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초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을 무렵, 가만히 집에서 노느니 외국어 공부라도 하자 싶어서 적당한 외국어 학습 어플을 찾다가 듀오링고를 시작했다. 처음 선택한 것은 프랑스어였다. 몇 년 째 듀오링고로 학습하긴 했지만 그외의 매체로 프랑스어를 거의 접하지 않다 보니 누구 앞에서 자랑할만한 실력에 이르기는 멀어 보인다. 어쨌든 듀오링고는 별다른 비용 없이 외국어에 입문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인터넷 접속만 되면 누구나 수십 가지 언어를 공부할 수 있다(여기에는 나바호어나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언어들도 포함된다). 


듀오링고의 한국어 학습자 수는 한국어의 위상을 드러내는 근거로 가끔 이용된다. 듀오링고의 영어 사용자들 기준으로 가장 많이 학습하는 언어는 순서대로 스페인어(4270만 명), 프랑스어(2490만 명), 일본어(1950만 명), 한국어(1650만 명), 독일어(1610만 명)다. 듀오링고라는 커뮤니티에 한정되긴 하지만 한국어가 영어권 화자들 사이에서 독일어를 제치고 일본어 다음으로 학습되는 언어라는 점은 대단한 성과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왜 저 1650만 명의 영어 사용자들이 한국어를 선택했는가? 이다. 



알베르토 코스타의 『언어의 뇌과학』은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이중언어 구사자들의 두뇌 작용과 구조를 분석한 책이다. "과학서"이기 때문에 이중언어 구사자들의 두뇌에 관해서만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중 언어는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자연스럽게 수반한다. 전 세계의 수 천 가지 언어 중 2가지 언어만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고르겠는가? 예를 들어, 영어와 중국어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아마지그어와 나바호어를 배울 것인가? 그에 관해 이 책은 아무런 답을 하지도 않고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 여기서 부터 '자연과학'이 아니라 우리가 인문학 혹은 사회과학 혹은 인문사회과학이라 부르는 영역의 문제여서다.



반대로 「마니에르 드 부아르」13호는 현실에서 인간의 언어 생활을 두고 다투는 여러 언어들의 권력 다툼을 조망한다. 여기서 『언어의 뇌과학』에서 다루는 '이중언어자의 두뇌 작용'에 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조차 찾을 수 없다. 대신 「마니에르 드 부아르」의 기고자들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언어들의 다양한 상호작용과 그 배경을 추적하고 제시한다. 「마니에르 드 부아르」13호에서 언어는 여러 요인에 의해 인위적으로 억제되어 권력을 잃거나, 반대로 권력을 획득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와닿는 사례를 들자면 국립국어원에서 주도하는 언어 순화 사업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짜장면→자장면, 피카츄→피카추, 닭도리탕→닭볶음탕 같은 경우도 있어서 그렇지.


「마니에르 드 부아르」가 가장 문제시하는 지점은 단연 영어다. 프랑스어권 매체라는 점의 특징이 여기서 잘 드러난다. 프랑스어조차도 나날이 커져가는 영어의 영향력 앞에서는 무기력을 느끼는 모양이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상징하는 에펠탑에 영어 슬로건이 내걸린 것은 영어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영어의 권력은 압도적이다. 세계 공용어에 가장 가까운 언어가 영어 아닐까? 영어는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서 필수적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네이처」, 「사이언스」 같은 영어 학술지에 연구 성과를 영어로 발표한다. 많은 텍스트가 영어로 생산되어 다른 언어로 번역된다. 그 반대는 드물다. 한국어 학술지에 "영어" 논문이 게재되는 경우는 있어도 영어 학술지에 "한국어" 논문이 게재되는 경우는 아마 없을 것이다(한국어 논문이더라도 영문 초록은 써야 한다). 


그 뿐인가? 살만 루슈디, 응구기 와 시응오 같은 비유럽권 작가, 제3세계 작가의 소설도 영어로 집필되어 영어권 독자들에게 읽히는 과정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린다. 디페시 차크라바티 같이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는 학자들의 글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글이든 서구권, 특히 영미권에서 명성을 누릴 때 비로소 한국에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영어권에서 태어나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람은 인종, 성별, 계급으로 대표되는 복잡한 계서제 속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비영어권 화자들보다 높은 위계에 위치한다고 봐도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언어의 뇌과학』을 보면 인간은 "피부색"보다는 사용하는 "언어"에 더 호감을 느낀다는 실험 결과가 나온다. 이쯤에서 "언어"도 "인종, 성별, 계급"과 나란히 위치시켜야 하지 않을까?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어서 제2외국어로 습득해야하는 입장에서는 순전히 영어 공부만을 위해 상당한 시간과 비용, 에너지를 투자해야한다. 영어 구사자는 영어를 습득해야 하는 과정에 수반되는 막대한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반면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 초, 중등 교육과정과 고등교육과정에서까지 거의 십수년에 걸쳐 영단어를 외우고 영문법을 외우고 영어 텍스트를 읽더라도 결국 영어는 제2외국어로서 습득한 것이기 때문에 원어민을 따라가기엔 한계가 분명하다(영어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 영어 시험을 치르는 것은 부수적인 결과다).


게다가 언어의 계서제에서 영어 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중요한 언어들은 모두 영어가 탄생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유럽 언어들(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이다. 독일어는 영어와 같은 게르만어권에 속하고, 프랑스어는 로망스어권이지만 서양 중세사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이래 프랑스어는 귀족들의 언어로서 영어에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프랑스어 역시 영어와 많은 어휘를 공유한다.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같은 로망스권 언어들은 프랑스어와 유사성이 많다. 게다가, 게르만/로망스어 모두 그 뿌리를 거슬러가면 인도-유럽어가 나온다.


그만큼 영어 구사자는 다른 유럽어를 배우기도 쉽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면 오펜하이머가 6주 동안 네덜란드어를 배워 네덜란드어로 강연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비유럽권 사람이 보기에 영화 상의 오펜하이머는 뛰어난 과학자인 것으로도 모자라 언어 습득 능력까지 뛰어난 천재로 보였을 것이다. 물론 영어가 모국어인 오펜하이머 입장에서 네덜란드어를 6주만에 습득하여 강연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를 지켜보던 이시도어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점이 이를 입증한다. 하지만 비유럽권 사람의 상상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저 1650만 명의 영어 사용자들이 듀오링고로 한국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몇 가지 답변이 제기될 수 있다. 그 중에서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답안은 이른바 K-culture로 통칭되는 여러 한국 문화상품의 대대적인 흥행일 것이다(형용사가 되버린 저 'K'가 로마자이며 culture는 영단어지만 넘어가자). 여기에 한국 기업들의 약진,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의 위상이 그간 꾸준히 상승하였다는 점이 답변으로 제시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한국어의 미래는 당분간은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을 것이다. 비록 여러 외국어들이 한국어에 침투하여 외래어로 자리잡고 있긴 하지만, 동시 한국어와 한국 문화도 퍼지고 있지 않은가? '누나,' '언니,' '오빠,' '김밥,' '학원,' '먹방,' 같은 한국어 어휘들이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된 사례들이 그렇다(여기에 '스킨쉽,' '파이팅' 같은 이른바 '콩글리시'도 등재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외국인과의 소통하는 과정이 늘어나면서 서로 다른 언어들이 뒤섞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그러나 한국어가 쟁취한 지위, 그리고 한국어가 다른 언어들과 뒤섞이는 과정은 결국은 언어들의 계서제, 그리고 그와 결부된 지구상의 사회 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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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2-29 04: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 젊은 시절, 어줍잖은 영어회화 실력으로 미8군에 파견된 군인이었고 이후 직장에선 국제금융을 전공하지 않은 순수 독학만으로도 전문가로 평가받았던 그때에 비하면 정말 한글의 위력이 엄청나게 상승된 모습입니다.

Heath 2024-02-29 11:06   좋아요 0 | URL
10년전, 20년전과 비교하면 정말 많이 변했구나 느끼게 됩니다.
 


입문서나 교양서는 전공서적에 비해 '인간적'이다. 전공서적은 무자비한 전문용어로 가득하며, 등장인물들도 인간미라고는 없어 보이는 선행 연구자들의 이름이 나열되고, 그들이 남긴 셀 수 없이 많은 연구들은 전공서적을 읽는 독자를 기겁하게 만든다. 


어떤 분야의 전공서적은 비전공자 더러 책을 덮으라는 듯이 강요한다. 분명 일상 생활에서 쓰는 용어임에도 그 책에서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 독자의 시선을 단어 하나에 묶어버린다. 어떤 분야에서는 그래프, 수식, 도표를 잔뜩 늘어 놓아 독자의 기를 잔뜩 죽여 놓는다. 분명 첫 문장에서 "본 서는 이러이러한 목적 하에 작성되었으며"는 또렷이 기억하나, 그 다음부터 언급되는 내용들이 논리적으로 무슨 관계가 있는거지 라면서 뒷 문장을 계속 읽게 만든다.


반면 입문서나 교양서는 그 반대다. 전문용어도 이해하기 쉽게 풀어 써주고, 그래프, 수식, 도표는 지양하며, 독자를 끌어들이는 스토리텔링에 대단히 능숙하다. 다시 말해, '재미있다.'


이 같은 입문서나 교양서의 장점이자 특징을 하나 꼽자면, 전공서적에서는 비인간적으로 나타나는 유명인들이 입문서나 교양서에서는 아주 친절하고 인자한 인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바꿔말해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된다. 잔악무도하여 많은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한 독재자조차 전기나 평전에서 해당 인물의 성장 내력, 일화, 인간적 면모만 따져보면 우리 주변에서 볼법한 평범한 인간이거나, 평범이라는 기준에도 미달인 인간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저 인간이 이래서 이랬구나...'라고 옹호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해는 가게 만드는 사례를 더러 찾을 수 있다.  


입문/교양서와 전공서 간의 차이점은 학부생이 만나는 교수님, 대학원생이 만나는 교수님에 빗댈 수 있겠다. 학부생이 만나는 교수님은 (가끔 '감히 내 수업에 A+을 받으려 하다니!'라면서 의도적으로 A+을 안주거나, '이 정도는 해야죠?' 라면서 과제 폭탄을 내는 교수도 더러 있지만) 친절하고 인자하며 인간미가 넘치시지만, 대학원생이 만나는 교수님은? 괜히 네이버 웹툰에서 '대학원 탈출일지'라는 웹툰이 순위권이겠는가. ("그들은 그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뿐이야")


학부생 입장에서는 수업 시간에 마주하는 평범하고 사람 좋아보이는 교수님이 사실은 그렇게 대단한 교수님인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수업 시간에 그렇게 졸리는 강의를 하시는 교수님이 사실은 그 분야에서 유명한 책 저자라거나, 그 분야에서 알아주는 상을 탄 수상자라거나, 해당 분야를 일신시킬 만큼의 새로운 발견을 했다거나, 교수님의 지도 교수님이 그 분야에서 알아주는 대가이거나, 교수님이 국내외 유수의 명문대학들 중 한 곳에서 학위를 취득했다거나(뉴스에서 지나가듯이 2-3초 등장하여 한 두마디 발언하는 국내외의 전문가들도 같은 사례에 포함된다).


같은 사람이 경우에 따라 천의 얼굴, 천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걸 모두 포착하기는 힘들다. 많은 전기들이 벽돌책으로 나오는 이유도 여기 있다. 하나의 단순한 사건도 실은 무한한 측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사건을 두고 끊임없이 다양한 관점에서 재해석이 반복되는데, 그 사건을 일으키고 다니는 인간의 한 평생을 책 하나로 모두 서술한다? 사람이 평생 보내는 시간 중 단 하루를 콕 집어서 24시간 중 수면 시간 8시간을 뺀 나머지 깨어 있는 시간 16시간 동안 일어난 모든 일과 그 사건들이 지니는 의미로 글을 하나 쓰라 하면 몇 십권짜리 전집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에 등장하는 경제학자들은 딱 위에서 든 학부생이 보는 교수님과 대학원생이 보는 동일한 교수님의 이중적인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경제학이나 인접분야 전문가가 아닌 이상 책등의 두께와 책등에 써진 제목을 보기만 해도 읽고 싶다는 의욕을 감퇴시키게 만드는 이 무자비한 경제학자들이, 평범한 인간과는 종이 달라보이는 그들이, 이 책에 나온 일화만 보면 '이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구나'라고 느끼게 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독자의 기를 죽이는 인물도 더러 있다. 유아기에 라틴어, 그리스어 작문까지 했다는 존 스튜어트 밀이라던가(다만 저자 토드 부크홀츠는 밀의 불행한 인생에 대해 연민을 보내긴 한다).


이 책을 비롯해 다른 분야의 입문/교양서들도 해당되는 사항을 하나 더 꼽자면, 대개 입문서나 교양서에서 언급되는 인물들은 그 분야의 아주 이름난 사람들이다. 그들의 업적은 대단하지만, 독자를 더 놀랍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업적을 이룬 시기다. 20대에 희대의 발견을 하거나, 20대에 학계의 패러다임을 뒤흔드는 대작을 쓴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뭘 하고 있(었)지?'라는 자기 반성(?)과 마주하게 된다. 물론 일찍부터 주변인들과 '종류의 차이'를 드러내면서 예나 지금이나 독자들을 압도하는 천재들의 숫자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뒤늦게 빛을 본 유명 인사들도 많다. 그들을 보면서 위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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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4-02-18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ㅎㅎ 이런저런 얼굴들을 떠올리며 읽게 된 글입니다. 좋은 생각 나눠주셔서 감사드려요

Heath 2024-02-18 19:4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잉크냄새 2024-02-18 17: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문 용어까지 들어가지 않더라도 경제학이라는 보통 명사 앞에서도 기겁하게 됩니다.

Heath 2024-02-18 19:41   좋아요 0 | URL
그렇죠. 무서운 명사들이 많습니다 ㅎㅎ
 


『역사대논쟁: 서구의 흥기』는 2014년 출간된 미국의 역사학자 조너선 데일리의 저작을 번역한 것으로, 어째서 서구가 중국을 제치고 세계의 패권을 쥐었는가 그 이유를 설명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정리한 책이다. 각각의 장에서 저자가 제시한 참고문헌 및 더 읽을 거리 중 역자가 첨부한 국내번역서들을 정리하려 한다. 2020년에 국내에 소개된 책이다보니 그 후에 나온 번역서들은 반영되어 있지 않다.(예를 들어 『법의 정신』) 오래되어 품절/절판되거나 값이 비싼 책들은 도서관의 도움을 빌려야할 것 같다.


서론


참고문헌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I』전2권, 강신준 옮김, 길, 2008.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책세상, 2018.


샤를 루이 드 스콩다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고봉만 옮김, 책세상, 2006.

 


애덤 스미스, 『국부론』, 전2권, 김수행, 비봉출판사, 2007.


조너선 D. 스펜스, 『현대 중국을 찾아서』, 전2권, 김희교 옮김, 이산, 1998.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허버트 조지 웰스, 『H. G. 웰스의 세계사산책』, 김희주, 전경훈 옮김, 옥당, 2017.



더 읽을 거리


프랑수아 기조, 『유럽 문명의 역사』, 임승휘 옮김, 아카넷, 2014.


앙리 피렌,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강일휴 옮김, 삼천리, 2010.



오스발트 슈펭글러, 『서구의 몰락』전3권, 박광순 옮김, 범우사, 1995.


아놀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전2권, 홍사중 옮김, 동서문화사, 2016.



1. 서구의 기적


참고문헌


카를로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최파일 옮김, 미지북스, 2010.



윌리엄 맥닐, 『전쟁의 세계사』, 신미원 옮김, 이산, 2005.



린 화이트 주니어,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 강일휴 옮김, 지식의 풍경, 2005.



더 읽을 거리


니얼 퍼거슨, 『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 구세희, 김정희 옮김, 21세기 북스, 2011.


로드니 스타크, 『기독교 승리의 발자취』, 허성식 옮김, 새물결플러스, 2020.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로빈슨,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시공사, 2012.


토비 E. 하프, 『사회 · 법 체계로 본 근대과학사강의』, 김병순 옮김, 모티브북, 2008.


더글러스 노스, 『제도, 제도변화, 경제적 성과』, 이병기 옮김, 자유기업센터, 1997


앨프리드 크로스비, 『수량화 혁명』, 김병화 옮김, 심산, 2005.


잭 골드스톤, 『왜 유럽인가』, 조지형, 김서형 옮김, 서해문집, 2011.



2. 세계사


참고문헌



마셜 호지슨, 『마셜 호지슨의 세계사론』, 이은정 옮김, 사계절, 2006.


앨프리드 W. 크로스비, 『생태제국주의』, 지식의



더 읽을 거리


로버트 B. 마르크스, 『다시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윤영호 옮김, 코나투스, 2007.


앨프리드 W. 크로스비, 『콜럼버스가 바꾼 세계』, 김기윤 옮김, 지식의숲, 2006.


이언 모리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최파일 옮김, 글항아리, 2013.


존 맥닐, 윌리엄 맥닐, 『휴먼 웹』, 유정희, 김우영 옮김, 이산, 2007.



3. 제국주의와 수탈


참고문헌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나종일 외 옮김, 전4권, 까치, 2013.


에릭 밀랜츠, 『자본주의의 기원과 서양의 발흥』, 김병순 옮김, 글항아리, 2012.


재닛 아부-루고드, 『유러 패권 이전』, 박흥식, 이은정 옮김, 까치, 2006. 



참고문헌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이정인 옮김, 아고라, 2017.


더 읽을 거리


R. 브레너 외 지음, T.H. 이스톤, C.H.E. 필핀 엮음, 『농업계급구조와 경제발전-브레너 논쟁-』, 이연구 옮김, 집문당, 1991.


에릭 R. 울프, 『유럽과 역사 없는 사람들』, 박광식 옮김, 뿌리와이파리, 2015.


제임스 M. 블라우트, 『식민주의자의 세계모델』, 김동택 옮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8.


클라이브 폰팅, 『클라이브 폰팅의 녹색 세계사』, 이진아, 김정민 옮김, 2019


조반니 아리기, 『장기 20세기』, 백승옥 옮김, 그린비, 2008.



4. 아시아의 위대함


참고문헌


안드레 군더 프랑크,『리오리엔트』, 이희재 옮김, 이산, 2003.



케네스 포메란츠, 『대분기』, 김규태, 이남희, 심은경 옮김, 에코리브르, 2016.



존 M. 홉슨, 『t서구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정경옥 옮김, 에코리브르, 2005.


더 읽을 거리


쵸두리, 『유럽 이전의 아시아』, 임민자 옮김, 심산, 2011.



5. 왜 중국이 아니었나?


참고문헌


데이비드 랜즈, 『국가의 부와 빈곤』, 안진환, 최소영 옮김, 한국경제신문, 2009.



사이먼 윈첸스터, 『중국을 사랑한 남자』, 박중서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9.



더 읽을 거리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전2권, 주경철 옮김, 까치,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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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린 머독의 『내 안의 여신을 찾아서』를 읽었다. 리뷰를 쓰는 데 책의 내용과 너무 동떨어진 내용이 떠올라서 따로 잡다한 글을 하나 써보기로 했다. 


이 책 앞표지, 뒷표지 날개에는 저자 모린 머독이 미국의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을 만난 에피소드가 나온다. 저자는 캠벨의 말에 충격을 받고 여성을 위한 영웅의 여정을 만드는 일에 착수하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의구심이 드는 지점이긴 했다. 내가 여태 읽은 캠벨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기 때문에. 특히 캠벨은 『여신들』(1972-1986년까지 캠벨의 강연을 엮은 책이다)이라는 저작에서 지금까지의 신화가 아닌, 앞으로 여성이 창조해나갈 신화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했었으니까.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신화 속에는 독자적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여성을 위한 모델은 없다. 또한 이런 여성들과 결혼하려는 남성을 위한 모델도 없다. 우리는 이를 흔한 동정심이 아니라 공감 속에서 서로 성장을 끈기 있게 격려하면서 함께 풀어 나가야만 한다. - P12

 

없는 미래 속으로 아무런 대책 없이 휩쓸려 빠져들게 되는 시대이기에 개인은 모두 자기만의 방식을 만들어야만 한다. 낡은 모델은 이미 역할을 다했으며, 새로운 모델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우리의 삶을 재미있게 만들고, 가운데 새로운 모델을 만들고 있는 것은 우리 (p. 13)신이다. 그것이 오늘날 도전을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선조'이며, 부지불식간에 미래의 삶에 영감을 불어넣을 신화 모델과 그것을 지켜 신화를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아주 실제적 의미에서 지금은 창조의 시대다. - PP12-13.


수세기에 걸쳐 남성들이 해방되었듯이, 여성들 역시 해방되어 독자적, 개인적인 발전을 이루어 있게 되었다. 남자들을 지배적 지위로 올려놓은 것은 근육의 힘이나 이러저러한 것들이 아니라 인격체로서의 해방이었다. 남자들은 과거 자연이 부여한 역할들로 이상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 P443

 

나는 여학생들에게, 신화에 대해 내가 말할 있는 모든 이야기란 남자들이 오래전부터 말해 왔고 경험해 왔던 바에 불과하니, 이제부터는 여자의 관점에서 여성들의 장래의 가능성에 대해 남자들에게 말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전했다. 그렇다. 그것이 미래일 것이다. - P444


그렇긴 한데 캠벨이 머독에게 한 말은 캠벨이 다른 저작에서 비슷하게 말한 점이기도 하다. 어느 책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자 아이는 신체가 변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히 정신적으로 성숙해지지만 남자 아이는 그렇지 못하므로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한다 였던가? 저자 모린 머독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어쨌든 모린 머독은 『내 안의 여신을 찾아서』에서『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캠벨이 제시한 (남성을 위한) 영웅의 여정과는 다른 (여성을 위한) 영웅의 여정의 구조를 제시하였다. 다만 『여신들』에서 캠벨이 말한 바를 실천하는 데 앞장선 것일까? 다른 학문에서 흔히 보이는, 후속 세대가 선구자를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학문을 발달시키는 것과 유사한 과정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모린 머독의 책을 읽으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캠벨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캠벨의 저작과 만난 날은 2020년의 어느 날이다. 지금 구매리스트를 체크해보니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과 『신화의 힘』 중고를 산게 2020년 4월 18일이다. 캠벨과 만나기까지의 여정은 개연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여정이었다. 그 시작은 2010년대 중반의 어느 날까지 거슬러간다, 그 무렵 헤이든 화이트의『메타 역사』라는 책과 만났다. 




화이트의 책은 그 어떤 역사책이나, 역사에 관한 역사책과도 다르다. 화이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역사는 역사가들이 세계관, 장르, 은유 기법으로 '플롯화'한 것이며, 역사는 과학보다는 문학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런 화이트의 주장을 접하면서 이 책에 언급된 역사가와 역사철학자들의 책을 찾아보기도 했다. 가끔 화이트의 주장이 언급되는 책(ex: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보면 내심 반갑기도 했다.


그런데 화이트의 책을 읽은 후 마음 한켠에는 엉뚱하게도 이야기, 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다. (화이트의 책 자체가 역사가/역사철학자의 역사 서술에서 플롯을 읽으려는 시도이니, 어찌보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은 꺼지지 않고 오래 갔지만 그렇다고 확 타오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2019년에 영화를 하나 보고나서 뒤늦게 이야기와 스토리텔링에 확 꽂혔다. 그 결과 알라딘 중고서점을 기웃거리며 이책 저책 사서 읽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시학을 구매하던 시절이었다.



읽으면서 학부 수업 때 교수님이 인용한 문구를 그대로 봤다. 시는 진리를 말하지만 역사는 일어난 일만 말하므로 시가 역사보다 위랬던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던 주장을 원전(번역본이기는 하지만)으로 직접 접해보니 느낌이 상당히 묘했다.


이야기를 창조하는 대표자하면 역시 작가. 그래서 운좋게 중고서점으로 『작가란 무엇인가?』를 구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한건 막상 구해놓고 아직도 안 읽었다는 점.


 


그러다 2022년 헤밍웨이 탄생 123주년 리커버판이 새로 출간되었다. 




아무튼 2020년 초 무렵 관심사가 과학으로 점차 옮겨갔다. 이유는 모르겠다. 개연성이랄 만한 것도 딱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굳이 개연성을 따지자면 개인적으로 꾸준히 관심을 가진 저자가 사회, 경제학적 서술을 할 때 과학 지식(그것도 생물학) 지식을 잔뜩 끌어왔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과학자 중에서 다윈은 사회과학 서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래서 예전부터 과학 중에 생물학 책은 가끔 챙겨보곤 했다. 특히 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자주 챙겨봤다. 


무슨 책인지 기억은 안나지만 어떤 생물학자가 쓴 책에서는 인문학도들에게 당부하기를 "생물학은 다른 과학처럼 수학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니 "생물학도 같이 공부해라!" 이랬던 것 같기도 하고. 분명 어느 카페에 앉아 그 책을 읽었는데, 카페의 위치와 카페에서 책을 읽은 장소까지도 정확히 기억난다. 그런데 막상 책 제목과 저자 이름만 기억나지 않는다. 내 뇌가 용량을 확보하기 위해 망각해버렸나보다.


코로나 팬데믹 초창기 시절, 정부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및 마스크 쓰기 실천을 당부하던 시절,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마이클 액셀로드의 『협력의 진화』를 읽고 난 후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을 읽고 있었다. 책을 읽게 된 순서는 오래전 다른 도킨스의 책들과 함께 사 놓고 책장에 고이 모셔만 둔 『이기적 유전자』를 먼저 꺼내 읽고, 『이기적 유전자』에서 언급된 『협력의 진화』라는 책에 흥미가 가 중고로 구매해 읽은 후, 도서관인지 집안의 서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이 눈에 띄여 읽었다.


  


윌슨의 『통섭』에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과 영웅의 여정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기억에 의거해 내용을 추리자면 인간의 두뇌가 자기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하나가 아닐까? 이런 뉘앙스 였던 걸로.


그렇지만 바로 캠벨과 연결되진 않았다. 『통섭』을 읽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중간 과정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마침내 캠벨의 책을 알라딘 중고로 주문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의 힘』을 같이 주문했다.


 


나중에 이 두 책의 최신 판본이 출간되었음을 알게 되었는데, 가격이 높아진 탓에 출판사를 향한 비판이 자주 보였다.




어쨌든 두 책을 읽으면서 캠벨에 빠졌다. 책을 읽기 전에 아는 신화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알만한 단군 신화와 가나출판사에서 2000년대 초에 출판, 한창 신드롬을 일으키며 애니메이션으로까지 제작된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시리즈 뿐이었다. 이집트 신화, 북유럽 신화는 건너 들은 수준. 북유럽 신화 같은 경우는 토르가 워낙 유명하니 상세한 내용은 몰라도 오딘, 토르, 로키 정도만 알고 있었다. 이집트 신화는 오시리스가 세트에게 죽은 후 이시스에 의해 부활, 저승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점 정도. 그정도로 특별히 신화에 대해 아는 바는 없었다.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의 힘』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얕았는지 알게 되었다. 신화가 허무맹랑한 옛날 이야기, 혹은 재미를 전달하는 데 그치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 인간의 가치관, 세계관, 무엇보다도 삶을 바라보는 태도, 삶을 어떻게 이어나가야하는 가에 대해 알려준다는 점에 매료되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 지점은 캠벨이 제시한 영웅의 여정을 삶에 대한 은유로 볼 수 있다는 점일까. 혹은 삶에 구조를 부여한다는 점일까. 거창한 사례를 들 필요 없이 잠에서 깨어나 하루 일과를 무사히 마치고 다시 잠들기까지의 과정도 영웅의 여정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삶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알려주었다는 점에서 캠벨은 순식간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 목록에 들어가게 되었다. 덧붙이자면 지금까지의 인문학 공부도 돌이켜볼 수 있었고, 뭔가 어려운 책을 읽으면서 다른 어려운 책도 한층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셈이기도 했다(그래도 읽기 어려운 책은 여전히 읽기 어렵다).


그 후 지금까지 중고, 새 책 통틀어 캠벨의 책 중에서 구할 수 있는 캠벨 책은 다 구한 듯 하다. 앞에서 언급한 『여신들』만은 못구해서 도서관에서 빌려봤다. 『여신들』은 밑에 나열한 책들에 비해 읽기 쉬운 편이긴 했다.


    



때마침 캠벨의 저작이 새로 출간되기도 했다.



다만 이쯤 오니 캠벨이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해서 한다는 느낌도 조금 들었다. 캠벨의 여러 저작들을 읽으면 같은 사례를 드는 경우를 몇 번씩 보게 된다. 연구서에 가까운『신의 가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도판집에 가까운 『신화의 이미지』를  제외한 나머지 저작들은 대중 강연을 엮은 책들이다 보니  이런 경향이 더하다. 


그렇긴 하지만 내가 캠벨에 관해 완벽히 이해했느냐 하면 그건 아닌 듯 하다.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캠벨에 관해 설명하시오'라고 하면, 제대로 설명할 자신은 없다. 한창 캠벨의 책을 읽을 당시에는 지금처럼 책을 읽고 글을 남긴다는 생각도 없었고,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지도 않았고, 기껏해야 인상적인 구절 몇 개 인용해서 기록하는 수준이었으니까. 그 시절 캠벨을 읽으면서 담은 지식은 뇌가 거의 다 망각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읽으면서 느꼈던 느낌만 잔재처럼 남아있다. 캠벨의 책들을 접하면서 이전에는 보지 못한 것들, 알지 못한 것들이 다가온 점도 있고, 어떤 점은 허무맹랑하다 싶었던 점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캠벨이 '벼룩 조차 생명의 신비를 품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보고 이 세상에 나쁜 책은 없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 점도 있다. 내가 무슨 책을 읽든, 내용이 좋든 나쁘든, 번역이 좋든 나쁘든 간에 '책'은 '책'이고, 나의 지적 여정을 이루는 과정의 일부분을 이룰테니까. 


지금 다시 캠벨의 책들을 읽으라면 읽기는 하겠는데 읽고 나서 생각을 정리해 리뷰로 쓰려면 한참 걸릴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머독의 책은 캠벨에 비해 생각도 금방 정리되고, 글도 빨리 써진 것 같다. 아니면 그동안 캠벨에 관해 읽은 것들이 머리 속에 정리가 안된 채로 널부러져 있다가 머독의 책을 계기로 다시 정리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참 정신없는 지적 여정이었다. 시작도 뜬금없지만, 중간과정도 뜬금없고, 캠벨에 도착하는 지점에서는 중간 과정도 생각이 안 날 정도. 


마지막으로 머독의 책을 만난 계기는 캠벨에 비하면 다소 간단하다. 2022년 어느 날 도서관에서 무심코 '영웅의 여정'으로 검색하다 『여성 영웅의 여정』을 발견했다. 때마침 SNS에서 개정판 『내 안의 여신을 찾아서』가 발간된다는 광고를 보고 바로 주문했다. 다만 읽은 것은 책을 사두고 1년이 지난 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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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지성사가 리처드 왓모어가 쓴『지성사란 무엇인가』는 지성사에 관한 입문서다. 이 책은 Polity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What is History?" 시리즈 중 하나다. 국내 번역본은 2020년에 발간되었지만 원서는 2015년에 발간되었다. 시기를 따져보면 원서는 슬슬 개정판이 나올 때가 아닌가 싶다.


 



"What is History?" 시리즈 중 국내에 번역된 책으로는 피터 버크의 『문화사란 무엇인가?』와 도널드 휴즈의 『환경사란 무엇인가?』가 있다. 이 중 『문화사란 무엇인가?』는 2005년 국내에 번역된 만큼 2018년에 발간된 3판은 아니고 그 이전의 구판 번역이다. 게다가 현재 품절 상태다.


 


반면 『환경사란 무엇인가?』는 2022년에 번역된 만큼 최신판이다.


 



이외에도 polity 출판사의 "What is History?" 시리즈 중에는 흥미로울 입문서가 많다. 국내에 모두 소개 되려면 얼마나 걸릴까. 


  

  

   

  



비슷한 입문서 시리즈로는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로 소개되는 Oxford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가 있다. 

 


가장 최근 번역된 기후변화 편이 시리즈 50권째.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가 아닌 다른 출판사를 통해 출간된 책도 하나 있긴 하다(해당 번역본은 현재 절판되었다). 



출판사 사이트에 들어가 목록을 확인해보니 Oxford very short introduction은 현재 출간된 시리즈 목록만 해도 770권. 남은 책들이 국내에 모두 소개 될려면 얼마나 걸릴까? 게다가 새로 나오는 권 수도 고려해야 한다.


덧붙이자면, 지금 이 글에 등장한 책들은 모두 '입문서'다. 입문서라고 해서 깊이가 얕지 않다. 오히려 입문서는 깊고 넓은 학문 세계의 출발점이다. 입문서를 통해서 다시 학문의 출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입문서를 한번씩 다시 읽을 때마다 출발점에 다시 서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어디까지 얼마나 나아갔는지, 덧붙여 아직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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