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컬렉션 dvd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게리 쿠퍼나 몽고메리 클리프트 같은 클래식 꽃미남들, 배역에 모든 몸짓과 대사들이 그대로 녹아있는 듯한 명연기, 고전 작품을 재현한 탄탄한 스토리 구성, 오래된 도시처럼 나른한 흑백 화면... 화려한 디테일을 자랑하는 요즘 영화들보다 오히려 더 인상적이고 매력적이다. 여유가 있을 때 좋은 영화를 많이 봐야겠다. 공을 들인 리뷰도 좀 써보고.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 머리가 좋기까지 한 로맨틱한 사나이, 현실에서도 과연 가능할까. 어딘가 이율배반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영리한 로맨틱 가이라니.

 고전 영화 속 로맨스는 키스로 말하지 않고 눈빛으로 말한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치열은 너무 고르고 단단해서 웃을 때마다 다소 아둔해 보였지만, 단정하고 감성적인 눈매와 촉촉한 눈빛 만큼은 최고였다. 

 말하지 않는 말은 여전히 강력한 포스를 발휘하는 것 같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랑은 구태의연한 방식이 가장 멋진 건지도.

 

 

 


 로마의 휴일. 로망의 그레고리 펙.
깜찍한 오드리 햅번과 수려한 그레고리 펙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영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정드는 건 순간이라지. 그 순간에 매몰되지 않고 미소로 간직한 채 돌아서는 두 사람.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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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1-10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사블랑카는 대단히 매력적인 영화에요..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하고요.주옥같은 명대사가 엄청 많이 나와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 "내가 여자였다면 자네하고 결혼했을 거네." 등등.. 네거티브 필림은 그만큼의 세월만큼 그만큼의 매력이 존재합니다.^^

깐따삐야 2008-01-10 20:29   좋아요 0 | URL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썩 잘 어울리는 대사에요. 전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청순한 눈매와 빛나던 눈동자 만큼은 아직도 눈앞에 선해요.
요즘은 옛날 영화들이 좋아져요. 점점.

살청님, 이상하다뇨. 전 진지하신 메피님도 좋아요. :)

다락방 2008-01-10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저 이거 볼래요, 볼래요.(캬~ 상품 넣기 하셨으면 완전 땡스투인데 말이죠.)
알라딘에 디비디 판매하나요, 이 두 영화?
예전부터 봐야지, 하고 맘만 먹었었는데 이 페이퍼 보고 완전 맘 굳혔어요.
볼래요, 볼래요!!

다락방 2008-01-10 17:51   좋아요 0 | URL
방금 주문했어요~~

(아, 행동 너무 빨라!)

깐따삐야 2008-01-10 20:30   좋아요 0 | URL
저는 '베스트 아카데미 수상작 컬렉션 (10disc)'으로 구입했어요.
좋아하는 영화들, 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이 잘 선별되어 세트로 나왔더라구요. 가격도 저렴했구요.
혹시 따로따로 주문하셨나요? 일찍 알려드릴걸.

다락방 2008-01-10 22:17   좋아요 0 | URL
아니요, 아카데미 수상작 컬렉션으로 구입했어요. :)

깐따삐야 2008-01-11 10:03   좋아요 0 | URL
그러셨구나. :)

비로그인 2008-01-10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현대 여성보다 예전의 여성들, 저 고전 미인들이 더 좋습니다.
기품 있고 우아한 천연적인 미를 느낄 수 있달까. 게다가 다들 얼굴의 개성까지.
요즘같이 '이 사람이 저 사람 같고, 저 사람이 이 사람 같고' 같은 성형 미인들이 아닌.

깐따삐야 2008-01-10 20:32   좋아요 0 | URL
엘신형님은 역시 눈이 높으시군요! 성형해도 그냥 이쁘면 돼, 이런 남자들이 훨씬 더 단순한 거라니까요. ㅋㅋ

다락방 2008-01-10 22:16   좋아요 0 | URL
앗. L-SHIN님.
그럼....


절 좋아하시겠군요!!

깐따삐야 2008-01-11 10:06   좋아요 0 | URL
일단 선글라스를 벗어보시죠. 다락방님. ㅋㅋ

다락방 2008-01-11 11:26   좋아요 0 | URL
그...그....그건..... OTL

비로그인 2008-01-11 11:41   좋아요 0 | URL
아쿵- 다락님같이 멋지고 아름다우신 분을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_>)
게다가 어찌 잊겠습니까, 우리의 상콤살벌한 죽음의 백세주를.ㅋㅋ

깐따삐야 2008-01-11 12:55   좋아요 0 | URL
어므낫. 두 분이 백세주도 같이 마셨단 말예요오?
저랑은 요구르트 한 병을 같이 안 마셨으면서 말이지요. 너무들 하신다.

다락방 2008-01-11 13:18   좋아요 0 | URL
앗, 깐따삐야님!
그 유명한 만남의 사건을 모르시는군요. 죽음의 백세주릴레이, 였던가요, L-SHIN님? 후후훗.

어딘가 뒤져보면 아프락사스님, L-SHIN님의 후기가 있을텐데 말여요. 훗 :)

깐따삐야 2008-01-11 13:27   좋아요 0 | URL
재밌었겠어요.^^
하지만 과거를 돌아보기 보다는 현재를 만들어 가야지요. 흠흠!
저랑 보리차라도 한 잔 하시죠. 다락방님.

프레이야 2008-01-10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그런 컬렉션이 있었군요.
언능 담아야겠어요.
전 잉그리드 버그만도 좋지만 오드리 햅번이 더 좋아요^^

깐따삐야 2008-01-11 10:08   좋아요 0 | URL
컬렉션도 몇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던데 로마의 휴일이 포함된 것을 찾아서 골랐지요. 저도 깜찍발랄 공주님, 오드리 햅번이 더 좋아요.^^

Mephistopheles 2008-01-10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 컬렉션에 "지상에서 영원으로"은 있지만 "젊은이의 양지"가 없군요..
몽고메리 클리프트란 배우의 매력이 물론 지상에서 영원으로 에도 잘 묘사되지만 그 우수어린눈빛만큼은 젊은이의 양지가..압권인데..아쉽네요.

깐따삐야 2008-01-11 10:10   좋아요 0 | URL
'지상에서 영원으로'에서 몽고메리 클리프트 연기를 처음 봤는데 미남이기도 하지만 아주 단단한 배우란 느낌이 들더라구요. '젊은이의 양지'도 보고 싶어요. 아마 다른 컬렉션 세트에 포함되어 있을 것 같아요.

라로 2008-01-10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편 다 제가 좋아라하는 영화에욥!!
전 옛날에 샀어서 다 비싸게 샀는디~.흑
암튼 것보다
저런 흑백영화에는 품위가 있었는데,,,,-.-*

깐따삐야 2008-01-11 10:13   좋아요 0 | URL
나비님은 왠지 로버트 테일러 같은 배우를 좋아하실 것 같아요. :)

순오기 2008-01-11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우리 학창시절엔 흑백으로 방송되는 '명화극장'을 보고 월요일마다 매니아들끼리 토론이 활발했어요. 그땐 정말, 내노라하는 명화만 하는 '명화극장'이었는데......이 영화들도 여러번 봤지요. 꿈속에도 그려지는 영화. 그레고리 펙, 너무 좋아요!

깐따삐야 2008-01-11 10:16   좋아요 0 | URL
저도 어릴적에 MBC명화극장, KBS토요명화로 봤던 영화들도 많아요. Once upon a time in America 같은 영화는 러닝타임이 무지 길어서 새벽까지 혼자 담요 쓰고 보기도 하고 그랬어요.^^
저도 그레고리 펙 완전 좋아해요. 왜 요즘은 그런 배우가 없는 걸까요. -_-
 



  애니 속 동물들은 그럴듯한 의인화로 귀여운 감탄사를 연발케 하는 동시에 인간에 대한 풍자 및 비판을 빠뜨리지 않는다. 유재석의 더빙으로 눈길을 끌었던 꿀벌대소동도 마찬가지. 거의 집집마다 한 병 정도는 놓여있을 꿀. 게다가 우리는 꿀단지 껴안은 푸우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화학조미료 하나 첨가하지 않고 순수한 단맛을 제공하는 꿀벌들에게 아무런 감사의 말도 없이, 위기 상황에서 한방의 침으로 장렬히 전사하는 벌 앞에서 벌에 쏘였다고 징징거리면서. 이런 하찮은 인간들이란! 그뿐인가. 꽃가루특공대가 꿀 채집 이후 꽃가루를 여기저기 뿌려주지 않는 한 생태계가 파괴되는 건 시간 문제다. 인간과 말할 수 있지만 단지 말을 걸지 않았을 뿐인 놀라운 꿀벌들은, 자연의 섭리에 불응한 채 고마움에 대한 불감증을 겪고 있는 인간들을 비판하며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주인공 배리로 활약한 유재석은 평소 메뚜기 이미지를 잘 활용하고 있는 덕분에 줄무늬 스웨터와 더듬이도 무척 잘 어울렸다. 그러나 딱 이렇다 할만큼 어색한 부분은 없었음에도, 꿀벌 세계의 유머는 때로 너무 지루해서 인간세계의 유재석의 입담과는 비교가 안 되더라는. 두 마디 대사에는 까르르 박장대소하고 그에 이어지는 한두 마디에는 아까 웃었던 그 입모양을 유지만 하고 있는 상태랄까. 날개만 달렸지 까칠한 성격은 그대로인 래리 킹의 모습을 꿀벌 티비에서도 보는 건 흥미로웠지만 상대적으로는 작년에 보았던 라따뚜이가 좀더 구성지고 재미있는 듯.

 모든 꿀벌들이 대학 졸업 후 아무런 불평 없이 평생 한 가지 일만 하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회의를 품은 배리. 그는 2억만년 넘게 한치의 의심도 없이 반복되어 오던 꿀벌의 삶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프로메테우스적 꿀벌이랄까.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품고 특공대를 따라 인간세계에 오게 된 배리. 그는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살려준 이상형의 플로리스트, 바네사와 친구가 되고 그녀와 합심하여 인간이 공짜로 가져간 벌꿀과 꿀 관련 용어에 대한 로얄티를 요구하는 소송을 건다. "우리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인간들은 허니~ 라는 말도 함부로 쓸 수 없었다구!" 팔짱을 끼고 당당히 외치는 배리는 배우 레이 리오타와 가수 스팅(Sting)까지 법정에 세우는 등, 무자비한 양봉으로 막대한 꿀을 얻고 있는 인간 전반을 비판한다. 마침내 소송에 승리한 꿀벌들. 그들은 인간 소유의 모든 꿀들을 수합해 꿀벌나라로 가져오고 더 이상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시간에 맞춰 다함께 돌아눕는 일 뿐.

 한편 꿀벌들이 활동을 멈추자 바네사의 꽃가게는 문을 닫아야 하고 아름다웠던 자연은 꽃 한 송이 피지 않은 채 잿빛으로 변해간다. 결국 마지막 남은 장미꽃들로 생태계 복원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배리. 이 즈음에서 영화의 명장면이 연출된다. 말하는 꿀벌에 놀라 소동을 피우다 기절하고 만 기장과 부기장을 대신해서 배리와 바네사가 비행기를 조종해야 하는 순간이 오고, 우리의 꿀벌들은 일사천리로 그들을 향해 날아가 비행기를 대신 조종한다. 노랑과 검정이 번갈이 피어나는 꿀벌들의 매스게임 덕분에 활주로를 찾은 비행기는 무사히 안착하고, 칙칙했던 인간 세상은 꽃가루특공대의 활약으로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는다는 애니다운 해피엔딩.

 감탄하고 소리 지르며 영화를 보는 어른은 나 이외엔 그다지 없는듯 했지만 아이들은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고, 영화가 주려는 교훈도 적절했다. 물론 아이들이 군데군데 양념처럼 등장하는 헐리웃 스타들을 알아보는 것 같진 않았다. 그것은 아무래도 미국의 아이들이나 어른들의 재미를 위한 장치겠지. 하지만 친근한 유재석의 더빙과 더불어 마치 어느어느 어린이집의 원복을 떠올리게 하는 노랑과 검정이라는 꿀벌 색상도 귀와 눈을 따듯하게 만족시키더라는. 봄이 조금 일찍 온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요즘 방학을 맞은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매우 즐거워할 것 같다. 어차피 원래대로 돌아갈 건데 재판은 왜 한거지? 요로코롬 매사에 시니컬한 타입의 아이만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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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1-07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때 그 영악한 조카였나? 친척 동생이었나? 암튼 그 아이랑 본 거에요?

깐따삐야 2008-01-07 00:35   좋아요 0 | URL
네.^^ 애니는 아이들 틈에 섞여서 같이 소리지르며 봐야 제맛이라는. ㅋㅋ

웽스북스 2008-01-07 00:39   좋아요 0 | URL
교회 아그들 데리고 볼 영화 고민중이었는데 이거 볼까봐요 흐흐흐
근데 다 컸다고 싫어하면 어쩌지? 흠흠
내가 애들보다 더 수준이 유아틱한가봐

깐따삐야 2008-01-07 00:46   좋아요 0 | URL
왠만큼 성격 까칠한 애 아니라면 좋아할 거여요.^^
근데 나는 지금까지 괜히 봤다 싶은 애니메이션은 하나도 없었어요.
모든 애니는 나름 다 재밌달까. ㅋㅋ

2008-01-07 05: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7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08-01-07 0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편이 너무 보고싶은 영화인데 더빙되어서 안본다지요~.ㅜ
배리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남편이 넘 좋아하는 배우라서
그의 목소리로 꼭 봐야 한데나 뭐라나,,,쩝
그래서 저흰 DVD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어요.
근데 저두 애니보면서 살짝 울다 웃다 잘한답니당~.ㅎㅎ

깐따삐야 2008-01-07 11:55   좋아요 0 | URL
남편분이 제리 세인펠드인가 하는 그 배우를 좋아하시나 보네요.
저는 유재석이 더 좋은뎅.^^
나비님도 애니를 아주 지대루 즐기실 것 같아요!


마늘빵 2008-01-07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첨 보는 애니인데...?

깐따삐야 2008-01-07 11:57   좋아요 0 | URL
요즘 한창 개봉 중인 애니인데 모르셨구나.
하긴 아프님은 애니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아요. 왠지.

네꼬 2008-01-07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보고 싶어요. (실은 유재석 더빙 때문에요.) -_-;;

"꿀벌 세계의 유머는 때로 너무 지루해서 인간세계의 유재석의 입담과는 비교가 안 되더라는."

한 줄에서, 깐따삐야님과 저의 공통분모를 (멋대로) 짐작합니다. 반가워요.
: )

깐따삐야 2008-01-07 17:01   좋아요 0 | URL
저도 반가워요!
유재석 더빙 때문에 보고싶으시단 말씀이 확 와닿네요. 그냥.^^
 


  지방에 사는 이유로 개봉관을 찾기 어려웠기에 아쉽게 스쳤던 영화였다. 주워들은 풍문만으로도 분명히 좋아할거란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그(글렌 한사드 분)'에게 말을 거는 '그녀(마르게타 이글로바 분)'의 연기가 영 어색해서 잠시 비포선라이즈의 줄리 델피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덜컹거리는 기차 안. 우유처럼 뽀얀 미소의 셀린느는 얼마나 싱그러웠던가.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묘한 분위기의 아가씨에게 점점 집중하게 되더라는. For what? 하며 되묻던 눈빛과는 달리 피아노 선율에 녹아드는 그녀의 목소리는 깊은 바다처럼 짙푸르고 아련했다. 낙천적이고 다정다감한 아일랜드 청년. 속을 잘 내비치지 않는 당찬 체코 아가씨.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우연히 조우하게 된 두 사람은 생에 단 한번, 바로 그 사람과 반짝이는 합일을 경험한다.

 밀루유 떼베(Miluiu teve). 별거 중인 남편을 사랑하느냐는 그의 질문에 그녀는 체코어로 대답한다. 밀루유 떼베. 무슨 뜻인지 말해달라고 보채지만 그녀는 끝내 그를 향해서도, 관객을 향해서도 입을 다문다. 막연히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궁금했기에 뜻을 찾아봤고 그 결과는? I love you. 살짜쿵 찬바람은 이는데 아쉽거나 슬프지는 않더라. 거기까지만. 그것으로 족하다는 느낌. 비포선라이즈의 대학생들은 언어로, 장 자끄 아노의 연인들은 몸으로, 그리고 원스의 청춘들은 음악으로 대화한다. 사랑을 말하기 전. 두 사람은 이미 사랑을 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는 말, 보이는 소리인 음악이라는 신비로운 매개를 통해.

 홍상수 감독이 그의 영화들 속에서 누누히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언어란 사람과 사람의 간극 사이에서 번번히 미끄러질 뿐.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속일 때도 많다. 알면서 속아주는 경우까지 보태자면 더더욱 부질없고. 그러나 음악 앞에선 누구나 정직해진다. 눈으로는 악보를 읽고, 손으로는 악기를 만지고, 혀로는 노래를 부르고, 귀로 그 소리를 들으며, 음악이 뿜어내는 향기를 맡는다. 이처럼 오감의 이탈을 허락하지 않는 음악은 순식간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동시에 때론 사람의 틈과 틈 사이를 느슨하게 유영하며 눈치채지 못한 사이, 우리를 고요히 매혹시킬 때도 있다. 악보를 읽지 못하는 나로선 악보란 그저 새카만 콩나물의 나열일 뿐이지만 음악피스에 그려진 음표들의 움직임을 보며 아름답다, 고 느껴본 적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소리로 화할 때 그 신비로운 매력은 배가 되었다.

 원스에서 음악과 영화는 서로의 기운을 온건하게 조화시키며 담백한 뮤지컬 한편으로 승화했다. 예상 외의 많은 관객들이 이 구태의연한 음악 영화 한편에 열광했던 건, 아마 영화라는 취미가 제공하는 수수한 담백함이 그리웠기 때문일 것이다. 거리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다, 장미꽃을 파는 처녀와 우연히 사랑에 빠진다면? 꽃 파는 오후, 어젯밤 그 기타리스트가 다가와 반갑게 말을 걸어준다면? 이러한 소박한 상상에서 출발해 사람들은 각자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음악처럼 그저 흘러가는대로. 마음이 이끄는대로. 단, 방종이 아닌 자유를 위해.

 진하고 뜨거운 에스프레소 커피 같은 일상. 누군가 끼어든다. 오늘은 요로코롬 허브차 한번 드셔보시와요. 옥수수수염차는 없나요? 텁텁한 일상의 당신, 원스를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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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1-03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보았어요. 안 그래도 아까 청소하면서 원스의 노래들을 다시 들었답니다.
깐따삐아님의 리뷰를 보면서도 '언어의 힘'을 느꼈어요. 원래도 아름다웠지만 그 영화를 더 아름답게 추억하게 만들어 주셨거든요^^

깐따삐야 2008-01-03 15:51   좋아요 0 | URL
우앙~ 원스 OST를 갖고 계신가 보죠?
저도 오늘 다시 듣고싶어서 남들 블로그 돌아다니며 찾아듣곤 했어요.
제 리뷰가 영화에 누가 되지만 않아도 다행이죠. 감사합니다.^^

치니 2008-01-03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원스>만큼 담담하고도 수려한 리뷰입니다. ^-^

깐따삐야 2008-01-03 15:5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당. 치니언니도 옥수수수염차를 좋아하시는 게 틀림없군요! 흐흐.

마늘빵 2008-01-03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원스 좋아해요. 바로 오에스티 사고, 영화두 극장서 두 번이나 보고. :)

깐따삐야 2008-01-04 01:07   좋아요 0 | URL
두 번이나 보셨다니! 정말로 좋으셨나부다.
저는 dvd로 구입했으니 텁텁한 날마다 꺼내봐야죠. :)

웽스북스 2008-01-03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의 리뷰는 정말 영화를 읽어주고 있다는 느낌~ 원스를 보시라~

깐따삐야 2008-01-04 01:10   좋아요 0 | URL
우리 웬디양님 식기 전에 드시라구 영화 보자마자 후다다다닥 써재꼈다는.^^

미미달 2008-01-04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파욥

깐따삐야 2008-01-04 01:24   좋아요 0 | URL
미미달님은 이 영화 보구나서 이럴 것 같아요. "내용도 퐝당하구 결말도 넘흐 욱껴요. 대체 왜들 이러는 거죠? ㅋㅋㅋㅋ"
농담(?)이구요. 한번 보세요. 원스지만 두 번 봐도 좋은가봐요.^^

2008-01-04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4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경애 2009-01-06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원스의 그녀를 보면서...선라이즈의 셀린을 생각했었는데..^^
 


  올해 최고의 영화로는 주저없이 '밀양'을 꼽겠지만 조금 늦게 찾아본 이 영화 또한 그에 버금갈 정도로 내 마음에 들었다. 1984년 동독이라는 배경에 처음엔 정치적 암투를 그린 시대물인가 했는데 영화는 인간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영화를 세 명의 주인공에 관한 세 가지 성찰로 읽어보았다.

#1
비즐러 (울리쉬 뮤흐 분)

 그는 극작가인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인 연극배우 크리스타를 도청, 감시하게 된 비밀경찰이다. 국가와 당의 신념에 따라서만 움직이던 냉혈인간 비즐러는 예술가 커플인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사생활을 엿듣게 되면서 지금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와 감정을 체험하게 된다. 애초의 목적과는 달리 비즐러는 국가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작품을 쓰는 드라이만과,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도 연극에의 꿈을 버리지 못한 채 방황하는 크리스타에게 인간애를 느끼게 된다. 결국 그는 거짓된 도청기록을 써가게 되고 그들을 지켜준 댓가로 본래의 직책을 잃게 된다.

 기억하기로, 이 영화에서 비즐러는 한번도 웃지 않는다. '피아니스트'의 에리카(이자벨 위뻬르 분)의 서늘했던 무표정을 상기시키는, 차디찬 대리석 같은 얼굴이다. 그에게는 가족도, 연인도 없으며 그가 나누는 대화란 취조자들을 상대로 한 심문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삶이었을 뿐, 그가 선택한 삶은 아니었다. 자유롭고 열정적인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를 보며 비즐러는 불현듯 위협을 느끼게 되고 그들이야말로 세밀한 감시가 필요한 대상임을 직감한다. 그러나 이들의 삶을 지켜보던 가운데 비즐러는 점점 다른 인간으로 변모해간다. 급기야는 자살한 친구를 애도하는 드라이만의 피아노 연주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레닌은 열정 소나타를 좋아했어. 그리고 말했지. 내가 그것을 계속 들었더라면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을 거라고." 드라이만의 말처럼 자유와 예술이 주는 감동과 희열에 한번 눈 뜬 사람은 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기 힘들다. 비즐러도 마찬가지.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는 그 순간, 비즐러의 마음의 벽도 함께 무너졌던 것이다. 그는 고수해왔던 가치를 포기함으로서 새롭게 구원을 받았다.


#2
드라이만 (세바스티안 코치 분)

 동독 정부가 주시하고 있는 극작가로서 자신의 신념과 생활의 안위, 동료와의 의리와 집필에의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재능이 탁월한 예술가이면서 정열적이고 사려깊은 연인이기도 하다. 비밀경찰의 눈을 피해 동독의 비극적 자살에 대한 에세이를 슈피겔지에 기고하는 등, 예술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실현시키고 정부의 비인간적 처사를 서방세계에 알리고 싶어한다. 이런 모든 과정은 비즐러의 도청 아래 이루어지지만 비즐러는 이 모든 사실을 고의적으로 눈감아준다. 그러나 정부의 고위급 간부와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어 어려움에 봉착한 상황에서도 연극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었던 크리스타의 밀고로 체포 위기에 놓이게 된다. 내막을 파악한 비즐러는 결정적 증거물인 타자기를 재빨리 감추고 드라이만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지만 죄책감을 견디지 못했던 크리스타를 잃고 만다. 그는 타자기를 인멸한 사람이 크리스타라고 믿지만 통일 독일 이후 수년이 흐른 뒤에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비즐러였음을 알게 된다.

 그는 지성과 감성을 두루 갖춘 예술가의 전형적 인상을 보여준다. 급진적인 성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뜻 맞는 동료들과 힘을 모아 신중하게 움직인다. 한편으론 견고한 시대의 장벽 앞에서 사랑하는 연인의 굴욕을 씻어주지도, 배우로서 겪어야 하는 내적 갈등을 치유해 줄 수도 없는, 무력한 지식인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사랑은 영혼과 육체의 완벽한 이중주를 보여주는 가장 전형적인 예술가적 사랑으로 읽혔다. 드라이만은 정치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크리스타를 경계하고, 크리스타는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사수하기 위해 드라이만을 배신하지만, 이러한 비극 앞에서 책임의 소재라든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는 등의 판단은 부질없다.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는 답답한 시대상황 속에서도 전인적 사랑을 나누는 용기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이들의 뜨거운 사랑은 비즐러라는 냉혈한을 구원했다.


#3
크리스타 (마티나 게덱 분)

 동독 연극계의 히로인이자 드라이만의 연인이다. 그 시대의 여인이라기엔 도드라질만큼 화려하고 정열적이다. 드라이만의 정치적, 작가적 행로를 존중하고 지지하며 그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주지만 배우로서의 재능에 대해 스스로 확신이 없고 약물에 의지해 살아가는 나약한 일면을 감추고 있다. 정부의 간부의 눈에 띄어 수치스런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는데, 배우로서의 생명이 끊기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드라이만에 대한 신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한다. 동독 정부는 트리스타의 이러한 약점을 이용, 증거물이 있는 장소를 알아내어 드라이만을 체포하려 하지만 비즐러의 개입으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던 트리스타는 차에 치여 숨을 거두고 만다.

 마치 열정적인 남반구의 여인을 연상시키는 듯 매혹적인 배우였다. 동독의 겨울이라는 칙칙한 배경 속에서 이 여인은 탐스러운 장미처럼 검붉은 빛을 발한다. 트리스타의 아름다움은 비즐러에게는 눈부신 동경으로, 저급한 정부간부에게는 욕망의 대상으로 비춰진다. 그리고 그녀의 자의식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다. 트리스타는 드라이만의 연인, 권력자의 정부로서만 살 수는 없는 여자였다. 드라이만은 이것을 이해했지만 현실적으로 도울 수 있는 힘이 없었고, 정부간부는 이것을 이해하지도, 이해할 마음 따위도 없지만, 그녀의 직업적 운명을 좌지우지할 힘이 있었다. 결국 드라이만을 배신하는 그녀의 선택은 어느만치 불가피했고, 비즐러는 두 사람 모두를 동정하여 최선을 다하지만 절망에 빠진 그녀를 지킬 수는 없었다. 트리스타는 무책임한 시대와 이기적인 남성들로 인해 쓸쓸히 고통으로 내몰린 비운의 히로인이다.

 
 영화의 라스트 씬은 '시네마 천국' 이래로 최고의 명장면이었다.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을 염두하여 자세한 설명은 삼가필) 불필요한 군더더기는 없고 여운은 길다. 비즐러는 이 라스트 씬에서 딱 한번 미세하게나마 밝은 낯빛을 보여준다. 그는 과거의 모든 것을 잃고나서야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 그것은 자발적 상실을 통한 구원인 동시에 난생 처음 스스로에게 선사하는 소중한 선물이었던 셈. 여기, 당신의 삶을 비추어줄 타인의 삶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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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2-30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리쉬 뮤흐" 이 영화가 이분의 유작이였습니다.
영화를 촬영시 이미 위암 말기판정을 받았고, 마지막 불꽃을 지피고
사그라들었죠. 그래서 그런지 더더욱 영화가 빛이 납니다.

깐따삐야 2007-12-30 21:50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그런 상황에서도 그만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니 존경스럽네요 정말. 메피님 이야길 듣고나니 영화 속에서 그가 흘렸던 눈물이 예사롭게 다가오질 않네요.
암튼 참 훌륭한 영화에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어요.^^

웽스북스 2007-12-30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너무 좋아요- 메피님 말씀하신 사연은 저도 몰랐던 사연인데 정말 대단한 배우라는 생각이 드네요- 정말 범상치 않은 느낌을 가진 배우였어요- 진짜 마지막 불꽃이었네요

깐따삐야 2007-12-30 22:06   좋아요 0 | URL
범상치 않은 느낌. 그렇죠!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라 더 범상찮아 보이구 심상찮아 보였는지도 몰라요.

마노아 2007-12-30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낮에 이 영화 예매했어요. 무려 열흘이나 더 기다려서야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엄청 두근거려요. 1월 10일 어여 와라!

깐따삐야 2007-12-30 22:35   좋아요 0 | URL
재상영 하나보죠? 잘됐네요. 마노아님도 좋아하실 거에요.^^

마늘빵 2007-12-30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내가 젤 좋아하는 영화 또 하나 나왔다아. 비즐러 넘 귀엽지 않나요? :)

깐따삐야 2007-12-30 23:13   좋아요 0 | URL
글쎄요. 얼핏 레고인형을 떠올리게끔 하는 게 귀여운 것도 같네요.
(어째 망자에 대한 모독 같으다. -_-)

라로 2007-12-31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보고싶다요~.
1월 10일에 나오면 다시 봐야쥐이~.

깐따삐야 2007-12-31 12:22   좋아요 0 | URL
다시 보셔도 좋으실 것 같다요~ ㅋㅋ 저도 나중에 한번 더 보려구요. 느낌이 또 다르겠죠.^^

순오기 2007-12-31 0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월 10일이라니 저도 기억할랍니다. 좋은 영화 알개 돼서 감사~ ^^
깐따님 한해 마무리 잘 하시고 행복한 새해 맞이하세요~
태그 덕분에 님을 알게 돼서 즐거웠어요. 새해에도 끈끈한 인연 이어가요. 우리! ^^

깐따삐야 2007-12-31 12:27   좋아요 0 | URL
네. 순오기님도 한번 보세요.^^
혼잣몸인 저야 특별히 마무리고 뭐고가 없죠. 그저 무탈했다는 데에 만족하고 새해 다짐이나 하는 정도에요.
저도 태그 덕분에 알라딘과 좀더 친밀해지고 순오기님도 알게 되고. 참 좋았더랬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프레이야 2008-01-01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7년 안타깝게도 이 영화를 못 보고 지나갔어요.
올해 봐야겠어요. 깐따삐야~~ ^^
부산에서도 재상영할까 모르겠네요.

깐따삐야 2008-01-01 11:41   좋아요 0 | URL
아하, 부산에 사시는군요! 먼 곳인데 혜경님 덕분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이 영화 분명히 좋아하실 거에요. dvd로도 나왔으니 꼬옥 한번 보세요.

Mephistopheles 2008-01-01 22:55   좋아요 0 | URL
소문엔 DVD 자막이 개판 오분전이라고 하더군요.오히려 어둠의 경로쪽 자막이 훌룡하다고 하더군요.^^

깐따삐야 2008-01-01 23:03   좋아요 0 | URL
독일어다보니 구텐탁이니 구테나흐트 정도 빼곤 그냥 그런갑다... 하고 봤어요. 흐흐. 개판 오분전인 자막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훌륭한 영화라지요.

다락방 2008-01-02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제 2007년 최고의 영화였어요.

여담으로, '마티나 게덱'이 주연했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여름휴가』도 정말 좋아요!

깐따삐야 2008-01-02 23:59   좋아요 0 | URL
우왓! 반가워요! 이 영화 정말 좋았어요.
전 마티나 게덱이란 배우도 좋았고 미필적 고의라는 말도 좋아하는데. 그 영화 꼭 찾아봐야겠어요. 감사해요.^^
 


  지난 가을. 상심한 나에게 누군가 권해주었던 영화이다. 개봉작들을 시기에 맞춰 꼬박꼬박 챙겨보지 못하는 나는 누가 나오는데요? 라고 물었다. '번지점프를 하다'의 김대승 감독의 작품이라는 말을 했고 그 작품이 좋았다면 이 영화도 분명히 마음에 들 것이라고 했다. 찾아보니 유지태와 김지수, 엄지원이 주연이었다. 여백이 많은 유지태의 미소와 김지수의 깨끗한 목소리를 좋아한다. 엄지원은 감정에 습기가 많고 여려 보이면서도 어딘지 인공적인 배우라는 느낌 때문에 많이 좋아하진 않고. 그 날 이후로 몇 개월의 시간이 흘러 최근에서야 이 영화를 찾아보게 되었다. 계절을 거슬러 완연한 가을의 정취가 곳곳에 담겨있는 이 영화를, 혼자 숨 죽인 채 담담한 심정으로 보았다. 안됐고, 그 마음 알 것 같지만, 더 이상 내 마음이 같이 아프지 않다는 사실에 아쉬워하며.

 현우(유지태 분)는 백화점 붕괴 사고로 연인이었던 민주(김지수 분)를 잃는다. 두 사람은 결혼을 한 달 앞두고 쇼핑을 하기 위해 백화점에 가기로 약속했던 상태였다. 신입검사로 바빴던 현우는 제 시간에 약속을 지킬 수 없었고 민주에게 먼저 백화점에 가 있을 것을 부탁한다. 민주는 오래 걸리지 않으면 그냥 이 곳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불편했던 현우는 민주를 설득한다. 결국 민주는 혼자 백화점에 가서 현우에게 선물할 등산화를 사서 지하 커피숍에 앉아 포장을 하던 중에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눈 앞에서 잃어버린 슬픔,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 자신이라는 죄책감으로 현우는 민주가 그렇게 좋아하던 웃음을 잃어버린 채 냉정한 검사로서 자신의 일에만 몰입한다. 그러던 중에 담당했던 사건의 결과로 여론의 압박이 심해져 휴직처분을 받게 된 현우는 민주가 남긴 다이어리 속의 여정을 따라 가을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의 제목은 '민주와 현우의 신혼여행'. 민주는 현우와 함께 다시 가고싶었던 장소와 그 곳에 대한 인상을 다이어리 속에 세심히 기록해왔고, 다이어리는 민주의 아버지에 의해 현우에게 넘겨진 것이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자꾸 마주치는 여자가 있다. 세진(엄지원 분)이다. 현우는 세진의 목소리를 통해 민주가 생전에 남겼던 말들을 다시 듣게 된다. 비는 하늘에서 들으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을거야. 비가 땅에 부딪치고, 돌에 부딪치고, 지붕 위에 부딪치고, 우산에 부딪쳐서 비소리가 들리는 거잖아. 비가 옴으로 인해 우리는 옆에서 잠자고 있던 사물의 소리를 듣게 되는거야. 뭔가 이상하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세진은 커피숍에서 민주에게 커피를 갖다주었던 아가씨였고 가까운 거리에서 민주와 함께 매몰되어 민주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세진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민주와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구출을 기다렸고, 민주로부터 현우와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민주는 죽어가면서 세진에게 현우를 위해 기록해왔던 다이어리를 남겼고, 살아남은 세진은 현우를 찾지 못해 민주의 부모에게 다이어리를 전했던 것.

 두 사람은 모두 아프다. 이제는 더 이상 편하게 웃을 수 없게 되버린 현우. 면접시험장에서, 교통사고 현장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뛰쳐나가는 세진. 살아남은 자의 고통은 너무도 커서 민주라는 교집합을 통해 우연히 겹치게 된 두 사람은 서로가 너무 아프고 버겁다. 그러나 민주가 다이어리의 맨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했듯 지금 우리 마음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하지만 이 여행이 끝날 때는 마음 속에 나무숲이 가득할 것이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두 사람은 미세하게나마 서로에게서 희망을 본다. 길이 너무 실없이 끝나버린다고 허탈해 할 필요는 없어. 방향만 바꾸면 여기가 또 출발이잖아. 마치 미래를 예감하는 전언과도 같은 민주의 메세지. 일상으로 돌아온 현우는 민주의 아버지로부터 나무 나침반을 선물 받는다. 아버지는 말한다. 나침반 바늘의 두 끝이 항상 다른 쪽을 가르키고 있지? 두 끝이 서로 만나지 못 한다고 해서 서로 다른 곳에 있겠나? 현우는 수소문을 해서 세진을 다시 찾게 되고 두 사람은 가을색이 완연한 가로수길을 걸으며 기억 속 민주와 재회한다. 새로 포장한 길인가 보죠? 전에 있었던 길들의 추억이 다 이 밑에 있을텐데. 사람들은 그 길을 잊고 이 길을 또 달리겠죠? 좋은 길이 됐음 좋겠다.

 널 만나서 내가 커졌고, 너 때문에 매일 새로워지고, 널 보면 힘이 나. 내 마음의 숲은 바로 너였나봐. 황량한 마음의 사막을 우거진 숲으로 채우기 위해 가을로 떠난 여행. 하지만 내 마음의 숲은 바로 내 곁에 있는 너라는 깨달음. 민주는 떠났지만 사랑은 남았다. 나침반과도 같은 정직한 사랑을.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함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인지도.

 스토리는 진부하고 번지점프 만큼의 신선함은 없었다. 더욱이 김지수와 엄지원은 이은주가 지녔던 독특한 아우라를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이 영화를 함께 보고싶다. 그가 속이 좀 좁은 사람이더라도 현우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었으면. 나를 통해 그가 커지고, 나로 인해 나날이 새로워지고, 나를 보고 힘을 낼 수 있었으면. 그리고 이 영화 속에서 멜로의 촌스러움이 아니라 마시멜로 같은 사랑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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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2-29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뛰어나진 않아도, 훌륭하진 않아도, 가슴 먹먹하고 마음을 적셨던 영화였어요. 유지태가 가는 길을 나도 따라가면서 엷은 미소도 지어보고, 툭 건드리면 울어버릴 것만 같은, 그런 영화.

깐따삐야 2007-12-29 23:45   좋아요 0 | URL
그쵸그쵸? 헤어진 지 얼마 안된 사람한테 보여주면 거의 쥐약이나 다름없는 그런 영화.
유지태는 참 밋밋하게 생겨주셨는데 멜로하고 썩 잘 어울린단 말이지요-

웽스북스 2007-12-29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진 너무 좋죠 ^^ 저도 영화를 보면서 참 스토리라인이 약하다,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번지점프 워낙 좋아해서) 둘이 연애하던 장면은 참 마음에 많이 남았었어요- 둘이 도서관에서 데이트하는 거 보면서 나도 저거 꼭 하리라, 생각했었는데 너무 늙어서 나 자체가 도서관에 안간다는 거 ㅠ-ㅠ
거기 나왔던 그 내연산이 나 졸업한 대학교 뒷편에 있었어요- 차타고 1시간 안걸리는 거리라 엠티로 여러번 갔었는데, 정작 나는 아침에 귀찮다고 산에는 안올라갔었는데, 영화를 보고 그게 그렇게 후회될 수가 없더라고요 흑

깐따삐야 2007-12-30 00:05   좋아요 0 | URL
이몸도 그 흔해빠진 도서관 데이트 한번을 지대루 못 해보고 졸업하셨다우. 이젠 도서관에 가봐도 동생들만 우글거린다는 비이-극. 흑흑!
내연산 찾아봤는데 웬디양님의 프로필이 자연스럽게 하나 더 추가되는군요.^^ 난 이제 두 손 꼭 잡고 등산 데이트 하는 걸루 희망사항 조정 중이에욤.


웽스북스 2007-12-30 00:32   좋아요 0 | URL
나는 원래 개인정보를 질질질 흘리고 다녀서 찾아보면 다나와요 ㅋㅋㅋ
난 등산도 잘 못해서 두손꼭 잡고 등산데이트하면 분명 차일거에요 ㅠㅠ

깐따삐야 2007-12-30 00:41   좋아요 0 | URL
하루 날 잡아서 웬디양님 서재 습격을 해야겠어요. 진짜 다 나온단 말이죠? ㅋㅋ
실은 나도 그게 걱정이라우. 남자로 하여금 날 다시 생각해보게끔 하고싶을 때나 써먹어야지 원. ㅠㅠ

치니 2007-12-30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스쳐 버렸던 영화인데, 김대승도 좋아하고 유지태도 좋아하는데도 넘겼는데, 깐따삐야님이 이 리뷰를 적어주시니 마음이 동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천 꾹 누르고. ^-^
마음이 너무 황량하다 싶을 때 빌려 봐야겠어요.
근데, 이은주 보고 싶어지네요...

깐따삐야 2007-12-30 20:57   좋아요 0 | URL
추천 감사합니다.^^
번지점프의 이은주도 그랬고, 가을로의 김지수도 그렇고 김대승 감독의 여주인공들은 참 밝고 매력적이라죠.
예쁘장한 배우들은 많지만 자신만의 아우라가 있는 배우는 드문데 이은주의 부재가 그런 면에서 많이 아쉬워요.

antitheme 2007-12-30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영화 초반에 나오는 거리가 제가 사는 곳 바로 근처라 보면서 깜짝 놀랐었어요. 잔잔한 가을 풍경이 기억에 남네요.

깐따삐야 2007-12-30 21:20   좋아요 0 | URL
앗, 그래요? 좋은 동네에 사시네요. 아파트 베란다 밖으로 내다뵈는 나무숲이 무척 멋지던걸요.^^
영화 보면서 가을이 그립더라구요. 아직 계절이 한 바퀴 돌려면 한참 남았는데 말이죠-

미미달 2007-12-31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별로 였어요. 내용도 좀 퐝당한 억지가 있고....
눈요기 할 만한 영화였다고 할까요. _-) ....
(왜 이렇게 혹평을 남발하는지는 저도 잘 몰겠지만 ㅎㅎ)

전 올해 본 영화 중
'베를린 천사의 시'
'마농의 샘' '너는 내 운명' '우리 사랑일까요'
좋았어요. '▽'

최악은 '디 워' (미안하게두.......... )

깐따삐야 2007-12-31 22:45   좋아요 0 | URL
이거이거 한창 나이의 츠자가 요로코롬 감성이 각박해서야 어떡해욧!
디워 툴툴거리면서도 재밌게 보고 주변 사람들에겐 무쟈게 혹평했다는 사아실.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