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자기 전 잠시 보았던 책은 이것이다. <철학자들의 싸움: 루소, 흄, 인간 이해의 한계>. 

1장의 끝에, 비몽사몽간에 웃게 만든 문장이 등장한다. In the end, we are shocked that philosophers are as thoughtless as the rest of us. 


이 문장이 있는 문단은: 

"철학은 이제 직업이 되었고, 철학을 "한다"는 건 물리학이나 심리학, 문학이나 통계학을 "한다" 할 때와 다르지 않은 게 되었다. 이 경향에 반대하는 비주류 고대철학 사학자 피에르 아도는 우리 시대에 철학이 관료들의 활동이 되었으며, 이 관료들에게 중요 과제란 그들 자신을 재생산하는 것임에 우려를 표한다: "to form other bureaucrats, rather than form man." 그는 고대 철학이 단지 이론적 담론에 불과하지 않고 삶의 기예이기도 하다고, 우리의 삶이 우리의 생각과 일치하도록 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논해 왔다. 알렉산더 니하머스도 비슷한 입장에서 글을 써왔다. 우리가 우리의 초-전문화 시대에 우리 시야 바깥으로 밀어내버린 중대한 문제들, 고대인들은 그 문제들을 알고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이론과 실천, 담론과 삶은 서로 영향을 끼친다. 사람들이 철학자가 되는 건, 그들이 최선의 인간 유형이 되고자 하며 또한 될 수 있기 때문, 인간이 살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와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는 직접 연결되는 문제들이다." 철학의 몰락에 대한 이런 근심들에 우리의 감수성은 반응하게 마련이다. 철학자가 전체주의 정권을 돕고 또한 그 정권에 (정신적) 안락도 제공할 수 있음을 알 때 우리는 충격을 받지 않는가. 철학자들이 우리만큼 생각 없다는 데 우리는 충격을 받지 않는가." 



밑줄 친 마지막 부분에 담긴 내용이 2장 이후 어떻게 반복, 변주될까 궁금하다. 

이 점과 관련해 이 저자들은 무슨 얘길 하고 싶었던 것이며, 하고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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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에서 Wittgenstein 쪽수들 참고해 찾아냈다. 읽은 기억이 있지만 찾지 못했던, 철학에서 해석의 오류에 대한 매기의 경험. 241-43쪽에 있다. 꽤 생각을 자극했던 대목임에도 아무 밑줄도 표시도 남겨져 있지 않음. 책 읽다가 조금이라도 내 편에서 반응이 있다면, 하다 못해 문장 근방에 빗금이라도. 기운이 있는 한은 그 반응의 일부라도 언어화하여 여백에 적어두기. 그러려고 하지만 이게 또 항상 되는 일이 아니다. 보는 책들 중엔 도서관 책들도 적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겠고. 이곳에서 산다는 건 무력감과 싸우는 일이라서도. 



한 문단 인용하면: 

이 모든 이유에서 나는 철학에서 2차 문헌들엔 거의 관심이 없었고 철학자 그들의 저술들을 읽고, 또 읽고 또 또 읽고 하는 쪽을 택했다. 당신이 철학자의 저술을 읽었고 그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싶다면, 그 저술에 대한 2차 문헌을 읽는 것보다 그 저술을 다시 읽는 쪽이 훨씬 더 도움이 된다. 내 경험은 그렇다. 논평들은 당신이 읽으며 놓쳤던 수많은 세부들이나 당신이 알 수 없었던 것에 당신이 주목하게 하겠지만, 그러나 이 경우 정말 중요한 건 세부가 아니다. 물론, 당신을 매혹한 무엇이 있을 때 당신은 그 무엇의 세부에도 매혹될 것이다. 또 당신이 어떤 특별한 연구를 하고 있거나 책을 출판하려는 계획이라면 세부에 통달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정황에서는 나도 2차 문헌들을 깊이 읽었다. 하지만 철학은, 큰 문제 큰 질문이 대단히 중요하고 그리하여 그 외의 것은 실상 그리 중요하지 않은 영역의 한 극단적 사례다. 2차 문헌과 보내는 시간은 얕은 물에서 첨벙대며 사는 삶이고, 위대한 철학자들 자신과 보내는 시간은 바다의 한계없는 그 깊이 속에서 사는 삶이다. 



이 문단 앞에선, 헤겔과 하이데거를 예로 들면서, 

어떤 경우엔 2차 문헌을 꼭 읽어야 하고, 아니 원저들이 아니라 2차 문헌"부터" 읽어야 한다는 얘기를 한다. 그들을 직접 읽을 때 전혀 이해할 수 없었는데 2차 문헌들을 읽으며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는 무수한 깨달음을 얻음. 그리고 자기 힘으로 그들을 읽고 다룰 수 있게 됨. 그러나 헤겔과 하이데거처럼 먼저 해석 작업들에서 도움을 얻어야만 그들에게 직접 갈 수 있을 철학자들의 경우에도, 그들을 직접 읽는 것은 전혀 다른 층위의 체험이라서 그것은 "금광에서 금을 캐내는 체험". 


이 문단 다음엔, 비트겐슈타인과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1세대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이 화제. 

그 연구자들의 몰이해는, 그들이 2차문헌부터 읽었거나 여하튼 비트겐슈타인을 읽기 전에 이미, 그들에게 오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얘길 한다. 어제 포스트 쓰면서 기억했던 것과는 약간 다른 얘기긴 하다. 


어쨌든 이런 얘기 (별 대단할 것은 없는) 읽으면서 생각이 자극됐던 건, 

내 경우엔 2차 문헌 읽으면서 그 저자 "수준" 판단할 수 있는 철학자, 아도르노. 혹은 바슐라르. 심지어 내게도 한심한 수준이 바로 알아보이는 연구들도 적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겠다.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해 생각해보고 싶던 몇 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철학한다는 건 무엇인가... 같은. 음.  


마틴 제이가 그가 쓴 아도르노 입문서 <아도르노>의 저자 서문에서, 지적 거장과의 만남은 내게 있던 기성관념들로부터 멀어짐, 그것들이 낯설어짐을 수반한다 같은 얘기 한다. 제이의 이 말에 대해선 뭐라 노트했을까 궁금해 찾아보니, 어떤 한국인 저자의 책을 읽고 나서 "그는 자기와의 대결은 거친 사람이지만 거장과의 대결은 안 한 사람이다. 거장과의 대결로 작은 것이 커지는, 성장하는 경험을 했던 이가 아니다." 같은 얘길 적어놓았다. 그런데 그러고보니, (내 말이 맞다는 건 아니고, 그와 별개로) 아 정말 그렇다... 지적 노쇠란 실은 애초 대단치 않았던 사람들에게 오는 건지도. 


*매기의 이 책은 허허실실. 그냥 심심파적으로. 

Direct contact with originality is an inexpressible experience. 이런 말도, 

좀 피로하고 아주 미미하지만 약파는 느낌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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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5 1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what beasts human beings really are.....  

듣는 혹은 읽는 순간 새겨져서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으며 

뜬금없이 무슨 판결처럼 튀어나오는 말. 이 구절도 그런 구절이었고 

이걸 어디서 읽었는지 혹은 들었는지는 알 수 없겠지... 라고 생각하다 

혹시 모르니 구글 검색 해보았다. 



조지 칼린이 Life is worth losing. 이 공연에서 했던 말인가 보았다. 

그러고 보니 십년 전쯤 칼린이 영웅이던 시절이 있었다. 이것저것 찾아보고 기록도 꽤 열심히 남김. 이런 걸 써두기도 했다. 



칼린만이, 진정 "제한 무"의 코미디. 또, 윤리적이다. 말콤 헤이던가, 유럽에서 유태인 박해의 역사를 쓰면서, 서문에서 이런 말 한다. "극히 희귀하게, 타고 나기를 그렇게 타고 났다고 볼 수밖에 없을 고귀한 품성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대부분 사람들은 주류가 세우는 편견(제도화된 잔인함)들을 나눠 갖고 실행하게 된다. 인종 편견, 당연히 예외 아니다." 십년 전이었다면, "극히 희귀"까진 아니지 않나? 는 생각부터 들었을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 저런 진실한 말을 서문에서 하는 그의 용기에 찬탄을 보내고 싶다는 반응. 정말이다. 미국 학자가 저런 말 하는 거, 별별 오만가지 오해를 무릅쓸 각오를 하고 해야 하는 말이니, 용기 필요했을 것이다. 여튼 말콤 헤이의 저런 말이 생각나게끔, 칼린의 유머와 농담엔 조금도 '제도화된 잔인함'의 흔적조차 없다. 그에게서 엄청난 영향 받았다는 빌 마어와 비교하면 더더욱. 빌 마어... 볼수록, 수상쩍은 패권주의. 와일드의 말대로 There is no sin, except stupidity. '멍청한' 인간만이 칼린의 공격 대상. 이 정도의 윤리, 이걸 일관되게 그리고 강력하게 갖는다는게 얼마나 어려운가 이젠 잘 아니까....



이런 엄청난 말들 속에서 등장했던 구절이었다: 

George Carlin: Human beings will do anything, anything. I am convinced. That's why when all those beheadings started in Iraq, it didn't bother me. A lot of people here were horrified, "Whaaaa, beheadings! Beheadings!" What, are you fucking surprised? Just one more form of extreme human behavior. Besides, who cares about some mercenary civilian contractor from Oklahoma who gets his head cut off? Fuck 'em. Hey Jack, you don't want to get your head cut off? Stay the fuck in Oklahoma. They ain't cuttin' off heads in Oklahoma, far as I know. But I do know this: you strap on a gun and go struttin' around some other man's country, you'd better be ready for some action, Jack. People are touchy about that sort of thing. And let me ask you this... this is a moral question, not rhetorical, I'm looking for the answer: what is the moral difference between cuttin' off one guy's head, or two, or three, or five, or ten - and dropping a big bomb on a hospital and killing a whole bunch of sick kids? Has anybody in authority given you an explanation of the difference? Now, in case you're wondering why I have a certain interest, or fascination let's call it, with torture and beheadings and all of those things I have mentioned, is because each of these items reminds me in life over and over again what beasts we human beings really are. When you get right down to it, human beings are nothing more than ordinary jungle beasts. Savages. No different from the Cro Magnon people who lived twenty five thousand years ago. No different. Our DNA hasn't changed substantially in a hundred thousand years. We're still operating out of the lower brain. The reptilian brain. Fight or flight. Kill or be killed. We like to think we've evolved and advanced because we can build a computer, fly an airplane, travel underwater, we can write a sonnet, paint a painting, compose an opera. But you know something? We're barely out of the jungle on this planet. Barely out of the fucking jungle. What we are, is semi-civilized beasts, with baseball caps and automatic weapons.



"인간이 어떤 야수인지 안다면 (                               )" 

괄호 채우기. 이것도 심지어 수업에서도; 해볼 수 있는 일. 인간혐오가 우리의 과제, 사명. 이런 답이 나오더라도. 나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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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에게. 


(.....................................................) 

잠 사이사이엔 메리메가 쓴 편지들을 읽었음. 

환멸과 무미함 -- 이라 해야할지 이걸 -- 의 기이한 조합을 보여주는 편지들이다. 

아주 지적이고 아주 잘 쓴 편지들인데 그럼에도 어딘가 이상하게도 회색인. 프랑스 사람들은 멜랑콜리한 민족이야. 그들에게 상상력이 없기 때문일까. 그들에게 상상력이 없고 그러니 (지적인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듯) 이 세계의 끔찍함 앞에 서 있는 자신에게 출구를 줄 수 없기 때문인 걸까? 프랑스 사람들에겐 어떤 건조한 절망 같은 게 있어. 영국인들에겐, 심지어 스위프트의 경우에도 없는 그것이. 스위프트라. 위대한 저자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여기 온 이래 헨리 제임스를 두 번이나 봤어. 그리고 막대하게 깊은 인상을 받았네. 물론, 오직 눈으로만 봤을 뿐이야. 그와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면! 두 번째로 봤을 땐 내가 그가 머무는 집 앞을 지나갈 때 창문으로 다가왔어. 이런 놀라운 일이! 아주 면밀하고 아주 근심도 많고 아주 중요한 헨리 제임스. 무한히 진중하고 예의바르게, 상대에게 만족을 주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상인같은 헨리 제임스. 지금 이 말에 조금이라도 진실이 있을까? 그의 소설들은 그 유머의 부재로 진정 탁월하단 생각이 그 후 내게 떠올랐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정확히 그 소설들을 그가 써야 했으며 그의 외모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정확히 그의 외모여야 한다는 그 점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만나 얘기해보면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재미있는 이야기와 인간의 삶에 관한 심오한 성찰로 가득 채워진 막대하게 긴 편지를 내게 써라. 

넌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인데, but will you? 편지지의 1/4 분량만이더라도 사막의 오아시스겠다. (*그녀 근황에 관한 몇 가지 구체적 질문들과 함께 편지가 끝남.)" 




리튼 스트래치가 버지니아 울프에게 쓴 편지. 1909년 1월 3일. 

두 사람이 20대 후반이던 때였다. 스물 일곱 (울프), 스물 아홉 (스트래치). 프랑스 사람들의 심성에 대해 고찰하다가 갑자기 헨리 제임스 봤다고 느낌표를 남용하는 편지. (실제론 두 개밖에 안되지만, 읽으면서 느낌으론 이십 개쯤 된다). 헨리 제임스는 정확히 헨리 제임스처럼 생겼다고, 쓰는 이 혼자 재밌어하며 썼을 것이 상상되는 편지. 


막대하게 긴 편지 쓰기는 이들의 우정에서 (우정이 긴 세월 유지되고 깊어지게 하는 데) 불가결했을 것이다. 

울프가 스트래치의 통찰력을 칭송하면서 "내 생각의 꼬리를 보여주면 바로 몸통을 보는 사람" 같은 말을 쓰기도 했는데, 다른 사람 정신의 "차원"을 그것의 표면, 얕은 곳에서 그것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밀하게 이해하는 일, 이런 것은 막대하게 긴 편지 쓰기같은 일을 수시로 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니체는 심지어 친한 친구와도 직접 만나기보다는 편지 쓰기를 애호했다" 같은 이해는 그냥 얕은 이해. 


*번역은, 지금 해보면서 그래도 나름 친구 사이의 편지로 자연스럽게 들릴 길을 찾아 --다체, --음체, --야체, 오가며 써보았는데 다 어색하긴 하다. 흐으 새삼, 한국에 이들같이 열정적으로 편지썼던 단 한 사례라도 있을까 (없겠지) 함. 게다가 남자와 여자. 어떤 언어든 쓰는 사람이 그걸 더 개인적으로, 더 실험적으로 쓸 때 다른 언어로 번역이 굉장히 어려워질텐데, 사적인 편지 일부일 따름이지만 사실 여기에도 그런 요소가 좀 있고, 그리고 한국어는 (영어와 비교하면) 자체 부자유한 면이, 제약이 있는 언어. 예를 들면 brilliant. 메리메의 편지에 대해 말하면서 "very 'brilliant' and very well-written." 여기서 brilliant는 지적으로 탁월한... 이 주된 의미. 그 의미와 어감에 꼭 대응할 한국어 어휘를 찾기가 쉽지 않기도 한데, 그보단 영어 어휘 brilliant처럼 유연하게 기본 의미를 언제나 유지하지만 조금씩 다른 의미들로 변신할 수 있는 그런 어휘가, 없다 뭐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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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매기의 <철학자의 고백>. 


목차 페이지 다음에 (이것은 헌사도, 제사도 아닌 것이. 그러나 그것들의 형태로) 경고가 나온다: 

"이 책은 철학, 그리고 철학사와 한 인간의 만남, 그 이야기를 통해 독자를 

철학과 철학사로 안내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아이디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책 속의 자전적 요소는 미디엄이지 메시지가 아니다." 


the autobiographical element is medium, not message. 

찾아보고 싶은 내용이 있어서 책을 꺼내 와선 이 문장 보고 다시 웃게 된다. 

책 사고 받아봤을 땐 이 대목에서 하트와 웃음이 동시에 터졌었다. 아 맘에 든다... 최고다. 그러고 읽기 시작하면서는 좀 빠르게 실망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저 문장만큼은 나도 적어도 열 번은 (변주하는 것도 감안해서) 말로도 하고 쓰고도 싶다. 지금 이 얘긴 미디엄이지 메시지가 아니에요. 


찾아보고 싶었던 내용은, 아마 비트겐슈타인에 본격 관심이 일던 무렵에 대한 회고였던 것같고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연구들을 보면서 놀라던 경험. 철학에서 거의 대부분의 연구들이 연구대상을 오해한다. 전적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떤 사상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내용은 전혀 이해되지 못하면서 그 사상에 대한 해석, 논평의 전통이 수립되는 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여기서는. : 대략 이런 얘길 하는 대목이 있었다고 기억하는데 지금 책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깊이 공감하면서 뭔가 노트를 남겼던 기억이 분명히 있어서, 검색해 보았으나 이것도 무결과. 


사실 위의 정반대도 진실일 것이다. (꼭 철학에서만이 아니라) 합당한 이해를 받으리라고 결코 기대할 수 없을 무엇이 합당 혹은 그 이상의 이해를 받고야 마는 일. 인류 정신의 생산인 한 인류 정신의 유산이 되는 일. 그래서 인류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는 일(도 실제로 종종...)


앞쪽의 예로 방금 생각나고 만 것이,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이 가사노동을 미화한다며, 

열내던 어떤 논문. 영어권에서 바슐라르 연구가 많지 않은데 많지 않은 가운데 눈에 띄는 연구들이 저런 방향이다. <물과 꿈>은 여성적 원소의 정복을 수행하는 가부장제. 바슐라르 = 전통적 철학자 = 가부장 편견. 김현이 거의 질투하며 공감했던 "독신자의 꿈"은 어디에? 


어쨌든 조금만 공부가 깊어져도 해석, 비평의 전통은 완강한 편견의 전통이기도 하다고 알아보이는 때가 적지 않을 것같고, 그래서 매기의 위와 같은 말에 순간 깊이 공감할 수도 있을 것같다. 편견을 이해로 교체하고 싶다면, 전통의 바깥에서, 대상과 내가 직접 많이, 깊이 만나길 택해야할 것: 이런 얘기로 이 글을 끝내고 싶었는데 이보단 더 잘 말하고 싶었으나 더 잘 말할 수 있을 길이 당장은 보이지 않아, 그럼 이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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