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예외없이 새벽에 (3시, 4시) 일어나긴 하는데 

오늘은 외풍 들어와서였나, 춥다고 느끼면서 눈 떴더니 1시 20분. 

2시 조금 넘게까지 억지로 자고 나서 하루 시작. 일어나면 하는 아도르노 (미학이론) 몇 문장 읽기 하고 나서 

플로베르 편지 1권 펴서 넘겨보다가, 가슴을 치는 구절 발견. 


영어판은 Dictionary of Accepted Ideas, 혹은 Dictionary of Received Ideas로 제목 번역된 책 

한국어판은 <통상관념사전>으로 번역된 책의 구상, 집필 계획에 대한 문단에서다. "예를 들면, 나는 문학에서 

범용함, 다시 말해 모두의 범위 안에 있는 일이, 그것만이 정당하다는 걸 보여주려고 해. 그래서 독창성은 그게 

무슨 종류든 위험하고 허황하고 기타 등등의 이유로 규탄 받는다는 걸. For example: I would show that in literature, mediocrity, being within the reach of everyone, is alone legitimate, and that consequently every kind of originality must be denounced as dangerous, ridiculous, etc." 


mediocrity, being within the reach of everyone. 

이 구절이 가슴을 침. 이런 구절에 반응하면, 그 자체로 미심쩍음의 시선 받기도 하던데 말이다. ('혹시 너는 그 범위 바깥에 있다고 생각해서 반응하는 거라면, 아니야 너부터가 mediocre해' 등을 포함하여). 왜 나는 예나 지금이나 이런 구절에 감동하는가 잠시 생각해 보았고, 모두의 범위 바깥으로 나가는 일 그것이 '자기극복'의 최상의 형태 아닐까. 라거나 


어쨌든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곳이 되게 한 것들 중엔 

언제나 그 범위의 울타리를 쥐고 흔들고 무너뜨린 (개인의, 집단의) 노력이 있지 않은가. 같은 답을 내 봄. 





어제 청문회에서 이대 총장, 학장 보면서 

(실제로 행한 일들의 위중함이 있긴 한데) 저들이 사실 뭐 극단적인 경우도 아니고. 교수들이 보통 저래.. 

그러게 되던데, 반-캠퍼스 소설 쓰는 사람들의 모임. 이런 거 있다면 좋겠다고 공상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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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은 아니고 10월 초에 했던 주문인가 

아마존 중고 배송대행했던 책들이 이제야 (조금전) 배송되었다. 

주문한 것들 중 어떤 책들이 재고없음, 어떤 책들은 상태불량. 하여튼 

엄청난 (크기나 주제나) 책들이 엄청난 양으로 도착. 우울해지려던 저녁인데

크고 무거운 책 박스 받아서 책들을 꺼내놓고 나니, 아주 궁금했던 책들도 있고 

어떤 책은 (표지와 활자가. 종이가) 마음에 들기도 하고. 덕분에, 우울해지지 않았다. 


가장 궁금했던 건 플로베르의 편지. 영어판으론 2권. 불어로는 12권이라던가.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F. 스코트 피츠제럴드 전기 다큐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는 자서전을 쓰지 않았다. 자서전보다 더 좋은 것을 썼다. 그는 수많은 편지들을 썼다." 

나는 점점 더, 편지 많이 쓴 사람들이 좋아지는 것 같다. 심지어 이게 무슨 기준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저 사람은, 편지 쓸 수 있는 사람인가. 저 사람은, 편지를 읽는가. 편지를 읽는 즐거움을 아는가. 


편지를 쓰지 않으며 쓸 수 없고 읽지 않으며 읽을 수 없는 사람. 

그런 사람, 그렇다고 알아보이고 그리고 신뢰할 수 없지 않나. 청문회 증인들. 


"글쓰기의 예술은 네가 무엇을 믿는지(네가 믿는 그것을) 발견하는 예술." 

강박적으로 편지를 많이 쓴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탐구자들 자신의 발견자들. 

반드시 그런 사람들이 타인의 탐구자며, 발견자이기도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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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오늘의 인용할 양식(중 아침.....)으로. 


이 말도 수업에서 토론 주제로 쓸 때 있는데, 써보면 거의 언제나 생각을 자극하는 말. 

뛰어난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러려면 타인의 뛰어남을 알아보는 눈 + 그에 감사하는 일. 이것이 필요하다. 

내가 덧붙이는 코멘트는 이런 것이고, 이에 반발하는 학생은 아직까지 없었다. 


조용히 앉아 그가 하는 모든 말에 경탄하기. sitting silently, admiring every word he (she) was saying. 

이러는 일. 이러는 일이 많을수록 행복한 삶 아닌가. 꼭 뛰어남을 원해서, 내가 뛰어나고자 해서가 아니라. 


아주 뛰어난 사람들이, 그들이 직접 하는 얘기든 

그들에 대한 이야기든... 이것들을 무궁무진 사람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인터넷의 축복. 

팟캐스트의 축복. 유툽이 가져온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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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호 좋지 않나. 

특히 신디 로퍼 노래 Girls just wanna have fun 성장기에 지겹게 들었다면 더더욱 

좋고 와닿고 웃기고. 일 구호. 그 노래 부르듯이 말해보면 좋다. girls just wanna have fun. (쉬고) damental human rights.


다음 주에 기말고사 끝나야 끝이긴 하지만 

오늘로 수업은 끝. 집에 오면서 맥주와 과자를 삼. 과자 가끔 먹는다. 

맥주는 매일은 아니지만 자주 먹는다. 음. 담배는 아직 끊지 못했는데 어째 올해 가기 전에 끊을 것도 같아지는 중이다. 연말의 흔한 결심이기보다, 예전에 끊을 때 느끼던 '이것도 이젠 놓아줄 수 있을 것 같음' 상태.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Time to quit. 


그런데 내 서재 팔로하신 분들 중 

어째 내 수업 듣는 학생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얼마전부터 들기 시작. 

나는 당신이 어제 블로그에 무엇을 썼는지 알고 있다. : 이런 뜻으로 보이는 표정을 보는 것도 같은 느낌. 

최대 방문자수 62 정도, 평균 방문자수 38 정도인 (이것도 최근에나) 극 미미한 독서 블로그라 할지라도 만일 

그 블로그가 내 얘길 하는 블로그라면......... 나라도 그 블로그 우연히라도 알게 되지 않겠어. 여하튼 어떤 경로로든 

자신의 이야기를 여기 와서 본 학생이 있는 것도 같은데, 만일 사실이라면 앞으론 인사하고 지내도 되겠습니다. 


어쨌든 지금 과자와 맥주를 먹고 있는 중이며 

올해는 어떤 해였나, 내년엔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일단, 세월이 갈수록 더욱 놀라워지는 세월의 빠름. 오죽하면, 얼마 안되는 

월급에서 적지 않은 돈을 뚝 떼어 저축하고 남은 극히 얼마 안되는 액수로 한 달을 사는 데도 

걱정이 안될 정도잖아. 고개 한 번 돌리면 열흘이 지나가 있어. 자다 눈 뜬거 같은데 한 달 뒤야. 

한 열흘 논 거 같은데 1년이 갔잖아. 그 작은 돈도 다 못쓸 시간은 누가 다 썼을까. : 이것이 집에 오던 마을버스 안에서 의식의 흐름. 


The Jargon of Authenticity는 아도르노가 실존주의, 특히 하이데거를 비판하기 위해 쓴 책인데 

그가 비판하는 지점들 거의 전부가, 바슐라르가 다시 해보인 지점들. 흙, 대지의 찬미. 농업, 농부의 찬미. 

인간의 찬미 ("인간은 비인간화의 이데올로기"). 두 사람을 같이 읽을 때 어떤 지점들에선 막대하게 생산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오긴 했는데, 내년엔 특히 이 주제와 관련해 진척이 있기를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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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16-12-14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를 아는 듯한 학생 표정이 어떨까 궁금하네요. ㅋ
또 한 해가 가는 지금, 세월의 빠름에 대해 쓰신 것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특히 이 부분 -> ˝한 열흘 논 거 같은데 1년이 갔잖아.˝
 


"등가성이 부르주아 사회를 지배한다. 부르주아 사회는 

같지 않은 것들을 추상적 양으로 환원함으로써 비교가능하게 만든다. 

계몽에게,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 그래서 궁극적으로 1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환영이다." 


어쩌면 조금 (더 "quotable"하게 만들기 위해) 고친 문장들일 텐데, <계몽의 변증법>에서. 

대학원에서 논문 쓸 때 논문 커미티에 계셨던 교수와 면담하면서, 아도르노는 꼭 읽고 참고하고 싶다 

아도르노 너무 좋다... 이런 얘기 내가 했더니 그 교수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바로 저 내용을 언급하면서 

"모두가 같아진다, 모두가 축소된다, 하향 평준화(leveling down) 일어난다. 이런 내용이 네게는 매혹적이니?" 

같은 질문을 했었다. 무엇일까, 그가 어떤 대학원생들에게 행사하는 매력이란. 당시 그 쌤 표정은 이런 것이었나. 


몇 주 전부터 

지하철에서 읽으려고 갖고 다니는 책이 The Jargon of Authenticity인데 (이것도, 작고 가벼운 책) 

새벽 지하철엔 사람이 없어서 앉아서 읽으며 올 수 있고, 어떤 땐 거의 집에서 잘 집중할 때처럼 

읽게 되기도 했다. 어느 날 새벽엔 나와 세자리쯤 사이두고 앉아있던 사람이, 내가 들고 있던 책 쪽을 한참 

쳐다보던 걸 보았는데, 그래서 나는 


그래 나 지하철에서 아도르노 읽는 여자야 

(음. 하지마. 하지마라..............) 


한참 전 언젠가는 <슈로딩어와 양자 혁명> 영어판 들고 서서 읽다가 

(아니 뭐, 나는 지하철에서 서서 영어책 읽는다고 티내거나 그러는 1호선 출퇴근 시간대가 아닌데 말입니다...) 

한 세 사람쯤 건너편에 있던 어떤 젊은 남자가, 노려보는 걸 마주보게 된 적 있다. 여자가 별 걸 다 읽네. 이런 표정. 

중년의 여자가 별 걸 다 읽네. 


하여튼, 어쩌다 오늘치의 서재 포스트를 못 쓸 수도 있을까봐 

부랴부랴 저는 방금 아무 말이나 써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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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16-12-14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몽‘이라는 말을 들으면 저는 과학(좋은 것!)이 생각나는데요, ‘계몽‘이 어떤 이들에게는 악몽이었을 것 같네요. <슈뢰딩어와 양자혁명>쪽에 가까운 사람으로서, 이런 인용은 저에게 여러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몰리 2016-12-15 08:15   좋아요 0 | URL
아도르노 사유(이 말은 근데 왜 오글거림 유발할까요. Adorno‘s thought, 이러면 전혀 그렇지 않은데요. 우리의 사유-적대적 현실......)에서 취약한 지점이 여기일 것 같아요. 실제로 아도르노 자신 ˝과학주의 scientism˝란 말을 여러번 쓰더라고요 (독어로는 어떻게 쓴 것인지, 독어 어휘가 영어의 scientism과 거의 같은 의미를 갖는지 확인해야겠지만요). 인문학자들이 ˝과학주의˝란 말을 쓰면서 보이는 흔한 반과학주의... 그런 면이 아도르노에게도 있어요. 그런가 하면, 바슐라르에게 서구의 합리주의 전통은 대단히도 소중하고 가치로운 유산. 바슐라르 과학철학은, 짐작하기에 아마 이것도 (문학연구에서 그가 한 일이 그렇듯이) 영어권은 물론이고 프랑스에서도 깊이 이해되지는 못했을 것 같은데, 적어도 이 점에서는 (서구 합리주의의 의의) 바슐라르가 아도르노를 완전히 압도할 것 같습니다.

blueyonder 2016-12-15 11:00   좋아요 0 | URL
써주신 댓글에 힘을 얻어 좀 더 과학을 변명해보자면, 과학은 정량화를 시도하지만 다른 대상을 정량화한 값을 비교하지는 않습니다. 1 kg과 1 m 모두 같은 숫자 1로 나타내지지만, 과학은 이 둘을 같다고 놓지는 않습니다. 비교 불가능한 전혀 다른 물리량일 뿐입니다. 물론 아도르노는 이런 정량화를 극단적으로(혹은 잘못되게) 시도하는 사회 분위기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저는 짐작합니다. 아도르노, 바슐라르 이런 이름들을 몰리님 통해서 처음 알게 되네요. 언젠가는 바슐라르도 한 번 읽어봐야지, 하고 읽어야 할 리스트에 추가합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몰리 2016-12-15 14:25   좋아요 0 | URL
과학에서 사유는, 차이의 분류에서 차이의 청산으로 나아가고
그렇게 대상을(세계를) 지배하고 전제적이 (autocratic, totalitarian) 된다...

이런 얘길 하는 거 같아요, <계몽의 변증법>의 특히 ˝계몽의 개념˝ 장에서요 (저 인용의 출전).
<계몽의 변증법>의 주장들이, 정말 급진적이긴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것이 계몽 이성 자체에 내재한 경향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해야겠어서요. 정량화 포함해 현대 과학의 연구 방법을 통째로 비판하는 것 같은 대목들도 있는데, 예전엔 이 책의 그런 면들이 ˝아니 그럼 그런 면들이 있고 그게 비판을 받아야 할 때, 일일이 말할 때마다 ˝이게 다는 아니지만..˝이라고 말해야 해? 현대 과학의 어떤 면들을 정면으로 보는 것일 뿐이지, 과학 자체를 비판하는 게 아니야˝ 같은 생각을 했었는데요.

지금 몇몇 페이지 보고 다시 생각하다보니, 정면으로 보는 건 맞고 정확히 본 것도 맞는데
같은 것을 아주 다르게 볼 수도 있었다... 그 다르게 본 사람이 아마도 바슐라르일 것 같다, 이런 생각 드네요. 서구과학에서 점증해온 합리주의, 이것에 대해 바슐라르가 어떤 얘기들을 하는지 알아야만 그런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만요. 모르면서 그냥 막 짐작합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