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왜 청년들이 월 40만 원짜리 방에 사는 주제?에 커피 한잔에 6,000~7,000원 하는 예쁜 카페에 죽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한다. 쾌적한 공간에 머무르고자 하는 욕구는 자연스럽다. 예쁜 집을 가질 수 없는 청년들은 그 욕구를 잘 꾸며진 카페에서 채운다. 상경한 청년(19~29세)들은 평균적으로 보증금 1,395만원에 월세 46만 원짜리 집에 산다...왜 이들은 쾌적한 공간에서 누리는 잠깐의 여유마저도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로 비난 받아야 하나?

[ ] 이력서에 적힌 취미들은 화려하지만, 그중 태반은 앞서 말한 가성비 좋은 취미들로 여가를 보내거나 ‘시체놀이‘라고 적어도 무방할 것이다. 대신 기업에서 직원들에게 ‘취미 할 권리‘를 보장하는 날을 꿈꾼다. 나에겐 그게 요가였지만 그것이 무엇이 됐든, 우리는 업무에서 단절된 상태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하루 한 시간 이상 몰두할 권리가 있다.

[ ] ‘신상을 안까고 모이는 2030‘: 요즘 젊은이들이 학벌, 나이, 직장, 사는 곳 등의 정보를 드러내지 않고, 모임 주제에 따라 취미나 정체성, 생각 등을 나누는 데 초점을 맞추는 모임을 선호한다는 것....한 독서모임의 회원들은 모임을 시작한 지 두 달이 넘었지만 서로 몇 살인지, 어디에 사는지, 어떤 학교나 회사에 다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나이 차이가 띠동갑 이상이어도 ‘00님‘이라 부르며 서로 존중해주는 게 이들끼리의 암묵적인 규칙이다.

[ ] 지금의 대한민국을 사는 청년은 세대로 묶이기 전에 현재의 사회구조로 인한 고된 경험에 공감하고 대안적 삶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고민의 공동체‘에 가깝다.

[ ] 윗세대가 굶는 데서 벗어나 충실하게 물질적 부를 늘려가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면, 현재 젊은 세대는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고급 욕구를 지닌 세대다. 그 욕구를 사회 분위기가 받아주지 못하니 서른이 넘어서도 방황한다.

[ ] 청년 세대는 촛불을 통해 거의 처음으로 정치에 깊게 관여하는 경험을 했다....‘삼포세대‘라는 말이 대변하듯, 지금의 20~30대는 수동적이고 불쌍한 존재, 시대를 이끌기에는 주체성이 한참 부족한 세대로 인식됐었다. 산업화 세대나 민주화 세대처럼 역사의 주체로 기록되지 않을 거라는 자조가 팽배한다....무릇 연애나 취업이 ‘다른 친구들을 제치고 나는 누린다는‘ 죄책감이 된 세대다. 희망차고 도전적인 ‘청춘‘이라는 말 대신 ‘이번 생은 망했다‘는 체념의 정서가 지배적인 젊음, ‘돈 없는 부모를 탓하라‘느 또래 청년의 비아냥이, 이들을 광장으로 모이게끔 불을 지폈으리라.

[ ] 이것은 청년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문제라고, 당신 역시 당사자가 될 수 있는 사회 일반의 문제라고. 그러니까 동정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출발은 청년세대에 대한 깊은 공감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믿는다.


볕뉘

0. 한 열흘 전, 한밭 벗들과 위의 ‘신상을 안까고 모이는 모임‘류의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는 조한혜정교수가 윗세대가 좀더 상황을 구조적으로 본다고 말을 보탠다.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이 변했다. 무척이나 말이다. 거꾸로 그 말은 구조에 집착하거나 일상에만 관심을 둔다는 말로 읽힐 수도 있다. 묶어두려고 둘수록 20대후반은 치고올라오는 20대초반이나 10대후반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혀를 내두를지도 모른다. 세대를 핑계삼아 해설하는 것은 자신에게 붙어있는 관성을 애써서 흔들지 않으려는 ‘꼰대‘정신의 발로 일 것이다. 움직임의 방향에 관심을 두는 것, 이미 움직인 것들에 대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탈각해야 할 것이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1. 몇몇 20대초반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나눌 기회들이 종종 있다. 지금까지 부모님들이 원하는대로 살아왔는데, 이제와서 또 딴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얘기해주지 않는 부모세대의 얄궂음, 자신의 가족만 챙기는 심리 밖은 논의에서 벗어나기 일쑤다. 20대 후반인 저자의 말 역시 그러하다. 정규직으로 어렵게 입사를 했는데, 그 때부터 정작 어떻게 살아야지 하는 고민에 다시 휩싸이게 된다고 말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우리는 정면 승부해야 되는 질문을 회피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20대 연구원으로 생활을 고려하는 졸업학기 공대여학생은, 남성주류의 꼰대밭을 어찌 헤쳐나가며 살아야하는지 걱정을 안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도 무수한 남초 꼰대지뢰밭의 일상의 경험에 녹초가 되어버렸다.

3. 부모세대는 아마 그럴 것이다. 아직도 최저임금이 인상하듯이 평균적인 삶이 질과 양으로 달라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한다. 물리적으로 허한다고 하더라도 심리적인 저지선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소비해보고 선택해본 세대라고 자식세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쾌적하고 편안함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당신들과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이다. 그 점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같다는 점을 깨우쳐야 하는지도 모른다.


4.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나이에 따라 유예되는 것이 아니다. 늦으면 늦을수록 서로 꼰대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논의는 불꽃이 튀도록 정면승부할 수록 어쩌면 세대도 나이도 세상과 사회라는 괴물을 순치하는데 도움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5, 자다 일어나보니 어느 새 나는 ‘꼰대‘라는 벌레가 되어있었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고 피하기만 하는 것이다. 세상은 수십차례 객토를 했음에도 골동품이 되려는 이들로 차고 넘친다. 그 깃발을 들고 있는 이 역시 ‘나‘였다.

6. 지난 토요일 다시 모임을 마치고 늦은 점심을 같이하다. 20대초반의 한 친구의 가까운 꿈이 집을 짓는 것이라는데 놀랐다. 윗세대가 로망처럼 갖거나 전재산을 털어 만드는 일을 대단치 않게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함께 해나는 것, 그녀에게 이미 많은 집짓는 기술을 갖고 있고, 일과 삶의 매듭을 꾸려가는 것들이 몸에 배여있는 것 같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길을 걷는 모습이 경이롭기도 하다. 왜 그렇게들 살지 못할까....마음을 건네다오....저 편에....서로...세상은 열려지기도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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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작품은 제로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실험이다. 제로에서 시작하지 않고 예술을 안전한 것,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것은 예술작품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이 시작하는 제로 상태가 미학적 상태, 미학적 자유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작품은 예술의 가능성을 시험하기 때문에 실험이다. 그것은 미학적 자유의 상태로부터 작품 창조의 가능성을 시험한다. 이 가능성은 미학적 상태가 해방된 힘의 도취 상태(니체), 무작품성의 상태, 형식 부재의 상태, 작품부재의 상태(푸코)이기 때문에 불가능성이다. 96


볕뉘.

0. 예술의 힘 1부 마지막에 나오는 대목이다. 미학적 힘을 다시 요약한 듯한 인상를 받는다. 읽기가 어렵다. 반면에 경험으로 예술은 읽기 쉽지만,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1. 멋이란 무엇일까? 맛이란 무엇일까? 빚에 점하나 찍으면 빛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멋이란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그러면 예술은 무엇인가? 맛은 일상에서 떨어진 것일까? 멋은 일상에서 떨어져야 하나? 예술은 저 멀리 범접할 수 없는 것인가? 소수만이 즐길 수 있는 것인가? 맛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데 왜 예술은 그렇게 일상의 번외로 떨어뜨려 놓은 것일까? 다 한 통속은 아닐까? 잘못된 것은 우리의 사고방식은 아니었을까? 못된 것은 우리 삶의 패턴은 아닐까?

2. 일은 무엇일까? 점하나 찍어보자. 얼. 얼은 차리고 있는가? 얼과 일이 만나기나 한 것일까? 한 번이라도 좋으니 짜릿함을 느껴본 적이라도 있는가?

3. 점하나 찍는 일. 상상력이란 저 멀리 하늘에서 떨어지고, 창의력이라는 것이 별똥 부대처럼 여겨지는 것은 왜 일까? 여기저기, 누구나 혈안이 되어 아니면 돈에 매여, 아니면 돈을 향해 올인을 해버리는 것일까?

4. 시인을 좋아해보자. 왜냐고 묻지 마라. 좋아해보자. 왜 시인이 당신과 다르다고 여기는가? 그래 맞다. 반성적 사고 일게다. 끊임없이 자신과 자신의 족적을 돌아본다는 일일 것이다. 그럴 때 뭔가 다른 것은 바로 잡을 수 없다. 끙끙대고 한 발 거리를 두기도 하고, 더 가까이 다가서기도 해야만, 벙어리같은 자신의 느낌을 살릴 수 있는 표현을 얻게된다. 아주 조금....다듬고 다듬고.....

5. 다듬고 다듬는 과정이 상상력이라고 한다. 일의 다른 기획에 대한 감에서 시작할 수도, 먹고싶은 맛을 향하는 돌진, 원하는 색깔을 입히고자 하는 노력이 다 상상력이자 창의력인게다. 통째로 온전한 경험을 해본 자만이 일에 치이지 않고, 그 맛을 또 보려고 한다. 일상은 예술이 될 수밖에 없다. 무언가 다른 것을 향하는 직관과 멋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가 없다.

6. 자신을 영도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모임도 영도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굳이 단체라는 것을 봐준다면 그도 그러하도록 사유와 행동의 맛을 느낄 줄 아는 자가 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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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제 속** 내과에 가서 마지막 진단결과를 들었다. 선종이고 조직검사한 것도 가벼운 염증이었던 것 같다고 말이다. 이래저래 속을 차렸다.    수액이 아니라 음식물을 섭취하니 무척 회복 속도도 빠른 듯 싶다. 새벽녘 기침을 했는데 뒤쪽 내장까지 한꺼번에 꿈틀하는 듯싶다.   후장사실주의자들 말이나 내장을 울리는 감동은 질이 다른 것이라고 한다. 우리 대부분은 인스턴트 감정에 절어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없게 되었 는지도 모른다. 퇴원수속을 밟으며 느낀 가장 인상깊은 것은 후각이었다. 카페와 빵집에서 터져 나오는 향기는 마치 한 가닥 한 가닥씩 다른 향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온몸이 반응할 수 있다는 것, 온몸의 감각을 곧추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삶의 한 가닥 한 가닥을 건져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병상에서 본 인상깊은 책은 프랑스 한 조향사의  글이었다. 아니 그의 편안한 사유와 사유방식, 그리고 다른 부문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는 마음들이었다.


2. 

‘기술편향‘ - 드론 밧데리가 터지고 추락하고 사생활을 침해하는 아침뉴스를 접했다.

100여개의 연구과제에 슬금슬금 1~2개 부작용 연구를 끼워넣는다. 이게 아니라 같은 균형과 비중으로 만일을 생각하는 기술을 연구해야 하는 건 아닐까 싶다.

이건 인공지능이란 야생마를 길들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안티ㆍ기술‘, ‘반ㆍ기술‘ ‘포월ㆍ기술‘ 멋대로 이름을 붙여본다. 그런다고 달라지는게 있겠냐만 그런게 기술의 진면목이고 멋이지 않을까 싶다. 멋있는 기술이나 멋있는 기획, 멋들어진 예산투자를 보고싶다. 기술맹목의 시대 ‘반기술‘할당제라도 꿈꾸어보면 싶다.

볕뉘. 곁의 대학, 대학원 친구들 얘기를 듣다보면 AI에 학교가 올인한 것은 알겠는데, 학생들의 사고가 저렴해 듣기조차 힘들다. 집단폐사가 염려될 정도다. 아직도 이런 논리다.

˝사람이 뭐 필요해 갈아 끼우면 되지/ 장자가 그랬데 수레바퀴 없애라구. 예전부터 기술을 반대하는 부류는 늘 있었다고 기술이 다 망친다구 ㆍㆍㆍ˝


볕뉘.

0. 아침 뉴스를 보다가 그림자처럼 기술의 몸뚱아리에 붙은 기술의 일거수일투족을 연구하는 것이 진짜 기술은 아닌가 싶었다. 너무도 쏠림이 커서, 다들 부작용을 연구합네 싶은데, 정작 그 편향과 사후 약방문식의 연구는 이미, 기술이 실험실을 뛰쳐나가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1. 오히려 메인보다 더 큰 메인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닐까? 의도적으로라도 말이다. 그러니 인문사회-예술-생태의 속성을 띨 수밖에 없는 것이 주된 기술을 포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경도된 자본주의 기술의 속성 상, 그것을 제어할 수 없다. 그 기술의 수명주기도 그만큼 단축될 수밖에 없을 듯싶다.

2. 포** 학생들이 자주오는 책방에서 머무르다 보면 가끔 그들의 대화내용이나 속맘을 읽을 수 있는데, 움직이는 방식이나 시스템을 살필 수 있다. 아마 AI가 돈도 되며 가능성이 많아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기술을 움켜쥘려고 하지 누가 내놓으려고 하겠느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선을 넘는 방법을 살피지 않고 미리 예측하지 않는다면 결코 만만치 않을 것 같다.

3. 조향사의 글 역시 예술은 경계가 없으며 잡히지 않는 느낌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갈구하고 노력하는 것임을 잘 묘사해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재능도 아니며, 손끝에서 맘끝에서 조금씩 자라는 그 무엇이라고 말한다.

4. 이래저래 책읽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듯하다. 예전과 같은 템포는 아니겠지만, 몸도, 마음도 글도.....조금씩 느낌들에 예민해져가는 가을이 왔으면 한다. 벌써 며칠이 지나면 푸른새벽에 찬 바람을 한공기씩 맛볼 수 있는 입추다. 여름이 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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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2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02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02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02 2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연스러운 건 본능적인 것이지. 실제로는 본능적이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본능처럼 보이는 게 있는데, 바로 관습이지. 담배는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고, 본능적인 필요도 아니야. 하지만 우리가 한번 담배에 익숙해지면, 담배를 피우는 건 우리에게 자연스런 행동이 되지. 결국 마치 본능적인 필요처럼 느껴지게 되는 거지. 265 자, 그럼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사회적 허구는 뭘까? 당연히, 현재의 ㅅㅣ스템, 부르주아 ㅅㅣ스템이야. 이 논리를 정연히 하자면, 만약 자연스러운 사회가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우린 무정부주의를 옹호할 것이고, 그게 아니라 ㄱㅏ능하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우린 부르주아의 체제를 고수해야 할 거야. 그 사이의 중간 입장은 있을 수 없어. 내 말 이해하겠나...? 265

목표: 무정부주의 혹은 자유로운 사회. 방법: 부르주아사회에서 자유로운 사회로의 이행, 단, 과도기 단계가 없는 이행. 이행은 ㅅㅏ람들의 인식을 ㅅㅏ전 준비시키고 모든 저항 세력을 ㅂㅜㄴ쇄하기 우ㅣ해 고안된 집중적이고, 총체적이고, 흡인력있는 선전이나 운동으로 ㄱㅏ능하겠지.....이런 방시ㄱ으로 더 이 상 극복해야 할 저항이 없을 때, 제압할 반대 세력이 없기 때문에, 혁명적 독재 ㅊㅔ제를 도입할 필요 없이 사회혁명은 신속하고도 용ㅇㅣ하게 이뤄질 수 있지. 이런 방식으로 일어날 수 없다면 무정부주의는 실현 불가능한 ㄱㅔ 맞아. 269

뭣ㅎㅏ러 사회 불평등이니 운동이니 기타 등등 따위 때문에 골치 아파하는 ㄱㅓ지? ㅇㅣ런 고민을 하지 않으면, 내 삶을 훨씬 더 즐기면서 재밌게 살 수 있을 텐데? 왜 이 삶 하나밖에 못 가진 인간이, 영생도 안 믿으면서, 오로지 ㅈㅏ연의 법칙만 받ㅇㅏ들이면서, 국가조차 자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반대하면서, ㄱㅕㄹ혼도, 돈도, 온갖 사회적 ㅎㅓ구도 그게 자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반대하면서, 이런 사람이 ㄷㅐ체 어쩌자고 이타주의, 타인과 인류를 우ㅣ한 흐ㅣ생을 옹호하는 거냐고? ㅇㅣ타주의와 흐ㅣ생역시 비자연적인 거ㅅ들이라면?..사람은 누굴 도와주기 위해 태어난 ㄱㅔ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태어난다는 것 ㅇㅣ는 이타주의나 연대주의와는 반대로, 오로지 개인주의일 뿐이란 것도 보여주지 않나. 276

친구, 누구를 돕는다는 건, 상대를 무력한 존재로 여기는 거라네. 만약 그가 정말로 무력한 ㄱㅔ 아니라면, 우리는 그를 그렇게 만들고 있거나, ㄱㅡ렇게 간주하고 있는거야. 전자를 독재라고 하고, 후자를 멸시라고 하지. 전자의 경우, 우린 그의 자유를 ㅈㅔ한하지. 후자의 경우는, 적어도 무의식적으로 그를 멸시할 만하고 무가치한 혹은 자유로울 능력도 없는 존재로 차별 ㄷㅐ우하는 셈이지. 284

볕뉘.

0. 페르난두 페소아의 1922년 작 ˝무정부주의자 은행가˝란 소설 흔적이다. 문학에 별반 취미가 없지만, 자꾸 곁의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을 통해 건네 듣다 보니 이내 익숙해져 이리 사서보게 되었다. 어느 시집에서도 ‘페르난두 페소아‘란 시가 있는데 시집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시에서 무수히 많은 그의 다른 이름을 열거해놓았다. 70여개의 다른 생각 다른 삶. 하지만 이 소설은 페르난두 페소아란 이름으로 쓴 것이다. 그의 이력서에서 그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무지, 광신과 독재라고 못박아 놓았다.

1. 이 산문은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짚어본다. 치밀할 정도로 치밀하게.....그러면서 문학의 힘이 얼마나 큰가 싶기도 하다. 그 통찰이 놀랍기도 하다. 1922년이다.

2. 아주 사적인 현대미술에는 리처드 세라라는 조각가가 나온다. 그는 ‘페르난두 페소아‘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느낌을 형상화할 줄 아는 놀라운 조각가의 결을 쫓다가 이렇게 다시 만났다.

3. 배수아 번역의 ‘불안의 서‘도 주문하고 말았다.

4. 백년동안의 세계대전(서효인)이란 시를 읽고 나누다가, 최근 알랭 바디우의 언급을 섞었다. 초기 아나키스트와 카탈로니아의 찬가의 세계인으로서 지향은 어쩌면 주기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의무나 당위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란 질문이 섞여든다면 우리는 한번쯤 국가의 경계를 다시 지우고 그 사유와 삶의 지평으로 다가서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깨끗한 통찰을 보여주는 문학과 어우러진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말 밋밋할 것 같다. 세계인? 세계인? 세 계 인!! 정말 그런 것이 있는가? 있어야 하는가? 있도록 해야하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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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좌우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과 느낌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과 그것 아닌 것, ‘인‘ 것과 ‘아닌‘ 것의 얽힘 가운데서 ㅇㅣ루어지는 사태이다. 0074
사람이 찾는 것은 무엇인가. 믿을 만한 대상. 그의 삶에 희망과 활기를 주는 것. 0092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사건들이 혹은 의식과 환경의 ㅅㅏ태들이 서로 뒤섞여 이어지는 이야기를 쓰는 클로드 시몽. 그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흐름을 실제대로 옮김으로서 소설을 쓴다고 주장한다. 0100
아무도 모든 것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누구든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과의 얽힘을 떠날 수 없다. 어떻게 얽히는가. 거기에 논리와 존재의 샘이 있다. 0107
모든 철학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광맥과 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그 광맥을 뚫고 흐르는 한 심장의 박동이 있다. 0155
철학과 논리가 개념의 조작과 놀이, 이유와 귀결의 그물로부터 풀려날 수 있는가. 개념의 놀이와 논리의 그물에 스며든 온갖 우연의 가지들을 버리고 거슬러올라가 의문과 상상과 추론이 시작하는 시원의 사태에 이를 수 있는가 0157
동양 사람이 서양 사람의 사상으로부터 많은 것을 잘라버리지 않은면 그것으로 수십 년을 가르치고 배우면서도 자신의 기질이나 호흡에서 우러나는 사상의 맥을 이룰 없는 것과 같다. 무엇을 잘라버릴까.(동아시아 사람은 그의 많은 것을 버리지 않으면 서양악기에서 자신의 몸과 일체가 되어나오는 음악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 같다.) 0190


그들의 직관과 경험으로 세계에 대한 자아의 폐쇄성이나 주관성을 벗어날 수 있는가...직관과 경험은 타자로 이어져 열리는 사태이다. 타자로 이어져 열림이라는 논리에 호소하지 않는 한 그들로부터 결과한 현대의 유아론이나 인본사상을 피할 수 있겠는가. 0251
타자에게 넘겨줌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자. 타자와의 얽힘에서 자아의 영토를 극소화하는 자. 극소의 생각으로 깨닫는 철학자. 극소의 힘으로 일하는 물리학자. 자아의 동일성을 버리는 자.(서양문명으로부터 던져진 생각거리) 0253
타자로부터 밀려오는 파국을 막으려는 의지의 사람은 자아를 가지고 세계를 본다. 자아의 대상으로 세계를 구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존재와 생각의 연장선 위에서 타자를 만나게 되어...더욱 큰 파국을 몰고 오는 참 타자를 결국에 만난다. 0255
사람의 역사는 자기도 이해할 수 없게시리 각기의 순수한 의도 밖에서 거역할 수 없는 어떤 길을 따라 만들어지고 있을 뿐이다....사물의 참 모습은 ‘이다‘로서가 아니라 ‘아니다‘로서 주어질 뿐이다. 0257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각자의 어디엔가 영혼이 있다. 영혼의 세상과 하나가 아니고 다름이다. 0290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처럼 자아는 자기 밖의 사태를 비추고 있다. 자기 밖의 사태와의 얽힘을 떠난 자아는 있을 수 없으므로 그는 그 자체로서 다만 외로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참 모습을 알 수 없는 타자와의 얽힘을 떠난 자아는 세상에 없다. 0295


사람이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잘못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에 사물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날 것이라고 기대한 점이다......생각이라는 것은 다만 뒤로 물러나 있는 자가 벌이는 겉치레에 말려드는 것이다. 생각은 뒤로 물러나 있는 자가 드러내보여주는 파노라마에 살 뿐이다. 생각을 끊음으로, 사람의 믿음을 거두어들임으로 오히려 파노라마 뒤로 물러나 있는 자의 모습에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0302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사태는 같음과 다름의 다름이 아닌가. 같음과 다름이 하나의 바퀴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0303
파르메니데스와 헤겔, 데카르트와 후설이 찾아낸 존재와 사유는 드러나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음을 버리지 않았는가. 드러나지 않음에서 다름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없이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0350
현실에 주어진 사물의 정체는 그 사물의 현실이 아닌, 현실 밖의 타자로서 드러나지 않겠는가 0353
파도가 파도 되게 하는 자는 파도가 아니다. 나무를 나무 되게 하는 자는 나무가 아니다. 음악을 음악되게 하는 자는 음악이 아니다...있음의 뿌리 되는 가장 높은 형상이나 어떤 다른 것에도 매달림이 없이 스스로 있는 자는 세상에 있음과의 다름으로 엃히어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0354
존재자는 오히려 존재를 존재로 한정하는 존재 아님을 존재 뒤에 지님으로 세계에 드러나지 않는가. 무엇으로든지 드러남은 드러나지 않음과 다름으로 얽히어 이루어진다. 0355
드러난 현실에 언제나 드러나지 않은 바가 따라다녀 지울 수 없는 그림자의 바탕으로 얽히지 않는가 0394
다름으로 얽히는 사물의 모습을 찾는 것이 존재의 깊이를 앎이 아니냐.0395


흔들이는 자기 운명의 목덜미를 휘어잡은 그 자의 돌아볼 수 없는 모습과 움직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해한다는 것은 뒤로 물러선다는 것이다...물러섬으로써 얻은 가설의 타당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발견되는 것이지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0403
빠져든 습관의 늪에서 자기의 몸을 일으키는 행위. 그것이 물음이다. ‘이다‘라는 게으름의 조류에서 자신을 세워서 ‘아니다‘로 거슬러오는 타자의 파도에 부딪치려고 물음을 던진다. 0406
‘그 밖에 없는가‘...이것들은 끝없이 밀려오는 타자에 부딪쳐서 떠오르는 상상의 대상이다. 0407
바꿈의 뿌리는 있음에 있는가, 없음에 있는가, 아니라면 있음과 없음은 같이 그 밑에 있는 바탕에서 다름으로 얽히어 교대하는 다만 순간의 모습들이 아닌가. 0433
말로 엮은 그물에 걸려 있지 않음을 어떻게 가리킬 수 있는가. 같음으로 엮이는 그물로부터 어떻게 있음의 뿌리로 벗어날 수 있는가. 0470
시원분석은 시작에 놓여 있는 어떤 사태를 찾음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날에서처럼 지금도 되풀이되는 보편의 바탕을 찾는다. 0473
얽힘을 찾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그 사태의 안으로 혹은 필연으로 얽혀 있는 것을 찾는 내재함축의 길과 그 사태의 밖으로 혹은 우연으로 얽혀 있는 것을 찾는 잉여추적의 길이 있다. 0495


서양사람들은 그들 사이의 메울 수 없는 철학적 이견에도 불구하고 다같이 ‘이다‘나 ‘아니다‘의 분명한 선택을 강요하는 무모순의 형식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 0500
이는 순수 존재라는 시원의 사태에 안으로 얽힘과 밖으로 얽힘이 짜는 두 갈래의 길이 함께 깃들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0542
반성과 부정의 샘은 이성 내재와 이성 초월의 두갈래로 펼쳐지는 타자의 길을 따라 흐르는 것이다. 0543
얽어짬의 논리를 초월성으로 푸는 자는 없는가 0599


경험주의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상상으로 모든 연역적인 귀결이나 일반화에 부딪칠 반역의 가능성을 가르치는 것이다. 0630
경험은 주어진 사태인 전건으로부터 그 전건 아닌 자에 달려 있는 후건으로 나아가는 밖으로 얽어짬의 논리 위에서 벌어지는 사태이다. 0632
경험을 좌우하는 논리는 없는가...경험은 그의 확률로서 0이나 1을 빼놓는 사태이다. 경험은 확률 0과 1 사이에서 일어난다. 0636
왜 그들은 직관과 경험의 논리를 주장하는가. 새로운 진리를 찾는 길이 전제 안으로 얽혀짜이는 테두리 밖의 잉여에 주어지는 직관이나 경험에 호소하는 데 있으니까 0670
참으로 자기 밖의 타자를 만날 수 있는가. 자기를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자기를 떠날 수 있는가. 어떻게 자기를 떠날 수 있는가. 어떻게 참으로 자기 아닌 타자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가. 0673
말은 참으로 있음을 드러내거나 대변하는 것인가. 아니면, 말은 참으로 있음을 덮어버리거나 배반하는 것인가. 아니며, 말은 있음을 만들어내는 것인가. 상호주관의 바탕 위에 선다고 ㅎㅏ는 말은 사람들이 같이 만들어낸 하나의 그물이 아닌가. 그 말의 그물은 참으로 주어진 ㅅㅏ태를 건져내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만들어낸 그물에 가려서 오히려 참으로 주어진 사태를 놓쳐버리는 것은 아닌가. 이십세기 언어철학의 두 가지 큰 흐름을 일으킨 장본인인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는 ㅅㅏ람들이 정교하게 짜내는 말의 그물을 어떻게 돌이켜보았는가. 그들은 말의 그물이 다만 도구적으로나 실용적으로 쓰임에 그치는 것이므로 참으로 주어진 사태를 잡으려면 말의 그물과 짜임을 헤쳐보아야 함을 가르치지 않았는가. 0675
존재와 존재 ㅇㅣ전의 뿌리가 얽히는 한 줄기 추론이 흐르며 일으키는 파동이다. 그것은 추론과 상상이 흐르는 길에 부딪쳐서 나타나는 존재의, 아니 존재 이전의 뿌리가 짓는 매듭 현상이다. 0694


의문의 사태는 자신이 만들어낸 것인지 타자로부터 덮쳐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러나 언제나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다. 0775
어떤 사태든지 그 사태 아닌 것이 내는 조건에 마주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존재 밖에서 존재의 뿌리를 찾을 수는 없는가. 뿌리나 바탕이나 이유를 찾음에 두 갈래의 길을 피할 수 있겠는가. 0776
한결같지 않음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보편의 대상에 귀의할 것인가. ‘보편의 횡포‘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을 것인가. 자아실현의 목적과 대상이 있는가. 아니면, ‘자아와 대상‘‘은 풀어버려야 할 매듭인가. 빠져나갈 수 없는 선택의 굴레 속에서 얽혀 이어지는 존재의 매듭을 번갈아잡으며 방황하는 ㅅㅏ람들. 철학자. 정치가. 신앙가. 0790


소와 같은 짐승에겐 부정의 체험이 없는가. 0800
뜻밖의 사태를 언제나 상상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인가. 0801
생각이란 파도처럼 일며 깨지는 것...방향도 알 수 없는 거친 풍랑을 만나면 산산이 찢겨진 그물에 얽힌 채로 바람과 바다가 지닌 무한한 자유와 힘을 상상해야 한다. 0802
사람의 경험으로부터 파국과 미결의 사태, 부조리와 무의미를 밀어내버릴 수 있는가. 0823
한결같이 펼쳐지는 연장선 너머에 얽혀 있는 잉여의 사태에 대한 상상으로 귀결은 내재함축을 따르는 추리의 영역 밖으로 나아가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다. 0850
가능의 사태에서 현실의 사태로 나아감에 부딪치는 우연을 막을 수 있는가. 그 미결의 정도를 확률이나 귀납논리로 줄일 수 있는가. 0851
뜻밖의 사태를 만나거나 잡는 데에 연역적인 논리의 추리는 크게 쓸모있는 것이 아니다. 0854
깨달음이란 다름의 사다리를 딛으며 거슬러올라감이 아닌가. 0870
부정의 힘을 가진 자는 어디에 있는가..상상에 맞서는 거부이거나 거부에 맞서는 상상이다. 0878
생명은 거부하는 힘으로 태어나 거부에 둘러싸여 잠든다. 존재 아닌 자의 힘으로 나타나고 존재 아닌 자의 힘이 거두어간다. 0890


타자를 정복하거나 세계를 하나로 통일하거나 그것은 일시적인 자유의 환상이다. 타자가 허용하지 않는 자유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0902
생각은 의문을 가진 자의 깨어날 수 없는 집념이다. 그것은 치료허거나 벗어나야 할 것이지 키우거나 잡고 있어야 할 일이 아니다. 0931
생각 자체는 언제나 이탈이며 거부이다. 0933
갓난 아기가 자기 아닌 참 대상의 소리나 참 타자의 몸짓에 마음을 여는 순간은 어떻게 일어나는 가0938
죽는다는 것은 드디어 버림으로 들어서는 자유의 길 0939
일생은 어린 아이 때 하루의 꿈같다. 부지런히 뛰는 삶은 더욱 짧다. 0970
찾음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버림으로써 보편과 일반에 이르지 않겠는가. 개념이나 경험 가운데는 사람의 관점이나 의도가 들어앉아 있으니까. 0980
이성 자신의 우연과 의존성을 시인함으로 타자에의 양도를 목표로 하는 합리성은 없는가. 0982
웃음은 말의 그물을 뚫는 것인가...웃음은 아직 버릇의 그물 가운데에 얽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웃는 얼굴에 따귀를 부친다면 웃음이 버릇의 그물을 깨뜨리고 그참 모스ㅂ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0991


한 이란 무엇인가. ㄱㅓ절당했기 때문에 풀리지 않은 감정,실험하지 못한 ㅇㅣㄹ에 대한 사라지지 않는 우ㅓㄴ망과 집념. ‘아니다‘를 토해내는 부정으 ㅣ샘이 초월한 데에 있거나 현실에 펼쳐지는 파도의 피할 수 없는 밀림이기때문에 넘쳐오는 것./아무리 퍼올려도 끝없이 쏟ㅇㅏ지는 우물바닥처럼 깊이 가라앉은 것인가 1001
동양 사람의 논리는 애매함을 받ㅇㅏ들이는 정신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논리는 실ㅈㅔ의 정신을 나타낸다. 1004
왜 인류구원을 향한 박애와 보편의 정신을 외치는 종교는 오히려 더 닫히거나 배타적일 수 있는가. 왜 동양 사람은 옛날부터 공과 무 혹은 중용의 대도를 지니고 자유자재의 열린생각과 논리를 펼치면서 전제정치와 획일주의의 더 오랜 흐름을 가지고 있는가. 1040

볕뉘.

-1. 고도를 기다리며의 럭키는 모자를 쓰면 생각하는 작가가 된다. 그 모자를 서로 번갈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쓴다. 서로 번갈아 쓰는 모양새를 취하다보니 어느 것이 어느 모자인줄 조차 모르게 된다. 더 이상 생각이라는 것 조차 수면 아래로 떨어진다. 생각해. 생각해. 생각해.

0. 안티호모에렉투스를 인상깊게 읽고 저작을 챙겨보려고 했지만 어디에서도 구하기 쉽지 않았다. 괄호의 철학. 위의 저서는 30년전 저작이고, 저자가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 책이기도 하다. 강신주가 박동환철학에 대한 강연을 한다고해서 끌리기도 했고, 사유가 확장되었으면 하는 바램들이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다.

1. 앞의 철학책들과 이어 읽으면 편할 듯 싶다. 이어진 저작들 사이 다른 결들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서 읽고 싶다. 있다라고 하는 순간 없어진다. 나와 너에 또 다시 집착하는 순간 그 사이는 다시 안보이기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무엇일까. 백지상태로 만들어놓고 덧셈의 가지를 하나하나 그려보는 것도 몸에 맞는 철학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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