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마 모랄리아>에서 2번 단장이 이런 문장들로 끝난다. 

"가족이 소멸하면서, 부르주아지의 가장 실행력 있는 대행체만이 아니라 

저항도 사라진다. 그 저항은 개인을 억압하기도 했지만 또한 개인에게 힘을 주었던 저항, 어쩌면 

개인을 생산했던 저항이다. 가족의 종말은 저항하는 힘을 마비시킨다. 현재 부상하는 집단주의 질서는 

무계급 사회의 조롱이다. 그 질서는 부르주아와 함께 유토피아도 청산하며, 그 유토피아는 한때 어머니의 

사랑에서 힘을 길었다." 


the Utopia that once drew sustenance from motherly love. 

이런 구절에서 "motherly love" 같은 표현엔 온당히 의심의 시선을 보내야할 것이긴 하다. 

이런 구절만이 아니라, 아도르노가 하고 있는 가족의 옹호 자체에 (전면적인 건 아니라도) 유보적일 수밖에 없는 독자들, 연구자들 있을 것이고. 그러나 기억해야할 건, 아도르노는 정말 "해피 패밀리" 출신이라는 것. 그의 가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누군가 그의 가족을 발명해야....... : 그런 가족이라는 것. 사실 그래서 위의 문장들의 경우, 그것들이 말하는 진실의 예가 그 자신이다. 그를 강한 사람이 되게 했고, 어쩌면 그를 생산했던 게 그의 가족. 그의 저항력의 원천이 그의 가족.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수업에서 학생에게도 들었던 "행복한 결혼은 없다, 모순 형용이다". 

행복한 결혼이 드물다면, 행복한 가족은? 


좀 전, 맥주 마시면서 조금만 더 채점하고 자야겠다며 맥주 사서 들고 집으로 오는데 

(아빠 ))))))  (아빠)))))))  (아빠)))))) : 골목에서 여자아이가 애타게 아빠를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침. 

곧 아빠 등장(등판?). 엄마와 그 아이의 자매도 등장. 그리고 그 4인 가족은 손에 손을 잡고 웃고 서로를 부르며 나를 지나갔다. 


지금처럼 바로 집근처 길들 산책하기 전에는 서대문의 안산에 거의 매일 다녔었는데 

어느 날 산에서, 저런 다정한 부자도 있나 놀라웠던 아버지와 아들을 봄. 아들은 아마 9세, 10세. 이제 도저히 "아기"일 

수는 없으나 그래도 조금 아기같은 때. 아버지는 한 삼십대 중후반. 그들의 놀라웠던 다정함을 글로 재연하기는, 지금은 어렵다 (맥주 마시기 시작. 시간도 없고). 하여튼 나는, 이것만으로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도시전설에나 등장하는 줄 알았던 부자관계, 가족도 세상엔 있는 게 분명하다며 놀람과 함께 하산. 그런데 그게 처음이었을 뿐이고 산에 다니던 세월 동안 자주는 아니어도 꾸준히 그런 부자와 부녀들을 봄. 


저항력의 본진, 가족을 지킵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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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집회는 못 가고 

고통 속에 채점하고 있는 중이다. 

한 학기에 퀴즈가 네 번인데, 세 반. 열두 번. 

마지막 퀴즈가 다음 주, 다다음 주에 있고 그것은 채점해 돌려주지 않아도 덜 미안할 듯. 

그 다음 주면 기말시험이고 종강이다. 종강 전, 앞의 세 번 퀴즈는 채점해 돌려주어야 마음이 편하겠어서 

(내 마음 편함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고 거의 늘 그래왔지만 이번 학기는 10월말부터 

지금까지는 참으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 보통은 수업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고 퀴즈는 무얼 무얼 보았고 

남은 것은 무엇이고, 이런 게 머리 속에 분명히 있는데 이번 학기엔 돌아서면 삭제되었다. 순서상 앞뒤도 

헷갈리고 요일을 헷갈리는 건 물론이고) 아무튼 참 힘들고 더딘데 하고 있는 중. 


새누리당 깃발이 찢기는 위의 장면. 

강렬하고 감동적이지 않나. ㅜㅜ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바로 

덜 그래지는 것 같다만. 





Scrubs의 정말 놀라운 점 하나가 

Dr. Cox를 통해, 남성우월주의 혹은 성차별주의 혹은 마초이즘 

거기에도 구제될 가치 있는 무엇이 있었다 생각하게 한다는 것. 

그가 JD를 여자 이름으로 부르고, 조롱이 담기기도 하지만 절실하게, 정언명령으로 "남자가 되어라 be a man, would you be a man?" 요구하는 일. 이것을, 저 위의 것들 모두의 극복이 되게 한다는 것. 


내가 Scrubs의 세계에 산다면 나도 그럴 것 같다. 그 말을 하고 싶고 할 수 있을 때마다 할 것 같다. Be a man. 

어쨌든 이 드라마의 이 면에 대하여, 만일 이 시대의 아도르노가 있고 그 아도르노는 tv도 열광하며 보는 아도르노라면 

아주 심오하고 재미있는 분석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절대 역부족. 


얼마 전 어느 날 수업에서 

지금 한국에서 조롱과 혐오의 문화, 이것이 우릴 연대하지 못하게 한다는 학생 의견 듣고 나서 

그렇다면 지금 주말마다 일어나는 일은? : 이런 반문한 적이 있다. 그 학생은 길게 다시 자기 입장을 설명. 

그 에너지가 공격에, 권력을 향한 공격에도 동원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들 사이를 견고히 잇는 힘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속으로 했던 생각은, 혐오와 조롱 여기에도 분명 구제될 가치 있는 무엇이 있다. 

이미 구제되는 중인지도 모르고. ;; 하여튼. 더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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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unted: On Ghosts, Witches, Vampires, Zombies, and Other Monsters of the Natural and Supernatural Worlds (2016). 부제까지 하면 자꾸 길어지는 제목의 이 책. 올해 10월 예일 출판부 간. 저자인 레오 브로디(Leo Braudy)는 남가주 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남가주 이 말 좋지 않나. 남양주는 좋지 않은데) 영문과 교수라고 한다. 18세기가 그의 주 연구 관심. 호러물에도 깊은 관심이 있다고. 


LARB 최근 업로드에서 그를 게스트로 저 책을 논의하던데 

호스트가 "당신의 이 책에 굉장한 인용문이 있다. 우리가 공포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이유 

아니 그것을 넘어서 우리가 예술을 필요로 하는 이유, 그게 무엇인가 이보다 더 명료히 내게 말해 준 문장은 

없었다. 에드워드 영의 말인데, "우리는 비참하며 동시에 무사하기를 원한다. We love to be at once miserable and unhurt"라는 문장이다. 에드워드 영, 사실 이 사람이 누군지도 잘 모르겠는데 그와 이 문장에 대해 말해주기 바람." : 이런 얘기를 했다. 


나도 몰랐던 사람 에드워드 영은 18세기의 영국 시인. Night-Thoughts 제목의 시집을 썼고 

그 시집의 화보를 윌리엄 블레이크가 그렸다 한다. 한편 사상가, 미학자이기도 해서, "독창성 originality"에 

대해 쓰기도 했다고. 


어쨌든 그의 말, We love to be at once miserable and unhurt. 

호스트는 진정 이 말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았고 그래서 그녀가 읽어주기 전 

나도 두둥.. 어떤 위대한 말이 나올까 기대햇으나, 기대에 많이 못 미친 허허실실. 

그런가 하면 새삼 "영어 어휘들에 대하여" 잠시 생각하게도 되었다. miserable and unhurt. 

영어 어휘들은 그 의미가 모호할 때 (의미의 공간이 넓을 때, 그 공간이 크게 확장될 수 있을 때) 

바로 그 덕분에, 정확한 의미를 전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생각하는데, 저 두 단어도 그 예.  




bbc radio4에서 하는 In Our Time. 

영국의 인문학 전공 대학교수들은 다 한번씩은 여기 출연하지 않았을까. 

Entitled Opinions와 비교하면 출연자들의 개성을 막는 편이라 (문화의 "공식" 채널 같은 느낌) 

교과서적으로 진행되고 내용도 그럴 때가 많다. 그래도 감사하며 듣는다. 


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소크라테스의 이 말을 중심에 두고 얘기하는데 

끝으로 가서 게스트 중 한 사람이, 소설과 철학(소설의 철학)에 대해 제인 오스틴과 <오만과 편견>을 예로 든다. 

"오스틴은 뛰어난 철학자였어요"라자 그를 제외한 게스트 전부가 그게 아니라고, 그렇게까지 말할 수는 없겠다고 

와르르 이의를 표함. (그러게, 문학과 철학(문학의 철학) 이 방향으로 연구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오스틴 작품의 철학은 지금 어떻게 이해되고 있을까). 이의에 맞서 그가 하는 말이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는, 도덕적 인식론의 실패에 관한 좋은 사례들을 제공합니다. 인간과 인격의 판단에서........." 


failure in moral epistemology. 도덕적 인식론. 도덕적 인식론의 실패. 

이 구절을 오늘의 구절로. 역사는 역사 철학이어야 하고, 문학 연구는 문학의 철학 연구여야 한다... 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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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지성과 지능의 구분이 있다. intellect vs. intelligence. 

지능은 인간 정신의 도구적 차원. 계산과 조작의 차원. 지성은 (더 깊이 질문하고 탐구하는) 성찰, 상상의 차원. 


이건 아도르노에게도 아주 중요한 주제였고 

흔히 지성(똑똑함)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 실은 그게 아니고 

흔히 멍청함으로 여겨지는 것이 실은 지성이고... 같은 얘기를 여러 곳에서 한다. 망설임이 지성의 표지다. 이런 얘기도 하는데 출전은 아마 <미니마 모랄리아> 아니면 <계몽의 변증법>. 망설임에 해당했던 영어 단어는 hesitate (hesitation). 


모더니즘은 (특히 <율리시스>나 <파도>, <피네건의 경야> 같은 '본격' 모더니즘은) 

읽기의 속도에서 일어난 혁명. 독자가 읽고 이해하기 위해 들여야할 시간, 그 시간이 얼마나 늘여질 수 있나 실험하기. 

누가 누가 더 그 시간을 늘리나 경쟁하기. 그런 거였단 생각을 한 적이 있고, 살면서 내가 해 본 '독창적' 생각.... 에 이것 속한다면서 은밀히 기뻐한 적도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기 진실이 있긴 있다 쪽이기도 하다. 모더니스트로 알려진 누구든, 빨리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입장이 이렇다보니 

빨리 읽고 많이 기억한다가 자랑인 해롤드 블룸을 보면서 

좀 우습기도 했다. 진짜의 지성은, 늘리기에 있어요. 그걸 왜 모르세요. 


김기춘에 대해서 박영수 특별검사가 

한때 그가 검찰총장이어서 모시는 사이이기도 했고 매우 논리적인 사람이라 조금은 걱정이 된다.. 

같은 얘기 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김기춘은 정말 "지능"의 끝판왕일텐데 (지성은 완전히 부재하면서) 

이런 사람은 어떻게 감당해야하는 걸까,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맞서야 하나. 알고 싶어지고, 오직 김기춘이 

패배만을 하는 특검이고 그 결과를 보면서 즐겁고 웃게 되길 바라봄. 


흐으. 김기춘이 아니라 지성 vs. 지능 관련 딴 더 철학적 얘길 쓰려고 했던 것 같은데 

맥주가 다 마셔가고 내일엔 내일의 포스트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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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an 2016-12-02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능과 지성의 구분이 인상적이네요. 저는 평소에 공부 잘하는 것과 똑똑한것은 다를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렇게 있어보이게 설명할 수 있는거 였네요~^^

몰리 2016-12-03 09:05   좋아요 1 | URL
정말, 책읽기는
내 생각에 더 좋은 옷 입혀주기 위해서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
 



블룸의 The Western Canon 이미지 검색을 해보니 

이탈리아어 (짐작인데 맞겠죠) 판 이미지도 뜬다. 영어판 표지는 

내 보잘것없는 미감에도 추하게 느껴지는 표지. 영어판 표지에 비하면 

이 이탈리어판 표지가 103배쯤 우월하다... 고 생각하긴 했으나, 조금 더 들여다보니 

영어판 표지도 아마 실제 의도와 달리 자기 희화화, 조롱하듯 보이지만 이 표지도 그렇게 보인다.  

정전은 유적이 아닌가? 그러는 것 같은. 




이것이 추한 영어판, 아마 초판 표지. 

더 찾아보니 다른 표지로도 나왔다. 




아래 포스트에 올린 인터뷰의 끝 부분에서 해롤드 블룸이 뉴트 깅그리치와 그가 강력히 대변하는 

미국의 몰락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한다. 뉴트 깅그리치. 한때 거물 정치인이었던 것 같긴 한데 "깅그리치가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그리고 재선에도 성공한다면 어떤 세계가 우리에게 닥쳐올지 나는 상상도 못하겠다" 같은 얘길 블룸이 하는 걸 들으니, 등장 인물들이 바뀔 뿐 세계는 영원히 같았다..... 가 차라리 더 맞는 거 아냐? Nothing ever stays the same 아닌 것 같다.  


깅그리치와 그의 정신적 (정신.. 이라는 말로 그들의 부패에 품위를 부여해선 안되겠지만 한 번만) 

형제들, 하여튼 그의 동류들을 "끔찍한 도덕적 백치들 hideous moral imbeciles"이라 부르면서, 그들이 셰익스피어를 읽었다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쓰면서 웃게 된다) 지금의 그들과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기승전셰익스피어. 

가끔, 기승전단테. 


그런데 이것, 답이 없다며 그만 생각하지는 말아야할 문제. 그렇지 않나. 

도덕적 백치들을 어찌할 것이냐. 도덕적 백치들이 덜 나오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나는 셰익스피어든 단테든 혹은 아도르노든 

천천히 깊이, 할 수 있는 한 천천히 깊이 읽고 

그러면서 아주 많이 토론하고 쓰기. 이것이 인간을 더 윤리적이 되게 한다고 

조금 전 맥주 사오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믿어 봄. 믿음. 윗점은 '천천히'에 찍혀야 한다. 

하루에 세 줄. 한 번의 수업에서 세 줄 혹은 여섯 줄까지. 모든 문장에, 그 문장과 함께 혹은 그 문장에 맞서 생각해야만 답을 쓸 수 있는 질문을 주고. 모두의 답을 공유하고, 답들을 연결하고 확장하면서. 


바슐라르는 이미지 하나를 놓고 한 학기 수업을 할 수 있었다는 얘기를 

어떤 바슐라르 연구서가 전해주기도 한다. 그 정도 (정말로, 이미지 하나로 한 학기 수업) 하려면 

선생이 바슐라르여야 하지만, 일반적인 '진도'처럼 보이면서 실은 아주 느리고 깊게 읽기는 일반적인 

선생들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수업을 원하는 학생이, 없다시피일까. 나만 원하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여튼 나라면, <계몽의 변증법>을 문장 단위로 답해야할 질문과 함께 읽는다면 좋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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