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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오 마이 캡틴


키팅선생님(로빈 윌리암스 분)


토드 앤더슨(에단 호크 분)

중학생이었을 무렵에 이 영화를 tv로 처음 봤다. 꿈 많던 소녀 시절(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참...)한 마디로 필 받고 감동 먹어서 학교 도서관에서 소설로도 보고 키팅 선생님이 떠난 그 이후의 이야기까지 빌려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Carpe Diem. - 오늘을 즐겨라. 키팅 선생님이 남겼던 이 말이 하도 근사해서 방학 때 친구에게 편지나 엽서를 보낼 때 끄트머리에는 항상 저 말을 적어넣는 간지러운 짓도 많이 했다. 당시에 공공연히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님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 고 말하고 다녔으니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새삼 다가온다. 대략 십 년이 흐른 지금 몇 차례 꿈이 바뀌는 우여곡절을 거친 후 나는 결국 키팅 선생님처럼 선생님이 되었으나 키팅 선생님같은 선생님이 되지는 못했다. 기회가 되어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다면 왠지 부끄러워질 것 같다.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고등학교인 웰튼 아카데미에 영어 교사 키팅 선생님(로빈 윌리암스 분)이 부임해 오면서 영화는 전개된다. 키팅은 기존의 고답적인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학생들을 지도한다.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기 위해 학생들을 하나씩 책상 위로 올라가게 하기도 하고 교과서의 불필요한 페이지를 가리키며 직접 손으로 찢어내라고 말한다. 그는 휘트먼의 싯구를 인용하며 학생들에게 자유의 가치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상상력에 대하여 가르친다. 보수적인 학풍에 갑갑해 있던 학생들은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리 참다운 인생의 가치를 역설하는 그에게서 존경과 매력을 느낀다. 이후 키팅을 따르던 몇몇의 아이들은 그로부터 전해 들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모임을 조직하고 학교 밖으로 빠져나와 동굴 속에서 모임을 가지며 그 동안 억압되어 있었던 자유를 발산하는 기쁨을 누린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들 멤버 중의 하나였던 닐이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연극의 주연을 맡으면서 아버지로부터 전학을 가라는 명을 받게 되고, 닐은 배우가 되리라는 자신의 꿈을 이해받지 못함에 괴로워 하다가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 만다. 결국 이 사건으로 모임은 해체되며 키팅은 책임을 안고 학교를 떠나게 된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세 번 째 사진, 수줍은 소년 토드 앤더슨(에단 호크 분)이 짐을 챙겨 나가는 키팅 선생님을 향해 Captain, oh my Captain을 외치며 책상 위로 올라가는 장면이다. 반전이라면 반전일 수도 있는 것이 토드는 늘상 다른 학생들의 의견에 묻어가는 식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생활을 해 온 상당히 수줍고 소극적인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듯 눈에 띄지 않는 자신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여 주고 자신감을 키워 준 키팅을 향한 마지막 헌사로 교장 선생님과 다른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용감하게 책상 위로 올라가서 오, 나의 선장을 부른다. 그러자 키팅을 사랑했던 몇몇 학생들이 함께 책상 위로 올라선다. 교장 선생님이 당황하여 Sit down을 외치며 흥분하는 모습은 장면을 더욱 감동적이고 감칠맛 나게 하는 조미료의 역할을 해낸다. 학교란 왜 늘 이런 우스꽝스런 풍경을 자아내는 것일까.

과거의 웰튼 아카데미의 현실에 비해 현재에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더 각박해지고 치열해졌을 뿐이다. 여전히 키팅 선생님은 내 마음 속에 중요한 상징처럼 남아 있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그래도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가르친다. 이미 아이들부터가 사회로부터 무의식 중에 이식 받은 탁월한 현실 감각을 바탕으로 돈과 성공의 의미에 대해 꿰뚫고 있는 경우도 많다. 바야흐로 카드를 한 번 드르륵 긁으면 행복이 와르르 쏟아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요즘같은 세상에 김소월의 시집 한 권이 신형 휴대폰보다 더 나은 가치를 지니고 길거리 밴드 드러머를 꿈꾸는 사람이 성형외과 의사를 꿈꾸는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이라고 과연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세상의 기득권은 꿈이 아니라 돈을 가진 자의 것이다. 가진 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가진 자의 룰을 따르지 않으면 가난한 보헤미안으로 살 수 밖에 없다. 나는 이번에 상고로 원서를 낸 아이들에게 지금부터 자격증을 닥치는대로 몽땅 따서 나중에 조금이라도 조건 좋은 곳에 취직한 다음 돈을 잔뜩 벌라는, 그지같은 조언을 했다. 그 중엔 밥보다 춤을 더 좋아하는 녀석도 있었지만 더욱 열심히 춤을 춰서 댄서가 되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인문계고로 원서를 낸, 집안 형편이 좀 낫고 공부에 취미가 있는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죽을 힘을 다해 공부해서 침체의 늪에 빠진 지역 사회를 일으키는 장본인이 되라는, 역시나 그지같은 충고를 했다. 그걸 누가 모르나? 그렇게 사는 법을 누가 모르냐고. 나는 결국 일 년 동안 아이들에게 새로운 것이라곤 눈꼽 싸라기 만큼도 가르치지 않았고 그것은 나 자신부터가 일정 궤도에 올라 그 궤도를 이탈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뻔하니 아둥바둥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만 없다면 학교는 얼마나 평화로운 곳이 될 것이냐, 라는 당최 앞뒤가 안 맞는, 누가 들으면 큰일 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생각이나 하고 앉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요즘에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가 보다. 初心 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랄까. 몇 년이나 묵었다고 이리 빨리 노쇠했는지. 처음 아이들을 마주했을 때 지나친 열정으로 중심을 못 잡고 허둥대던 그 모습 속에서 근래에 엄습해오는 매너리즘의 해법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아이들에게 다가서는 방법을 모르고 나 자신에 대한 정립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가 교사를 배출하는 시스템의 폐해를 나를 보면 정확히 알 수 있을 정도다. 다른 건 좀 부족하더라도 외모가 빼어나서 뭇 남학생들의 환심을 사는 방법도 있겠으나 어차피 아이들의 감성을 자극하게 생겨주지 않은 데다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전락하는 건 시간 문제니 그것도 물 건너 갔다. 아무튼 재충전과 재도약이 필요한 이 시기에 나부터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고 노력해야 아이들에게도 그 에너지가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은 방학 기간 동안 교직은 心術이라고, 내 마음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겠다. 어떻게 살든 그것은 각자의 몫이지만 기왕이면 오래 갈 수 있는 가치를 심어주는 교육을 해야 할 것 같다. 뚜렷한 철학을 기저로 정말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매 시간 매 초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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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12-29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갑자기 하우스가 보고 싶어집니다. 오- 윌슨!

깐따삐야 2005-12-29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보지 않는 드라마라서. ^^ 성장한 닐의 모습을 보고 싶네요.

마늘빵 2005-12-31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캡틴 오 마이 캡틴 하면서 책상위로 일어서는 저 장면.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ㅠ_ㅠ 저도 키팅선생이 되고파요. 먼저 교과서부터 찢어야되나...?

깐따삐야 2005-12-31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쿠. 저는 아마 애들 앞에서 교과서를 찢어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거에요. 워낙에 그렇고 그런 이미지라서.

BRINY 2006-01-02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제 서재에 글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깐따삐야님은 중학교 선생님이신가봐요. 저도 작년초까지는 중학교에 있었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저도 눈물 흘리면서 본 영환데, 얼마전 이 소설을 읽는 학생을 발견하고 찡했어요.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 책이 아이들에겐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현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모든 학생들이 책상 위에 올라간 게 아니라, 여전히 신경 안 쓰는 척, 나랑 관계 없는 척하면서 의자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는 학생들도 있던게 더 인상적이었어요.

깐따삐야 2006-01-02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 저도 예전에 이 영화를 울면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도 울면서 볼 것 같아요. 영화 속 키팅 선생님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울 것 같거든요. 후우-
 


아이다호 中 - 리버피닉스

 

예전에 리버피닉스란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새 이름인 줄 알았다. phoenix가 원래 이집트에 사는 불사조라는 뜻이 있으니 river phoenix. 얼마나 근사한 이름인가. 나중에 요절한 젊은 배우라는 사실을 알고 호기심이 일어 이미지를 찾아 보았는데 과연 완벽한 젊은이였다. 마치 이완 맥그리거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키아누 리브스를 교묘하게 섞어 놓은듯한.

정부를 살해한 어머니 때문에 고아가 된 마이크(리버 피닉스 분)는 남색을 즐기는 남자들을 상대로 몸을 파는 젊은이다. 그에게는 흔하지 않은 병이 있는데 긴장을 하게 되면 갑자기 잠으로 빠져 드는 수면 장애가 있다. 한편 거부인 아버지를 향한 반발로 거리를 떠돌게 된 스코트(키아누 리브스 분)는 이러한 마이크가 어머니를 찾는 것을 돕게 되고 두 사람은 우정을 넘어서 동성애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스코트는 로마에서 한 소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오토파이를 팔고 남은 돈을 쥐어주며 마이크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포틀랜드의 사창가로 돌아온 마이크는 지난날 두 사람이 의지했던 밥과 함께 지내게 되는데 어느 날 밥은 아버지가 죽고 재산을 물려받아 신사가 된 스코트에게 인사를 건넸다가 초라하게 외면 당한다. 이 충격으로 밥은 세상을 떠나고 스코트 아버지의 장례식이 치뤄지는 반대편에서 밥의 초라한 장례식이 함께 치뤄진다. 마이크와 스코트는 서로를 바라보지만 두 사람은 이미 다른 길에 서 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이크는 길 위에서 다시 잠이 들고 짐과 구두를 빼앗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이크가 불쌍해서 죽는 줄 알았다. 아, 나는 고작해야 이렇게 밖에 감상평을 못하겠다. 어머니도 없고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새파란 젊은이가 먹고 살 줄 아는 방법은 몸을 파는 것. 몸을 팔던 젊은이가 태어나서 처음 어머니 다음으로 애착을 느낀 상대는 제 또래의 젊은 남자. 그 남자에게 구걸하다시피 말을 건넨다. 난 돈을 받지 않고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어. 난 너를 사랑해. 돈은 안 내도 돼. 그러나 그 남자는 제 또래의 젊은 여자에게 떠나고 마이크는 다시 혼자 남겨진다. 어머니도 못 찾은 채로. 그리고는 밥을 먹기 위해서 다시 몸을 판다. 아, 이 조각처럼 아름답고 병든 사슴처럼 슬픈 남자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나는 지적이지 않은 채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는 남자의 아름다움에 대해 잘 안다. 그들 스스로 인식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러한 남자를 사랑해 본 경험이 있고 시시때때로 내 안에서 모락모락 뿜어져 나오는 모성애를 느꼈다. 매우 위험한 남자였다. 그러나 영원히 크지 않은 채로 방황하는, 신발도 벗겨가고 짐도 빼앗아 갈지 모르는 적막한 길 위에서 혼자 웅크리고 잠들어 버리는, 그 대책 없음은 여자를 어머니로 키우고 모성애의 힘은 사랑보다 강하고 질긴 것이다.

이 영화는 리버 피닉스를 위한 영화다. 길 위에서 어머니를 찾아 방황하는 마이크의 모습은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 모두의 자화상일 수 있다. 밥은 죽어가면서 God를 외치고 마이크는 기면증으로 쓰러질 때마다 어머니를 본다. 스코트는 아버지를 싫어했지만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회의 출발선에 선다. 우리는 의지할 대상을 그리워하며 인생에 던져지고 빈 손으로 길 위에 선다. 

 

"나는 길의 감식가. 난 평생 길들을 맛보며 살아갈 것이다.

이 길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고 틀림없이 이 길로 온 세상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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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 대문 中 - 진아와 혜미 >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과정을 유심히 봤다. 역시 추측했던 대로 김기덕 감독의 작품이었다. 지금까지 김기덕 작품의 영화는 <나쁜 남자>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전부인데 케이블 tv에서 하는 이 영화를 보고 김기덕을 떠올렸다. 김기덕 감독 작품같은데, 김기덕 감독 작품 아닐까.

파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혜미네 집이다. 혜미네 집은 새장여인숙이라는 여관을 운영한다. 방 하나에 아가씨를 들이고 그 아가씨가 밤에 묵어가는 손님들로부터 벌어들이는 화대가 혜미네 식구의 밥벌이가 되어 왔다. 여대생인 혜미는 이 사실을 한없이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그녀는 새로 들어온 아가씨인 진아를 자기와는 전혀 다른 부류, 전혀 다른 계급 정도로 무시하고 진아가 있다는 이유로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오는 것을 거부한다.

진아는 금붕어와 곰인형을 좋아하고 그림에 재능도 있지만 매일 밤 자신의 몸을 내주어 돈을 번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저만치 떨어져 있다. 그녀에게도 꽃봉아리같은 여고 시절이 있었을 것이고 화가를 꿈꾸던 소녀 시절이 있었을 테지만 지금의 진아는 비 오는 날 우산을 내주어도 욕을 들을만큼 무시와 냉대 속에서 살고 있다.

이렇듯 다른 두 여자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영화 속에서 혜미(이혜은 분)가 늘 짧은 머리에 바지를 입고 진아(이지은 분)는 늘 긴 생머리에 치마나 원피스를 입고 있는 것처럼 이들은 서로 완벽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혜미가 혼전 순결을 이유로 남자친구와의 섹스를 끈질기게 거부해 왔다는 점에서,  진아가 밥벌이의 수단이거나 혹은 사람끼리의 외로움을 달래는 위안의 방식으로 섹스를 지속해오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들의 차이점은 확연히 드러난다.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숨기면서까지 섹스를 신성시하는 혜미와 달리 진아에게 그것은 아침에 양치질을 하는 것처럼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두 여자가 계속 갈등하다 화해의 길목에 들어서는 지점은 진아의 방을 둘러 본 후 혜미가 진아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더럽고 불순한 여자라고 생각한 진아의 방은 의외로 매우 소박하고 깨끗했으며 밥을 먹으면서 우연히 찍인 혜미와의 사진 한 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늘 들고 다니던 스케치북에는 혜미네 집 식구들의 모습이 섬세하고 따듯한 터치로 그려져 있었다. 이후 혜미는 진아의 뒤를 밟으며 그녀가 낮 동안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훔쳐본다. 미술학원에 다니고 북적거리는 골목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동전 노래방에 가서 혼자 노래를 부르고 노점상에 놓인 머리핀을 구경하는 진아는 지극히 평범한 이십대 아가씨의 모습이다.

진아를 향해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는 혜미. 결국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性이라는 이질감은 점점 화해의 모드로 바뀌고 급기야는 진아가 아플 때 혜미가 대신 손님 방에 들면서, 혜미는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편견과 두려움 속에서 벗어나게 되고 이들은 푸른 새장 속에서 웃으며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

영화 속에서 혜미의 아버지(장항선 분)가 혜미의 신고로 진아와 구치소에 들어갔을 때 했던 말이 있다. "너만 벗고 사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 다 벗고 산다."는 말. 몸을 파는 것은 죄가 되고 양심을 파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 사회를 조롱한 말은 아닐까. 진아는 착하고 동정심이 넘치고 그림을 잘 그리는 모든 점이 아름다운 여자이지만 몸을 판다는 점에서 손가락질을 받는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진아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건 그녀의 몸 뿐이고 그녀는 자신의 몸을 이용해서 먹고 산다는 면에서 정직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엔 하루에도 몇 번 씩 거짓말을 해서 남을 속이고 다른 사람의 것을 뺏어서 부자가 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것은 하나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도 남의 것을 교묘하게 훔쳐오는 법을 알고 있다. 그들은 간혹 돈을 주고 진아와 같은 여자들을 사기도 하고 하룻밤에도 몇 번 씩 다른 여자를 상상하며 아내와 섹스를 하지만 이튿날 새하얀 비즈니스 셔츠와 고급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에겐 돌을 던지지 않고 굽실거리며 인사를 건넨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옷을 벗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벗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으며 때론 존경까지 받는다.

창녀와 여대생, 다소 작위적이고 극단적인 구도일수도 있지만 감독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라는 선에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모두 챙겨본 것은 아니었고, <나쁜 남자>를 보면서 심히 마음이 거북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만지면 추한 것도 아름다운 것이 된다는 점에서 시선의 새로움과 재능의 탁월함을 느끼게 한다. 앞으로 어떤 소재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사회 안에 격리된 미추의 룰을 깨뜨릴 것인지 기대되는 작가이며 감독이다.

아, 그리고 그가 배우를 보는 눈 또한 빼어나다고 하겠다. 순진과 퇴폐, 아름다움과 슬픔을 두루 갖춘 "순수한" 얼굴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는 것 같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나쁜 남자>의 서원이나 <파란 대문>의 이지은이 그림같은 표정과 독특한 아우라가 있긴 하지만 대사 전달력 면에서는 다소 부족한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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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12-2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보고 싶었는데 아직 못봤어요. 보통 많은 여자들이 김기덕 감독의 작품에 치를 떠는데, 그건 '외견상' 그렇게 보이는거죠. 흠. 볼 때 가끔 불쾌한 기분이 들때도 있지만 감독의 의도를 일부러 변형시키는건 옳지 않다고 봐요. 님 영화감상 잘 보고 가요. 정말 잘 쓰셨어요.

깐따삐야 2005-12-27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쾌한 것 뿐만 아니라 불쾌한 것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감독인 것 같아요. 그 불쾌함도 다만 익숙하지 않은 데서 오는 충격 같은 것일테구요. 기회 되면 이 영화 꼭 보시기 바래요. 케이블 tv에서 종종 우려먹곤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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