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those people and how unhappy most of them are.
The terrible things they do to each other.
Everything's over so quickly and you don't have any idea if it's worth it or not.
읽고 있는 니체 연구서에서
니하머스의 <니체, 문학으로서의 삶>도 길게 논의하는데
이 책에서 니하머스가 영원회귀를 "그것은 이상적 삶의 공식" 정도로 강하게,
몇몇 단장에 흩어져 있고 의미 확정이 불가하게 과장스럽고 환상적이며 모호하게 제시되는 니체의 교설을
해석하고 있나 보았다. 나는 저 책을 거의 읽었음에도 그랬나? (...) 기억,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읽은 기억도 다시 보자.
니하머스의 그 해석에서, 이 책의 저자들은 한편 "자기만족"을 보는 것 같고 (명확히 말하진 않는다) 그게 못마땅한 듯. "네가 살았던 삶 그대로를 다시 살고 싶을 때, 그 삶이 아닌 다른 어떤 삶도 가능하지 않을 때, 그 때 너의 삶이 정당화된다" 이런 해석을 하면서 니하머스는, '예를 들어 나라면 나의 삶이라면 이 기준에서 온전히 정당화된다'고 느끼고 있는 거 아냐? : 라고 이 책 저자들은 밀담하고 있는 느낌.
그런데 니하머스에게 분명히 그런 면이 있다.
삶의 거의 모두가 수월했고
그럼에도 그 모두가 또한 가치있으며 소중했던 사람?
하여튼 자기 삶에 (가끔은 스스로 믿지 못할만큼) 깊이 감사, 만족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학습된 겸손? 절제? : 이런 것을 지목 혹은 암시하는 대목들을 찾아보라면
위의 두 책에서도 수십 군데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자서전을 쓴 것도 아니며 그의 생애를 구성하는 단계들 모두가 문서로 잘 정리된 것도 아님에도
저렇게 느낀다면 착각에 불과한 걸 수 있으면 좋겠는데, 착각이 아닐 것 같다. Art of Living의 "서문"이었을 텐데,
"결혼한 철학자는 코미디에 속한다고 했던 니체는 결혼을 몰랐다. 지난 4년간 내 삶의 모두를 공유했던 나의 아내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 감사한다" 대략 이런 대목이 있다. 니체의 그 말을 저런 식으로 인용하기 위해 필요한 건, 정말로 제대로 언제나 "보호된 삶"이고 그런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건 외적 조건 외에 (이런 건 타고 나는 것인) 좋은 종류의 정신의 피상성. 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어쨌든 그래서, 그로부터 누구도 면제되지 못하는 고통이 있어 인생엔. 이런 말은 진실이 아닐 수도.
우디 앨런의 Stardust Memories에서 위의 명대사, 특히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하는 끔찍한 일들" 이 부분. 이게 사람들마다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왜 나라고 그걸 모르겠어, 하지만 생각해 보니 terrible이랄만한 일은 겪지 않은 거 같네, 내가 행운이겠지 : 이런 쪽 사람들이 니하머스를 포함해 있을 것이고.
각자가 자기 삶의 증언을 충실하게 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좋은 삶' 이것의 최고의 실현은 어떤 것인지, 그 정반대는 어떤 것인지..
실제로 알 수 있다면. 니하머스가 그의 <미니마 모랄리아: 상처입은 삶으로부터의 성찰>을 쓴다면,
그는 무슨 얘길 해줄 것인가.
*Entitled Opinions에 니하머스가 게스트
로버트 해리슨 대신 Josh Landy가 호스트, Beauty 주제로 두 개 에피가 있다.
여기서도 니하머스는 .... 말하자면, 한 번도 흔들려 본 적 없는 정신을 보여준달까 하여간.
모두가 굉장히 편안한 사람. 그런데 이런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악행을 할 가능성은 굉장히 작을 것같고
이런 사람들이 많은 세상일수록 좋은 세상일 것이다. 한국에선, 니하머스도 나오지 않지 않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