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12월 5일은 조앤 디디온의 생일이었다고 

Writer's Almanac이 전해 주었다. 34년생. 그녀의 에세이집 The White Album에 실린 에세이 하나가 

"We tell ourselves stories in order to live." 이런 첫문장으로 시작하는데, 그 문장이 아주 유명한 문장이라고. 


불어 문법 공부할 때, 대명동사...... 이거 불어의 매력이겠다 (그 말고도 여러, 중요한 매력들이; 있겠지만) 

생각하고 불어 문장 볼 때 대명동사가 나오면 (아주 자주 나온다, 영어엔 없는 거라서 더 그렇게 느껴지나 몰라도) 오호. 잠시 반색. 대명동사와 비할 바 아니겠지만 영어에선 재귀대명사. 우리말 번역하면서 직역하면 거의 예외없이 어색해지는 재귀대명사. 저 짧은 문장도 피해가지 못하지 않나, 번역하면 거추장스러워지는 일. 




34년생이니 지금은 많이 늙었고 

노년의 사진 보면 젊었을 때의 이런 사진들과는 많이 다르다. (당연..... ㅋㅋㅋㅋㅋ; 당연 안해도 될텐데;;;). 

패션 아이콘으로 유명했다고. 셀린 모델도 했었다던가, 그런 얘기도 들은 것 같다. 어쨌든 여러 사진에서, 미국보다 프랑스 분위기. 






우리가 의미를 생산하는 중요한 수단, 방법이 이야기(서사)다, 

인문학 옹호를 할 때도 자주 등장하는 이 말에 대해, 나는 유보적인 것 같다. 

바슐라르라면, 유보적일 것이다. <순간의 직관> 같은 책을 쓰셔서만은 아닌 

'총체화하는 충동' 이런 것에 깊이 기질적인 반감이, 바슐라르에겐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슐라르라면, 디디온의 위의 말에 더 오래 반응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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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9일에 좀 이르지만 송년 모임이 있다. 

정말, 어떤 기분으로 술을 마시게 될지. 대취할 것임은 분명한데 

어떻게 대취할 것인가. 12년의 송년 모임이 아마 최저점을 찍은 것일 거라서 

무슨 일이 있든 그보다는... 혹은 (이것도 실은 가능했다며) 고점의 체험. 송년 모임까지 

진정 keep calm 하고 그 날 대취하려고, 오늘 이 저녁도 맥주 한두 캔 정도 마시고 싶어지지만 참고 있는 중. 


식스핏언더엔 

참으로 아름다운 파티 장면들도 많다. 가족 파티. 연인 파티. 

저런 게 사랑이다, 우애다.. 실감되는 장면들. 




그런가 하면, 화질이 좋지 않지만 

이 정도 이미지만 구글 이미지에서 구해지니 이 이미지. 라이프스타일(이라고 쓰고 보통 "쓰리썸"으로 읽어야 한다는) 파티 장면. 섹스중독인 브렌다가 네이트와 결혼 확정되고 나서 미친 짓을 많이 하는데, 이런 파티에 가서 난교 비슷한 걸 한다. tv에서 보여줄 수 있는 노출, 섹스 장면의 아마 최고점; 찍은 장면들 연달아 나온다. 


물론 그게, 대단히도 인류학적인 장면이지 성애 묘사 같은 게 아닌 것인데 

이런 걸 한국 tv에서도 만든다면 좋지 않을까. 여기서 브렌다의 방식으로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 그녀가 

우연히 파티에서 만나 섹스하는 캘리포니아의 여피들, 그들의 보여주는 황량하고 고통 가득한 얼굴들.... ;; 그런 것 말이다. 


저건 정말 인간의 탐구고 사회의 탐구고 

저들이 극단적이든 않든 저들이야말로 진정하게 인간적이고....... 이런 생각을 <식스핏언더> 보면서 무수히 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했던 한국 드라마는, 아주 옛날에 보았던 (주찬옥 극본?) 것들 중엔 있었던 것 같지만 대학 이후엔 없었던 듯. 어쩐지 혹은 노골적으로 모두가 가짜였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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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색(영어 단어는 questioning으로 선택해 보자. doubt와 의미가 조금 겹치게끔)은 

인간의(나든, 남이든) 성장을 돕지만, 의심은 그러지 않지 않나. 나를 탐색하게 하는 힘과 

나를 의심하게 하는 힘은 구분해야 하는 것 같다. 내게든 다른 사람들에게든, 탐색을 요청해야지 

의심을 요청해선 안되는 것 같고. 


7시 즈음 학교에 도착했는데 

그 시각에 아직도 캄캄(까진 아니면, 컴컴). 지난 주 수요일만 해도 아니지 않았나? 했더니 수요일 그 시각엔 지하철에 있었던 것이었음. 매일 일단 인용할 양식부터. 



*그런가 하면 링클레이터가 <힘에의 의지>에서 인용해 Slacker에서 썼던 그 문장들: 

진짜 전사가 넘어야할 최초의 장애물: "내가 아끼고 믿는 인간들을 향해 빈다. 그들에게 고통이, 버림받음이,

질병이, 냉대가, 모욕이 있기를. 그들에게 심오한 자기-혐오가 남의 일이 아니기를.

그들이 자기-불신이라는 고문과 패배라는 비참에 친숙하기를. 그들을 향한 연민은 나의 몫이 아니다.

오늘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기준이, 그가 버텼는가이므로."

 

The first hurdle for a true warrior: "To those humans in whom I have faith, I wish suffering, being forsaken,

sickness, maltreatment, humiliation. I wish that they should not remain unfamiliar with profound self-contempt,

the torture of self-mistrust, and the misery of the vanquished. I have no pity for them because I wish them the only

thing that can prove today whether one is worth anything or not: that one endures."


여기서 니체가 self-doubt를 일종의 미덕으로 제시하는 거 아니었나 해서 정확히는 어떤 단어였나 찾아보니 

self-mistrust. 자기-의심과 자기-불신. mistrust에 해당하는 독어단어는 영어로는 self-doubt에 쓰는 doubt의 

뜻이기도 해서, 니체 문장에서 저 말은 self-doubt로 바꾸어도 아무 차이 없을 수도 있을 듯. 그렇긴 한데, 그렇다 해도 플라스가 말하는 자기 의심과 니체가 저 문장들에서 말하는 그것은 


작더라도 중요하게 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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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로딩어와 양자혁명의 짧은 (짧고 어렵지 않은) 전기. 

이 책 앞부분에, 슈로딩어의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하면서 

그가 일찌감치 기록광이었다던가, 나중 일기도 꽤 오래 방대하게 썼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 쪽으로 소질이 대단했다 : 이런 얘기 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서너살 무렵 글을 배우기도 전부터 "구술로" (8살 정도 나이차, 누나뻘인 막내이모가 같은 집에서 살았는데 이모에게) 일기를 썼으며, 그 이모가 기록해 남겨둔 아기 슈로딩어의 어느 날 일기에 따르면: "오늘 저녁은 이모가 해준 걸로 먹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 전부를 같이 얘기했다." 


자기 전에 뭘 하나라도 더 쓰고 자고 싶어져서 뭘 쓰나 하다가 

저 책에서 정말 인상적인, 잊기 힘든 저 대목 인용하고 자려던 참인데 

책이 찾아지지 않는다. (한숨). 그래서, 기억하는 만큼만. 


두번째 문장이 영어로, And we talked all about the world. 

저것이었을 것이다. "all" 이 작은 한 단어가 알게 하는 아기 슈로딩어의 비범함. 

주제 탐색력. 집중력. 몰입력. 이런 등등의 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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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가서 석사 1년차일 때 

영화도 중요하게 포함된 20세기 미국문학 수업 듣고 

히치콕과 What Lies Beneath, 주제로 기말 페이퍼를 썼다. 

Psycho만이 아니라 Vertigo, Rear Window 기타 히치콕의 걸작들을 

로버트 저멕키스가 차용하고 오마주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나마나한(그래서, 하지말아야할) 소리였을 텐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어려웠던 당시 내게, 선택의 여지가 얼마나 있었으랴. 하여튼 쓰는 나 자신은 신기해 

하면서 (Psycho에서 버나드 허먼의 음악, Saul Bass의 타이틀 디자인 이런 것도 시대보정하면, 혹은 하지 않아도 

얼마나 획기적인가........ 걸작걸작) 좋아하며 썼다. 


그리고 담당 교수가, 페이퍼에 붙인 논평에서 들려주던 말: 

"네가 여기 쓴 내용 거의 전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내용이다. 버나드 허먼. 사울 배스. 히치콕이고 뭐고. 등등. 

모두가 안다." 


이게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 

저멕키스의 What Lies Beneath이 히치콕 차용, 오마주 함은 

히치콕을 보았고 그 영화를 본다면 (보지 않아도. 영화 포스터부터가 강력히) 몰라볼 수 없는 것이긴 한데

몰라볼 수 없든 말든 난 그걸 글로 쓰... 려고 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은데? : 이런 이상함. 


어쨌든 이 일. ㅋㅋㅋㅋㅋㅋ 혼자 기억하고 웃게 되는 일이 지금도 있다. 

너 왜 세상 모르는 사람 없는 일을 혼자 흥분해 쓰고 그래. 너만 몰랐다. 너만 몰랐다고. 


두고두고 생각할 점이 있긴 하다. 

어느 지점부터, 이것은 말해진 바 없는 것이라 (혹은 충분히 말해지지 않은 것이라, 다시) 말할 가치 있다는 

판단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 없다 해서 말할 가치도 없는 것인지. 


히치콕은 지금은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그의 영화 보고 싶어지는 때도 거의 없지만 

춥고 흐리고 하늘이 무거운 날, Dial M for Murder 이런 영화가 

집안에서 상영 중이면, 뜨겁게 달군 방바닥으로 이불을 들치고 들어가 

반쯤은 열심히 딴 생각하고 반쯤은 열심히 히치콕의 장인정신에 감탄하면서 

본담 좋겠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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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12-04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 바스, 타이틀 디자인은 확실히 예술적이죠.. 타이포그라피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장인입니다..ㅎㅎ

몰리 2016-12-04 17:12   좋아요 0 | URL
Psycho 오프닝은
여러 번 봐도 볼 때마다 짜릿하기도 합니다. 당시엔 정말 신선했을 거에요.

모두가 알고 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