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러가기 전 

<그리스인들에게 비극 시대의 철학> 넘기다 보니 

장 파울에게서 다음의 문장들을 니체가 인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위대한 사실들 — 탁월한 감각을 가진 인간에게 풍요한 의미를 띨 사실들 — 은 짧게만 그리고 (그에 따라) 모호하게만 표현된다는 것이 옳다. 그래야만 불모의 정신들이 그것들을, 자기들도 이해할 수 있는 헛소리로 번역하는 대신, 이건 헛소리라는 선포만 하고 내버려둘 것이라서다. 저급하고 속된 정신들에게, 가장 심오하고 가장 함축적인 진술들에서 오직 그들 자신의 진부한 견해들을 보아내는 추한 능력이 있다





*특히 끝 문장, 끝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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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그리스인들에게 비극 시대의 철학>에서 인용한 괴테의 말. 

영어판에 나오는 문장으로는 이렇다. 

"Do not complain of the mean and the petty, for regardless of what you have been told, the mean and the petty are everywhere in control." 

the mean and the petty. 
mean, petty 이 두 흔한 형용사도 번역하기 쉬운 말들이 아닐 듯. 
mean. "비열한"으로 흡족하지 않은 건, "평균치에도 달하지 못하는. 저급한, 저열한" 같은 의미가 있고 
괴테의 저 문장에선 그 의미도 중요해 보이기 때문에. petty의 경우엔, 이 문맥 의미에선 거의 100% 대응하는 한국어 형용사 "쪼잔한"이 있지만 영어의 petty는 "쪼잔한" 곱하기 3. 쯤 되는 거 아닌가. 인간 전존재로 쪼잔한? ;; 또 쪼잔하다.. 는 아직 표준 한국어 어휘 대접을 못받는 것같기도 하고. 

다른 예라면 
keen, dull, 이 두 단어도 생각할 수 있는데 
인간의 정신, 정신활동 혹은 정신의 삶과 관련된 어휘들의 경우 
영어에서는 아주 기본적인 단어들이 분명한 뜻을 갖고 강력히 쓰일 수 있지만 
그와 비슷한 뜻을 갖는 한국어 어휘들은, 뜻이 (영어 어휘들과 비교하면) 덜 분명하고 
그리고 (혹은, 그래서겠지만) 쓰인대도 강력한 의미를 갖는 일이 드뭄. 제대로 자기 할 일 하면서 쓰이질 못함. 
정말로, 정신.. 사유.. 이런 것이 아직도 사치, "irrelevant"해서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싶었던 얘긴 괴테의 저 말이 

정말 엄청나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단 것. 지난 몇 년 동안, 

아 괴테는 얼마나 옳은가. 더 이상 옳을 수 없다. 세상 어딜 가든 the mean and the petty are in control. 

이렇게 기억하면 좀 견딜만해지던 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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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니체 사도> 77쪽에서. 

니체의 도덕철학은 그 전부가 남들을 폄훼하고자 하는 욕구의 극복에 관한 것이고 

니체는 자기칭송할 자유의 분출과 함께 나르시시즘의 시대를 열었고... 이런 얘기를 하다가 

에머슨과 니체를 비교한다. 니체가 개인주의의 트렌드 디자이너로 거둔 대성공, 이 대성공의 

무엇이 독특한가를 알고 싶다면 (이것도 개인주의이긴 하지만 니체의 것과는 조금 달랐던) 에머슨의 

트렌드 디자인을 볼 수 있겠다면서. 슬로터다이크는 <냉소적 이성비판>이 집에 있고 그것 두 페이지쯤 읽으면서 

한 대목에서 현실웃음 터졌던 것같은 기억이 있다. 철학자들이 불어올리는 허세, 비누방울 콕콕 터뜨리는 사람? 그런 

무엇이 있었던 것같은데 <니체 사도> 이 책에서도 그 비슷한 면모가 있다. 니체라는 "브랜드". 니체라는 "트렌드 디자이너" 이런 말들을 (조금의 아이러니 없이) 쓰는 것에서도. <냉소적 이성비판>에선 성공적인 무엇이었나 몰라도 이 책에선 아님. 으으. 시시한 얘길 어찌나 복잡한 구문으로 하고 있는지.  


















어쨌든 에머슨과 니체를 비교하는 한 대목: 

니체와 비교할 때 에머슨에게, 심리-정치적 우위만이 아니라 시간적 우위도 있다. 

에머슨의 반-순응주의는, 저항을 겪긴 하겠지만 민주주의 덕분에 결국엔 늘 균형을 유지할 

대중의 양가적 나르시시즘으로 발전할 무엇이었다면, 니체의 자유 정신엔 성공에 굶주린 패배자들의 운동에 

채택될 아주 큰 위험이 있었다.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파시즘은 정치적으로 말하면 "갑자기 에너지를 충전한 패배자들의 반란"일 따름이다. 이들이 어떤 예외의 시간 동안, 승리자로 보이기 위해 규칙을 바꾼다. 패배자들이 니체 브랜드를 택했고, 이건 승리자의 브랜드라는 약속이 거기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니체가 패배자들의 영웅이 되었다는) 이 끔찍한 에피소드는 지속될 수 없었고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브랜드의 전선에서 에머슨의 프로젝트가 니체의 프로젝트에 맞서 승리했다. 오늘 우리 대부분이 반-순응주의자이지 자유정신이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 우리가 흔히 갖는 생각과 감정들은 "미국산"이지 "실스 마리아산"이 아니다. 



마지막 문장이 묻게 함. 그런가? 

우리의 평범한 생각과 감정들이 "made in the USA"이지 "made in Sils-Maria"가 아닌가? 

슬로터다이크의 우리는 가장 먼저 독일인들이겠으니, 독일에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들은 미국산이다" 그러면 별생각없이 다들 끄덕이려나? 그런가 하면 니체를 해석하면서, 그 해석을 통해 우리의 감정과 생각이 진정 "실스 마리아산"이 되게끔 (그에게 먼저 그런 일이 일어났고) 애쓰신 바슐라르를 생각했다. 니체주의, 니체주의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이보다 더 명확하고 강력한 진술, 옹호는 없겠지. 그렇다고 알아만 볼 뿐 실행은 못하더라도. 그래도, 애쓰심을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그리스인들에게 비극 시대의 철학>. 니체의 초기작. 이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책들의 운명[fatum libellorum]이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서 헤라클레이토스를 뺏아가고, 엠페도클레스의 아름다운 시편을 읽지 못하게 하고, 고대 사람들에겐 플라톤과 동급으로, 아니 독창성으로 보면 그보다 탁월하다 여겨졌던 데모크리투스의 글을 볼 기회를 앗아가고, 대신에 스토아 학파와 에피큐로스 학파를, 키케로를 남겨준 게 이 운명일지 모른다. 고대 그리스 정신이 낳았던 가장 탁월한 표현을 우린 잃었지만, 이 운명이 의아할 필요는 없다. 스코투스 에리게나와 파스칼에게 일어났던 일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바로 이 계몽된 시대에,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폐지로 팔려야 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이런 사건을 관장하는 특별한 힘을 갖고 싶다면, 괴테와 함께 아래의 말을 되뇌면 된다. 

"세상이 비열하고 천하다고 불평하지 말라. 네가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세상 어디든 비열하고 천한 것이 다스리고 있다." 진정, 비열하고 천한 것이 진실보다 힘이 세다. 인류가 좋은 책을 생산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대담하고 자유롭게 진실을 외치는 책. 철학과 철학자의 영웅주의를 노래하는 책은 극히 드물게만 씌어진다. 그런데 우연 중에서도 가장 하찮은 우연이, 말하자면 인간의 변덕이나 미신에 빠진 정신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 혹은 반감, 쥐나버린 손가락, 또는 책 파먹는 좀벌레나 예상에 없던 폭우 등의 우연이, 하나의 책이 한 세기 이상 읽힐 것인지 아니면 재가 되어 스러질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37)



고대 그리스 정신의 탁월한 표현을 잃은 것이 

인간들의 우매함 때문인 것처럼, 그 다음 이어지는 문장들을 보면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될만큼 드물지 않나? 불운("예상에 없던 폭우" 같은)에 의해 유실되는 경우가 거의 다지, 탁월했으나 그 탁월함을 알아본 인간들이 없어서 사라지고 만... 그런 저자, 작품은 없지 않나? 있나? 있을까?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점도 사실 "인류에 대한 믿음의 회복"이 가능한 얼마 안되는 점들 중 하나 아닐까 했다. 

뛰어난 작품은 반드시 알려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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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슬로터다이크, <니체 사도>. 

영어판은 2013. 



니체의 가장 격렬한 자기 과시가 담긴 문장들이 

독자에게 갖는 노출값은 (exposure value) 그에게 가장 우호적인, 

그리고 가장 자유정신인, 심지어 자발적으로 그에게서 눈부심을 경험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도, 

고개 돌려 외면하게 할만큼 강하다. 이 독자들도, 니체에 의해 종이 위로 옮겨졌으며 책으로 출판된 

이 문장들, 그것들을 보지 않았기를, 그것들을 읽었다는 부서를 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눈을 똑바로 뜨고 

태양을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광인이 쏟아내는 자기 찬미를 똑바로 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이런 이유에서, 

칭송의 대상인 자신에 대한 자의식이 분출하는 이 문단들을, 우리는 시력을 보호할 안경을 끼고 읽는다. 독자의 시선으로 직접 들어갈 수는 없을 내용을 우리는 걸러낸다. 이것은 자제력을 잃은 상대를 대신해 우리가 느낄 수치심, 그 수치심 때문에 우리가 외면하고 말 문장들을 지키는 방법이다. 혹은 이것은 예의의 문제다. 예의는 우리에게, 한 흥분한 사람이 그 자신 그러지 않으려 함에도 자기 치부를 드러내는 현장에 있다면, 못 본 체 하라고 가르친다. 니체를 사랑하는 독자들 사이에서, 니체의 이런 문장들을 인용하지 않음이 품위의 표지다. 아닌가? (48) 






길고 복잡한 문장이라 내 마음대로 쪼개고 보태어 옮겨 보았다. 

이런 문장들은, 재미있긴 ;; 한데 

니체의 이해에 도움이, 조금이라도 되나? 


니체의 수많은 문장들이 과대망상, 자기찬미의 문장들이라면서 위와 같이 말하고 나서 

예가 될 문장들을 길게 인용하는데 예를 들면 <우상의 황혼>에서: "동급인 그 누구도 없는 최상급 심리학자가 내 저술들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 뛰어난 독자가 가장 먼저 알아볼 것이 이것이다." 


이런 문장들이 보면 외면하게 되는 문장인 거냐. 

보면 매혹되는 문장 아닌가. 자기과시 자기찬미도, 

어떤 진실을 얼마나 잘 말하고 있느냐의 관점에서 봐야하지 않나? 

그래서 니체의 경우엔, 그가 어떤 칭송을 자신에게 보내든 바로 다 아무렇지 않아지지 않나. 처음부터 아무렇지 않았거나. 슬로터다이크가 니체의 이 면모를 이용하고 있는 게, 뭔가 협잡같아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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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스핏언더 5시즌에서. 

루스의 동생이고, 그러니 클레어에겐 이모인 사라가 

같이 등산하던 친구 피오나를 실족사로 잃음. 피오나의 장례는 피셔네 장의사에서 치러지고 

장례식 전날 사라, 루스, 그리고 처음엔 사라 쪽 사람이지만 루스의 절친이 되는 베티나(캐시 베이츠) 세 사람이 술을 마심. 술은 거의 사라 혼자 마심. (이런 디테일도 좋다. 나도 한 38회 그래봤던 것같다. 여자 셋이 있으며 나만 술마심....;;;) 


피오나의 죽음을 자책하는 사라에게  

Everything happens for a reason 이라자 

Oh Fuck off! 라며 폭발하는 장면. "그럼 할머니가 다리를 잃은 데도 이유가 있고 

쓰나미와 전쟁에도 이유가 있고 (*사지를 흔들고 온몸으로 저항하며*) 조지 퍽킹 부시가 재선된 데도 이유가 있어??" 


이 장면 

처음 보던 때도 좋았다. 단호하게 병나발 부는 것부터 ;; 

많이 울고 망가진 상태에서 소리소리 지르는 것도 참으로 리얼하고 

진정하라고 속삭이는 루스 옆에서 베티나는 "냅둬.. (어떤 뻘짓하나 보게).." 이러는 것도 웃겼고 

"조지 퍽킹 부시"라고 부르는 것도 처음 보던 땐 HBO만 이럴 수 있는 건가 아니면? 정도지만 나름의 충격이었다. 


사실 더 좋은 장면은 

여기 바로 이어지는 장면. 

굉장히 좋은 장면임에도 뜻밖에 유툽에서 찾아지지 않는다. 

이렇게 부시도 욕하고 자신도 비난하면서 술에 떡이 되었을 사라가 

다음 날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이미 일어나 아침 식사 준비 중인 부엌의 루스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녀가 루스에게:  

I am the asshole at the center of the universe, 

forgetting how vast the universe is, how nothing is within our control. 

An idea both terrifying and beautiful.







이런 대사를 사라라는 인물에게 준 건 

"일급의 각본" 같은 말로도 한참 모자랄, 정말 TV 역사상 유례가 없는 뛰어남일 것이다. 

이런 대사와 이런 장면이 (아무리 HBO라 해도) TV에서 나오다니......... 믿기 힘들다는 경이감 

그런 거 느끼면서 보던 기억이 남아 있다. 


한국의 HBO가 ("한국의"란 말로 종류는 비슷하더라도 수준으론 한참 떨어짐을 뜻하는 거 말고, 진정 종류나 수준에서나 HBO와 동급인 TV 채널) 있다면 매일매일 놀라고 그거 하나 때문에라도 사는게 흥분되고 재밌을 것이란 상상을 해보게 된다. 한국의 브렌다, 루스, 사라, 이런 인물들이 나오는 드라마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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