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를 보러 간 조제와 츠네오

바쁜 가운데 딴짓을 하게 되는 건 학창시절부터의 오래된 습관이다. 그런데 막상 알고보면 나같은 사람들이 어지간히 있는 것 같다. 시험 전 날 소설을 읽거나 편지를 쓰거나 서랍 정리를 하는 사람들. 정신 상태가 그다지 쌈빡하지 못한 사람들. 내 주변은 오늘도 겁나 바빠 보인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안 바쁘다.

안 바쁘다고 해서 벌 받았나 보다. 위의 글 써놓고 한 시간 정도 들입다 바빴더랬다. 음료수까지 사 나르며 단순 노동에 시달렸다.

어젯밤 늦은 시간에 이 영화를 혼자 보았다. 방 안에 서랍처럼 생겼다 싶은 것들은 모조리 활짝 열어놓고 버릴 것, 안 버릴 것까지 몽땅 모아서 한 켠에 쌓아둔 채 컴퓨터 앞에 앉아 곰플레이어를 클릭, 이 별스런 제목의 일본 영화를 보았다. 문득 생뚱맞게도 사이보그가 나오는 SF영화를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으나 마땅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아 선택한 영화였다. 너도 나도 좋았다는 말이 많아서 전부터 한 번 보고 싶었던 작품이기도 했다. 영화는 제법 쿨하고 재미있었다. 츠네오(스마부키 사토시)는 너무나도 솔직하고 귀여웠으며 조제(이케와키 치즈루)는 독특하고 사랑스러웠다. 된장국과 달걀말이, 생선구이를 올린 그들의 아침 밥상은 코끝에 담백한 향기를 폴폴 풍기며 얼마전 일본에서의 아침 식사를 떠올리게끔 하기도 했다.

심야 마작 게임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츠네오는 어느 날 새벽 언덕길을 달려 내려오는 유모차와 마주치고 유모차 안에서 다리가 불편한 소녀, 조제를 발견한다. 조제는 프랑소와즈 사강의 소설에서 따온 이름. 지금까지 그녀는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고 할머니가 주워온 잡다한 책들을 읽는 것이 유일한 취미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이미 기막힌 미인을 여자친구로 두고 있던 츠네오는 헝클어진 단발머리에 시큰둥하고 독특한 조제에게 점점 이끌리게 되고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조제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그녀와 동거 생활에 들어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호랑이를 보러 가고 싶었다는 조제와 함께 츠네오는 호랑이를 보러 가기도 하고,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헤엄치는 영상이 어른거리는 방 안에서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바다를 보러 가기도 한다. 그렇듯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보며 알콩달콩 즐거운 연애를 하던 그들에게도 이별의 시간은 오고 츠네오는 스스로 그녀로부터 도망쳤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조제는 혼자 먹을 분량의 생선을 구우며, 의자에서 내려오기 위해 철퍼떡 다이빙을 하며, 츠네오가 없는 그녀만의 일상을 담담히 꾸려간다.

츠네오의 여자친구가 조제를 찾아와 다리가 없다는 너의 무기가 솔직히 부럽다고 말하자 조제가 하는 말,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 너도 네 다리를 잘라." 난 푸핫, 웃으며 참 조제답다고 생각했다. 조제는 가란다고 해서 정말 가버릴 사람이면 가버리라고, 그렇지만 내곁에 남아달라고 진심을 다해 츠네오를 붙잡았지만 츠네오에게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츠네오와 함께 하는 동안 늘 생각했을 것이다. "너도 나를 만나 즐거우면서 뭘 그래." 츠네오가 떠날 때 조제가 그에게 선물한 책. SM 킹. 다시 푸핫, 웃으며 참 조제스럽다고 생각했다.

(집에 가서 이어서 쓰자. 앗싸, 퇴근 시간!)        

사람을 만나고, 만나서 사랑하고, 사랑하다 헤어지는 과정이 이렇듯 상큼하고 담백할 수 있을까. 물론 뜨겁고 끈적한 느낌이 드는 사랑이라고 해서 더 진실되다거나 더 아름답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만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맑고 차가운 도랑물이 졸졸 흐르는 것처럼, 흐르는 물을 사이에 두고 물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나는 얼굴을 마주하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처럼, 정겹고 슬프고 사랑스러웠다. 츠네오는 조제를 업고서, 유모차와 렌트카에 태워서, 하늘의 구름처럼, 바다의 물고기처럼 멀리멀리 떠다니며 자유롭고 싶었던 그녀에게 집 밖의 세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츠네오 스스로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가도 가도 내가 있을만한 적당한 자리는 없어 보이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새롭게 배워나가며 더욱 성숙해지는 계기를 맞는다. 조제와 헤어지고 난 후 옛 여자친구와 길을 걸으며 내내 찌푸리고 있던 츠네오가 갑자기 펑펑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에서 나는 공감했다. 사랑을 하고 나이를 먹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훌쩍 어른으로 커버린 소년의 마음 속에 문득 북받쳐오르는 슬픔같은 것.

예전의 나도 그런 기억이 있다. 누군가를 잃어버렸을 무렵이었다. 그렇지만 뭔가를 잃어버리고도 그게 뭔지를 잘 몰랐을 그런 나이였을 것이다. 오후 수업이 없던 그 날. 그저 여느날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고 시간은 정오 무렵이었다. 차창 밖은 한창 봄이었고 나는 조그만 모자가 달린 귀엽고 화사한 감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친구들을 만나서 새학기 강의에 대한 수다를 떨었고 얼굴이 하얘서 점퍼가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들었고 자목련은 흰목련보다 어쩐지 덜 예쁘다는 말들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더없이 평범한 하루였다. 그런데 버스에 자리가 나서 앉자마자부터였나, 갑자기 울컥하더니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거였다. 마침 손수건도 가진 게 없어 휴대용 화장지를 꺼내서 남들 모르게 눈물을 닦아내고 속으로 꺽꺽거리면서 나는 대체 이 눈물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계속 생각했었다. 성이 차지 않게 나와주었던 지난 학기의 학점이라든가, 평소 나를 서운하게 대했던 사람들, 엄마와의 사사로운 언쟁 등을 계속 떠올렸지만 이렇다할 대답은 나와주지 않았고 이러다가 탈수증으로 쓰러지겠다 싶을만큼 많은 눈물이 솟아오르고 또 솟아올랐다. 아무튼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그 지경이었고 뒤도 안 돌아보고 후다닥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는 길, 눈물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후련했고 배가 고팠고 막 눈물이 솟을 때보다 마음은 어쩐지 더 슬픈 것도 같았다.

나는 지금도 그 때 내가 왜 그렇게 울었는지 잘 모른다. 누군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정말? 아무튼 영화 속 츠네오를 보면서 그 날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냥 이해가 되었다. 그냥 이해가 되어버리는 상황. 자잘한 설명을 듣지 않고도 저절로, 마음으로 이해가 되어버리는 순간. 어깨를 토닥여주며 너도 이제서야 조금 어른이 되었구나. 그런 말을 건네고 싶은 순간. 그랬다.

츠네오는 옛 여자친구와 분명 더욱 성숙하고 멋진 연애를 할 것이다. 조제는 시장을 봐서 따듯한 된장국을 끓이고 부드러운 계란말이를 만들고 고소하게 생선을 구우며 스스로를 위한 밥상을 차릴 것이다. 집으로 가져가고 싶은 구름, 손 안에 가두고 싶은 물고기들, 하지만 그들이 바람 속에 물결 속에 미끄러져 가듯 사랑도 마찬가지다. 파란 하늘을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있는 그 순간, 찬 물 속에 손을 집어넣고 물고기의 미끈한 등을 살짝 스치는 그 순간, 주어진 그 시간을 열렬히 느끼면 되는 것이다. 아쉽지만, 아쉬워 하다가는 그 시간마저 영영 놓칠지도 모르니까.  

그 모든 아쉬움을 떠나서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있다면, 그의 든든한 팔목을 꼬옥 붙잡고 있을 수만 있다면, 호랑이처럼 두려운 이 세상과 마주하는 일도 한 번 쯤 즐길만한 모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섭고 막막한 세상 앞에서 츠네오가 조제에게 홀로 서는 용기를, 조제가 츠네오에게 둘이 하는 사랑을 가르쳤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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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8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03-08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그럼~요. 감사합니다. ^^

이게다예요 2006-11-14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와 닿네요. 재미있었고 또 울컥하기도 했던 영화였어요.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깐따삐야 2006-11-14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다예요 님, 반갑습니다. 서재에 종종 놀러갈게요. ^^
 


로버트 드니로(예비장인)와 벤 스틸러(예비사위)

토요명화로 이 영화를 보았다. 예전에 보려다가 그만 둔 영화였는데 왠지 가끔 미국식 유머 코드를 맛볼 수 있는 코메디 영화가 당길 때가 있다. 영화는 기대보다는 덜, 하지만 재미있었다. 로버트 드니로에 대해서야 말할 것도 없고 예비 사위로 나오는 벤 스틸러란 배우는 웨딩 싱어의 아담 샌들러만큼이나 순수하고 소심하고 엉뚱한 젊은 남자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다. 다른 나라나 우리나라나 착하고 반듯한 남자는 어딘지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남자 간호사 그렉(벤 스틸러 분)은 애인인 팜(테리 폴로 분)에게 청혼하기 전에 그녀의 아버지인 잭 바이런(로버트 드니로 분)의 승낙부터 받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CIA 심리분석가 출신인 잭은 의심이 많고 비판적인 성품으로 그렉이 그의 마음에 들기란 쉽지가 않다. 결국 예비 장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거짓말까지 하게 되는 그렉. 팜의 여동생의 결혼식을 앞두고 일은 자꾸만 그렉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꼬이고 그렉은 예비 장인의 견디기 힘든 심술과 훼방에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잭은 딸 팜이 진심으로 그렉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렉을 잡으러 공항으로 달려가고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영화를 보면서 공감했던 건 반드시 CIA 심리분석가 출신이 아니더라도 결혼 적령기의 자식을 두고 있는 부모님들은 대개 타고난 능력을 넘어서 뛰어난 독심술가로, 관상학자로, 예언자로 삼단변신까지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잭에게 팜만큼 아름답고 똑똑하고 괜찮은 여자란 없는 것처럼 보이고 딸이 사귀는 남자친구들은 어딘가 죄다 부족해 보이기만 한다.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물증을 확보해 확인하기 전까지는 몽땅 거짓말같고 순진한 딸이 음흉한 놈한테 홀리고 만 것이라는 의심을 끝까지 떨쳐내지 못한다. 남자의 속성을 잘 아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딸이 데려온 남자가 더욱 못마땅하고 의심스러운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예비 장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예비 사위의 모습도 재밌었지만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딸과 떨어뜨려 놓으려는 아버지의 모습도 참 귀여웠다. 나는 아직 부모가 되어보진 못했지만 그 마음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집은 그렇다. 본래 무대책이 상대책이라고 생각하며 사시는 아빠는 앞으로 사위와 함께 마시겠다며 이런저런 술을 모으고 계신다. 오래 묵은 양주부터 관광지에서 사온 토속주까지, 아빠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면 만사 오케이를 하실 기세다. 사위의 조건 1 - 술을 좋아할 것. 사위의 조건 2 - 술을 잘 마실 것. 아빠답다. 반면에 엄마는 다르다. 남자 보는 취향이 매우 구체적이어서 두상이 잘생긴 남자를 찾아오라는 것이다. 두상이 잘생긴 남자라니 토끼 잡듯 활 매고 사냥을 나갈 수도 없고 대략 난감하다. 엄마가 말씀하시는 잘생긴 두상이란 옆에서 보면 마치 물음표처럼 뒤통수가 봉긋하게 올라온 형새를 가리킨다. 천재형 두상이기 때문에 잘만 보좌하면 뭐든지 해낼 수 있는 타입이란 것이다. 천재형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친오라버님께서 바로 그 두상을 가지고 계신다. 평균에 비해 사이즈가 좀 크고 뒤통수가 뽈록하고 딴딴하다. 간혹 내 허벅지라도 베고 누우면 무슨 바윗덩어리 올려놓은 것처럼 묵직하니 고통스러웠던. 두상이 그렇지 못하면 아예 MC몽처럼 생겼던가, 적어도 김용만처럼은 생겨줘야 한다나. 요즘 트렌드인 호리호리하고 야들야들한 꽃미남을 싫어하시는 엄마의 취향은 참 독특하달 수 밖에. 나의 취향과는 별도로 우리 부모님은 좀 이상하신 것 같다. 어떻게 딸과 평생을 살 사람을 보는데 술을 잘 마시는지의 여부와 머리통 모양을 보고 결정하겠다는 것인지. 그저 머리만 크고 술만 잘 마시면 장땡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쯤은 나도 알지만 그래도 좀 뭔가 미심쩍고 부족하단 생각이 든다. 얼굴 좀 작고 술 못 마시는 남자도 괜찮다고 생각해오던 나였지만 부모님이 다년간 저런 주장을 하고 계시니 이젠 길을 가다가도 두상 좋은 남자 보면 괜히 끌리고 술자리에서 주저주저하는 남자들 보면 저걸 어디다 써, 라는 망할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게다가 나처럼 단순한 애한테 저런 단순한 생각을 주입시키다니, 우리 부모님 살짝 경솔하셨던 것 같다.       

아무튼 영화를 보면서 대외적으로는 결혼 적령기에 이른 나한테도 머지 않은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내 마음에 들어야 하겠지만 기왕이면 부모님의 마음에도 쏙 드는 사람이면 좋겠다. 뭔가가 잘 안 맞아서 서로 힘을 소진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지난 연애에 너무 지쳐서 이젠 좀 편하게 가고 싶다. 아슬아슬 마음 졸이는 외줄타기 같은 것 말고 양편으로 넓게 잔디가 펼쳐지고 그 사이로 난 평평하고 가뿐한 길. 그런 길로 갔으면 좋겠다. 살고 사랑하는 게 모험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고 여행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는데 요즘 나는 살고 사랑하는 건 생활이라는 생각을 한다. 낭만이 아니라 생활에의 용기를 가진 사람, 그런 사람 둘이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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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1-24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움이 되는 사람을 고르세요. 싸움을 해보면, 그 사람이 벽인지 문인지 알 수 있거든요.

깐따삐야 2006-01-24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움이 되는 사람. 오, 그럴듯 합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요?
 


오지혜 - 사랑밖엔 난 몰라

그러고보니 노래를 불러본지도 참 오래다. 다리를 다치고 난 후로는 회식 자리에도 종종 불참했고 특별한 약속도 잡지 않았으며 나를 보고 싶은 사람들이 직접 우리집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동안 기분이 울적해 있었기 때문인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일도 드물었다. 학창시절에 오락부장을 하거나 사회를 본 적이 있지만 나는 지금도 행사 MC들만 보면 마음이 뛰며 감정이입을 할만큼 노는 것을 좋아한다. 가무에 소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웃고 마시고 떠들고 하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참 좋다. 물론 노는 자리 전후로 따라오는 부작용 때문에 사람들에 대해서, 나 자신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사람이 제대로 즐겁게 놀 수 있다는 것 또한 축복이자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대개 나의 레퍼토리는 이러하다. 낭만고양이나 DOC와 춤을, 정도로 진하게 흥을 북돋워 주다가 촉촉하게 술이 오르고 다들 센치해질 무렵 즈음해서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를 불러준다. 술이 좀 올랐을 때 이 노래를 부르면 칼칼하던 목과 찐득하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인희(오지혜 분)가 부르는 사랑밖에 난 몰라, 는 심수봉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감이 좋았다. 나는 그 장면을 자꾸 반복해서 보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오지혜란 배우가 평소에 참 연기를 잘하는 배우구나 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수준급의 노래 실력까지 지닌 줄은 몰랐다. 그녀는 너무 멋있었다.

남성 4인조 밴드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전국 각지를 돌며 연주를 하는 출장 밴드다. 팀의 리더 성우(이얼 분)의 시선을 따라가며 진행되는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대개 자신의 꿈을 이루었든, 그렇지 못했든 불행한 삶을 견디며 살고 있다. 학창 시절 함께 공연을 하며 일류 밴드의 꿈을 키우던 친구들은 약사가 되고 환경 운동가가 되어 현실에 매여 있고 성우의 첫사랑이었던 그녀, I love Rock & Roll을 부르던 록밴드의 보컬 인희(오지혜 분)도 남편과 사별한 채 채소 장사를 하며 억척스럽게 살고 있다. 그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을 때와는 달리, 사는 방식에 있어선 거칠고 서툴기만한 밴드 멤버들은 이런저런 상처를 안은 채 각자의 길로 흩어지게 되고 성우는 여수로 내려와 남아있는 멤버인 키보디스트와 보컬 인희를 데리고 새롭게 밤무대 밴드 생활을 시작한다.

언젠가 내가 아는 한 친구가 그랬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나오는 황정민을 보면 꼭 나를 보는 것 같아." 그는 실제로 학교 밴드의 드러머로 활동 중이며 말수가 적고 우직한 한편 속을 쉽사리 내비치지 않는 성격이다. 단지 드러머의 역할을 맡았다는 것을 떠나서 그는 정말 황정민같고 황정민스러운 사람이다. 여전히 그를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그가 말하면 다 진실일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황정민이 대마초에 취해 멀건한 얼굴로 "그 여자, 네가 가져." 하는 장면에서 문득 그가 보고싶었다. 소주와 오뎅을 앞에 놓고 흘러간 노래를 들으며 시덥잖은 얘기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조만간 그를 한 번 봐야겠다.

인희는 말한다.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그 때였는데." 그렇듯 전성기가 지나고 나면 이제는 내려와야 할 순서일까. 사는 게 그런 것 같긴 하다. 정신적으로 무르익고 성장하는 나이에 이르는 의미에서의 전성기가 아니라 내가 가장 나다웠고 행복했던 시점에서의 전성기. 그러한 의미에서의 전성기는 누군가에게는 학창시절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백발이 되고난 시점의 어느날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한 때의 열광 뒤에는 누구나 대개 평범해지고 만다. 일류 밴드를 꿈꾸던 아이들은 삼류 밴드가 되고 음악 선생님과 연애하던 도도한 보컬 소녀는 가끔 노래방에 가서나 전성기를 떠올리는 채소 장사 아줌마가 된다. 끝까지 하고 싶은 음악을 선택한 성우나 시류에 맞게 약대를 나와 약사가 된 친구나 삶에 대해 불만족스럽고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술집에서 발가벗고 기타를 치며 눈물을 흘리는 성우의 모습은 꼭 나같고 내 주변 사람들같고 세상 사람들같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개판인데 나는 벌거벗은 채로 노래를 부르며 기타를 칠 수 밖에 없다.

삶 자체를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였다. 때때로 이 보다 조금 더 낫거나 조금 더 못할 수는 있겠지만. 메뚜기도 한 철이듯 사람도 한 철이다. 그 한 철을 그리워하면서 평생을 평범하게 사는 게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른 거라도 알면 조금은 편해지련만 사랑밖엔 난 모른다면 더없이 버텨내기 버거운 게 삶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노래는 참 아름답지 않은가. 사랑밖엔 난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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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1-09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북쟁이에요. ^^

깐따삐야 2006-01-09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도 드러머시구나. 평온한 외면에 감춰진 뜨거운 열정. 크아. 멋져요.^^
 


넬슨과 새러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2001년 여름, 비행기 안에서였다. 밤이 깊은 하늘에서 졸다가 다시 깨어났다가를 반복하면서 영화를 보았던 것 같다. 그 때 기내방송을 통해 상영되었던 영화들 중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Heartbreakers'와 '스위트 노벰버' 뿐인데, 하트 브레이커스를 훨씬 더 재미있게 봤음에도 불구하고 스위트 노벰버에서 새러(샤를리즈 테론 분)가 해변가에서 덤블링을 하던 장면은 이상하리만치 내 가슴 속에 오래도록 남았다. 결국 그 장면 하나 때문에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고 샤를리즈 테론은 내가 가장 근사하다고 생각하는 배우들의 목록에 올랐다. 하나의 얼굴 속에 열정과 우수를 함께 지닌 그녀는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광고회사 간부 넬슨(키아누 리브스 분), 일종의 워커홀릭에 빠져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생활하며 성공만을 위해 내달리는 그 앞에 어느날 엉뚱한 말괄량이 아가씨, 새러(샤를리즈 테론 분)가 나타난다. 한 달에 한 번씩 남자를 바뀌어가며 사귀던 그녀는 넬슨에게 11월 한 달 동안 같이 살 것을 제안하고, 넬슨은 매력적인 새러에 대한 호기심과 일탈에의 욕구로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녀와의 동거가 시작되면서 새롭게 펼쳐지는 삶의 환희와 생명력을 느끼며 넬슨은 항상 철저하게 준비되고 치밀하게 진행되었던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 새러와의 동거를 통해 삶의 기쁨을 알게 된 넬슨. 결국 그와 그녀 사이에는 서서히 사랑의 감정이 싹트지만 새러에겐 오래전부터 앓아 온 불치병이 있었고 그녀는 깨끗하고 아름답게 헤어질 것을 부탁한다. 새러의 바람대로 꿈같은 여운만을 남기며 헤어지는 두 사람, 새러는 넬슨과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인생과 아름답고 편안하게 이별할 수 있었고 넬슨은 새러와의 사랑을 통해 인간적인 삶, 여유 있는 삶을 사는 제 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넬슨과 새러의 한바탕 꿈같은 사랑은 Enya의 Only time이 흐르며 더욱 여운의 빛을 발한다.

Sweet는 달콤하지만 November는 달콤하지 않다. (나는 11월만 되면 늘 감상에 빠졌고 불안했다. 건즈 앤 로지즈의 'November rain'을 듣고 있으면 그 음악처럼 마음 속에도 쏴아- 하면서 빗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넬슨은 참 좋은 남자고 새러는 너무나 사랑스럽다. 그들의 사랑은 사탕을 녹여 먹으며 덤블링을 하는 것처럼 달콤하고 신이 난다. 반면에 가을과 겨울의 경계인 11월에 이별하는 것처럼 두렵고 쓸쓸한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고 사랑은 가도 추억은 남는다고 했던가. 그리고 아마 추억은 내가 스스로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추억을 넘어선 무엇인가를 남겼을 것이다. 사랑이 쓸고간 자리는 폐허라지만 그 폐허의 땅을 뚫고 새롭게 돋아나는 무엇인가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랑했던 기억이 단지 아픔만을 남겼다면 첫사랑 이후 나는 영원히 성장하지 못한 채 그대로였어야 했다. 그 사람이 싫어져서, 사랑이 식어서 헤어지는 것만큼 쉬운 것도 없다. 그런데 넬슨은 새러를 사랑함에도 그녀를 보내야했고 가장 고통스러울 법한 이별 뒤에 그는 새로운 삶을 얻었다. 이별은 쓰지만 이별 후에 오는 것들은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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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천국

너무나 유명해서 별 말이 필요없는 영화.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다시 보고 싶어지는 영화. '거의 모든 것의 영화'라고 해도 좋을만큼 인생에 대해서, 꿈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우정에 대해서, 이 영화가 다루지 않고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마니아들, 영화를 좋아하거나 영화에 대해 뭘 좀 안다는 사람들은 대개 이 영화를 지금까지 보아왔던 최고의 영화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작은 마을의 영사 기사를 꿈꾸던 꼬마 토토가 나중에 세계적인 영화 감독으로 성장하게 될 때까지의 과정을 다정하면서도 절제된 시선으로 그려나간 작품이다. 특히 영화 한 컷 한 컷의 느낌을 효과적으로 살려주는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과 영화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토토를 위한 알프레도 아저씨의 마지막 선물, 즉 흑백화면의 편집된 키스신들은 매우 인상적이다.


2차 대전 직후인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아버지 없이 가난하게 살고 있는 토토는 광장에 있는 '시네마 파라디소'라는 영화관을 들낙거리며 영사 기사의 꿈을 꾼다. 외롭고 힘든 직업이라는 것을 알기에 영사 기사인 알프레도 아저씨도 토토를 만류하고 가난과 생활고에 지친 토토의 어머니도 영화만 좋아하는 토토를 꾸중하지만 영화와 영사 기사의 일에 대한 토토의 열정은 쉽게 가라앉질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영화관에는 화재가 발생하고 토토가 알프레도 아저씨를 불길 속에서 구해낸다. 그 이후 토토는 아저씨로부터 영사 기사 일을 배우게 되고 그의 뒤를 이어 시네마 파라디소를 지키는 영사 기사가 된다. 청년이 된 토토는 엘레나라는 아름다운 소녀와 사랑에 빠지지만 첫사랑의 인연은 어긋나 버리고 알프레도 아저씨의 조언대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꿈을 펼치기 위해 마을을 떠난다. 영화 감독으로 성공하고 이제 중년이 된 토토는 알프레도 아저씨의 부음을 듣고 마을로 돌아와 첫사랑의 연인이었던 엘레나와 재회하게 되고 아저씨의 마지막 선물인 키스신 편집 필름을 보며 추억의 여운을 느낀다.


알프레도 아저씨는 엘레나가 남긴 메모에 대해 토토에게 말하지 않았다. 만약 토토가 엘레나의 연락처가 담긴 그 메모를 읽었다면 그들은 사랑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저씨는 토토가 작은 마을의 영사 기사로 머물러 있길 바라지 않았다. 첫사랑을 잃는 아픔 대신 그가 자신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성장하길 바랬다. 토토는 몰랐던 사실에 잠시 놀라워 하면서도 그런 알프레도 아저씨의 마음을 이해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바로 이러한 면에서 우정이 사랑보다 공정한 것 같다. 사랑의 에너지는 점차 뜨거워짐에 따라 서로를 영원히 소유하고픈 열망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지만 우정은 그에 비해 적정 온도의 공정함에 기반하고 있기에 친구의 성장을 돕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객관성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알프레도 아저씨는 때로는 아버지같은 엄격함과 너그러움으로, 때로는 친구같은 공정함과 다정함으로 토토를 사랑했다. 다소 초점을 벗어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남녀간의 사랑도 이러한 우정의 요소들을 충분히 활용할 수만 있다면 훨씬 더 오래, 서로의 성장을 도우면서 신실한 감정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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