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으면서 이런저런 위대한 인간들이 남긴 말들 찾아보곤 하는데 

아침 먹으면서 찾은, 디드로가 출전으로 되어 있는 이 말을 오늘의 인용할 양식으로 선택. 

덕불고 필유린. 그 말을 알고 했던 말일 수도? 





내가 인생을 어떻게 견뎠느냐고? 위대한 인간들을 보면서 견뎠다. 

니체의 이런 말에 완전히 공감하면서 견뎠던 대학원 시절. 인생사, 이 징그럽고 지겨운 것. 

슬퍼하고 분노하다가 '심지어 그들도, 그들에게도' 알게 되면 견딜만해지고 힘이 났었다. 디드로로 찾아보니 저런 말도 

찾아진다. "인생, 그것은 망상에 찬 희망에 치르는 대가." 앞뒤 문장들을 보고 싶다. 





실은 볼테르의 말이 아니라는데 

볼테르도 했음직한 말이고,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이면 누구든 하기가 어려운 말은 사실 아니니 

볼테르의 말로 여겨도 좋겠을 이 말. 인문학자를 판단할 때 특히 더 유용하지 않을까. 인문학의 생명이 

여기 있지 않나. 어떤 질문을 하는가. 혹은, 질문하는 능력 그 자체. 질문이 없고,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의 

질문에 대한 답도 아닌, 그런 인문학 논문들이 지금 이 순간 7892편쯤 쓰여지고 있지 않을까. (한숨) 


이건 특히 인문학 전공자들에게서 흔히 보는 "망상에 찬 희망"일수도 있는데

그들이 공부하는 "위대한 인간들" 덕분에, 덕불고 필유린 되는 일. 망상일 따름이라도 

무려 인생이 대가라면, 가질 가치가 있는 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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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로 쓸 때 question, 이것을 옮길 한국어 단어가 마땅치 않은 듯. 

파인만의 이 짧고 아름다운 문장, 어떻게 번역해야 좋을까. "질문할 수 없는 답보다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나는 택하겠다." 이렇게 한다면, "질문할 수 없는 답"은 "답, 그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할 수 없는 답"의 뜻으로 해석되고 그 답 자체를 의문에 부침.... 의 뜻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영어에선 question, answer, 이 두 단어가 둘 다 명사로도 동사로도 쓸 수 있어서 나올 수 있었던 문장. 언어와 사고가 갖는 관계는 아주 밀접하지 않나. 





"부당함이나 우매함의 관객이 되지 말 것. 

논쟁과 반박을 그 자체로 추구할 것. 

무덤에서 보낼 기나긴 침묵의 시간이 있으니." 


어제 집회에서 거의 1년만의 '재회'를 하고 나 포함 다섯 사람이 오늘 새벽까지 술 마셨는데 

7시 향해가는 지금, 이제서야 술이 좀 깨기 시작한다. 연남동의 "숨은 골목"이라는 술집, 안주가 특이하고 맛있었다. 메뉴는 평범한데 (부추전, 두부김치, 생선찜) 두부가 부쳐져서 나오는 두부김치의 그 두부가, 어떤 팬에 무슨 기름으로 어떻게 부쳤는가, 예사롭지 않던 두부. 부추전도 무슨 가루로 어떻게 반죽하여 어떤 팬에... 그알싶. 삐져나온 부추가 튀김 상태인 가장자리부터 가운데까지 남김없이 맛있던 전. 


술 덜 깬 상태에서 대멸치 손질하고 고등어 조림 만들면서 크리스토퍼 히친스 강연들을 들음. 

좋아하거나 꼭 읽어야겠다 생각한 적 없는 히친스. 그런데 오늘 강연들 들으면서, 이 사람 그만의 방식으로 

굉장히 좋은 사람이었단 생각이 듬. decent human being 이었어 그는. 밑도끝도없는 생각. 그가 지금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애석할 일로 여겨졌다. 트럼프 당선에 대해서 그가 건강히 살아있었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이성의 사용을 포기한 사람과 논쟁하는 건 

죽은 사람에게 약을 주는 일." 음 그렇다마다. 히친스의 영웅 명단에 계시다는 토마스 페인. 


"문학과 정치" 주제로 한 강연이 있는데 (하나가 아니고 여럿, 많다) 

오웰을 중심에 두지만 셸리도 비중있게 논의하는 강연, 듣다 보니 그게 누구든 이런 얘기 해주는 사람에게 

감사해야 한단 생각도 듬. 정말 이런 것도 (셸리에게서 문학과 정치는 어떻게 만나나, 자신의 관점에서 해설하기) 과거와 약속을 지키고 미래에 전통을 물려주는 일. 누구라도 그렇게 살면 좋겠지 않나. 과거와 약속을 지키고 미래에게 전통을 물려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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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여러 분리된 학제들과 그들의 연구 관심, 연구 방법들을 가리키는 포괄적 용어만이 아니다. 

인문학은 신념 조항이기도 하다. 이 말을 쓸 때마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선언한다. 우리는 인류(인간성)에 관심 있다고. 우리의 지적 윤리적 가치들이 인류가 가진 최선을 보호하고 향상한다고. 우리를 더 인간적이 되게 하는 지적 실천을 우리는 하고자 한다고. 


인문학을 공부함이 그 덕분에 사람을 좋은 사람이 되게 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리더들 중 인문학 전공자들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조지 오스본은 역사학에, 

보리스 존슨은 고전학에 오명을 주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주는 경고의 이야기들은, 인문학 학과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 사람들에겐 필요하지도 않다. 인문학 학과에서 시간을 보내면, 우리의 주제가 우리를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한다는 주장을 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인문학은 우릴 좋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인문학은 우릴 영원한 학생으로, 평생의 학습자로 만든다. 인문학은 우리가 

도전적 전제들에, 변화하는 문맥에 능동적으로 반응하게 만든다. 인문학은 우리가, 설득에 열려 있게 만든다. 

인문학은, 우릴 설득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높은 기준을 유지하면서, 설득에 열려 있게 만든다. 이것이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사라 처치웰이 "인문학의 미래" 주제로 한 강연에서 마지막으로 하는 말들이다. 

"The humanities is also an article of faith, an implicit declaration every time we use the term that we are interested in humanity." 특히 이 문장,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들. 듣고 적어두고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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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월 1일자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린 글. "내가 그린카드를 받은 날."

필자는 인도인, 파키스탄인 부모에게서 런던 태생인 Aatish Taseer. 

미국인 남자와 결혼하고 미국으로 입국하면서, 미국에서 동성결혼이 최근에야 인정되었기 때문에 

영주권 사기를 의심받지 않을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환대를 받음. "Welcome home, sir." 존 F. 케네디 공항의 이민담당 직원이 그의 영주권("그린카드") 보자 그에게 보낸 인사. "그리고 나는 미국식 환영의 그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도착한 이 곳은, 마침내 문서가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나는 아마 우리 시대의 가장 촌스러운 감정일, 미국을 향한 무한하고 유보없는 사랑에 압도되었다. And already I could feel the warmth of the American welcome. Here, at last, was a country where a document meant something! I was overcome by what must be one of the most unfashionable emotions of our time: boundless, unqualified love for America." 


이게 정말 우리 시대의 가장 촌스러운 감정일 것이긴 해서 

글 서두의 저런 대목만 보고도 더 이상 읽지 않을 독자가 적지 않겠지. 

그런데 글의 끝으로 가서, 감상적이고 교과서적일지라도 어쨌든 중요하고 감동적인 얘길 한다. 


"(*영주권 심사를 하던 흑인 여성의 친절함. 그를 이방인이 아니라 공동체 성원으로 포용함에 대한 얘기). 이것이 국가가 시민의 사랑을 얻는 법이다. 시민의 사랑을 얻는 국가는 시민들의 관계를 품위있게 한다. 그 국가는 시민들의 행복을 진지하게 여긴다. 그리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단 반의 기회라도 그들에게 주어진다면 인간은 자신의 더 나은 본성을 실현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 행동한다. This is how a country earns the love of its citizens: It ennobles their relationships; it takes seriously their happiness; it acts on the assumption that people are basically good and, if given half a chance, will realize their better natures. 


그 국가는 시민들의 관계를 품위있게 한다. 

그 국가는 시민들의 행복을 진지하게 여긴다. 

그 국가는......... : 미국은 '이게 내가 알았던 미국'이라며 이런 얘기 쓸 수 있는 사람들이 (그럴 수 없게 할 그 모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적지 않을 것이다. 문서가 통하는 나라! 이것도. 음. 어쨌든 여기에도 생각해볼 지점들 있지 않나. 누구에게든 단 반의 기회라도 주어 더 나은 본성을 실현하게 해야 한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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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찍은 것 아니고 구글 이미지에서 "눈오는 연희동"으로 검색. 

매일 산책하는 바로 그 길이다. 작년 12월인가 올해 1월인가 새벽에 나갔다가 보았던 

나무 가지들이 막 내리는 눈을 두껍게 그대로 이고 있고 노란 가로등 빛은 몽환적이고 그리하여 

"magic mountain" 되던 풍경. 이건 낮의 사진임에도 보면서 그 풍경 기억함.  


서울에서 여러 동네 살았던 건 아닌데 이 동네가 나는 참 좋고, 서울 산다면 언제나 (영원히?) 여기 살고 싶어진다. 이미 서재 포스트로도 여러 번 쓴 얘기. 무엇보다 산책하기가 아주 좋다는 점. 산책이 목적인 산책도 좋지만, 걸어서 뭐든 해결할 수 있다. 장보기, 담배사기 ㅜㅜ 술 사기. 세탁소 동사무소. walkability. 최강. 하긴 후자, 걸어서 해결함은 그게 안되는 곳이 한국엔 없겠지만. 새벽이나 저녁에 안전하고 조용한 곳에서 걸을 수 있다는 건, 예전 살던 동네에선 생각할 수 없던 일. 


그런데 여기 보태어 막강한 강점이 그것 아닌가. 광화문 접근 용이. 

집 내놓고 (집이 조금 더 넓고 부엌이 조금 더 좋았으면 이 집에서 계약 연장하면서 계속 살텐데, 그렇지 않아서 집에는 약간 불만이 있다) 내놓으면서 집의 장점으로 그것도 말하자고 생각해 봄. 집회에 바로 쉽게 갈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점 생각하지 않으며 연희동에 집 구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아, 10월 20일 근방엔 가장 큰 뉴스가 문단성폭력이었다. 그러다... 오늘에 이르고 

거의 한 달을, 책을 제대로 읽지도 글을 쓰지도 못하고 있음. 그냥 휴업이 되고 맘. 바슐라르는 어떻게 휴업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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