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하루를 

before / after 로 나누네요. 



아 어리둥절. 

2012년 12월 19일 저녁보다 덜하긴 한데 

그 덜해봤자 덜하지도 않은 충격, 상심, 슬픔, 어이없음, 배신감, 분노,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 또한 지나 가긴 뭘 지나가. 

수업 끝나고 걷고 지하철 타면서 집에 갈 힘도 없는 기분이라 학교에 남아서 미대선 결과 글들 조금 보다가 

서재 들어와서 씀. 



어떤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인지. 

처음으로 희미하게, 살면서 얻게 되는 보수 성향 

어떤 걸지 알 것 같은 심정. 



그렇긴 한데 

2차대전에 비하겠니. 

나치 점령 하의 프랑스. 

폭격 당하는 런던. ;;;;; 1차대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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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크 2016-11-09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먼가 멜랑꼴리하네요...

몰리 2016-11-09 20:23   좋아요 1 | URL
아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지, 미대선 소식은 꽤 충격이네요. ㅜㅜ
 



1995년 아카데미 최우수 다큐멘터리 상 받았던 이 영화에 

마야 린이 예일대 명예박사 학위 받으면서 했던 연설이 나온다. 

주제가 "사회에서 예술 art in society." 보면서 노트했다가 대강 번역했던 내용은 아래와 같음: 


"내 작품의 기원은, 사람들이 자기를 둘러싼 환경을 좀더 느끼게 만들고프다는 단순한 욕망에 있다. 사람들이 사는 환경, 그건 물리적 세계만이 아니고 심리적 세계도 포함한다. 이런 나의 욕망이 때로 내게, 미학적 기원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정치적 동기도 품은 작품들에 참여하게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준엄한 현실(sovereign realities)을 탐구하는 작품들. 예술가는 자기 작품의 "integrity"를 훼손하지 않게 애를 쓰며, 그건 작품의 "strong clear vision"을 보전하기 위해서이다. 예술은 개인의 행위이고 개인의 행위이어야만 한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 무엇인가 낯선 것을 말할 용기가 예술가에게 있어야 한다. 예술가의 개인적인 비전, 이것들이 모여서 시간을 가로질러, 우리의 역사를 가로질러, 우리는 누구인가, 나아가서 우리는 왜 우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주었다.

 

작품은 예술가가 동시대인들 뿐 아니라 우리 이전의, 그리고 우리 이후의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다. 우리 모두 우리가 여기 머물 시간이 짧다는 걸 안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 짧은 시간을 넘어 우리 존재를 확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집단 의식의 한 부분을 이루며 우리의 작품, 이미지, 생각, 그리고 글을 통해 우리 존재를 시간을 넘어 확장시킨다. 이렇게 우린 미래의 세대에게 우리가 누구였는지 알려주며, 아마도 감히 희망하자면, 이렇게 해서 우린 우리가 무엇이 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하여 미래 세대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명예박사학위는 어떤 사람들에게 왜 주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암튼) 

그녀가 이 예일대 명예박사 학위 받은 건 27세. 예일대 역사상 최연소 수여자였다는 얘기도 이 영화에 나올 것이다. 십년전 대학원 시절 보고 남겼던 기록을 찾아 옮겨 오는 것이라, 정확한 내용은 다시 확인이 필요. 


밑줄 친 마지막 문장, 놀랍지 않나. 소박하고 겸손하면서 동시에 강력하다. 그녀의 성장 배경에 대해서 

이 영화가 알게 하는 바는: 마야 린은 Ohio, Athens 출생. 어머니와 아버지는 40년대에 이민. 어머니는 오하이오 대학의 영문과 교수였고 아버지는 도예가였는데, 역시 오하이오 대학에 취직했고 미술대학 학장까지 지냈다. 그녀의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하던 미술대학의 건물, 그 근방 전체가 그녀에게 친숙한 놀이터였다고. 부모의 미적 취향이 소박, 청결 이런 거였다는데, 그녀 자신의 "clean aesthetics" 이게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거나 마찬가지. 이 다큐멘터리 보면서 가장 와닿은 대목이, 이런 내용으로 짧게 등장하는 그녀의 성장담. 그녀의 부모는 "이상적인 부모"였고 여러 면에서 그녀가 "critical eye"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또 세상에 나가 너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일을 하라, 돈을 못 벌어 가난하더라도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암묵적 장려(unsaid push). 돈과 상관없이, "창조적인 일을 한다는 것을 향한 엄청난 존중"이 부모에게 있었고, 그런 부모를 보며 배우며 자랐다는 것이다. 그녀 자신의 말대로, 이건 굉장한 행운. 그저 부러울 일이었다.......


일기쓰기의 중요성을 토론 주제로 만들려고 하면서 찾아본 글. 

어제 생각한 주제라서, 잘 만들려면 더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은 일단 대강 써보기만. 

어쨌든 기록, 기억의 중요성. 강한 개인이 전통(유산)을 만든다. 강한 개인은 대화하고 기록한다. 

본질의 사유, 심문, 기억. 존재의 탐구와 확장. 공동체의 심리적 현실. 이런 것들 생각하면서 괜찮은 

질문을 만들어 두어야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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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하기 며칠 전 그는 편지에서 최종 원고를 위해 "아직 절박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이제 남은 건 구성의 문제지 책의 알맹이(substance)의 문제가 아니다"고 썼다. 

그 알맹이와 관련해, 아도르노 자신에 따르면 "있어야 할 모두가 거기 있다." 최종 원고를 위한 개고를 

아도르노는 1970년 여름에 끝낼 계획이었고, 본문 안에서 대목들을 옮기는 일과 줄이는 일이 여기 포함될 예정이었다. 지금 이 책에 "보유 Paralipomena"로 묶인 단편들은, 이 최종 개고 과정을 위해 남겨졌던 것들이다. 또 이 책에서 "서론 초고"로 묶인 부분은, 아예 새로 쓰여질 수도 있었다. 아도르노는 문장의 세부들을 더 낫게 고치기도 했을 것이다. 이 책은, <부정 변증법> 그리고 아도르노가 쓰고자 했던 도덕 철학에 관한 저술과 함께, "내가 저울 속으로 던져 넣을 그것"을 보여줄 그의 주저였지만 미완으로 남았다. 


영어판 "편집자 서문"의 첫 문단에 있는 얘기다. 

나는 여기서 인용부호로 묶인 아도르노의 말, <미학 이론>이 "will show what I have to throw into the scale" 이 구절도 좀 사무쳤었다. 아 나의 무게는? 몸의 무게 말고! : 이런 방향으로. 몸은 헤비웨이트. 정신은 초경량급. 


무게로(체급으로) 정신의 힘을 말하는 영어 표현들. intellectual heavyweight. intellectual lightweight. 

이런 표현들이 정확하고 진실하다 새삼 생각함. 거의 같은 말을 해도, 그가 헤비급이면 강력한 펀치. 경량급이면 '어디서 주워 들은 건 있어가지고.' 이런 일들 일어나지 않나. 


존 롤스 <정의론> 한국어판 역자 서문에 이런 대목 있다: "<정의론>을 번역한답시고 떠벌이던 옮긴이에게 "정의의 이론이 없어 세상에 정의가 부재하나"라고 꼬집던 어떤 험구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하지만 정의의 문제가 해결되기 어려운 것은, 구조적 부정의의 요인을 분석, 처리하는 능력 내지는 명백한 부정의를 척결하겠다는 우리의 실천적 의지가 부족한 데에 그 일단의 이유가 있겠으나 정의에 대한 설득력 있고 타당한 기준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데도 일말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철학자의 미련만은 아닐 것이며 바로 이 점에서 철학자의 기여가 요청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험구의 말을 했던 사람이, 역자의 동료 교수라면 

그의 지적 역량은 깃털 급 아닐까. (저 말을 심오한 아이러니와 함께 말할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하지만 여긴 아이러니가 죽으러 오는 곳이니...) 아도르노 같은 헤비급이라면, 저 말을 어떻게 박살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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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7일은 마리 퀴리의 생일.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1867년생이고 1934년에 타계했다. 

어제 Writer's Almanac은 퀴리 여사의 위의 인용으로 시작했고 

그녀의 삶은 이렇게 요약되었다. "오늘은 물리학자이며 화학자인 마리 퀴리의 생일. 바르샤바 출생. 

그녀는 방사능 이론을 개척했고 그녀의 연구는 엑스레이와 암치료에서 있었던 막대한 진보를 도왔다. 

똑똑하고 호기심 많은 아이였던 그녀는 독학했다고 해야할텐데 대학이 여학생을 받지 않아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바르샤바에서 "유랑 대학"이라 불렸던 지하 강의들을 수강하며 남몰래 공부했다." 


끝 부분 문장은 이런 거였다: 

she studied clandestinely at what was called a floating university, a secret set of informal, underground classes held in Warsaw.  


"studied clandestinely" 이런 조합도 가능함. 

여성 과학자들의 (과학자 뿐이겠냐먄. 작가도, 화가나 음악가도) 여러 전기들에서 

같은 뜻의 말들을 보고 또 볼 수 있겠지. 


그런데 "사람보다는 아이디어에 호기심을 가지세요" 이거 진정 진실. 

언제나 진실인 건 아니라도 어쨌든 강력한 진실의 계기가 있지 않나. 특히 한국에서는 

사람을 너무 사람으로 보는 일과 연관되는 타락, 부패, 지배.. 흔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인간과 인간의 '관계'만이 남고 그것만이 작동하는 상황. 그런 상황 아주 흔하지 않나. 

정말, 이것도 나만 겪는 일인가. "사람보다 아이디어에 관심 가지라" 퀴리의 이 말 듣자마자 

"내 말이........!" 였으나 어느 지점에서 강력히 공감했나 적으려니, 쉬운 일이 아니고 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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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 고향 바르-쉬르-오브에 있다는 건물. 





건물 벽에 이런 인용문들도 적혀 있다. 

첫째 인용, <물과 꿈>이 출전인 인용은 

영어판에서 2쪽. 영어 번역문은: In the depths of matter there grows an obscure vegetation; black flowers bloom in matter's darkness. "물질의 심연에서 어둠의 식물이 자란다. 물질의 어둠(밤) 속에서 검은 꽃이 피어난다." 


두번째 인용, <과학 정신의 형성>이 출전인 인용은 

영어판에서 249쪽, 이 책의 맨 마지막 문장이다. 번역문은: Society will be made for school, not school for society. "학교를 위해 사회가 만들어져야지, 사회를 위해 학교가 만들어져선 안된다." 이 말, 진짜 이 말도 최고지 않나. 메리 맥알리스터-존스가 이 말을 너무나 좋아하면서 인용하고 논평하는 대목이 그녀 책에 있다.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이 책 전부를 읽어봐야 알겠지만, 바슐라르의 수많은 문장들이 그렇듯이 지극히 과하고 기벽적인(idiosyncratic) 말일 것이다.  


어제 받아온 바슐라르 연구서에서, 바슐라르 읽기가 안기는 당혹스러움에 대하여:  

"<공간의 시학>엔 예를 들어 이런 문장이 있다. "존재는 잘 존재함에서 시작한다. Being starts with well-being." 기만적으로 소박한 이 문장은 실상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이런 문장은 그의 저술에서 예외가 아니다. <공간의 시학>은 이런 문장들로 가득하다."  


"존재는 잘 존재함이다" 이건 과하고 미친 말은 아닐텐데, 

이런 기만적으로 소박한 문장들이 적지 않은 경우 (철학사를 향하는) 논쟁이고 다시쓰기일 것이라는 점. 아마 근본적으로 그럴 것이라는 점. 


그래서(그러니)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지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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