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를 보러 간 조제와 츠네오
바쁜 가운데 딴짓을 하게 되는 건 학창시절부터의 오래된 습관이다. 그런데 막상 알고보면 나같은 사람들이 어지간히 있는 것 같다. 시험 전 날 소설을 읽거나 편지를 쓰거나 서랍 정리를 하는 사람들. 정신 상태가 그다지 쌈빡하지 못한 사람들. 내 주변은 오늘도 겁나 바빠 보인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안 바쁘다.
안 바쁘다고 해서 벌 받았나 보다. 위의 글 써놓고 한 시간 정도 들입다 바빴더랬다. 음료수까지 사 나르며 단순 노동에 시달렸다.
어젯밤 늦은 시간에 이 영화를 혼자 보았다. 방 안에 서랍처럼 생겼다 싶은 것들은 모조리 활짝 열어놓고 버릴 것, 안 버릴 것까지 몽땅 모아서 한 켠에 쌓아둔 채 컴퓨터 앞에 앉아 곰플레이어를 클릭, 이 별스런 제목의 일본 영화를 보았다. 문득 생뚱맞게도 사이보그가 나오는 SF영화를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으나 마땅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아 선택한 영화였다. 너도 나도 좋았다는 말이 많아서 전부터 한 번 보고 싶었던 작품이기도 했다. 영화는 제법 쿨하고 재미있었다. 츠네오(스마부키 사토시)는 너무나도 솔직하고 귀여웠으며 조제(이케와키 치즈루)는 독특하고 사랑스러웠다. 된장국과 달걀말이, 생선구이를 올린 그들의 아침 밥상은 코끝에 담백한 향기를 폴폴 풍기며 얼마전 일본에서의 아침 식사를 떠올리게끔 하기도 했다.
심야 마작 게임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츠네오는 어느 날 새벽 언덕길을 달려 내려오는 유모차와 마주치고 유모차 안에서 다리가 불편한 소녀, 조제를 발견한다. 조제는 프랑소와즈 사강의 소설에서 따온 이름. 지금까지 그녀는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고 할머니가 주워온 잡다한 책들을 읽는 것이 유일한 취미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이미 기막힌 미인을 여자친구로 두고 있던 츠네오는 헝클어진 단발머리에 시큰둥하고 독특한 조제에게 점점 이끌리게 되고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조제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그녀와 동거 생활에 들어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호랑이를 보러 가고 싶었다는 조제와 함께 츠네오는 호랑이를 보러 가기도 하고,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헤엄치는 영상이 어른거리는 방 안에서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바다를 보러 가기도 한다. 그렇듯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보며 알콩달콩 즐거운 연애를 하던 그들에게도 이별의 시간은 오고 츠네오는 스스로 그녀로부터 도망쳤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조제는 혼자 먹을 분량의 생선을 구우며, 의자에서 내려오기 위해 철퍼떡 다이빙을 하며, 츠네오가 없는 그녀만의 일상을 담담히 꾸려간다.
츠네오의 여자친구가 조제를 찾아와 다리가 없다는 너의 무기가 솔직히 부럽다고 말하자 조제가 하는 말,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 너도 네 다리를 잘라." 난 푸핫, 웃으며 참 조제답다고 생각했다. 조제는 가란다고 해서 정말 가버릴 사람이면 가버리라고, 그렇지만 내곁에 남아달라고 진심을 다해 츠네오를 붙잡았지만 츠네오에게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츠네오와 함께 하는 동안 늘 생각했을 것이다. "너도 나를 만나 즐거우면서 뭘 그래." 츠네오가 떠날 때 조제가 그에게 선물한 책. SM 킹. 다시 푸핫, 웃으며 참 조제스럽다고 생각했다.
(집에 가서 이어서 쓰자. 앗싸, 퇴근 시간!)
사람을 만나고, 만나서 사랑하고, 사랑하다 헤어지는 과정이 이렇듯 상큼하고 담백할 수 있을까. 물론 뜨겁고 끈적한 느낌이 드는 사랑이라고 해서 더 진실되다거나 더 아름답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만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맑고 차가운 도랑물이 졸졸 흐르는 것처럼, 흐르는 물을 사이에 두고 물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나는 얼굴을 마주하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처럼, 정겹고 슬프고 사랑스러웠다. 츠네오는 조제를 업고서, 유모차와 렌트카에 태워서, 하늘의 구름처럼, 바다의 물고기처럼 멀리멀리 떠다니며 자유롭고 싶었던 그녀에게 집 밖의 세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츠네오 스스로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가도 가도 내가 있을만한 적당한 자리는 없어 보이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새롭게 배워나가며 더욱 성숙해지는 계기를 맞는다. 조제와 헤어지고 난 후 옛 여자친구와 길을 걸으며 내내 찌푸리고 있던 츠네오가 갑자기 펑펑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에서 나는 공감했다. 사랑을 하고 나이를 먹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훌쩍 어른으로 커버린 소년의 마음 속에 문득 북받쳐오르는 슬픔같은 것.
예전의 나도 그런 기억이 있다. 누군가를 잃어버렸을 무렵이었다. 그렇지만 뭔가를 잃어버리고도 그게 뭔지를 잘 몰랐을 그런 나이였을 것이다. 오후 수업이 없던 그 날. 그저 여느날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고 시간은 정오 무렵이었다. 차창 밖은 한창 봄이었고 나는 조그만 모자가 달린 귀엽고 화사한 감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친구들을 만나서 새학기 강의에 대한 수다를 떨었고 얼굴이 하얘서 점퍼가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들었고 자목련은 흰목련보다 어쩐지 덜 예쁘다는 말들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더없이 평범한 하루였다. 그런데 버스에 자리가 나서 앉자마자부터였나, 갑자기 울컥하더니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거였다. 마침 손수건도 가진 게 없어 휴대용 화장지를 꺼내서 남들 모르게 눈물을 닦아내고 속으로 꺽꺽거리면서 나는 대체 이 눈물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계속 생각했었다. 성이 차지 않게 나와주었던 지난 학기의 학점이라든가, 평소 나를 서운하게 대했던 사람들, 엄마와의 사사로운 언쟁 등을 계속 떠올렸지만 이렇다할 대답은 나와주지 않았고 이러다가 탈수증으로 쓰러지겠다 싶을만큼 많은 눈물이 솟아오르고 또 솟아올랐다. 아무튼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그 지경이었고 뒤도 안 돌아보고 후다닥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는 길, 눈물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후련했고 배가 고팠고 막 눈물이 솟을 때보다 마음은 어쩐지 더 슬픈 것도 같았다.
나는 지금도 그 때 내가 왜 그렇게 울었는지 잘 모른다. 누군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정말? 아무튼 영화 속 츠네오를 보면서 그 날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냥 이해가 되었다. 그냥 이해가 되어버리는 상황. 자잘한 설명을 듣지 않고도 저절로, 마음으로 이해가 되어버리는 순간. 어깨를 토닥여주며 너도 이제서야 조금 어른이 되었구나. 그런 말을 건네고 싶은 순간. 그랬다.
츠네오는 옛 여자친구와 분명 더욱 성숙하고 멋진 연애를 할 것이다. 조제는 시장을 봐서 따듯한 된장국을 끓이고 부드러운 계란말이를 만들고 고소하게 생선을 구우며 스스로를 위한 밥상을 차릴 것이다. 집으로 가져가고 싶은 구름, 손 안에 가두고 싶은 물고기들, 하지만 그들이 바람 속에 물결 속에 미끄러져 가듯 사랑도 마찬가지다. 파란 하늘을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있는 그 순간, 찬 물 속에 손을 집어넣고 물고기의 미끈한 등을 살짝 스치는 그 순간, 주어진 그 시간을 열렬히 느끼면 되는 것이다. 아쉽지만, 아쉬워 하다가는 그 시간마저 영영 놓칠지도 모르니까.
그 모든 아쉬움을 떠나서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있다면, 그의 든든한 팔목을 꼬옥 붙잡고 있을 수만 있다면, 호랑이처럼 두려운 이 세상과 마주하는 일도 한 번 쯤 즐길만한 모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섭고 막막한 세상 앞에서 츠네오가 조제에게 홀로 서는 용기를, 조제가 츠네오에게 둘이 하는 사랑을 가르쳤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