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서 중간까지는 영화 내용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한적한 노르웨이의 바닷가 마을, 엄격한 청교도적 윤리 하에 회색빛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곳에서 정말 행복해하며 살고 있다. 아토스 섬에 사는 남자 수도사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두 자매에게 다가오는 각각의 첫사랑. 그 첫사랑은 이야기의 주요한 동인이다. 바베트가 오게 된 것이 동생의 첫사랑 때문이었고, 이야기를 한결 윤기있게 하는 장군은 언니의 첫사랑이다. 그리고 바베트. 그녀는 진정한 예술가의 힘으로 다툼과 갈등이 심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준다.

영화와는 크게 다른 점은 바베트라는 인물이 전혀 다른 느낌었다는 것. 영화 속의 바베트는 다소곳한 느낌의 부인으로 보다 금욕적이었다면 책 속의 바베트는 화려한 원색의 느낌이다. 불꽃같이 타오르고 진정한 예술을 알아보는 능력과 타인을 이해하는 포용력, 거기다 인내심까지 갖춘 한상궁같은 인물이다.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다. 예술가는 가난을 초월한 사람이다. 그들은 범인과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복권으로 당첨된 만프랑을 아낌없이 만찬에 쏟아부은 바베트는 자신을 동정하는 자매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바베트의 홍조 띤 얼굴. 그리고 그 자신감 넘치는 몸가짐. 정말 너무 매력적이다. 나도 이렇게 절도있고 열정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바베트의 만찬은 기독교의 성찬식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함께 즐겁게 마시면서 과거를 추억하고 성스러웠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그 분위기 속에서 지극히 세속적인 영달만을 쫓아왔던 장군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 한 번 붙여보지 못했던 순수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

때로 한 끼의 식사란 그런 힘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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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럴리는 없겠지만, 출판사에서 꼭 짜기라도 한 것처럼 비슷한 주제의 책이 한꺼번에 나오는 경우가 있다. 올 하반기에는 교실문제를 다룬 책이 4권이나 나왔다. 하이타니 겐지로의 동화 2편과 비롯하여, <있잖아요, 민들레 선생님>, 그리고 이 책까지. 하이타니 겐지로는 한국에도 워낙 유명한 사람이지만, 이 책을 쓴 고토 류지나 <있잖아요..>를 쓴 미야가아 히로도 모두 일본에서 교육관련 동화나 글로 이름이 높은 사람들이다.

이 책은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을 인터뷰해서 쓴 책답게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교실 문제를 풀어간다. 모범생, 공부에만 관심이 있는 아이, 집안 문제로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 등교를 거부하는 아이, 선생님을 쫓아낸 아이. 오늘 날 우리 교실의 모습을 보는 듯 생생한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면, 절망적인 기분이 든다.

교육에 관한 한 나는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긍정적인 생각이 불가능하다. 위의 이야기 속에서는 단 한 명의 선생님이 교실을 구한다. 그런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볼 때마다 나는 '불가사리'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 애들은 운좋게 썰물인 해변에서 바다로 되돌려진 불가사리들이다. 많은 아이들이 이런 책을 읽으면 '감동'은 하겠지만 자신의 현실에는 별도움이 못된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된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학교라는 공간이 경쟁하도록, 누군가를 낙오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곳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성적이 없는 학교가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은 사회가 이상적 공산주의 사회(물론 이것도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가 되지 않으면 -뭐 인디언 사회같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교실의 문제를 인격자인 선생님에게 모두 다 짊어지우는 것도 너무 말이 안된다. 선생님도 인간이고, 봉급 생활자다. 결국은 사회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한 교육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열두 살의 전설>에 등장하는 릴라 선생님이나, <너는 닥스 선생님이 싫으냐>에 등장하는 닥스 선생님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다. 내 긴긴 학창시절을 회고해 보아도 그다지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없다. 그래서 싫다는 것이 아니다. 별로 기억에 안남는다는 것은 무난한 선생님들과 하루하루를 보냈다는 거니까.

교실동화의 한계는 바로 교실의 문제를 모두 '선생님과 아이들의 힘'으로 풀려고 하는 데에 있다. 물론, 좋은 선생님을 만나 잘되었다는 이야기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좋은 선생님들이 가뭄에 콩나듯 있긴 하다. 하지만, 교실에서 벌어지는 투쟁과 전쟁은 좋은 선생님 하나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이미 곪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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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가치를 전복성이라 한다면, 이 책을 쓴 나피시 교수가 처한 처지는 정말 절묘하기 그지없다. 회교원리주의자에 의해, 여성들에게 다시 차도르가 씌워지고, '사과를 유혹적으로 베어물었다'는 이유로 여대생들을 억압하는 테헤란의 어느 작은 아파트에서 대학생과 대학원생 그리고 나피시 교수가 모여앉아 금지된 소설들을 읽는다.

소설을 비롯한 모든 예술 작품들은 작품을 완성한 순간 만든 사람의 손을 떠나버린다. 작품은 결코 작가의 의도대로 읽히지 않는다. 평론가들과 같은 전문적인 분석가들에 의한 공인된 해석이 학계에서 통용되고, 교과서에 실리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리그이며, 그들만의 세계이다.

한권의 책이 독자의 손에 잡혀 읽히는 순간 그 책은 읽는 사람의 경험 체계 속에서 재의미화된다. 이 책은 단순히 독후감이 아니다. 억압적이고 어두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작품은 제각기 또다른 의미를 독자에게 제공하고, 삶의 조건들을 반성하고 반사하는 거울이 된다. 이 책의 제목에 테헤란과 롤리타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들이 워싱턴이나 뉴욕 혹은 런던과 파리에서 이 소설을 읽었다면 그저 평범한 감흥 정도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제목부터 얼마나 전복적인가. 테헤란과 롤리타. 후세인과 미국만큼이나 안맞는 궁합이다. 차도르를 벗고 그들만의 안식처에서 여자들을 롤리타를 읽으면서, 험버트가 소녀 롤리타를 자신의 환상에 끼워맞추려고 했던 것은, 호메이니를 비롯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여성들을 그들의 틀에 맞추려고 했던 것과 같음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모두 이제는 존재할 수 없는 부서진 과거를 애처롭게 끼워맞추려는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여성들은 롤리타와 험버트의 관계를 통해 그것이 자신과 상관없는 남성적 권력의 환상임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을 읽고나면 <롤리타>, <오만과 편견>, <위대한 개츠비>까지 모조리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든다. 절망적이라면 끝없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들이 소설을 읽었던 이유는 뭘까 생각하면서. 예술은 무엇가 대항할 대상이 있을 때 더욱더 강하게 타오르는 것 같다. 창작을 하는 사람도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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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나는 '재미있으니까'라고 대답한다. 좋은 책의 조건이 뭐냐고 물으면 역시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한다. 이 대답은 내가 입사면접 때 한 말이기도 하다. 딱히 시간을 들여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나에게 좋은 책은 재미있는 책이다. 당연히 용서할 수 없는 책은 재미없는 책이다.

그런데, 서점에 읽하면서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 하나를 발견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책을 사지 않는다. 재미있는 책은 '빌려서 읽거나 서점에서 서서 읽고' 좋다고 여겨지는 책을 산다. 사실, 그렇게 산 책들의 운명은 뻔하다. 사서 펼쳐볼 확률 반, 끝까지 읽을 확율은 그 반, 재미있을 확률은 그 반, 그 책을 다시 읽을 확률은 그 반이다. 남 이야기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건 내 이야기다.

그리고 두고두고 기억나고, 어느 날 문득 다시 읽고 싶은 책은 서점에서 서서 읽었던 책 혹은 도서관이나 대여점에서 빌려 읽었던 책이다. 그리고 그런 책들은 쉽게 구할 수 없다. 금방 품절되거나 절판이 되니까 말이다. 이른바 명작은 절대로 절판될 걱정 안해도 된다. 그런 책들은 메이저 출판사들에서 주구장창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토록 나올 테니...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스티브 킹 때문이다. 소시적에 이런 대중 소설이라면서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았는데, 지금 땅을 치고 후회한다. 그때 살걸. 번역이 엉망이든 책 편집이 조잡하던, 아니면 대중소설을 내 책꽂이에 꽂아두든(아, 어린 시절의 나는 얼마나 허영과 과식욕에 넘치는 존재였던가)그밖에도 많다. 수없이 절판된 만화들... 이제는 대여점에서 폐기처분된 그 만화를 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 샀던 책들은 지금도 대부분 구입할 수 있는 책들이다. 게다가 개정판까지 줄줄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때 안샀던 책들은 지금는 대부분 절판 상태고 다시 나올 확율도 낮은 상태다. ㅠ.ㅠ

그렇게 보면 내 책꽂이는 내 허영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실, 그 허영은 내게 도움이 되기는 했다. 그 허영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고전의 맛을 몰랐을 거다. 사서삼경, 도덕경, 한비자, 셰익스피어니 초서니, 그리스 로마 신화, 실러, 괴테, 도스토예프스키..아.. 솔직히 고백해 처음에는 너무 재미없었다. 지적 욕구만큼이나 더 무서운 것은 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내 허영의 욕구였다. 그 결과 나는 고전을 이제 정말 좋아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전공까지 고전을 하게됐고...^^;;

 요즘 책을 정리하다 보면 정말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책'을 들고 다녔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아, 왜 나는 솔직하지 못했던가. 지금은 재미있는 책도 사고, 그럴듯한 책도 산다. 언젠가는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책은 현재를 위해서도 사야하지만, 미래를 위해서도 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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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_hyuni 2003-12-05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저두 한때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고 그 여파는 여전히 제 책꽂이에 남아있지요. 하지만, 그 덕에 저의 관심분야가 많이 넓어졌다는 생각은 듭니다. 적어도 ''들고다님이 부끄럽지는 않아야 한다''는 저 나름의 목표 덕에, 지금의 제가 있지 않았나 싶어요. (뭐 그렇다고 제가 똘똘하거다거나 이런 건 아니구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 서재에 퍼갈께요~ ^^

starla 2003-12-05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과 정확히 같은 논리의 말을 장정일이 한 적이 있죠. 책을 버려야 한다면, 순서가 있다. 첫째, 명작을 버린다. 둘째, 큰 출판사의 책을 버린다. (맞나?) 뭐 이런...

zooey 2003-12-06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공도서관에서 볼 수 있는 책들을 버린다...는 내용도 있었던든.
 


크리스토포 워멀은 이미 국내에 그의 대표작이 2권 각각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그에 비해 이 <파란 토끼와 친구들 Blue Rabbit and Friends>는 그렇게 유명한 작품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읽는 즐거움이 있다. 무엇보다 엉크러진 것을 정돈된 상태로 이끌어가는 일종의 신화적 즐거움(혼돈->질서)과 아이의 자리는 미지의 것을 찾아가는 여행자라는 것을 은연 중에 알려주기 때문이다.

어지러진 방 안 여기저기에 장난감들이 처박혀 있다. 어두컴컴한 동굴(말이 동굴이지 장난감 블록이 쌓여진 공간이다)에 사는 파란 토끼는 왠지 지금 있는 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숲을 나온 토끼는 곰인형, 거위인형, 강아지 인형과 차례로 만난다. 그들 모두 한 눈에 어딘가 맞지 않는 공간에 놓여져 있다.

파란 토끼는 친구들과 함께 각각이 어울리는 본래 돌아가야 할 공간을 찾아간다. 강아지는 개집에, 오리는 연못에, 곰은 동굴에... 모든 것이 말끔하게 정리된 방에서 파란 토끼만이 갈 곳이 없다. 그리고 토끼는 스스로 깨닫는다. 자기가 가야할 곳은 바로 세상의 넓은 곳이라고, Adventrue!라고 외치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파란 토끼. 결말이 너무도 인상적이다.

모험이라면 비현실적인 공간과 비현실적인 인물을 상정하는 일종의 판타지가 되기 싶다. 하지만, 어린이의 공간에서 장난감과 함께 모험을 깨닫는 파란 토끼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지 않을 아이가 있을까? 장난감을 제자리에 놓는 것은 어느 집이나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들, 하지만 이것이 이렇게 신나는 이야기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게 되었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배경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검정색 윤곽선으로 둘러진 존재감이 뚜렷한 장난감 캐릭터들도 이야기에 금방 몰입하게 한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는 듯한 현실감은 그림으로부터 눈을 결코 뗄 수 없게 한다. 배경색과 장난감들의 색깔이 어둡지만 기분이 가라앉지는 않는다.  거기다, 어른들이 합격점을 주는 파스텔톤의 색상대신, 이 책에 등장하는 색상들은 모두 강렬하다.

여기에 보이는 표지의 배경색은 흰색이지만, 내가 산 책은 표지 자체도 어두운 청회색이어서 쉽게 손이 가지 않는 책이었다. 하지만 배경색이 어둡기 때문에 도리어 그 속에서 움직이는 장난감들은 뚜렷하게 부각된다. 어른의 허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유아들의 눈높이에는 방 장난감들이 이렇게 크고 친근하게 보일 것이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장난감을 바라보는 듯한 일견, 평범해 보이는 접근방식이지만, 많은 그림책 작가들이 잊고 있는 덕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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