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색(영어 단어는 questioning으로 선택해 보자. doubt와 의미가 조금 겹치게끔)은 

인간의(나든, 남이든) 성장을 돕지만, 의심은 그러지 않지 않나. 나를 탐색하게 하는 힘과 

나를 의심하게 하는 힘은 구분해야 하는 것 같다. 내게든 다른 사람들에게든, 탐색을 요청해야지 

의심을 요청해선 안되는 것 같고. 


7시 즈음 학교에 도착했는데 

그 시각에 아직도 캄캄(까진 아니면, 컴컴). 지난 주 수요일만 해도 아니지 않았나? 했더니 수요일 그 시각엔 지하철에 있었던 것이었음. 매일 일단 인용할 양식부터. 



*그런가 하면 링클레이터가 <힘에의 의지>에서 인용해 Slacker에서 썼던 그 문장들: 

진짜 전사가 넘어야할 최초의 장애물: "내가 아끼고 믿는 인간들을 향해 빈다. 그들에게 고통이, 버림받음이,

질병이, 냉대가, 모욕이 있기를. 그들에게 심오한 자기-혐오가 남의 일이 아니기를.

그들이 자기-불신이라는 고문과 패배라는 비참에 친숙하기를. 그들을 향한 연민은 나의 몫이 아니다.

오늘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기준이, 그가 버텼는가이므로."

 

The first hurdle for a true warrior: "To those humans in whom I have faith, I wish suffering, being forsaken,

sickness, maltreatment, humiliation. I wish that they should not remain unfamiliar with profound self-contempt,

the torture of self-mistrust, and the misery of the vanquished. I have no pity for them because I wish them the only

thing that can prove today whether one is worth anything or not: that one endures."


여기서 니체가 self-doubt를 일종의 미덕으로 제시하는 거 아니었나 해서 정확히는 어떤 단어였나 찾아보니 

self-mistrust. 자기-의심과 자기-불신. mistrust에 해당하는 독어단어는 영어로는 self-doubt에 쓰는 doubt의 

뜻이기도 해서, 니체 문장에서 저 말은 self-doubt로 바꾸어도 아무 차이 없을 수도 있을 듯. 그렇긴 한데, 그렇다 해도 플라스가 말하는 자기 의심과 니체가 저 문장들에서 말하는 그것은 


작더라도 중요하게 다를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슈로딩어와 양자혁명의 짧은 (짧고 어렵지 않은) 전기. 

이 책 앞부분에, 슈로딩어의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하면서 

그가 일찌감치 기록광이었다던가, 나중 일기도 꽤 오래 방대하게 썼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 쪽으로 소질이 대단했다 : 이런 얘기 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서너살 무렵 글을 배우기도 전부터 "구술로" (8살 정도 나이차, 누나뻘인 막내이모가 같은 집에서 살았는데 이모에게) 일기를 썼으며, 그 이모가 기록해 남겨둔 아기 슈로딩어의 어느 날 일기에 따르면: "오늘 저녁은 이모가 해준 걸로 먹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 전부를 같이 얘기했다." 


자기 전에 뭘 하나라도 더 쓰고 자고 싶어져서 뭘 쓰나 하다가 

저 책에서 정말 인상적인, 잊기 힘든 저 대목 인용하고 자려던 참인데 

책이 찾아지지 않는다. (한숨). 그래서, 기억하는 만큼만. 


두번째 문장이 영어로, And we talked all about the world. 

저것이었을 것이다. "all" 이 작은 한 단어가 알게 하는 아기 슈로딩어의 비범함. 

주제 탐색력. 집중력. 몰입력. 이런 등등의 면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학원 가서 석사 1년차일 때 

영화도 중요하게 포함된 20세기 미국문학 수업 듣고 

히치콕과 What Lies Beneath, 주제로 기말 페이퍼를 썼다. 

Psycho만이 아니라 Vertigo, Rear Window 기타 히치콕의 걸작들을 

로버트 저멕키스가 차용하고 오마주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나마나한(그래서, 하지말아야할) 소리였을 텐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어려웠던 당시 내게, 선택의 여지가 얼마나 있었으랴. 하여튼 쓰는 나 자신은 신기해 

하면서 (Psycho에서 버나드 허먼의 음악, Saul Bass의 타이틀 디자인 이런 것도 시대보정하면, 혹은 하지 않아도 

얼마나 획기적인가........ 걸작걸작) 좋아하며 썼다. 


그리고 담당 교수가, 페이퍼에 붙인 논평에서 들려주던 말: 

"네가 여기 쓴 내용 거의 전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내용이다. 버나드 허먼. 사울 배스. 히치콕이고 뭐고. 등등. 

모두가 안다." 


이게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 

저멕키스의 What Lies Beneath이 히치콕 차용, 오마주 함은 

히치콕을 보았고 그 영화를 본다면 (보지 않아도. 영화 포스터부터가 강력히) 몰라볼 수 없는 것이긴 한데

몰라볼 수 없든 말든 난 그걸 글로 쓰... 려고 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은데? : 이런 이상함. 


어쨌든 이 일. ㅋㅋㅋㅋㅋㅋ 혼자 기억하고 웃게 되는 일이 지금도 있다. 

너 왜 세상 모르는 사람 없는 일을 혼자 흥분해 쓰고 그래. 너만 몰랐다. 너만 몰랐다고. 


두고두고 생각할 점이 있긴 하다. 

어느 지점부터, 이것은 말해진 바 없는 것이라 (혹은 충분히 말해지지 않은 것이라, 다시) 말할 가치 있다는 

판단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 없다 해서 말할 가치도 없는 것인지. 


히치콕은 지금은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그의 영화 보고 싶어지는 때도 거의 없지만 

춥고 흐리고 하늘이 무거운 날, Dial M for Murder 이런 영화가 

집안에서 상영 중이면, 뜨겁게 달군 방바닥으로 이불을 들치고 들어가 

반쯤은 열심히 딴 생각하고 반쯤은 열심히 히치콕의 장인정신에 감탄하면서 

본담 좋겠기도 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곰곰생각하는발 2016-12-04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 바스, 타이틀 디자인은 확실히 예술적이죠.. 타이포그라피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장인입니다..ㅎㅎ

몰리 2016-12-04 17:12   좋아요 0 | URL
Psycho 오프닝은
여러 번 봐도 볼 때마다 짜릿하기도 합니다. 당시엔 정말 신선했을 거에요.

모두가 알고 있고. ;;
 



이 책도 좋은 책이다. 

읽은 게 아니고, 독해가 아니라 해독, 판독했던 책임에도. 온라인 사전이 아니라 

하드카피 사전을 써야 했다면, 사전이 닳아가는 게 보였을지도. 불어 문법이 중급 정도 되나 

문장 속 모든 어휘의 의미를 알아도 문장으로 완성해 이해할 수 없는 경우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래도 한참 

오래 들여다보고 궁리하다보면, 문장이 되기도 했다. 사실 이런 게 외국어 공부의 중요한 재미 아닌가. 어려웠던 문장들이 

이해되는 일. 


인문학은 

이미 있는 진실을 말할 자격을 얻어가는 과정. 그리고 윗점은 '자격'에 찍어야 한다. 

그렇다 생각한 적 있는데, "나는 공부하다 동사의 주어에 불과하다"는 바슐라르 말, 이 말을 할 

자격은 내게 아직 없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씀. 이것이 오늘의 인용할 양식입니다. 



오픈사전new

자료제공
동아출판 프라임 불한사전
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원 새한불 사전
민중서림 엣센스 한불사전



네이버 불어 사전에서 단어장 기능을 13년부터 쓰고 있는데 

15년엔 4천개가 넘는 단어를 기록했지만 올핸 그 10분의 1. 

해가 가기 전에 적어도 네자리 수를 넘겨두어야 겠다고 작정하고 

막 아무 단어나 찾아보고 입력하기. 이 (이런 쓸데없는) 일에도 착수했다. 

불어 책을 옆에 세워두고 계속 단어를 찾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몰아서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눈이 조금 트인 느낌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2번 단장이 이런 문장들로 끝난다. 

"가족이 소멸하면서, 부르주아지의 가장 실행력 있는 대행체만이 아니라 

저항도 사라진다. 그 저항은 개인을 억압하기도 했지만 또한 개인에게 힘을 주었던 저항, 어쩌면 

개인을 생산했던 저항이다. 가족의 종말은 저항하는 힘을 마비시킨다. 현재 부상하는 집단주의 질서는 

무계급 사회의 조롱이다. 그 질서는 부르주아와 함께 유토피아도 청산하며, 그 유토피아는 한때 어머니의 

사랑에서 힘을 길었다." 


the Utopia that once drew sustenance from motherly love. 

이런 구절에서 "motherly love" 같은 표현엔 온당히 의심의 시선을 보내야할 것이긴 하다. 

이런 구절만이 아니라, 아도르노가 하고 있는 가족의 옹호 자체에 (전면적인 건 아니라도) 유보적일 수밖에 없는 독자들, 연구자들 있을 것이고. 그러나 기억해야할 건, 아도르노는 정말 "해피 패밀리" 출신이라는 것. 그의 가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누군가 그의 가족을 발명해야....... : 그런 가족이라는 것. 사실 그래서 위의 문장들의 경우, 그것들이 말하는 진실의 예가 그 자신이다. 그를 강한 사람이 되게 했고, 어쩌면 그를 생산했던 게 그의 가족. 그의 저항력의 원천이 그의 가족.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수업에서 학생에게도 들었던 "행복한 결혼은 없다, 모순 형용이다". 

행복한 결혼이 드물다면, 행복한 가족은? 


좀 전, 맥주 마시면서 조금만 더 채점하고 자야겠다며 맥주 사서 들고 집으로 오는데 

(아빠 ))))))  (아빠)))))))  (아빠)))))) : 골목에서 여자아이가 애타게 아빠를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침. 

곧 아빠 등장(등판?). 엄마와 그 아이의 자매도 등장. 그리고 그 4인 가족은 손에 손을 잡고 웃고 서로를 부르며 나를 지나갔다. 


지금처럼 바로 집근처 길들 산책하기 전에는 서대문의 안산에 거의 매일 다녔었는데 

어느 날 산에서, 저런 다정한 부자도 있나 놀라웠던 아버지와 아들을 봄. 아들은 아마 9세, 10세. 이제 도저히 "아기"일 

수는 없으나 그래도 조금 아기같은 때. 아버지는 한 삼십대 중후반. 그들의 놀라웠던 다정함을 글로 재연하기는, 지금은 어렵다 (맥주 마시기 시작. 시간도 없고). 하여튼 나는, 이것만으로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도시전설에나 등장하는 줄 알았던 부자관계, 가족도 세상엔 있는 게 분명하다며 놀람과 함께 하산. 그런데 그게 처음이었을 뿐이고 산에 다니던 세월 동안 자주는 아니어도 꾸준히 그런 부자와 부녀들을 봄. 


저항력의 본진, 가족을 지킵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