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도 알겠고 젊은 배우들도 열연을 펼친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돌아서는 순간 자극적인 장면, 또 장면만이 남을 뿐. 여운이 없다. 주진모의 눈빛 연기는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앞선 영화들, <미녀는 괴로워>, <사랑>에서 이미 선보였던 것이었다. 조인성은 삼각관계의 중심에서 미묘한 감정의 결을 표현해야 하는 까다로운 역할을 맡았다. 나름 열의를 다하고 있었고 어느 장면에선 찍을 때 몹시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왕의 남자> 이준기 만큼 아름답거나 개성 있지 않았다. 송지효는 몽고 여인처럼 보이기는 하나 원나라 공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당최 무겁기만 할 뿐 특징이 없다.

  그간의 작품들을 보아온 바. 유하 감독은 아마도 영화로 시를 쓰는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내면은 시인인데 외면은 잡설가라고 해야 할까. 질펀한 청승을 고급 서정으로 승화시키기에는 다소 역부족이란 느낌. 표현하려는 메시지와 영화적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반면 스타일의 세련미에서는 줄곧 마이너스다. 그것이 그의 방식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관객의 입장에선 덜 익은 고기, 덜 깎은 과일을 받아든 것처럼 미진한 기분이다.

  한때 유하의 시집을 즐겨 읽던 때가 있었다. 다소 산문적인 그의 시는 대개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정열적이었다. 유하, 이 남자는 연애나 사랑에 관한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는 게 틀림없어. 멋대로 추측하기도 했다. 폼 잡지 않는 시는 발랄했고 폼 잡은 시는 가상했다. 그저 직감으로 나와 코드가 맞는 시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메가폰을 잡고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그의 정열이 그를 가만두지 않는구나, 자유롭게 상상했다.

  그래서 <쌍화점>은 참 아쉽다. 세운상가를 배회하던 헐리웃 키드 유하는 젊은 날, 보고배운 것들을 활자를 통해 시로 담아냈고, 성공했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로 표현하는 솜씨는 재고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물론 <쌍화점>은 뭇 영화들과도 다르고 그가 만든 기존의 영화들과도 다르다. 그런데도 어딘가 관습적이고 상투적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왕의 남자>, <음란서생>, <색, 계> 등등이 중첩되는 느낌. 맨주먹이나 총이 칼로 바뀌었을 뿐. 공민왕(주진모 분)과 홍림(조인성 분)의 대결에서는 왜 뜬금없이 느와르가 떠오를까. 기왕 필요해서 쓴 베드신이라면 좀 더 섬세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유하 감독의 여전한 정열, 그것만큼은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역시 그는 절제 보다는 과잉에 능하다. 어차피 예술은 장르 불문하고 은유적으로 청승 떠는 일일 텐데 그의 은유가 다소 뻔하고 거칠다는 점만은 줄곧 아쉽다. 상투적 대사를 남발하느니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서 좀 더 침묵하는 법을 익혀도 좋을 것 같다. 이미지로서의 표현이 영화란 장르의 특징이자 매력이기도 할뿐더러 사랑은, 말하지 않는 말, 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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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1-10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보고 싶은데 다들 평이 별로라서 아직도 망설이는 중인데...보지 말까요? 과속스캔들도 안 봤지만...^^

깐따삐야 2009-01-13 00:06   좋아요 0 | URL
그런데 관객은 상당히 많았고 반응도 재밌었어요. 웅성거리다가는 다시 잠잠해지고, 다시 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는 또 잠잠해지고. 다른 분들의 리뷰도 참조하셔서 선택하시길요. 저도 악평을 한 것 같지만 유하 감독의 열정 만큼은 좋았어요.^^

Mephistopheles 2009-01-11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에 나온 배우들의 얼굴크기가 모든 것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요...^^

깐따삐야 2009-01-13 00:08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제가 보기엔 송지효-주진모-조인성 순으로 얼굴이 크기 때문에 오히려 조인성을 가장 앞에 세운 것 같아요. 그처럼 조인성은 영화 속에서도 주진모와 송지효를 배려하다가 죽었지요. 쯧쯧!

다락방 2009-01-16 08:49   좋아요 0 | URL
앗, 스폿!!
죽었구나, 조인성이! ㅎㅎ

깐따삐야 2009-01-16 16:26   좋아요 0 | URL
이런이런. 원하던 바가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근데요, 주진모도 죽어요. =333

다락방 2009-01-17 13:27   좋아요 0 | URL
악. 정말요? !!!
 

1. 지구가 멈추는 날  

 



우리 키아누 리브스는 자꾸 이러시다가는, 조만간 신흥종교의 교주님 되시겠다.

그나저나 지구가 멈추기 전까지는 사람은 안 변한다, 요게 메시지인가. 그러니깐 지구 멈추기 전에 다 같이 잘 좀 하자는 건가.  

 우리 키아누 리브스가 설마하니 메시지'만' 좋은 영화에'만' 출연하기로 한 것인지. 허공을 휘저으며 총알을 피하던 날렵함은 어디로 갔을꼬.  

구원자로서의 역할은 매트릭스의 네오까지가 딱, 좋았다는.  





 

 

2. Twilight 


 

 

천둥칠 때 뱀파이어 가족이 야구하는 장면만 재밌었다. 

그런데 뭐랄까, 다 보고 난 느낌은 다소 생뚱맞게도,

건전한 이성교제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십대용 영화랄까.  

멜로인지, 액션인지, 판타지인지, 그걸 모두 섞은 것이라기엔 너무나 미흡하고 그냥 얼굴 허연 두 주인공을 보면서, 로미오와 줄리엣 역할을 맡기면 어울리겠단 상상만 했다.   

딱 고로코롬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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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1-03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하긴 키아누 리브스는 콘스탄틴에서 조차도 살인성인을 통한 인류의 구원자로 묘사되버렸죠.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배우만큼은 용서해주세요.....

깐따삐야 2009-01-03 00:22   좋아요 0 | URL
1. 인류 구원도 좋지만 배우로서의 자기 자신부터 좀 돌아보고 구원했음 좋겠어요.
2. 제니퍼 코넬리 팬이신가보죠? 아니면 줄리엣 닮은 저 아가씨? 남자배우들이 넘 멋있어서 묻히던데요. 흥!

Mephistopheles 2009-01-03 00:36   좋아요 0 | URL
제니퍼 코넬리도 좋아하는 배우이고 크리스틴이라는 저 배우 역시 관심을 가지고 있다죠...아니 그럼 제가 저런 기생홀애비같이 생긴 남자주인공에 관심이 갈꺼라 생각하십니까?

깐따삐야 2009-01-05 11:56   좋아요 0 | URL
마님한테 이를 거에요!

라로 2009-01-03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간에 들어와야 두분을 다 만나는 군요~.ㅎㅎ
두분 반가와요~.^^
그래도 트와일라잇은 용서해주세용~.나름 틴스럽잖아용~.^^;;;

깐따삐야 2009-01-05 11:59   좋아요 0 | URL
앗, nabi님이시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반갑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한텐 그냥 그랬어요. 그나저나 뱀파이어도 한번 해볼만 하겠던데요. -_-

웽스북스 2009-01-03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전한 이성교제요? 어머, 저요 ㅋㅋㅋ

깐따삐야 2009-01-05 12:00   좋아요 0 | URL
나이 서른에 대체 이 댓글은 어떻게 응대를 해야 하는 건지 원. ㅋㅋㅋ ^^

웽스북스 2009-01-05 12:54   좋아요 0 | URL
ㅋㅋ 깐따삐야님, 나이 서른에 이정도 지혜는 갖춰놓으셨어야죠 ㅋㅋ

마늘빵 2009-01-03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구가 멈추는 날은... 저도. 100분짜리 영화가 세 시간처럼 느껴졌어요.

깐따삐야 2009-01-05 12:04   좋아요 0 | URL
그러니깐요. 끝까지 기대하면서 봤는데 고작 100분짜리 영화가 그렇게 지루하기까지 하다니. 키아누 리브스한테 전화하고 싶었어요.

2009-01-03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05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스탕 2009-01-03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트와일라잇 보면서 천둥칠때 야구경기 하는 부분에서 많이 웃었어요 ^^
글고 늘 헷갈리는게 '키아 누리브스' 냐 '키아누 리브스' 냐 라는거.. -_-;;

깐따삐야 2009-01-05 12:10   좋아요 0 | URL
투수 뱀파이어도 나름 귀엽더라구요.^^
하하핫! 무스탕님이 저를 웃겨 주십니다. 계속 이런 영화만 찍다가는 머잖아 키아 누리브스교를 창시할지도 모르죠.

다락방 2009-01-04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아아아. 깐따삐야님. 전 트와일라잇 두번 봤는데 orz

깐따삐야 2009-01-05 12:12   좋아요 0 | URL
아아아아아아. 다락방님. 빛을 받으면 다이아몬드 피부로 변하는... 샤방샤방한 꽃총각 뱀파이어 땜에 그러셨던 거죠?! 저는 그 총각이 냄새 참는 장면에서 혼자 막 크게 웃고 그랬답니다. -_-a

레와 2009-01-05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트와일라잇 세번째 볼려고 벼르고 있는 1人.

키키...^^;;

깐따삐야 2009-01-07 11:51   좋아요 0 | URL
세번!! 그 영화의 무엇이 다락방님과 레와님을...? 흠.
 

 



  코끝에 어느새 찬 맛이 스민다. 가을이 묵묵히 깊어가는 사이 나도 묵묵한 주부가 되었다. 연애할 땐 나날이 심란하기도 하더니 막상 결혼하고 보니 나날이 바빠 심란할 짬이 없다. 손에 익지 않은 살림과, 낯선 동거와, 불쑥 다가온 논문발표 등으로 나~안 분주하고도 단순한 일상을 꾸려갈 뿐이고.

 ‘사과’는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며칠 안 되어 그와 함께 본 영화다. 개봉 전부터 꼭 봐야겠다 싶어지는 영화들이 있는데 이 영화가 그랬다. 사실 이런(?) 영화는 둘이 함께 보고 싶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둘이 함께 봐도 괜찮을까? 하는 양가감정을 품게 만들곤 한다. 얼마 전 ‘멋진 하루’를 참 좋게 보았고 이 영화에 대해서도 비슷한 기대를 품었던 것 같다. 이제 결혼을 했기 때문일까. 의외로 ‘사과’가 더 좋았다. 덕분에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보고나서 여운이 찰랑거릴 때 바로 리뷰를 썼다면 좋았을 텐데. 아, 주부란 참 고단도 하다.

 오래된 연인, 현정(문소리 분)과 민석(이선균 분)은 여행 중에 민석의 일방적인 결별 선언으로 갑작스럽게 헤어진다. ‘나를 점점 잃어버리는 것 같다’는 민석의 고백은 ‘나를 점점 잃어가는 게 싫다’는 거부의 뜻 아니겠는가. 어느 정도 나를 버려야 비로소 채워지는 사랑과, 결코 버릴 수 없는 자아의 한 모서리 때문에 부딪쳐 본 적이 있는 아무개들이라면 그를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로 승천하지 못한 관념은 결별로 추락할 뿐. 모든 헤어짐이 그러하듯 현정은 많이 아파한다. 그런 그녀 주변을 맴돌던 상훈(김태우 분)은 꾸준한 구애로 현정의 마음을 얻고 그들은 별다른 장애 없이 결혼한다.

 떨어져 지내는 것을 감수하고도 목표를 이루려는 상훈과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현정. 남자는 ‘미래’를 보고 여자는 ‘지금’도 소중하다. 대개는 ‘잘해보려고’ 한 일들이 ‘몰라주는 게’ 되어버리니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현정이 더 잘 사랑해 보려고 한 말이 “너 나 미워하잖아.”라는 상훈의 대꾸로 돌아오는 것처럼. 그렇듯 영화는 남녀 간의 생각 차로 인해 이들이 겪는 해프닝과 진실의 시간차 때문에 방해 받는 소통에 대해 가감 없이 보도한다. 연애와 결혼 속에서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아무도 나쁘지는 않다. 입장 차이만이 존재할 뿐. 그 시선이 참 공평하고 담백했다.

 관객이 많지 않아 낯모르는 커플 몇 쌍이 오붓하게 봤는데 극장을 나오면서 예상 밖의 반응을 들었다. 앞서 걷던 중년 부인이 남편을 향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영화라고 원 그지 같아서.”라고 불평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주보며 다소 당황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연령대에 따라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데에 동의했다. 십대라면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고, 목하 연애 중이거나 우리처럼 갓 결혼한 커플들이라면 꽤 흥미로울 것이며, 이미 그 세월을 넘어선 커플들은 주목할 만한 사건 하나 없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간만의 데이트를 망쳤다거나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도. 결별과 결혼의 시즌, 이 영화는 처음부터 그들을 타깃으로 했는가 보다.

“난 결혼하고 나서 자기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아.”
“나는 참 사랑을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노력은 안 했던 것 같아.”
얼마나 흔해빠진 대사들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층 새로워진 눈빛의 문소리는 그 진부한 대사들로 내 마음을 툭툭 건드렸다. 그처럼 ‘사과’는 나와 당신을 포함한 아무개들의 거울 같은 영화다.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했으면. 고로, 이제 노력할 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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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08-10-29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랜만이예요! 깐따삐야 새~댁!^^
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립니다!!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놓쳐버린 영화 '멋진하루'와 '사과'. (아이고;;)
이렇게 눈에 쏙쏙 가슴에 송송 박히는 리뷰들을 만날때면 놓쳐버린 영화들에 대한 아쉬움이 백만배쯤 커져요. 어떻게든 챙겨봐야겠어요! (불끈!)

학생으로 주부로 바쁘시겠지만,
깐따삐야님의 페이퍼에 목말라있는 알라디너들을 위해 종종 흔적 남겨 주시어요.
감기 조심하시구요! ^^

깐따삐야 2008-10-31 10: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멋진 하루', '사과' 둘 다 나름 좋았어요. 그냥 조용히 혼자 봐도 좋을 것 같은 영화들이에요.

요즘은 하루가 넘 빨리 가네요. 별로 하는 일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죠. 감기 걸린 사람들 많던데 레와님도 쌀쌀한 날씨, 건강 유의하세요!

순오기 2008-10-30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잉?~~~ 연애한단 페이퍼 하나 달랑 올리고 결혼한거예요?
누구처럼 인증샷이 필요해요~ ^^ 알콩달콩 행복을 잘 만들어가세요!!
멋진 하루~~~ 대중적인 흥미를 유발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나름 괜찮았어요.
깐따님 후기를 봐선 나는 '사과'는 보지 말아야 할지도~~~~

깐따삐야 2008-10-31 10:07   좋아요 0 | URL
어머~ 결혼한단 페이퍼도 올렸는데요? ㅋㅋ
요즘은 순오기님처럼 세상의 주부들이 모두 대단해 보인답니다. 열심히 살아야죠.
'멋진 하루'는 전도연이 지하철 안에서 울던 장면이 내내 기억에 남아요. 생각날 때 한번 더 보고 싶은 영화에요.
'사과'도 보세요. 문소리의 변화가 눈길을 끌더군요.^^

봄봄 2008-10-30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앗..오래간만에 들어왔더니 바람이 지나간사이에 결혼하셨네요^^ 늦게나마 축하드려요..결혼하기 전에 봤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저도 요근래 한국영화 주루룩 봤는데 멋진하루와 사과가 좋더라구요~~

깐따삐야 2008-10-31 10:1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른다더니 저도 제가 올해 결혼할 줄은 몰랐답니다.^^
조만간 '미쓰 홍당무'도 보려구요. 영화계는 요즘 여배우 전성시대 같아요.

 

  첫눈에 반하는 운명이든, 고의적인 마주침이든 사랑의 시작은 말 그래도 시작에 불과하다. 댄(주드 로 분)은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앨리스(나탈리 포트먼 분)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사랑도 결국 선택의 문제라고 말하는 앨리스가 옳았다. 영국의 앨리스가 뉴욕의 제인으로 돌아갔을 때, 지나가는 남자들마다 눈에 띄는 미모의 그녀를 돌아본다. 제인이 댄에게 처음 그랬던 것처럼 마주 오는 한 사람을 향해 매력적인 미소로 유혹의 제스처를 보냈다면 누구라도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까?

 댄은 앨리스를 운명이라고 여겼던 것처럼 처음 만난 안나(줄리아 로버츠 분)를 향한 감정 또한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어린 연인의 삶을 빌려다 쓰고 안나가 자신을 거부하자 유치하고 저열한 복수를 하는 그는 미성숙한 남자다. 댄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연인들을 향해 자신의 잣대만을 강요한다. 진실이 먼저인가, 사랑이 먼저인가. 눈을 감아주는 것이 믿음인가, 눈을 뜨고 직시하는 것이 사랑인가. 갈팡질팡 우유부단한 그가 스스로의 행동이 연인의 입장에선 얼마나 모순이며 상처인가를 깨닫게 되었을 때 곁에 남아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반면 스트립 댄서인 앨리스는 모든 사람 앞에서 벌거벗고 춤을 추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끝까지 실명을 알려주지 않을 정도로 은밀한 구석이 있다. 앨리스의 두 얼굴을 가장 먼저 눈치 챈 사람은 래리(클라이브 오웬 분)다. 그는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론 아주 영악스러운’ 앨리스를 알아본다. 그녀는 사랑하고픈 사람을 알아보고, 무방비 상태로 그를 유혹하고, 충실하게 사랑하고,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걸 깨닫자 그를 떠난다. 생계를 위해 벌거벗고 춤을 추더라도 상대에 대한 사랑만큼은 변함없이 간직한다. 어린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랑에 있어서 앨리스는 댄보다 훨씬 성숙하다. 댄의 위선을 간파하자 냉차게 돌아서는 그녀. 사랑할만한 사람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때가 왔을 때 그 애착을 버릴 수도 있는 그녀는 멋있다.

 포토그래퍼인 안나는 사람들의 슬픈 표정에서도 아름다움을 캐취하는 직업처럼 감정으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여자다. 단순하고 노골적인 래리는 그처럼 우아하고 신비로운 그녀에게 이끌리며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피부과 의사인 그는 안나에게 계속 진실을 말하라고 종용하고 있지만, 그는 어쩌면 사람의 피부 속 진실에 대해서는 무심한 남자일지 모른다. 래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안나와 우연히 사랑에 빠진 건 댄의 고의적인 장난질 때문이었고 댄의 등장으로 결혼까지 파경을 맞지만 래리는 안나를 향한 사랑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말할 것을 요구하고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어도 안나를 계속 사랑한다. 진실을 궁금해 하면서도 막상 진실 앞에서 나약해지는 댄과는 다르다. 안나가 선택하는 사람은 결국 댄이 아니라 래리다. 

 사랑의 시작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진실이 가장 중요한가? 앨리스가 사실은 제인이었다고 해서 그녀가 댄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사랑이 가장 중요한가? 굴욕을 감수하고서라도 사랑을 지키려고 했던 안나를 차갑게 내치던 댄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지 않는가? 사랑의 시작은 ‘시작’에 불과할 뿐. 영화는 그것을 기적이고 운명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갸우뚱한 표정으로 묻고 있다. 그 다음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황홀한 순간을 지나 조금씩 변해가는 감정과, 상대방의 거짓 또는 위선, 애착과 집착의 불안한 경계와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홀로 서서 두리번거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당신과 영영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내가 믿어야 할 것은 당신이라는 존재인가, 당신과 나를 이어주고 있는 사랑인가. 클로저는 섬세한 연기를 펼치고 있는 배우들의 대화와 움직임, 그 사이의 틈을 이처럼 수많은 질문들로 메운다. 꼼꼼한 독서를 하듯 집중력을 요하는 영화다. Stranger로 만나 Closer로 이별하는 누구든, 사랑 앞에 이방인이며, 연인에게 타인일 수밖에 없다고 영화는 끊임없이 말하는 것 같다. 시작하는 연인에겐 다소 우울하겠지만 오래된 연인들에겐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품이란 느낌. 사람과 사랑의 두 얼굴을 인정하고 그것을 한 차원 승화시키는 경지에까지 오르려면 연인을 놓치고 훌쩍이는 댄처럼 더 많이 아프고, 더 오래 울고, 더 많이 후회해야 하는 건지도. 그렇다고 해서 크게 변하는 것은 별로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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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4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4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4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5 0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08-02-04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보고 되미안 롸이스 아자씨를 처음 알았지요 흐흐
영화도 참 좋았었는데 또 이 이기적인 기억력 때문에 가물가물하네요
깐따삐야님 리뷰를 보니 다시 보고 싶다
(어둠의 경로로 부비적부비적 ㅋㅋ)

깐따삐야 2008-02-05 09:47   좋아요 0 | URL
원스 ost도 그랬고 아일랜드 음악엔 신비한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이기적인 기억력.ㅋㅋ 영화가 딱히 줄거리를 기억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서 그런지도 몰라요.^^

웽스북스 2008-02-05 13:36   좋아요 0 | URL
맞아요, 게다가 이 아저씨는 본인의 음악과 어울리게 생겨서 좋아요 ^_^

- 2008-02-05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훠! 영화랑 내용은 좋은데,왜 자꾸 포스터에 눈이 갈까?
사람들 눈알이 너무 부리부리해.

깐따삐야 2008-02-05 23:38   좋아요 0 | URL
엄훠! 서양배우들이라 더 그런가?? 그나저나 영화랑 내용이 좋다뉘. 과연...?

비로그인 2008-02-06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크 니콜스 감독, 졸업은 참 서투르고 우스꽝스럽고 사랑스러웠는데. ^^*
이 영화는 뭐랄까,.. 굉장히 깔끔하고 세련된 것 같아요.

깐따삐야 2008-02-09 10:54   좋아요 0 | URL
'졸업'은 유명한 작품인데도 아직 못 봤어요. 보고 싶네요!
클로저는 언제 한 번 더 봐야 할 것 같아요. 아직도 정리 안 된 질문들이 많아요.^^

프레이야 2008-02-09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삐야님 설연휴 즐거이 보내셨지요? ^^
이 영화 저도 무지 좋아해요. 어쩜 이리 인물들의 심리관계망을 촘촘히 그려내셨어요.
님의 리뷰가 참 좋습니다. ^^

깐따삐야 2008-02-09 22:58   좋아요 0 | URL
아, 혜경님도 떡국 맛있게 드시고 연휴 잘 보내셨죠? ^^
사실은 리뷰를 쓰면서도 갸우뚱 했어요. 영화가 좋긴 좋은데 뭔가 미진하고 아리송하고 말이죠. 그래서 조만간 한 번 더 보려구요.
 



  사업에 실패한 젊은이가 고향으로 돌아와 재기의 희망과 기운을 되찾는다는 스토리만 놓고 보면 진부함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이 영화의 미덕은 단 한 번의 웅장한 클라이막스 없이도 은은한 잔향을 오래 남긴다는 것이다. 하얗다 못해 푸른빛을 발하는 눈의 고장 홋카이도, 썰매 끌기 대회에 출전할 말을 돌보며 사는 성실한 사람들, 힘겨운 모래언덕을 넘으며 이 고장 사람들의 유일한 낙이자 보람이 되어주는 경주마들... 주인공 마나부(이세야 유스케 분)의 귀향은 재생을 위한 귀소본능처럼 그의 마음과 정신을 치유한다.

 자신의 이력에 누가 될까봐 가족마저 모른 채 하고 성공가도만을 달려왔던 마나부는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각박한 도시 생활의 상처와 피로로 지쳐있지만 마구간을 운영하는 형은 동생의 실패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일부러 그를 냉정하게 대한다.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어머니는 돌아온 그를 알아보지 못한 채 양로원에서 늙어가고 있고, 바깥세상을 잘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썰매 대회의 우승을 위해 말을 기르는 일에만 헌신하고 있다. 아무런 변화도, 발전도 없는 홋카이도가 지겨워 떠났던 마나부이지만 부질없는 성공과 그 상실의 절망 후 귀향한 그는 고향의 다른 얼굴을 보게 된다.

 이 고장에서 이뤄지는 ‘반에이 경마’는 일반 경마와는 달리 단순한 속도전이라기보다는 끈질긴 지구력을 더 중시하는 경기다. 경주마들은 썰매에 무거운 짐을 싣고 달려야 하며 트랙 사이사이에는 모래 언덕이 있어서 앞서가던 말들도 숨을 고르며 잠시 멈추어야 한다. 힘에 부쳐 언덕을 넘지 못하는 말은 탈락하게 되고 머리가 먼저 들어오는 말이 아니라 꼬리와 썰매 끝이 완전히 통과해야만 우승이다. 처음에 앞서간다고 방심할 수 없으며 조금 뒤처지고 있다고 해서 실망하기엔 이르다. 지구력이 강한 말과, 그 말을 적절히 잘 조율할 수 있는 기수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 결국 끝까지 가봐야만 희비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박성 경마와는 달리, 반에이 경마는 지난한 우리네 인생과 몹시 닮아 있다.

 가족도, 고향도 버리고 독불장군처럼 앞으로만 전진해왔던 마나부는 경주마의 건강을 위해 낮밤을 가리지 않고 헌신하는 사람들과,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그 사람들의 정성에 보답하는 말과, 애정과 테크닉을 모두 갖추어야 하는 기수. 이렇듯 삼위일체로 합심하여 목표를 이뤄가는 홋카이도의 반에이 경마를 보면서 지나간 삶을 돌아보게 된다. 새로운 기운을 얻고 홋카이도를 떠나는 마나부가 그들을 향해 줄 수 있는 선물은 지붕 위의 눈덩이. 언젠가 말이 병에 걸렸을 때 친구가 지붕 위에 눈덩이를 올려놓고 절을 하던 모습을 보았던 것. 육회로 팔려나갈 퇴마로 여겨졌던 ‘운류’가 결승점을 향해 선두로 달려가는 가운데 마나부의 눈덩이는 지붕 위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슬픔조차 절제되어 있고 분노 또한 극한으로 치닫지 않는다. 영화는 한 순간도 단정적인 주장을 하지 않은 채 홋카이도의 정경을 훑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읽고, 말들의 경주를 지켜본다. 그 묵묵함 안에서 지붕 위의 눈덩이는 하늘을 향해 반짝이고 마나부는 서서히 절망으로부터 벗어난다. 말 그대로,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없다. 살벌한 경쟁사회에 내몰리다 보면 본의 아니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범실로 한순간에 신망을 잃기도 한다. 그때 필요한 사람이 바로 가족, 그리고 어머니인 것 같다. 마나부의 형은 돌아온 마나부에게 외면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가족을 찾느냐고 다그치는데 마나부는 뭘 바라고 온 게 아니라 ‘그냥 갑자기 엄마와 형이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과거의 그가 어떤 아들이고 어떤 동생이었든 간에 그 순간의 그 말만큼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한 톨의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진심일 것이다.

 변함없이 지루한 홋카이도, 정신을 놓은 채로도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 말을 위해 모든 걸 바치는 형.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도시의 논리에 상처 입은 마나부는 지루하지만 한결같고, 무지하지만 부지런한 가족과 동료들의 품에서 재기의 힘을 얻는다. 퇴마라는 운명을 거스르며 혼신을 다해 모래 언덕을 넘어가는 운류처럼 마나부 또한 새로운 결의를 다진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이 영화를 많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명절을 앞둔 요즘, 나도 어느새 사람보다 선물세트를 더 반가워하는 속물이 되어간다는 자각에 움찔하기도 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인생이 참 지겨울 만큼 길구나, 우리가 일순간의 안락에 심신을 내맡기면서도 쉬이 만족할 수 없는 것은 인생이 그렇듯 길기 때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그 뿐인가. 탄탄대로를 달리다가도 모래 언덕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고, 처음 출발선과는 달리 점점 더 지쳐가는 체력에,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트랙은 인생을 더욱 고단하게 한다.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은 그 멀미나도록 오랜 경주가 재빨리 치고 나가는 속도전이 아니라 기나긴 지구력 다툼이라는 것. 

 앞서간다고 자만하지 마라. 모래 언덕 보일라. 뒤쳐진다고 절망하지 마라. 결승점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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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8-02-01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속 인물들은 슬픔조차 절제되어 있고 분노 또한 극한으로 치닫지 않는다
-> 이 맛에 일본 영화 보는거 같아요.
그나저나 염장질 하고 싶어졌어요, 저 조만간 홋카이도로 보드 타러 갑니당 ~ 히힛.

깐따삐야 2008-02-01 12:10   좋아요 0 | URL
오호! 좋으시겠다. 저도 일본에 다시 가고 싶어요. 노천탕에 몸을 푸욱 담그고 있던 기억이 모락모락~ ^^ 씽씽~ 재밌게 놀다 오세요!

2008-02-01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1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3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3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8-02-02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태그의 의미심장함~~~~~ 동감하면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거겠죠? ^^

깐따삐야 2008-02-03 01:41   좋아요 0 | URL
태그처럼만 살면 좋겠어요. 동감하신다니 역시 순오기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