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장에 하루씩 건조하고 냉정하게 세월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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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넬은 달라졌다. 침대에서 나와 램프에 불을 켜고 거울 속을 들여다 보았다. 거기에는 자신의 얼굴, 평범한 갈색 눈, 세 가닥으로 땋은 머리, 어머니가 싫어하는 코가 있었다. 한참 동안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전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이게 나야." 넬은 속삭였다. "나."
넬은 자기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인지 전혀 몰랐지만 한편으로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게 나야. 난 그들의 딸이 아니야. 나는 넬이 아니야. 나는 나야, 나."
나라는 말을 할 때마다 힘처럼, 기쁨처럼, 공포처럼 그녀 안에 무언가가 모였다. 넬은 자신이 발견한 것을 품고 침대로 되돌아와 창밖 마로니에의 검은 잎을 바라보았다.
"나," 넬은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퀼트 이불 속으로 더 깊이 몸을 파묻었다. "내가 원하는 건... 내가 되고 싶은 건... 근사해지는거야. 아, 주님, 저를 근사하게 만들어주세요." (47-48)

"흠, 참을 수 없다느니 그딴 소리나 나불댈 생각은 마라. 결혼은 언제 할 셈이냐? 아기도 낳아야 할 테고. 정착을 해야지."
"전 다른 누구도 만들고 싶지 않아요. 제 자신을 만들고 싶어요."
"이기적이구나. 어떤 여자도 남자 없이 떠돌며 살 수는 없어."
"할머니는 그러셨잖아요."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어."
"엄마도 그랬고요."
"원해서 그랬던 게 아니었다니까. 혼자 외따로 살고 싶어하는 건 옳지 않아. 네게 필요한 건 ... 너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말해주마."
술라가 일어나 앉았다. "저에게 필요한 건 할머니가 입다무시는 거예요."
(133)

신에 대해 사람들이 비밀스럽게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신은 그들이 찬송하는 세 개의 얼굴을 가진 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네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네번째 얼굴이 술라를 설명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다양한 형태의 악과 더불어 평생을 살아왔고, 하느님이 그들을 돌봐주실 거라고 믿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에게는 형제가 하나 있고 그 형제는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여준 적이 없다고 믿었다. 그런 마당에 어째서 그가 그들을 봐주겠는가?
그들이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사악한 피조물은 세상에 없었다. 성질을 돋운다면 쉽게 죽여버릴 수도 있겠지만 의도적으로 그러지는 않았다. 이로써 왜 그들이 누구라도 `떼로 공격해 죽일` 수 없는지가 설명되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품위 없는 짓이었다. 악의 존재는 우선 인식하고 그다음 잘 다루어 극복하고, 살아남고, 선수 치고, 승리를 거두어야 할 상대였다.
(170-171)

"내가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해서 네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줄 아니? 이 나라 흑인 여자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나도 알아."
"어떻게 사는데?"
"죽어가고 있지. 바로 나처럼 말이야.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그 여자들은 그루터기처럼 죽어간다는 거야. 나, 나는 저 미국삼나무 중 하나처럼 쓰러지고 있고. 나는 정말로 이 세상에서 살아봤어."
"정말? 그 증거로 보여줄 수 있는 게 뭔데?"
"보여줘? 누구한테? 얘, 내 마음은 내가 갖고 있어.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것도. 무슨 말이냐면, 나는 내거야."
"외롭잖아, 그렇지 않니?"
"그렇지. 하지만 내 외로움도 내 것이야. 지금 네 외로움은 누군가 딴사람 거고. 딴사람이 만들어서 너에게 준 거지. 그게 뭐 대단하니? 중고 외로움이지."
(205)

"하지만..." 넬은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난 어떻게 하고? 내 생각은 안 했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난 너에게 한 번도 상처 준 적 없어.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그이를 빼앗아갔니, 왜 내 생각은 안 했어?"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난 너에게 잘해주었는데, 술라,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니?"
술라는 널빤지를 댄 창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고 눈 위의 줄기 달린 장미는 아주 새까맸다. "그건 중요하지, 넬. 하지만 너한테만이야. 다른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아. 누군가에게 잘해준다는 건 누군가에게 비열하게 구는 거랑 똑같아. 위험하지. 그래봤자 아무것도 얻지 못해."
(207)

이렇게 지친 기대의 상태에 있으면서 술라는 자신이 숨을 쉬고 있지 않음을, 심장이 완전히 멎었음을 알아차렸다. 공포의 주름이 그녀의 가슴에 가 닿았다. 당장이라도 머릿속에서 격렬한 폭발이 일어나고 숨을 거칠게 들이쉴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비로소 그녀는 이제 더는 어떤 고통도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깨닫기보다는 느꼈다. 그녀의 육체는 산소가 필요치 않았다. 그녀는 죽었다.
술라는 자신의 얼굴이 미소 짓고 있음을 느꼈다. `와, 별일을 다 보겠네.` 그녀는 생각했다. `아프지도 않았어. 기다렸다가 넬한테 말해줘야지.`
(214)

이제 그는 얼음이 덮인 강 위로 높이 뜬 달을 응시했다. 그의 외로움이 발목 주변 어딘가에 떨어졌다. 다른 어떤 감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의 눈을 어루만져 눈을 깜박이게 만드는 감정이었다. 몇 달인가 몇 주 전 그녀를 다시 보았다. 그는 호지스 씨를 위해 낙엽을 긁다가 낙엽을 쓸어 담을 2부셀짜리 바구니를 가지러 지하 창고로 갔다. 복도에서 작은 방으로 이어지는 열린 문을 지나쳤다. 그녀가 거기 테이블 위에 누워 있었다. 틀림없이 그녀였다. 똑같은 어린 소녀의 얼굴, 똑같은 눈 위의 올챙이, 그러니까 그가 틀렸다. 완전히 틀렸다. "언제나"가 전혀 아니었다. 그가 얼굴을 아는 누군가에게서 또다른 것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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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요요로 하자.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시간. 영원을 향해 직선으로 흐르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는, 요요의 시간으로 하자. 그래,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아. ㅡ <요요> 300

 

 

현수는 할 수 있다면 자신을 모조리 분리시키고 싶었다. 나사들을 하나씩 풀어서 모든 부품들을 늘어놓고 처음부터 다시 짜맞추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다시 짜맞출 수 없대도 일단 해채하고 싶었다. 삐걱거리는 육체를, 가누기 힘들 정도로 무거워진 심장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고통이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줄 것 같았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폭설처럼 다가와 누추한 모든 마음을 덮어줄 것 같았다. 모든 게 텅 비길 원했다. ㅡ <힘과 가속도의 법칙> 261

 

 

꿈이나 미래 같은 단어들은 한입에 먹기엔 버거운, 세상에서 가장 큰 복숭아 같다. 일단 베어 물면 달콤한 즙이 새어나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덩어리에 압도당하고 만다. 달콤하던 즙은 점점 시큼한 맛으로 변하고, 복숭아는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 ㅡ <보트가 가는 곳> 223

 

 

태워드려요?

아뇨. 걸어갈게요.

내일 봐요.

네, 내일 봐요.                          ㅡ <종이 위의 욕조> 198

 

 

가 있는 마음을 가져오려면 많은 걸 잃을 것이다. 잃는 게 무엇일지 하나하나 따져보고서 정민철은 류영선을 포기했다. 포기해야겟다고 생각했다. 포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포기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정민철은 '포기'라는 단어를 생각했고, 소리내어 발음해보기도 햇다. '포기'라는 발음에서 쏟아져나오는 한숨은 정민철의 마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ㅡ <뱀들이 있어> 134

 

 

술은 물보다 강합니다. 물은 몸에 에너지를 주지만, 적당한 술은 우리의 몸에 초능력을 줍니다.

                                 ㅡ <가짜 팔로 하는 포옹> 109

 

 

두개골이 얼어붙었나. 머리끝의 차가운 기운에 놀라서 이호준은 눈을 떴다. 머리를 만져보았다. 두피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현실감각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ㅡ <픽포켓> 47

 

 

탁구공은 격렬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똑, 딱, 똑, 딱, 규칙적으로 움직이다가 머리에서 뒷덜미를 타고 내려와 차양준의 심장 속으로 들어갔다. 차양준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 보았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처럼 탁구공이 손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차양준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ㅡ <상황과 비율>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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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는 이교도인 와일드를 불편하고 괴롭게 했다. 그는 복음서가 전하는 기적을 용서하지 못했다. 이교도에게 기적이란 예술인데 기독교가 예술의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비현실을 추구하는 예술가라도 실재하는 삶 가운데서는 현실성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37)

 

와일드는 예술가의 인생에는 일종의 치명적인 숙명이 동반되며, 생각은 인간을 뛰어넘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43)

 

"내 인생의 비밀을 알려줄까? 나는 나의 모든 천재성을 내 인생에 쏟아부었어. 내 작품에는 고작 재주만을 부렸네."

그보다 더 사실일 수 없었다. 와일드의 가장 뛰어난 작품도 그의 화려한 말솜씨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 이라면 누구나 그의 글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처음에는 얼마나 참신한 이야기인가. 발자크의 <나귀가죽>에 비하면 얼마나 대단하고 또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하지만 글로 남겨진 그 작품은 실로 실패한 걸작이 아니던가! 그의 재미있는 이야기는 문학적 간섭을 지나치게 받아 아무리 수려해도 허식을 지울 수 없게 된다. 미사여구로 멋을 내느라 최초의 이야기가 지녔던 아름다움이 가려진다. 독자로서는 그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거치는 세 단계를 놓치기가 쉽지 않다. 최초의 생각은 언제나 아름답고 단순하며 오묘하고 놀랍다. 일종의 잠재적인 필연성으로 각각의 부분이 인위적으로 전개되고 작품의 구성이 서툴러진다. 그 후 와일드가 각 문장을 다듬고 손보면서 지나친 기교를 더하고 진부한 표현으로 뒤바꿔 감동은 사라지고 독자는 영롱한 표현 밑에 가려진 심오한 감정선을 놓치게 된다. (51)

 

"B는 끔찍하네.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네. 내가 다시 과거의 나로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남들이 나를 변화시켰다며 비난을 퍼붓고 있네. 하지만 사람이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지. 내 인생은 예술작품이네. 그런데 예술가가 같은 작품을 다시 만드는 법이 있던가? 그랬다면 그 작품은 실패작이어서겠지. 수감 이전의 내 인생은 최고로 성공한 인생이었다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나의 과거라네." (60-61)

 

와일드는 몇 번이나 말한 바 있다. "인생에서 얻은 모든 것은 예술로서는 잃은 것이다." 그랬기에 와일드는 비극을 맞이했다. "그렇다면 결국 예술만이 이 모든 것의 결론인가요?"라고 와일드는 <의도>의 화자를 통해 묻는다. 다른 화자를 통해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예술은 우리를 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10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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