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hur Krystal, This Thing We Call Literature (2016). 



물론 지금도 미국 전역의 대학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프라하 학파에 대해, 

그들의 이론과 교의에 대해 배울 수 있다. 맑스주의 비평가들과 정신분석 비평가들(알튀세, 라캉, 들뢰즈, 리오타르, 마르쿠제, 노먼 O. 브라운)의 저술들에 대해 지금도 연구할 수 있다. 데리다나 드 만의 해체에 관한 저술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짜릿함"이 사라졌다. 역사적 기억이 되는 지적 에너지, 그것이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랄까, 인문학에서 마지막으로 있었던 아이디어의 분출, 그것이 근본적으로 반-인문주의적이었다. 아카데미는 이 아이디어들을 열렬히 껴안고 또 과시했으며, 그래서 인문학은 쭈그러들기 시작했다. 문학 교수들이 문학을 가르치면서 비평 이론을 적용하기 시작했을 때, 실상 이들은 이론을 이용한 자살을 시작했던 것이다. (111) 




책에 실린 "The Shrinking World of Ideas" 이 글에서다. 

이 글 서두에, 라이오넬 트릴링의 어마어마 무시무시한 말이 인용된다. 

"신들이 전쟁하던 고대인들에게 가졌던 의미, 그게 우리에겐 아이디어가 갖는 의미다." 


(하.......) 

What gods were to the ancients at war, ideas are to us. 이 문장인데 이것도 번역 잘되지 않는다. 

단 12단어. 별 생각없이 착수했다가 깜짝 놀람. 


20세기 전반, 중반까지 정말 그럴 수 있었나 본데, 놀라운 일이다. 아이디어가 신급이던 시대라니. 




*오늘 책들을 대출도 하고 배송도 받음. 

이건 대출한 책이다. 집에 오면서 조금 읽음. 

문학 연구에서 이론의 공과. 이것도 (미국 대학들 기준으로, 당사자들 사이에서) 지금 정리가 안되는 것같다. 

이 저자의 글들은 아주 재밌거나 그런 건 아닌데 (사실 재미없는 쪽에 속한다. 저자가 재미있으려 노력할 때도 재미없는. 음.. 나도 그런 쪽인가 이 서재 포스트들에서) 자신이 있는 현재의 시간을 늘 의식하는 편이랄까 그래서, 조감하는 태도가 자주 있고 그게 도움이 된다. 위의 한 문단 옮기고, 그의 마지막 문장 ("그들은 이론으로 자살했다"), 이건 전혀 이렇게 볼만한 문제가 아닌데 왜 이렇게 썼을까에 대해서 쓰고 싶었는데 


(비명 + 한숨을 상상하세요) 피곤해 죽을 거 같다. 

대충 그만 여기서. 아 근데, "짜릿함, 역사적 기억이 되는 지적 에너지" 이 구절은 기억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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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ry Eagleton, The Gatekeeper (2002)


"책을 안 쓸 수가 없다는 문제. 이건 문제라고 하기엔 무슨, 치욕스런 특권 같은 것이었다. 근친상간이나 동물 애호증처럼, 다른 누구와도 편히 얘기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도저히 책을 안 쓰고 있을 수 없다는 내 문제를 고백하면, 내 동료들은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지고 토하고 싶은 표정이 되곤 했다. 내게 돈이 너무 많아서 문제, 여자들이 쓰러질만큼 잘생긴게 골치 아프다고 고백하기라도 한 것처럼. 세상 어딘가에 <익명의 저자 모임 Authors Anonymous>이 있을지 모른다. 여기 나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오늘 모임 직전까지 이론에 관한 논문에 심신이 만신창이 되도록 빠져 있었다거나 네 편의 소논문을 조금도 쉬지 못하고 연달아 끝내야 했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다. 컴퓨터를 도저히 혼자 힘으론 끌 수가 없음에 대해, 서평을 사흘 참으려면 필요한 초인적인 노력에 대해, 하루 한 문단만 쓰도록 중독을 조절하기 위해서 다른 중독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어려움에 대해, 말할 것이다."



너무 빨리 너무 많이 썼다는 게 

이글턴의 작업이 나쁜 유산이 되게 하는데 기여했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래도, 쓰기를 멈출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이런 얘긴 기억해두고 여러 번 생각해볼 가치가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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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도 귀여운데 고양이 보고 있는 남자들의 말투가 

아주 그냥 다정하기 짝이 없다. 한국 남자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지 않나? 이렇게 말하지 못하게 양육된 건가? 

보면서 그 방향 의문이 들고 맘. 어디선가 누군가는 저렇게 다정하겠지. 그런데 나는 본 적이 없다며. 







여기서도 팔에 문신까지 한 남자가 고양이에게, 

고양이와 다정하게 얘기한다. 듣는 사람도 마음이 녹는다. 

이 클립 잠시 홀릭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시절 이 동네에서 유명한 칼국수 집 혼자 갔다가 

나도 모르게 yum yum yum, yum yum yum, 념념념, 념념념, 그러며 먹고 있게 되던 그 때 마침 옆에 있던 사람들이 

쳐다보던 일. ㅋㅋㅋㅋㅋ ;;;;;; 


갓양남. 그건 '천사'같은 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do they exist?) 

한편 양, 그 쪽에 천사가 있거나 더 많을 것같기도 하다. 2012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던 스탠포드 교수 

자택 습격한 동영상 인터뷰도, 한국에선 저런 인간형 불가능하다............. 는 생각을 시작하자마자 자극한다. 








그런데 정말 그렇지 않은지. 

우리의 말을 보면, 우리가 서로에게 말하는 방식을 보면 

........................... 음 하여간, 자족 (니체도 때론 강하게 긍정하고 권유하는, 자신을 아는 덕분인 자기만족)

그것도 드물고, 그건 다시 말해 대상을 향한 관심과 존중도 드물다는 것이고.. (그밖에도 여러가지. 나중을 기약) 

알 수 있지 않나. 


Never underestimate the power of denial. 

<아메리칸 뷰티>에서 이 명대사는, 마리화나 딜러인 옆집 고교생에게 

마리화나 사러 온 케빈 스페이시. 자기가 이렇게 사는 줄 자기 아버지는 모른다면서 그 남고생이 스페이시에게 

하는 말이다. 이것이 한국 상황에서 잘 번역되지 않는다는 그것에도, 의미심장한 무엇이 있는 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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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1년 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11년에 한 7-8개월 정도 가끔 (하루에 가끔.. 이 아니고 며칠, 몇 주에 한 번쯤인 가끔) 

피우다가 매일 피우기 시작해 지금에 이름. 담배값 인상이 있었을 때 (이게 벌써, 그게 14년초였던가?) 

끊으려 했으나 못하고 말았다. 한 2년 정도, 매일 매일매일매일매일매일매일매일매일 "오늘 이것이 마지막이다"

정말 그럴 수 있을 것같아하며 담배 사왔다. 장대비가 쏟아져도,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괜찮고. 한 걸음만에 더워 죽을 거

같아도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괜찮지. 다시 있을 일은 아니야. ;;; 


마지막으로 사왔던 걸 다 피움. 

지나친 흡연으로 생긴 설암 수술 뒤에 (직후에?) 

입을 자기 힘으로 열지 못하니까 기구의 도움을 받아 연 다음 

담배를(시가를) 피웠다던가. 프로이트는. 








*서재 페이퍼들을 금연일기 겸해 

(뭘 쓴다면 오른쪽 하단에 1일, 2일. 식으로. 

다시 1일, 2일...) 쓴다면 조금 더 잘 금연할 수 있을까. 

매일, 흡연의 무엇이 어떻게 나쁘며 나는 비흡연으로 전향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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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찾다가 

뉴레프트리뷰에 실렸던 아도르노의 "사회학과 심리학"에서 

한 문장 적어둔 걸 발견했다. 





Rationality always involves a measure of futile sacrifice; it is thus
as irrational as a world which, released from sacrifice, no longer had
any cause for rationality.


합리성엔 언제나 무용한 희생이 수반된다. 따라서 합리성은, 

희생에서 해방되어 더 이상 합리성의 명분이 필요하지 않은 세계만큼 

비합리(비이성)적이다. 


로버트 훌롯-켄터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지적 형성 과정에서 무엇보다 아도르노의 이 에세이가 

충격이고 자극이었다.. 는 얘기 한다. 이 얘길 보기 전에 이 에세이 출력해서 갖고는 있으면서 꼼꼼히 

읽지 않았다가 보고 나서 꼼꼼히 읽으려 했던 기억이 난다. 졸업하기 전의 몇 달 동안 있었던 일. 몇 달 뒤 

거처와 행방이 불분명하니 불안했던 시절이라 훌롯-켄터의 강력했던 '영업'에도 불구하고 읽지는 못했음. 

그러나 그 시절 출력했던 (미국 A4지(레터지), 한국의 A4와 크기가 다른) 그대로 갖고 있긴 하다. 출력했던 것들 

거의 전부를 버리고 남은, 하여간 옛시절이 담긴 논문. 남의 논문. ;;; 얼른 찾아서 독서대 위에 올려두고 싶어진다. 


옮겨 둔 저 한 문장을 보니 

아도르노 답고 (문장보고 저자 맞추기 문제를 만든다면, 

저 문장은 아주 맞추기 쉬운 문장이겠지. 1) 스피노자, 2) 데카르트, 3) 하이데거, 4) 아도르노. 선택이 이렇다면 

네 사람 전부 실제론 읽지 않았고 소문으로만 알고 있다 해도 맞출 수 있을 듯. 아이고 이건 쓸데없는 (futile) 

잡념이다) 왜 아도르노의 문장들이 기운나게함(energizing)이 아니고 기운빠지게함(enervating)이라는 이들이 있는지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어쩌라고? : 이런 반응도 타당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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