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탄생철학의 고된 탄생에 대하여

미래에 놓인 것으로서의 죽음은 죽어야 할 운명인 자들의 시간을 향해 열린 존재를 근본적으로 동요시킨다. 이러한 죽음과 달리, 탄생은 탄생한 자들이 모두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혼란스런 자유 이전의 과거에 속한 것이다. 17

하이데거의 “죽음으로 미리 달려감”과 쌍을 이루는, 이전에 결정된 “탄생으로 되돌아감”때문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탄생은 반드시 개별자의 죽음과는 달리 처음부터 타자와 결부되어 타자에 종속되는 “사회적 생겨남”(한스자너)을 가리킨다. 18

철학은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탄생보다 죽음에 대해 더 많이 논의하였다. 탄생이 아니라 죽음이 철학의 “뮤즈”가 되었던 것이다. “탄생에 대한 망각”(한스 자너)과 “탄생에 대한 맹목성”(페터 슬로터다이크)은 무의 망각과 “죽음의 심취”에 보완적으로 작용하면서 탄생에 대한 철학의 결핍을 강조한다. 19

2. 철학적 조산술에 대하여

스승은 오히려 인식을 낳을 수 있는 자들 안에 이미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나게 할 뿐이다./단지 자신이 의도했던 깨달음을 제자 스스로 낳을 수 있을 때까지 현명하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참을성 있게 제자에게 질문해야만 한다. 철학적 조산사가 이렇게 함으로써 노예는 인식하는 자로서 자율적이게 된다. 32

3. 한나 아렌트의 출생성 철학

하이데거의 해석은 죽음의 철학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이 사실적인 현존재를 대부분 등한시했다. 사실상 “끝을 향한 존재”가 하이데거 해석의 중심이다./한나 아렌트의 탄생 철학은 궁극적으로 하이데거의 죽음학과 대립되며, 하이데거의 “죽음으로 가는 존재”에 대한 선호는 “탄생하는 존재”(한스 자너)와 대립되며, 죽어야할 운명은 “출생성”과 대립되며,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내던져짐”의 철학은 탄생에서 유래하는 시작함과 대립된다./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새로운 시작을 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능력이 ㅂㅏ로 그녀의 “탄생성”의 핵심 개념이다. 43

이 새로운 철학은 하이데거처럼 존재와 무의 긴장으로부터 현존재를 규정하지만, 현존재의 배열에서는 완전히 다른 변화를 시도한다. 48

“가장 최상의 삶은 둘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아는 것이다...제3자의 근원은 둘이 그렇게 하나가 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여기서 복수성이 비로소 시작한다. ‘개체화의 원리‘라는 의미에서의 실존이 여기서 발생한다.” 59/ “사람들과 함께 시작은 세계로 왔다. 여기에 인간의 자발성의 성스러움에 근거한다.” 60 “만약 인간의 창조가 우주 속에서 시작의 창조와 동시에 발생한다면, 자신들이 새로운 시작인 개별적 인간들의 탄생은 인간들의 근원적 성격을 증명한다. 이 근원은 결코 더 이상 과거의 일이 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시작들을 기억하는 지속성이 세대의 연속에 있다는 사실은 결코 끝나지 않는 역사를 보증한다. 왜냐하면 탄생은 그 존재가 시작인 피조물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64, 65

죽음은 단지 이 세상의 사건으로서... 한 번 이 세상에 와서 세상의 역사를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단 한 번이고 단 한 번의 새로운 것이 단지 단 한 번 발생할 뿐이다. 이에 반하여 한나 아렌트는 출생성을 구원과 결부된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인간으로서의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이라고 이해한다. 단지 한 아이가 탄생한 것이 아니다. – 우리 모두가 아이이듯이 우리에게 모든 아이가 탄생한 것이다. 69 :.

하이데거와 플라톤이 “모든 것을 간직하면서” “더욱더 고향을 추구하는” 입장으로 결코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철저하게 보수적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아렌트는 신과 같은 형상이라는 이념에 대해서도 ㅇl렇게 말한다.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유일한 피조물이라면” 인간은 “신에 상응하는 시작하는 능력을 타고나게 된다.” 이는 하나의 상호 관계로서, 신과 같은 형상은 시작하는 능력을 함의한다. 71

“시작이 있기 위해서” 인간이 창조되었다면, 그 인간은 자신의 입장에서는 최초이며 이미 주어져 있는 “원칙적으로” 창조된 세계에서는 새롭고 유일한 “누군가”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누군가는 강조된 의미에서 “시작”이라는 술어를 획득한다. 76

“인간의 조건” 안에서, 즉 행위의 조건은 탄생성이고 사유의 조건은 죽어야 할 운명이다. 삶과 관련된 사유는 죽음에 비해 삶을 우선시하는 조건들을 미리 확정한다.” 뜻밖에 그녀는 다시 경건해진다. “ 이 세계에서 불멸성을 소망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모독이다. 이 소망이 죽음을 제거하기 때문이 아니라 탄생을 부정하기 때문이다./”인간들 사이의 인간으로서의 인간”이라는 복수적 현존재는 죽음이 아니라 탄생에 기초한다. “하이데거는 틀렸다. 인간은 ‘세계로‘ ‘내던져지지‘않았다. 만약 우리가 ㄴㅐ던져진 존재라면 – 동물과 다르지 않게 – 이 지구에 ㄴㅐ던져진 것이다. 인간은 세계로 바로 ㅇㅣ끌어진 것이지 내던져진 것이 아니다. 여기서 바로 인간의 연속성이 성립되며 인간의 귀속성이 개시된다. 우리가 세계에 내던져진 것이라면 슬픈 일이다!” 86, 87

“이해하는 것은 행위의 다른 면이다” 이 행위의 한편으로 제시된 의사소통적 행위인 “말하기”와 마찬가지로 이해는 말하자면 화용론의 쌍둥이이다./”이해”는 정확히 행위와 탄생의 시작성에 부합한다. “시작을 본질로 하는 ㅍㅣ조물은 주어진 범주없이 ㅇㅣ해하기 위해서..그 자체에 충분한 근원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88

4. 시작된 시작에 대하여

슬로터다이크는 “세상에 오는 것”에 대한 분석에서 탄생과, 세상에 와서 자신에게로 오는 것 사이를 구분한다. 하이데거의 선입견과 상관없이 인간이란 차라리 탄생한 “강림한 동물”이지만, 실제로 자신 스스로 이 세상에서 무언가 시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한 번은 이 세상으로 스스로 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105

그는 “스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응답한다./인간이 성숙해지는 날은 결국 주체가 삶의 노고와 위험에 대한 충분한 통찰을 가지고 죽음의 확실성을 파악하며서, 이러한 삶을 이어가게 하는 생식에 대한 위임을 자신의 부모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을 결심하는 날일 것이다. 107

나는 주어진 것이다. 108

5. 탄생의 강제에 대하여

“강제”가 문자적으로 함축하는 의미 말고도, 부과된 존재, 규정된 존재, 운명적인 존재라는 강한 은유로 탄생의 숙명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 111
이러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 탄생을 죽음과 구분 짓는다. 112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영혼들이란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미 항상 순환적으로 돌며 움직이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첨예화한다. “그래서 탄생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이 지니는 어떤 수준에 대한 심판이 된다. 누구든지 자신의 영혼의 완성을 향해 스스로 만드는 인생을 살아간다. 115

탄생 철학의 질문들과 문제들은 시작함을 부정하는 업보설을 전혀 용납하지 않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117

“탄생의” 현존은 현존재의 존재 성격이며, 스스로 “시작을 향한 존재”로서 자기 존재와 관계하는 것이다. 120

사르트르는 내가 갑자기 홀로 어떤 도움도 없이 이 세계에 참여하고 이 세계에 대해 총체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123 스스로 거부하는 내던져짐은 바로 “내던져진 기획”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스스로 기획하는 내던져짐의 총체 개념이 될 수 있는 것이다.125

그들의 미성숙한 자녀가 가능한 한 일찍 성숙할 수 있도록 하고 “세계시민”으로서 지체 없이 자유의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의무인 것이다. 단지 이러한 자유만이 탄생의 강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128

탄생이 활동적 삶의 본질적 차원으로서 생산과 노동보다 우위에 있는 행위를 의미한다면, 그래서 이것을 스스로 시작하는 존재의 행위라는 고유성으로 이해한다면, 생산은 이러한 시작하는 행위를 취소하게 한다...인간공학은 생산자라는 돌연변이가 된 창조자가 자신의 생산물에 대해 가장 지속적으로 구속하는 강제인 것이다. 133

6. 원인이 되는 자의 원칙과 책임의 윤리에 대하여

출산은 불가피하게 책임이라는 구속을 부여한 것이다. 124 부모와 자식 사이에 취소할 수 없는 비대칭적인 책임 관계를 정초한다. 135

지구가 하나의 책임을 지게 하는 유산인 한에서 미래와 연관된 가장 멀리 나아간 윤리의 계명에 따라 지구를 훼손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생겨난다. 81 이상 한스 요나스

7. 삶의 선물과 “세계의 빛”에 대하여

인간은 그 어떤 시작이 아니라면, 죄인으로 탄생한 것이다. 149

왜 탄생한 자들이 희미해진 “세계의 빛”을 바라보는지 그리고 왜 그들의 삶의 “선물”을 부담과 구분하기 힘든지, 그 이유를 고통의 교육학도, 그 어떤 죄 혹은 벌에 대한 구성주의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없고 전혀 정당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151

8. 내던져짐의 거부에 대하여

고대 그리스는 성경의 전통과는 달리 어던 본래의 창조주도, 즉 “무로부터의 창조”도 알지 못한다...창조주와 재판관 사이의 최종 심급의 합치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더욱더 철저하게 “무엇을 위해서”라는 탄생한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다. 165

“최악의 것은 바로 죽는 것이며 두 번째로 악인 것은 한 번은 죽는 것이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인간들이 그들의 공허함을 탄식한다는 의미에서 죽어야 할 운명인 ㅈㅏ들로 간주되는 것이라면 그들의 죽어야 할 운명을 구제할 수 있는 자는 바로 탄생한 자들이다. 171

우리 모두는 자기 스스로에게 머무르는 무능력을 물려받았다. 이 무능력 때문에 창조자는 유감스러운 입증 방법을 제공했다. 그것이 바로 생식이다....생성이라는 죄를 짓게 하는 요청, 즉 ‘성장하고 증식하라‘는 것은...이러한 요청은 나쁜 신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신의 거침없는 나르시시즘이 그의 피조물을 부추겨 가장 효과가 큰 모든 모방 행위를 하도록 했다. 174

9. 금욕에 대하여

오늘날 출산 통제가 쉽게 이루어지는 이 시대에 여전히 “희생‘에 대해 말해야만 하는가? 완전한 포기나 완전한 고된 금욕 없이도 탄생하지 않은 자의 파라다이스로 가는 편안한 치유의 길이 열린 것이 아닌가? 178

10. 마치 선물과 같은 것에 대하여

그 반대의 반응은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근본적인 원한 감정의 의혹에 있다. 탄생한 자로서 탄생을, 살아가는 자로서 인생을 한탄하며 사는 자들은 아마 틀림없이 삶을 미워하고, 창조자를 미워하고, 부모를 미워한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 삶에 무력해지고 생기를 잃어 분명히 삶에 감사할 줄 모를 것이라고 추측된다. 180

(탄생이) 강제라는 타당한 근거로서 아이의 미성숙성은 들이닥친 선물과 분리 불가능하게 결합되어 있다....제1의 탄생은 강제적으로 시작된 삶으로서 미성숙하지만, 제2 의 탄생은 칸트적 의미로 성숙한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자발적 능력, 아렌트적 입장에서는 스스로 시작하는 행위의 능력을 지니는 성숙한 인간의 탄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들이닥친 선물) 189

모든 고전적이고 지엽적인 윤리에 맞서서, ...자신의 동의 없이 탄생한 (모든) 존재는 자신이 실존한다는 사실과 화해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삶이 선물인 것처럼, 이 세상이 빛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122

볕뉘

0. 선불교의 철학을 읽은 뒤였다. 궁금하여 몇권을 더 추천받아 읽고 싶었다. 같은 출판사의 이 책을 인상깊게 읽었다는 관계자의 말에 따라, 연관읽기로 제목이 무척 끌렸다. 아래는 읽는 도중 몇 꼭지 생각꼬리다.

1. 한나 아렌트의 말이란 책에서 인터뷰 여러 꼭지에서 흥분되기도 하고, 사유의 긴장을 늦추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다. 아렌트의 박사논문, 하이데거와 다른 사유를 잉태하였다는 점, 그 전개가 놀랍다. 혁명에 대한 사유도 거침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에게는 ‘공화‘의 지평을 멋지게 확장한 이로 마음 속에 다시 박혀있다. 몇 번의 다시읽기가 전제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척 흥미로운 책이었다.

덧말 1. 죽음은 본질적으로 나만 생각하게 한다. 이상하게도 개인에 사로잡히게 하는 장치인 듯하다. 단 한 번인, 단을 붙이게 만든다는 점에서 삶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탄생으로 사유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우리 삶들을 적절하게 나타낼 수 있다. 말을 하고 ㄴㅏ누는 존재, 복수성을 전제로 하는 우리의 삶을 잘 어루만지게 한다는 점에서 더 낫다

덧말 2. 우리는 세계에 이끌어진 것이다. 아렌트는 정치성의 핵심이 말을 하는 존재라고 했다. 혼자가 아니라 서로 말을 하는 복수성이 아렌트의 핵심이자 공화(주의)의 열쇳말이다. 실존주의는 삶과 존재를 어렵게 설명한다. 다시말하면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내던져지거나, 기투(던져야)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현존재와 나를 고정시켜 세계를 분리시킨 뒤에서나 행위를 하게 만든다. 쓸데없는 논리를 만든 것이다. 이끌어진 존재-손잡아야하는 존재-말해야하는 존재-서로 시작해야하는 존재라는 표현이 삶과 세계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쓸데없는 논리로) 서로를 분리시켜 따로따로 설명해내지도 않으면서, 전체를 감싸안으면서 나아가는 방향을 적확하게 묘사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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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은 나에게 무조건 필요한 겁니다. 나를 살게 하고, 나에게 살아 있는 세계와의 연결을 유지시켜주는 수단이니까요. 그 세계를 느끼지 못하면 단 한글자도 쓸 수가 없고, 단 한 줄의 시나 산문도 내 입에서 흘러나오지 못할 겁니다. 산책을 못하면 나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내 일도 무너져버릴 겁니다. 339

멋진 산책 길에는 형상, 살아 있는 시, 마법, 그리고 온갖 아름다운 자연물들이, 비록 작은 존재들이라고 해도 꿈틀거리며 차고 넘치는 것이 보통이죠./만약 어머니 같고 아버지 같고 아이들 같은 눈부신 자연이 선함과 아름다움의 원천으로 매번 신선한 자극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시인은 얼마나 비참하고 빈한한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지 말입니다/산책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감정에 겨운 나르시시즘이나 너무 민감하게 상처받는 성향을 지녀서는 안 됩니다. 340, 341

산책자는 사물을 오직 바라보고 응시하는 행위 속에서 자신을 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비탄, 자신의 욕구와 결핍, 자신의 모든 궁핍을, 산책자는 마치 용감하고 투철하고 헌신적이며 모드 자질이 입증된 군인이 전쟁터에서 그러듯이, 전부 무시하고 개의치 않고 잊어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매 순간 그는 동정과 공감과 감동의 감정을 느낄 줄 알아야 ㅎㅏ고, 바라건대 그것을 느낍니다./산책자에게는 갖가지 아름답고 미묘한 산책의 사색들이 신비하고도 비밀스럽게 따라붙게 되는데, 그래서 신중한 걸음을 부지런히 옮기던 중에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추어 가만히 귀를 ㄱㅣ울일 수밖에 없으며,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 유령에게 사로잡힌 듯이 마법에 홀린 듯이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갑자기 땅속으로 꺼져들어가는 듯한, ㅁㅣ혹과 혼란에 빠진 사색가의 눈이자 시인의 눈앞에 거대한 심연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342, 343

우리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한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라 어떤 다른 존재였으며, 또한 바로 그렇게 때문에 비로소 진정으로 나 자신이었다. 349

하나의 기쁨은 또 다른 기쁨을 불러들였으며, 부드럽고 친숙한 대기에서는 유쾌함이 두둥실 떠다녔고 즐거움을 억지로 참는 듯한 떨림이 느껴졌다. 350

올바른 태도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남들에게 엄격한 만큼 우리 자신에게도 엄격해야만 하고, 우리 자신의 행위에 관대하고 너그럽듯이 남들의 행위도 마찬가지로 너그럽고 관대하게 평가해야만 한다. 356

볕뉘.

0. 친구가 읽어주었다. ‘....음악도 없이 나는 유쾌하였다. 나는 시간에 현혹당하는 듯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듯이 시간에 말을 걸었고, 시간도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고 생각했다. 시간에 얼굴이 있는 듯 한참을 쳐다보았고, 시간 또한 묘하게 다정한 눈동자로 나를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첫 장의 ˝시인˝의 한 대목이다. 낭독하는 사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봄을 마주하는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래..그렇지 맞아....추임새가 트이는 명문이었다.

1. 한 친구에게 책을 추천해주길 권했고, 그 책들 사이를 거닐다, 어느 서재를 갔고, 그 서재에서 발저를 또 만났다. 책을 주문을 했고, 발저의 민음사 판본과 지금 이 책 가운데 어떤 것을 원하느냐는 말에 민음사보다 더 많은 산문이 있다는 이 것을 골랐다.

2. 주말의 여정이 깊어 피곤이 몰려와 일찍 잠을 청하다보니 자정에 말뚱해져 이 책이 손에 잡혔다. 산책을 마저 읽다가 기어이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에 말을 거는 방법도, 남과 나에게 말거는 태도도,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도 서로 나눌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헤세도 카프카도 벤야민도 사랑했던 작가 사교에는 미숙했지만, 산책과 삶을 대하는 모습은 경이롭고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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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고독-글쓰기-연대]의 곱셈으로 나아가는 사유들

 

 

 

느낌말들 : 발라낸나,정신,서사로서나,이야기,관계--자아,고독,글쓰기,연대,감정,,관계,달의이면,사유,반지성주의, 활동주의철학,느낌,일상,사건,상황

 

1. 이야기 후회는 이야기를 하려는 열망이다”/”이야기하는 이는 물 긷는 장치에 묶인 낙타처럼 계속 원을 그리고 돌면서 부지런하게 비극을 길어 올리고, 매번 다시 이야기할 때마다 그 때의 감정도 되살아난다. 서사가 없었더라면 희미해졌을 감정이 생생하게 유지되고, 과거에 있었던 일과 거의 관련이 없고 지금과는 더욱더 관련이 없는 감정이 서사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한다.” 39

감정의 보존법 : 밑줄은 감정의 생성때문에 긋다. 이야기가 감정을 되살리고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고 말이다. 새로운 서사는 그렇게 새로운 감정을 융기하게 하고 번지게 하는 것이다. 더구나 통찰과 맞닿아 있다면 시간과 속도를 그리 걱정할 일이 못된다.

 

2. 자아라는 것 역시 만들어지는 것, 당신의 삶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자, 모든 이로 하여금 예술가가 되게 하는 어떤 작업이다. 늘 무언가 되어 가는 이 끝없는 과정은 당신이 종말을 맞이할 때 비로소 끝나며, 심지어 그 후에도 그 과정의 결과는 계속 살아남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만들어 가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아라는 작은 우주와 그 자아가 반향을 일으키는 더 큰 세계의 작은 신이 된다.” 85

 

를 다루는 법 : 몽테뉴는 내 과제는 내 삶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직업이며 유일한 소명이다라고 하였다. 예술에서도 최고의 예술은 자기 보존의 예술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정신이란 우리가 자기 자신을 다루는 태도라고 한다. 인생 경험은 모두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리고 정확히 이것은 정신의 이해 과정, 곧 자아와의 만남이라는 의미의 이해과정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가는 과정에서 정신은 영글어 간다.

 

3. 고독 작가의 재능이란 많은 시간 동안의 고독을 견디고 계속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독자이며, 책 속에서, 책을 가로지르며 살아간다.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또한 다른 삶의 머릿 속에서, 매우 친밀하지만, 지극히 외롭기도 한 그 행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96

 

사랑의 그림자 :한 시인은 고독이 발바닥 굳은 살처럼 다져졌다/아프지 않게 생의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외로움이 밖으로 향하고 있다면 고독은 안으로 아래로 향한다. 중심과 관련된 행위인 것이다. 외로움은 끊임없이 부여잡고자 하는 구심성을 가진 욕망이지만 고독은 가득차오르는 순간 밖으로 향하는 원심성으로 번진다. 관대함과 너그러움이 자란다.

 

4. 글쓰기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혹은 지금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훗날 독자가 될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행위이다”/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100

 

함께글쓰기란 저항행위 :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말하는 능력보다 침묵하는 능력을 가졌으면 삶이 훨씬 더 윤택해졌을 것이라고 한다. 침묵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의 하나로 글쓰기는 권장할 만하다. 결과가 아니라 아직 말이 되지 않는 나의 사유의 근육을 키우는 일만으로도 고독은 빛이 나는 일이고, 글쓰기라는 행위자체가 현실을 거스르는 의미있는 일이다.

 

5. 연대 01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도 않는다‘(나병과 고통) “/ “당사자를 당신 안으로 불러들여, 그들의 고통을 당신의 몸이나 가슴, 혹은 머리에 새기고, 그다음엔 마치 그 고통이 자신의 것인 양 반응한다. 동일시라는 말은 나를 확장해 당신과 연대한다는 의미이며, 당신이 누구와 혹은 무엇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정체성이 구축된다.”/”이러한 동일시는 애정 어린 관심과 지지를 통해 더 큰 자아라는 지도의 경계선을 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51, 158

 

고통의 사용법: 한센병에 대한 통찰이 이 책 가운데 가장 끌리기도 하였는데, 혼자 궁금해하던 것 가운데 사람들이 정치적 참여를 하는 과정은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인식이 전제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이 숙성된 뒤에서나 있을 수 있다는 진단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맹점을 인식하되, 자신을 벗어나거나 구조를 의문시하지 않는 경우도 대부분이다. 인식은 나아가지 못하고 맴돈다. 그런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대부분이다. 문제를 인식하기에 성숙하다고 보아야 하지만, 이면을 살피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다. 전체로 확장하려하지 않고 보고싶은 것만 보게되는 이분법의 아류에 머무는 인식은 이렇게 따끔한 사유 속에 성숙된다.

 

6. 연대 02 - 정신의 무감각 스스로 냉담해짐으로써 살아남으려는 전략. 이것은 비인간화의 한 측면이자 실패한 복구과정이다. 이런 무감각은 자아의 경계를 수축시키는 것이다. 반면에 감정이입은 그 경계를 확장한다. 161

 

슬픔을 줄이는 법 : 얼마나 많은 냉담이 지금여기 공존하는가. 끊임없이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벌레 취급하는 그들의 정신승리를 목도하는 것은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시간에 무감각하며 자신만 옳다는 반지성주의의 표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것조차 과분한 일인지도 모른다.

 

7. 연대 03 감정이입이란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살짝 나와서 여행하는 일, 자신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진정으로 타인의 현실적 존재를 알아보는 일이며, 바로 이것이 감정이입을 탄생시키는 상상적 도약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들어가 느끼다” 286

 

기쁨의 요소로서 감정이입법: 한 장소에 지나치게 머무르면 자신 조차 제대로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다. 관계라는 것이 그렇게 관성을 갖고 보고싶은 것만 보게 만든다. 그래서 늘 여기상태를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시공간의 이동이 그러하며 일박의 공간이동은 미처 보지 못했던 관계들을 헤아리게 만든다. ‘관성의 착각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고정관계에 우리는 중독되어 있다. 그래서 스스로, 외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을 밀어내는 연습들이 필요하다. 주기를 갖고...

 

8. 사유 우리는 정상적인 것과 미친 것, 좋은 것과 파괴적인 것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그 사이에 마치 뚜렷한 경계가 있다는 듯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우리는 수천 가지 방식으로 서로를 취하고 있으며, 누군가는 그 덕분에 즐거움을 얻고, 누군가는 범죄를 저지르고 악몽을 꾼다.” 302

 

사유의 근력단력법: 이분법은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온 이래로 버리지 않는 인식법이다. 여전히 그 방법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지식체계를 구성해나간다. 하지만 나누는 순간 2n만큼 봐야하는 것들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아야할 것이다. 전체의 절반의 절반은 횟수를 거듭하면서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사유를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전체를 향해서....또 하나는 총체를 가정하면서 내려와야할 것이다. 여전히 흑백이 횡행하는 세상이기에 말이다.

 

덧글. 죽음을 통해 삶을 길어왔고, 삶으로서 개인은 발라낸 나(자아)로 끊임없이 미래만 주입하는 상품광고로서 자신을 앓고 현재를 살아지기만 한다. 침묵과 고독은 현재를 살아가게하는 유일한 가교다. 미래가 아니라 지금여기를 충만하게 하는 기쁨의 근력이다. 그렇게 걸음을 걷는다. 세상에 홀로선나가 아니라 손내미는 나로 자란다. 걸음걸음마다 이야기가 자란다. 기쁨의 감정이 햇살처럼 강열하다. 뺄셈은 덧셈으로, 덧셈은 분홍으로 끓어넘쳐야 한다. 죽음을 뒤집는 건 탄생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한방향으로만 지문을 남겼고, 그 지문들만 해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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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이란 원석을 캐려는 자(들의 두서없는 자취)들


죽기 전을 생각하기도 벅찬데 죽은 이후까지 사유할 여력이 있는가? 1)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죽음과 체념을 곁에 두고 따져보아야 겨우 돋을 새김이 되는 삶. 삶을 오롯이 생각해본 자. 삶들을 사유하는 자. 지층 속에 묻혀있는 삶들이라는 광맥을 다시 찾기위해 스스로 카나리아처럼 폐허같은 광산으로 뛰어들던 자. 삶들이라는 광맥에서 좋은 삶이란 원석을 찾은 자. 하지만 자신의 삶은 그저 비참에 멈춘 자들.

좋은 삶들을 비껴가는 교묘한 기술 1000선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자. 그것을 헤아려 버려보는 것이 조금 더 좋은 삶에 가까이 가는 게으르지 않은 방법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서 하나와 둘을 헤아린다. 나눈다. 너와나, 선과악, 정치와경제, 사회와문화, 예술과기술,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 이렇게 따로와 따로를 나누고 따로를 각자 따로 놀게 하는 것이다. 다음은 살림살이를 발라내는 것이다. 거기에 미학도 정치도 정의와 형평도 달라붙지 못하게 기름을 듬뿍 바르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것을 사람2)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여 사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거다. 맛과 멋이라는 것도 발라내서 될수록 건조무미하게 냉혈하자. 너에게서 ‘나‘를 떼어내어 나란 개인이란 원자로만 세상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래서 또 ‘이성‘만으로 감정도 감성도 정서도 정념도 아예없는 것이라고 치자. 세상은 온통 회색이라고 단정해보는 것이다. 사물은 그대로 멈춰 버린 것이라고 해보는 것이다. 죽음의 강건너에 신이있고, 삶은 지금이 아니라 미래를 담보로 하는 것일뿐이라고 하자. 정치는 철학을 필요로 하지 않고, 과학은 철학을 필요조차 하지 않으며, 윤리는 정치를 품에 안기를 거부하자. 경제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제멋대로 가게 하자. 삶이라는 것에는 진도 선도 미도 아예 관계조차 없는 것으로 치자. 그리고 따로따로 널어놓고 어느 것이 중한 지 신경쓰지 말자.

맞다. 그 광부들은 역사란 삶들의 지층에서 이렇게 살아지는만 하는 삶들을 캐내어 광미로 버렸다. 지구 저 반대편으로 지축을 가로지르며 좋은 삶을 캐던 막장은 닫혀 있고, 또 다른 갱구로 이어지고, 또 다른 갱구는 지표면으로 돌출되려고 하거나, 다시 파는 이들로 이 지구 별 안은 뜨끈하다. 그 가운데 한 사유의 광부를 골라본다. 정신과 육체를 나누지 않은 자, 감성과 이성을 나누지 않은 자, 신과 인간을 나누지 않은 자인 그는 규폐증에 걸려 생사를 넘나들며 그 책의 결을 벼리고 벼렸다. 사후에 겨우 출간된 그의 책에는 이런 문구가 남겨져 있다.

“자유인은 결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

1) 공자 논어 2) 비코

느낌말: 전체성이나총체성,통째로사유하기,예술로서의삶,서사로서나,사회적자아,달의이면보기,삶의반복,이분법에서벗어나기,진리는계절을탄다,반지성주의,고독은삶의최소근력,세계-내-존재,자아-내-타자,관계-내-존재

볕뉘.

0. 뫼비우스의 띠에는 안과밖이 없다. 안과밖으로 사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던 셈이다. 사물은 정지해있을까 운동하고 있을까? 뉴튼의 고전역학이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정지가 극히 작은 부분이었고, 뉴튼이 또한 극히 작은 부분이었다. 시공간은 공간과 시간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나눠서 생각하는 순간 시공간을 이해할 수 없다.

1. 증상으로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외로움과 고독을 양산한다. 하지만 실존으로서 최소한의 고독을 채우지 못한 자는 삶의 근력을 확보할 수 없다. 하나의 명사로 모든 학문은 제대로 사유할 수 없다. 그래서 명사에 명사를 이어서 사유한다. 그것조차 되지 않아 감정과 정서를 불려들여 새롭게 사유한다. 어쩌면 경계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통째로 무너뜨려야 새로운 사유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따라가본다. 물 위에 난 길들로, 바람에 사라지는 길들로 접어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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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정서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

스피노자의 윤리 개념은 고대인들의 그것에 더 가깝다. 그가 자신의 윤리적 탐구를 통해서 규명하기 원한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상의 삶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사는 데 장애가 되는 ㅇㅛ소들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었다. 145

인간에게는 어떤 종류의 삶이 최선의 삶이며 어떻게 우리는 그러한 삶에 다다를 수 있는가를 밝히는 것 146

나는 인간 행동을 조롱하거나 한탄하거나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조심스럽게 노력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나는 사랑, 증오, 분노, 시기, 야망, 동정 및 정신의 다른 동요들과 같은 정념을 인간의 악한 본성이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147

인간 존재는 자연의 일부이며, 인간 정서는 자연적 사건들이다. 148

우리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어떤 것이 생길 때 우리가 능동적으로 행동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상상지의 관념은 수동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상상의 관념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공통관념이다. 이 관념들은 모드ㄴ 것의 적합한 원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어떤 것이 나의 정신 안에 있는 적합한 관념들로부터 따라 나올 때는 언제나 나는 능동적이다. 나는 능동적으로 행동한다/인간 정신이 더 능동적이면 능동적일수록 인간 정신은 적합한 관념들을 더 많이 가지며, 덜 능동적일수록 인간 정신의 관념은 외부 ㅅㅏ물들의 관념에 더 많이 의존한다. 149

정신적인 ㅅㅏ건들은 신체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게 ㅎㅏ는 원인이 아니며, 신체적인 사건들은 정신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게 ㅎㅏ는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두 ㄱㅐ의 원인과 결과의 계열이 서로 ㅅㅓ로 정확히 평행하게 달려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151

코나투스 – 각각의 것은, 힘이 닿는 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다. 153

물체가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노력한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물체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 우주에 존재하는 각각의 사물, 외부로부터 악영향을 받지 않는 한, 계속해서 존재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155

그것의 실존은 비율의 유지에 있고,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자연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비율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그러므로 그것은 자연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존재를 보존하려는 경향이 있다. 157

스피노자는 존재를 보존하려는 한 사물의 노력을 능동적인 힘 내지 역량으로 간주한다./모든 것은 언제나 존재를 보존하려고 노력한다고, 그리고 어떤 것도 외부 원인에 의하지 않고는 파괴될 수 없다. 159,160

이 노력이 정신에만 관계될 때, 그것은 의지라 불리지만, 정신과 신체 모두에 관계될 ㄸㅐ, 그것은 욕구라 불린다. 그러므로 욕구는 바로 인간의 본질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며, 따라서 인간은 그러한 것들을 하도록 결정된다..그 욕구를 의식할 때 그것은 욕망이라 불린다는 것이다. 162

어떤 종류의 ㅍㅏ괴적인 요인들과 ㅁㅏ주친 결과로, 정신의 활동 역량이 감소될 때 더 낮은 상태의 완전성으로의 이러한 이행이 슬픔이다. 정신이 더 높은 수준의 역량으로 이행할 ㄸㅐ, 그것은 기쁨이라 불린다. 164

욕망, 기쁨 및 슬픔은 스피노자 ㅇㅣ론에서 세 가지 기본 정서다. 그것들은 어떤 관념들 및 각기 다른 정서와 결합하여 그 밖의 감정들의 목록을 거의 끝없이 산출할 수 있다./세 가지 기본 정서로부터 그 이상의 감정들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은 끝이 없다. 165

스피노자는 인간을 ‘부딪치는 ㅂㅏ람에 일렁이는 바다 위의 파도처럼...외부 원인에 의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흔들리는 존재(우리는 결말과 운명을 알지 못하기에 동요한다. 166

선이란, 내가 이해하기로는, 모든 종류의 기쁨, 그리고 기쁨을 가져다주는 모든 것이다...그리고 악이란 모든 종류의 슬픔이다. 168

제q4부 인간 예속 혹은 감정의 힘에 대하여

에티카는 어떤 삶이 인간 존재에게 최선의 삶인가 그리고 ㅇㅓ떻게 개인은 그런 삶을 방해하는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가를 설명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170

자유롭다는 것은 자기-결정적이라는 것-오로지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만 존재하는 것, 그리고 자기자신에 의해서만 행동이 결정되는 것이다. 172

3부에서 논의된 대부분의 정서는 우리가 주위 사물들에 의해 자극받을 때 우리 안에 생긴 수동적 정서(정념)다. 173

실ㅈㅔ로는, 대부분의 시간 정서를 생기게 하는 외부의 영향은 활동하는 우리의 역량보다 더 강하며, 우리는 느낌, 정서 혹은 행동을 제어하지 못한다. 반대로, 우리의 정념이 우리를 지배하지만, 우리는 정념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며, 심지어 그 영향을 의식하지 못한다..이것이 스피노자가 우리를 ‘파도에 동요하고 부딪히는 바람에 휘둘리는‘ 존재라고 말할 때 그가 주목한 ㅅㅏ태다....이러한 상태를 ㅇㅖ속이라고 부른다. 174

어떤 인공물에 대해 만약 그것이 그것을 생산한 장인의 계획이나 의도에 전적으로 부합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완전하다‘고 말한다....만약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완전하다고 일컬어진다. 174 자연 속에 있는 어떤 것도 객관적으로는 그 자체로 완전하거나 불완전하지 않다 176

나는 좋음이란 우리가 ㅈㅔ시한 인간 본성의 모델에 더 가까이 접근하는 데 수단이 된다고 확실하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나쁨이란 앞서 언급한 모델을 재현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확실하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177

개인에게 있어서 좋은 것은 더 큰 역량, 활동성, 기쁨 및 자유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178

감정은, 신체와 관련되는 한, 신체의 활동 역량에 있어서의 변화다. 만약 내가 아픔이나 슬픔에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면, 나의 활동 역량은 감소되고 있는 것이다 그 슬픔을 억제하거나 제거하기 위해서는 나의 역량의 크기가 커질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반대 방향으로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179

상상의 관념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신체가 변용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180

미래의 것에 대한 상은 현재의 것에 대한 상보다 더 약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것에 대한 감정은 미래의 것에 대한 감정보다 더 강할 것이다/일어나는 것이 확실하다고 알고 있는 것들과 관련된 감정은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관련된 감정보다 ㄱㅏㅇ하다/선과 악에 ㄷㅐ한 참된 인식으로부터 생기는 욕망은 ㄷㅏ른 수동적 감정의 힘에 의해 빈번하게 억압되고 압도될 수 있다/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은, 다른 사정이 같다면, 슬픔에서 생긴 욕망보다 강하다 182-183

스피노자는 ㄱㅐ인의 역량을 그의 덕과 동일시하며 개인이 존재 보존 노력에 있어서 더 많은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그는 덕을 더 많이 갖게 된다고 결론내린다. 185

‘적합한 원인‘과 ‘능동‘에 대한 정의를 사용함으로써, 그는 정신은 적합한 관념을 가지는 한에 있어서만 능동적으로 행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그는 존재를 보존하려는 노력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등치시키고 있다. 187

겸손은 보통 전통적으로 덕으로 간주되지만, 스피노자는 명백하게 이것을 거부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후회는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스피노자는 그것과 상반되는 충고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ㅅㅏ람은 이중으로 불행하거나 무능하기 때문이다. 198
볕뉘

0. 시간이 많이 흐르고서야 흔적을 남긴다.

1. 우리는 파도에 동요하고 바람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한다. 그 수동성으로 인해 숱한 정념에 출렁거리고 감정에 동요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는 의지, 욕구, 욕망을 구분한다. 정신에만 관련되는 것을 의지, 정신과 신체에 관련되는 것을 욕구, 욕구를 의식할 때 그것을 욕망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다시 욕망, 기쁨, 슬픔를 세가지 기본 정서로 규정짓는다. 활력에 도움이 되는 덧셈을 기쁨이라고 하고, 뺄셈이 되는 것이 슬픔이라고 말이다. 이를 기준으로 부수적으로 생기는 모든 감정들을 설명해낼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로 평생을 앓았다. 그러기 위해 이성만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그렇지 않은 감정들을 살피고 살폈다. 좋은 삶들을 방해하는 것들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어쩌면 그의 논리는 명약하고 상쾌하다. 군더더기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2.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의 흔적을 쫓다가 다시 그 자리로 온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또 다른 걸음일 것이다. 수많은 덧셈들....곱셈의 문턱으로 수렴하는 지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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