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가휘, 제인 마치

아주 오래 전에 나온 영화인데 개봉 당시엔 내가 미성년이었던 관계로 이 영화를 좀더 나중에서야 보게 되었다. 언론마다 청순미와 퇴폐미를 겸비한 소녀 배우의 탄생 어쩌니 해가면서 대서특필했던 기억도 난다. 사실 이 영화 이후 '컬러 오브 나이트'에 브루스 윌리스와 함께 출연했던 제인 마치는 섹시 스타로 지나치게 과장되고 부풀려져 다소 우스꽝스런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연인'에서의 그녀는 스스로도 인지할 수 없을만큼의 열정을 내면에 가득 품은, 조숙하고 아름다운 사춘기 소녀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반면에 나는 배우 양가휘의 매력에 대해선 여전히 잘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고 양가휘에게 반했다는 사람도 여럿 보았지만 연기력이나 배우로서의 능력을 떠나서 일단 내 취향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1920년대 말 프랑스 점령 치하에 있는 베트남 사이공. 이 곳에 프랑스 소녀(제인 마치 분)와 거의 구제불능이라고 볼 수 있는 그녀의 가족들이 살고 있다. 어머니는 절망에 빠져 있고 오빠는 아편에 찌들어 있으며 동생은 우울에 빠져 지낸다. 그들은 서로를 증오하고 있으며 소녀는 가족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에서 괴롭고 외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배의 난간에서 세련된 중국인 청년(양가휘 분)과 마주치게 되고 이들은 이내 운명같은 사랑에 빠져든다. 지역의 최대 부호의 아들인 청년은 그의 침실로 소녀를 이끌고 약 일 년 반 동안 그들의 밀애가 지속된다. 처음에 이러한 관계에 대해 소녀를 타박하던 가족들도 청년이 부자라는 사실에 모두 잠잠해지고, 반면에 청년은 아버지의 뜻대로 결혼하지 않을 경우 모든 것을 잃을 수 밖에 없다는 두려움에 소녀와 이별하고 중국인 처녀와 결혼한다. 사이공을 떠나 프랑스로 가는 배에 몸을 실은 소녀, 부두 한 귀퉁이에서는 청년의 승용차가 숨어서 소녀를 말 없이 배웅한다. 그리고 배가 사이공 항구를 벗어나면서부터 소녀는 어디서부터 솟아나오는지 모를 눈물을 펑펑 터뜨린다. 늙어서 작가가 된 소녀가 중국인 청년과 사랑에 빠졌던 지난날을 회상하는 나레이션으로 시작했던 영화는 다시 회상을 마감하는 나레이션으로 끝이 난다.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 유학까지 마치고 온 남부러울 것 없는 중국인 청년은 낡고 촌스런 옷차림 속에 가려져 있는 프랑스 소녀의 이국적인 아름다움과 아직 때묻을 새 없었던 순수를 알아본다. 그는 모든 걸 다 가졌기에 오히려 권태로웠고 반면에 소녀는 낯선 이국 땅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아무런 희망도 없었기에 권태로웠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르다는 것'에 이끌렸고 비록 다른 이유에서일지라도 둘 다 외롭고 무료한 처지였음을 공감한다. 그들은 그들의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섹스에 탐닉하고 서로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러나 너무 가진 것이 많은 청년은 모든 것을 버릴 용기가 없었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소녀는 청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섹스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두 사람은 마치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것처럼 담담하게 헤어진다.

과연 현실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이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사랑의 완성이 결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아예 처음부터 사랑에 완성이란 것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무엇을 보았든, 서로의 닮은 면을 보았든 아니면 서로의 다른 점에 이끌렸든, 언제 어디에서건 사랑은 부지불식간에 싹틀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부르는 소리에 따라가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이 되거나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지 않는 한에서라면 말이다. 영화에서 소녀는 청년에게 매달리지 않았다. 자신의 가족을 보고 난 후 실망감과 역겨움에 자신에게 더 잔인하게 구는 청년의 마음에 대해서도 한 마디 원망 없이 그녀는 그를 받아들였다. 청년은 소녀에게 더욱 강하게 집착했지만 소녀는 청년을 더욱 강하게 사랑했다. 더 많이 사랑한 쪽은 소녀다. 이별의 시점이 왔을 때 떠나지 말아 달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과 사랑의 깊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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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와 수기야마

대학 2학년 때인가. 어느 봄날 저녁 매우 소란한 합동 강의실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던 기억이 난다. 학내 영화 동아리에서 무료 관람을 홍보했고 늘 붙어다니던 친구 하나가 나를 그리로 이끈 것이었다. 친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실컷 웃자 했다. 정말로 영화를 관람하던 내내 꽤 넓었던 합동 강의실은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떠나갈 듯 했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이 영화에는 아주 웃기는 인물이 등장한다. 걸을 때마다 관절이 고장난 사람처럼 반듯하게 각을 맞추어 이동하던 사람인데 아마도 주인공 수기야마의 직장 동료였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사람들은 그 사람이 화면에 등장할 때마다 웃어댔고 나도 따라 웃어댔다. 그 사람이 정말 웃겼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나중에 이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땐 그렇게 시끄럽게 웃으면서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저 사진 속 중년의 사내에게 공감했고 사교댄스를 배워볼까 진지하게 고민까지 하게 되었다. 물론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영화를 볼 때만큼은 무대 위에서 모든 것을 잊고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던 수기야마와 잠시 한 마음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정한 가족과 예쁜 이층집을 가진 샐러리맨 수기야마(야쿠쇼 고지 분)는 누가 보아도 성실한 가장이자 모범적인 직장인이다. 그러나 하루하루 엇비슷하게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 그는 마음의 헛헛증을 느끼고 점점 생기를 잃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올려다본 사교댄스 교습소의 창가에서 한 아름다운 여인(마이 - 구사가미 다미요 분)을 발견하게 되고 그녀의 알듯 모를듯한 미묘함에 이끌려 수기야마는 급기야 사교댄스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렇듯 대단치 않은 호기심으로 시작한 사교댄스는 밋밋하던 그의 일상에 활기와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고 춤을 배우고 추는 과정 속에서 수기야마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남편의 변화를 의심하던 그의 아내도 사교댄스 경연장에서 댄스에 열중하는 수기야마의 모습을 보고 그 동안 자신이 잘 안다고 믿었던 남편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슬럼프에 빠져 있던 마이에게도 수기야마의 춤에 대한 남다른 열정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젊고 예쁜 여자가 아니라 젊고 예쁜 여자가 가르쳐 주는 춤과 바람이 난 중년 남성의 이야기는 신선하면서도 유쾌했다. 어딘가 억눌려 있고 지쳐 보였던 그가 눈빛에 가득 의지를 싣고 땀을 뻘뻘 흘리며 복잡한 스텝을 배워가는 모습은 때로 장렬하기까지 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상 만사를 잊는 낚싯꾼들처럼, 화투장을 돌리며 온갖 시름을 잊는 노름꾼들처럼, 수기야마는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스텝을 밟으면서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저만치 떨어져 있는 춤꾼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각자 일상에서 벗어나 흠뻑 취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그랬다. 우리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마실 물이 아니라 생에 대한 갈증이라고. 무엇인가를 원하는 갈증이 없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무료하고 적적한가.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우리를 취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빡빡한 일상을 더 잘 견디게 하는 에너지가 되고 활력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들 하나씩 혹은 더 많이 사랑할 대상을 갖고 있거나 찾고 있다. 그리고 낚시와 노름과 춤 속에서 인생을 배우듯이 무엇인가에 빠진 사람들은 단순히 병적으로 중독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더 잘 사는 방법에 대한 진리를 깨우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아름다운 일상을 위해 더 많이 미치고 싶다. 더 강하게, 더 뜨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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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 소은

개봉에 맞추어 영화를 보게 되면 대개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나 '아일랜드'와 같은 흥미나 오락 위주의 액션물을 고르게 된다. 실제로 가끔 그런 영화들을 보고 싶어질 때도 있긴 하지만 지인들과 함께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고르다 보면 관람 도중에 마음을 징하게 건드릴 법한 내용의 영화는 부러 피하게 된다. 영화가 끝난 후 왠지 멋쩍어짐과 동시에 내 눈빛 속에서 나를 아는 누군가가 내가 추억을 되짚는 모습이나 흔들리는 마음의 결을 다독이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것도 신나는 오후를 꿀꿀하게 망쳐버릴 흔해빠진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 안젤리나 졸리의 미모라든가 이완 맥그리거의 건재함에 대한 약간 오버 섞인 감탄, 그 정도로 그치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보고 싶었던 대부분의 영화를 개봉이 한참 지난 이후에 혼자 DVD로 빌려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허진호 감독의 영화들,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가 그랬고 이 영화 '동감'이 그랬다. 비록 따끈따끈한 맛은 떨어지지만 가슴 속에 차곡차곡 묵혀 두었던 영화들을 하나 둘 씩 꺼내어서 다시 이야기하는 기쁨이 또 새롭다는 것을 요즘 느끼고 있다.

1979년에 살고 있는 여대생 소은(김하늘 분)은 선배(박용우 분)와의 닿을듯 말듯한 짝사랑의 설레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그녀는 우연히 고물 무선기 하나를 얻게 되고 개기월식이 진행되던 날 밤, 무선기로부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에게 교신해 온 사람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인(유지태 분)이라는 남학생. 그들은 시계탑 앞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지만 사실 2000년의 서울에 살고 있는 인과 과거 속에 살고 있는 소은은 어긋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는 믿기 힘든 현실을 받아들인 후 무선기를 통해 사랑에 대해, 우정에 대해, 세상에 대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그처럼 그들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소통하며 공감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또 다시 믿기 힘든 인연의 줄로 자신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똑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딱 한 번 서로와 마주친 채 스쳐 지나간다.

나 개인적으로는 배우 김하늘을 좋아한다. 한국 영화계엔 종횡무진 폭 넓은 연기력을 선보이는 전도연이나 닳지 않는 진주처럼 빛나는 자태를 드러내는 이영애가 있고 귀여운 마스크로 긴 생머리를 흩날리며 뭇 남성팬을 사로잡는 시원시원한 미모의 전지현도 있지만 나는 '동갑내기 과외하기'에서 순진하기 짝이 없는 복길이같은 말투로 권상우를 혼냈다 다독였다 하는 그녀,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서 귀엽고 깜찍한 내숭으로 한 가족을 사로잡던 그녀, 그리고 '바이 준'이나 '동감'에서의 솔직한 눈매를 지닌 청순한 모습의 그녀를 아주 좋아한다. 그것은 김하늘 그녀이기에 가능했던 역할과 이미지였다. 배우 나름으로 노력해서 바뀌는 이미지도 있으나 타고난 이미지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것 또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배우 김하늘이 무리한 연기 변신을 시도하지 않고 찬찬히 자신의 색깔에 맞는 역할과 연기를 해내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역시 이 영화 '동감'에서도 그녀는 촌스러움과 청순함의 경계에 서서 70년대 여대생의 이미지를 잘 소화해 내고 있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역시나 사랑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2000년대에 사는 남학생과 70년대에 사는 여대생이 서로 공감할 수는 있으나 이어질 수는 없는 것처럼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서 헤어지는 일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싶다. 실제의 삶 속에서 굳이 긴 시간차를 설정해 놓지 않더라도 지금 이 사람을 좀더 늦게 만났더라면, 지금 이 사람을 좀더 일찍 만났더라면, 그런 아쉬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한 교수님은 당신의 첫사랑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녀는 나를 무척 따르며 좋아했고 나도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그 당시의 나는 공부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고 아무 것도 준비된 것이 없어서 약속같은 걸 할 수가 없었다."고. 잠시 회상에 잠기셨던 교수님은 바로 웃으시면서 "사랑의 문제를 떠나서 결혼 적령기에 만난 사람이 확률적으로 내 운명의 상대가 되고 마는거지. 운명은 타이밍이야." 라고 말씀하셨다. 강의실에 있던 CC들을 보시면서 "그래도 너희 나이 때에는 쟤들처럼 연애도 열심히 해보긴 해봐야 하는거다."라고 하셨던 기억도 난다. 그 때 아리송하게나마 타이밍이란 말을 이해했고 공감했다. 그 때 나는 무엇에든지 열정적으로 빠져들만한 나이였기에 도리어 산다는 게 힘이 부치기만 했고 자꾸 나이를 먹고 빨리 늙어서 모든 것에 초연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 자신의 어설픔과 성급함 때문에 주변의 많은 것을 놓쳐버리고 소중한 인연들을 싹둑싹둑 잘라내곤 했던 시절이었다. 당최 뭐가 뭔지 분간이 안되던 시절, 다 때가 되면 운명의 그 상대가 나타난다는 말에만 귀가 반짝하던 귀여운 나이였다. 운명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의 유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채로 말이다.

앞으로의 일은 모르고 사는 편이 낫다.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몰라야 한다. 영화 속에서 소은은 인을 통해 우연히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되게 됨으로써, 그녀를 설레이게 하고 행복하게 했던 짝사랑의 환희는 일순간 물거품이 되고 그녀를 웃게 해주었던 우정에 대해서도 더 이상 정직할 수가 없게 된다. 소은이 결과에 상관 없이 미래의 인연의 향방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면 기대와 가능성 속에서 그녀는 훨씬 더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삶의 행복이 하루하루의 만족과 미래에 거는 희망에 있는 거라면 그녀는 행복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쳤다. 더불어 놓쳐버린 인연에 매달린 그녀는 언젠가 한 번 쯤은 나타났을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타이밍까지 놓쳐 버린 셈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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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01 2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01-01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othing special~ 여느 때와 다름 없었습니다. 님이 어떻게 보내셨는지는 방금 페이퍼를 읽고 와서 대충 알겠네요. 저도 그와 비슷했어요.
밥 많이 드세요. ^^
 


제시와 셀린느

같은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영혼끼리 공감하는 운명같은 하루를 보내고 작별하는 두 사람. 그들은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돌아섰지만 우리는 세월이 훌쩍 흐른 다음에야 비로소 Before Sunset이란 영화 속에서 더욱 성숙해진 그들과 재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나의 예상대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 같다. Before Sunset은 아직 보지 못했다. 개봉 당시에 봤더라면 추억으로 남을 뻔 했다. 그 때 못 보길 잘했다. 나중을 기약한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늘 더 많은 자유를 느낀다. 마음 놓고 일탈을 한다거나 누군가를 일부러 속인다거나 그런 의미의 방종이 아니라 왠지 다리 힘을 풀고 터덜터덜 걸어도 좋을 것 같고 호흡할 수 있는 산소의 양마저 좀더 많아진 것 같은 느낌 말이다. 미국 청년인 제시(에단 호크 분)와 프랑스 아가씨인 셀린느(줄리 델피 분)도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비엔나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랑의 아픔, 결혼의 의미,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며 평소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했던 사연들을 공유한다. 젊고 순수하고 풋풋한 이들은 상대에 대한 겉잡을 수 없는 열정으로 빠져들지만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서로의 갈 길로 떠난다. 두 사람은 아마 평생 서로를 그리워하고 떠올리며 살 것이다. 닮은 두 영혼이 마주쳐 불꽃을 일으키는 순간은 기대와는 달리 그렇게 쉽게, 자주 일어나 주지는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론 그렇게 꿈처럼 시작된 만남이라 하더라도 생활 속에서 서서히 퇴색되기 마련이니 어쩌면 두 사람이 여운만을 남긴 채 서로의 일상으로 복귀한 것은 참 잘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어떤 한 사람을 허무하게 떠나 보낸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나와 영원히 오래오래 친구가 되길 바랬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는 너무 어려서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 연인 이외에도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좋으면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면 서로 사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나보다 먼저 사랑해 온 사람이 있었고 그는 이런 나를 설득했고 이해했고 기다렸지만 나는 당최 말을 듣지 않았다. 어리고 고집이 세었던 나는 그를 이기적인 욕심쟁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좋아하면서도 미워했다. 이후 시간은 흘렀고 나의 이별 통보로 우리는 헤어졌다. 살다가, 간혹 그와 나눴던 대화가 한 움큼씩 떠오를 때가 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한참 어린 나를 위해 대화의 코드를 그 편에서 섬세하게 맞추어 주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우리는 잘 맞았고 서로의 매력에 탄복했으며 너를 만나 행복하다는 느낌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의 나라면? 나는 어렸기 때문에 그와 헤어졌지만 어렸기 때문에 그와 행복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두 가지 일이 벌어지는 데 한 가지 이유가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은 단 한 번 뿐일지언정, 혹은 앞으로 나에게 그런 행운이 주어질지도 모르겠으나 그 기억을 내 인생의 보너스 정도로 여기고 있다. 나도 영화같은 추억 하나 가지고 있다는 것. 정말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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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12-31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포 선셋 보고 너무나 좋아서 얼마전 선셋관 선라이즈 시리즈를 디비디로 구입했어요. 선라이즈를 아직 보지 않았는데. 어여 시간내서 봐야겠어요. 사랑은 정말 어렵죠. 너무나 예측 불가능하고 매번 다르기때문에 힘들어요.

깐따삐야 2005-12-31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쵸?
사람끼리 감정의 저울질 없이 담백하게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재섭과 소희

몽환적이면서도 나른한 루시드 폴의 음악과 잘 어울렸던 이 영화는 매우 어둡고 우울했던 배경과 스토리 이면에 두 배우의 반짝거리는 젊음으로 빛이 나던 영화로 기억한다. 영화 속에서 재섭(김태우 분)은 정말 이도저도 뜻대로 안 풀린 채 상처와 불만을 가득 안으로 머금은, 결국 모든 것에 무심해지다 못해 초탈해진 듯한 학원 강사의 얼굴 그대로였다. 소희(김민정 분) 역시 누구에게도 제대로 이해 받지 못한 채 외로움에 치를 떠는, 그것을 반항이나 당돌함으로 한껏 위장하여 내보일 수 밖에 없는 여리고 섬세한 여고생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감독은 배우를 잘 골랐다. 옆으로 가방을 매고 서 있는 재섭의 구부정한 어깨와 말은 안해도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듯한 소희의 크고 맑은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보습 학원의 국어 강사인 재섭은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소통하지 않은 채 오직 길거리의 창녀들과만 몸을 나눈다. 그는 그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런 변화도 없고 아무런 희망도 없는 따분하고 외로운 일상이다. 그런 일상 속으로 소희라는 한 소녀가 뛰어든다. 공부도 잘하고 부유한 집에서 살고 있지만 소희에게 그런 것들은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녀는 이해 받지 못함에 괴로워하며 원조교제를 하는 등 자기 스스로를 막 다룬다. 재섭은 이러한 소희에게서 알듯 모를듯한 동질감을 느끼며 점점 더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두 사람은 버스 정류장에서 같이 버스를 기다리고 같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서로의 삶에 대해 수수께끼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가까워진다. 그러나 임신과 낙태, 어린 여고생이 겪기엔 너무 큰 일들을 겪어버린 소희는 어느 날 부터인가 학원에 나오지 않고 재섭은 소희가 사라진 무료한 일상 속에서 계속 그녀를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 정류장에서 소희를 다시 만나고 재섭은 소희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펑펑 울음을 터뜨린다.

나는 이 영화를 외로움이 다른 외로움에게 말을 걸다, 라고 읽었다. 아직 스무살이 되지 않은 소녀와 아직 사회 속에 완벽히 편입되지 못한 청년은 서로가 서로의 외로움을 알아본다. 삶 속의 위선과 구차함을 마주한 이들은 어설프게라도 연기를 하며 살 수가 없다. 산다는 것이 본래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고(박인환-'목마와 숙녀'에서 인용) 저마다 한 통속이 되어 서로의 비위를 맞춰 주며 통속적으로 굴러가는 것임을, 이들은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들이 택한 것은 왕따 놀이. 사회라는 공간 내에서 연기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바보가 되거나 왕따가 되어야 한다. 바보는 간혹 동정이라도 받지만 왕따는 혼자 고상 떤다고 뒷담화에나 오르락 내리락 하기 일쑤다. 때론 한 번 더 뒤집어서 본래는 왕따가 되기 좋을 스타일인데 바보 연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처럼 큰 날개를 숨기고 일부러 뒤뚱거리며 걷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웃고 즐거워한다. 그의 정신은 고고하게 창공을 날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육신이 질퍽한 지상에 있음을 잘 안다. 그리고 그 씁쓸한 괴리감을 웃음과 농담으로 채운다.

그래서 재섭과 소희의 왕따 놀이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나는 이들이 작은 동네만 오락가락하는 버스 말고 기차나 비행기도 타 보았으면 좋겠다. 컵라면만 먹지 말고 대파를 송송 띄운 맛있는 라면도 먹어보고 나와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을 하나씩 정해서 천장 보며 욕해 보기, 그런 놀이도 하면서 놀았음 좋겠다. 서로의 상처를 알아 보고 말 없이 이해하는 soul-mate를 찾았으니 이제 두 사람이 할 일은 안으로 더 안으로 파고드는 일이 아니라 즐거운 일을 같이 해보는 것이다. 지금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슬픔이나 괴로움, 그게 전부인 것 같지만 스무살이 되고 서른살이 되면 뭔가 다른 게 보일지도 모른다. 세월이 지나도 별 게 없고 삶은 자꾸만 더 구차해진다 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싱싱한 채 살아 있고 더욱이 그리운 그 사람과 함께라면 그 무엇이 두려운가. 나는 두 사람이 이 영화처럼 솔직하고 간결하고 담백하게 살길 바란다. 때때로 젊다는 게 너무 힘이 드는 나를 포함한 모든 청춘들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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