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내내 나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무수히 바보 짓을 하는 어깨 좁은 남자들을, 옆의 인간들에게 야수가 되고 

모든 수를 써서든 (그들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인간들을 보았다. 그들 행동의 동기를 그들은 

-- 명예라고 불렀다. 


Throughout my life I have seen, without one exception, narrow-shouldered men 

performing innumerable idiotic acts, brutalizing their fellows, and corrupting souls by every means. 

They call the motive for their actions: fame. 
















갖고 있는 영어판은 이것인데 여기서 30쪽이다. 

청하판에 이 부분이 번역되어 있는데 거기선: "좁은 어깨를 하고 명예를 위해 수많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며 그들의 동류를 바보로 만들며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영혼을 타락시킨다." (16)


아무 저항없이 바로 이해되고 공감도 되는 문장 아닌가. (아닌가?) 

그런데 적어놓고 보니 청하판 번역에서 "명예를 위해" 이 구절은 

명백히 오역이라곤 할 수 없지만 실은 이런 것도 오역이라고 봐야 하며 

원문에서 '번역되지 않은(못한)' 것을 기준으로 하면 실은 이런 오역이 명백한 오역보다 

어쩌면 더 나쁘다고도 할 수 있잖을까는 생각 든다. 명백한 오역의 경우엔 그걸 바로 알아볼 수도 

있지만 이런 경우엔 그러지 못할 거라서. 


어쨌든 영어판에서 명예가 거론되는 건 그들의 

악행에 찍는 마침표같은 것. 사회에 보내는 저주같은 것. 한국어판에서 "명예를 위해 수많은 어리석은 행동을.."은 

그들의 (고상한, 이 아니라면 어쨌든 누구라도 예외가 아닐) 동기를 감안해 그들의 죄를 조금 사하라는 얘기처럼 들릴 것이다. 원작, 원문의 개성이나 새로움을 밀어내고 거기 도착언어 사용자들의 통념이 있게 하는 일. 실은 아주 자주 일어나는 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좋은 예.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기성관념을 추방하는 프루스트의 문장들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한국의 삶, 한국의 기성관념을 반영하는 문장들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누가 논문을 쓰더라도 좋은 논문이 나올 법한 주제. 


(*번역 얘길 하려면 원서 기준으로 해야할텐데 

영어판 놓고 주절댐은 양해를............. 불어-영어번역은 거의 언제나 충실한 번역이기도 하고요.) 


하고 싶었던 얘긴 "타인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인간들." 

세 명쯤 바로 기억했다. 그 중 한 사람은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사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데) 

'상부의 뜻' 이것 외엔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 일관되게 지키는 기준, 가치가 없고 그러니 당연한 건가 

위에서 시키는 일 외에는 약육강식. ㅋㅋㅋ; 걸어다니는 영혼없음, 내면없음. 여러 면에서 fuck with me, 하셨던 분. 

그 분과 얘길 하다보면 정말 어김없이 머리가 녹아내리는 것같았다. 뇌손상. 뇌손상이 일어나고 있어. 영혼의 타락과 뇌손상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지만 그런가하면 반드시 같이 일어나는 일이지 않을까. ㅋㅋㅋㅋㅋ (한숨) 


그 분을 능가하시는 분들도 계시나 다른 분들 얘긴 눈물 없인 할 수 없는 얘길 것이다. 


블룸스베리그룹 내에서 작은 집단, 회고록 클럽. 

회고록 클럽을 같이 할 수 있는 사이여야,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저 사람과는 회고록 클럽 같이 안된다. 라면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 많지 않을까. 알 수 있는 게 많겠다보다, 중요한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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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중고로 구입했던 톨스토이 자기계발서. 

제목이 Wise Thoughts for Every Day 라고 되어 있는데 

Every Day가 Everyday (붙여서)일 걸로 여겼다. 매일 (하루도 어김없이) 기억하면 좋을 현명한 생각들. 

책을 받아보니 Every Day (띄어서)이고, 1년을 이루는 날 각각, 모두에 그 날만의 현명한 생각을 주고 있다. 


오늘 8월 20일에 그가 주는 생각은 Effort가 주제: 


무엇을 제대로 하려면, 어떻게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어떤 활동에든 이게 적용됩니다. 

좋은 삶을 살려면, 어떻게 좋은 삶을 사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의 왕국을 가질 거라는 희망만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신의 왕국이 온다는 걸 우린 압니다. 

신의 왕국이 매일 우리에게, 우리가 좋은 노력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위대하고 중요한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위대한 무엇을 성취하려고 노력해선 안됩니다. 

다만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신의 정신이 우리에게 하라고 말하는 그것을 해야 합니다. 


당신 삶의 어떤 면을 바꿀 수 있다면 바로 당신 삶이 나아지리라 생각하는 건 유치합니다. 

아이들은 양탄자 위에 앉아 양탄자 모서리를 움켜 잡으면 날아갈 수 있다고 상상하곤 하지요. 






어제 초저녁부터 자고 오늘 1시 반쯤에 깼다. 

새벽에 날 밝기 전에 나가서 걷고 뛰는 게 좋은데 그러지 못한 지가 (날 다 밝고 아침이라도 더워 죽을 거 같을 때나 나간) 오래되어서, 1시 반은 이르긴 하지만 그래도 일찍 깬 게 좋았음. 


좋아서 이것저것 하다가 책장 구석에 있던 이 책 꺼내봄. 오늘을 위해 톨스토이가 주는 말을 보자. 

사실 저 정도 생각은, 이거 모 나라도 하겠네... 진지하게 여길 수 없게 허허실실한 얘기처럼 보이고 몇 번 (매일 열어본 건 아니다) 열어보면서 어김없이 비슷하게 반응하긴 했다. 그런데 동시에,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어김없이 있기도 하다. 무엇인가 반드시 도움을 준다, 날 도우러 온다. 약하더라도. 


그런 일들이 없었다면 내 삶이 더 나을텐데. 

이건 양탄자 위에 앉아서 끝을 움켜쥐면 날 수 있다는 애들같은 생각. : 이거 끄덕끄덕. 




*책 페이지 사진에 오늘 날짜 August 20, 가 보이게 찍었어야 한다.   

사진 자체를 잘 못 찍기도 하지만 이게 전화기의 문젠지 네이버 사진 편집기의 문젠지 

사진이 뒤집힌 상태로만 나오던 걸 해결하느라 버벅대기도 하고 여튼 사진들이 발퀄일 사정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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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해설" 한 문단 읽고 보관하던 

Stoner 좀 전 꺼내보았다. 해설을 넘기다 보니 

존 윌리엄스가 은퇴 직전 했다는 인터뷰에서 인용이 있다. 생전 인터뷰는 거의 하지 않은 편이라는데 

이 인터뷰, 인용 출처가 명시되어 있지 않고 검색해 보았지만 웹에서 아직 구해지지 않는 것 같다. 어쨌든 인용된 부분은, 윌리엄스가 보는 스토너. 



스토너는 '진정' 영웅이에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스토너가 아주 슬프고 나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나는 스토너가 아주 좋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해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좋은 삶을 살았던 건 분명하죠. 그는 하고 싶은 걸 했고,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느끼는 무엇인가가 있었어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그에겐 어떤 감각이 있었어요. 중요한 가치들, 그는 중요한 가치들을 직접 보았던 증인이에요... 이 소설에서 중요한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스토너에게 "일"이 가졌던 의미를 택하겠어요. 강의는 그에게 일입니다. 그 말이 가진 좋고 명예로운 의미에서의 일. 그의 일이 그에게, 특별한 정체성을 주었고 그라는 사람이 되게 했어요... 대상을 향한 사랑이 핵심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그걸 이해하게 됩니다. 당신이 그걸 이해한다면, 당신은 아주 많은 걸 배울 거에요. 그 사랑이 없다 -- 그게 나쁜 선생들을 규정합니다... 당신이 하는 일의 결과 전부를 알 수는 없어요. 그게 실은 <스토너>에서 내가 가보고자 했던 거에요. 언제나 믿음을 가져야 해요. 전통이 유지되게 하기, 그게 중요해요. 전통이 문명이기 때문이죠. 



밑줄 친 부분 

아주 조용히, 그러나 명징하게, 문학 연구를 찬미하는 문장 같다. 

나도 거의 모든 문장 (조용히) 동의하거나 공감하며 읽음. 




















일이 그를 만들었다... 는 말은 베케트의 Murphy에 나오던 웃기고 천재적인 문장을 기억하게 했다. "자기 신부와 같이 살 집과 돈을 벌어보겠다고 나서는, 런던의 백수 청년 머피의 비극적이기도 웃기는 이야기"라는 소설. 백수청년 머피를 사랑하는 셀리아. 셀리아는 그가 취직하기를 원하고 취직은 생각만으로도 진절머리난다는 그를 설득하러 오는데 그들 사이의 대화. 



머피: "내가 당신이 바뀌길 원한 적이 있었나?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괴롭힌 적 있었나?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내겐 아무 상관이 없어."

 

셀리아: "내가 하는 일이 곧 나야. I am what I do."

 

머피: "아니야. You do what you are, 

You do a fraction of what you are, you suffer a dreary ooze of your being into doing." 



머피의 마지막 말 번역불가의 강력한 사례일 듯. 한국어 번역 아직 나오지 않은 것같은데 

나온다면 어떻게 번역될까. "나를, 나만 나는 할 수 있을 뿐이야. 나인 나의 한 조각을 할 수 있을 뿐이고, 

내 행위로 내 존재의 끔찍한 스며듬을 견뎌낼 뿐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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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의 문학 책들에서 반복되는 구절 중에 

"잘못 살았던 삶" 이게 있다. 예를 들면 <몽상의 시학> "서론"에서: 



삶과 작품을 연결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아래 구절을 베를렌이 교도소 수감 중 썼다는 걸 밝힘으로써 전기작가가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지붕 위 저 멀리 있는 하늘은,

그토록 푸르고 고요하네.

 

베를렌은 감옥에 있었다! 멜랑콜리의 시절에 감옥에 있지 않은 자 누구인가? 파리의 내 방에서, 내가 태어난 땅에서 그토록 멀리 있는 내 방에서, 나는 베를렌의 몽상을 이어간다. 이 돌로 지어진 도시 위에, 어느 다른 시대의 하늘이 펼쳐진다. 그리고 나의 기억 속에서, 레이날도 한이 베를렌의 시에 붙였던 곡의 자락들이 떠오른다. 감정과 몽상과 기억들이 이 시에서 나를 위해 자라난다. 그것들은 이 시의 위로 떠오른다. 시의 밑, 불행했던 시인의 잘못 살았던 삶, 내가 살지 않았던 그 삶 속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시가 그의 삶을 지배하지 않았던가? 작품은, 자기 삶을 잘못 살았던 시인을 위한 사면이 아닌가?






4장 "몽상가의 코기토"의 첫문단에서도: 

밤에는 미래가 없다. 우리의 낮의 존재가 자기 기억을 몰래 들여올 수 있을만큼 살아 있고, 그래서 덜 어두운 밤들도 있다. 정신분석가는 이 반쯤의 밤들을 탐구한다. 이 반쯤의 밤들에, 우리 존재는 여전히 거기 있다 -- 인간의 드라마를, 잘못 살았던 삶들의 모든 무게를, 끌고 다니며. 


저건 내가 읽으면서 했던 번역이고 김현 번역에선 이렇게 되어 있다: 

밤에는 미래가 없다. 낮의 우리 존재가 추억과 암거래할 만큼은 살아 있는, 덜 컴컴한 밤들이 있다. 정신분석가들은 이 半 밤[demi-nuit]을 탐색한다. 이 半 밤에, 우리 존재는 아직까지 인간 드라마, 잘못 만들어진 삶의 온갖 무게를 겪으며 거기 존재한다. 


그런가 하면 <공기와 꿈>의 니체 장에선, 먼저 니체의 시를 인용하는데: 


너의 고통을 심연으로 던지라! 

인간이여, 잊으라! 인간이여, 잊어버려라! 

망각의 예술은 신성하다! 

날고 싶은가? 

저 고지에서 집에 있다 느끼고 싶은가? 

너의 가장 무거운 짐을 바다에 던져 버려라! 

바다가 여기 있다 

너, 너 자신을 바다로 던지라! 

망각의 예술은 신성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바슐라르의 논의는: 

이 시는, 물에 의한 재생을 찾아 바다로 뛰어드는, 일반적 심리현상을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의 모든 "무게"를, 우리의 후회를, 우리의 회한을, 우리의 원한을, 우리 안에서 과거로 눈돌리고자 하는 모두를, 멀리 던져 버리라고 이 시는 말하고 있다. 우리는 "무거운 우리의 전존재"를 바다로 던지고 그래서 그것이 영원히 사라지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의 무거운 분신, 우리 안의 대지적인 것, 우리 안의 숨겨진 내밀한 과거를 파멸시킬 것이다. 그럴 때, 우리의 공기적 분신이 찬연히 나타날 것이니,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갇혀 있던 감옥으로부터 공기처럼 자유로이 벗어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문득 자신에게 성실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판에서 258. 영어판은 143. 한국어판 번역이 무진장 좋지만, 이 책이 내게 소중했던 책이라 내 번역도 넣음..) 


"잘못 살았던 삶" 이 구절이 그대로 나오진 않지만 

저 니체 시의 바슐라르 해석은, "니체에게 바다는 잘못 살았던 삶의 영원한 망각을 행할 수 있는 곳"이라 요약해도 되겠고 이 대목 읽을 때마다 무게, 후회, 회한, 원한. 우리 안의, 과거를 보려 하는 존재. 나의 무거운 분신, 내 안의 대지, 내 안의 과거. 이것들이 전부 내 몫의 "잘못 살았던 삶"으로 바뀌는 일이 일어났었다. 


아 이 대목을 읽기 위해 잘못 살았던 거야! 

이 대목을 읽었으니 이제 잘못 살지 말아야지. 





Sideways (2004)에서 그 대사 

내가 하도 하찮아서 난 자살도 못해. I am so insignificant I can't even kill myself. 


그런데 앞으로 단 10년만 남아 있다 해도 

10년 후에 죽는다 해도 그래도 요절이라 할 수 없을만큼은 

이미 살았다고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눈이 밝아지는 느낌, 힘이 얻어지기도 한다. 10년만이 남았다고 생각해. 그럼 무얼 하겠니. 이 방향으로. 뭐 Sideways에서 저 대사와 연결이 -_-;; 안 되는 얘기같은데, 조금 전까지 내 머릿속에선 연결이 되고 있었다. 


어쨌든 종일 교정하고 자기 전에 맥주 마시던 '감옥'을 벗어났으니 

고등어를 갓김치 넣어 조리고 오뎅을 볶고 동태전을 만들어 맛있게 먹겠다는 오늘의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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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받은 조지 스타이너의 책 After Babel, 

번역에 관한 책이란 것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열어 보니 세 개의 에피그래프가 있는데 하나가 하이데거. 

출전의 제목은 독어 제목으로만 주고 있어서 정확히 어떤 뜻인지 영어로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됐는지 나중에 알아봐야겠다. Dichterisch Wohnet der Mensch.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한다?" "인간의 시적 거처?" 


어쨌든 에피그래프로 인용된 대목은 이런 얘길 하고 있다: 


인간은 마치 자신이 언어를 만들고 언어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는데, 실은 언제나 언어가 인간의 주인이다. 이 지배 관계가 역전될 때, 인간은 기이한 억지에 빠진다. 이때 언어는 표현의 수단이 된다. 표현일 때, 언어는 한낱 인상으로, 활자에 불과한 무엇으로 타락하는 경향이 있다. 언어가 인상과 활자에 불과할 때라도, 인간은 자기 언어에 유의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유의한다 해도, 언어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진정한 지배 관계의 혼란과 역전으로부터 빠져 나오지 못한다. 왜냐, 진정 말하는 것은 언어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말할 때, 인간은 그 자신 언어에 반응할 수 있는 한에서, 그 자신 언어와 만날 수 있는 한에서만 말한다. 인간은, 언어가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을, 자신에게 보내는 동의를 들을 수 있는 한에서만 말한다


















나중 찾아보려다 지금 막 찾아봤더니 

위의 제목은 영어로는 Poetically Man Dwells로 번역되고 위의 책에 실렸다. 

음 이 책을 갖고 있다는 건 안비밀.... 이렇게 한 번 말해보고 싶어진다. ------- 어쨌든 

한 30%쯤 이해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가 여기서 무엇인가 중대한 얘길 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느끼면서 

특히 밑줄 친 대목은 만인이 모여 돌아가며 각자 코멘터리를 내놓는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어 번역이 되었나 모르겠지만 30배 길이의 주석을 붙여가며 읽으면 좋을 문장들이겠다고, 내가 기여할 한 줄의 주석으론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생각해 보게도 되고. 






다시 볼 곳이 조금 남긴 했지만 

번역 원고 교정을 오늘 끝냈는데 

하나 남는 생각이 뭐냐면, 번역에서 가독성보단 충실성. 

이게 지켜져야 하지 않을까. 탁월한 역자라면 둘 다 높은 수준에서 유지할 텐데 탁월한 역자들 제외하고, 

조금 어색, 난삽, 장황... 등등 하지만 주의 기울여 읽으면 원문이 전하는 내용을 모두, 정확히 알 수 있는 문장과 

매끈하게 읽히지만 실은 원문 내용의 80% 이하가 담긴 문장. 혹은 (조금이라도) 틀리게 담긴 문장. 둘 사이에 선택해야 한다면 언제나 앞쪽을 택해야 하지 않나. 


최고 번역가로 꼽혔던 이윤기의 번역도  

내용 차원에서 오역이 굉장히 많은데 그 오역들의 특징이, 매끈하게 읽히지만 실은 원문을 전하지 못함(않음). 

가독성이 중요하게 여겨지면, 그게 오히려 오역을 장려하기도 하지 않을까? (이윤기의 경우엔 사정이 좀 복잡하다고 

생각하긴 한다. 그런데 어쨌든, 잘 읽히는(우리말같은)..... 의 요구가 강력하면 오히려 졸역(오역)을 장려할 것같다고 나는 생각하긴 하는데, 얼마전 New York Review of Books에서 읽었던 러시아문학 영어번역과 관련한 글을 기억한다면 여기서도 아마도 난 무척 소수.. 쪽이겠단 (전율;;). 


대학원 시절 In Treatment 보다가 여러 번 깊은 충격;; (무려) 받았었는데 

그 중 하난, 50대 이상 나이 많은 사람들이 하는 굉장히 길고, 진지하고, 문학적이고, 진짜로 생각하고, 그래서 서로를 진짜로 알게 되고.... (이 외에도 더 생각해보면 여러 특징들이 있을) 대화였다. 폴과 지나가 얘기할 때가 (위의 이미지) 가장 그렇다. 


두 사람이 교육수준이 아주 높고 한때 '썸타던' 사이였던 것도 조금은 감안해야겠지만 

한국어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한국어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 이런 질문을 고심하며 생각해 봤었음. 이렇게 천천히, 사려깊게, 단어 하나 예외없이 깊은 뜻을 담아, 단어 하나 예외없이 온전히 이해될 것을 기대하며, 말할 수 있는가. 


;;;; 그럴 수 없을 것 같고 

없는 이유엔, 쉼표는 거의 무조건 (내용을 볼 것도 없이) 지워야 하고 

"--으로부터" 역시 문장이 무엇을 말하려던 것인가와 상관없이 "--에서"로 고쳐야 하고 

등등의, 번역문이 가져올 낯설음의 차단.. ;;;; 도 작용하지 않느냔 생각을 


맥주를 마아------------------------------------악 마시며 해보았습니다. ㅋㅋㅋㅋㅋ; 조금 아주 조금 취한 상태. 

낼부텀은 하고 싶엇던 공부하며 서재도 중단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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