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400.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오에 겐자부로)

 

작년에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선한 얼굴의 작가 사진과 '만엔 원년의 풋볼'이라는 소박한 제목에 속았다. 첫 장부터 정신없이 얻어맞는 기분이었던 그 장편소설은 덮으면서는 무슨 감상을 말하기가 벅찰 정도의 감동(이라기엔 더 무서운 기분)을 남겼다. 오에 겐자부로가 왜 반폭력주의자로 불리는지 어렴풋이 이해는 하겠는데, 그의 소설 읽기는 역시나 힘겨웠다.

 

폭력을 고발한다는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복수나 응징을 내세우며 독자나 관객이 가해자의 편에 서서 칼과 총을 휘두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심한 경우,'악인'과 동행하는 독자는 가해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피해자를 (어쩔 수 없이) 짓밟게 된다. 하지만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에서는 살짝 다른 기분이 든다. 그의 소설들 역시 폭력이 넘치고 피와 상처의 묘사가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책을 읽는 나는 '때리는' 입장이 아니라 '맞는' 인물에 더 가까이 서 있고, 그의 겁에 질린 눈으로 바깥 세상을, 그리고 어느새 바로 내 앞에까지 쳐들어 온 무자비한 전쟁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피가 흐르고 상처가 벌어지고 죽음이 닥치는데, '나'는 속수 무책이지만 애써 '아니야!'라고 소리지른다.

 

'풋볼'은 고립된 산속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이번에도 겨울 산속 마을에 닷새 동안 고립되는 소년들의 이야기다. 얼핏 '파리대왕'을 떠올렸지만 이 소년들은 자신들 무리 안의 서열 다툼 보다는 그들만이 남겨진 상황에서 살아남기에 더 집중한다. 채 어른이 되기 전인 소년들이 새사냥을 하고, 버려진 개를 거두고, 빈집을 터는 일은 그들이 당연히 해야할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 것만 같다. 하지만 돌아온 어른들은 끔찍한 일을 벌이고, 아이들에게 비겁한 거래를 제안한다. '풋볼'에서 처럼 마을 외곽의 조선인 부락의 소년 '리'는 소설의 배경이 말하는 이중의 피해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풋볼' 만큼이나 불편하고 섬뜩하고 무서운 이야기인데, 왜 그랬을까, 지저분하고 잔인한 장면의 묘사가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역시 노벨상 수상 작가의 힘인가. 제목이 말하는 '새싹 뽑기'는 한가로운 농촌의 정경에 대한 것이 아니라 늙은 촌장이 소년을 협박하며 하는 표현이다. 멋스러운 양장 표지와 다시 한 번, 인자한 오에 겐자부로의 사진에 속았지만, 후회는 않는다. 정신없이 무자비한 전쟁의 속으로 던져진 다음, 그 안에서 작가의 인간에 대한 믿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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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3-04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작가의 책을 사둘껄..후회한다니까요..ㅠㅠ;

유부만두 2015-03-05 10:02   좋아요 1 | URL
그런 책이 저도 많아요....

오에 겐자부로는 정말 착하게 생겼잖아요... 주위에서도 `좋다`고만 해서 무방비 상태로 책을 읽었는데, 충격과 공포 속에서 ... 그래도 문장이나 이야기가 좋았어요. 강하게 두들겨 맞는 느낌이지만, 오에 겐자부로는 훌륭한 작가에요.

[그장소] 2015-03-05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에 겐자부로 책이..있으신가봐요..부럽네요.^^
일본 문학을 이제 막 시작하는 병아리 수준이다 보니..너무 얕아요. 대출해본 책들이 더 많고..사서 볼걸..후회하죠..뭐~.
어쩐지..지금 책값이나 그때나 물가변동을 보면 그게 그건지도 모르는데.. 손해보는 느낌인지..어이없죠?

유부만두 2015-03-05 17:52   좋아요 1 | URL
저도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작년에야 처음으로 읽었어요. 저도 병아리에요~
도서정가제 실시 이후, 구간을 사게될 땐 저도 책값에 망설이게돼요.... 어쩔 수 없나봐요. ^^

[그장소] 2015-03-05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째..정가제 이후 책욕심은 더 불타버리는
이상 현상이..생겼어요.뭐 언제 오를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고요.
후회는 이미 충분히 했다는 자괴감이..충동을
부추키는 역도 함께말이죠..
 

108/400.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김연수)
옛 연인이 보낸 이메일은 십 년 전 두 사람이 로스코의 벽화를 보고 난 후 들렀던 카페와 옛 노래 그리고 그 노래를 들은 어느 일본인 이야기를 전한다. 낯설고도 친숙한 그 옛 일본 노래를 찾아 듣다가 오지은의 노래가 생각났다. 아련한 느낌. 여기, 그곳, 지금, 과거, 나, 너 그리고 삶과 죽음의 붙잡기 어려운 꼭지점들이 섬세한 노랫가락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끊.어. 진. 다.



109/400. 아이를 찾습니다 (김영하)
부모들이 꾸는 가장 끔찍한 악몽. 차마 입에 올릴 수도 없는 사고.

대낮에 눈 깜짝할 새 아이가 사라진다, 그리고 생활은 무너지고 시간은 흐른다. 십일 년 후, 중학생 나이가 되어 돌아온 아이는 모습도 남이고 사투리 억양도 남이 되어버렸다. 이 무섭고 잔인한 소설이 어찌 끝나는지 알아야겠기에 책을 덮지도 못하고 끝까지 읽긴 했는데... 아직 내 심장은 미치도록 불안하다. 이런 불행은 그냥 갑자기 뒷통수를 후려치듯 오는구나. 무섭다. 이런 내용인줄 알았다면 읽지 않았을텐데.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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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의다락방 2015-03-03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오지은의 날 사랑하는게 아니고 라는 노래에 빠져 무한반복하던때가 생각나요. 오랜만에 들어봐야겠어요^ ^

유부만두 2015-03-03 15:35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좋아하는 곡이에요!!

라로 2015-03-03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편 두 편을 읽으신 거지요???^^

유부만두 2015-03-03 15:34   좋아요 0 | URL
네;;

라로 2015-03-03 15:42   좋아요 0 | URL
지난 번 댓글에 단편,,, 이라고 하신 글이 생각이 나서요~~~ㅋㅋ
그래도 책 넘 많이 읽으세요!!! 전 어제 남편이 북플 하는 거 보다 책 읽는 게 좋다는데,,, 북플하면서 책 더 안 읽게 되었다는 끔찍한 이야기~~~~ㅠㅠ

2015-03-03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5-03-03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지은?? 찾아서 들어볼게요. 김영하의 소설은 끔찍한 얘기군요~~ㅠㅠ 먼저 읽으셔서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유부만두 2015-03-03 17:53   좋아요 0 | URL
오지은 노래 좋아요...

김영하 단편은 무시무시했어요.. ㅠ ㅠ
하지만 제가 아롬님의 독서를 미리 차단하는 게 아닐까, 걱정되네요.
제가 아롬님의 독서.기미상궁, 인가요? ^^ ;;
 

시로이 하카 (하얀 무덤)

작가 김연수의 텀블러에 올라온 단편 BGM

읽Go 듣Go 달린다 — 이번 문학동네 겨울호에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라는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http://yeonsukim.tumblr.com/post/104344614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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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5-03-02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듣다보니 오지은 노래 생각이 나네...
 

107/400. 차별 받은 식탁 (우에하라 요시히로)

 

저자는 어릴적부터 소창자를 튀긴 요리인 아부라카스를 즐겨먹었다고 했다. 그 음식은 특정 지역,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천대받던 '부락'에서만 먹었던 음식이다. 다른 동네 아이들은 그 아부라카스를 몰랐다는 게 어린 시절 저자에게 꽤나 충격이었다고 했다. 과거 육식을 하지 않던 일본에서 도축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간간이 '조선인들과 함께' 먹었다는 소내장 요리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시절 일본에서 조선인들 만큼이나 차별당한 사람들의 음식이었다.

 

이 책은 천대당하는 사람들의 천대 받는 음식 이야기다. 미국 남부의 흑인들, 브라질로 몇백년전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들 중 해안가 밀림으로 도망가 마을을 이룬 사람들, 불가리아와 이라크 지역의 집시, 그리고 금단의 소고기를 먹는 네팔의 불가촉 천민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이런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음식들을 소개한다. 그들은 먹을 게 없어서 특정한 음식을, 흙내 나는 갯가재를 이것저것 섞어서, 주인들은 종교상의 이유로, 내키지 않아서 먹지 않는 것들을 먹었다.

 

책에 실린 음식 사진들은 너무 어두워서 제대로 음식이나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하지만 저자의 '부락민의식"이랄까, 강한 자존심은 세계 어디에서도, 어느 누구와 함께라도, 떳떳하게 드러났다. 책의 맺음말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 '아부라카스'와 정육 공장을 운영했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더듬으며 말한다. 그게 자신의 음식이었고, 그게 바로 자신이었노라, 라고.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오늘도 카스트의 제일 아래 층에서는 가난하고, 질기고, 역한 냄새가 나는 음식들을 먹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내일이 어제보다 더 위태롭기 때문에, 저자의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어둡다. 이 책에 실린 뭉개진 사진만큼이나.

 

당시 우리와 대립했던 KKK 멤버나 백인들을 지금도 거리에서 마주치고 있어요. 모두 침묵을 지키고는 있지만, 상황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지요. KKK의 창설자 중 한 명이었던 포레스트 장군의 동상이 그 증거입니다. 셀마에 흑인 시장이 나오자, 백인들은 이에 대항해서 마을 공동묘지에 그의 동상을 세웠지요.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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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400. 빛 속으로 (김사량)

 

식민지의 어둠을 나타내는 열 작품 중 마지막 편. 김사량의 단편은 일본어로 쓰인 것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일본어로 쓰인 작품 속 주인공 '나'는 일본식으로 미나미 선생이라 불리는 조선 유학생이다. 배경은 일본. 그곳에서 만난 조선인 엄마를 둔 어린 학생을 통해 식민지 시대 조선의 처지를, 그리고 일본어로 쓰는 조선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투박하게나마 인물의 속내를 설명하고 이해하려 애쓰는 작가는 끝내 자신의 갈등을 후련하게 풀어내지는 못하는 듯하다. 선생과 이 어린 학생과의 화해는 이루어질까. 글도 말도 아닌 몸으로 풀어 표현하는 무용을 이 두 인물이 택하는 것은 꽤 의미심장해 보인다. 하지만 학생의 폭력적인 아버지가 등장하기도 전에 끝나는 소설은 불안하다.

 

일본어로 쓰여진 일제 강점기의 소설이라니. 그것도 일본이 배경인. 김사량의 소설은 그 사실만으로도 무겁고 어렵다. 하지만 피하지 말고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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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5-03-01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주 팟캐스트 낭만서점에서 소개되었는데 혹시 들으셨는지요? 저는 작가 이름부터 처음 듣는 작가였어요.
이 시리즈 꾸준하게 읽으시네요.

유부만두 2015-03-01 00:04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처음 알게되었어요. 이 시리즈 전집을 구입했어요. 꾸준히 열 권 다 읽으려고요~

라로 2015-03-01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부만두님 책을 일주일에 몇 권이나 읽으세요????대단대단!!!!

유부만두 2015-03-01 15:05   좋아요 0 | URL
요샌 얇은걸 읽고 꼬박꼬박 기록을 하니 꽤 많이 읽는듯 보여요;;;
그리고 이 작품은 단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