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가 된 타에코와 소녀 타에코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6년 내내 왈가닥이라는 별명을 떼지 못하며 지냈던 몹시도 터프한 말괄량이 소녀였다. 점심시간마다 각 반 남자 아이들과의 피 튀기는 싸움이 약속되어 있었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마다 나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남자 아이들의 습격을 받곤 했다. '추억은 방울방울'의 주인공 타에코가 회상하듯 그 당시 여자 아이들 눈 속에 비치는 남자 아이들은 구제불능이면서도 저질이었고 틈만 나면 여자 아이들을 괴롭히려 들고 학급 회의 시간마다 남성 우월주의 입장에 서서 말도 안되는 안건만 내어놓는 수준 이하의 동물들이었다. 불의만 보면 무한한 인내심이 용솟는 지금과는 달리 소녀시절의 나는 불의만 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의감으로 활활 불타오르는 소녀 전사였다. 한편 서로가 서로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것과는 별도로 당시의 우리들 사이에서는 수줍고도 어설픈 풋사랑의 감정이 싹트기도 했다. 화장실 벽마다 조각난 분필들로 지저분하게 쓰여져 있던 '아무개는 아무개를 좋아한다'는 식의 낙서들. 여자 아이는 울고 남자 아이들은 싸우고 하는 과정이 동반되었던 소문들. 이 영화는 그렇듯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초등학교 시절, 수줍고 행복하던 어린날의 추억담을 회상하는 따스하고도 쓸쓸한 영화이다.

도쿄에서 직장을 다니는 타에코는 여름 휴가차 시골을 방문하게 되면서 그 동안 기억 저편에서 잊고 지냈던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린다. 처음으로 파인애플이란 과일을 먹어보았던 날, 야구 소년으로부터 어설픈 사랑 고백을 받았던 날, 난생 처음 연극에 출연해서 숨겨져 있던 끼를 선보였던 날, 분수를 못해 가족들의 염려를 샀던 날... 그리고 타에코는 전학을 갈 때 자신하고만 악수를 하지 않겠다던 짝궁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가장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이 그 아이를 가장 싫어했고 그 아이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때국물이 꼬질꼬질 흐르던 짝궁은 사실 타에코를 좋아했지만 자신이 없는데다 표현할 길을 몰랐기에, 손을 잡으면 자신의 속감정을 들킬까봐 악수를 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과거의 기억과 화해한다. 이렇듯 추억을 되짚는 과정에서 타에코는 지난날의 기쁨과 상처들을 정리하고 보듬으며 더욱 성숙한 모습이 되어 도시로 돌아온다.

제목만큼이나 아주 예쁘고 산뜻한 영화였다. 특히 영화의 장면 장면을 따라가면서 기억 속에 묻혀버린 나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릴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소득이었다. 대개 그렇겠지만 추억은 고스란히 통째로 저장되는 게 아니라 매우 띄엄띄엄, 반드시 기억하려고 애썼던 부분도 아닌, 정말 생뚱맞다고 밖에 표현할 길 없는 내용들로 저장이 된다. 짝궁의 손등에 났던 하얗고 딱딱해 뵈던 사마귀, 복도 청소를 하기 위해 가져왔던 수건의 색깔, 운동화에 붙어 있던 형광색 반짝이, 선생님이 공책에 찍어주셨던 참 잘했어요 도장, 보온도시락 통으로 가격을 당하고도 헤헤거리며 좋아하던 남자 아이, 양쪽으로 머리를 잡아당기던 아이들을 패주고 난 다음 어느날부터 머리를 하나로만 묶기 시작했던 내 모습... 잡동사니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추억의 조각들이 모락모락 떠올랐다. 나처럼 친구들도 이제 어른이 되었을 것이고 다들 한몫씩 하고 사느라 피로하고도 고단할 것이다. 가장 지저분한 모습부터 어정쩡하게 잘난 척 하는 모습까지 모든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웃고 울고 했기에 그 시절은 쉽게 잊혀지지 않고 그런 내 모습을 보았던 그 시절의 친구들이 가장 소중하게 기억되고 있나보다. 가장 부끄러운 시절이지만 가장 행복했던 시절, 그 시절 친구들이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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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 웡카씨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무렵엔 내가 다리를 다쳤을 때였다. 목발을 짚은 채로 영화를 보러 갈 수 없었던 나는 시공사에서 나온 '찰리와 초콜릿 공장', '찰리와 거대한 유리 엘리베이터'를 샀고 그 책들이 너무나 재미있어 원서로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Puffin에서 나온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를 샀다. 쉽고 재치 있는 영어로 되어 있는 그 책은 흥미 면에서나 학습 면에서나 매우 추천할만 하다. 그리고 작가 로알드 달은 익히 듣던 바대로 이야기의 고수이며 귀재였다.

동화적인 상상력을 실현시키는 데는 역시 활자보다는 비쥬얼이 낫다는 것을 영화를 보며 느꼈다. 조니 뎁은 마치 미국판 노홍철 버전을 보듯 엉뚱하고 산만한 모션들로 나를 웃겨주었고 영화 사이사이에 원색의 쫄티와 쫄바지를 갖춰 입고 등장하여 흥겨운 뮤지컬을 보여주는 움파룸파 사람들도 책에서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네 명의 문제아들을 제치고 가난하지만 정직한 소년 찰리가 결국 초콜릿 공장을 물려받게 되고 고립된 채로 오직 성공만을 위해 살았던 웡카씨가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결론은 다소 진부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미덕은 권선징악류의 뻔한 결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꽃미남 배우 조니 뎁의 변신, 오감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품과 세트, 그리고 그 동안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원주민들의 화려한 뮤지컬 쇼, 그러한 엉뚱하고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그 상상력을 효과적으로 비쥬얼화 시켰던 부분에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와 이 영화를 같이 봤던 외사촌 꼬마는 영화를 보는 내내 흥분했으며 (비록 오래 산 것은 아니나) 자기 생애 최고의 영화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더랬다.

현실을 온전하고 섬세하게 그려낸 영화를 보고 싶어질 때도 있지만 가끔은 일탈이라도 하듯 '찰리와 초콜릿 공장'같은 영화가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둔해진 오감을 마구 자극시켜 줄 감각적인 비쥬얼과 나이를 먹을수록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상상력을 보충해 줄 경이로운 세계를 보고 싶어질 때가 있듯 말이다. 한편으론 꼴 보기 싫은 욕심꾸러기들이 쓰레기통으로 처박히는 것은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서 그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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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1-06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영화 참 많이 보세요. 아니면 전에 보신거를 쓰시는중??

깐따삐야 2006-01-07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보았던 영화를 상기하면서 쓰기도 하고, 보았던 영화를 요즘 다시 보고나서 쓰기도 합니다. 어째 기억력이 자꾸 나빠져서 이렇게 리뷰로라도 남겨놓지 않으면 다 잊혀질 것 같아서 말이죠. ^^

마늘빵 2006-01-07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꾸준히 많이 빨리 올리셔서 궁금했어요. ^^ 저도 기록해놓지 않으면 다 까먹습니다. 전 원래 기억력이 별로 안좋은듯.
 


혜주, 태희, 지영

"내가 너를 떠난다고 해서 너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냐." 영화 속에서 태희(배두나 분)가 봉사활동에서 만났던 뇌성마비 시인에게 건네는 말이다. 나는 이 영화를 떠올일 때마다 가장 먼저 배두나의 그 대사가 생각난다. 스무살은 어쩐지 막막하고 부담스럽다. 하지만 스무살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고 해서 그 시절을 좋아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이 영화는 그런 '스무살'에 관한 영화이다.

여상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 다섯 명의 친구들. 혜주(이요원 분), 태희(배두나 분), 지영(서지영 분), 비류+온조. 증권회사에 입사한 깍쟁이 혜주, 미술 디자인을 꿈꾸는 차분한 지영, 뇌성마비 시인을 도와주며 봉사활동을 하는 무던한 태희, 악세서리를 만들어 팔며 그들의 우정에 즐거운 감미료가 되어주는 비류+온조. 아직 완전한 어른이랄수도, 그렇다고 아이랄수도 없는 어정쩡한 나이의 경계에 서서 이렇듯 각자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다섯명의 친구들 앞에 어느 날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등장하고 그들은 이 처치 곤란의 고양이를 돌려가면서 맡게 된다. 아직 자기 스스로를 감당하기에도 벅찬 그녀들은 맡겨진 고양이를 어쩔 줄 몰라한다.

스무살은 그렇다. 갑작스레 덜컥 맡겨진 고양이 같기도 하고 속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잔뜩 웅크린 채 조심조심 집안을 기웃거리는 불안한 고양이 같기도 하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19세 미만의 모든 금칙어가 사라지며 일견 굉장한 자유가 주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빗나간 내 인생'의 주인공 발퇴르가 지적하듯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일 뿐이다. 일정한 룰과 시스템 속에서 움직이는 사회 속에서 진실로 자유롭기 위해서는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이미 출발선부터 공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사정을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공을 위해 자존심은 접어둔 채 더욱 싹싹하게 굴고 코끝을 좀 세웠으면 하고 바라는 혜주나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점점 더 폐쇄적으로 자신의 내면 속으로 파고드는 지영이나 외양의 차이일 뿐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힘겨운 스무살을 '버티고' 있는 것이다.

정말 학창 시절엔 스무살만 되면 무엇이든지 가능할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막상 스무살이 되고 보면 현실의 견고한 벽에 부딪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랬다. 현실에 부딪쳐 이리저리 나가 떨어지다가는 소박함의 미덕을 떠올리며 현재에 만족하면서 겸손하게 살길 바랬지만 기대와 꿈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고, 그 기대와 꿈을 충족시키기엔 완벽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어리고 볼품 없는 나 자신 때문에 화가 나고 속상했다.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현실을 피하거나 현실에 천착하거나 어차피 비겁해지기는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나이는 자꾸 먹어가고 삶에서 중요한 결단의 순간이 왔을 때 나는 조금씩 현실과 타협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한 때는 이런 나 자신을 비롯한 인간 전반에 대해 절망한 적도 있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세상사의 '대단치 않음'을 자연스레 인정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다들 조금씩 어리석고 다들 조금씩 불만에 차 있고 다들 조금씩 불행하다.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우스꽝스런 헤프닝 천지인 세상은 어쨌거나 잘만 돌아간다. 나만 몰랐지 원래 이런 것이었다. 

스무살 무렵엔 세상이 아주 희극적으로 보이거나 또는 아주 비극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무엇을 보든 극단에 극단을 내달리던 시기였다. 그만큼 사는 데 눈물이나 과장이 많았다는 얘기다. 삶을 묘사하거나 비유하는 데만 치중했지 실제로 살아 볼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던 그런 시기. 이제 나는 이십대 중반의 경계를 조금 벗어나 있다. 과거에 비해 훨씬 편안해졌고 나를 사로잡았던 수많은 형이상학적 의제들로부터 멀어져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봉급과 아침 밥상 위에 뽀글거리는 달래 된장찌개에 행복해하는 단순한 사람이 되어 있다. 그런 반면에 방안에만 틀어박히면 또 다시 스무살 적의 나로 돌아가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스무살로부터 벗어났다고 해서 스무살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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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1-05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수건 위에 꼼꼼하게 수놓은 자수 같은 리뷰예요. 사랑스러워요.

깐따삐야 2006-01-05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리뷰에 대한 namu님의 리뷰가 더 사랑스럽네요. 감사합니다. ^^
 


파리에서 재회한 셀린느와 제시

Before Sunrise 이후 9년이 흐른 다음 다시 파리에서 마주치는 두 사람. 약속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제시는 셀린느를 기다리며 비엔나에서 이틀간이나 머물렀지만 공교롭게도 셀린느는 할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약속 장소로 나오지 못했다. 뉴욕에서, 파리에서, 한 때 가까운 공간에 머물렀으면서도 스쳐갈 수 밖에 없었던 안타깝고 장난같은 운명에 이들은 서로 아쉬워하며, 9년 전 나누었던 대화와는 사뭇 달라진 어른들의 대화를 나눈다. 제시의 이마와 눈가에는 주름이 늘었고 셀린느 또한 싱그럽고 건강하던 예전에 비해 다소 여윈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영화 속 두 사람은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제시의 말.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뭔가 와닿는 느낌이야..." 지난날의 러브스토리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제시와 과거 점술가의 예언처럼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모색하며 일하고 있는 셀린느. 9년 전의 그들이 모호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 함께 고민했다면 지금의 그들은 산다는 일이 너무 뻔하고 분명하고 변함 없다는 것 때문에 불만에 차 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뭔가 와닿는 느낌 때문에 편안해진 그들이지만 그 편안함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셀린느는 말한다. 연애를 하면서 자신의 내면이 점점 죽어가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제시는 27살 이후로 자신의 삶은 그냥 미쳐버렸다고 말한다. 제시는 소설을 통해 셀린느를 간직하고 셀린느는 그녀가 작곡한 왈츠 속에서 제시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두 사람은 시간의 풍화작용에도 여전히 닳지 않고 반짝이는 추억과 사랑이, 그들 사이에 살아 있음을 느낀다.

Before Sunrise를 보고 나서 나는 두 사람이 재회할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감독이 후일담을 만든다면 좋은 얘기 갖고 욕심 내거나 장난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을 것 같았다. 그만큼 Before Sunrise가 담고 있는 젊은이들의 정서와 고민이 좋았고 서로 쿵닥거리다가 프로포즈나 결혼식으로 끝을 맺는 상투적인 결말이 아니라서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나의 상상 속에서 앞으로 만날 수도 있었고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고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두는 편이 훨씬 좋았다. 그런데 Before Sunset이란 영화가 개봉되었고 나는 나의 염려가 현실화 되는 것을 보았다. 후일담으로 나온 영화가 나쁘면 나빴지 더 좋아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혼자 보기 위해 아껴두었다. 개봉 당시 나는 아마 다른 사람과 액션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공감한다. 나머지 모든 생이 둘이서 공감했던 그 날 하룻밤 만도 못하다는 것을. 삶이란 것이 때론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굴러갈 때가 있다는 것을. Before Sunrise에서 제시는 셀린느를 열차에서 내리게 하기 위해 "넌 나중에 결혼을 해서 나같은 놈을 알고 지냈다는 것 때문에 위로를 받을거야. 아, 지금 내 남편같은 사람을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말야." 라고 말했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제시도, 셀린느도 꿈에서 현실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비엔나에서의 추억 때문에 오히려 그들이 밟고 서 있는 현실이 더욱 초라하고 안타깝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약속을 지켜서 연인으로 발전하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더라면? 과연 지금처럼 설레고 행복할 수 있었을지 아니면 여타의 평범한 커플들처럼 간신히 서로를 참아주며 살게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속편은 허접하다는 편견을 옹호하는 편에 속했던 나도 이 영화만큼은 꽤 좋았다. 전편에 비해 뭔가 허전하고 밍숭맹숭한 느낌이 없진 않지만 그것은 젊은 그들이 어느 새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특히 셀린느가 제시를 위해 기타를 치며 왈츠를 불러주는 장면은 정말 최고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가 불어를 발음할 때 만큼이나 아련하고 근사했다. 줄리 델피만큼 변함없이 아름답게 나이들 수만 있다면 길거리에서 첫사랑과 마주친들 무엇이 문제리요.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 없이 나라면 속편은 만들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영화든 나의 현실에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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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1-04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셋 보셨군요. 선라이즈 본거 곧 올려야겠습니다. 잘 봤습니다.

깐따삐야 2006-01-04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편을 먼저 보고 나서 전편을 보았을 경우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궁금해집니다!
 


철수와 춘희

철수가 손수 끓인 찌개를 식탁으로 가져오자 마구 이상한 소리를 내고 박수를 치며 좋아하던 춘희(심은하 분)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극중에서는 순진하고 게으르고 매력 없는 여자로 설정되어 있지만 심은하란 배우에게 어디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동화같은 화면 속에서 화장기 없는 얼굴로 가벼운 조울증 환자마냥 까불던 심은하는 참 귀여웠다. 영화를 같이 보던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어째 똑같은 짓을 하는데도 심은하는 예뻐 죽겠고 너는 안타까워 죽겠냐고. 그렇듯 그녀는 나와 닮아 있었다. 오로지 하는 짓만.

결혼 비디오 촬영기사 춘희(심은하 분)는 결혼식 장에서 종종 마주치는 보좌관 인공(안성기 분)을 짝사랑하는 스물 여섯의 여자이다. 어느 날 그녀의 방에 침입한 철수(이성재 분)는 그의 애인(송선미 분)이 아직도 이 방에 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를 찾아왔지만 이미 그녀는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얼결에 두 사람은 이상한 동거 생활에 들어가고 춘희는 애인을 잃어버린 철수를 안타까워 하지만 철수는 온통 머릿속 몽상으로밖엔 사랑할 줄 모르는 춘희를 뭘 모르고 순진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짝사랑에 관련된 줄거리로 시나리오를 쓰고 있던 춘희의 글을 어느 날 철수는 훔쳐 보게 되고 그녀가 사랑하는 방식에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그들이 사랑했던 이들의 이름을 빌려 '미술관 옆 동물원'이란 제목의 새로운 시나리오를 써 나간다. 그 속에서 철수가 그리는 다혜는 춘희를 변화시키고, 춘희가 그리는 인공은 철수를 변화시킨다. 그 과정 속에서 둘은 서로의 사랑 방식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고 서로를 향한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있음을 알게 된다.

춘희는 철수에게 말한다. "만약 네가 아직도 다혜씨를 보내 줄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자기집착이야." 철수는 춘희에게 말한다. "넌 사랑을 언제나 머릿속으로만 해. 그게 다라고 여기고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으니까 언제나 그 모양인거야." 춘희는 사랑은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되는 간절하고도 운명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철수는 사랑은 함께 체온을 나누듯 뜨겁고 구체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춘희의 사랑이 미술관이라면 철수의 사랑은 동물원인 셈. 사실 어느 하나도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다만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어느 한쪽만을 극단적으로 몰고 갈 때가 아닐까. 추상적인 감정에서 시작해서 구체적인 행위로 옮겨가든, 구체적인 행위에서부터 시작해서 추상적인 감정으로 발전하든, 사랑은 하나고 그 순서로 인해 어떤 사랑은 고결하고 어떤 사랑은 비루하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 역시 아이들처럼 유치한 다툼 속에서 서서히 싹트는 애정을 실감하게 되고 그들이 서로를 만나기 이전에 사랑과 연애에 대하여 어떤 룰을 가지고 있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된다. 새로운 사람끼리는 다시 새로운 룰을 만들어 가는 것이 옳다.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것인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인 줄은 몰랐어." 이 영화에서 건진 대사 중 단연 돋보이는 말이다. 장대같은 소나기를 기다려 보는 것도 가슴 설레는 일이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이미 사랑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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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krksmsrlf2 2006-01-03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올리 셨네요.
참 여러 일들하시네요..

마늘빵 2006-01-04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거 오늘 디비디 주문했는데. 참 좋은 영화.

깐따삐야 2006-01-04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의 리뷰도 기대할게요. 전 오늘 비포선셋 DVD를 구해서 이제 보는 일만 남았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