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행과 작별에 대한 그 곡을 연주했다. 한 미국 사내가 연인 곁을 떠난다. 그는 줄곧 그녀를 생각하면서 도시들을 지나간다. 한 도시, 또 한 도시, 한 소절, 또 한 소절, 피닉스, 앨버커키, 오클라호마. 그는 차를 몰고 지나간다. 내 어머니로서는 결코 할 수 없었던 방식이다. 만약 우리가 그런 식으로 사태를 뒤로하고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머니는 바로 그런 것을 생각하셨던 것이 아닐까. 슬픔을 그런 식으로 지나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크루너, 38)

 

문제는 말이야, 레이먼드, 그 시절 우리는 네게 그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었고 너는 그저 웃어넘겼다는 거야. 그래서 우리도 함께 웃었고, 그러고 나면 모든 걸 농담처럼 흘려보낼 수 있었지. 네가 여전히 그대 같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내가 정말 어리석었어.” (비가 오나 해가 뜨나, 63)

 

나도 똑같은 말을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젊고 재능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난 확신은 할 수 없어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인생에서 많은 실망을 만나게 될 테니까요. 정상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꿈을 가질 수 있겠죠......” 여자는 다시 미소를 짓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이런 말은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난 모범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당신은 나보다는 틸로랑 훨씬 비슷해요. 실망이 닥친다 해도 계속 노력할 거에요. 틸로처럼 당신도 말하겠죠. 난 무척 운이 좋다고.” 잠시 동안 여자는 내 모습을 머릿속에 담아 두려는 듯 지그시 나를 응시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어놓아서 평소 모습보다 나이가 들어보였다. “당신에게 행운이 함께하길 빌어요.”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말번힐스, 142)

 

 

나는 문득 뭔가를 깨달았어요. 아직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정원 같은 게 저 멀리 있었어요. 그 사이에는 많은 것들이 있었죠. 처음으로 안 거예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정원이 있다는 걸요.”

해질 무렵 그는 호텔을 나서서 광장을 가로질러 카페로 와서는 휘핑크림을 올린 사치스러운 아몬드 케이크를 주문했다. 의기양양한 기분을 애써 자제하면서. (첼리스트,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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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5-05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름신을 부르시는 군요!! 네네 읽을게요~~~^^*

유부만두 2015-05-05 13:01   좋아요 0 | URL
옙, 제가 불렀어요. ㅎㅎ
녹턴 좋아요. 읽으세요. 왠지 위로가 됩니다..
 

페르시아의 민족서사시 <샤나메>에 따르면, 보르주야는 호스로 왕에게 인도 여행을 허가해 달라고 청한다. 시체 위에 뿌리면 죽은 자를 살릴 수도 있다는 마법의 산에서 나는 약초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인도에 도착한 그가 만난 현인은 그 이야기 속의 시체가 '무지'를 가리키고, 그 약초는 '낱말 words'이며, 마법의 산은 '지식'이라고 말해주었다. 무지를 치유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책에 담긴 낱말뿐이므로, 보르주야는 <판차탄트라>를 갖고 돌아왔다. (82)

 

 

어쨌든 이 마약 은유가 어디서나 쓰이는 언어적 상황은 이런 정크푸드와 디저트를 중독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이 우리 문화에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식품을 탓함으로써 튀긴 음식이나 설탕 범벅의 스낵을 먹는 자신들의 죄와 자신들을 분리한다. "그건 내 잘못이 아냐. 컵케이크가 그렇게 만들었어." 우리의 연구 또한 여성이 남성들보다 리뷰에 마약 은유를 더 많이 쓰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알아냈는데, 이는 건강식품이나 저칼로리 식사에 적응하라는 압박이 여자들에게 특히 더 심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197)

 

 

아이스크림, 젤라토, 소르베, 셔벗, 레모네이드, 소다수, 민트 줄렙 (마멀레이드는 말할 것도 없고)은 모두 중세의 여름 시럽과 무슬림 세계의 샤르바트의 후손들이다. 내가 어릴 때 캘리포니아 교외에서 여름날 그 가루를 한 숟갈 듬뿍 떠서 물에 타 마시던 현대 인스턴트 음료의 연원도 5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초기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 노점상을 거쳐 16세기 터키와 페르시아의 노점상에게 닿는다.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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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5-05-03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약 은유에 대한 분석 공감 돼요. 특히 여성이 남성들보다 리뷰에 마약 은유를 더 많이 쓰는 경향이, 저칼로리 식사에 대한 압박이 여자들에게 더 심하다는 걸 암시한다는 내용이요. ^^

유부만두 2015-05-03 09:15   좋아요 1 | URL
그쵸? 책의 비유에 대한 분석이 재미있어요. 가격이 싼 음식은 마약에, 비싼 음식은 섹스에 비유한다더군요.
 

"그러고 보니 스티븐스 씨, 당신이 대체 어떤 책을 읽으시는지 궁금해지네요."

"그냥 책이오, 켄턴 양."

"그건 알아요, 스티븐스 씨, 과연 어떤 책이냐, 그게 제 관심사죠."

고개를 쳐든 나는 캔턴 양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얼른 책을 덮어 품에 끌어안고는 벌떡 일어섰다.

"이봐요, 캔턴 양." 내가 말했다.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군요."

"책을 가지고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세요, 스티븐스 씨? 난 뭔가 난잡한 내용이 아닐까 의심스럽군요."

"캔턴 양, 그게 말이나 됩니까? 당신 표현대로 '난잡한' 것이 어찌 우리 나리 서가에 꽂혀 있을 수 있겠소?"

"제가 비록 베짱이 없어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학구적인 책 중에도 지극히 난잡한 대목들이 담긴 게 많다고 들었어요. 자, 스티븐스 씨, 뭘 읽고 계시는지 한번 보게 해 주세요."

"캔턴 양, 부탁이니 날 혼자 내버려 둬요. 모처럼 잠시 여가를 즐기는 사람을 이렇게 쫓아다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오." (204)

 

실랑이 끝, 켄턴 양은 책을 빼앗는데....

 

 

그녀가 손을 내밀더니 내 손아귀에서 가만가만 책을 빼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러는 동안 나는 외면하고 있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지만 그녀가 워낙 바짝 붙어 있어, 고개를 다소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비튼 후에야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캔턴 양은 아주 천천히, 내 손가락을 한 번에 하나씩 풀어 내며 책을 차지해 가고 있었다. 그 과정이 내게는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는데, 그동안에도 나는 어렵사리 그 자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스티븐스 씨, 별 창피할 것도 없는 책이잖아요. 감상적인 연애소설일 뿐인데."

(205-206)

 

하, 이 달콤한 장면에서 당황한 스티븐스 씨의 얼굴이 또 그의 코앞에서 장난하는 캔턴 양의 장미꽃 향수가 떠오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스티븐스 씨의 변명. 연애 소설은 훌륭한 어휘 구사력 습득을 위하여 읽는 것일 뿐이라고. 연애소설의 황당하고 감상적인 줄거리는 시간낭비처럼 느껴지지만, 자신은 원칙을 세워두고 읽는다는 그. 아,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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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4-08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부분에서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궁금해서 죽는 줄 정도는 아니지만 답답했다는요~~~ㅋㅎㅎㅎㅎ 가즈오 이시구로 넘 얄미웠어요~~ㅋㅎㅎㅎ 독자를 갖고 놀아~~~~^^;;;

유부만두 2015-04-08 17:27   좋아요 0 | URL
그쵸 그쵸.

막 변명하고 부끄러워하는 스티븐스 씨가 상상되서 우습기도 했고요.
 

파이 소가 양념에 재워지는 동안 거기서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는 것은 정말 흐뭇했다. 냄새는 기억 속의 소리와 향을 전하며 과거의 어떤 시간을 떠오르게 하는 특성을 지녔다. 티타는 냄새를 흠뻑 들이마시며 그 각별한 냄새나 향과 함께 자신의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걸 좋아했다 (16)

고개를 돌리자 페드로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 순간 티타는 팔팔 끓는 기름에 도넛 반죽을 집어 넣었을 때의 느낌이 이런 거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얼굴과 배, 심장, 젖가슴, 온몸이 도넛처럼 기포가 몽글몽글 맺힐듯이 후끈 달아올랐다. 티타는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페드로의 눈길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24)

어머니 옆에서는 가차 없이 미리 정해진 일을 해야만 했다. 질문의 여지도 없었다. [...] 매일 매일, 해마다 그렇게 똑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그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 어머니의 명령에서 자유로워진 손을 보며 티타는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 결정을 내린 적이 한번도 업성ㅆ다. 이제 그녀의 손은 뭐든지 할 수 있었고, 무엇을 만들건 상관없었다. 손이 새가 되어 훨훨 날아갈 수 있다면! 그 손이 자신을 멀리, 가능한 한 아주 멀리 데려가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티타는 안뜰로 난 창문에 다가가 하늘을 향해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117-118)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고 하셨죠. (124)

티타는 인형의 섬세한 모양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어렸을 때 소원을 비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이었던가 생각했다. 그때는 불가능이라는 게 없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을 다 바랄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금기시되는 것과 죄악시되는 것, 정숙하지 않은 것은 바랄 수 없다. (184)

나는 나예요! 원하는 대로 자기 삶을 살 권리를 가진 인간이란 말이에요. 제발 날 좀 내버려 둬요! 더 이상은 참지 않을 거예요! 나는 어머니를 증오해요! 항상 증오해왔다고요!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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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설명하는 아주머니로부터 죽순 1킬로그램을 9천원에 샀다. 우선은 닭볶음탕 - 난 이 근본 없는 '볶음탕'이라는 말을 굉장히 싫어한다. 볶음이면 볶음이고 탕이면 탕이지 볶음탕은 어느나라의 요리법이란 말인가. 닭도리탕의 '도리'라는 말이 일본어 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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