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에 반하는 로맨스, 천재 소년, 아름다운 음악, 해피엔딩, 그리고 로빈 윌리엄스까지(이 영화에선 안쓰러운 악한으로 등장하여 눈길을 끔), 대중의 심중을 건드릴만한 거의 모든 요소를 갖춘 영화였다. 한편으론 그렇듯 모든 것을 담으려다 보니 스토리의 비약이 심하다는 오점을 남겼다. 첼리스트와 록커라는 닮은 듯 다른 세계의 운명적인 이끌림, 십년이라는 긴 세월을 초월하는 가족애, 마치 자신의 미모를 악용하는 미인처럼, 음악의 아름다움을 잘 알고 그것을 자본화 하려는 악당, 줄리어드와 저잣거리를 아우르는 천재적인 음악성... 이러한 간극의 파고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몰입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어떤 '간절함'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 소년, 에반(프레디 하이모어 분)은 말한다. "부모님은 나를 원했을 거에요. 하지만 그들은 길을 잃었을 뿐이에요." 스치듯 지나는 저 대사가 내내 여운으로 남았다. 누구라도 우리에게 저만치 따듯한 희망을 걸어준다면, 당신은 다만 길을 잃었을 뿐이라고 다독여 준다면, 숨을 쉬는 일이 조금은 더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보면, 보이는 절망 앞에서 굴복하는 것은 쉬운 반면에 보이지 않는 희망 속에 자신을 던지는 것은 그렇듯 쉽지가 않다. 하지만 그것이 허황된 비약일지언정, 해피엔딩을 위해서라면 단 2%의 희망이라도 한번 쯤 걸어보고 싶은 것 또한 사람의 마음인지도.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음악'이다. 어쩌면 '소리'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에반에게는 그냥 지나쳐도 좋을 소리란 없고, 부모를 찾는 막막한 여정의 이정표처럼 작용하는 것 또한 소리이다. 아직 서로를 찾지 못했지만 마치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것처럼, 밴드싱어인 아버지 루이스(조나단 리스 마이어스 분)의 노래, 첼리스트인 어머니 라일라(케리 러셀 분)의 연주, 아들 에반의 지휘가 오버랩되며 하나의 선율처럼 조화되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었다. 소리는 약속처럼 서로를 부르고, 음악은 운명처럼 서로를 엮어준다. 위저드(로빈 윌리엄스 분)는 말한다. "음악은 사람들을 이어주는 하모니란다." 그는 악당임에도 불구하고 Wizard of OZ처럼 에반을 부모에게로 돌려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셈. 역시 헐리우드의 영원한 삼촌, 로빈 윌리엄스는 칼을 휘두르고, 고함을 질러대고, 수십 개의 피어싱을 하더라도, 어린이를 위한 휴머니스트란 사실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아, 에반의 아버지로 나오는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가 넘흐넘흐 멋지더라는.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문득 젊은 날의 이완 맥그리거를 떠올리며 잠시 흐뭇했다. 음악영화에 관심이 있으시거나 '찰리와 쵸콜릿 공장'의 찰리를 다시 보고 싶어하는 어린이들, 또는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라는 훈남의 재발견에 공감하시고 싶으신 분들은 이 영화를 선택하셔도 밑질 게 없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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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12-09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이 영화 보았어요. 노래, 하모니, 소리.... 환상의 조합이었죠. 스토리의 비약에도 불구하고 보고 있으면 행복해지는 그런 영화였어요. 몹시 아름답게 보였답니다. ^^

깐따삐야 2007-12-10 10:06   좋아요 0 | URL
아, 마노아님도 보셨군요. 여류 감독이라 그런가요. 서사의 재미보다는 감성 건드리기에 초점을 두었달까. 무엇보다 음악의 힘이 컸어요.^^

Mephistopheles 2007-12-09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음악이 주제인 영화들은 한방 먹고 들어가긴 하더라구요.^^
귀를 즐겁게 해 줄 요소는 충분히 있고 훈남이나 미소년까지 나온다면 시각적 만족감도 동반되다 보니..^^

깐따삐야 2007-12-10 10:09   좋아요 0 | URL
그렇죠? 음악영화치고 몹시 실망했던 경우는 드물었던 것 같아요.

웽스북스 2007-12-10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훈남의 재발견에 저도 휘둥글 ㅋㅋ

깐따삐야 2007-12-10 10:09   좋아요 0 | URL
근데 극중 역할이 애아버지라 좀 그렇더라는. ㅋㅋ

마늘빵 2007-12-10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옥상씬이 제일 좋았다는.

깐따삐야 2007-12-10 22:21   좋아요 0 | URL
그럴 줄 알았다는.

라로 2007-12-10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아그들 이끌고, 아기 유모차 태워서
사람들이 쑤군거리는것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봤다지요~.ㅎㅎㅎ
전 생각만큼 좋진 않았어요,,,넘 기대했나봐요~.^^;;;
하지만 제 아이들이 넘 좋아라 하더라구요~.ㅎㅎㅎ
훈남인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는 미션 임파셔블에서부터
제가 "오호~ 훈남인걸?"했다지요~ㅎㅎ(훈남 귀신)
제가 넘 늙은건지, 부모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젊어지는걸 보면서
뭔지 모를 아뭏든 그런 느낌이 들어서 그랬어요,,,ㅎㅎ암튼(아우 표현의 무능력ㅠ)

깐따삐야 2007-12-10 22:27   좋아요 0 | URL
아이들과 함께 보셨군요.^^ 저와 같이 보았던 어린이는 nabi님처럼 이 영화가 별로였나 봐요. 좀 지루해 하더라구요. 역시 훈남으로 인해 하나되는 우리.ㅋㅋ

라로 2007-12-10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옥상씬에서,,,,거리에서 기타치던 사람이 라빈윌리암스였던거 아시나용???ㅎㅎ
우연의 일치가 넘 지독하죠???ㅎㅎ

제 아이들은 넘 좋아하면서 보든디,,,^^;;;;

깐따삐야 2007-12-10 22:54   좋아요 0 | URL
그래요오오? 몰랐어요. 악당 위저드씨 알고보니 좋은 일 많이 했네요.^^ 저랑 같이 영화 본 꼬마는 곧 제 페이퍼에 등장합니다. 고고씽~

순오기 2007-12-2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보고 나름 좋았는데, 페이퍼는 안 썼다는... ㅎㅎ
저토록 간절하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희망이라도 있어야 살맛나지 않겠나 변호하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

깐따삐야 2007-12-22 00:02   좋아요 0 | URL
그쵸? 희망이 간절하면 기적도 가능한가 봐요. 그러리라는 희망이 또 있어야 절망 속에서도 꽃이 피는 거고. (법정 스님 오셨네 그냥-_-)

프레이야 2007-12-22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치포인트,에서 조나단 넘 멋있던걸요^^
기타 치는 저 아이도 훈훈하네요. 역시 영화보다 훈남에ㅎㅎ
이 영화는 아직 안 봤네요.

깐따삐야 2007-12-22 00:19   좋아요 0 | URL
오... 그 영화에도 나오는군요? 못 봤는데 꼬옥 봐야지!
dvd로 나오면 함 보세요. 가족이 함께 보는 영화로 좋을 것 같아요.
날이 추워지니 훈남을 기반으로 한 영화 선택이 주종을 이루네요.ㅋㅋ
 



  영화를 보고나서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되 리뷰를 쓰긴 어렵겠단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운 것은 내가 아니라 전도연인데 한참을 울고 난 것처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고 가슴이 먹먹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대개 그러하듯 밀양 또한 널널한 마음으로 편한히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익살맞고 넉살좋은 송강호를 보면서 쿡쿡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나는 이제 그런 케릭터들에게조차 어째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남편의 외도와 죽음, 유괴 당한 아이의 죽음... 신애(전도연 분)의 불운은 계속된다. 특별히 살아오면서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괴상망측한 성품을 가진 것도 아닌데 남들에게는 한 두 번 일어날까 말까한 불행들이 그녀에겐 연달아 들이닥친다. 픽션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라는 질문을 떨칠 수가 없었고 그녀가 어떤 면에서 성격비극에 나오는 주인공 같기도 하단 생각이 들었다. 피아노에 대한 꿈을 포기한 채 남자를 믿고 일찍 결혼한 실수, 은밀하게 숨어있으리라는 희망을 믿고 생면부지의 사람들만 모여있는 밀양으로 옮겨온 실수, 만만히 보이지 않기 위해 없는 돈을 있는 척한 실수, 얼른 들어오라는 아들의 전화를 대수롭잖게 여기고 늦게 들어온 실수, 용서와 구원에 대해 너무 쉽고도 빠르게 스스로의 능력을 믿어버린 실수... 어찌 보면 그녀는 실수투성이 여자였다. 그녀에게 부족한 건 솔직함, 그녀에게 필요한 건 기다림, 이란 생각이 들었다. 

  배신한 남편은 미워해야 마땅하고 그의 고향까지 증오하는 게 당연하다. 밀양은 종찬(송강호 분)의 말맞다나 그저 다른 데와 똑같은 사람 사는 곳이지 숨어 있는 빛, 따위는 없는 곳이다. 남편을 사고로 잃은 미망인이 낯선 땅에 들어와 돈 자랑을 하는 허영은 날 잡아잡수,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신애는 아들 준 앞에서 아빠의 배신과 죽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게 더 나았다. 아들을 살해한 유괴범이 그녀 곁을 지나칠 때 얼른 고개를 떨구며 외면해 버리는 신애의 모습은 고통을 정면으로 맞닥뜨리지 못하는 나약함을 드러낸다. 처음 만나는 옷가게 주인에게 인테리어를 바꾸면 장사가 더 잘될 거라고 충고하는 그녀는, 뭇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역시 서울 여자고 피아노 치는 여자라 고상해, 가 아니라 생긴 건 멀쩡한데 어딘가 좀 이상해, 정도로 밖에 비치지 않는다. 신애는 의미를 찾아 불행을 합리화하며 고상을 떨지만 그 고상함 덕분에 스스로는 고생에 빠지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손목을 긋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신애, 미장원에서 유괴범의 딸과 맞닥뜨리자 신경질을 부려대며 미장원을 뛰쳐나온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종찬에게 왜 나를 여기로 데려왔냐며 버럭버럭 화를 내기도 한다. 한 쪽만 껑충 올라간 머리결을 바람에 날리며 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활보하며 집에 오자 스스로 썩둑썩둑 가위질을 한다. 영화는 끝나가고 그 즈음에야 신애의 하늘색 원피스와 풀어헤친 머리칼처럼 그녀가 드디어 자유를 얻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너나 나나 그다지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세상은 가도가도 별 수 없고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는 것. 감독은 결국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쉽게 용서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위선, 하느님에게 나 좀 봐라 하는 식으로 도둑질을 하고 유부남을 유혹하는 위악, 어쩌면 남들보다 순수하고 예민한 탓에 극단에 극단을 내달리지만 신애는 내 모습이기도 했고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기도 했다.   

  마치 언저리 뉴스마냥 심심하게 신애 곁을 맴맴 도는 종찬은 이웃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평범한 케릭터이다. 아니, 오히려 평범하기에 요즘은 더 찾기 힘들어진 그런 인물. 전도연이 연기를 잘하는 것이야 설탕이 달거나 소금이 짠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것이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송강호에게 따로 큰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 물 같은 배우란 느낌. 대단히 머리 좋고 성실한. 어깨에 힘주는 장동건, 눈동자에 힘들어가는 설경구, 목소리에 힘 싣는 최민수들에게 이렇게 힘 하나 안 들이고도 강력한 포스를 발휘하는, 그야말로 secret sunshine 같은 송강호의 반짝이는 가치를 배우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언뜻 무애무덕한 평범한 케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종찬은 송강호의 연기를 통해 빛을 발했다. 매사를 웃어넘길 줄 아는, 어쩌면 자기 자신조차 웃어넘길 줄 아는 배포 있는 농담, 차가움 이면에 가려진 따듯한 빛을 본능적으로 알아보곤 어떠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진득하니 노력할 줄 아는 성실성, 묵은 머리카락, 오래된 과거를 잘라내는 여자를 위해 선뜻 거울을 비춰줄 수 있는 배려, 그러한 소박한 미덕들을 갖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종찬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인간상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반쯤 미쳐가는 신애 곁에서 그녀를 변함없이 아껴주었다. 그와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기에 종찬의 노력은 실수였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되든 아마 그는 다시 웃을 것이다.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라고 웃어넘기면서. 희망을 품고 밀양을 찾는 이들에게 사람 사는 데야 다 똑같죠 뭐, 라고 이야기 하면서. 신애는 운명에 끌려다녔고 종찬은 신애에게 끌려다니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신애는 종찬이 들어주는 거울 앞에 앉았다. 그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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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6-02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도연의 수상소감이 생각나네요..
강호오빠가 받쳐줬기에 지금의 이 자리에 있다는 내용이요..^^
송강호씨의 연기는 초록물고기보다 넘버3를 통해 먼저 알게 되었어요..
어찌보면 그의 히트작이였죠..그런데 몇편의 영화를 더보니 양파같은 기질이
다분한 배우같더라구요...껍데기를 벗겨도 계속해서 다른 껍데기가 나오는...^^

깐따삐야 2007-06-02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전도연이 연기를 잘하는 배우임에는 틀림없지만 가끔 감정 배분에 있어서 아주 미세하나마 위태위태한 면이 엿보이는데 아무래도 여자라는 성별 때문이라면 편견일까요. 아무튼 그런 부족한 점은 시야가 넓고 해석력이 좋은 송강호에게 두고두고 배워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아, 송강호. 정말 최고입니다.^^

프레이야 2007-06-02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종찬이 들어주는 거울의 의미, 인상 깊어요.
이 영화 보고 나서 벌레이야기를 읽었어요. 책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어요. 영화에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음이 강조되지만
책에선 사랑하기 위해 살아야함을 강조했어요. 정말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을 때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싯구절처럼..

깐따삐야 2007-06-03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그렇죠. 사랑을 받으려고 들면 항상 궁핍감에 시달리고, 사랑을 하려고 들면 한없이 충만해지는 마음. 그렇듯 삶이 종교가 되어야 궁극의 행복에 이르는 걸까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봄봄 2007-06-04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신 포스터 맘에 드네요..글도 좋으네요^^ 전도연의 위태위태는 그녀의 불안한 삶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구도적으로는 영화를 그녀가 이끌어가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을 것 같구요, 그 전체적인 틀을 송강호가 탄탄하게(그리고 티 안나게^^) 잘 받쳐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들이 각자 다른 곳에 끌려다녔더라고 그녀는 이제 거울을 들고 있는 이 남자 앞에서 조용히 거부하지 않으며 머리를 자릅니다. 이것이 현실이라는 듯..
저는 이 영화가 하나의 텍스트처럼 느껴졌습니다.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렇지 처럼 그냥 특별할 것 없는 것을 특별하게 만들었다는, 별 얘기 없는 것 같은데 다 똑같은 얘기같은데 삶 전체를 아우러버리는, 그래서 결코 단순하지마는 않는, 그래서 머리속이 징징거리는, 너무 많은 해석들이 나올법한 영화였습니다.

깐따삐야 2007-06-04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봄님, 아... 보기 좋게 정리를 해주셨네요. 징징거리는, 참 적확한 표현이에요. 저 포스터를 올리면서 송강호가 빠진 것에 대해서 좀 아쉬웠더랬죠.^^

생각중 2007-06-07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양...

감독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 착각이라는 화두를 던진건 아닐까..

용서한 적이 없는데 용서 받았다고 믿는 범인... 화해도 없이 용서하러 가는 피해자...

이런 웃지못할 에피소드를 감독의 높은 경지의 감수성이 그려낸 영화라고 본다.

신앙인에게는... 어쩌면... 평생토록.. 착각의 신앙속에서 죽을때까지 깨닫지 못할 중요한 실수에 대해

던진 메시지이며.. 사회에는...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이기심의 분쟁에 대해 던진 메시지라고 본다.

자극과 반응사이엔 공간이 있듯이 상처와 용서 사이엔 화해가 있어야 한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주어진 공간... 신이 인간에게만 내리신 특혜의 시간이다!

참 많은 생각을 남긴 영화다...

개인적으로는 나도 수많은 관계속에서 무슨 착각을 하는지 점검해봐야 겠다.

 

 


깐따삐야 2007-06-15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중님, 자극과 반응 사이에 주어진 공간... 신이 인간에게만 내리신 특혜의 시간이라는 말씀, 흥미롭습니다. 이렇듯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영화도 참 드문 것 같아요.^^
 


  토끼처럼 귀여운 영화를 보려던 참이었다. 휴 그랜트와 드루 베리모어라니, 이보다 더 사랑스럽기도 어려운 조합이다. 알렉스(휴 그랜트 분)는 끊임없이 엉치뼈를 흔들어대고 소피(드루 베리모어 분)는 토실토실 앙증맞은 표정으로 가슴에 녹아든다. 영화는 모자람도 넘침도 없다. 다정한 사람끼리 나란히 앉아 음악에 맞춰 고개를 까닥이고, 같은 씬에서 동시에 웃을 수 있게끔 배려한, 베스트셀러의 요목을 제대로 숙지한 로맨틱 코메디였다. 영화를 보기 전에 곱창을 먹은 것은 잘한 일이었지만 약간 시장기가 있는 상태에서 영화를 본 다음, 딸기와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창밖의 봄비를 구경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80년대, 최고 전성기를 누리던 인기 듀오 '팝'의 멤버였던 알렉스는 이제는 주부들 사이에서나 기억되고 있는 한물 간 가수다. 각종 시시한 행사에 불려다니며 힘겹게 엉치뼈를 흔들어대곤 하지만 모든 것이 예전같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최고 인기 가수인 코라 콜만이 알렉스에게 듀엣을 제의해 온다. 하지만 알렉스에겐 주어진 짧은 기간 동안 직접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는 임무가 맡겨지고 한창 고심을 하던 중, 화초에 물을 주러 왔던 소피에게서 놀라운 작사 능력을 발견한다. 알렉스의 말을 그대로 빌려오자면 노랫말을 떠올리는 소피는 그야말로 입만 열면 옥구슬. 사실 그녀는 작가 지망생이었지만 억울하게 모함을 당한 후로 꿈을 포기했었다. 알렉스와 소피는 낮밤을 함께 하며 'Way back into Love'라는 노래를 작사, 작곡하고 코라는 이 노래를 아주 마음에 들어한다. 하지만 자기 식으로 노래를 바꾸어 부르려 하는 코라를 소피는 인정하려 하지 않고, 이 과정에서 알렉스와 심하게 틀어지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예전에 김광한 씨가 진행하던 쇼비디오자키, 인가 하는 프로그램에서 Wham의 Last Christmas의 뮤직비디오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나는 아마 초등학생이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시디나 MP파일이 흔하지 않을 때라서 당시에 내가 팝송을 접할 수 있는 매체는 심야 라디오 방송과 오빠가 듣던 오래된 테입들, 그리고 쇼비디오자키 정도였는데 Wham의 저 뮤직비디오를 보고 난 후로 곧바로 팬이 되었다. 과거에 뉴키즈온더블럭이 내한 공연을 하러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녀들이 실신하여 실려가고, 한바탕 나라 안이 떠들썩했을 때도 있었지만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고 그저 웸의 노래가 나오면 야, 정도의 환호성과 함께 반가워하고 좋아했다. 그 무렵, 내가 녹음해서 선물했던 테입에는 상대의 취향이나 시기와 계절을 막론하고 언제나 웸의 래스트 크리스마스가 있었다. 영화 속 알렉스와 그룹 팝은 나로 하여금 창창하던 시절의 조지 마이클을 떠올리게 했다. 그 촌스러운 멜로디와 민망한 엉치뼈 댄스를 보며 어깨가 들썩이고 구두굽이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아, 팝의 고전이란 역시! 혼자 감탄하기까지 했다.

  주름이 짜글짜글한 휴 그랜트도 늙긴 늙었더라마는 다행히 귀엽게 늙어가는 듯 했다. 그가 숀 코네리나 마이클 더글라스 만큼 늙으면 과연 어떤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여전히 궁금하지만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화초에 물 주러 온 귀여운 할머니를 홀려서 알콩달콩 재미나게 지낼 것 같긴 하다. 할머니였든, 아줌마였든, 아가씨였든 나이를 불문하고 여자라면 그를 내치지 못한다. 여자들은 누구나 그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랑에 빠질 수밖에. 행운의 사나이, 부실한 엉치뼈마저도 사랑스러운. 드루 베리모어는 '웨딩싱어'에서 만큼 젊고 싱그럽진 않지만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로맨틱 코메디 여주인공의 전형을 보여주기에는 무리가 없다. 마르고 닳도록 빼고 또 뺀다는 요즘 헐리웃 풍조에 비하면 여전히 살짝 통통하다 싶은 체구이지만, I need inspiration~ Not just another negotiation~ 하는 그녀의 노랫말과 스키니함은 영 어울리지 않는다. 정곡을 찌르는 위트 넘치는 대사와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두 배우, 귀에 익은 듯한 아름다운 노래들이 즐거운 하모니를 이루며 사랑을 찾아가는 길(Way back into love)에 대해 이야기하는, 군더더기 없이 다정다감한 영화였다.

  알렉스와 소피는 서로를 위해 잃었던 꿈을 찾아준다. 과거의 영광에 매여있던 알렉스, 과거의 미련에 의지했던 소피. 그들은 과거로부터 벗어나 이제 함께 시작하자고 노래한다. 내가 언제나 나다워도 편안한 것, 싸우지 않고 우아하게 비껴가느니 서로 치고받고 하더라도 함께 갈 수 있음을 깨닫는 것. 사랑을 찾아가는 길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로맨틱 코메디가 사시사철 끊임없이 주입하곤 있지만 사실 별 효력은 없는, 사랑을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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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07-03-0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맞아!
예전엔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골라 테잎 선물도 굉장히 많이 했는데..
그게 어느덧 시디로 바뀌더니, 요즘엔 아예 시도도 안하고 있네요..^^;;


이번주 하루 시간내서 꼭 보러가야겠어요! 이 영화~

바람의 심술이 굉장한 오늘입니다.!
날려가지 않게 조심조심하셔요~

깐따삐야 2007-03-05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와님, 이 영화 추천합니다. 기분이 좋아지실 거에요.
 



   내가 어서 스무 살이 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대학에 가면 수학을 안 배워도 되기 때문이었다. 소심한 탓에 늘상 수학책을 붙들고는 있었지만 내게 있어 수학책이란 그저 하나의 물체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교과목에 비해 확연히 처지는 점수 때문에 늘 고민스러웠고 주변 사람들 대다수가 나의 수학 성적에 대해 함께 염려해 주기도 했다. 아예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과목에 더 몰두하는 건 어떨까,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게 말처럼 포기가 안 된다는 것이 또 문제였다. 오로지 욕심 때문이었다.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그럭저럭 잘 나와주던 다른 교과목에 더 집중해봤자 그다지 전체적인 점수 상승이 있을리 없으니, 역시나 부족한 수학에 좀더 매진해야 한다는 결론이 떨어졌다. 결국 나는 굉장히 열심히 수학 공부를 하는 것 같긴 한데, 모의고사만 보면 늘상 반타작 언저리를 웃도는 참으로 안쓰럽기 그지없는 학생이었다. 종종 수학 선생님들을 까닭도 없이 미워하고 수학 교과서 귀퉁이에 상스런 욕을 써놓았던 것은 모두 수학에 대한 원한 때문이었다. 영어가 효자였다면 수학은 발목 잡는 귀신 같았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니. 사랑할 게 그렇게도 없었더냐, 싶었지만 너무나도 따듯하고 서정적인 영화라서 보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십 년 전에 이 영화가 나왔더라면 내 인생이 조금 바뀌었을까. 수리에 약한 천성이야 쉽게 변할 리 없으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수학 교과서 귀퉁이에 끄적였던 욕 만큼은 슬쩍 지웠을지도 모르겠다. 왜 그 때 그 시절 수학 선생님들은 첫 시간마다 수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다, 라며 잘난 척만 하셨을까. 루트 선생님처럼 수학과의 엄청난 인연을 풀어놓진 못하더라도 오일러의 공식 정도만 차분차분 읊어주셨다면 3.14 원주율과 허수 i와 네피어 수, e가 無로 합일되는 아름다운 조화 속에서 수학의 신비한 매력을 발견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서툰 목수가 연장 탓하고 공부 못하는 학생이 선생 욕한다지만,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한 루트 선생님의 수업은 내 일생 가장 재미있는 수학 수업이었다.

  사고로 인해 1시간 20분의 기억력 밖에 갖지 못한 박사(테아로 아키라 분)는 그러한 특수한 상황과 독특한 성품 때문에 무려 9명의 가정부를 갈아치운 상태다. 새 가정부로 일하게 된 싱글맘, 쿄코(후카츠 에리 분)는 박사의 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아까 말했던 거잖아요, 라는 말을 금칙어로 정한다. 쿄코의 신발사이즈를 묻는 것으로부터 반복되는 일상은 우애수, 완전수 등 다양한 수의 성질을 발견하고 깨달아 가는 흥미로운 수학 수업과도 같다. 엄마 없이 저녁 시간을 보내야 하는 쿄코의 아들을 걱정한 박사는 쿄코의 아들이 방과 후에 자신의 집에 오게 하도록 하고, 아이에게 모든 수를 감싸 안아주는 '루트'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박사와 루트는 야구와 숫자를 매개로 친밀한 우정을 나누게 되지만 한때 박사가 앓아 눕는 사건을 계기로 세 사람은 헤어질 위기에 놓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교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수식처럼 맺어진 인연은 이후로도 따스하게 지속되고 루트는 수학 교사가 되어 수업 첫 시간,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소개한다.


박사가 사랑한 오일러의 공식 : 모순되는 것들이 통일이 되면 zero가 된다.

  박사에게 루트는 매일 새롭게 만나는 아이다. 박사는 납작한 루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현명한 마음이 가득 차 있을 것 같군, 이라고 말한다. 아마 날마다 이런 말을 듣고 자라는 아이는 저절로 현명해지지 않고는 못 배길런지도 모르겠다. 루트가 머리를 다친 날, 쿄코는 야구 코치에게 왜 아이를 박사님한테 맡겼냐고 화를 내고 박사의 우울한 표정을 눈치챈 루트는, 엄마가 씌워주려는 모자를 내팽개친다. 어느새 현명한 마음으로 가득 찬 아이는 엄마가 하는 말이 옳지 않음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현명한 마음이란, 의리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쿄코는 그녀가 항상 신고 다니는 하얀 운동화처럼 깨끗하고 상큼하다. 오물조물 바지런히 음식을 만들고 향긋한 냉이를 코끝에 갖다대며 활짝 웃음 짓는 그녀는 천성이 고운 여자, 의 모습을 발랄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박사처럼 수리에 능하지는 못하지만 순수한 직감 만큼은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 본능적으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채고 그것을 시의적절하게 배려할 줄 안다. 루트에게 박사님한테는 절대로 전에 말했던 거잖아요, 라는 말을 해선 안된다고 이르는 쿄코는 착하고 사려깊다. 어쩌면 그동안의 가정부들은 그거 아까 말했던 거잖아요, 라고 신경질을 부리다 스스로 좌절했는지도 모를 일. 매일 매일 현관에서 신발 사이즈를 묻고 답하며 시작되는 똑같은 일상에 대해 그녀는 한 번도 인상을 찌푸리거나 하지 않는다. 쿄코는 이상적인 여자다.

  박사에게 그냥 지나쳐도 좋을 숫자란 없다. 그는 쿄코의 신발 사이즈에서, 그녀의 생일날짜에서, 야구선수의 등번호에서, 루트의 열한번째 생일에서, 자신이 차고 있는 손목시계의 넘버에서, 갖가지 의미들을 찾아내고 새로운 의미들을 부여하기도 한다. 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이해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그는 수학과 사랑에 빠진 천재였다. 1시간 20분의 기억력밖에 갖지 못한 건 신이 그에게 내려준 소박한 축복인지도. 일상의 자잘한 내용물들을 모두 기억하고 그것들에 반응하며 살아간다면, 그가 수와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는 기쁨이 다소 줄어들었을지도 모르니까.

  특별한 소재를 다룬 특별한 영화였다. 멀어진 지금, 이제는 좋고 싫고 할 것도 없지만 수학에 대한 나의 오랜 반감을 반감시켜주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영화의 힘은 막강하다. 루트의 든든한 포용력과 소수의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에 대해 미리 좀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내내 가시질 않았다. 수학을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아이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박사의 말처럼 밤하늘의 별의 아름다움이나 들판에 피어난 꽃과 같이,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직감과 감성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한 가지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수식의 아름다움을 어찌 지나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내가 수와 친해지지 못했던 것은 천성이 아니라, 잘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기인한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도. 쿄코와 루트처럼 사심 없이 다가섰다면 나는 수학과 우애와 의리를 돈독히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블레이크의 시로 끝을 맺는다. 

  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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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07-03-02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맙소사! 영화도 있군요!!
전, 책으로 읽었어요.
마음이.. 가슴이 .. 어찌나 따뜻해지던지..
감동의 바다에 풍덩 빠져버린 느낌이였어요!!

이 책을 읽고, 버스번호도 예사롭지 않았다는...^^


깐따삐야 2007-03-02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와님, 아.. 책도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아름다운 비욘세 말고도 볼 것이 많은 영화였다. '사운드 오브 뮤직' 정도에 견줄 만한 스케일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갖출 것을 제대로 갖췄다 싶을 만큼 웰메이드 뮤지컬 영화였다. 무엇보다 두 시간 남짓의 러닝타임 동안 절절하고도 감미로운 흑인 음악을 실컷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평소에 리듬 앤 블루스나 재즈 등의 음악을 즐겨 듣는 편은 아니었지만 내 취향과는 별도로, 음악과 체육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검은 피부의 활약상은 역시나 놀라운 것이다. 대개 그냥 말할 수 있는 것도 노래로 말하면 쿡, 하고 웃음이 삐져 나올 때가 있는데 드림걸즈의 주인공들이 대사를 노래로 대신할 때, 관객들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나는 사실 영화를 보는 동안 누가 웃으면 어떡하나, 속으로 쓸데없는 걱정까지 했더랬다. 상대방이 무슨 일인가로 흥분하거나 실망해서 진지한 대사를 읊고 있는데 그 면전에다 대고 워우워우워, 한다는 건 자칫하다간 비극적인 상황도 희극적으로 보이게 만들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짓을 벌이다가 본의 아니게 망신당한 적도 있고. 하지만 드림걸즈의 출연진들은 죄다 사람이 노래인지, 노래가 사람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심신 전체가 하나의 거대하고 매력적인 소리통이 되어 가슴을 파고들고 머리를 관통했다. 감정의 오버라고 해도 좋다. 나는 그녀들의 노래를 듣던 도중에 잠깐 울 뻔 했다.

  그들만의 음반을 내기 위해 뭉친 트리오, 디나(비욘세 놀즈 분), 에피(제니퍼 허드슨 분), 로렐(에니카 노니 로즈 분)은 어느 오디션 현장에서 쇼 비즈니스계의 매니저 커티스(제이미 폭스 분)로부터 가수 제임스 얼리(에디 머피 분)의 코러스로 활동해 줄 것을 제안받는다. 처음엔 다른 가수의 코러스나 하고 있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에피의 반대로 무산될 조짐이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세 사람은 믿고 따라온다면 머잖아 음반을 내주겠다는 커티스의 약속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후 그녀들은 제임스 얼리의 공연을 따라다니며 쇼 무대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쌓게 되고, 커티스는 리드보컬 자리를 에피에서 디나로 바꿈으로서 드림걸즈의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려 한다. 음악적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에피는 크게 반발하게 되고, 연인이었던 커티스의 애정마저 디나에게로 쏠리자 팀을 탈퇴하고 만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점점 더 화려한 상품으로 변모되어 가던 디나는 매니저인 커티스와 결혼함으로서 음악을 위한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성 댄스 가수로 색깔을 굳혀가게 된다. 성공에 눈이 먼 커티스는 재기를 위해 준비했던 에피의 노래마저 가로채기하고 이에 반발한 에피와, 점점 자신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에 환멸을 느끼던 디나는 서로 화해의 계기를 맞게 된다. 조종당하는 인형이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의 색깔을 찾기로 결정한 그녀들은 드림걸즈의 마지막 공연에서 화려하게 재회한다.

  머라이어 캐리를 무척 좋아하던 아이가 전에 '글리터'란 영화 시디를 주었고, 가수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가 대개 그렇듯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정말로 몹시 실망하며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무대에서의 카리스마는 간데온데없이 영화 속의 그녀는 딱 김빠진 사이다 같았다. 김빠진 사이다는 밍밍하긴 해도 미약하게나마 단맛이라도 남으니, 그 흔한 비유조차 아까울 지경이었다. 한 가지 발견이라면, 그녀의 상대역이었던 '맥스 비슬리'라는 배우였는데 머라이어 캐리의 아둔한 연기력 때문에 멋진 남자배우 하나 애먹였다, 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가수로서의 그녀는 많은 이들이 인정하듯 한 시절을 풍미했던 휘트니 휴스턴, 타고난 음폭으로 자유자재로 노래를 부르는 셀린 디옹과 더불어 팝계의 3대 디바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가수로서 무대를 꽉 채우던 그녀는 영화 속 어느 장면에서도 나는 머라이어 캐리다, 라고 말하지 못했다. 드림걸즈에는 비욘세가 나온다길래 나는 사실 비슷한 지레짐작을 했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싶었던 건 에디 머피를 보면서 실컷 웃고 싶었고,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에 구미가 당겼고, 스토리와 메시지가 있는 영화보다는 그런 건 다소 뻔해도 좋으니 편히 앉아서 화려한 쇼와 흥겨운 노래를 감상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쉽게 가자, 였다. 대충 예고편과 홍보기사만 훑어도 감이 왔다. 드림걸즈가 지닌 상업성과 음악성, 그 점에 이끌렸다.

  변덕스런 흥 이면에 감춰진 무기력한 절망을 연기했던 에디 머피나, 온몸을 울리는 듯한 파워풀하고 개성 넘치는 가창력을 선보였던 제니퍼 허드슨,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자연과 본성 그대로의 검은 피부인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고혹적인 이집트 여인처럼 아름다운 용모를 갖춘 비욘세와, 궁리가 많은 눈빛을 한 채 영리하고 계산적인 매니저 역할을 선보인 제이미 폭스는 오히려 제조된 케릭터처럼 평범했다. 고의적인 구도이자 설정일테지만, 나는 에디 머피나 제니퍼 허드슨을 보기 위해 영화관에 온 것 같았다. 비욘세는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예쁘고, 영화의 흐름이 진행될수록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점점 더 아름다워진다. 연기도 글리터의 머라이어 캐리에 비하면 훨씬 더 진정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56%에 머물러 있다. 아마도 가장 많이 팔리는 맛. 그래도 길들여졌기에 가장 먹을만하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실제로 제니퍼 허드슨의 절창이 이어질 때조차, 예쁜 비욘세는 언제 나오나, 하고 잠깐씩 생각하기도 했다. 바비인형 같은 백인 여가수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고 말할 틈조차 주지 않고 그녀는 참 예뻤다. 대사를 노래로 전달하는 장면에서 혼자 웃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느슨한 마음으로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픈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본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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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오리 2007-02-27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변에서 영화를 본 사람들이 뭔가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귀가 솔깃하는데, 이 영화도 그런 것 같아요.
근데 왜 56%를 보니 드림카카오가 먼저 생각이 날까요? ^^

마태우스 2007-02-27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욘세의 미모에는 동의하는데요...전 이 영화가 내내 혼란스러웠어요 뭐가 선이고 악인지가 헷갈렸고, 또 주인공이 일정하지가 않아서 집중이 잘 안됐어요 다만... 음악은 좋았고, 싸우는 것도 노래로 하는 게 신선하더이다.

깐따삐야 2007-02-27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적파시오나리아님, 반갑습니다. 드림카카오 맛을 연상하며 쓴 것 맞아요. ^^

마태우스님, 아무래도 유명 가수를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들은 대개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노래 나올 때만 좋다는 거. ㅋㅋ

Mephistopheles 2007-02-27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철수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에서 이 영화의 실존그룹 "슈프림스"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하더군요..결국 리더자리를 빼았긴 후 그룹 해체 후 에피는 페렴으로 새상을 떠났다고 하더군요. 프로듀서와 메니저 격인 커티스는 상당히 잔인한 면모를 지닌 냉정한 사람이였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세계적인 뮤지션으로써의 인정을 받진 못하지만 슈프림스도 비틀즈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넘버 원 싱글 힛트는 비틀즈보다 많다고 하네요..^^

레와 2007-02-27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보고싶은 영화가 속속 개봉하고 있다는 반가운 뉴스가 또 하나!

행복한 날들입니다.^^*

깐따삐야 2007-02-27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흑인 뮤지션에 대한 천대라든가, 쇼비즈니스계의 어두운 면을 엿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했어요. 역시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냉정했겠죠.

레와님, 레와님은 참 밝은 성품이신 것 같아요. 즐거운 봄 맞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