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OTL] 장애인에게 ‘퇴소 협박’하는 복지시설?



시설 내 비리와 인권침해를 폭로한 생활인들을 ‘퇴소 조처’로 압박하는 석암재단

▣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인권 OTL-30개의 시선 ⑦]

“20년 만에 만난 딸에게 부담을 줄 순 없지 않습니까?”
얼마 전 이민수(59·가명)씨가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를 탈퇴했다. 5월21일 경기 김포시 석암베데스다요양원 앞마당 게시판에 ‘이사회 결정사항’이 붙은 직후였다. “거주 장애인들이 단체 탈퇴·농성 중단을 하지 않으면 퇴소 조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재단 쪽이 이씨의 딸에게 ‘아빠 문제’로 전화를 했고, 늘 씩씩하던 그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 ‘인간답게 살아보자’ 석암재단 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이 5월27일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아가 긴급구제를 요청했다. (사진/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20년 만에 연락된 딸에게 “아빠 데려가라”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을 둔 회사원이던 이씨가 사고를 당한 것은 1987년. 가족들과 유원지에 놀러갔다가 물놀이 중에 사고를 당했다. 수심이 얕은 곳에서 다이빙을 했다가 목뼈가 부러졌다. 응급처치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그렇게 장애인이 됐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그에게 친척들이 “애들 엄마 더 나이 들기 전에 빨리 이혼해줘라”고 조언했다. 병원비도 계속 들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져만 갔다.
결국 아내가 집에 없을 때 짐을 싸서 나왔다. 놀라서 우는 딸아이에게 “아버지 병원 갔다가 꽃 피면 온다”고 말했다. 이듬해 이혼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한 복지시설에 들어갔다. 군대식 생활이었다. 아침 6시 예배, 밤 9시 완전 소등. 꽂고 있던 소변 호스는 오염이 돼서 온몸에 세균이 침투해 끙끙 앓았다. 그 소식을 들은 형이 그를 400만원 주고 석암재단 산하 요양원으로 옮겼다. 1989년 12월이었다.
지난해 5월, 그는 대학생이 된 딸들을 만나게 됐다. 아내는 재혼을 했고 새 아빠가 잘해준다고 했다. 그렇게 행복만을 기원해주고 싶었는데, 재단 쪽이 난데없이 딸에게 “아빠를 데려가라”고 연락했다. 그는 열심히 활동하던 비대위를 떠나기로 했다. 그가 재단 비리를 알리는 활동을 더 이상 못하겠다고 했을 때, 속사정을 아는 동료들은 그를 잡지 못했다.
사회복지시설 운영 과정의 비리 혐의로 전·현직 이사장들이 유죄 선고를 받은 석암재단이 시설에 살고 있는 장애인들의 권리찾기 움직임을 여전히 방해하고 있어 또 물의를 빚고 있다.
6개의 사회복지시설을 운영 중인 석암재단의 이사장 일가는 최근 법원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서울남부지법은 지난 5월22일 석암재단 이부일 전 이사장에게 징역 3년을, 제복만 현 이사장(이 전 이사장의 사위)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 80시간을, 홍정환 시설장(이 전 이사장의 처남)과 김성숙 전 시설장에게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 80시간을 선고했다.
서울시 특별감사를 통해 석암재단의 비리와 인권침해가 세상에 공개된 지 1년, 시설 장애인들이 비대위를 만들어 재단 비리를 폭로하러 거리에 나선 지 6개월여 만이었다. 죄목은 자금 횡령, 국가보조금 전용, 사기 등이다. 몇 글자 안 되는 범죄 사실 속에는 수많은 장애인들의 한스러운 세월이 담겨 있다. 그동안 비대위 회원들은 거리에 나서 자신들이 당해온 인권침해를 알려왔다.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고 약을 먹이고 묶어놓고, 썩은 김치를 씻어서 형편없는 밥을 주고, 외출을 허락하지 않는 환경에서 20여 년을 살아왔다는 증언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한 시설 생활인은 “난 개나 돼지가 아니다. 난 사람이야”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법원 판결이 나기 하루 전 재단이 ‘이사회 결정사항’ 공고문을 붙이고 본인과 가족에게 ‘퇴소’ 협박까지 해오자 비대위 회원들은 5월27일 국가인권위를 찾았다. 이 자리에서 지체장애 1급인 홍경철(54·가명)씨는 “제복만 이사장이 나한테 와서 자꾸 집회 같은 데 나가면 퇴소시킨다고 협박했다. 누나한테도 전화해서 집에 보낸다고 했다”고 말했다. 동생이 시설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니 데려가라는 전화를 받은 누나는 놀라서 쓰러졌고 병원에 입원한 상태라고 했다. “500만원 주고 평생 있기로 했는데 이제 와서 이럴 수 있습니까.” 말을 제대로 못하는 그가 답답한 심경을 적어온 종이를 받아 사회자가 대신 읽어주는 동안 홍씨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듯 “어,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재단에서 온 전화 받고 쓰러진 누나



△ 시설에서는 말을 듣지 않으면 몸을 묶거나 때리고 심지어 항정신성의 약품을 먹이기도 했다.감사가 나올때면 직원들에게 암기 수칙을 전달해 비리를 감췄다. 잘 씹지 못하는 생활인들에게도 반찬을 대충 썰어 밥에 섞어줬을 뿐이다. (사진 위부터 /석암 비대위 제공)






비대위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전동휠체어를 뺏겼다는 장애인도 있었다. “원래 다른 사람 휠체어였는데 그 사람이 죽어서 내가 쓰게 됐어요. 한데 며칠 전에 갑자기 반납하라는 거예요. 내 몸 같은 건데….” 옆에 있던 여성 장애인이 흥분하며 “내 휠체어도 뺏어갈까봐 불안하다. 이게 없으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 비대위 회원은 “재단에서 한 번만 더 투쟁하면 집에 보내버린다고 합니다. 전 엄마가 무섭고 불안합니다”라고 적어와 사회자에게 건넸다.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의 염경욱 변호사는 “재단 쪽이 석암 비대위 회원들은 물론 가족들에게까지 연락해 퇴소를 강요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도록 국가인권위가 긴급 구제해주길 바라며 공고문을 붙인 차별행위에 대해 인권위에 진정한다”고 말했다. 현장에 참석한 진보신당 박영희 공동대표는 “여기 있는 입소자들은 매일 제복만 이사장과 눈을 마주치고 살아야 하는 생활인들이다. 한시간이라도 빨리 조처해 이들이 마음 편하게 잘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긴급 구제를 촉구했다.
비대위 회원들은 다음날인 5월28일 석암재단을 관리·감독하는 서울 양천구청을 찾아갔다. 이날은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을 나서면서 이를 막는 재단 쪽과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양천구청에 재단 이사장과 시설장의 해임 명령을 요구했다. 한데 구청에는 20명 남짓한 시위대의 두 배가 넘는 전경과 경찰이 배치돼 있었다. 결국 화장실에 가려고 건물에 들어가던 장애인이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다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저녁 때까지 대치 상태가 계속된 뒤에야 양천구청 이희 주민생활지원국장은 “이번주 안에 해임 명령을 공식적으로 내리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날 제복만 이사장은 <한겨레21>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판결은 아직 수긍할 수 없으며 비대위에 가입한 생활인은 일부일 뿐이다. 이들에게 순수한 생활인들이 이용당하고 피해당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입소 계약을 할 때 쓴 서약서대로 퇴소 조처는 있을 수도 있다”면서도 “본인이나 가족에게 ‘퇴소시키겠다’거나 ‘집에 데려가라’는 말은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또한 “전동휠체어는 원래 본인 것이 아니니까 반납하게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현재 법원은 제복만 이사장이 “다른 범죄 전력이 있는데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며 다른 피고인들보다 더 무거운 형을 선고한 상태다. 그를 포함한 피고인들은 항소를 했다. “최종 판결까지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양천구청은 5월30일, 석암재단에 ‘임원 해임 명령-시설장 교체 명령 사전 통지 및 의견진술 기회 부여’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내 제복만 이사장과 홍정환 시설장에 대해 해임·교체 명령을 내렸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석암재단에 직접 조사차 찾아가 이사장으로부터 ‘생활인들을 강제 퇴소시키지 않겠다는 내용의 확약서를 받아왔다”고 밝혔다.

비대위와 소통한 직원 해임까지

재단 쪽은 이쯤에서 물러날 생각이 있을까. 상황으로 보면 답은 ‘아니요’다. 이번에는 재단이 비대위 활동을 돕는 직원을 탄압하고 나섰다. 석암재단 쪽은 6월1일자로 비대위 회원들·외부 활동가들과 소통해온 노조지부장 박미순 생활교사를 해임했다. 비대위 쪽이 거세게 항의하자 현재는 ‘3개월 무급 정직’으로 징계 내용을 바꾼 상태다. 박미순 생활교사는 출근투쟁을 하고 있지만 재단 쪽은 “그가 시설에 들어오도록 두는 직원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재단 쪽이 김포시 아파트 개발의 노른자위가 된 시설 땅을 팔아 시세차익을 챙기려 한다는 의혹도 불거지고 있다. 그룹홈과 자립시설을 만들 테니 시설을 처분하는 데 동의하라고 장애인들을 설득하고 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집행위원장은 “그룹홈이나 자립 지원 등의 방향은 올바르지만, 비리 재단이 재판도 끝나기 전에 시설을 팔아 시세차익을 가로채려는 시도는 있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6월4일, 비 내리는 거리 위에는 어김없이 휠체어를 탄 비대위 회원들이 떴다. 이번에는 김포시청 앞이었다. “김포 시민에게 석암재단 산하 노인복지시설인 ‘김포 수산나의 집’의 비리까지 알리겠다”는 각오다. 이에 김포 수산나의 집 오인순 원장은 “치매, 중풍 등을 앓는 어르신들을 모시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으면 인권침해 지적은 사실과 다르다”고 <한겨레21>에 전해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지칠 만도 한데, 석암 비대위 김현수(33·뇌병변1급) 대표는 “요즘, 힘들어도 살아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들은 오늘도 거리 위에서 “인간답게,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처음처럼 외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인권 OTL] “난 네가 병원에서 한 일을 알고있다”



세무조사 나와 환자 진료정보 몽땅 가져가는 국세청, USB에 옮긴 파일과 복사한 종이 차트는 어디로?

▣ 글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인권OTL-30개의 시선⑥]


서울 강남에서 성형외과를 운영하고 있는 ㄱ씨는 올해 초 갑자기 들이닥친 세무서 직원들 때문에 깜짝 놀랐다. 대여섯 명의 세무서 직원들은 오자마자 최근 3년치 환자들의 종이 차트와 컴퓨터에 담긴 환자 사진 등 진료정보를 몽땅 내놓으라고 했다. 성형외과의 경우는 진료 과정에서 그림을 많이 그려야 하기 때문에 전산자료 말고도 종이 차트를 매번 만든다. 해당 차트에는 환자의 이름과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 가족력, 진료 및 처방, 수술 내용까지 모두 담겨 있다. 사진에는 환자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진료 내용도 간단하게 언급돼 있다. ㄱ씨는 코와 눈, 턱, 가슴 등 각종 성형수술을 받거나 진료 상담을 한 환자들의 은밀한 정보가 담긴 자료들이라 내주는 게 꺼림칙했다. 하지만 특별 세무조사를 나온 세무서 직원들의 위세에 눌려 요구하는 자료를 모두 줄 수밖에 없었다.



△ 10년 동안 보관하도록 돼 있는 환자 개인에 대한 진료정보는 작은 의원의 경우라도 수천 건에 달하고 병상이 몇 개 있는 병원급만 돼도 10만 건이 넘는다고 한다. 서울의 한 성형외과 직원이 환자 차트를 정리하고 있다.





성형외과 환자 사진 1만여 장 가져가

세무서 직원들이 자료 제출을 요구한 까닭은 건강보험 비급여 항목이 많은 성형외과의 특성상 매출을 누락한 부분은 없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세무서 직원들은 애초엔 40일가량 조사하면 된다며 1천 명이 훨씬 넘는 환자들의 차트와 사진 1만여 장 등 민감한 정보가 담긴 자료들을 모두 가져갔다. 디지털 정보는 아예 노트북 컴퓨터에 복사해갔다. 나중엔 30일을 연장하겠다고 해, 차트는 70일 가까이 병원을 떠나 세무서 직원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었다. ㄱ씨는 “가지고 간 차트를 복사했는지, 디지털 사진 정보를 세무조사 뒤 폐기했는지 알 수 없다”며 “검찰 같은 수사기관들은 압수수색영장이라도 들고 오지만 세무서 직원들은 그냥 와서 민감한 정보들을 다 가져갔다”고 말했다. 그는 “불쾌한 것도 불쾌한 것이지만, 환자들의 진료정보를 내줄 수밖에 없어 자괴감이 들었다”며 “일종의 행정편의주의적 조사 관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지방국세청이나 일선 세무서가 병·의원을 세무조사하면서 환자들의 진료정보에 무제한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환자와 관련한 모든 민감한 진료정보가 아무런 제지 없이 국가라는 권력 앞에 발가벗겨지고 있는 셈이다. 대학병원 등 대형 병원에서 세무공무원이 진료정보에 접근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중소형 병·의원에서는 대부분 환자의 진료정보를 일선 세무서에 제공하고 있다. 심지어 컴퓨터에 저장된 정보를 USB와 같은 휴대용 저장장치에 담아가거나 아예 하드디스크를 떼어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는 게 관련 업계의 증언이다. 담당 공무원이 이를 고의로 유출하거나 실수로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자칫 대형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병·의원에 환자 관리 전산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한 정보기술(IT) 업체 관계자는 “병원에서 세무조사를 이유로 ‘빨리 와서 세무서 직원에게 진료기록을 엑셀 파일로 모두 복사해주라’는 요청이 온다”며 “세무서 직원들이 분량 때문에 종이에 인쇄해 보기 힘드니까 USB에 복사한 뒤 사무실이나 집에 가서 본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한 달에 1∼2건은 꾸준히 (진료정보를 복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고 했다. 다른 IT 업체 관계자도 “많을 때는 한 달에 서너 건씩 그런 요청이 온다”며 “아예 진료정보 등이 담긴 하드디스크를 통째로 떼어갔다는 얘기도 들었으나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우리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프로그램 공급 업체들은 적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십만 명의 진료정보를 세무공무원에게 제공하다 보면 정보 유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한 IT 업체의 홍보 담당자는 “병원에 세무조사를 나오면 100% 프로그램 공급 업체에 연락이 오는데, 간혹 컴퓨터 본체를 가져가버리기도 한다”며 “국세청이나 병원은 ‘갑’이고 중간에 끼인 우리만 ‘을’이라 어쩔 수 없이 요구를 들어주지만, 나중에 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어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다”고 털어놨다.

물론 병·의원은 환자 진료정보의 민감성을 이유로 무더기 자료 제공에 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난해 세무조사를 받은 지방의 ㅇ병원이 그랬다. 세무공무원 세 명이 조사를 나와 처음엔 영수증과 수익집계표 등을 보더니 곧 “외부에서 분석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 전체를 백업해달라”고 요구했다. 이 병원은 내부 논의 끝에 이를 거절하는 대신 병원 안에서 필요한 부분만 모니터로 조회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병원의 전산팀장은 “세무조사를 위해 정보에 접근하는 건 인정할 수 있지만 우리로서는 보호해야 할 정보이기 때문에, 유출 우려도 있고 외부로 가져가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어 막았다”고 말했다.

“성병 치료 환자 차트까지 다 내줬다”

하지만 이는 극히 드문 사례일 뿐이다. 법인이 아닌 중소 규모 병·의원은 지방국세청이나 세무서에서 특별 세무조사를 나오는 경우 자료 제출 요구를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특별 세무조사를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소득 누락과 같은 탈루 혐의에 대한 단서를 잡고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비뇨기과를 6년째 운영하고 있는 전문의 이아무개씨도 세무서 직원이 요구하는 대로 환자 진료 자료를 전부 내어줬다. 지난 4월 들이닥친 세무소 직원들은 지난 한 해 동안의 매출 통계부터 시작해 환자 차트까지 모두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세무서 직원들은 무려 1만2천여 명의 진료정보가 담긴 차트를 이틀 동안 샅샅이 훑어보고 돌아갔다. 이씨는 “세무서 직원이 ‘소득세 신고를 제대로 하는지 조사차 나왔다’며 차트를 다 보여달라고 하는데, 내가 뭐 꼬불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쪽에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다 보여줬다”며 “나중에 다른 의사한테 들어보니 전부 보여줄 의무도 없고 일일이 답할 필요도 없다고 해 다음부터는 환자 차트를 보여주지 않을 작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환자 가운데 30∼40%가량이 성병 치료를 위해 온 이들이라서 자신의 진료정보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비뇨기과는 신경정신과, 산부인과 등과 함께 가장 민감한 진료정보를 다루는 분야다.
비록 상대가 국가 공무원일지라도 이처럼 환자의 진료정보를 조건 없이 내주는 관행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사들도 대체로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칫 세무조사에 비협조적인 것으로 비치면 더 강도 높은 조사를 받거나 보복을 당하는 일이 있을까봐 자료를 내줄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한다. 한 성형외과 개원의는 “의료법상 환자 정보를 노출할 수 없도록 돼 있고, (세무서 직원이 진료정보를 가져가는 건) 엄밀하게 볼 때 환자 정보 유출이 맞다”면서도 “강제가 아닌 협조요청이지만 안 내줄 수 없어 협조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세청은 책임회피, 복지부는 실태 몰라

현행 의료법 19조는 ‘의료인은 이 법이나 다른 법령에 특별히 규정된 경우 외에는 의료, 조산 또는 간호를 하면서 알게 된 다른 사람의 비밀을 누설하거나 발표하지 못한다’고 못박고 있다. 하지만 의료법은 물론 어떤 다른 법에도 환자의 진료정보를 세무공무원에게 공개할 수 있다는 조항은 없다.
반면 국세청 쪽은 현행 소득세법 등의 조항에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법 170조에는 ‘소득세에 관한 사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은 그 직무수행상 필요한 때에는 (납세의무자 등에게) 질문하거나 당해 장부·서류 기타 물건을 조사하거나 그 제출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그러면서도 국세청은 의사들이 세무서 직원의 요구를 강제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등 오락가락하는 설명을 하고 있다. 의료법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는 만큼 억지로 자료를 확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김국현 국세청 조사기획과 서기관은 “병·의원 쪽에서 환자의 비밀사항이나 공개하지 않아야 할 정보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면 (세무공무원이) 가져갈 수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진료정보 누출사고가 생기면 해당 병·의원의 의사가 일정 정도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가족부는 실태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데다 명확한 해법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한겨레21>이 이 문제에 대한 공식적인 견해를 물었을 때 복지부 쪽은 현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곽명섭 보건복지가족부 의료제도과 사무관은 “(취재가 시작된 뒤) 부서 회의 때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그런 세무조사 관행이) 의료법에 저촉될 소지가 있는 것으로 본다”면서도 “세무 현장과 조화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환자의 진료정보가 복사되거나 통째로 세무공무원이 들고 간 뒤 어떻게 관리되는지도 현재로선 투명하지 않다. 자료를 다시 복사하는지, 조사 기간 동안 보안을 지키는지, 조사가 끝난 뒤 정확하게 폐기하는지 등에 대한 엄정한 관리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 시내 일선 세무서의 한 관리팀장은 “탈세 제보가 있거나 심층 조사를 할 경우에 (진료정보를 가져다 보는 일을) 하고 있다”며 “전부 받아와도 필요한 부분만 볼 뿐 내부적으로 철저히 관리를 하지만, 이에 대한 명문화된 규정은 없다”고 말했다. 피부과 개업의 ㅎ씨는 “예전에는 세무조사를 나오면 차트를 전부 복사해갔는데 그 차트들이 어떻게 폐기됐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고 우려했다.

개인식별 정보 제외 가능, 문제는 의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이은우 변호사는 “국세청이 병·의원의 환자 정보에 접근하는 것은 일반 점포의 매출정보를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며 “징세 편의를 위해 개인 정보를 과다하게 들여다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의사들도 자신이 치료를 담당하는 환자의 비밀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국세청이 세원 포착을 이유로 상세한 진료정보를 다 가져가는 걸 막지 못하는 것은 의료인으로서 환자 보호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더 근본적으로는 환자의 진료정보를 국세청 직원처럼 의사가 아닌 제3자가 보는 게 과연 타당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환자들은 자신과 의사 사이의 상담과 치료 내용을 의사만이 알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병원에 가기 때문이다. 오병일 한겨레21인권위원(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은 “의료정보의 민감성을 봤을 때 세무공무원의 접근 자체도 허용이 돼서는 안 될 것”이라며 “필요하지 않은 정보까지 제3자가 접근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진료정보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한 업체의 전문가는 “프로그램에서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부분은 제외하고 출력할 수도 있고, 개인식별 정보만 남긴 채 진료정보는 빼고 출력할 수도 있는 만큼 세무서가 필요한 정보만 가져가면 될 것”이라며 현재 상황에서도 세무당국의 의지만 있으면 진료정보 유출 우려는 피해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
세무당국에 의한 의료정보 유출사고는 아직 알려진 경우가 없을 뿐 일어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당국의 세무조사 관행이 바뀌지 않는 한 은밀한 내 진료정보가 언제 제3자에게 노출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것이 세무공무원이 됐든, 나를 아는 누군가가 됐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인권 OTL] 인간답게 죽고싶다



골방에서 거친 음식을 삼키며 시한부 삶을 살아내는 빈곤층 말기암 환자들과의 대화
▣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 영상 박수진 취재영상팀 피디


[인권 OTL-30개의 시선 ⑤]

말기암 선고. 생의 모든 게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남은 시한부 인생. 존엄하고 소중한 한 생명을 어떻게 마무리지을 것인가.
그러나 빈곤층 말기암 환자들에게 삶의 반추는 사치일 뿐이다. 지저분하고 컴컴한 골방에서, 홀로, 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병들고 지친 가족과 함께, 거친 음식으로 연명하며, 그들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만큼이나 쓰디쓴 시한부 삶을 살아내야 하고, 누추한 죽음을 쓸쓸히 기다려야 한다. 그들에게 생의 존엄은 무엇이고, 존엄한 죽음은 무엇인가.
이 기사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빈곤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시한부 삶들과 나눈 대화이다.
시한부, 빈곤층 말기암 환자들과의 대화


종일 싱크대 옆에 누워있는 이혜용씨
5월19일 오후 1시 경기 일산시 덕양구 고양동. 지은 지 20년이 넘어 붉은 벽돌이 거뭇거뭇해진 낡은 연립주택 2층. 한낮이지만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데다 불을 켜지 않아 집 안은 컴컴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대소변 냄새가 섞여 있는 듯한 지린내가 훅 끼쳤다. 거실 겸 부엌 싱크대 바로 옆에 이혜용(79)씨가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뼈 위에 얇은 거죽을 걸쳐놓은 듯 살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핏기 하나 없는 샛노란 얼굴. 푹 파인 눈두덩이 주변은 푸르스름하다. 이씨는 때때로 비썩 말라 부서질 것 같은 팔을 뻗어 두유를 마셨다. 석 달에 20kg씩 지원되는 쌀로 버티기 위해서 점심 대신 두유를 먹는다. 그나마도 아까워 조금씩 몇 시간을 두고 마신다.
이씨는 지난해 10월 직장암을 선고받았다. 8년 전 비암으로 수술을 크게 받은 뒤, 두 번째 암 선고다. 직장에서 생긴 암세포는 몸을 타고 뼈로 옮아갔는지, 석 달 전 심하게 열이 난 뒤로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하루 24시간을 가만히 누워 있는다. 스스로 몸을 뒤척일 수도 없다. 암이 얼마나 어떻게 번졌는지, 병원에 가지 않아서 정확히 상태를 알지도 못한다. 덕양구 보건소 ‘방문간호사업’을 통해 이씨를 방문한 김아무개 일산병원 전문의(가정의학)는 “검사기구로 정확한 진단을 한 건 아니지만, 발이 붓는 등 상태로 보아 말기인 것 같다”며 “노인이어서 지금은 통증에 무디지만 두 달 이내에 통증이 극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를 돌보는 건 아내 김춘자(74)씨다. 관절염, 허리 디스크, 저혈압 등 김씨가 앓고 있는 만성질환도 여러 가지다. 김씨 역시 ‘돌봄’과 ‘부양’을 받아야 하는 노인이지만, 그는 꼼짝 못하는 남편을 돌봐야 한다. 이 노부부의 하루는 길다. “밤에 잠이 안 와서 밤 12시~새벽 1시에 겨우 눈을 붙여. 아침 6시면 눈이 떠져. 그러면 뭘 해. 가만히 계속 있어. 1시간쯤 있으면 할아버지가 내 발을 막 잡고 흔들어. 기저귀 갈아달라고. 그러면 내가 기저귀를 갈아주지.” 김씨가 하는 일은 하루 다섯 번 남편인 이씨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하루 두 번 밥을 챙기는 일이다. 밥은 하루 두 끼, 기저귀는 다섯 번만 간다. 10개들이 6천원인 기저귀 값만 한 달에 9만원쯤 된다. 노령연금 13만7천원, 기초생활급여 31만원, 장애인 아들에게 나오는 돈 15만원이 생활비의 전부인 이들에게 방세 30만원을 빼고 나면 그나마도 남는 돈이 없다. 두 부부가 싱크대 옆에 자리한 것도 밥을 하고 밥을 먹이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 움직이는 거리를 가장 짧게 하기 위해서다.
나머지 시간에는 김씨도 남편 이씨 옆에 모로 누웠다, 바로 누웠다, 텔레비전을 켰다, 껐다를 반복할 뿐이다.

몸 전체에 마약성 패치 붙인 정광명씨
2003년 직장암에서 시작해 지금은 척추·폐 등 온몸에 암세포가 번져 말기 상태에 이른 정광명(49·가명)씨. 그의 세상은 서울 답십리1동 방 두 개짜리 반지하 주택의 큰방 침대 위가 전부다. 기자를 처음 보자마자 그는 “내가 얼마나 아픈지 아냐”며 통증에 대해 설명했다. “일단 배 쪽은 계속해서 전기고문을 하는 것처럼 찌릿찌릿한 고통이 24시간 계속되고요. 왼쪽 다리는 누가 칼로 다리를 째는 것 같고, 오른쪽 다리는 쇳덩이로 짓이기는 것 같아요. 말로 다 못해. 말로는….” 정씨는 말하면서 웃옷을 들어올려 그가 붙이는 마약성 패치를 보여줬다. 시간당 50mg으로 진통제 중 강도가 가장 센 약이다. 몸 전체에 붙어 있는 마약 진통제만 총 20개다.
정씨의 또 다른 고통은 ‘밤’이다. “나는 잠도 맘대로 못 자요. 너무 아프니까….” 밤새 잠 못 이루는 정씨는 크게 앓는 소리를 내지도 못한다. 밤이 되면 정씨 침대 옆에는 낮에 일하러 갔다가 돌아온 아내 류영미(45·가명)씨와 중학교 2학년 둘째딸, 원래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지만 왼쪽 손발이 작아 발달이 늦된 셋째딸이 잠을 자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옆 작은방에는 올해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고등학교 3학년 큰딸이 자고 있다. 정씨는 “밤에 캄캄해지면 그래도 옆에서 자고 있는 아이들과 아내를 보고 꼭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움직이지 못하지만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켜 앉아요. 내가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만 같거든요. 그래서 혼자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요.”
표막달레나 모현호스피스센터 책임수녀는 정씨의 상태를 전해듣고 “척추나 신경으로 암세포가 번져서 패치를 아무리 붙여도 통증이 줄어들지 않는 것 같다. 그럴 땐 의료진이 주사 등을 투약하고 다른 방법들을 써서 통증을 전문적으로 조절해야 하는데, 혼자 악으로 버티고 있으면 환자의 마음이 너무나 지쳐버린다”고 걱정했다. 수면장애도 말기 암환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장애로 정맥주사나 적절한 약 처방이 필요하다. 또 밤사이 죽으리라는 두려움과 악몽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 환자를 안심시키고 격려하는 말을 해주거나 정신과 의사가 상담을 해주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정씨는 ‘가족이 있다’는 위안과 그것 때문에 살고 싶다는 ‘의지’ 외에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태다.
정씨는 말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가서 1년쯤 지내다 보면 병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들어요. 그런데 어쩔 수 없죠. 여건이 안 되니까….”



△ 24시간 누워 있어야 하는 정광명씨는 손을 뻗을 수 있는 침대 바로 옆에 진통제, 휴지, 약 등 필요한 물건을 두고 있다.





간호하던 딸이 우울증 걸린 홍진녀씨
“간장 좀 사와라, 경애야.”
대구에 사는 홍진녀(52·가명)씨가 숨을 몰아쉬며 딸에게 말했다. 홍씨는 요즘 매일같이 딸에게 하루 한 가지씩 심부름을 시키면서, 딸이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연습시킨다. 그는 2000년 비강암 진단을 받은 뒤 1년 정도 항암치료를 받고 식당 보조일, 파출부 일을 시작했다. 남편은 심근경색으로 10년 전 세상을 떠났다. 열심히 살아보려던 2004년 여름, 홍씨는 다시 숨이 찼다. 병원에 갔더니 암세포가 폐로 전이됐다고 했다. 폐암 말기로 집에서 마약성 진통제로 통증 조절만 하고 있는 홍씨는 매일 호흡곤란, 팔다리를 찢는 것 같은 온몸의 통증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그러나 지금 홍씨의 머릿속에는 고통보다 더 큰 걱정이 가득하다. 둘째딸 김경애(26·가명)씨 걱정이다. 홍씨에게는 딸이 셋 있다. 큰딸은 이혼한 뒤 작은 중소기업에 다니면서 근근이 살고 있다. 막내딸은 가출 뒤 연락이 안 된다. 홍씨의 곁을 떠나지 않고 홍씨를 돌봐준 건 둘째딸 경애씨다. “밥 차려주고, 몸 씻겨주고, 집안일 하고.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늘 나를 돌봐줬어.” 홍씨에게 경애씨는 착한 딸이었지만, 경애씨는 점차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을 보이기 시작됐다. 밖으로 나가는 일도 적어졌다. “내가 재발하고 1년쯤 지났을까. 집에 누가 찾아오면 경애가 방으로 콕 들어가는 거야. 아무리 불러도 밖으로 안 나와. 그때부터 며칠씩 문을 잠그고 있어. 나중에 물으니 거의 1년을 집 밖에 나가지 않고 방에만 있었다나봐. 내가 내 아픔에 급급해서 딸이 어떤 마음인지 전혀 몰랐던 거야.”
가정방문을 하는 보건소 간호사의 연결로 정신과 상담을 받은 지 1년. 경애씨는 이제 조금씩 혼자서 나가는 연습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집 밖엔 잘 나가지 않고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내가 죽으면 우리 경애는 어떡해. 저걸 생각하면 내가 못 죽어. 내가 어떻게 죽어.”
마약성 진통제 패치를 몇 개씩 붙여도 끊이지 않는 통증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홍씨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노인 인구와 저소득층이 많은 동네
경기 일산시 덕양구 대덕동에서 지난해 12월까지 1년6개월 동안 방문간호사업을 진행한 소행연 간호사는 “유독 노인 인구가 많은 이 지역은 마을 전체가 ‘놀랄 노자’”라고 말했다. 대덕동은 노인 인구가 12%(인구 4500명 중 550명)로 전체 평균 노인 인구 비율(9.1%)을 훨씬 웃돈다. 소 간호사는 이 지역에 저소득층이 많다고도 덧붙였다.
아들 둘, 딸 한 명을 둔 아주머니가 식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두 아들 중 한 명은 집을 나갔고, 다른 한 명은 파산 선고를 받았다. 돌봐줄 사람이 없어 마을 이장이 경기 의정부시에서 결혼해 살고 있는 딸에게 아주머니를 보냈지만, 한 달 뒤 딸은 “도저히 돌볼 수가 없다”며 어머니를 다시 대덕동으로 돌려보냈다. 동네 사람들이 가끔 들여다보는 것 말고는 홀로 병마와 싸우던 아주머니는 지난 2월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이 아주머니는 실질적으로 자신을 부양하지 않는 딸이 부양가족으로 등록돼 있고 집이 있다는 이유로 차상위계층으로 등록돼 기초생활급여 대상자도 되지 못했다.
같은 마을에 사는 한 부부는 재혼한 지 5년 만에 부인이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결혼해서 집을 샀는데, 3년 동안 치료비를 대느라 집을 팔았다. 고물상을 하던 남편은 아내가 죽은 뒤 알코올중독으로 매일같이 술만 마시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또 다른 노부부도 할아버지가 암에 걸려서 숨지자, 할머니가 자살을 하기도 했다.


이경식 가톨릭의대 명예교수(종양내과·완화의료학)는 올해 2월부터 돈이 없거나 돌봐줄 가족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않고 생을 포기한 채 집에만 있는 사람들에게 가정방문 호스피스 사업을 하는 ‘삼성산 호스피스 봉사회’를 설립했다. 그는 빈곤층 시한부 삶의 현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병원에 올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 방치된 사람들이 여전히 너무 많다. 지금의 보험 수가로는 이들을 병원으로 끌어낼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없거나, 돌봐줄 가족이 없다. 가족이 있는 경우도 암환자가 있으면 나머지 가족은 미성년자가 아닌 다음에야 모두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 그러니 추가로 간병인이 필요하고, 그것도 다 돈이다. 이들을 포섭할 수 있는 ‘제도’는 현재로선 없다. ‘자원봉사’, 여러 단체나 재단의 ‘지원’밖에 대안이 없는 실정이다.”



△ ‘삼성산 호스피스 봉사회’는 이웃의 신고·알림 등을 받고 돌봐줄 가족이 없거나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는 말기 암환자들을 위해 ‘호스피스 봉사’를 하고 있다. 문의 02-887-2311.




말기암 환자들은 수술, 약물요법 등 적극적인 항암치료가 더 이상 효과가 없다고 판단되는 환자다. 기대되는 수명은 6개월 이하다. 이들은 회복 가능성은 없지만,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기 때문에 통증을 조절해주는 ‘통증완화 치료’가 필요하다. 통증은 암의 종류마다 다르지만 말기에 다다르면 대체로 호흡곤란, 통증으로 인한 수면장애, 방광 팽만이나 변비, 마약성 진통제 사용으로 인한 입마름증, 구토, 복수, 딸꾹질, 발열, 부종, 욕창 등 다종다양의 통증이 온몸을 공격한다. 통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울증과 이로 인한 자살 시도 등 정신적으로 겪는 불안도 심각하다.

‘버킷 리스트’엔 생계·가족 걱정 뿐

말기암 환자들은 이 모든 통증을 적절하게 관리받으면서 죽음을 잘 준비할 권리가 있다. 존엄하게 죽을 권리는 인간에게 부여된 마지막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소득층 암환자들은 통증을 세심하게 돌보면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기는커녕, 생계에 대한 두려움, 남겨진 가족의 생활에 대한 걱정까지 떠안고 얼마 남지 않은 삶을 홀로 숨죽이며 보내야 한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버킷 리스트>에서 돈 많은 시한부 환자 에드워드는 마지막 남은 삶을 뜻깊게 보내기 위해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을 만들어 실천하는 여행을 떠난다. 카레이싱, 스카이다이빙,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 문신하기 등 유쾌한 목록들을 하나하나 실천한다. 그러나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만나본 시한부 환자들의 버킷 리스트를 물었다.
“집 전셋값 좀 마련됐으면 좋겠어. 할망이 돈 걱정 안 하고 아프지 않게 죽었으면 좋겠고.”(이혜용씨)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고 싶어.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없나) 간혹 집 앞에 산책이나 나가면 되지.”(송정란씨)
“누가 나 죽을 때 장례비만 좀 내줬으면 좋겠어. 우리 딸 돈도 없는데 나 초상도 못 치르면 어떡하나, 그게 걱정이야.”(홍진녀씨)
“내가 다시 건강해지는 거지. 둘째딸이 개그맨 기질이 있는 것 같아서 마술을 가르쳐주고 싶었는데 결국 못 가르쳐줬어.”(정광명씨)
‘가난’과 ‘죽음’을 동시에 떠안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가족에 대한 미안함, 생계에 대한 걱정을 통증과 함께 머리에 이고 집 안에서 고통의 한숨을 내뱉었다.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침해받은 권리’를 찾기 위해 거리로 나오는 시대지만, 거리로 나올 힘조차 없는 이들은 별달리 바라는 것도 없이 조용히 집 안에 누워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 우리에겐 잘 보이지 않지만, 그렇게 생명의 숨을 쉬고 있는 이들이 있다.


 



국내 호스피스 기관의 현실



의료보험만으론 턱도 없군요

말기 암환자를 위한 국내 호스피스 기관은 2007년 현재 총 78개다. 그러나 이들 호스피스 기관을 이용하는 데는 돈이 필요하다. 국내에서 가장 시설이 잘돼 있다는 서울 강남성모병원의 경우 호스피스 병동에는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6인실이 없다. 6인실은 환자를 제대로 돌볼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1인실은 하루 병실료가 25만4천원, 4인실은 하루 17만2천원, 5인실은 하루 5만7천원이다. 의료보험에서 6인실 기준으로 지급되는 2만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환자 부담이다. 의료급여 대상자 여부, 기초생활급여 대상자 여부도 따지지 않는다. 각 병원 사회사업과에서 환자들의 상황을 점검해 재단 등과 연계해 병원비가 지원되기도 하지만, 지원 여부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환자들이 마음놓고 이용할 수 없는 형편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호스피스 병동의 경우 전체 병실의 절반 이상이 1인실이고, 모두 의료보험이 적용된다.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유방암이 피부·폐 등으로 전이된 송정란(45·가명)씨는 얼마 전 폐에 물이 차 숨이 넘어가기 직전 한 호스피스 병동 4인실에 입원했다. 각종 진료비를 포함해 2주 입원했고 113만원이 나왔다. 손씨는 “중·고생 딸이 있다”며 “언니가 도와줘서 가능했지만, 계속 그런 치료를 받기란 사실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병원 사회사업과에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지만, 우선은 병원비를 모두 지불한 상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완화치료를 받지 않고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저소득층 말기 암환자를 대상으로 각 지역 보건소가 ‘맞춤형 방문보건사업’을 실시하기도 하지만, 실질적 도움을 주기에는 역부족이다. 말기 암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양성 과정을 이수하는 등 전문성을 갖춘 간호사도 적고, 간호사 1명이 담당해야 하는 가구 수도 평균 245가구로 너무 많다. 이 때문에 방문간호사들이 많게는 한 달에 한 번, 적게는 두세 달에 한 번 환자를 방문할 수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인권 OTL] 언니, 나이 든 동성애자 처음 봐요



10대부터 50대 레즈비언 50여명이 연대한 2박3일, ‘육색찬란 캠프’를 다녀와서

▣ 한채윤 한겨레21인권위원·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대표

[인권 OTL-30개의 시선④]

지난 5월10~12일 10대에서 60대까지 여섯 세대에 걸친 레즈비언들이 함께 만나 소통해 찬란한 역사를 만들어나가자는 뜻에서 ‘육색찬란’이라고 이름 붙인 한국 최초의 캠프가 강원도에서 열렸다. 아쉽게도 60대 참가자는 없었지만 50대까지의 다양한 세대 총 50여 명의 레즈비언(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 레즈비언까지 포함해)이 모였다. 특히 ‘육색찬란 캠프’는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늘 배제됐던 10대들이 다른 세대들과 함께 참여한 캠프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 ‘육색찬란 캠프’에 참여한 이들은 단지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이라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연령차나 지역차 등 모든 차이를 뛰어넘었다. 세대 간 연대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었던 2박3일이었다. 사진은 2007년 ‘퀴어문화축제’의 한 모습. (사진/ 한겨레 박종식 기자)





나이차 극복하고 놀 수 있을까 했더니…

지금까지 동성애자 커뮤니티에서 10대와 비(非)10대는 서로 등을 돌린 듯 소원하게 지내왔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청소년보호법이 제정된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청소년보호법은 (국가보안법보다 더한 악법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듯이) 청소년들을 어떤 식으로든 ‘성적’인 것과 연결시키면 범죄라는 식이었고, 사이버 공간의 동성애자 모임들은 애매하게 법에 걸려 모임 해체를 겪을까봐 아예 청소년 가입을 금지해 모임의 ‘적법성’을 보장받았다. 물론 동성애자 인권운동 단체에서는 청소년 동성애자들을 위한 여름학교를 여는 등 연결고리를 만드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친목 기반의 커뮤니티는 성인 모임과 청소년 모임으로 완전히 이분화됐다.
2002년에 한국 최초의 동성애자 웹사이트인 엑스존(exzone.com)이 청소년 유해 사이트로 지목되면서 이에 항의하는 운동이 조직됐고, 이를 계기로 청소년보호법의 동성애자 차별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됐다. 청소년보호법의 독소조항이 2004년 개정되기는 했지만, 이미 시작된 ‘분리’를 멈추게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10대와 비10대들은 서로에 대한 소식을 마치 남의 동네 이야기를 풍문으로 듣는 정도로 계속 멀어져갔다.
2007년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에서는 10대 성적 소수자에 대한 실태조사를 기획하면서 많은 10대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이때 만난 한 10대 청소년 동성애자의 말을 빌리자면 “스물두 살 넘은 레즈비언은 없는 줄 알았어요”라고 할 정도였다. 바로 이런 말들이 육색찬란을 기획한 계기였다.
청소년기의 고민을 혼란과 방황, 혹은 착각으로만 치부해버리는 사회에서 10대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사랑이나 삶에 확신을 갖기 어렵다. “나이 들어서도 사랑하는 사람이랑 살 수 있나요?”라고 묻는 10대의 고민을 함께 나눌 자리가 필요했다. 나이 든 동성애자를 만나보지 못했기에 나이 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과 다른 삶을 상상하고 과거의 나를 해석하며 미래의 나를 기획하는 것은 나의 일상 테두리 밖의 이들과 만날 때 가능하다. 육색찬란 캠프는 10대들에게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좀더 나이 든 레즈비언들’의 모습을 눈앞에 보여주자는 소박한 목표로 시작됐다.

뒤풀이는 ‘커밍아웃 가이드북’ 후원 파티

그러나 과연 10대부터 50대까지 별 마찰 없이 소통할 수 있을지, 혹여 캠프에서 도리어 갈등이 깊어지면 어떡하나 걱정도 없진 않았다. 단지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이라는 공통점만으로 연령차나 지역차, 그리고 각기 가치관의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기우였다. 첫날 참가자들의 이름과 별자리와 취미 등을 조사하는 빙고게임에서부터 연애와 섹스, 커밍아웃과 아우팅, 종교, 취업과 독립 등 여러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수다방, 배정된 방별로 준비하는 장기자랑까지 모든 프로그램 진행에서 참가자들은 서로의 ‘나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듯 함께 어울렸다.
이성애 사회가 흔히 상상하는 그런 세대 차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육색찬란에서의 소통은 단순한 세대차이 극복 프로젝트가 아니라, 다른 듯하지만 사실은 같은 억압을 겪고 있는 동질적 존재로서 서로를 발견하는 소통이었다. 그 소통을 통해 진심으로 세대 간 연대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었다.
캠프가 끝나고 10대들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아닌 어른들과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정신적 위안을 얻었다며 감사해했고, 결혼 압력과 독립에의 욕구 사이에서 고민에 휩싸인 20대는 이미 그 고비를 넘긴 30대에게 갈등 극복의 요령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고 평가했다. 30대 이상은 “10대들이 마냥 어리기만 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사려 깊어서 속으로 좀 놀랐어”라며 그동안 무심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이제는 자신이 가진 자원을 10대들을 위해 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고도 했다.
첫 번째 캠프라 진행상의 부족함은 있었지만, 황금 연휴였던 2박3일을 기꺼이 캠프에 쏟았던 참가자들에게 세대 간의 교류가 얼마나 절실한지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 덕에 캠프의 뒤풀이는 흔한 술자리가 아니라 10대 동성애자 친구들이 직접 마련한 ‘청소년을 위한 커밍아웃 가이드북 제작을 위한 후원 파티’에 참여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제 이렇게 한 걸음씩 시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인권 OTL] 내가 10대 레즈비언이다, 어쩔래?




서울의 한 공원과 ‘라틴’ 봄소풍에서 만난 청소년들, 햇빛 아래 드러낸 그들의 무지갯빛 꿈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인권 OTL-30개의 시선 ④]


서울에도 레즈비언들의 ‘레스보스’(각주1)가 있다. 그것도 10대들의 레스보스다.
서울의 도심에 이른바 ‘레즈(비언) 공원’으로 불리는 한 공원이 섬처럼 떠 있다(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어 공원의 이름과 위치는 밝히지 않는다). 이성애 사회에서 외로운 섬으로 고립됐던 10대 레즈비언들은 그곳에서 자유의 공기를 마시고 친구를 만나고 비로소 ‘자신’이 된다. 그러나 그곳은 즐겁고도 외로운 섬이다.




△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여러분 덕분에 ‘일차’ 잘 마쳤습니다”

봄날의 공원에 소녀들이 앉아 있었다. 검은색 정장을 빼입은 톰보이,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어울려 얘기를 나눈다. 여기에 운동복 차림에 축구공을 든 여성이 다가가 인사를 나눈다. 이렇게 때로는 서너 명, 이따금 10여 명,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서 10대 여성들이 일요일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한껏 정성을 다한 그들의 차림에서 오늘의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눈에 드러난다. 5월 어느날 오후 4시, 공원의 중앙에 10여 명의 소녀들이 줄지어 늘어서 인사를 했다. “여러분 덕분에 ‘일차’ 잘 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 흔히 ‘일차’로 줄여 부르는 ‘일일찻집’을 주최한 팀의 인사다. 일일찻집은 이 공원을 중심으로 모이는 10대 여성 성소수자들이 스스로 주최자가 되고 다 함께 관객이 되는 문화다. 인사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춤 연습을 계속하는 대여섯 명 소녀들의 손목에는 스탬프가 찍혀 있다. 공원 주변의 호프집을 빌려서 열리는 일일찻집의 입장권을 대신하는 손도장이다. 그들은 인기그룹 빅뱅의 춤을 연습하며 말했다. “우리도 7월에 일차를 (주최)하거든요. 연습하는 거예요.” 그렇게 그들은 문화 기획자와 공연 관객의 위치를 넘나들며 그들만의 ‘일차’ 문화를 즐긴다.
외로운 섬에 반가운 손님도 있었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이하 센터) 활동가들이 10대의 손에 소식지 ‘퀴어뱅’을 건넸다. 소식지에는 성소수자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만화도 있고 안전한 성관계를 위한 지식과 검정고시 학원 정보도 담겨 있다. 센터는 지난 4월부터 늘푸른여성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아서 10대 성소수자 여성과 사회적 서비스를 연결하는 이동상담 프로그램 ‘레인보우 브릿지’(무지개 다리)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날도 센터의 활동가들이 공원의 한켠에 상담소를 차리자 10대들이 하나둘 다가와 고민을 나눴다. 지난해 이들은 ‘레인보우 브릿지’의 사전조사 활동인 ‘물보라 작전’을 통해서 성소수자 여성들 사이에 무지개 다리를 놓았다. 물보라 작전은 10대 성소수자 여성들의 생활실태 조사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어느새 안면을 익힌 공원의 10대 몇 명은 반갑게 다가와 활동가들과 인사를 나눴다.
공원의 또 다른 곳에선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활동가들이 ‘학교 종이 띵동’이란 피켓을 들고 ‘10대 이반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실태조사’를 벌이고 있다. 레즈비언 ‘고딩어’ 사전 첫 장엔 ‘띵동’이 나온다. 용례는 이렇다. “너네 학교 종은 어떻게 울려?” 서로를 레즈비언인지 알아보는 질문이다. 만약에 “띵동”이라고 대답했다면 당신은 동성애자. 동성애자를 뜻하는 은어인 ‘이반’조차 이미 이성애자들이 알아버린 상황에서 10대 성소수자들이 새롭게 개발한 은어가 ‘띵’이다. 그래서 그들은 ‘레즈비언’이나 ‘이반’보다는 ‘띵’을 애용한다.

인천·강원·부산… 전국에서 모인 ‘띵’들

레인보우 브릿지 10대 활동가 유성(18·가명)이는 이 공원 출신 띵이다. 그의 첫 번째 공원 나들이는 중학교 2학년 때인 2003년. 그는 학교에서 이미 띵들을 만나고 있었지만 공원에서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띵들을 보았다. 그리하여 존재 확인. “내가 레즈비언인지 확실하게 몰랐고, 우리 학교에만 그런 애들이 있는 것이 아닐까 했는데 거기서 비로소 맞구나 했다.” 일차를 가서 신세계가 열리는 희열도 맛봤다. 그는 “학교에선 이반으로 찍혔고 공부는 이미 늦었는데, 일차를 직접 준비하면서 자신감이 생기고 즐거웠다”고 돌이켰다. 일차에서 그가 맡은 일은 ‘남웨’. 일차팀은 사장, 부사장, 사회자, 남성웨이터, 여성웨이터 등을 맡은 10~20명으로 구성된다. 10대들이 스스로 회비를 모아서 종자돈을 만들고 호프집을 빌린다. 퍼포먼스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주로 가수들의 춤을 차용한다. 공연 연습엔 짧게는 한두 달, 길게는 1년씩 걸린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일차에선 댄스타임, 공개고백 등의 프로그램을 두어서 띵들 사이의 만남도 주선한다. 유성이는 “흥행이 성공하면 1천 명까지 손님이 몰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 레즈비언 10대의 ‘깜짝’ 등장은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활력소가 됐다. 올바른 차별금지법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는 모습.




이러한 10대에 의한, 10대를 위한 일차 문화는 2000년대 초반부터 존재했다. 소문난 일차엔 경향 각지의 띵들이 몰려온다. 유성이의 친구 리인(가명)이는 “인천에선 매주 오고, 강원도나 부산에서도 매달 왔다”고 전했다. 그곳은 대한민국 10대 레즈비언의 해방구인 것이다.
공원의 10대에겐 ‘또 하나의 가족’이 있다. 진짜 가족에게서는 이해받지 못하는 성정체성을 가진 아이들이 서로를 엄마, 아빠, 아들, 딸로 부르며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것이다. 리인이는 “친가족에게 느끼지 못했던 면을 선배나 친구들 속에서 찾으면서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자신들이 배제당한 기성의 가족문화를 반복하는 한계도 있지만, 서로를 그만큼 ‘끔찍하게’ 아낀다는 방증이다. 이렇게 혈연처럼 단단히 엮인 공원의 내부 지지 체계는 가출 뒤에도 기대는 언덕이다. 지난해 166명을 대상으로 한 ‘물보라 작전’ 조사에서 가출한 이후에 누구와 살았는지 묻는 질문에 52.6%가 이반 친구나 선후배와 지냈다고 응답했다.
이 공원 바깥에도 자신을 드러낸 10대 성소수자들이 있다. 5월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 나무 그늘 아래서 이들의 ‘전국구 모임’이 열렸다.


인권운동 커뮤니티 활동에 신난 아이들


대전에서 올라온 중학생 지민(이하 가명), 대구에서 올라온 고고생 진기, 강원도에서 올라온 대학교 1학년 은희 등 청소년 20여 명이 모여 앉았다. 봄소풍을 나온 청소년성소수자커뮤니티 ‘라틴’(‘레인보우 틴에이저’의 줄임말·cafe.daum.net/Rateen)의 회원들이다. 이들 가운데 경기 분당에 사는 중학교 3학년 여학생 서진(15)이는 서울의 한강도, 이반(동성애자)도 이날 처음 보았다. 각별한 첫날을 맞은 서진이는 게임을 하다가 벌칙에 걸려 노래를 불렀다. “반갑습니다~ 동포 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혼자서 서울에 와봤다는 서진이는 “어떤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서서 버스를 타고 여기에 왔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중학교에 들어와 자신이 여성을 좋아한단 생각에 힘들었던 기억을 토해냈다. 얼마 전 두 살 위의 언니에게 커밍아웃을 했다가 ‘하나님의 섭리를 역행하는 죄인’이란 소리를 들었던 아픈 기억, 정말로 다니고 싶었던 교회에 나갔을 때 전도사가 ‘가정은 올바른 남녀의 결합’이란 얘기를 하자 남들은 웃는데 혼자서 털썩 주저앉아 말없이 울었던 기억을 곱씹었다. 그래도 비로소 ‘동포’를 만난 소녀의 얼굴엔 웃음이 번졌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맑음(17)이는 중학교 시절에 공원에 몇 번 나갔지만 공원 문화에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 정체성에 대한 탐색을 묻어두어야 하나, 고민하던 즈음에 라틴을 만났다.
지난해 1월 라틴을 만든 진기(18)는 대구발 서울행 고속버스 첫차를 벌써 여러 번 탔다. 매달 열리는 라틴의 정기모임을 위해서 새벽 6시20분 첫차를 탔다. 진기는 “지방에선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접할 기회가 적다”며 “그래서 자기 안의 호모포비아도 크고 탈반도 많이 한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답답했던 진기는 스스로 성소수자의 인권을 얘기하는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현재 라틴의 회원 수는 560여 명. 그는 “정말로 이만큼 커뮤니티가 커질 줄은 몰랐다”며 “목마른 인재들이 스스로 찾아왔다”고 말했다. 라틴은 한 달에 한 번씩 성소수자 관련 토론 모임을 연다. 이날도 봄소풍을 나오기 전에 5월 말에 열리는 퀴어퍼레이드에 들고 나갈 피켓을 만들었다.



△ 10대들이 스스로 기획했던 거리 플래시 몹, ‘작전, 그녀를 찾아라.’ (사진/ ‘무지개행동’ 10대팀 제공)





라틴에는 소수자 중의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청소년도 있다. ‘여고에 다니는 남학생’ 준엽(18)이는 스스로를 ‘여성에서 남성으로’(Female To Male) 트랜스젠더로 소개했다. 어린 나이에 스스로를 레즈비언도 아닌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한 것이다. 준엽이는 “열다섯 살에 레즈비언의 정체성도 받아들이지 못해 스스로 가방끈으로 목을 조였다”며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렵게 선배 FTM 트랜스젠더를 만나 내 정체성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어렵게 성정체성을 찾아온 준엽이는 “어른들은 성인이 된 뒤 (성정체성을) 결정하라고 하지만 사실 그 말에는 어른이 되면 그렇지 않을 것이란 전제가 들어 있다”고 말했다. “치마를 입고 있으면 벗고 있는 것 같다”는 그가 여고를 다니며 겪었을 고충은 ‘안 봐도 비디오’다. 날마다 “여자냐 남자냐”고 나무라는 교사들과 전쟁을 치렀다. 그는 “지금도 여자로 패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며 한숨을 지었다. ‘패싱’(Passing)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드러내면 차별받기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체성을 숨기는 일을 말한다.
성소수자 집회에 떠오르는 ‘10대팀’

자신의 문제에 맞서는 10대 레즈비언들은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성적 지향을 차별금지 항목에서 삭제한 차별금지 법안에 반대하는 운동 과정에서 레즈비언 10대들의 활약은 빛났다. 이들의 갑작스런 등장은 성소수자 차별반대 연대운동체인 ‘무지개 행동’이 10대팀을 별도로 결성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10대팀’은 당시 서울 대학로에서 차별금지 법안에 반대하는 퍼포먼스도 벌였다.
5월14일 서울 북아현동에선 10대팀의 춤연습이 한창이었다. 인기가수 아이비의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10대팀 아이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공연을 준비하는 10대팀 10명 중에 9명이 레즈비언. 가히 ‘청소녀 아마조네스’의 전성기다. 이들은 일일찻집 준비에서 익혔던 노하우를 후원파티에 쓰고 있다. 이들이 주최하는 ‘성소수자 10대가 10대를 위해 만드는 커밍아웃 가이드북’ 제작을 위한 후원파티는 5월24일 홍익대 부근 클럽에서 열린다.
이렇게 새로운 세대의 레즈비언들은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오래된 슬로건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침묵은 죽음이고, 행동만이 삶이다.’(Silence Is Death, Action Is Life) 더 이상 행복은 무지개 너머에 있지 않다. 바로 여기가 무지개 너머의 섬이다.

각주1: 그리스 동부 에게해에 있는 섬. 이곳의 여성을 레즈비언이라 부르는데, 고대 레스보스에는 여성들만의 공동체가 있었다. 여기서 여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단어 레즈비언이 유래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글샘 2008-07-01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요일 시청 광장에 갔더니, 정말 무지개 깃발이 등장했더군요. 부산서 같이 간 젊은이들에게 저 깃발 아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모르데요. 그래서 동성애자, 성적 소수자들 상징이라 했더니... 좀 거부감이 드는 듯하다는 말들을... ^^ 아직 오래 오래 더 있어야 할 문제일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