생각해? 삶은 믿으라고 있는 게 아니야. 배신을 가르쳐주기 위해 있는 거야."(pp259-260)
“나는 인생에 자신이 없어. 그래서 가볍게 살고 싶은 거야....희망을 가지면 난 약해져."(260p)

이 말은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말과 블로흐의 '희망의 철학'을 무안하게 한다. 희망을 갖는게 두렵고 믿음에 부정적이고 인생에 자신이 없어 가볍게 산다는 그녀에게 삶의 의미 운운하는게 우스울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 그녀는 안정과 지루함이 두려운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건 외로움을 채워주고 긴장감 있는 섹스가 필요한 것 뿐이다.

결국 그녀는 삶의 문제에 정면으로 무딪쳐 보기보단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 가볍게 살고 싶다고 한게 바로 그것이다. 가볍게 사는 사람에게 자유는 없다. 용서도 없고 연민도 없다. 희망은 조롱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희망을 갖지 않는 삶은 죽은 삶이다. 죽은 삶은 더러운 땅에서 질척거릴 뿐이다. 무슨 얼어 죽을 춤인가. 진흑탕 속에서 질척거림만 있을 뿐이다.

부인도 아니고 창녀도 아닌, 독립된 여성으로서 '사랑입네'하는 여자들의 대표 강진희. 그녀의 마음은 공허하다. 그 공허함은 남자가 있어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끊임없이 남자를 찾을 것이다. 불륜이라고 해서 그녀에게 해될 건 없어 보인다. 맞다. 그녀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본질은 비켜갈 수 없다. 방정식의 풀이 과정은 복잡해보여도 해는 곧 문제의 본질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불륜의 방정식이라는 게 있다. 윤성희의 단편 제목이기도 하다. 항상 3이라는 숫자와 함께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불륜의 대명사 강진희. 그렇기에 그녀의 불륜의 방정식은 'y=3x', ' y=3x의 제곱', 'y=3x의 3승'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가장 어울리는 불륜의 방정식은 'y=3x의 3승'이 가장 적당할 것 같다. 극대점과 극소점을 갖는 3차방정식. 정점에 올랐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구조. 미분을 해도 나락에 있기는 마찬가지다. 극소점인 진흑탕에서 영원히 질척거릴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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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마치다 준 지음, 김은진 옮김 / 삼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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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고양이 독재국의 두더지 각하와 족제비 잭 장관, 그리고 다수의 고양이들이 그려가는 코믹 풍자극~ 
책은 지극히 얇고 우습게 보인다. 한 시간도 채 안돼서 읽을 수 있는 만만한 책 같다. 겉으로는 진짜 우습게 보인다. 읽으면 진짜 우습기도 하다. 빙그레 웃으면서 그림과 글 속에 담겨있는 것을 보노라면 여러 편의 정치 칼럼을 보는 느낌이다. 간결하고도 함축적인 그림들은 정말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순전히 책의 표지 그림에 반해서 이 책을 갖고 있는 지인을 졸라서 빌려 본 책이다. 두더지 각하와 고양이 그리고 족제비 잭 장관의 그림이 너무도 귀엽고도 재미나게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책에는 ‘실없는 날들의 기록’이라고 돼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만큼은 전혀 실없지 않다.

짧은 그림 긴 생각. 잊혀질 수 없는 에피소드가 너무 많다.


2

국가 경제가 결딴났다고 호들갑떠는 잭 장관이 내놓는 새 화폐 발행 안. 인쇄한 돈의 1/3은 국고로, 1/3은 시장에 그리고 나머지는 두더지 각하의 소유로 하자는 안은 결국 10냐옹이 100,000각하로 교환되는 결과를 빚는다. 여러 독재국가에서 해 왔던 악습의 폐혜를 너무도 간결히 표현해 주고 있다. 화폐개혁이라는 명목 하에 한밑천 챙기는 독재자들, 그리고 심한 인플레를 너무도 해학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불안>이라는 에피소드를 보면 ‘각하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단’은 다름 아닌 도처에 있는 고양이 주민들. 갑자기 날아오는 총알에 혼비백산하는 각하의 모습이 너무도 재밌게 그려져 있다. 식탁 밑에 숨어서 잭 장관은 능청을 떤다. “괜찮습니다. 각하. 저건 우리 첩보요원입니다. 적을 교란시키기 위해 위장공작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는 잭에게 “멍청한 놈”이라고 핀잔주는 두더지 각하. 잭 장관을 멍청하다고 하는 각하는 그 자신이 멍청한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 에피소드에 그려진 그림이 아주 귀엽다~

<쿠데타>에서 잭 장관은 어물어물 하면서 두더지 각하에게, ·····사실은···어젯밤····쿠데타가···· “뭐야!” 놀라는 각하 앞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는 꿈을 꾸었는데, 수면 부족인가 봅니다”로 각하를 놀리는 잭 장관. 매를 벌지만 항상 그러한 잭이 있어 재밌다.

<명화>를 보다 보면 다음과 같은 장면도 대하게 된다. “정말 감동적인 그림이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받친 영웅의 죽음인가. 이봐 가까이 가서 이 그림의 제목을 읽어보게.” 그림은 무수히 날아오는 총탄을 맞고 죽어가는 두더지 각하를 그리고 있다. “저····독재자에게 죽음을! 이라고 써 있는 데요.”

잭의 촌철살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호심탐탐 각하의 동상을 없애고 자신의 동상을 멋있게 보호하거나 새로 건립하려는 잭 장관. 그런 동상이 각하의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건만 잭의 그럴듯한 동상을 보고 “어이, 저건 뭐지”라고 묻는 추궁에 “네? 각하, 전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몸이 허하신가 봅니다. 헛것을 다 보시고.”라고 능청을 떤다.

무엇보다 이 책의 압권은 <시선>과 <형무소>를 표현한 두 에피소드이다. <시선>은 잭 장관과 고양이 주민들이 짜고 두더지 장관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재미있게 묘사한 곳이다. 테러리스트의 대책에 대해서 연설하던 두더지 각하는 앉아 있는 고양이 시민들이 시선을 따라 그곳을 바라보지만 테러리스트로 변장한 한 고양이 시민은 그 반대쪽 무대 커튼에서 각하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다시 반대편 쪽을 예정된 연기로 연기하는 두더지 시민들. 반대편에 뭐가 있는지 각하의 고개가 돌아가는 순간 반대편으로 가 있던 고양이 테러리스트는 각하를 향해 총탄을 발사하고 그제야 속은 것을 알고 두려움에 떠는 각하와 잭 장관. 그 장면을 앉아서 즐기는 우리의 고양이 시민들.

<형무소>를 시찰하는 각하. 어딜 가나 형무소는 만원인 것을 본 각하는, 죄수들이 묘하게 즐거워 보인다고 한다. 길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그 이유가 모두 체포되어 형무소에 있다는 것을 은연히 말하는 잭 장관. 사람들이 없어 쓸쓸하니 형무소에 들어가서 지내자고 제안하는 각하.  

 

 3 


귀여운 캐릭터를 등장시켜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이 책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그런 우스운 책이 아니다. 모든 에피소드들은 독재국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기가막히게 풍자하고 있다. 각하가 멍청할수록, 잭이 각하를 골탕먹일수록, 잭과 각하가 계획한 것이 항상 어긋날수록 풍자의 강도는 높아진다.

어느 독재국가도 여기있는 애피소드들의 내용을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독재자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여기서 묘사된 각하와 장관 그리고 고양이 시민들의 모습에서 여러 나라가 경험한 독재의 악습을 의미 있게 반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바로 우리들에게 어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두더지 각하와 같은 지도자를 지겹게도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 정치를 유쾌하게 풍자하는 작가의 역량이 담긴 놀라운 책이다~ 본래 이런 종류의 책은 돈을 주고 사기가 무척 아깝지만(너무 빨리 봐서) 이 책만큼은 절대 아깝지 않을 것이라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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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어느 분이 어느 카페에 책 판다 길래...거기서 댓글 좀 달았더니...그분이 저한테 막 뭐라 하시더군요. 뭐..전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책값이 넘 비싸다. 헌 책인데....읽지 않으면 그냥 쌓아놓는 쓰레기와 다름없는데...뭐, 정가의 60%를 받느냐..그냥 권당 천원에 팔지...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한건 데..그리 큰 상처를 받을 건 뭔지...아~ 그분이 책은 쓰레기가 아니라고 저한테 충고 아닌 충고를 해주셔서...

그래서 생각나는 게 있어 몇 자 적습니다..

책도 쓰레기가 될 수 있다라는 사실을 3년 전에 첨 알았습니다. 집에 책이 좀 많아서 놓을 공간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안보는것들은 박스에 넣어서 보관을 합니다. 책꽂이로도 한계가 많더라구요..

이사를 하는 중에도 제 책때문에 여간 골치를 썩는 게 아닙니다. 집에서는 항상 안보는 책들은 버리라고..성화입니다..그래서 모  독서카페에서 대량으로 싸게 넘기기도하고..(액면가 10000원짜리도 천원 6천원 짜리도 천원...하여간 모든 책을 액면가 불문하고 천원에 처분함...직거래로 제가 갖고 가서 직접드림) 대학 책벼룩시장에 내놓기도 하고...그런데도 불구하고 집 곳곳의 공간에 책이 넘쳐납니다...보다못한 어머니가 만화책을(좀 오래된거) 대량으로 갖다 버리시기도 하고...거기에는 아키라도 있었죠..ㅜㅜ

나중에는 도저히 안되겠어서...책을 버리기까지 햇습니다. 한 300권 정도 됩니다. 뭐..연극의 이해와 같은 대학교양 교재들...백범 김구의 백범일지...실용서 처세술 같은 책들은 모조리 버렸습니다. 그런 책들은 팔리지도 않으려니와 빨랑 공간을 확보해야할 필요가 있어서요...

몇년 전 집의 가세가 기울어 더 작은 집으로 이사할때....책을 또 버려야 했습니다. 버려야 할 책들을 선별하는 고통은...정말 말할 수 없는 고통이죠...그때 버린 책들이 원서 였습니다. 대학때 보았던 원서들...진짜 비싼건데...근데 버렸죠.

그 이후 ....지금도 집에 빡스로 책이 쌓여있고 친구들 집에 분산시켜놓고...그러고보니 책도 쓰레기가 될 수 있더군요. 더군다나 안보는 책들은 싸여만 갑니다. 새로운 신간은 쏟아져 나오고..읽고 쓰고 하다보면 순수이성비판 같은 책은 책꽂이에서 잠만 자고 있습니다. 아~ 뭐 쓸게 있으면 뽑아 보곤 합니다만...한번도 안보게 되는 에세이류들이 많습니다. 일명 공간만 차지하는 쓰레기죠.

나한테 필요한 책...지금 당장 읽을 수 있는 책...조만간 읽어야 할 책이 진정으로 필요한 책이고...그렇지 않은건...쓰레기일 뿐이죠..처치곤란한 쓰레기...

뭐...혹자는 책을 어케 쓰레기고 분류하냐고 반박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아~ 저도 엔날엔 그랬거든요~..하지만 물에 잠겨 볼 수 없는 책을 어케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거와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될거 같은데..

하여간 빌려보고 꼭 필요한 책이 아니면 사지 않는게 저의 최근 신조입니다...근데, 소설은 뭐...빌려 읽으면 되지 굳이 소장가치가 있는 책이 별로 없더군요..하~   쓰레기라 하니 어감이 약간은 이상한데...뭐...처치곤란하니..필요없으니 쓰레기일 수 밖에요^^ 적어도 저한테는요~ 저와같은 생각을 하시는 분은 없으신지...동지를 만나면 좋을텐데말이죠^^

그래서 2년 전에 집에 있는 책의 일부를 갖고 독립했습니다만...독립한 이후에는 아무도 제지할 사람이 없으니, 마구 책을 사서 또 놓을 공간이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엔날처럼 버리진 않지만 조만간 처분을 해야할거 같다는..ㅜㅜ 

어쨋거나 책도 쓰레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에 아직은 변함이 없다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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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란 2010-03-26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을 쓰레기로 생각하는 사람과 보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고 그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할 뿐입니다. 의견이랄 것도 없습니다. 단지 그뿐이죠. 왜 논란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책을 쓰레기로 생각하고 버리는 분들 덕분에 아파트 재활용장에서 매우 좋은 책들을 종종 주워옵니다.감사할 따름이죠.

yamoo 2010-03-28 13:52   좋아요 0 | URL
하하...아파트 재활용장..거기 정말 좋더라구요~~괜찮은 좋은 책들이 쏟아져 나와 종종 수거해 온 적도 있습니다...ㅎㅎ 그 사람에게는 쓰레기...저에게는 필요했던 책^^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世設, 첫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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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글은 날선 검과 같아서 내 무딘 신경을 자르고도 남음이 있다.  

산문의 진수가 과연 어떤 것인지 김훈은 읽은 이로하여금 온 몸으로 느낄 수 있게끔 한다.  

거시적 담론은 거기에 맞게 묵직한 소리를 내고, 일상의 소소한 것에는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 운동하는 물체조차 존재의 의미를 갖고 날아간다.  

그가 보는 사물은 그냥 거기에 있는 사물이 아니라 김훈에 의해 재창조된 의미있는 사물이 되고, 인간에게 깨달음을 주는 매개체가 된다.  

결코 빨리 읽을 수가 없다. 문장이 너무 아름답고 그가 하는 말이 너무도 심오하여 행간에서 멈추고 그 의미를 반추하게끔 한다.  

고종석님의 <코드훔치기>와 같이 읽었더랬다. 고종석님과 같은 글을 좋아하고 그와 같은 글을 언제나 동경해왔는데, 김훈의 글은 단번에 이런 내 생각에 파문을 던져주기 충분했다.  

매 문장하나하나 멈춰서 음미할 수밖에 없었다. 가슴 깊은 곳에 울림을 주는 글의 힘이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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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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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말도 안되는, 그리고 겁대가리를 상실할 정도로 미쳐버리지 않고는 타이틀로 내 걸 수 없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사르트르, 방곤 역, 1999). 이 빌어먹을 책은 실존주의에 대한 사르트르의 변명이다.(실존이 휴머니즘과 양립할 수 있다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책이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측에서 그리고 여타 문학가와 사상가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은 실존철학을, 자신만의 거만한(?) 언어로 복잡하고도 현학적이게 강연한 그 대본이 바로 이 책이다. (간결한 팜플릿이라는 느낌은 거의 못받았다. 역시 번역의 문제인가..)

  1981년에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한 이 책은 50쪽 분량의 본문과 사르트르의 실존철학 강연에 반대하는 피에르 나빌르 교수와의 <토론>, 그리고 1952년 프랑스 <현대>지에 게재된 사르트르와 까뮈의 알고싶지 않은 둘 만의 싸움을 비화한 <반항과 혁명>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


거기다가 뭘 말하겠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 현학적인 이 논쟁을 확대시킨 장송은 지금까지 알고싶어하는 사람들만의 관심을 끌어온 것 같다. 개인적으로 둘의 싸움에 제 3자가 끼어들어 교통정리하는 모양새가 여간 보기 불편한게 아니었다. (아, 그 본질은 무슨 말인지 정황파악이 안되서 였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실존주의의 도덕관으로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비비 꼬아서 논증하고 있다. (시튜아시옹과 기투의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읽고 있으면 한 없는 미로를 걷게 된다. 실존주의의 본질을 매우 난해하고 불투명하게 논하면서(번역이 한 몫 했을 수도 있다), 여기에 더해 자유와 책임의 문제까지 건드려, 실존을 해야 자유로운것인지 아니면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현존재의 가능태가 실존인지 헷갈리게 한다.

 그럼으로써 (적어도 나에게는) 실존주의 보급을 목적으로 했다는 이 해설서의 취지를 무색하게 했다.

 헌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빌어먹을 헛소리를 늘어놓고 투덜거리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번역을 한 방곤이라는 역자때문이다. 글을 읽는 게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비문 투성이에다가 가독성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문체는 원작을 망쳐놓은 느낌이다. 이 사람이 문학을 전공한 사람인지 심히 의아했다.

그리고 제발 전공자가 번역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실존주의 제 1 원칙인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를 이 사람은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고 써놓고 있다. 물론 다른 판본에서도 보인다. 실존과 존재의 개념적 차이를 알면 이러한 실수(?)도 피해갈 수 있지 않았을까? 뉘앙스 차이라고 보기에는 개념적 차이가 너무 크다. 

 이러한 개념적 어휘 선택은 책 전체에서 넘쳐난다. 그래서 행간을 멈추어 생각을 해 봐야 한다. 모든 페이지가 다 그모양이다. 제발 개념을 탑재하고 번역해 주길 간절히 바랄뿐이다~

번역만 제대로 됐다면 아마도 실존주의 보급을 목적으로 사르트르의 본래의 취지는 성취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고전모임 주제도서라서 읽기 했는데, 하여간 읽느라 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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