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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아베를 쏘다
김정현 지음 / 열림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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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아베를 쏘다』에서 저자는 죽은 안중근을 다시 살려낸다. 그리고 안중근은 100여 년 전 자신이 이등 박문(저자는 요즘은 모두 일본사람 이름을 일본식 발음 표기로 하지만, 저자는 일본식 표기를 앞세우지 않고, 예전의 한자식 발음으로 한다. 의도적 표기가 아닌가 싶다)을 쏘았던 그 현장에서 아베를 다시 쏜다. 그래서 판타지라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소설의 인클루지오를 이루고 있을 뿐, 대부분의 전개는 안중근 재판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을 읽어가는 가운데 갖게 되는 느낌들은 분노, 경외, 통쾌, 공감 등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분노는 우선 안중근을 두려워하며 야비하게 행동하는 일본의 행태에서 느끼게 된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재판권이 중국, 또는 러시아에 있음에도 자신들의 힘으로 윽박질러 자신들에게 유리한 재판을 하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이다. 아울러 100여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아베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일본 극우세력들의 주장과 행보에 대한 분노이다.

 

당시 일본이 안중근 의사를 사형에 처하고 급하게 집행한 이유를 검사 구연의 말을 통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 같은 사람이 세상에 살아 있으면 많은 한국인이 그 행동을 본뜰 것이며, 일본인들은 겁이 나서 일상을 온전히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일본이 안중근 의사를 단순 살인자, 단순 테러분자로 규정하고 사형에 처한 이면에는 안중근 의사의 의연함과 그 높은 애국의 정신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시대를 떠나 마찬가지이다. 권력자들이 민중의 행동이나 발언에 대해 과도한 대처를 하는 이유는 사실 두려움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이 두려움의 근원은 본인들의 그름에 있다. 본인들이 옳은 길을 가고 있다면, 자신들을 향한 비난에 두려워하지도 않고, 과도한 대처를 하거나 온갖 거짓 주장들을 억지로 주입시킬 필요가 없다. 이는 오늘 이 시대를 돌아보게도 한다.

 

둘째, 경외의 감정은 언제나 의연함을 잃지 않는 안중근 의사의 모습에서 갖게 된다. 그리고 안중근의 정의심에 이 감정을 품게 된다. 끝까지 나라와 동포를 생각하는 그 모습에서 경외의 감정을 품게 된다. 오늘 우리는 국가나 동포보다는 ‘나’가 더 중요하진 않은가?

 

셋째, 통쾌함은 아베를 처단하는 장면에서이다(물론 이런 감정은 옳지 않은 감정이지만, 본인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다. 일본사람은 일본사람이라고 표현하면 안 되고, 일본 ‘놈’이라고 표현해야 맞는 것처럼 여기는). 하지만, 더욱 통쾌함을 느끼는 장면은 아베를 죽인 후 다시 열리게 된 재판에서 안중근 의사가 당당하게 소견을 밝히는 장면이다. 특히, 아베의 죄에 대해 조목조목 밝히는 부분에서는 통쾌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공감은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서이다. 비록 미운 일본이다. 어쩌면 용서가 쉽지 않은 일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는 함께 가야 한다. 안중근 의사는 바로 그러한 대안을 생각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이등방문을 쏜 것은 대안 없는 폭력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동양평화론에서는 공감을 느끼게 된다.

 

『안중근, 아베를 쏘다』, 8월에 읽으면 더욱 좋을 책이다. 시간이 없는 분들은 인클루지오 부분(프롤로그, 제3부)만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통쾌함만을 마음껏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껍질만 먹는 것이다. 조금은 지루한 감도 없진 않지만, 안의 내용물도 섭취해야 저자가 성의껏 장만한 맛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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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조의 바다 위에서
이창래 지음, 나동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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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래 작가는 노벨 문학상 후부로까지 거론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이다. 그의 작품, 『만조의 바다 위에서』을 읽고 나서 왜 작가는 소설의 제목을 『만조의 바다 위에서』라고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 제목을 이해하기 위해 작가가 작품을 통해 흘린 몇 가지 단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첫째, 소설의 주인공 판. 그녀는 지극히 평범하고 놀라울 정도로 조그마한 16살 소녀이다. 그녀는 B-모어 주민으로서 수조안에서 물고기를 기르고 돌보는 일을 하던 소녀이다. 그녀의 직업이 첫 번째 단서가 될 수 있다.

 

둘째, 가장 부유한 주거공간인 차터, 그곳의 캐시 양에 의해 사육되어지는 7소녀들이 판을 위해 그린 벽화 안에 등장하는 그림이 그것이다. 7소녀로 상징되는 7수초가 흐느적거리는 물속의 판이 물 밖으로 손을 내밀고 판의 남자친구 레그의 손을 잡는 장면.

 

마지막, 비크가 올리버의 집들이 선물로 사온, ‘만조의 바다’가 그것. 사실, 이것이 가장 직접적 단서가 아닐까? 바다안의 풍경이 모두 담겨 있지만, 모든 생물은 가짜.

 

판이 살아가는 시대는 3개의 주거 공간으로 나눠져 있다. 상류층이 살아가는 차터(이곳은 말 그대로 그들만의 리그이다). 차터에 물자를 공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즉 안정적인 삶을 살아간다 안위하며, 가족적인 분위기(사실은 전혀 가족적 분위기가 아님)에서 살아가는 B-모어. 마지막 어떤 안전장치도 없이 방치된 채 살아가는 자치구.

 

판은 B-모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교육받고(이 교육 역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차터를 위한 일군으로서 살아가는 교육이다), 물속에서 물고기를 기르는 일을 하는 소녀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의 애인 레그가 아무런 발표도 없이 B-모어에서 사라졌다. 이에 판은 레그를 찾아 자발적으로 B-모어를 떠난다.

 

극히 평범하고 놀라울 정도로 작은 소녀, 판은 자치구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생명의 위기 앞에 놓인다. 과연 판이 레그를 찾을 수 있을까? B-모어에서 자란 판은 자치구에도, 그리고 차터에도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판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모험들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된 메시지는 판의 모험에 있지 않다. 판이 남자 친구 레그를 만나는지의 여부에 있지도 않다. 극히 평범하고 작은 소녀, 판의 여정을 통해, 발견되어지는 모든 주거 공간이 결국 ‘만조의 바다’, 즉 가짜에 불과하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자신들의 삶은 자치구와 달리 안정적이고, 또한 안전한 삶을 살아간다 생각하지만, 그리고 가족적인 삶을 살아간다 여기지만, B-모어의 삶 역시, ‘만조의 바다’, 가짜 삶에 불과하다. 이를 판과 레그의 실종을 통해(사실은 자신들의 유익의 문제가 결정적이지만), 부조리를 깨닫고 봉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치구의 모습은 자유롭고, 야생의 삶을 살아가기에 어쩌면, 자치구에서 참 삶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았다. 하지만, 자치구에서의 삶 역시 가짜다. 퀴그가 만들어가는 삶의 공간도, 또 다른 이들이 만들어 가는 공간도, 오직 자신들의 유익이 먼저인 가짜다.

 

차터에서의 삶 역시 가짜다. 특히, 이곳에서는 판이 찾아 헤매던 사촌 오빠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오빠는 엄청난 성공을 기반으로 그곳 차터에, B-모어에서의 가족적 공간을 만들려 하지만, 이 역시 가짜다.

 

모두 가짜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공간 역시 그러한 가짜가 아닐까? 이러한 가짜의 공간에서 어쩌면, C-질환의 항체를 가졌을 아기를 잉태한 판의 작은 움직임이 가짜의 공간에 작지만 강력한 물보라를 일으킨다. 그 물보라는 소설을 읽은 우리들의 삶에서도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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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불멸의 신화
조정우 지음 / 세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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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우 작가의 글은 처음 읽었다. 누적 방문자 1,200만에 이르는 파워 블로거지만, 정보가 어두운 나에게는 처음이었다(참 대단하죠?). 처음 접한 단 한 권의 책이지만, 이 책을 통해, 조정우 작가 글의 특징을 생각해본다면, 그의 글은 간결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이 간결함은 작가의 장점이기도 하며 또 한편으로는 단점이기도 하다.

 

간결하기에 사건 전개가 빠르다. 그만큼 직접적으로 와 닿는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간결하기에 사건이 전부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사건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간의 심리, 배경, 암투 등 모든 것들이 생략되어 있다(물론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기에 장점이면서도 치명적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조정우 작가의 이순신에 대한 글. 이순신에 대한 글 중에서도 전투 장면을 위주로 한 글. 하지만 읽을수록 묘한 매력이 있다. 사건 전개가 빠르기에 지루하지 않고 재미나다. 전투 위주로 글이 이루어져 있기에 왠지 군대와 군대의 싸움이 등장하는 무협지(무림 고수간의 싸움이 아닌 군대의 싸움을 다루는)를 읽는 느낌마저 든다.

 

많이 읽고, 듣고, 알고 있는 이순신 이야기이지만, 저자의 손끝에서 새롭게 창작되어진 문장들 사이에 감동이 있고, 때론 소름도 돋으며, 한숨과 분노도 있으며, 마지막엔 눈물도 있다. 어쩌면 이것이 간결한 글 안에 담겨진 저자의 필력이 아닐까 싶다.

 

요즘 이순신에 대한 모 영화로 인해, 이순신 장군에 대해 설왕설래하는 분위기이다. 물론, 이순신 장군을 역사에 부각시킨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맞다. 군의 힘으로 정권을 잡았기에 정통성의 문제가 있었을 그로서는 군인들을 부각시키는 작업이 그에게 분명 유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 아래에서 성장한 현 박 대통령 역시 군인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오히려 군인에 대한 흠모의 감정이 크다. 오죽하면 자신의 첫사랑이 조자룡이라고 말했을까? 그런 박 대통령이 영화를 봄으로 더 많은 논란의 말들이 있다.

 

분명, 의도적 작업들이 있음이 사실이겠지만, 그럼에도 이순신 장군이 명장이었음도 사실이고, 그의 위대함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책과 영화를 통해, 그가 품었던 마인드를 닮아가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백성들의 고통과 아픔을 가장 크게 봤던 이순신 장군의 그 마음을 오늘 정치인들이 닮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본서에서도 저자는 이순신의 그러한 마음을 부각시킨다. 전투에서 더 큰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순간에도 백성들에게 돌아갈 아픔을 생각해 퇴각하는 모습들이 자주 등장한다. 또한 백성의 고통을 보며 함께 눈물 흘리는 이순신의 모습 역시 부각된다. 이는 간결한 문장들을 통한 사건 전개 중에서 우리에게 주고 싶었던 저자의 메시지가 아닐까?

 

백성들의 눈물을 기억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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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틀 스타일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
배명훈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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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틀 스타일』은 중편소설이다. 책 한권 분량으로는 꽤 짧은 분량인 120페이지 가량이다. 그렇기에 일단 읽는데 부담이 없다. 그리고 내용 역시 상당히 재미나 금세 읽고 만다.

 

세계를 정복할 야욕을 품고, 가마틀이라는 로봇을 제작한 박사. 그 로봇들과의 전투에서 로봇들은 모두 제거되지만, 한 로봇이 사라졌음을 알고 추적하는 과정을 소설은 그려나간다. 그리고 이 추적 과정은 가마틀 로봇에게는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가마틀 로봇의 오른팔에는 무시무시한 고성능 살상용 레이저가 무기가 장착되어 있다. 하지만, 잠적한 가마틀 로봇, 그에게는 부품이 배달되는 가운데 실수로 여성들의 얼굴을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 성형용 레이저가 장착된 것. 바로 이 웃지 못 할 실수에서부터 가마틀 로봇은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저자는 로봇과 기계를 다르게 생각한다. 로봇과 기계의 차이는 마음이다. 기계는 마음이 없지만, 로봇은 마음이 있다. 그렇기에 로봇은 더 나아가 정신을 소유하게 된다. 이것이 저자의 관점이다. 그리고 마음을 가지고 있는 로봇이기에 일탈을 꿈꿀 수 있다.

 

하지만, 『가마틀 스타일』에서의 가마틀 로봇은 일탈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참 자아를 찾아가는 것일 뿐. 만약 살상용 레이저가 장착되어져 있고, 공격적 마음만이 입력되어 있는데도 비공격적 성향으로 돌아선다면, 일탈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이 가마틀 로봇의 오른팔에는 공격적 성향이라곤 전혀 없는, 아니 오히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성형용 레이저가 장착되어 있다. 물론, 그 마음은 공격적 성향이 입력되어 있지만. 하지만, 마음은 움직이게 마련 아닌가. 특히, 자신의 본질을 찾아서 말이다.

 

이처럼 『가마틀 스타일』은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한 로봇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중편소설이라는 한계 때문일까? 왠지 짜임새가 헐겁다는 기분. 뭔가 짜임새 있게 일탈한 가마틀 로봇을 추격하는 듯싶었는데, 뿐 아니라 마음이 존재하는 로봇이기에(저자의 관점) 로봇의 심리변화에 대한 묘사를 기대하게 되는데, 그저 단순한 실수로 인해 성형용 레이저 팔이 장착되어졌다는 부분에서는 허탈감마저 느끼게 한다.

 

아울러 마지막 부분, 은수와 민소가 신혼여행을 떠나는 부분은 연애소설의 해피엔딩 분위기마저 느끼게 함으로 이 소설의 정체가 무엇일까 궁금해지기도...

 

그럼에도 짧은 내용, 흥미로운 전개, 유쾌한 결말(물론 조금은 허망하기도 하지만)은 이 소설의 매력적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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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간들 - 제1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지월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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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간들』은 제1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죽음에 대한 저자의 통찰력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로 살던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 그 뒤에 남겨진 병들었지만, 고집스러운 퇴역 군인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를 돌볼 책임을 맡게 된 연애소설을 쓰는 둘째 딸과 아버지간의 갈등. 화자인 둘째 딸은 엄마의 죽음을 추억하고, 또 한편 남겨진 아버지와의 갈등관계 속에서 죽음에 대해 성찰하며, 죽음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이 죽음을 바라보고, 이 죽음을 애도하고 추억하는 방식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둘째딸을 통해 펼쳐진다.

 

죽은 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처리할 수 없기에 남겨진 자들이 고인의 죽음에 대해 행정적으로 처리해야 함을 고인을 다시 한 번 죽여야만 하는 것을 보는 관점이 참신하다.

 

아울러, 죽음 이후에 남겨진 자들의 현실적인 삶의 고민들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평생 아내가 모든 것을 챙겨줬던 아버지의 혼자됨. 그 빈자리. 하지만, 애써 아내의 죽음을 거부하고 부정하며 도피하며 의연한 체 하려는 남성성의 허울도 고발한다.

 

또한 엄마의 죽음을 밀접하게 둘러싸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그 죽음과는 동떨어져 있는 생활인들(상조회, 구급차 운전자, 간호사 등)에 대한 모습도 고발하고 있다.

 

저자는 또한 떠난 자를 애도하는 모습 가운데 보이는 모순을 고발하기도 한다. 상가에서 애도하는 모습.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 슬퍼하지 않고, 종교인들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로, 친지들은 품앗이, 또는 대인관계에서의 도리를 다함으로. 여기에 더하여 헛된 호기심의 모습까지. 게다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고인을 애도함이 불합리하다는 저자의 관점은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요식적 행위에 대해 고발한다. 이는 우리를 반성케 하고 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나도 편협한 생각이기도 하다. 덴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을 보면,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죽음이지만, 모든 죽음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그 사람에 대해 묻고, 진심으로 애도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한 애도함이 왜 없겠나? 아니 관계없는 죽음까지는 차치하고라도 자신과 관계있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모든 이들이 형식적으로 접하는 것은 아니다. 왜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애통함이 죽음의 현장에 왜 없겠는가? 저자가 고발하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으나, 그럼에도 편향적인 견해임이 아쉽다.

 

죽음을 애도하는 종교적 갈등도 보여준다. 물론, 엄마는 기독교인이다. 감리교 권사, 그렇기에 당시 종교예식은 기독교식으로 치러졌다. 하지만, 장례 뒤의 애도의 방식은 어떠해야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감리교 권사인 아버지, 천주교인 언니, 무종교인 여동생, 그리고 불교인 주인공. 이 사이에서 어떤 방식으로 애도해야 하나?

 

여기에서 저자의 견해는 우리 전통 방식을 찾아가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전통인가? 그것을 과연 한국적이라 말할 수 있나? 그것 역시 유교와 불교의 습합이 아닐까? 여기에서 저자의 모순이 드러난다. 죽음에 대한 저자의 연구와 고민이 녹아들어있긴 하지만, 저자의 견해만이 옳다는 것 역시 독단 아닐까?

 

게다가 죽음을 둘러싼 모순 가운데 가장 적나라하게 고발되고 있는 것은 바로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다. 기본적으로 저자는 기독교를 혐오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가운데, 몇 가지 불편함이 있었다.

 

첫째, 저자가 교회를 고발하는 내용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실제 그렇기에 부끄러운 불편함이다. 이 불편함은 마땅히 감당해야 할 불편함이요,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새기고 반성해야 할 부분으로 불편케 해 줌이 고맙다.

 

두 번째 불편함은 그럼에도 그 모습이 모든 교인들의 모습은 분명 아니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그 모습을 일반화시켰고, 그로 인해, 모든 사람들은 저자의 수준 이하로 뭉개졌다는 점이다. 자신의 생각 이하의 모습으로 뭉개 버렸다.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모든 기독교인을 그처럼 폄하해버리는 저자의 경솔함이 불편하였다.

 

죽음에 대해 냉철하고 바른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 외에는 폄하해 버리는 모습들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셋째, 끊임없이 저자는 둘째 딸을 통해, 저자가 생각하는 견해와 다른 견해에 대해서 반박한다.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논지이다. 하지만, 왜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는 반성함을 보이지 않는지. 왜 둘째 딸은 죽은 엄마에 대해, 남겨진 고집쟁이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호주에 있는 언니에 대해서도 냉철하게 판단하는데, 둘째 딸 자신에 대해서는 성찰함이 없는지. 이 부분 역시 불편한 부분이었다. 저자는 자신에 대한 성찰은 철저하게 감추고 있다는 느낌이 불편했다.

 

또 하나 학창시절 이야기를 상당히 긴 분량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 부분이 과연 왜 필요한지 의문이 든다. 그 고백이 작가의 경험담을 통해, 자신의 학창시절이 “상실의 시간들”이었다고 말하고자 하는 건지, 자신을 성찰하려는 의도였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을 성찰하는 회상이라기보다는 학교의 부조리, 교사의 부조리에 대한 고발의 시간이다. 물론, 학교를 향한, 그리고 교사를 향한 저자의 견해에는 본인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나 길게 그 부분을 회상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학창 시절의 회상 모티브를 가지고 다음 기회에 다른 작품으로 우리에게 찾아왔더라면 좋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과 반성을 하게 한 작품이기에 저자에게 고맙다. 하지만, 많은 아쉬움과 불편함도 함께 안겨주고 있음이 솔직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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