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돌아오던 길, 헌책방에 들렀고 뜻밖의 수확이 있었다. 비아트릭스 포터의 그림 이야기책 시리즈를 발견했다. 동행했던 열두살배기 외사촌은 눈을 반짝이더니 푸른 자켓을 입은 토끼가 그려진 <진저와 피클 이야기>를 집어들었다. 영화에 나왔던 그림책 속의 귀여운 주인공들이 첫번째 속지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플롭시 버니즈, 피터 래비트, 제미마 푸들 덕... 동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으며 기쁨에 겨워하던 포터(르네 젤위거 분)의 모습이 떠올랐다. 1900년대 초, 칙칙하고도 점잖은 의상 속에 가까스로 우겨넣은 듯한 르네 젤위거와 이완 맥그리거는 어쩐지 불편하고도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고스란히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옮겨오고 싶은 아름다운 자연과 소박하면서도 깜찍한 그림 속 주인공들, 앙증맞게 꿈틀대는 동화적 상상력이 알맞게 어우러져 영화를 보는 내내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 노만 워른(이완 맥그리거 분)의 죽음 이후부터 다소 밋밋하게 흘러가던 후반부와 바로 뒷줄에서 거의 에로영화를 찍고 있던 커플의 소음이 옥의 티라면 옥의 티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상상력과 그림에 대한 재능을 갖고 있었던 베아트릭스 포터는 동물 케릭터들을 주인공으로 한 책을 출판하려 하지만 1902년의 영국 사회는 그녀를 결혼하지 않고 책만 쓰는 독특한 노처녀로 바라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노만 워른이라는 편집자가 포터의 재능과 그림의 매력을 알아보고 그녀의 책을 출판하기로 한다. 두 사람은 책이 나오기까지 함께 일하며 서로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되고 결혼을 약속하지만 장사치와는 결혼시킬 수 없다는 포터의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그들의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 포터의 부모는 포터에게 여름 동안 런던을 떠나 있을 것을 제안하고 포터는 노만과의 사랑을 믿고 훗날을 기약한 후 잠시 헤어져 있기로 한다. 그러나 그녀가 떠나있던 사이, 노만은 갑자기 병으로 죽게 되고 그 충격으로 포터는 잠시 방황하지만 노만을 통해 친구가 되었던 밀리(에밀리 왓슨 분)의 응원을 받으며 다시 작품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포터는 부모님의 곁을 떠나 한적한 시골 농장에 머무르기로 하고 자신이 그림책을 팔아 벌어들인 인지세로 개발 위기에 놓여있던 땅을 사들이며, 그 과정 중에 만난 윌리엄 힐리스(로이드 오웬 분)와 동지애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된다. 결국 이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는 후일담.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발끝까지 삼십대 노처녀가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넘치도록 보여주었던 르네 젤위거는 이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사랑스러우면서도 세련되고, 다정다감하면서도 자의식이 강한, 그 때 그 시절에 놓아두기엔 너무 아깝다 싶은, 매력적인 동화작가의 모습으로 새롭게 등장했다. 살짝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수더분한 미소는 여전하다 못해 질릴 지경이었지만 자신이 그려놓은 토끼나 개구리와 넉살 좋게 대화하는 장면이 어색하지 않을 수 있는 건 르네 젤위거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영원한 <영 아담>일 줄 알았던 이완 맥그리거의 출현에는 왜 이런 도발을 하는 걸까, 갸우뚱했고 영화를 보고나서도 사실 의문이 풀릴 턱은 없었지만 오랜만에 그를 본 것은 반가웠다. 그래도 이완 맥그리거는 조니 뎁처럼 점점 더 다양한 얼굴로 등장하여 관객을 놀래키거나 즐겁게 하지 말고 계속 눈과 허리와 다리에 힘주고 살았으면 좋겠다. <트레인스포팅>에서처럼 늘상 혈기왕성할 순 없더라도 토끼 그림을 보면서 눈에 별까지 띄우면서 아름답다고 감탄한다든지, 반들반들 가지런히 빗어넘긴 머리가 왠말이며 그마저 비에 다 젖은 채로 나타나서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1902년의 영국이나 지금이나 가정주부 이상, 또는 그 이외의 꿈을 꾸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우려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남성들의 시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말이 있고 그것이 어느만치 현실이라고 인정해 오던 바였는데 밀리와 포터의 신실한 우정은 그런 면에서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팽배한 자존심이 아니라 넉넉한 자의식을 지닌 두 여성의 대화와 우정은 따스하고도 멋스러웠다. 우연처럼, 서점에서는 보봐르와 샤르트르를, 헌책방에서는 브레히트와 루트 베를라우의 이야기를 읽었다. 연인이었지만 그들의 사랑도 동지로서, 친구로서, 우정의 속성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나도 나이를 먹은걸까. 일시적인 냉소일까. 넘칠 듯 아슬아슬한 열정은 어쩐지 불안해서 더 흥미로운 장난같다. 동지애에서 싹튼 듬직한 우정을 포터와 밀리, 포터와 노만, 포터와 힐리스에게서 읽었고 성장을 위한 자양분과도 같은 그 사랑들이, 예전에는 다소 싱겁게만 보였던 그 관계들이, 이상향이라도 된 듯 벅차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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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1-26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님이 이 영화를 보여달라고 하길래 잠깐 검색해봤는데....
생각보다 러닝타임이 짧더라구요...자를 내용의 영화는 아니므로..
워낙 짧게 만들어진 영화이구나 싶었습니다.^^

깐따삐야 2007-01-27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짧은 영화에요. 스토리도 평범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심심해지는. 그래도 재미있었고 이완 맥그리거를 봐서 좋았답니다. ^^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강은 넓으니 독극물을 방류하라고 하는 미군을 보면서 아, 반미 영화겠구나. 항상 마지막 한 발을 쏘지 못하는 양궁선수로 등장하는 배두나를 보면서 아, 저 활로 결정적 한 발을 쏘겠구나. 다소 모자란 듯 어리버리하지만 딸이라면 사족을 못 서는 송강호를 보면서 마지막에 괴물을 처치하는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겠구나. 괴물이 나온다는 것, 딸이 그 괴물에게 잡혀간다는 것 이외에는 줄거리를 전혀 모르고 극장에 갔지만 영화 서두만 보더라도 영화의 굵직한 줄기들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만큼 영화의 스토리와 메시지는 지극히 단순했다. 마치 <죠스>와 <엘리게이터>를 적당히 버무려 놓은 듯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는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방식 또한 에둘러 은유하기 보다는 영상을 통해 직접 눈 앞에 보여주고 대사를 통해 귀로 들려준다. 반면에 디테일은 훌륭했다. 돌연변이 도롱뇽같던 괴물은 그 세세한 생김새에 있어서 괴물 영화 중 전무후무한 이미지가 될 것이라 느꼈고 적절한 타이밍에 관객을 놀래켜대는 솜씨 또한 여간 아니었다. 특별한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고 단순하고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완벽하게 몰입하여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오락 영화였다.    

<괴물>의 흥행을 바라보며 한국의 관객 수준과 영화의 수준이 잘 맞아떨어진 경우라고 말한 김기덕은 옳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세계 시장에 진출해서도 성공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 때 가서도 김기덕 감독이 세계의 관객 수준과 영화의 수준이 잘 맞아떨어진 경우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물론 나는 그 동안 몇 편 안되긴 하지만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좋게 보아왔고 영화 속 독특한 은유의 미학에 대해서 감탄과 함께 존경을 느껴왔던 참이다. 그의 이번 발언은 실망스럽다. 대개의 평균적인 관객들은 해석이 아니라 오락을 위해 극장을 찾는다. 그런 영화를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지만 내키지 않아 안 만드는 것이라면 그 고집대로 영화계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개척해 나가면 되는 것이고, 소수의 평론가나 매니아층의 공감과 응원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관객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읽어내고 어느만치 배려할 줄 아는 것도 감독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해를 못하느냐, 고 윽박질러봤자 슬퍼지기만 할 뿐. 이 영화는 모든 것이 잘 맞아떨어졌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모두 소시민이고 괴물을 무찌르는 데 일조하는 건 경찰이나 군인이 아니라 노숙자, 여자 양궁 선수, 소시민 아버지다. 국제 깡패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미국에 대해 전 세계가 반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고 계절은 아이들의 방학이 끼어 있는 무더운 여름. 영화의 배경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한강이며 괴물은 물 속을 유유히 헤엄치다가 시원한 물살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는 줄곧 장대비가 내린다. 이만하면 시원하고 통쾌하게 즐긴 다음, 어렵지 않은 방식으로 사회적 메시지까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오는 유의미한 경험이 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두 번이나 봤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몽땅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어 하는 배우들이라 그런지도. 변희봉이야 원체 말할 것도 없고 송강호는 완전 물이 올랐지 싶다.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게 소설이라고 한다면, 소시민보다 더 소시민스러운 사람이 송강호였다. 배우 설경구가 아무리 눈에 힘을 풀고 연기해도 어딘지 배어나오는 독기 때문에 다소 부담스럽다면, 송강호는 언제나 그 모습 자체로 편하고 좋다. 박해일은 무슨 역할을 해도 귀엽다. 뺀질거리는 외모에 쌍시옷을 뱉어대며 악을 써대는 모습을 보면 또 까분다, 는 즐거운 느낌이 들면서 하나도 밉지가 않다. 괴물을 향해 화염병을 던져대는 모습은 다소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웠지만 박해일이니까 그만한 그림이 나오는 것이지, 장동건이 하거나 양동근이 했다면 더 어색해질 것이었다. 배두나는 양궁선수라기엔 너무 바짝 마른 모습에 실감이 덜했지만 어둠 속에서 튀어나올 듯 커다란 눈망울이나 야무지게 꼭 다문 입술은 축축하고 캄캄한 괴물 영화와 잘 어울렸다. 예쁘게 보이려고 하거나 폼 잡지 않고 얼굴에 온통 검은 칠을 한 채 연기에 몰두하는 모습이 좋았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너무 직접적으로 들이대는 것만 빼면(생각할 거리를 주지 않아 그만큼 편하기도 했지만)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너무 직접적으로 들이대는 그 방식 자체도 나쁘지 않았다. 감독의 성향이자 열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알고보면, 가장 평범한 소시민들이 말하는 방식 또한 그렇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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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8-18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기덕 감독이 그런 말을 했군요. 수준이라... 쩝.
아무튼 님의 평에는 동감입니다.

blowup 2006-08-18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아성 이야기도 해주셔야죠. <떨리는 가슴>에 나왔을 때부터 참 맘에 들었는데. 배두나와 한번은 이모, 조카 사이로. 한번은 고모, 조카 사이로. 그런 경우도 드물듯.
느낌이 닮지 않았나요?

깐따삐야 2006-08-18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rblue님, 처음 뵙지요? 반갑습니다. 김기덕 감독은 그 발언 때문에 어젯밤 100분 토론에까지 출연했다고 하는데 그 내용에 대해선 방송을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뭐라고 했을지 궁금해서 지금 뉴스를 찾아보는 중이랍니다. ^^

namu님, <떨리는 가슴>은 못 보았구요. 처음에 예고편에서 얼핏 고아성을 보았을 땐 임수정인 줄 알았어요. namu님 말씀을 듣고 보니, 똘망똘망하면서도 수수하고 발랄한 모습이 배두나와 사뭇 비슷하다고 느껴집니다. 영리해 보이는 예쁜 배우였어요. ^^
 


배를 매며

  - 장 석 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뜨겁고 끈적한 여름. 어디선가 서걱이는 눈 냄새가 나는 듯 했던, 충분한 여백마다 쓸쓸함이 배어있던 이 영화를 다시 보고싶었다. 잎이 무성한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서 정원(한석규 분)과 다림(심은하 분)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스크림을 먹던 장면, 서로의 어깨가 비에 다 젖는 줄도 모르고 가까이 몸을 붙이지 못한 채 쑥스러운 폼으로 우산을 나눠쓰고 걷던 모습, 놀이공원에서 다림이 내미는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를 양손에 받아들고는 멋쩍은 듯한 미소를 짓던 정원, 불이 켜지지 않는 초원사진관에 돌을 던지며 정원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던 다림. 활자로 된 기록물과는 달리 영화는 그렇듯 띄엄띄엄, 대사도 없는 몇 장의 이미지들로 기억 속에 남곤 한다.

혼자 동네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정원은 곧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시한부 인생이다. 첫사랑을 떠나보낸 후 결혼도 하지 않고 삶의 많은 부분을 체념한 채 보내고 있는 정원의 일상은 그다지 새로울 일도 없고 즐거울 일도 없다. 그런 정원 앞에 어느 날 주차단속요원인 다림이 나타나고 두 사람은 점점 사진사와 손님이라는 밋밋한 관계를 벗어나 서로에게 친절을 넘어선 호감을 갖게 된다.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며 피곤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다림은 자신을 바라보며 사람 좋은 웃음을 한가득 웃어주고 어떤 말을 해도 담담히 받아주는 정원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정원 또한 솔직과 내숭의 경계를 넘나들며 종종 깜찍한 말을 건네오며 자신의 잔잔한 일상 속으로 파고드는 다림이 신선하고 사랑스럽다. 그러나 정원이 입원한 사이, 다림은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게 되고 다림은 문이 열리지 않는 사진관을 바라보며 정원에 대한 호감이 그리움으로, 그리움이 원망으로, 원망이 다시 그리움으로 바뀌는 과정을 겪게 된다. 마지막 정리를 위해 사진관에 들른 정원은 다림의 편지를 보게 되고 다림이 새롭게 일하게 된 구역의 커피숍에서 다림을 바라보지만, 죽음을 앞둔 사람으로서 이제 갓 피어오르듯 싱싱하고 건강한 그녀에게 다가갈 수는 없다. 계절은 바뀌어 겨울이 오고 다시 사진관을 찾은 다림, 사진관 진열대에서 자신의 사진을 발견하곤 정원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모른 채, 활짝 미소 짓는다.

처음에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제 우리나라에서 더 이상의 멜로 영화는 나오기 어렵지 않을까, 싶을만큼 좋았더랬다. 같은 감독의 작품이었지만 이후 <봄날은 간다>에서도 이만큼의 진한 여운을 느끼진 못했고 한창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외출>은 배용준과 손예진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너무나 주관적이고도 편협한 이유로 영화를 보지 않았다. 기대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미 허진호 감독은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최고 정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제는 내려오는 것 뿐인가, 하는 주제넘은 생각까지 했더랬다. 그만큼 이 영화는 내게 최고였다. 세심하고도 강한 내면을 수수한 듯 편안한 웃음으로 감추고 있는 정원과 새카만 생머리를 쓸어올리며 귀엽고 새침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다림 또한 내가 만난 멜로의 주인공들 중에는 단연 최고였다. 정원이 한석규가 아닌 다른 남자배우였다면, 다림이 심은하가 아닌 다른 여배우였다면, 을 상상할 수 없을만큼 적재적소의 캐스팅이었다고 밖에는, 혹은 배우가 가진 이미지를 제대로 끌어내어 활용할 줄 아는 감독의 타고난 감각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길이 없다. 이제 심은하는 결혼과 동시에 배우 생활을 접었고 한석규는 근래 들어 새롭게 연기변신을 시도하고 있지만 앞으로의 향방과는 무관하게 그들의 가장 아름다웠던 청춘은 <8월의 크리스마스>, 이 영화 속에서가 아닌가 싶다. 

날씨 탓인지, 세월 탓인지는 몰라도 요즘은 '삼가는 사랑'에 대해서 이것이야말로 진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머릿수만큼이나 다양한 게 사랑의 정의이며 방식인데다 특정한 하나를 두고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일 또한 무용한 일이겠지만 역시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진짜야말로 진짜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예전에는 산을 끝까지 오르든, 바로 하산을 준비해야 하든, 나는 저 산을 좋아해, 라고 외쳐야만 다인 줄 알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으면 입 밖으로 사랑의 언어들이 폭발하기 시작했고 그 순간 자존심이라든가, 상대에 대한 배려 따윈 안중에 없었다. 가슴이 시켜서 그랬다, 는 말처럼 솔직한 듯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을까. 물론 그처럼 무모하고도 이기적인 과정을 겪어내며 엇비슷한 상처와 후회를 반복하고 나야만 비로서 성숙해지는 게 인간이라지만. 너를 정말 내것으로 만들고 싶다, 라는 불가능한 소유욕에서 파생하는 줄다리기가 아니라 너를 위한 끊임없는 배려로서의 조심성, 그것이야말로 진짜 사랑의 속성은 아닐까. 내가 완력과 재치로 사랑을 쟁취하고는 막상 스칼렛이 곁에 있어달라고 할 때 냉정하게 등을 보이는 레트 버틀러보다 스칼렛을 사랑했음에도 그 마음을 숨긴 채 끝까지 부인과의 의리를 지켜낸 에슐리 윌크스에게 찬사를 보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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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8-10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림이 정원의 사진관 유리창을 돌로 박살내는 장면이 생각나네요..^^
극중 인물들이 눈물 질질 짜고 슬퍼하는 것보다 더 절절한 이별이 아니였나
생각되어집니다..^^

깐따삐야 2006-08-10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허진호 감독은 절제의 미학에 능통하지요. 스스로 오버하지 않는 대신 관객으로 하여금 오버 해석을 이끌어내게 하는. 어서 이 영화처럼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서 보여주면 좋겠어요. ^^

비연 2006-08-11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환,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립니다.
우리나라 영화 중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 중 하나라는 생각.

깐따삐야 2006-08-11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반갑습니다. 참 좋은 영화죠. ^^
 

 

휴 그랜트는 바람둥이일 수는 있어도 결코 악인은 될 수 없는,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을 때는 있어도 절대로 미워할 수는 없는, 고의라면 상당히 단수 높은, 고의가 아니라면 그저 어떤 면에서 행운이랄 수밖에 없는, 그만의 고유한 이미지로 성공한 케이스들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영화 <어바웃 어 보이>는 더도 덜도 말고 딱 휴 그랜트를 위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널널한 삶을 구가하는 백수, 정착하기 두려워하는 연애술사,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음에도 곤란한 문제가 닥칠 때마다 멍한 표정으로 갸웃거리기만 하는 미성숙한 이기주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노, 라고 말하지 못할 것만 같은, 노, 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결국 찜찜한 마음을 못 이기고 다시 돌아와 줄것만 같은 주인공 '윌'이 바로 휴 그랜트가 열연하고 있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은 채 솔로 생활을 즐기고 있는 윌은 사랑하다가도 귀찮지 않은 결말로 쿨하게 헤어질 수 있는 상대를 찾던 중, 혼자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들이 적임자라 생각하고 미혼모 클럽에 가입한다. 드디어 마음에 드는 상대와 데이트 약속을 하게 된 윌은 상대가 데이트에 데리고 나온 '마커스(니콜라스 호울트 분)'라는 아이와 만나게 되고 공교롭게도 마커스의 집을 방문했을 때 마커스의 엄마가 자살 시도를 한 현장과 맞닥뜨린다. 그 후로 마커스는 학교가 끝날 때마다 윌의 집을 방문해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 하고, 윌은 학교에서는 왕따에 시달리고 집에서는 자신의 속내를 알아주지 않는 엄마로부터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마커스를 내치지 못한 채 점점 함께 하는 시간 속에 익숙해진다. 윌은 마커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최신 나이키 신발을 사주고, 랩 음악을 들려주는 등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새로 만난 연인, 레이첼(레이첼 웨이즈 분)과 이별하고 상처를 입은 윌은 다른 사람의 인생에 도움이 되어주고, 상대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주는 과정에 대해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윌은 결국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엄마를 도와달라는 마커스의 부탁을 냉정하게 거절하고, 다시 예전처럼 고독하지만 안정된 섬으로의 생활로 돌아가려 하지만 진심으로 행복했던 순간은 마커스와 함께 보냈던 시간임을 깨닫고 마커스와 그 동안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간다. 

내가 이 영화에서 눈여겨 보았던 것은, 휴 그랜트의 여전히 미워할 수 없는 느끼함이나 '미이라'에서부터 '콘스탄트 가드너'까지 어느 영화에서건 빛을 발하는 레이첼 웨이즈의 스마트함, 마커스로 출연하는 아역배우, 니콜라스 호울트의 발칙함보다도, 영화의 흐름 내내 전혀 이상하거나 어색하게 보이지 않는 다양한 삶의 방식, 가족의 형태였다. 결국 이 영화가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적당히 이기적인 삶을 즐기는 솔로들을 질타하고 가족이란 연대에 동참하는 삶을 부추긴다 하더라도, 영화에서 지향하는 가족의 형태가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 마치 그 이상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 곧 노멀함의 범주를 비껴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라보는 폭력적인 시선을 끊임없이 지양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커스의 엄마는 크리스마스에 헤어진 남편과 남편의 애인, 애인의 어머니까지 초대해서 파티를 열고, 마커스는 친구인 윌을 초대해서 이 모든 사람들이 따듯하고 즐거운 식사를 즐긴다. 레이첼은 마커스를 윌의 아들로 오해했고 윌은 나중에 마커스는 자신이 낳은 아이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은 윌의 아빠라고 말한다. 그 애매모호하고 똑 떨어지지 않는 설명에 대해 레이첼은 결국 한 쪽의 오해와 한 쪽의 거짓말이었다,는 그 이상의 해석을 하지 못하고 윌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학교에서 락 축제가 열리던 날, 조롱과 망신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엄마를 위해 준비한 곡, Killing me softly를 부르는 마커스를 위해 기타를 치며 함께 노래를 불러주는 윌을 보고 활짝 웃음을 보인다.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사랑은 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피가 아니라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야말로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는 곧 그 사회의 반영이라는 말이 있다. 유전자 감식, 친자 확인에 열을 올리며 위기감을 조성시키곤 하는 우리나라 드라마들을 보면 우리 사회의 시선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가족의 범위에 대해 닫혀 있고 보수적인지 실감하곤 한다. 마커스를 낳지도 않았고 마커스의 엄마와 연인 사이도 아니지만 자신이 마커스의 아빠라고 말하는 윌의 입장은 옳다. 언제나 쿨한 인생을 지향하며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 윌이었지만, 친아들이 아니어도 기꺼이 아빠가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선택이야말로 진정으로 쿨한 인생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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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8-07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캐릭터를 보면 얄밉긴 하지만, 미워할수만은 없는 모습이더라구요..
개인적으로는 네번의 결혼식.한번의 장례식이 제일 좋았습니다..^^

깐따삐야 2006-08-07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저는 휴 그랜트가 노년이 되면 과연 어떤 연기를 할 수 있을까, 궁금해지곤 합니다. ^^

Mephistopheles 2006-08-07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숀코너리 와는 다른 모습이겠죠..^^

비로그인 2006-08-07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휴 그랜트의 캐릭터가 얄밉지도 않고 사랑스럽고 부럽기만 했으니 이를 어쩝니까..

깐따삐야 2006-08-07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ude님, 남자 입장에선 모르겠지만 대개의 여자들은 어쩐지 휴 그랜트와 그의 케릭터를 미워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영화는 결국 연대의 중요성을 설득하고 있었지만, 저 또한 Jude님처럼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은 채로 자유를 구가하는 윌의 생활방식이 부러웠답니다. 그의 거짓됨은 싫었지만 그의 고독은 좋았어요. ^^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 분)

햇볕 따듯했지만 바람은 찼던 어제. 소심한 청년과 함께 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그 청년을 닮아 있었다. 스토리는 매우 단순하지만 세심했으며 등장인물은 제각기 귀엽고 매력적이었다. 크고 검은 눈동자 속에 지성과 장난기를 함께 머금은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 분)는 아름답고 싱그러웠으며, 오만한 남자의 진실, 무뚝뚝한 남자의 로망이 뭔지를 보여주겠다는 듯 영화 시작부터 엔딩까지 진지한 모습을 잃지 않았던 다아시(매튜 맥파든 분)는 의젓하고도 어쩐지 귀여웠다. 미스터 다아시처럼 악의가 없는 채로 겉과 속이 영 딴판인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딘지 수줍고 귀여운 데가 있다. 멋진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영화 속 다아시의 표정과 마주친다면 쿡, 하고 웃음이 터질 것만 같다.

부유하고 명망 있는 집안으로 다섯 딸들을 시집 보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삶고 있는 수선스런 어머니와 딸을 조용하고 너그럽게 사랑하는 아버지. 그리고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닌 자매들과 함께 북적거리며 살고 있는 엘리자베스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믿고 늘 당당하게 자존심을 지키며 사는 낭만적이고도 총명한 아가씨다. 아무런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하고 지루한 시골 마을에 어느 날 '빙리'라는 신사와 그의 친구 '다아시'가 여름 동안 저택에 머물게 되고 댄스파티에서 마주친 빙리와 엘리자베스의 언니는 첫눈에 호감을 갖게 된다. 반면에 다아시로부터 함께 춤을 추자는 제안을 거절당한 엘리자베스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되고 그에게 이끌리면서도 그를 멀리하려고 한다.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질 듯 좁혀지지 않고 빙리와 언니를 헤어지게 만든 장본인이 다아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다아시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반감은 더욱 커지기만 한다. 두 집안의 수준 차이 때문에 결혼을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고 솔직히 말하는 다아시를 엘리자베스는 오만에 찬 속물로 여기고 거부하지만, 이후 동생의 결혼을 도와주고 빙리와 언니를 다시 맺어주려고 노력하는 다아시의 모습을 보면서 엘리자베스는 스스로가 다아시에 대해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깨닫게 되고 조금씩 그의 진실을 향해 마음을 연다. 이렇듯 몇 차례의 우여곡절을 거쳐서 결국 극성스런 어머니의 바람대로 빙리는 언니와,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와 맺어지게 된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 나왔던 '마크 다아시' 또한 '다아시'였는데 그 다아시 또한 처음에는 브리짓에게 무관심했고 퉁명스러웠다. 마치 처음 보는 여자에게는 무심한 듯 불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진실한 남자의 징표이기라도 한 것처럼. 물론 그들이 지닌 태생적, 본래적 고지식함은 고귀한 것이다. 요즘 세상엔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부러 고지식한 척 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가. 물론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그들이 그 고지식함과 무뚝뚝함 때문에 사랑받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외연에 불과할 뿐, 내포는 역시 진실일테니깐. 게다가 브리짓처럼, 엘리자베스처럼, 처음에 대개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상처 받기 십상이다. 대학 새내기 시절. 나도 어떤 고지식한 예비역으로부터 빌어먹을(!) 상처를 받은 기억이 있다. 조별로 토론을 거친 다음 결과물을 제출해야 하는 수업이었는데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고 서로 낯설었던 조원들은 다들 본숭만숭. 결국 성질머리 급한 내가 "서로 이름부터 소개하면 좋지 않을까요?"라고 운을 띄우자 가장 연세 지긋해 뵈는 예비역 어르신이 팔짱을 풀며 하던 말, "계속 모일 것도 아닌데 꼭 이름을 알 필요가 있습니까?" 지금같았으면 어이, 노땅, 너 잘났다 뿡! 해버리면 그만인데 순진무구한(?) 새내기였던 당시의 나는 약간 민망한 분위기인 건 감지했으면서도 여전히 분위기 파악 못하고 고집을 부려대며 그래도 이름을 알아야 어쩌구... 하고 앉아있고 옆에 있던 친구 내 팔뚝을 쿡 찌르며 귓속말로 "야, 저 XX 재수 없다. 고만둬." 결국 그 날의 토론은 흐지부지 그만두게 되었고 교재와 머릿속을 오가며 대충 퍼즐 맞추듯 짜집기한 내용으로 레포트를 내고 했던 것 같다. 그 때의 기억이 오롯하게 기억이 나는 걸 보면 퉁명스런 남자의 매력까진 모르겠고 평균적인 수준보다 좀더 퉁명스런 남자가 뇌리에 확실히 각인되는 것 만큼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결혼을 향한 지점까지 서로 자존심 대결을 벌이며 갖가지 오해와 편견 속에서 아웅다웅 하는 양상은 19세기나 지금이나 그다지 달라진 점이 없어 보인다. 그렇듯 서로 다른 타인이 우연히 만나서 이리저리 부딪치고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헤어지지 않고 평생 같이 살아야 하는 결혼까지 하는 것을 보면 사랑의 에너지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결혼이라는 제도가 예나 지금이나 사회 안에서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 새삼 재확인하게 된다. 물론 현실의 삶들이 죄다 영화처럼 서로의 진실에 반해 사랑하고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해피앤딩은 아니지만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으면서도 "이건 픽션일 뿐인데."라고 냉소하지 않고 유쾌하고도 따뜻해지는 느낌을 갖게 되는 걸 보면 어떤 현실을 살고 있든, 현실이 진실이든 페인트 모션이든, 역시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삶은 다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진실에 반하고 싶고 진실에 반해 사랑하고 싶고 손톱 끝 발톱 끝까지 그 사람 앞에서 진실하고 싶은 것. 오만과 편견의 긴장과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싶은 그런 것.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기 위해서 이만치 열렬히 싸우는 무리들은 오직 인간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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