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제작된 BBC 3부작이라는데, 

맑스, 니체, 프로이트. 이 세 사람 다루고 있다. 

어제 발견해서 니체 편은 이미 몇 번, 맑스와 프로이트 편도 

집에서 고추잎 다듬으면서, 청소나 정리하면서 들음. 


그런데 genius, 이 말도 일종의 나름의 컴백을 하는 듯. 

스탠포드 불문과의 프루스트 전문가 Josh Landy는 한 7년전쯤 인터뷰에서 

"이젠 가질 수 없는 믿음일 천재에 대한 믿음이 내겐 있어요" 이런 말 하기도 한다. 

08년엔 아도르노 전기가 Adorno: One Last Genius, 이런 제목으로 나오기도 했는데 

원저는 독어고 03년에 나온 독어판도 (지금 책 꺼내서 확인해 봄) 같은 제목이다. Adorno: Ein Letztes Genie. 

BBC의 이 3부작 제목에서는, 복수형으로 Geniuses라고 썼다면 말이 거추장스러워지기도 하고 (이 3인을 향한) 영웅숭배, 재능의 물신화... 같은 것이 됐겠지만 단수형으로 쓰면, 이게 꼭 "천재"만이 아니라 "정신"이기도 하지 않나? 어원상 그렇고 특히 독어에서는 영어보다 더 그런 용례가 있는 어휘 아닌가 한다. <미학이론> 독어판과 같이 보던 때 (하루 몇 줄만 보니까 가능) 몇 번 그런 경우 있었던 듯. 어쨌든 이 시리즈의 제목을 보니, 이 말은 그러자고 해서 그만 쓰게 될 어휘는 당연 아니라는 생각이 듬. 그러기엔 지나치게 모호하고 신비한 의미가 있다. 


한 20분 지점에서 니체의 실스마리아 시기가 시작하는데 

진행자에 따르면 니체는 실스마리아와 첫눈에 사랑에 빠졌고, 삶을 최고로 긍정하는 그의 아이디어들 대부분이 실스마리아의 극히 아름다운 풍경들 안에서 얻어졌다. 


실스마리아... 뿐 아니라 유럽에 

가고 싶어짐. 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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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now that he's been put away, you're going to face your own demons. 

And sweetheart, they are legion. 


브렌다 모친 마가렛. 식스핏언더에서 제일 좋았던 조연. 언제나 도발적인 망가진 여자. 

남편의 새여자 잡으러 가면서 가기 싫다는 브렌다를 동행하고, 남편의 새여자가 나오길 기다리다 차 안에서  

딸과 언쟁한다. 브렌다가 마침내 그와 정착할지도 모르는 한 남자(네이트)를 만났음을 질투하면서. 브렌다에게, 네가 네이트와 어떤 얼마나 "모범"인 관계라 네가 생각하느냐와 상관없이 나와 네 아버지의 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다.... 며 극딜(?)이 시작하고. 그리고 끝내는 딸에게 뺨을 (제대로) 맞는데 뺨맞기 전의 대사가 위의 대사. he는 브렌다 동생 빌리. "너는 빌리 유모로 32년을 살았어. 이제 빌리가 정신병원으로 가버렸으니, 넌 너의 악령을 봐야할 거야...." 


악령. 

오늘 아침엔 마가렛이 말한 바의 "악령"을 잠시 생각함. 

인생의 전부는 아니어도 적어도 한 6할? 은 악령과의 싸움 아닌지? 

인생에서 (너라는 인간에게서) 무엇을 만들어내느냐 마느냐, 너의 인생을 무엇으로 만드느냐 마느냐 여부는 

악령과의 싸움에 달려있지 않은지. 어떻게 싸우느냐, 어떻게 이겼느냐 혹은 졌느냐.


브렌다와 빌리는 부모에 의해 망가진 인물들이다. 

둘 다 정신과 의사인 부모가 젊어선 히피들이었고 결혼하고서도 적극적으로 프리섹스를 실천함. 

일단 부모의 (자식에게도 과시하는) 성생활에 의해 브렌다, 빌리 남매가 망가지고 또 (미국에선 그런 클리셰가 있다지만) 정신과 의사들이 자식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mind-fucking에 의해. 브렌다는 어려서부터 남동생 빌리를 그런 부모에게서 보호하고자 하고 빌리 때문에 대학도 (예일대에 합격하지만) 포기하고 빌리를 돌봐줌. 이것이 모친에 따르면 "넌 걔의 유모였어, 32년 내내". 


어떤 에피에선 거의 회복불가로 망가진 (심신 모두) 빌리 앞에서, 

브렌다가 목이 메고 눈물을 글썽이며 They did a real number on you. 이러는 장면 있는데, 

장면도 좋은 장면이고, 저 표현도 참 좋은 표현. do a number on (something, someone). 이런 표현들에 영어의 매력이 있다... 고 수업에서 말하면 별로 설득에 성공하지 못하지만. 


여하튼, 할 수만 있다면 매일 새벽에 일어나고 한 시간은 땀나게 운동하기. 

악령에 맞서는 방법으로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드물 것임에 대해 (새삼스럽지도 않다만) 또 생각했다. 

근력운동을 강화해야해. 악령은 근력으로. 발음은 좀 어렵지만, 이것이 진리다. 악령은 근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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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지금까지 내가 가능할 거라 생각한 적 없는 무엇을 미국은 

아무도 꺾을 수 없을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invincible" 이 대목에서 뭐라 해얄지). 

중간 계급이 국가를 통치할 수 있다는 것. 그들의 작은 열정, 미완인 교육, 상스러운 습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실용적이랄 어떤 지성을 제공할 수 있으며, 그거면 족한 거였다. 


America demonstrates one thing invincibly that I have doubted up to now; that the middle class can govern a state. Despite their small passions, their incomplete education, their vulgar habits, they can obviously provide a practical sort of intelligence and that turns out to be enough." 





Writer's Almanac 팟캐스트에서 인용하는 걸 들으며 공감했다. 

심지어 (인구내 박사학위소지자 비율로 30위 안에 들 대학타운이라 해도) 캠퍼스 바깥이면 바로 

"작은 열정, 미완인 교육, 상스런 습관". 그러지 않았나? 이것들이 꼭 나쁜 뜻으로가 아니라 독특하게 미국적 방식으로 이런 면면들 있지 않았나. 왜 이리 정확하게 들리지? 그런가 하면 practical sort of intelligence 이것도. 뭘 말하는지 나도 그걸 본 거 같았다. 심지어 개신교 복음주의 광신도들이 아주 많은 도시라 해도, 뭔가 생활의 실제적 면들은 주로 늘 합리적이고 편리하단. 신앙은 오직 정신의 (정신에서도 신앙 생활 담당 부분의) 협소함에만 기여함. 


있을 땐 욕하다가 떠난 다음 칭송하기. 

있을 땐 거의 매일 불평했다. 여긴 구름도 독을 (광신의) 품고 있으며, 그 독이 모두를 적시고 있어. 이런 등등. 

그런가 하면 얼마 전엔 집에 오면서, 개인이 개인에게 개인으로 하는 존중.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어디 살고 뭐하는 사람인가와 아무 상관없이 (그것들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 그것들을 알면 그걸로 무시할만한 것이지만), 나를 모르면서도, 그가 개인이고 나도 개인이므로 하는 존중. 그런 건 미국 있을 때만 받았던거 아닌가? 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정말인가? 8할 정도가 아니라 전부? 


당연히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런 의문이 들었다는 게 신기했다. 지금 내 이 삶의 무엇이 문제인가? 

버몬트 같은 곳 시골마을 마을회관에서 마을회의하는 걸 보면 이게 민주주의다..... 며 감동하기도 한다던데, 

대학원 시절 이런저런 대학원생 회의나 미팅,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에선 아직도 일어날 수 없는 분위기 (평등하고 존중하는) 있었다. 뭐 어쨌든 개인적 경험이 그러했으니 나는 그 면만 봐야겠다...... 해선 안되겠지만. 좋기만 했던 건 아니어도, 좋았던 시절인 건 분명. 책장의 이런 저런 책들 넘겨보다가 감사가 밀려들 때도 많다. 요즘 특히. 이런 책들을 읽을 수 있게 해주었던 일. 아무나 해주는 일이 아니지. ;; 대학원생은 할 수 있는 한 공부만 할 수 있게 해주기. 이것 말이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인구밀도와 실은 아주 상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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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국 교수가 편집, 해설한 니체 잠언집. 

나는 왼쪽 책으로 갖고 있다. 


그대 vs. 너

어느 쪽이 더 좋을까? 


한국어판 니체 읽으면서 (아주아주 미미하지만) 매번 움찔하고 고쳐읽는 단어, "그대". 

당신들은 아니었나요? 너, 너희, 너희들.. 이 쪽으로 바꾼다. 


위의 잠언집을 열면,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이 제목 아래 <짜라투스트라>에서: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져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  


이건: 

"나는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하는 무엇이다. 

너희는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이 쪽이 낫지 않나? 이 쪽이 니체에게 조금 (조금이라도) 더 가깝지 않나? 

<아침놀>에서도 "그대"는 아주 자주, 거의 중단 없이, 나온다. 지금 보고 있는 215번 단장: 


"아마 그대들은 그것을 이기적이라고 부를 것이다. 분명히 그러한 도덕은 그대들의 마음에 들 리가 없다! 그리고 그대들은 진정으로 그것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열광적으로 자신을 헌신하고 자신을 희생물로 만들어, 신이든 인간이든 그대들그대 자신을 바치는 강력한 존재와 지금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도취되는 것이다. 그대들그대들의 희생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저 강력한 존재가 갖는 힘의 느낌에 탐닉한다." 


니체는 무례한 사람이었다. (이건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가 내게 했던 말이기도. Nietzsche is rude! 느낌표까지.) 

그렇다는 합의가 있다. 표면적인 무례함이겠지만. 그렇담 그대.. 는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대가 좋은 사람?! : 묻고 싶다 정말. 

















219번 단장은 이렇다. 

겸양에 깃들어 있는 기만. — 그대는 사려 없는 행동을 통해 그대의 이웃에게 깊은 고통을 주었고 그의 행복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했다. 이제 그대는 자만을 버리고 그를 찾아간다. 그대는 그 앞에서 그대를 비하하고 그대의 사려 없는 행동을 그로 하여금 경멸하게 한다. 그리고 그대는 이렇게 가혹하고 매우 힘든 상황이 지나가면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대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명예를 상실함으로써 타인이 비자발적으로 상실한 행복을 보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과 함께 그대의 기분은 고무되고 그대는 자신의 미덕이 회복되었다고 생각하며 물러간다. 그러나 타인은 여전히 고통스럽게 느끼며 그대가 사려 없다고 생각하고 그대가 그 사실을 인정했다는 사실에서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그대가 그 앞에서 그대 자신을 경멸하면서 그에게 보인 고통스러운 모습조차 그대 때문에 입은 새로운 상처처럼 기억한다. 그러나 그는 복수할 생각은 하지 않으며 그대가 그에게 어떤 방식으로 보상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근본적으로 그대는 그 장면을 그대 앞에서 그대 자신을 위해 상연한 것이다. 그대가 그러한 장면에 증인을 초대한 것 역시 그대 자신을 위해서이지 그를 위해서는 아니다. 그대 자신을 속이지 말라! 




이런 단장에서 "너" 대신 "그대"를 쓸 때 일어나는 일 하나는 

이게 전혀 독자에게 (독자를 향한) 자기 얘기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사전적 어법으로는 2인칭이라도 3인칭처럼 들리지 않나?  


"너"는 한국어에서 실은 이미 욕인가? 

공식적으로는 쓸 수 없어 완곡어법(euphemism)이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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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번 단장. 제목은 "완벽한 적수를 원하는 것". 기독교적 이상의 실현에서 가장 탁월한 나라였던 프랑스에서 

그것의 정반대, 비기독교적 자유정신도 생산된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단장의 끝으로 가면서: 


프랑스의 위대한 인물들은 다른 어떤 곳의 사람들보다도 이러한 개화(開花)를 잘 이해하고 있다. 결코 피상적인 존재가 아니면서도 위대한 프랑스인은 항상 자신의 표면, 즉 자신의 내용과 깊이에 부합되는 자연스러운 피부를 갖고 있다. 이에 반해 위대한 독일인의 깊이는 대부분 복잡한 상자 안에 밀봉되어 있다. 흡사 딱딱하고 기이한 껍질을 통해 빛과 경박한 손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영약(靈藥)처럼 말이다. 그러면 이제 기독교인의 완전한 전형을 구현한 이 민족이 왜 비기독교적인 자유정신이라는 완전한 반대 전형 역시 산출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보라! 프랑스의 자유정신은 항상 위대한 인물들과 싸웠던 것이지 다른 나라들의 자유정신처럼 단지 도그마들과 숭고한 괴물들하고만 싸웠던 것이 아니다




밑줄 친 문장에서 "숭고한 괴물"은 케임브리지판에서는 sublime abortions, 

독어판에서는 erhabenen Missgeburten. 영어 단어 abortion엔 '낙태'의 뜻만 있지 않고 실패, 좌절, 중단, 이런 뜻 있다. 독어단어 Missgeburt는 어원 혹은 조어의 면에서 영어론 abortion보다 miscarriage (miscarry)에 더 가까운 단어일 것같단 짐작. 독한사전 찾아보면 "기형" "불구"의 뜻. 독한사전의 정의만 보면, 이 단어에도 "실패"의 의미가 있는 듯한데 그게 abortion의 "실패"와는 좀 다를 듯. 앞쪽은 결과의 실패, 뒤쪽은 결과에 가지 못함으로서의 실패. 


박찬국 번역의 책세상판 읽으면서 이 대목에서, 

여기 역주가 있었기를 짧은 순간 소망. "괴물"이라는 역어선택에 대해서 말이다. 원문의 독어단어엔 이런 뜻들이 있고, 

"괴물"로 번역되지 않은 다른 작은 의미들도 실은 모두 작용하고 있으니 유의 바람.. 이 구절로 니체가 염두에 둔 건, 무엇보다 --- 이었을 것이다. 같은 역주. 독일어와 니체를 잘 안다면 내가 "독자주"로라도 달고 싶었으나, 좌절. 


박찬국 교수가 번역한 니체 책들 <비극의 탄생>, <안티크리스트> 둘 다 경탄, 감사하며 읽었고 

내겐 "믿고 보는" 역자. 아카넷에서 나온 저 두 책들에선 역주가 상세하고 많은 편이다. <아침놀>은 그렇지 않은 편. 


프랑스 사람은 이렇다 저렇다.. 하는 얘기 읽을 때 

거의 늘 바슐라르부터 생각하는데, 오늘 이 단장에서 프랑스적 자유정신에 대한 니체의 말은 

바슐라르에게 그대로 할 수 있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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