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아닌 게 아니라 세상에는 속속 '땅 끝까지 전하라'의 성격을 띤 프로의 복음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고, 한결같이 방송인과 지식인, 광고인과 경영인들의 슬기를 모은 것들이었으며, 과연 줄기찬 것이었다.

1.  이젠 프로만이 살아남는다: 당시 가장 많이 회자되던 프로복음 1호 되겠다. 프로가 안 되면 아마 죽을 거라는, 최후의 통첩이 실린 무게 있는 복음이다.

2. 난, 프로라구요: 과거의 삶을 회개하고, 앞으로는 잔업이든 휴가 반납이든-아무튼 불꽃 같은 프로의 삶을 살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뚜렷이 공고한 프로복음 2호 되겠다. 한편 당돌해 뵈면서도 목숨의 부지를 위한 비장한 각오와 잔잔한 애수가 서려있는 복음. 과거 유신복음 중에는 같은 맥락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있다.

3. 프로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 아닙니까?: 주로 비열한 방법으로 목적을 이룬 자들이 내뱉던 프로복음 3호 되겠다. [동물의 왕국]을 인간의 삶에 적용시킨 친(親)환경주의, 동물애호주의의 복음. 이 복음을 토대로 어쨌든 이기면 된다, 어쨌든 돈만 벌면 된다는 새로운 세계관이 빠르게 형성될 수 있었다.

4. 하루빨리 프로가 되게: 주로 회사의 상사들이 신입사원들에게 쓰던 프로복음 4호 되겠다. 쉽게 말해, 할 일이 태산 같다는 말이다.

5. 허허, 이 친구 아마추어구먼: 미전향 아마추어들에게 전도의 목적으로 쓰이던 프로복음 5호 되겠다. 가벼운 멸시와 조롱을 담아서 그들의 전향을 유도했다.

6. 맛에도 프로가 있습니다: 요식업계를 통해, 민간에서 처음으로 창출된 프로복음 6호 되겠다. 거창한 문구로 위장해 있으나, 그 어원은 '옆집보다 우리 집이 더 맛있어요'라는 소박한 것이다.

7. 이러고도 프로라고 말할 수 있나?: 주로 실수를 범한 부하직원에게 상사가 내뱉던 프로복음 7호 되겠다. 쉽게 말해, 나가 죽으라는 말이다.

8. 프로의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이다: 아직 멀었다. 더 높은 경지의 프로 세계가 있으니 분발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프로복음 8호 되겠다. 주로 대학교수나 무슨 연구소의 소장이란 사람들의 입을 통해 개발도상국의 최대 급소인 무식(無識)의 혈을 찌른 고급 복음이다.

9. 프로는 끝까지 책임을 진다: 아마추어 음해와 더불어 야근의 생활화 고착을 목표로 한 프로복음 9호 되겠다. 이후 아마추어는 책임감이 없다는 사회적 무의식과 야근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기업 풍토가 널리 확산된다.

10.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한국 경제사에서 여성 고급 인력의 필요성이 대두될 때 나온, 그러나 여성 고급 인력의 필요성과는 아무 상관 없는 프로복음 10호 되겠다. 역시 거창한 문구로 위장해 있으나, 그 원래의 뜻은 '옷 사세요'라는 말이다.

11. 프로주부 9단: 자칫 느슨해지기 쉬운 주부들에게 그럴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만든 포로복음 11호 되겠다. 주부가 앞장서서 살림도 프로로 하고, 애들도 프로로 키우라는 거시안적 포석이 깔린 복음. 승단 심사와 발표를 어디서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박민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한겨레 신문사, 2003. 77~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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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8-25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rom hook-choi]샘 덕분에 오랫만에 책읽으면서 크게 웃었어요. 나의 캐릭터와 어울리는 좋은 책을 읽게 해 줘서 너무 고마워^^ 나도 서재에 뭔가를 채우고 싶은데, 역시나 게을러서 실현하는건 어려울 것 같아... - 2006-07-13 15:19
 
 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그리움의 다양한 표정들
바다 호수 - 이시영 시집
이시영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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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리움의 다양한 표정들

 


어제 낮의 나의 패배
어쩌면 오래 전부터 예정되어 왔던 그것을
이제는 아무 두려움 없이 솔직히 인정하자
뉘우침 속에서 이렇게 밤의 고독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오랜만의 나의 참모습 아니냐

그래,나는 패배했다
그리고 그것은 건너뛸 수 없는 사실이다
밤이여, 커다란 밤이여
네가 나를 밟고서 가라
어둠은 나의 오랜 친구였다
그 속의 쓰라린 빛도!
-이시영,「나의 패배」

대체로 文明은 고통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흘러 갑니다. 나날이 우리의 삶은 산뜻해져 가고 모든 퀴퀴한 것들은 자취를 감춥니다. 문명의 광택제는 모든 낡은 것들을 코팅시켜가고 있습니다. 여름이면 악취를 풍겨대던 쓰레기의 땅 난지도에도 얼마 있으면 첨단의 인텔리전트 빌딩들이 들어선다고들 하더군요. 따개비 같이 덕지덕지하던 봉천동의 하꼬방 동네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지는 이미 오랩니다. 아, 낡은 것들도 이렇게 근사하게 一家를 이루어낼 수도 있는 것이구나, 했던 황학동 벼룩시장도 조만간 개발의 바람에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군요. 머지않아 도시는 깨끗하게 위생처리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살균등처럼 가로등이 환하게 밤의 도시를 비추고 있을 테지요. 그러나 이렇게 의기양양한 도시의 어딘가에도 조명이 닿지 않는 곳은 있습니다.

어떤 싸움에서 패배는 반드시 치욕만은 아닙니다. 떳떳하지 못한 승리보다는 차라리 깨끗한 패배가 아름답다는 것은 구차한 설명이 따로 필요없을 듯합니다. 하나의 승리가 한 인간의 분투와 각고의 산물일진대 우린 그 사람의 승리에 응당 박수를 보내야 하겠지요. 그러나 공정하지 못한 게임의 승리자에게까지 우리가 환호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명이란 일종의 싸움이었습니다. 거대한 해일과 폭풍우와의 싸움이기도 했고, 죽음, 질병, 어둠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나무꾼이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던 시절, 인간은 자연과의 싸움에서 오늘처럼 늘 의기양양한 승리자일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를 목전에 앞둔 오늘, 사정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인간 복제의 가능성이 운위되기도 하고, 불치의 병을 정복하고 노화 억제물질을 개발해낼 수 있는 날도 멀지 않았다고들 합니다. 불로초의 꿈이 이제 현실화되기에 이른 것이지요. 과학기술을 등에 업은 인간의 막강한 힘은 지구를 향하는 혜성의 돌진을 무산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물론 영화에서의 일이긴 합니다만 영화에서의 일이라고 해서 이제 헛된 망상이라고 일축해버릴 수만도 없는 현실입니다.

이런 승리에도 불구하고 신촌과 강남역 부근의 자정은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습니다. 나날이 그 기종을 고급화시켜가는 첨단 통신기기를 동원해 타인들과 쉼없이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도 자정 무렵, 신촌과 강남역의 얼굴들은 그렇게 화평해보이지 않습니다. 토악질을 해대는 한 여자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한 청년은 연신 상소리를 지껄이기도 하고, 이제 마악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법한 소녀가 제 또래의 사내아이들과 담배를 물고 있는 광경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심야의 폭주족에 그리 크게 놀라지 않게 된 것도 이미 오래 전의 일입니다. 고막을 찢는 기타와 드럼의 굉음 속에서 연신 치렁치렁한 머리를 흔드는 청년들, 땀으로 범벅을 한 그들의 얼굴에서 이 시대의 문명의 승리를 읽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 승리자의 얼굴이 아닙니다. 문명은 그러나 이런 풍경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칙칙하기만 했던 건물들도 이제는 칼라풀하고 심플한 디자인으로 의상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순대국집에도 이젠 화장이 필요한 시대이니까요. 한 사내가 버스에 올라, 이게 그 유명한 나이롱 양말이다면서 송곳니로 물어뜯으며 나이롱 양말의 견고성과 제 이빨의 튼튼함을 동시에 자랑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실체와 내용보다는 포장과 형식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오늘날의 패배는 실체와 내용의 패배이기 전에 포장과 형식의 패배입니다. 어떠한 분위기나 상표로 자신을 포장하고 감싸는 데에 실패하면 실체와 내용은 제 목소리를 가지기가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
사정이 이쯤 되면 우린 두 가지의 패배자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 아무리 열심히 스스로를 포장해도 제가 가진 능력으로는 포장 실력이 뒤쳐질 수밖에 없는 자, 둘, 아예 스스로를 포장하길 거부하는 자. 만약 시(詩)에도 절망과 패배가 있다면 포장하길 거부하는 자의 패배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인이 베스트드레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시인이 근사한 서재(書齋)로 남의 부러움을 살 수도 있습니다. 멋진 차와 품위 있는 주택으로서 히야, 하는 탄성을 유발할 수도 있겠습니다. 굳이 시인들이라고 해서 우중충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양보해도 시인의 시인으로서의 위의와 품격은 어떠한 포장이나 화장술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 성직자들의 위의와 품격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비단의 승려복이나 사제복으로 하늘나라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는 없겠습니다.

우수에 찬 눈빛, 폭발적 에네르기를 간직한 듯한 표정의 스타들처럼 시인들도 실체야 어쨌든 어떤 상품적 이미지를 자꾸만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요? 내용이야 어쨌든 일단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보자는 식으로 목소리를 높이든지, 그럴싸한 포장으로 자신을 감싸야 하는 것인지요. 외국에서 수입된 논리를 충분히 자신의 심장으로 녹여내지도 못하고 단지 자신의 빈약한 상상력을 메꾸지 위한 소품으로 도배를 해야 하는 것인지요?

모든 시인들이 있어야 할 곳은 결핍의 땅입니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것은 무언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 도시의 문명이 인간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인간의 편익을 증진시켜주는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해도 어떠한 결핍은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인 이상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그리움은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자정 무렵의 신촌이나 강남역의 자정 무렵에 젊은이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그리움은 아닐는지요. 어떠한 물질적 풍요도 마음 한 구석에 있는 공허를 메꿔줄 수 없다면 우리는 그 결핍을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시가, 음악이, 더 나아가 모든 예술이 그 그리움의 다양한 표정들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시로 글을 접겠습니다.

가질 수 없는 건 다 상처랬죠?
닿지 않는 하늘 닿지 않는 바다
돈이 없어 닿지 않는 외투
빌릴 수 없는 방 두 칸짜리 집
닿지 않는 사랑

절망의 아들인 포기가 가장 편하겠죠
아니, 그냥 흘러가는 거죠
뼈처럼 흰구름이 되는 거죠

가다보면 흰구름이 진흙더미가 되기도 하고
흰구름이 배가 되어 풍랑을 만나고
흰구름 외투를 입고
길가에 쓰러진 나를 발견하겠죠

나는 나를 깨워 이렇게 말하겠죠
<내가 나를 가질 수 없는데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져서 뭐하냐>구요
-신현림, 「가질 수 없는 건 상처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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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데이 서울
김형민 지음 / 아웃사이더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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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확한 위치가 어디였더라.. 수영에서 광안리로 넘어가는 도로.. 수영로타리 못가서였던가? (눈썰미가 없어서리..) '그 그림'을 간판으로 만들어 붙여놓은 사무실이 있었다. '여성과 민족000' (에잉 기억력, 너마저도..) 이라고 씌여진 간판... 순간 움찔 놀라며 이 책 - [썸데이 서울]의 한 쪽이 떠올랐다. 몇 십 번은 지났을 이 길.. 왜 진작 보지 못했을까?

정확하게 말하면  <빼앗긴 순정, 파헤쳐진 나들목>이라는  글이다! 사실 책에 실린 사진과 그 사무실의 '간판'에 사용한 그림은 같은 것이 아니었는데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걸 보면 그 글 자체에 아주 많이 공감하고 또 반성하고 있었나 보다. 위안부 할머니들에 관한 글이었다. 작가는 PD로 취재했던 경험으로 이 글을 썼는데 할머니들의 삶을 바라보는 일반인(작가 자신을 포함한)들의 무심함에 통쾌한 펀지를 사정없이 날린다. 그것이 자신에게도 날리는 주먹이기에 '그러는 너는?'이라고 반문조차 할 수 없다. 이 책의 글들은 모두 이런 식이다.

작가는 참으로 '예민한 양심'을 가졌다. 일상적이고, 그래서 사소하다고 느낄 수 있는 일들 하나하나에 '양심'의 촉각을 세우고  독자를 반성하게 한다. 물론 이 반성은 작가가 늘 앞서 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인 나는 '너는?'이라는 짜증스러운 질문을 할 수 없었다. 그 질문은 오히려 '그러는 나는?'으로 되돌아왔다.

하나하나 작은 글들은 80년대와 현재를 요리조리 오가며 추억을 떠오르게 하고, 그것이 그저 아름답기만 한 추억은 아닐 수 있다고, 지금도 그런 잘못들은 계속되고 있다고 말해준다. 그래서 이 책은 재미있으면서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슴이 아릿하게 저려오기도 했다.

일상은 늘 계속된다.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도 일상을 벗어난 특별한 사건에는 핏대를 세우며 '是'와 '非'를 가리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겹게 반복되는 나의 일상이 되면 민감했던 촉수는 점차 무뎌져서 관용을 가장한 무관심으로 잦아든다.  작가와 같이 '민감한 양심'을 지니지 못한 나같은 사람은 더 그렇다. 덕분에 나의 일상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였다면? 그 시간에 나는 어디서 무얼 했더라? 나도 그런 '몰상식한 가해자 편'에 서있었던 것은 아닐까?'  '.............'

홍세화 아저씨는 그가 '아직 분노하지 않는'다고 했다. 글 속에서 그는 자주 '분노'했지만 그가 '진짜로  분노하게 되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다.

2004. 8. 2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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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4-08-31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100 ㅋㅋ 제가 100번째 방문객이네요. 축하드립니다. 좋은 글 감사하구요.

해콩 2004-09-01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100이게 어디 나오는 숫자? 100번째 방문객인지 어떻게 아시는 거죠?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숫자는 안 보이는디... 추천은 샘이 해주신 거죠? (제 리뷰 추천은 모두 샘께서?...! 허허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