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소타 주 덜루스에서 로버트 짐머만Robert Zimmerma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밥 딜런Bob Dylan은 라디오를 듣고 기타와 피아노를 배우며 성장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리틀 리처드의 음악을 알고나서부터 여러 록밴드에서 활동했다. 내성적이던 로버트는 11학년 학예회에서 피아노 옆에 서서 절규하듯 노래를 불러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했으며 당시 학교의 교장은 노래가 채 끝나기 전에 커튼을 내려 공연을 중단시켰다. 그의 영어교사의 말에 따르면, 그 다음날 등교한 그는 평소처럼 조용했지만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고 한다.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당시 유행했던 비트족 열풍에 빠져들었고 자신의 우상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의 블루스와 포크가 결합된 음악에 심취했다. 그는 이름을 딜런으로 바꾸고 포크 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961년 학교를 그만둔 딜런은 당시 투병 중이던 우디 거스리의 병상을 지키기 위해 미네소타를 떠났고 얼마 후 맨해튼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블루스/포크 커버곡과 새로 작곡한 곡을 연주하여 순식간에 그리니치 빌리지의 극성팬들에게 인기를 독차지했다. 아직 젊은 나이에 그는 이미 포크와 블루스의 대가다운 면모를 보여주며 데뷔앨범 "밥 딜런" (1962)에서 음악적 소양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그가 알려지게 된 것은 두번째 앨범 "프리윌링 밥 딜런The Freewheelin' Bob Dylan"(1963)을 통해서였다. 이 앨범은 "블로잉 인더 윈드Blowin in the wind"와 어 하드 레인즈 거너 폴A Hard Rain's a gonna fall"같은 송가를 통해 밥 딜런이 저항세대에 끼친 짧지만 엄청난 영향의 시작을 의미했다. 이는 고전적인 곡 "더 타임스 데이 아 어 체인징 The Times They Are-A Changin”(1964)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딜런은 반정부주의, 시민권리를 주장하는 운동, 마약 그리고 문화적 불만으로 점철된 갈등의 시대를 산 동시대의 젊은이들을 위해 일종의 정치적 표어를 곡으로 썼다. 그 후 이삼 년 동안 그는 포크음악에 변화를 몰고 왔다.



^밥 딜런                           ^프리윌링 밥 딜런

 <더 타임즈 데이 아 어 체인징

 

 

 

그의 다음 앨범, “어나더 사이드 오브 밥 딜런 Another Side Of Bob Dylan”(1964)은 그의 팬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는 사회적인 이슈들을 버리고, 여자에 대한 큰 쓰라림에 대한 감정들을 표현한 개인적인 노래들을 불렀다. 이것은 팬들이 배반이라고 생각한, 그의 여러 전환들 중 첫 번째 였다. 개인적인 노래들을 위해 항의하는 노래들을 버린 후 그는 락을 위해 포크송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락을 버렸고 다시 태어난 기독교를 위해 유대교를 버렸다.



^어나더 사이드 오브 밥 딜런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적 음악을 넘어섰으며, 상징주의 시인들의 시구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 또한 그는 로렌스 펄링게티와 앨런 긴즈버그 같은 비트족 시인들이 쓴 재즈적으로 변용된 시들과 공연 중간에 신들린 즉흥 연주를 보여준 기타리스트 척 베리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65년에 이해에 그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전자 악기로 돌아섰다;-브링잉 잇 올 백 홈Bring it All Back Home’이라는 획기적인 앨범을 발표했다. 그에게 실망한 포크 순수주의자들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서브터레이니언 홈시크 블루스Subterranean Homesick Blues’같은 노래는 전작들처럼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영화 제작자 D.A.펜베이커는 무대 위와 무대 밖에서 딜런의 모습을 촬영하여 <돈 룩 백Don’t Look Back(1965)>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오프닝 장면에서 딜런은 서브터레이니언 홈시크 블루스의 가사가 적힌 여러 장의 큐 카드를 카메라 앞에서 떨어뜨렸고, 앨런 긴즈버그는 뒤에서 아무 말 없이 어슬렁거렸다. 이 다큐멘터리는 시네마 베리떼의 특징을 알림과 동시에 뮤직 비디오의 시대를 예고했다.



^브링잉 잇 얼 백 홈                  ^"돈 룩 백"의 오프닝 씬

 

 

 

 

그 후 2년 동안 그는 두 개의 앨범 하이웨이 61 리비지티드Highway 61 Revisited”(1965)블론드 온 블론드Blonde on Blonde”(1966)를 더 발표했다. 두 앨범 모두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추구하는 그의 의도를 확인시켜주었으며, 최고의 팝 뮤직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미스터 탬버린 맨Mr. Tambourine Man”, “라이크 어 롤링스톤 Like A Rolling Stone” 그리고 저스트 라이크 어 우먼Just Like A Woman”같은 곡들은 딜런이 얼마나 다양한 음악을 추구하는 지 입증했다. ‘라이크 어 롤링스톤은 이 시기의 가장 성공적인 불후의 명곡으로, 60년대 젊은이들의 좌절감을 열렬히 표현하였고 그들의 진심 어린 저항심의 목소리가 되었다. 이것은 세대의 대변자로서의 밥 딜런의 역할의 가장 높은 지점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 노래는 2004년 가을, 롤링스톤지의 역대최고의 노래 1위를 차지했다. 1965년과 1966년에 두 번에 걸친 세계 순회공연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팬이 되었다.



^하이웨이 61 리비지티드          ^블론드 온 블론드(감독님이 가장 좋아한다는 앨범)

 

 

 

 

1966년 밥 딜런은 오토바이 사고로 목을 다쳤다. 이 사고는 그의 생애의 터닝 포인트였다. 이 사고 후 밥 딜런은 우드스탁의 그의 집으로 사라져서 은둔생활을 하며 그의 아내 사라와 함께 가족을 부양하는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 이후의 노래들은 밥 딜런의 송라이팅이 변형을 겪었으며 간결하고 더 직설적으로 변했음을 보여준다. 사고 이후의 첫 번째 앨범 <존 웨슬리 하딩”John Wesley Harding(1968)”은 소란한 락을 버리고 조용하며 더 개인적인 노래들로 채워졌다. “얼 어롱 더 워치타워All Along The Watchtower”(지미 핸드릭스의 리메이크로 유명)’ 진실과 진지함에 대한 새로운 헌신을 표현하였다. 영화 음악 팻 가렛 앤 빌리 더 키드Pat Garrett and Billy the Kid(1973)”‘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은 밥 딜런에게 최초로 미국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하게 했다. “블러드 온 더 트랙스Blood on the Tracks(1975)”는 오랫동안 컴백을 기다리게 한 그의 첫 번째 차트 1위의 앨범이 되었고 뒤이어 두번째 앨범 디자이어Desire(1976)”이 나왔다. 다시 한번 그는 정열적으로 열중하여 음악을 하였다.



^존 웨슬리 하딩                    ^팻 가렛 & 빌리 더 키드

 

^블러드 온 더 트랙스             ^디자이어

 

 

 

 

1970년대 말에 딜런은 기독교적 성향이 아주 강한 일련의 세 음반 중 첫 음반인 슬로우 트레인 커밍Slow Train Coming”(1979)를 발표했다. 1980년대 초반에 딜런은 유대교에 새로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뒤 실망스러운 앨범들을 발표했으며-그러나 인피델스 Infidels”(1983), 메르시Oh, Mercy”(1989)는 예외였다-엉뚱한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점점 늘었다. 그러나 이른바 네버 엔딩 투어라고 부르는 전국 순회공연을 위해 계속 옮겨다녀야했던 딜런에게는 이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순회공연에서 톰 페티 앤 더 하트브레이커즈나 그레이트풀 데드 등과 공동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슬로우 트레인 커밍



^인피델                              ^오 메르시

 

 

 

 

80년대 그는 여기저기 많은 곳에서 투어를 했고, 90년대에는 그의 노래들이 새로운 청중을 찾았으며 음악계에서 더 많은 갈채를 받았다. 1991년 그는 그래미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았으며 그의 1997년 앨범 타임 아웃 오브 마인드Time Out Of Mind”는 그래미에서 세 개의 상을 받았고, 그리고 2001년 영화 <원더 보이즈Wonder Boys>(2000)에 삽입된 음악 모든 건 변했어Things Have Changed’로 밥 딜런은 오스카상을 받았다. 2006 65세의 나이에 발표한 그의 모던 타임즈앨범은 다시 한 번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사랑 받았다.

 

^타임 아웃 오브 마인드              ^모던 타임즈

 

 

 

 


"모던 타임즈"의 수록곡 "웬 더 딜 고우즈 다운When The Deal Goes Down"의 뮤직 비디오엔 스칼렛 요한슨이 출연해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http://www.sonybmg.com/musicbox/video/bobdylan/ 에 방문하셔서 위에서 세번째 When The Deal Goes Down을 선택하시면 뮤직 비디오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아임 낫 데어>에 이 영상과 흡사한 장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뮤직 비디오의 한 장면

 

 

 

 

참고문헌: <아임 낫 데어> 공식 프레스북, <아이콘> (바버라 캐디 지음 인희 옮김 거름.)


[출처] 밥 딜런의 역사|작성자 밥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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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8-07-30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콩님 잘 지내시죠?^^
어제 '아임 낫 데어'를 봤어요. 참 좋더군요. '아이콘'을 사서 읽어볼까봐요.
밥 딜런의 시적인 노랫말이 좋아요. 자료가 반가워 들어왔는데 사진들이 모두 액박으로만
보여요. 님 ^^

해콩 2008-07-30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붙여넣기 할땐 분명 사진 보였는데 이게 왠일? ㅜㅜ 제겐 이 영화가 너무 어려워서 밥 딜런에 대한 공부를 좀 하고 싶었어요. ^^; 사진은.. 어디 가서 찾죠? ㅠㅠ
 

한겨레

출소하자마자 ‘오야코돈부리’부터?


기사입력 2008-07-26 15:07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매거진 esc] 도쿄 백년 맛집 이야기 다마히데

200년 전통 닭요리집의 그 전설적 메뉴, 영계 대신 170일 넘은 투계만 사용


200년 넘은 닭요리집 다마히데(玉ひで)는, 장어(우나기)를 요리하는 이즈에이 혼텐(伊豆榮 本店)과 함께 가 취재한 시니세 가운데 가장 역사가 깊다.

다마히데는 18세기 막부 시절 도쿠가와가를 수행하던 하급 무사 야마다 데쓰에몬이 ‘투잡’을 위해 만든 것이었다. 야마다 데쓰에몬은 도쿠가와 가문이 사냥에 앞서 학의 목을 치던 의식을 담당하던 하급 무사였다. 학의 긴 목을 칼로 내리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하급 무사의 봉록만으로 먹고살기 힘들어 그는 1760년 다마히데를 창업했다. 8대손인 야마다 고노스케(47)는 “아마 학을 죽일 때 칼을 쓰셨던 분이니까 닭요리를 하는 게 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의 목을 치던 무사의 후손이 닭을 치다

애초 다마히데는 현재의 위치에서 북쪽으로 약 30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1883년(메이지 16년) 무렵 4대손이 본점을 유지한 채 현재의 위치에 지점을 만들어 5대손에게 물려줬다. 2차대전 때 미군이 도쿄 공습을 감행할 당시 원래 자리에 있던 본점은 불탔고 5대손이 경영하던 지점이 외려 본점이 됐다.

어쨌거나 반경 300미터 안에서 200년 넘는 세월 똑같은 식당이 한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한국의 수원화성도 비슷한 시기인 18세기 말에 지어졌다. 그 뒤부터 수원 토박이라면 몇 세대에 걸쳐 “○시에 수원화성 앞에서 만나자”고 말해 왔을 것이며, 몇 세대에 걸쳐 할머니와 어머니와 손녀가 수원화성에 나들이했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을 게다. 지역주민의 피부와 일상에 각인된 존재인 셈이다. 마치 수원화성처럼 지역주민들의 입맛을 책임진 시니세 다마히데의 존재감은 ‘참을 수 없게’ 큰 게 아니었을까?


야마다 고노스케 사장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은 전혀 전통의 무게에 짓눌려 보이지 않는다. “언제 처음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느냐”고 묻자 대뜸 “이야이야 주산사이”라고 말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싫어 싫어, 열세 살”이라는 말이다. 가업을 잇기 너무 싫었지만 할 수 없이 중학교 때 일을 배우기 시작했단다. 직업으로 가업을 잇기 시작한 것은 대학을 졸업한 뒤. 대학 땐 요리와 무관한 매스미디어 이론과 노동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는 “공부는 안 하고 마작만 했다. 졸업하고 할 게 없어서 가업을 이었다”고 장난스레 말했다.



야마다 고노스케는 “가업을 잇도록 정해져 있었다”는 표현을 반복했다. 결정은 누가 했을까? 주어를 알 수 없는 수동태의 문장에 스스로의 우유부단을 감춘 것이 아닌가 못된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하기 싫으면 그만인데 왜 하느냐”고 짐짓 추궁하듯 질문을 던졌다. 얼굴에 장난기를 거둔 야마다 사장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어릴 때 왜 내가 가게를 이어야 하는지 몰랐다. 내 주변에 가부키 배우의 자식인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나는 우리 집 가업 잇고 싶지 않다. 그런데 넌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가업을 이었냐?’고 물었다. 나도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정말 알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다 자식들이 태어났다. 첫딸을 낳았을 땐 주위 친척과 동네 사람들이 그저 ‘축하합니다’라고만 했는데 아들이 태어나니 주변에서 던진 첫마디는 ‘아, 이제 얘가 9대째가 되는군요?’였다. 하루는 아버지(야마다 고지)가 손자를 안고 동네를 돌았다. 닌교초 거리의 사람마다 아버지를 보고 ‘아~ 이 아이가 9대째군요?’라고 묻더라. 그것뿐이 아니었다. 아들을 유치원에 보냈더니 유치원 선생님도 아들을 보고는 ‘아, 네가 다마히데의 9대손이구나’라고 말하더라.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아, 나도 어릴 때 자연스럽게 주변 환경에서 다마히데 가업을 잇도록 만든 거구나라고 말이다. 그걸 내 아이를 보며 알게 됐다.”

‘에도시대의 맛’으로만 굳어질까 두려워

그러나 그는 자식에게 가업을 잇도록 강요할 생각은 없는 ‘신세대’ 아버지다. 아들이 물려받기 바라지만 강요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아들이 가업을 이을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건 자신의 능력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솔직히 가업 이어받으면 편하다. 계승하는 순간 유명인이 된다. ‘네가 이걸 해야 된다’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자식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가게를 잘 운영하지 못하면 그건 내 책임이다.”

야마다 고노스케는 “내 자식이 가업 잇기를 거부할 땐 내 여동생의 자식이나 다른 친척이 가업을 이어도 좋다. 다마히데라는 것만 계속되면 된다”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다른 친척도 가업을 이을 생각이 없을 땐 다마히데의 간판을 내릴 계획이라고 그는 말했다.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손님에게 얽힌 추억이 없을 수 없다. 기타노 다케시가 다시 영화화한 영화 <자토이치>의 원작에서 주연을 맡았던 가쓰 신타로라는 영화배우는 1990년대 초 범죄에 연루돼 교도소에서 잠시 복역했다. 출소하자마자 그는 집에 가는 대신 다마히데로 달려왔다. 도쿄 시내를 곡예 주행하며 교도소 앞에서부터 자신을 따라다니던 기자들을 뿌리쳤다. 현관에서 야마다 사장과 눈이 딱 마주친 가쓰 신타로는 웃으며 “아내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말하며 오야코돈부리(닭고기덮밥)를 욱여넣었다.

야마다 사장은 요리학교는 다니지 않았지만 <미슐랭 가이드> 도쿄판에서 별 세 개를 받은 최고급 일본요릿집 하마다야 등 여러 요릿집에서 3년 넘게 요리 수행을 했다. 요리를 하면서 그가 겪는 어려움은 무게감이다. 다마히데가 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이기 때문에 ‘다마히데의 맛=에도시대의 맛’처럼 돼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다마히데의 맛을 유지하면서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는 게 힘들다고 그는 털어놨다. 사람들은 오로지 전통만 먹으러 식당을 찾지 않는다.

200년 넘은 맛의 비밀은 와리시타에 숨어 있다. 와리시타는 오야코돈부리나 닭고기전골(스키야키)에 사용되는 소스다. 미림(소주에다 찐 찹쌀과 쌀 누룩을 넣어 양조한 조미료)과 쓰유(간장)를 어떻게 섞느냐를 가지고 다마히데의 독자적인 맛을 표현해야 한다.


영계 대신 170일 넘은 투계만 사용



신선한 닭고기를 쓰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80년부터 도쿄도 내의 한 축산장과 공동개발 협약을 맺고 닭을 직접 기른다. 달걀은 한 가게에서 35년째 공급받고 있다. 축산 개발한 닭 외에 닭고기를 구입할 땐 거래관계가 100년 넘은 업체에서 공급받는다. 한국인이 ‘영계’를 좋아하는 것과 달리, 다마히데의 닭은 170일 넘은 투계 품종을 쓴다. 쫄깃한 질감이 닭고기의 생명이라 믿는 까닭이다.

오야코의 ‘오야’는 어머니이고 ‘코’는 아들이란 뜻이다. 달걀이 닭의 자식이므로 닭고기와 달걀이 함께 들어가는 덮밥을 오야코돈부리라고 일컫게 됐다. 오야코돈부리를 한 입 떠넣자 기자와 사진기자, 통역 모두 입 맞춰 “한국에서 장사하면 대박 나겠다”는 말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적당히 달큼하고 적당히 짭조름한 고기를 씹으며 기자는 ‘인간적인 맛’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 주소·연락처 : 도쿄도 주오구 니혼바시 닌교초 이치-주시치-주(東京都 中央區 日本橋 人形町 1-17-10). 영업시간 오전 11시30분~오후 1시, 오후 5~9시. 토요일은 오후 4~8시. 일요일·휴일 휴무. 03-3668-7651.

⊙ 대표 메뉴와 가격 : 오야코돈부리 1300엔(1만3000원). 단, 오야코돈부리만 단품으로 주문할 수 있는 것은 점심때뿐이다. 이 밖에는 모두 코스요리다. 투계 스키야키 코스요리는 5800엔(5만8000원)인데, 오야코돈부리는 포함돼 있지 않으므로 원하면 따로 주문해야 한다. 처음부터 오야코돈부리가 포함된 코스요리는 1만1000엔(11만원).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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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885년부터 그냥 알아서 줘요”


기사입력 2008-07-26 15:07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매거진 esc] 도쿄 백년 맛집 이야기 스시코 혼텐

메뉴판이 없는 희한한 맞춤초밥집… 나이·성별·국적 따라 크기·모양이 달라



주토로(참치 옆구리살)가 길게 밥을 덮고 있다.

밥의 양이 턱없이 많기 십상인 한국의 초밥과 다르다. 입에 넣자 주위는 금세 명품거리 긴자가 아니라 도쿄만이 된다. 이렇게 시작된 스시코 혼텐(壽司幸 本店)의 점심 코스는 요리사가 서로 다른 재료로 직접 눈앞에서 만들어주는 초밥으로 이어졌다. 가자미, 오징어 초밥으로 이어진 코스는 성게 초밥에서 금세 절정에 달했다. 혀는 개펄이었고 개펄로 밀물이 몰려왔다. 흰새우, 아나고(붕장어), 고히다(중간 크기 전어), 다마고야키(달걀), 표고버섯, 참치살 마구로가 심처럼 박힌 데카마키가 이어졌다. 여기까지가 보통의 1인분이었지만, 조금 더 달라고 말하자 이쿠라(연어알), 새우, 가다랑어 초밥이 더 나왔다. 2008년 <미슐랭 가이드> 도쿄판이 스시코 혼텐에 별 하나를 주며 “에도마에 스시(에도 앞바다에서 잡은 생선으로 만든 초밥)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고 찬양한 맛이다.

까다롭고 까다로운 최상급 쌀 확보작전

창업자의 4대손인 스기야마 마모루(55)에게 요리 비법을 묻자 그가 되묻는다. “쉰 살 남성과 그의 20대 딸과, 여든 살 할머니가 가게를 찾았다. 초밥의 크기가 똑같을까?”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스기야마 마모루는 날카로운 학자 인상이다. 그는 차분한 말투로 50대 남자의 초밥이 이 정도 크기라면 20대 여성에게는 그것의 3분의 2 정도로, 할머니에게는 그보다 더 작게 만들어 준다고 설명했다. 손님에 따라 고추냉이의 양, 밥의 양, 생선 크기도 다 달라진다. 여성 가운데 고추냉이에 약한 손님이 올 땐 그 양을 줄인다. 이런 ‘맞춤 요리’는 서양인의 경우도 마찬가지. 서양인들은 젓가락질이 서툴러 초밥이 부스러지기 쉬우므로 밥을 상대적으로 딱딱하게 지어 생선과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쓴다.


이 ‘맞춤 요리 철학’에서 따로 가격표를 만들지 않는 스시코 혼텐의 정책이 태어났다. 그러니 〈esc〉를 따라 시니세 여행을 온 독자는 스시코 혼텐에 갔을 때 메뉴판이 없어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이달 2일 스시코 혼텐을 방문한 시간은 점심 무렵이었지만, 내부의 조도는 낮아 아늑했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어떤 식재료도 전시하지 않는다. 손님이 들어왔는데 메뉴판도, 전시된 음식도 없다면 손님은 어떻게 주문할까? 그냥 ‘알아서 주세요’라고 하면 된다. 처음 온 분도, 열 번 이상 온 분도 그날 먹고 싶은 게 다를 수 있고, 매일 들어오는 생선의 상태가 조금씩 다르다.” 1대 창업자부터 가격표가 없었다고 한다. ‘맞춤 초밥’에 질 좋은 생선은 기본이다. 같은 업자로부터 50년 넘게 생선을 공급받고 있다. 최상급 쌀을 확보하기 위해 유명한 쌀 산지의 농가 서너 곳과 동시에 계약을 맺고 그해 가장 작황이 좋은 쌀을 공급받는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좋은 재료를 준비하는 게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손님에게 많은 돈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점심 코스가 일인당 약 9000엔(약 9만원)이니 싸지는 않다.

1885년(메이지 18년) 스시코 혼텐을 창업한 1대 역시 메이지유신으로 월급이 사라진 하급 무사였다. 하급 무사는 먹고살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칼을 놓고, 사람을 먹이는 칼을 잡았다. 첫 자리는 긴자가 아닌 신바시였다. 1952년 긴자로 옮겼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삼형제 중 막내여서 자신이 가업을 이으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 때 돈 많이 드는 골프 동아리 활동비를 대려고 주방에서 잠깐씩 일했을 따름이었다. ‘예정대로’ 장남인 큰형이 초밥을 만들었지만, 덜컥 몸이 아파 드러누웠다. 둘째형은 이미 취직해 직장인이었다. 아버지 스기야마 야스조는 셋째아들이 가업을 잇길 바랐다.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던 그는 2대손의 사위였다. 가업을 잇길 바라는 장인의 뜻에 따라 성을 부인의 성으로 바꾸고 양자가 됐다. “남은 게 나밖에 없었다”고 말하며 스기야마 마모루는 처음으로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서른여섯 되던 90년대 초반부터 경영을 책임졌다.

재산은 다 타버려도 손님은 남더라

53년생인 그는 단카이 세대(47~49년 태어나 60년대 후반 격렬한 좌파운동을 경험한 세대)에 가깝다. 아버지와 사고방식이 다르다. 딸만 둘인 그는 “아버지는 ‘내가 양자니까 여기를 망하게 할 수 없었다’고 하셨다. 나는 본류(아들)니까 상황이 안 되면 끝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가족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이어도 된다. 가족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시니세가 지속되는 비결을 물었다. “23년 간토(관동)대지진, 전쟁, 거품경제가 꺼지면서 물게 된 엄청난 상속세. 이 세 가지가 가장 큰 시련이었다. 90년대 초 상속세를 지급하지 못할 상황이 닥쳤다. 그때 내게 남은 게 딱 하나 있었다. 손님들이었다. 손님들은 간토대지진 뒤에도 일부는 살아남았고 전쟁 뒤에도 예전 손님의 3분의 1은 찾아왔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손님이 바뀌기도 했지만, 중심적인 손님들이 있었다. 손님들이 와준다는 건 맛도 있겠지만 우리 집을 신용해주는 것이도 하다. 재산이 타버린다 하더라도 손님은 남아 있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말을 마치고 조용히 칼을 잡았다.






■ 주소·연락처 : 도쿄도 주오구 긴자로쿠초메 산반 하치고(東京都 中央區 銀座6丁目 3番8호). 영업시간 오전 11시30분~밤 10시30분. 03-3571-1968.

■ 대표 메뉴와 가격 : 일인당 점심 약 9000엔(9만원), 저녁식사 2만5000엔(25만원). 정해진 메뉴판이 없어 가격에 변동이 있으며, 대개 이보다 덜 나온다. 1만엔(10만원) 수준의 와인을 중심으로 와인 리스트도 갖추고 있다.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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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实 2008-08-29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很好啊

해콩 2008-08-29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眞的?
 

한겨레

당당한 수타면, 1000인분을 쳐라!


기사입력 2008-07-24 17:07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매거진 esc] 도쿄 백년 맛집 이야기 간다 마쓰야

100년 인테리어 분위기 속에 먹는 100년 소바…“사위·딸에겐 절대 가업 못 물려줘”


일본으로 떠나오기 전 머릿속에 상상했던 시니세.

6월30일 저녁 8시 땅거미 진 거리에서 바라본 소바(메밀국수)집 간다 마쓰야(紳田 まつや)의 이미지가 딱 그랬다. 농구선수 사이에 선 일반인처럼 현대식 빌딩 사이에 끼인 듯 서 있는 건물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연방 흘러나왔다. 고동색 색감의 목조건물에서 시간과 유행에 완강하게 버티는 고집이 느껴졌다.

상상 속의 시니세와 딱 떨어지는 느낌

상상의 시니세와 현실의 시니세 이미지의 놀라운 일치는 6대손에 해당하는 고다카 다카유키(43)의 외모에도 이어졌다. 앙다문 입술과 180㎝에 90㎏이 넘어 보이는 커다란 덩치에는 ‘듬직하다’는 형용사가 잘 어울렸다. 식당 주방 옆에 1평이 채 안 되는 작업실에서 고다카 다카유키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밀가루 반죽을 쾅쾅 도마에 내리친다. 작업실 사방은 나무칸막이로 막혀 있지만 손님들이 수타면을 만드는 광경을 볼 수 있도록 위쪽은 유리로 돼 있다. 반죽을 내리칠 때마다 삼두박근과 상완근이 꿈틀거렸다. 짙은 눈썹의 사내는 내리친 반죽을 봉으로 밀어 얇게 편 뒤 다시 말았다. 온 신경을 집중해 조심조심 손바닥만한 철판 모양의 소바칼(소바보초)로 반죽을 썰 때마다 간다 마쓰야의 전매특허인 수타소바가 탄생했다.

왜 시니세를 물려받았느냐고 물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고다카 다카유키의 대답 역시 교과서적이다. 그는 “어느새 (소바 만드는 게) 내 일이 돼 있었다. 내 갈 길이 정해져 있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아버지가 ‘너 이거 해야 된다’ ‘이 길을 가라’ ‘요리사가 되어라’ 이런 말은 한 번도 안 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이 일을 돕게 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여기까지 왔다.” 그는 대학 졸업 뒤 3년 정도 다른 일을 경험해볼까도 생각해봤고, 다른 소바집에서 요리 수련을 쌓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만뒀다. “본격적으로 하려면 대학 졸업 직후 바로 시작하라”는 아버지 고다카 도시의 충고를 그대로 따랐다.

내친김에 자식에게도 가업을 잇게 할 것인지 물었다. 고다카 다카유키는 여전히 웃음 없이 무덤덤하게 “3녀1남인데 아직 누가 이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이 원하면 이 가게를 물려줄 생각이다. “속으로는 먼저 말해주길 바란다. 자발적으로 한다면 그것보다 좋은 건 없다. 아마 한다고 할 것 같다”는 대답이 이어졌다.

도쿄의 시니세는 서로 알고 지내는 곳이 많다. 고다카 다카유키는 스시코 혼텐의 스기야마 마모루 사장과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다. 그러나 가족 외 다른 사람이 시니세를 이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서 고다카 다카유키와 스기야마 마모루 사장의 철학은 다르다. 고다카 사장이 ‘강경파’라면 스기야마 사장은 ‘온건파’에 해당한다.





거울과 계산기까지 고풍스런 분위기에 한몫

고다카 다카유키는 아들이 가업 잇기를 거부한다면 간다 마쓰야 간판을 내릴 생각이다. 수타면을 직접 만들고 가게를 경영하는 일은 딸들이 하기엔 너무 어렵다고 그는 말했다. “스시코 혼텐처럼 사위에게 가업을 잇게 할 수 있지 않으냐”고 묻자 “사위가 계승한다고 해도 맛은 그렇게 쉽게 계승되는 게 아니다. 맛이 달라질 게 불 보듯 뻔한데, 그리고 손님들한테 ‘맛이 달라졌다’는 말을 들을 게 뻔한데 그걸 그대로 용납할 순 없다”고 말했다. 딸과 사위가 소바집을 연다면 맛에 대한 도움은 주겠지만 간다 마쓰야란 이름은 쓰지 못하게 할 것이란다.


간다 마쓰야는 1884년 후쿠시마라는 성을 가진 평민이 처음 열었다. 23년 간토대지진으로 건물이 다 무너지고 일대가 폐허가 됐다. 간다 마쓰야도 문을 닫을 처지가 됐는데, 당시 근처에서 술집을 경영하던 고다카 다카유키의 증조할아버지가 이를 인수했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고다카 다카유키는 인수자의 4대손이며, 연대기상 간다 마쓰야 창업자와의 나이차를 계산하면 약 6대째에 해당한다.

가업을 잇는 데는 게이오대학 법학부에서 수학한 아버지 고다카 도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도 장남이었다. 대신 동생들은 회계사와 판사가 됐다. 고다카 도시는 “다른 소바집은 일하는 게 힘들어서 장남들이 많이 도망가 차남이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집은 운이 좋아 계속 장남이 가업을 잇고 있다”고 말했다.

의자와 탁자가 모두 오래된 질감의 목재로 만들어져 있다. 입구에 걸린 거울은 소바집을 인수한 증조할아버지가 술집을 운영할 때 쓰던 100년 가까이 된 ‘보물’이다. 고즈넉하다. 소바를 한 젓가락 먹을 때마다 ‘지금 당신은 100년 넘은 소바집에서 100년 넘은 맛을 먹고 있습니다’라고 일깨워주는 느낌이랄까? 계산대의 독일제 젠마크 계산기 역시 고풍스런 분위기에 한몫한다. 쇼와 5년(1930년)부터 썼다는 계산기를 아직 사용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묻자, 고다카 도시는 심드렁하게 “그냥 버리지 않아서 쓴다”고 답했다.

고다카 다카유키가 심각한 표정으로 정성스레 만든 모리소바(찬 소바)는 본가다랑어 국물로 만든 쓰유(간장)에 적셔 먹었다. 짭짤하고 시원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온면에 해당하는 가시와 난반 국물을 떠넣었다. 첫맛은 약간 비릿했지만, 뒷맛은 구수했다. 가시와 난반의 국물은 ‘고등어 부시’(고등어를 말려 가루로 낸 것) 등 세 종류의 서로 다른 부시(가루)로 맛을 낸다. 자극적이지 않고 웅숭깊었다.

메밀 공급하는 가게와 5대째 관계

100년 넘은 맛의 비결에 대해 고다카 다카유키는 좋은 재료를 강조했다. 이와 함께 수타법 기술은 면을 기계로 뽑는 다른 소바집과 비교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간다 마쓰야는 소바 시니세 연합에 속해 있다. 소바집 가운데 3대 넘게 이어진 가게들이 연합회를 만들었다. 이 시니세 연합 안에서도 수타면을 고집하는 곳은 간다 마쓰야를 포함해 서너 곳뿐이라고 고다카 도시는 설명했다. 고다카 다카유키를 포함한 요리사 5명은 손님이 몰리는 토요일엔 이렇게 일일이 손으로 1천인분의 소바를 만들어낸다. 좋은 재료는 이번에 취재한 모든 시니세의 기본 덕목이었다. 간다 마쓰야도 메밀을 공급받는 가게와 5대째 관계를 이어간다.

밤 10시. 인터뷰가 끝나갈 때쯤 ‘강경파’들은 어느새 이웃집 아저씨·할아버지로 변해 있다. 고다카 도시는 “시니세 하면 교토다. 도쿄는 시니세가 적다. 교토에서는 100년 됐다고 시니세에 안 끼워준다. 300~400년은 돼야지”라고 말하며 웃는다. 그 옆에서 험상궂은 고다카 다카유키도 그제야 입가에 보일락 말락 웃음을 띤다. “돈가스 시니세 ‘호라이야’도 취재한다고? 거기 우리도 종종 간다. 고기가 아주 두껍지. 스시코 혼텐에 가면 아들 고다카 다카유키 안부 전해주고, 다마히데(玉ひで)에 가면 내 소식 전해줘!” 떠나는 취재진에게 고다카 도시가 손을 흔들며 부탁했다.






⊙ 주소·연락처 : 도쿄도 간다스다초 이치-주산(東京都 神田須田町 1-13). 영업시간 오전 11시~저녁 8시. 토요일 축일(휴일)은 저녁 7시까지. 일요일 정기휴무. 03-3251-1556. www.kanda-matsuya.jp. 기치조지의 도큐백화점에 지점이 있다.

⊙ 대표 메뉴와 가격 : 모리소바(찬 소바) 600엔(6000원), 가시와 난반 950엔(9500원).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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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사무라이가 개척한 ‘돈가스의 성지’


기사입력 2008-07-26 15:17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매거진 esc] 도쿄 백년 맛집 이야기 렌가테이

맛 유지 위해 마요네즈도 직접 만드는 일본 최초의 포크가쓰레쓰 전문점


돈가스는 음식이 아니다. 먹을 수 있는 역사책이다.

돈가스는 프랑스 요리인 코틀레트(영어로 커틀릿)가 변형된 독특한 음식이다. 중국·한국도 똑같이 서양 요리를 접했지만, 돈가스 같은 ‘변형된 양식’을 개발하지 않았다. 오직 일본만이 서양의 음식을 자기 음식으로 변형시켰다.

64년 도쿄올림픽 뒤 인테리어 안 바꿔

코틀레트를 일본인들은 가쓰레쓰라고 불렀다. 원래 프랑스 코틀레트는 송아지나 양, 돼지의 등심과 등심 형태로 자른 고기를 튀긴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 코틀레트를 변형시켜 닭이나 쇠고기로 가쓰레쓰를 만들었다. 그 뒤 돼지고기를 쓴 포크가쓰레쓰가 나왔고, 20년 뒤 포크가쓰레쓰가 돈가스가 된다. 일본 음식사가 오카다 데쓰는 저서 <돈가스의 탄생>(뿌리와이파리)에서 일본 최초의 포크가쓰레쓰가 이달 3일 찾은 렌가테이(煉瓦亭)에서 첫선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렌가테이는 ‘돈가스의 성지’인 셈이다.


렌가테이는 19세기 사회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났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은 거대한 혁명이었다. 농경사회에서 급격하게 산업사회로 변하는 과정은 구시대의 지배계급인 사무라이(무사)계급에게는 재난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상공업에 종사하지 않는 사무라이들의 월급을 가차없이 끊어버렸다. 세상의 중심은 생산이어야 했다. 도쿄 아사쿠사의 가난한 하급 무사 기타 모토지로도 역사의 무한궤도를 피할 수 없었다.

기타 모토지로는 난생처음 노동으로 살아가야 했다. 당시 일본인들이 체격이 작은 이유가 서양인과 달리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메이지 정부도 육식을 장려했다. 기타 모토지로는 ‘고기 요리’가 유행임을 직감했다. 그는 혈혈단신 서양인이 모여 살던 요코하마의 프랑스인 클럽 주방 문을 두드렸다. 프랑스인 클럽은 일본에 거주하던 프랑스인들이 모여 소식을 나누고 음식을 먹던 연회장이었다. 기타 모토지로는 중국·조선인 동료와 접시를 닦으며 코틀레트를 익혔다. 때마침 요코하마에서 긴자 근처 신바시까지 전차 노선이 생겼고, 1895년(메이지 28년) 기타 모토지로는 렌가테이를 열었다.

렌가테이는 가스등 거리를 뜻한다. 실제로 렌가테이의 조그만 간판에는 창업 1년 뒤 서양화가 손님이 그려준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가스등이 켜진 긴자 거리에 마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실루엣으로 표현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64년 도쿄 올림픽 뒤 인테리어를 바꾸지 않았다는 고풍스런 내부가 인상적이다. 도쿄올림픽 때 샀다는 스웨덴제 ‘스웨다’ 계산기가 여전히 계산대를 지킨다. 이미 여러 차례 언론의 취재를 경험했다는 3대손 기타 아키토시(74)가 역사 강의를 하듯 능숙하게 레스토랑의 긴 역사를 들려줬다.

2차대전 패전은 렌가테이에도 시련이었다. 긴자 근처에 있던 지점은 미군정에 사무실로 무상 접수 당했다. 주식인 밀가루와 쌀이 배급제라 암시장에서 구해야 했다. 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어릴 적 물장구 치던 주변 신바시와 니혼바시(바시는 ‘다리’) 주변 하천이 복개되는 것을 기타 아키토시는 묵묵히 지켜봤다. 80년대 후반 일본 경제의 부동산 버블(거품)은 가게를 팔 생각이 없는 시니세에게는 되레 재앙이었다. 요즘 한국인이라면 천정부지로 솟은 땅값에 얼른 식당을 팔고 차익을 챙기겠지만, 그럴 마음이 없는 시니세에게 땅값 상승은 재앙이었다. 오른 땅값 때문에 어마어마한 상속세를 물어야 했다.

기타 아키토시는 중학생이던 열두살 때부터 주방일을 도왔다. 그는 아버지에게 혼쭐나 가며 돈가스 요리를 배웠다. 패전 뒤 가스가 없어 코크스(석탄을 정제한 연료)와 석탄을 섞어 땐 불 조절에 진땀을 뺀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여러 대에 걸쳐 후손들이 식당을 잇는 것은 한국에선 상상하기 힘든 문화다. 일본인들은 ‘장인 유전자’라도 타고나는 것일까? 기타 아키토시에게 “다른 일을 꿈꿔보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는 웃으며 “그런 게 왜 없었겠냐. 그런데 결국 뒤를 잇게 되더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장남이 가업을 잇는 게 전통이었으니까.” 대신 형제들은 다른 길을 갔다. 동생은 <요미우리신문> 기자였다. 그는 외아들인 4대 기타 고이치로와 손자가 계속 가게를 이어가길 바란다.

돼지기름과 샐러드유 반반씩 섞어 사용



시니세에서는 전통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맛을 유지하지 못하는데 사람들이 전통만 먹으러 시니세를 찾진 않는다. 렌가테이에서 여전히 마요네즈를 직접 만드는 이유다. 렌가테이의 100년 넘은 맛의 비밀은 기름에 있다. 렌가테이에서는 돼지기름(라드)과 샐러드유를 반반씩 섞어 사용한다. 질 좋은 돼지기름을 사서 매일 아침 이를 녹여 돈가스 튀길 기름을 직접 만든다. 엄선한 돼지고기를 쓰는 것은 기본이다. 렌가테이는 50년째 같은 가게에서 돼지고기를 공급받는다. 한 입 베어 물자 ‘바삭’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고 촉촉한 돼지고기가 씹혔다. 육즙이 풍성했다. 고슈 지역에서 양조된 ‘렌가테이’ 레이블 와인을 곁들였다. 당도가 낮고 산미 높은 맛이 돼지고기 육즙과 섞여 입 안을 풍성하게 채웠다.




■ 주소·연락처 : 도쿄도 주오구 긴자산초메 고반 주로쿠고(東京都 中央區 銀座3丁目 5番16호) 03-3561-3882·7258.

■ 대표 메뉴와 가격 : 점심메뉴 포크커틀릿 1250엔(1만2500원), 밥·빵 추가 200엔(2000원). 스페셜 포크커틀릿 1450엔(1만4500원). 렌가테이 와인 작은 병 800엔(8000원).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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