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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보편적인 진보의 담당자임을 근거로 하여 유럽인들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역사관은 ① 진보가 모든 비유럽인들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유럽인들의 희생 위에서 이룩되었고, ② 더욱이 비유럽인들에게서 그들의 역사를 빼앗아 공식적인 역사 이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있음을 애초부터 차단하고 진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다양한 형태의 경제적 수취와 사회적 통제를 호도하는 기능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비판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유럽이 지녔던 문화적 헤게모니 장치의 핵심적인 일부분으로서 사실상 그 헤게모니의 단순한 반영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영속화하는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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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나 19세기 이래 국민국가를 기본적인 구분선으로 하는 국가 단위의 정체성이 강화되면서 영국사, 한국사, 중국사 등과 같은 일국사적 서술 경향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있다. 일국사적인 접근은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고 현재적 정체성의 기원을 재확인한다는 측면에서 많은 가치와 장점들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일국사적 서술은 대상이 되는 공간을 미리 구분하는 탓에, 국민국가가 등장하기 이전의 유동성이나 국가보다 작은 단위 내지 초국가적 단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국가라는, 정착을 염두에 둔 일정한 공간은 안정성 내지 고정성이라는 관점을 전제하는탓에, 특히 국가 간 체제가 등장하는 17세기 중반 이전의 혼돈된 유럽을 특징짓는 유동성과 불안정성을 파악하는 데 한계를 지닌다. 불안정성은 공간적으로 피난, 반란, 전쟁, 강제 이주 등의 인구 이동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며, 인구 이동이 영향을 미치는 경계는 국경과 무관한 미시적인 지역일 수도, 아니면 국경을 넘어서는 광범위한 영역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또한 국민의 범주에 들지 못한 노예, 포로 등의 강제적 이동이나 유대인, 집시등 소수자들의 존재도 오랫동안 외면되었다.
최근 들어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일국적 단위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게 된 세계화라는 새로운 현실 앞에서 초국적인 접근이 주목받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교통과 통신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국경을 넘나드는 빈번한 인구 이동이일상화되면서, 이주가 인류사에서 예외적이 아닌 정상적인 현상일 수 있다는문제의식도 생겨났다. 그런 점에서 인류사를 ‘정주=지속안정‘이라는 측면 외에 이제껏 소홀히 해온 ‘이주=변화/불안정‘이라는 시각에서 역사적으로 추적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기존의 역사 서술에 비교해서 이런 관점의 전환은 아직은 초보 단계에 머물고 있지만, 이동하는 인간들에 주목할수록 역사 해석의 폭과 깊이는 훨씬 더 확장될 것이다. - P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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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그 사관이 여전히 번창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아직까지는 지성사 연구가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어떤 면에서 휘그 사관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널리 퍼져있다. 대중적인 역사 잡지나 어느 도시 책방의 ‘역사‘ 코너, 또는 라디오나 TV에 출연하는 인기 있는 역사가가 말하는 내용을 훑어보면, 예기적 해석, 즉 과거가 미래의 관심사를 앞질러 말해준다는 식의 독해가 지금까지 이를 비판해온 연구자들의 낯이 뜨거워질 만큼 여전히 지배적으로 유통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식의 잘못된 역사서 쓰기는 과거를 오늘날의 도덕적 관점에서 판단하는 단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다음으로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역사적인 매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이어지는 무언가의 기원을 찾아내는 것이 두 번째 단계라면, 역사 속의 행위자들에게서 단순명료한 교훈을 이끌어내는 것이 세 번째 단계다. 그런 교훈의 예로는, 과거란 얼마나 별나고 흥미로운 때였는지, 또는 종종 되풀이되듯 과거에 비해 우리가 더 합리적이고, 더 윤택한 생활 수준을 누리고, 더 커다란 부를 누리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등등의 뻔한 내용이 있다. - P198

이런 출판물에 실리는 글을 몇 편 읽어보면, 수많은 현직 역사가들이 여전히 다음과 같은 잘못된 믿음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들은 과거의 연구에서 오늘날의 선행 사례를 찾아내야 하고, 과거는 우리 자신이 - P199

살고 있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을 때에만 흥미로우며,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범주들을 활용해 과거의 쟁점들을 캐물어야 하고, 우리가 과거의 행위자들 및 그들이 살던 시대를 반드시 도덕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믿음들이다. - P200

이러한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면 과거가 현재와 지극히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혹은 과거가 지금과 너무나 다르다는 점에서 신기하게 보이도록 역사를 제시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오곤 한다. 그 부정적인 결과 중 하나는 이렇다. 점점 더 많은 수의 정치가들 혹은 공인들이 역사책을 적어도 한 권 정도 쓰는 일을 통과의례처럼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들의 책장은 스스로가 다른 이들의 작업을 적절히 각색했으며 1차 자료를 거의 또는 완전히 무시했다고 고백하는 책들로 채워지고 있는 중이다. - P200

지성사 연구가 목표하는 바는 과거 사상의 복잡성을 인식하고 이를 더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는 것, 그리고 그런 사상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어째서 역사적인 문제를 풀고자 하는 서로 다른 해결 방법들이 각기 나름대로 타당할 수 있는지, 사람들이 삶에서 마주하는 이데올로기적 체계가 역사 속의 인간 행위에 어떤 한계를 부여하는지 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역사 속 행위자에게 공감하는 태도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자세가 꼭 역사가가 과거의 사상과 행동을 정당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지성사 연구자는 인간과 사회가 완전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약속하는 기획에 회의적인 견해를 가질 확률이 높으며, 마찬가지로 혁명가로 살아가게 될 가능성도 적다. 이는 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이 역사에 작용하곤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느 저자가 개진한 관념이 그 저작을 곧바로 대면한 청중들에 의해 수정되고 또 시간이 흘러 그때와는 달라진 지적 맥락 속에서 살아가는 미래의 세대들에 의해 어느 정 - P210

도 재발명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지성사 연구자들은 한편으로는 과거 혹은 현재와 연관된 주제들을 다루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충분히 수긍한다. 동시에 그들은 과거에 또 현재도 계속해서 사람들의 지적인 삶을 형성하고 있는 역사의 여러 층위들을 알고 있기에, 과거 어떤 관념이 중요했던 이유와, 역사 속 행위자들 혹은 우리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들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P211

혹시 지성사가 스스로 과거의 저자에게서 혐오스러운 주장 혹은 관념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것들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요점은 왜 저자가 그런 관념을 세계에 내놓았는지, 그리고 당시의 맥락에 입각할 때 어떻게 그런 논변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 이해하는 데 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의 상황을 좀 더 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며, 더불어 당시에 해당 논변이 (설령 지금 우리들에게 매우 끔찍하다 할지라도) 어떤 이유에서 유효했는지 통찰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적어도 한 가지 측면에서는 텍스트를 평가하는 작업을 피할 수 없다. 지성사 연구자들이 역사적인 텍스트를 두고 피상적인 비평을 내놓을 뿐인 접근법을 공격하는 것은 타당하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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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암울한 세계관은 플라톤이나 데카르트를 읽기 훨씬 전인 어린 시절에 형성되었다. 열일곱 살에 부모와 함께 유럽을 여행하던 쇼펜하우어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 세상은 선한 존재의 작품일 수 없다. 세상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려고 생명체를 창조한 악마의 작품일 것이다." 몇 년 후 철학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 쇼펜하우어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삶은 끔찍한 사건이야. 나는 이러한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살기로 결심했다네." - P150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감사와 연민의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세계를 분리된 것으로 경험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동양의 신비주의자들처럼 이러한 인식이 환상이라고 믿었다. 세계는 하나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돕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손가락의 통증을 느끼듯 타인의 고통을 느낀다. 낯선 것이 아닌, 자신의 일부로서. - P152

듣기는 연민의 행위, 사랑의 행위다. 귀를 빌려주는 것은 곧 마음을 빌려주는 것이다. 잘 듣는 것은 잘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술이며,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 가능하다. - P153

매일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처럼 정신에서 구성된, 즉 인지적 세계를 경험한다. 이 세계는 실재한다. 호수의 표면이 실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리처럼 매끈한 수면이 호수의 전부가 아니듯이, 인지적 세계 역시 실재의 일부만을 나타낸다. 호수의 깊이를 설명해내지는 못한다. - P155

쇼펜하우어가 매우 즐겁게 플루트를 연주했다는 사실은 그의 팬이었다가 비판자로 변한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의 염세주의에 의문을 품게 했다. 매일 그렇게 즐거워하며, 그렇게 사랑을 담아 플루트를 연주한 사람이 어떻게 염세주의자일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아무 모순도 느끼지 못했다. 이 세계는 실제로 고통이자 엄청난 오류이지만, 그 고통이 일시적으로 유예될 때가 있다. 짧은 즐거움의 순간들. - P163

예술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다. 예술, 좋은 예술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고, 쇼펜하우어는 생각했다. 예술가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지식을 전달한다. 실재의 진정한 본질을 보여주는 창문, 예술은 "한낱 개념"을 넘어서는 지식이며, 그러므로 말의 표현 범위를 넘어선다.
또한 좋은 예술은 정념을 초월한다. 욕망을 키우는 모든 것은 고통을 키운다. 욕망을, 쇼펜하우어의 표현에 따르면, 의지를 줄이는 모든 것은 고통을 완화한다. 예술 작품을 바라볼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포르노가 예술이 아닌 것이다. 포르노는 예술의 정반대 지점에 있다. 포르노의 유일한 목적은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다. 욕망을 자극하지 못하면 그 포르노는 실패작으로 여겨진다. 예술에는 더 고귀한 목표가 있다. - P164

쇼펜하우어는 음악 외의 다른 예술은 그림자를 이야기할 뿐이라고 말한다. 음악은 본질을, 물자체를 이야기하고, 그러므로 "모든 삶과 존재의 가장 내밀한 본성을 표현"한다. - P164

진정한 듣기를 위해서는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이처럼 아무런 판단 없이 음악을 들을 때 "절대적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 P169

다른 철학자들이 저 바깥세상을 설명하려 시도한 것과 달리 쇼펜하우어는 내면세계에 더 관심이 많았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이 세계도 알 수 없다. 이 사실은 내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명백하다. 왜 그토록 많은 철학자가, 다른 방면으로는 똑똑한 작자들이, 이 사실을 놓치는 걸까? 내 생각에 그 이유 중 하나는 외부를 살피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환한 불빛 아래서 자기 열쇠를 찾는 술주정뱅이나 마찬가지다. - P175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함께 머무르지 않고 너무 자주 책 앞으로 달려간다고 말했다. "책은 자기생각이 고갈되었을 때만 읽어야 한다." - P179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런 과도한 양의 데이터(사실상 소음)는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며, 통찰의 가능성을 없앤다. 소음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 - P179

인터넷은 디지털 시대에 나타난 쇼펜하우어의 의지다. 끝없이 분투하고, 절대 만족하는 법이 없다. 나의 가장 귀중한 자원인 시간을 포함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행복이라는 환상을 제시하지만 오로지 고통만을 가져온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처럼, 인터넷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금욕적인 삶을 살거나, 미학적인 삶을 살거나. 명상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 P180

나는 깨닫는다.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 유예가 아닌, 더욱 풍성한 다른 세상으로의 침잠, 바로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음악 안에서 본 것임을.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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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여러 가지 이유로 잊혔거나 거부되었던 정치적 논의들은 오늘날의 정치를 위해 다시 복원 · 활용될 수 있었으며, 바로 그 작업이 이제 지성사 연구가 수행해야 할 과제 중 하나였다. - P155

정확히 말해 지성사 연구자들이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톰슨이 저지른 것처럼 역사적 기록에서 후대에나 만들어진 관념을 투사해 읽어내는 오류를 찾아 판별하는 일이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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