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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그 흔적들은 지금도 아주 많은 곳에, 가령 인터넷 사이트들에도 널려 있다.
지금도 세계사의 흐름을 보이지 않게 주도하는 비밀집단이 있다는 생각을 이론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인터넷에서는 삼자 회담, 빌더버그 회의, 다보스 정상 회의 등을 기업가, 정치가, 은행가들이 자기네 입맛대로 경제 전략을 세우는 자리처럼 묘사하곤 한다. 하루하루 절약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파생상품투기로 파산한 것에 대해서도 깊이 감춰진 음모가 있다는 듯이. - P384

장미십자회 오컬티스트 조제핀 펠라당이 말한 대로 입문의 비밀은 드러나는 순간 쓸모가 없어진다. 하지만 대중은 비밀을 탐하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비밀을 쥐고 있는 것 같은 사람에게 권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언제 그 비밀을 폭로해 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잘 알수록, 혹은 잘 알고 있음을 드러낼 수록 권력을 쥐게 된다. 지구의 절반에서는 이것이 경찰과 첩보활동의 원칙이었다.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첩보 활동은 정부의 기밀문서가 공개될 때, 혹은 위키리크스 같은 단체가 기밀을 파고드는 데 성공했을 때 무너진다. - P390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계획을 발명해 냈다. 그러자 그들은 그 계획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 논리적이고 반박할 여지가 없는 유추와 유사와 의혹을 거미줄처럼 교직한 우리 계획의 계기와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누가 계획을 발명하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수행한다면 계획은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대목에 이르면 계획은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 - P392

자, 진짜 비밀로 마무리를 하자. 침해할 수 없고 다다를 수 없는 비밀을 악착같이 추구하는 것은 장황한 욕망이다. 알카에다의 몇몇 자살 특공대원이 쌍둥이 빌딩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가 눈으로 본 것에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우리는 서툴고 불량한 조물주의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 P398

이쯤에서 렌르샤토 이야기를 접어도 되겠다. 이제 그 마을은 메주고레가 그렇듯 순례의 장소일 뿐이다. 렌르샤토의 경우는 전설을 <아예 처음부터> 지어내기가 얼마나 쉬운지, 또한 역사학자와 법정과 기타 기관이 거짓임을 입증한 전설조차 얼마나 힘이 셀 수 있는지 보여 준다. 그래서 우리는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의 아포리즘을 떠올리게 된다. <인간이 더는 신을 믿지 않을 때는 아무것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뭐든지 믿을 태세이기 때문에 그렇다.> 포퍼의 관찰과도 일치하는 이 아포리즘은 음모 신드롬에 대한 성찰의 명구로 안성맞춤이지 싶다. - P430

성스러움을 경험한 자는 현존을 느끼지만 그것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복종이나 희생, 때로는 인신공양의 행위로 반응한다. 또 어떨 때는—특히 순박한 사람들이 자주 그러한데―성스러움을 〈보고〉 싶어 한다. 여기서 히에로파니hierophany(성현聖顯), 즉 성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가시적 모습을 취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성의 존재를 체험한 사람은 그것을 말하기 위해 성스러운 것을 보기 원한다. 그러지 않으면 경이감, 당혹감, 망연자실, 공포 같은 효과에만 머물게 될 것이므로(그런데 그는 이 효과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성스러움이 늘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어떤 문화에서는 다양한 대체 형상, 어쨌든 인간이 <다른> 것을 엿볼 수 있는 나무, 돌의 모습을 취한다. - P434

그렇지만(나는 신비주의 역사 전문가가 아니므로 이 가설을 조심스럽게 내밀어 보자면)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한 <무(無)>의 체험은 남성 신비주의자의 고유한 특성—내가 보기에는—같다. 신을 순수한 무로 보았던 여성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걸출한 신비주의자 여성들은 그리스도를 거의 육체적인 존재처럼 떠올리곤 했다. 여성의 신비주의에서는 히에로파니가 우세하다. 신의이미지를 본 여성은 의심할 여지없는 성애적 황홀경을 묘사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이와 주고받은 사랑의 감정을 토로한다. - P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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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을 수 있는 아포리즘은 <재치> 성벽의 질병이다. 달리 말하자면, 재치 있어 보이기만 하면 어떤 명제와 그 명제의 역(逆)이 모두 참이어도 상관없다는 입장의 격언이다. 역설은 일반적 관점을 사실상 뒤집어서 받아들이기 힘든 세계를 제시하고 저항과 거부를 야기한다. 하지만 그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앎이 발생한다. 결국 그게 참이라고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에 재치 있게 보인다. 뒤집을 수 있는 아포리즘은 부분적인 진리만 담고 있으며 일단 뒤집어 놓고 보면 두 시각 중 어느 쪽도 참이 아닐 때도 있다. 단지 재치 있게 쓰였기 때문에 얼핏 참처럼 보였던것이다. - P258

서사적 허구는 누군가의 믿음을 얻으려고, 혹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려고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작가는 <가능한 세계〉를 구축하고 독자 혹은 관객이 공모자가 되어 그게 진짜 세계인 것처럼 그 세계의 규칙 (말하는 동물, 마법의 소산,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행동 등)을 수용하고 살아 주기를 요구한다. - P296

물론 서사적 허구에서는 허구성의 신호들이 발신되어야 한다. 때때로 이 신호들은 제목이나 <소설>이라는 장르, 나아가 뒤표지의 소개 글 같은 <파라텍스트paratext>로 주어진다. 텍스트 내에서 가장 명백한 허구적 신호는 <옛날 옛날에 —가 있었다> 형식의 도입문이다. 하지만 상황 가운데서in medias res 서사를 시작한다든가, 대화로 시작한다든가, 일반적이지 않은 개인사에 빠르게 힘을 실어 준다든가 하는 다른 허구적 신호들이 있다. - P296

가짜 더블double을 만드는 것은 결과적으로 거짓 동일시 falsa identificazione에 가담한다. 역사적 상황t1에서 원작자 A는 원작 O를만들지만 모조자 C는 역사적 상황 t2에서 모조품 OC를 만든다. 그러나 C는 연습 삼아 혹은 순전히 재미로 OC를 만들 수도 있으므로 OC가 반드시 위조인 것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도 처음에는 순전히 수사학 연습 삼아 쓴 텍스트였을 것이다. 이 텍스트가 진짜 칙령 문서로 (선의에서든 악의에서든) 간주된 것은 나중 일이었을 뿐이다. 반면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O와 OC가 똑같다고 거짓 동일시를 수행하는 자 I의 의도다. 이럴 때만 OC는 가짜가 된다. 이 때문에 거짓 동일시는 삼원적 관계를 작동시킨다. - P303

<더블>은 물리적으로 <출현한 것>이면서, 물리적으로 출현한 다른 것의 속성을 똑같이 지닌다. 그 둘은 추상적인 <유형>에 따른 타당한 특징들을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똑같은 모델의 의자 두 개는 서로에 대해서 더블이고, A4 용지 두 장도 서로에 대해 더블이다. 더블은 분별은 안 되지만 <교환 가능하기> 때문에 위조의 속임수가 아니다. 똑같은 A4 용지 두 장도 현미경으로 분석하면 상당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 P305

반면 같은 유형으로 출현한 것들 가운데 <하나>만 한 명 이상의 사용자에게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면 <가짜 더블>의 경우라고할 수 있다. 수집이라는 분야에서 지금은 몇 점 남지 않은 희귀 우표라든가 저자 서명이 들어 있는 고서(古書)에는 특별한 가치가 부여된다. 이 단계에서 더블의 위조는 흥미로워지고, 실제로 희귀 우표 위조는 심심찮게 일어난다. 일상적 교환에서 액면가가 동일한 지폐는 더블이므로 교환 가능하다. 하지만 법적인 면에서는 각각의 지폐는 고유한 일련번호가 있으므로—비록 그런 차이는몸값으로 지불된 돈이나 은행 강도가 훔쳐간 돈일 때만 중요하지만—동일하지 않다. - P306

진품이 없어지거나 아예 존재한 적이 없다면, 어쨌든 아무도 진품을 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외전> 혹은 <위작>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OC가 진품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진품은 존재한 적이 없다. - P309

컬트 영화가 되려면 영화 자체에 엉성하고 서툴고 일관성 없는 면이 있어야한다. 완성도가 높아서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선호하는 관점에서다시 읽을 수 없는 영화—책도 마찬가지지만—는 기억 속에 그전체로서 어떤 관념 혹은 주요한 감정으로 남는다. 엉성한 영화만이 흩어진 이미지, 시각적 봉우리로 남는다. 그러한 영화는 하나의 중심적인 생각이 아니라 다양한 중심 생각들을 보여 줄 것이다. 일관적인 <구성 철학>을 드러내기보다는 빼어난 불안정성 덕택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 P350

저자들은 즉흥적으로 짜임새를 만드느라 기존에 시험해 봤던 레퍼토리를 쥐어짠다. 시험해 봤던 것의 선택이 제한될 때의 결과물은 키치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험해 봤던 것의 총체를 투입하면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비슷한 구조물이 나온다. 그런 구조물도 아찔하고 천재적이다.
「카사블랑카」는 모든 원형을 담고 있기 때문에, 배우들이 다른 작품에서 했던 연기를 답습하기 때문에, 그 안의 인물들이 <현실적 > 삶이 아니라 다른 영화들에서 상투적으로 그려 보였던 삶을 살기 때문에 컬트 영화다. - P354

모든 원형이 뻔뻔하게 난입할 때 호메로스적인 깊이에 이른다. 두 개의 클리셰는 웃긴다. 백 개의 클리셰는 감동적이다. 클리셰들이 자기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재회를 만끽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극치가 쾌락과 일맥상통하듯, 도착의 극치는 신비로운 에너지와 흡사하다. 진부함의 극치에서 숭고함이 얼핏 엿보인다. -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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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전에 〈절대〉는 연결과 한계에 거리끼거나 얽매이지 않는 모든 것, 타자에게 좌우되지 않고 그 자체에 자신의 근거, 원인, 설명이 있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신과 아주 흡사한 것이다. 신은 <나는 존재하는 자다Ergo sum qui sum)라고 자기 자신을 정의하지 않는가. 신에 비하면 나머지는 모두 〈우연적〉이다. 그 자체에 자기 원인이 없으며 어쩌다 존재하게 되었을지라도 당장 내일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런 일은 태양계에도, 혹은 우리 각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반드시 죽고 말 우연적 존재인 우리는 사라지지 않을 무엇, 다시 말해 절대적인 어떤 것과 이어지기를 갈구한다. - P125

요컨대 불은 너무 많은 것이고 물리적 현상을 넘어서서 상징이 된다. 그리고 모든 상징이 그렇듯 이 상징도 애매하고 다의적이며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불러온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불의 정신분석학이 아니라 개략적이고 느슨한 불의 기호학을 해보고 싶다. 우리는 불을 써서 온기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죽기도하는데, 이 불이 지녀 왔고 지금도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살펴보겠다는 얘기다. - P165

사물이 빛의 발산에서 태어난다면 신성한 빛의 발산과 닮은 불보다 아름다운 것은 지상에 달리 없을 것이다. 색의 아름다움은 단순한 것이다. 이 아름다움은 질료의 어둠을 다스리는 형상에서 나오고, 색에 존재하는 무형의 빛, 즉 색의 형상적 이치에서 나온다. 그래서 불은 그 어떤 사물보다 그 자체로 아름답다. 불에는 형상의 비물질성이 있기 때문이다. 불은 모든 물체 중에서 가장 가볍다 못해 거의 물질이라고 할 수도 없다. 불은 질료를 이루는 다른 원소들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늘 순수하게 남는다. 반면 다른 원소들은 늘 불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들은 불을 받아들여 따뜻해질 수 있지만 불은 차가워질 수 없다. 오직 불만이 그 성질상 여러 색을 지닐 수 있다. 다른 사물들은 불을 통해서 색깔과 모양을 부여받고 불빛에서 멀어질수록 아름다움을 잃는다. - P169

그렇지만 역사 시험에서 히틀러는 코모 호수에서 총살당했다고 답한 학생을 떨어뜨린다고 해도, 문학 시험에서 안나 카레니나는 알렉세이 카라마조프와 시베리아로 달아났다고 답한 학생도 떨어뜨리는 것은 어찌 된 일일까?
논리학과 기호학의 관점에서 이 문제는 쉽게 풀린다. <안나 카레니나는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실제 세계에서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가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한다는 내용을 쓴 것은 사실이다>를 관습적으로 줄여 쓴 문장이다. 따라서 톨스토이와 히틀러는 같은 세계에 속해 있지만 히틀러와 안나 카레니나는 같은 세계에 속해 있지 않다.
따라서 논리학적으로 말해 보자면 <안나 카레니나는 자살했다〉는 〈대언적de dicto> 참이고 <히틀러는 자살했다〉는 〈대물적de re〉 참이다. 혹은 좀 더 잘 말해 보자면, 안나 카레니나의 경우는 표현의 〈기의〉와 관련 없이 기표하고만 관련이 있다. - P214

안나 카레니나에게 감동하는 이유는 우리가 서사의 규약에 따라 그 인물의 세계를 우리의 세계처럼 사는 척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가면(마치 서사의 특징에서 비롯된 신비주의 발작에 빠진 것처럼) 우리는 <그러는 척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그게 다가 아니다. 우리가 그 세계에 들어가 있지 않으므로, 다시 말해 그 세계에서 우리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우리 자신을 그 세계에 속한 인물 중에서 우리와 가장 공통점이 많은 사람에게 의탁하게 된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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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은 뒷모습만 보인다. 일종의 무대연출에 따라서 숭고가 무대를 차지하고 인물은 무대 전면에 놓인다. 그는 장면 안에 있으면서도—관객의 입장에 있는 우리가 보기에는—장면 밖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우리는 그를 통해 보고, 그의 자리에서 보며, 그가 보는 것을 보기 때문에 장면과 거리를 두게 된다. 이로써 우리 자신도 그 인물처럼 대자연 앞에서는 미미한 존재임을 느끼는 동시에 우리를 위협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자연의 힘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렇다, 나는 유구한 세월 속에서도 아름다움은 늘 이런 식으로 체험되었다고 생각한다. 뒤돌아서서, 우리에게 속하지 않고 어떻게든 소유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을 마주하면서 바로 이 거리에 미의 경험과 다른 종류의 정념(情念)을 구분하는 희미한 선이 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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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담론에는 계속 되돌아오는 주제들이 있다. 단순 반복보다는 라이트모티프에 가까운 이 주제들은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부단한 관심을 기울여 왔음을 보여 준다.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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