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 너도바람꽃. 천마산에서 가장 일찍 피는 들꽃의 하나로 북방계 식물이다.
 




얼음 풀린 산
낙엽이불 사이
여린 몸 간들간들

디카 물결 타고
꽃산행꾼도 줄줄

“밟지 말고
꺾지 말고
캐지 말고
그 자리서 살게”


“복수초 보셨어요?” “노루귀는 아직 안 나왔죠?”

응달진 골짜기는 얼어 있지만 봄기운이 완연했던 지난 8일, 경기도 남양주시 천마산의 오남리 쪽 계곡에서 만난 등산객들은 낯선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배낭과 스틱 말고도 카메라와 삼각대를 갖추고 계곡 주변을 기웃거리는 품이 여느 등산객과 달랐다. ‘꽃산행’을 나선 이들은 정상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지 않는다. 낙엽을 헤치고 돋아난 앙증맞은 야생화의 사진을 찍고 바라보느라 시간을 보낸다. 이날 반나절 동안 이 계곡에서 만난 꽃산행꾼은 20여명에 이르러 보통 등산객보다 훨씬 많았다.







 

» 앉은부채. 주걱 모양의 포 속에 꽃이 피는 모습이 이채롭다.
 

■ 왜 야생화인가 동네 화단이나 공원에 가도 화려한 봄꽃은 널렸다. 들이나 산에 핀 야생화는 대체로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고 수수한 편이다. 그렇지만 들꽃을 몇 년 찾아다닌 이들은 이런 은근하고 싫증나지 않는 아름다움에 푹 빠진다고 입을 모은다.



 

» 노랑앉은부채. 앉은부채의 변이종으로 천마산 등에서 드물게 볼 수 있다(맨위). 새끼노루귀. 제주도와 남해 섬에 분포한다(가운데). <한겨레> 자료사진. 앵초와 할미꽃(맨아래).
 
10년째 들꽃 사진을 찍고 있는 고재응(52·서울 서대문구 남가좌2동)씨는 “보면 볼수록 수줍으면서 화사한 모습을 발견한다”며 “무얼 찍는지 궁금해하던 등산객들도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 ‘이렇게 고운 꽃이 숨어 있었냐’며 놀라곤 한다”고 말했다.

자연 속에서 꽃과 사귀면서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천마산에서 만난 김낙호(62·경기도 분당)씨에게 야생화 탐사는 항암치료의 하나다. 그는 “한 주에 한두 번 들꽃을 찾아다니다 보면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여유가 생긴다”고 말했다.

시인 김춘수는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했다. 들꽃의 이름을 외고 생태를 알아가는 과정은 커다란 성취이자 희열이다.

대관령의 꽃이 좋아 아예 그곳에서 일자리를 잡은 박대문(60)씨는 “야생화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눈이 열리는 쾌감을 맛본다”고 말했다. 환경부 공무원, 수도권매립지공사와 강원풍력발전 사장을 지낸 그는 최근 식물분류기사 자격증을 따는 등 본격적으로 식물 연구에 빠져들고 있다.



 

» 큰괭이밥.
 

■ 늘어난 동호인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이 ‘꽃산행’이란 말을 만든 1990년대 중반께만 해도 야생화 탐사는 고상한 취미 정도였다. 최근 디지털카메라의 보급과 인터넷이 상승작용을 하면서 야생화 동호인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촬영한 들꽃 사진을 인터넷 동호회 사이트에 올려 품평을 하고 정보를 나누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다른 분야에 비해 중년 이후의 동호인이 많은 것도 두드러진 현상이다. 의정부 정보도서관에서 6년째 야생화 강좌를 운영하고 있는 이명호(52)씨는 “수강생은 40대 이후의 여성이 다수이고 숲해설가 등 퇴직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강좌를 듣는 이들도 많다”고 말했다.



 

» 복수초.
 

■ 주의사항 급증한 동호인으로 인한 부작용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천마산에서 발에 밟혀 싹이 뭉개진 앉은부채를 쉽게 볼 수 있었다. 고재응씨는 촬영이 끝난 야생화에 낙엽을 덮어 숨겼다. “모르고 밟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이 좋은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일부러 훼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일부 동호회를 중심으로 자정 노력도 벌어진다. ‘인디카’는 최근 ‘꽃의 낙원’으로 입소문을 탄 서해 풍도의 야생화 훼손을 막기 위해 단체출사 계획을 취소했다. 야생화클럽 등 많은 동호회가 인터넷에 사진을 올릴 때 구체적인 장소를 명기하지 않는 불문율을 세워두고 있다.

이진동 인디카 회장은 “좋은 야생화 사진을 찍기 위해 낙엽을 걷어내는 것은 날씨 변동이 큰 봄에 이불을 걷어내는 것과 같다”며 “사진기부터 들이대지 말고 꽃과 대화를 해보라”고 조언했다. 사진은 결과물일 뿐 목적이 돼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 큰괭이눈과 노루귀.
 


■ 관찰요령 화려한 접사 사진만 보고 산에 간다면 실망하기 십상이다. 대부분의 야생화는 작고 낙엽에 가려 있다. 따라서 산을 천천히 올라가며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천마산 등 꽃산행으로 유명한 곳에서는 다른 이들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는 것도 요령이다. 전문가나 경험 많은 이들과 동행하는 것도 좋다. 최은경 한국교사식물연구회 회장은 “도감을 휴대해 현장에서 확인하고 돌아와선 찍은 사진과 참고자료를 비교하는 등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식물 지식을 늘리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 얼레지.
 

■ 어디로 갈까 중부지역에선 2월 말부터 변산바람꽃을 시작으로 들꽃이 피어나지만, 본격적으로 많은 들꽃이 피어나는 것은 4~5월이다. 현재 중부지역의 천마산, 화야산, 수리산 등에서 가장 이른 야생화인 너도바람꽃과 앉은부채가 한창이고 복수초, 노루귀 등이 피어나고 있다. 4월부터는 꿩의바람꽃, 만주바람꽃, 생강나무, 현호색, 얼레지, 큰괭이밥 등이 앞다퉈 피어난다.

천마산은 도심에서 가까운데다 희귀한 북방계 식물이 많아 유명하다. 4월에 절정을 맞는다. 수도권에선 광덕산, 명지산, 청계산, 관악산, 북한산 등에서도 많은 야생화를 볼 수 있다. 초보자라면 꼭 희귀종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 곰배령 등 점봉산 진동계곡 일대에서는 4월 말부터 한계령풀 등 희귀 야생화를 볼 수 있다. 자세한 정보는 <사계절 꽃산행>(현진오 지음/ 궁리·2만2천원)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 산까지 가지 않아도 야생화 관찰이 가능하다. 식물원이나 수목원에서는 깊은 산에나 있는 희귀식물을 비롯해 다양한 야생화를 볼 수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인 경기도 용인의 한택식물원을 비롯해, 오대산의 한국자생식물원, 경기도 양평의 유명산식물원, 경기도 포천의 평강식물원 등이 알려져 있다.

또 인천의 수도권매립지에서는 4월30일~5월10일 동안 멸종위기식물, 향기식물, 텃밭식물 등 800여종 3천여점을 선보이는 야생식물 전시회를 연다. 충남 태안군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에서 열리는 안면도 국제꽃박람회도 4월24일~5월20일 열린다.

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 오늘 못 찍으면 내년에 찍지
 

야생화 촬영법

오늘 못 찍으면 내년에 찍지


키가 작은 봄꽃을 찍으려면 소형 삼각대가 필요하다. 요즘 렌즈 교환식 디지털카메라(DSLR)가 많이 보급돼 있지만 초보자라면 소형 콤팩트 카메라부터 시작해도 괜찮다. 봄꽃 촬영에는 렌즈 교환식이라면 접사용 마크로 렌즈를 많이 쓰는데, 콤팩트 카메라에도 대부분 접사 기능이 있다.

날씨가 쉽게 바뀌는 봄철에 야생화를 찍으려면 끈기와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기온과 빛의 양에 따라 꽃의 상태도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적당한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야생화의 섬모 등 섬세한 모습과 아름다운 색감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인물사진과는 달리 역광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다음은 동북아식물연구소가 식물분류 준전문가를 양성할 때 가르치는 식물 접사촬영의 기본 원칙이다.


화면을 가르는 선은 가급적 피한다. 특히 나뭇가지나 커다란 잎이 화면을 가로로 가르지 않도록 한다.

잡광이 들어오지 않도록 한다. 광선이 나뭇잎이나 돌, 흙에 부딪히며 화면에 퍼지지 않도록 한다.

③ 자연 그대로를 보여줄 때 의미가 있다. 광선이 나쁘다고 식물을 옮겨서 찍어서는 안 된다.

오늘 못 찍으면 내년에 다시 와 찍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느긋하게 찍어라.



 

» 현호색. <한겨레> 자료사진.
 


 


야생화 인터넷 사이트


▶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인디카

www.indica.or.kr 10년의 연륜을 지닌 대표적 야생화사이트. 회원 수 5천명이며, 해마다 선출된 회원이 운영을 맡고 후원금으로만 운영하고 있다.

▶ 야생화클럽

wildflower.kr 갤러리 외에도 웹 식물도감과 사진교실, 야생화교실 등이 마련돼 있다.

▶ 풀꽃나라

cafe.daum.net/wildflowerland 회원 수 1만4천명의 다음 카페. 답사 정보 교환과 갤러리 활동이 활발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철도로 가는 지속 가능한 사회] 열차를 타고 열도를 뚫다 [2008.09.19 제727호]
 
일본·독일·프랑스·한국의 철도망 비교… 일본 최남단부터 최북단까지 3126km 기차 여행
 
 
 
 


 
 

당신의 나라에서 ‘철도’는 어떤 교통 수단인가. 나라 안 구석구석을 이어주는 핵심 교통 수단인가, 아니면 도로 우선 정책에 밀려 외면된 대중교통체계인가. 한국의 철도를 바로보기 위해 일본과 독일, 프랑스의 기차에 몸을 실었다. 고유가와 기후변화라는 화두 앞에 경제와 산업 전반은 체질 개선을 요구받고 있다. 고비용 저효율의 상징인 도로 중심의 교통체계를 극복하고 지속 가능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의 철도는 어떠해야 할지 생각해보는 여행을 시작한다. 편집자



 
 


» 홋카이도 시골철도 노선의 모습. 적자 노선이라도 주민들의 발이라는 공공성 때문에 일본 정부는 이런 노선을 포기하지 않고 운영한다.
 
 
 

섬나라 일본은 흔히 열도로 불린다. 하지만 일본은 교통에서 섬이라는 지리적 한계를 극복한 지 오래다. 혼슈와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 등 4개의 주요 섬이 모두 철도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도로는 아직 혼슈와 홋카이도를 연결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철도가 국가기간 교통망을 차지하고 여기에 도로를 결합한 ‘철도국가’인 것이다. 일본 본토 최남단 역인 규슈 가고시마현의 니시오야마역에서 최북단 역인 홋카이도의 와카나이역까지 거리는 3126km, 요금도 5만1450엔(약 50만원)이 넘는다. 쉬지 않고 환승하면 30시간22분이 소요되지만 실제로는 아무리 빨리 가도 2박3일이 걸리는 이 종단철도를 따라가면서, 국가 교통의 핵심을 철도로 삼고 살아가는 일본 사회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어린이·노인의 이동 책임지는 간이역


철길로 일본 국토 종단 대장정을 이어가는 출발은 가고시마현 최남단의 작은 간이역인 니시오야마역에서 시작된다. 이 역은 일본 본토 최남단 역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비해 무척이나 소박하다. 역무원은 물론 제대로 된 건물도 없다. 하루 다섯 차례 오가는 2량짜리 지방 보통열차가 전부이고, 플랫폼 가운데 ‘일본 최남단 역’이라는 표지와 전국 각지까지의 철도 거리를 표시한 안내판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을 뿐이다.

이 역은 일본의 두메산골이나 시골 해안선 철도 노선에서 흔히 마주치는 간이역의 전형을 보여준다. 일본에는 수많은 간이역이 있다. 1량이나 2량짜리 열차에 주민들은 몸도 싣고 마음도 실으며 살아간다. 간이역과 지선 철도망은 일본 철도의 실체이자 바탕이라 할 수 있다. 교통에서 소외돼가는 지역 주민들의 삶과 이동을 보장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없거나 운전을 하기 곤란한 어린이, 학생, 노인 등의 이동을 국가가 확실히 책임지는 것이 일본 철도다. 경제성의 잣대로 지역 노선과 간이역을 폐지하는 우리 현실에서 되짚어볼 대목이다.

 
 


» 일본 철도종단 지도
 
 
 


니시오야마역에서 시골 열차를 타면 이브스키역에서 특급으로 갈아타게 된다. 이 도시는 모래찜질 온천으로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에도 제법 알려진 곳이다. 이브스키에서 탄 특급은 다시 가고시마현 도심에 있는 가고시마 중앙역에서 신칸센으로 갈아탄다. 일본은 세계에서 고속열차망을 가장 먼저 실현했다. 교통량이 충분한 노선을 중심으로 고속철도망을 건설하고 이를 간선 및 지선 철도망과 체계적으로 연결해 국가기간 교통망을 운영하고 있다.

구마모토현의 신야스시로역에서 다시 특급으로 갈아타면 규슈의 중심지이자 일본에서 네 번째 도시로 꼽히는 후쿠오카의 하카타역에 닿는다. 이 지역의 거점역인 하카타역에 와보면 일본이 철도 중심 국가라는 사실을 확실히 체감하게 된다. 하카타역을 비롯해 서일본을 대표하는 오사카역, 중부 지역의 나고야역 그리고 도쿄역을 거쳐 동북 지방의 센다이역과 홋카이도의 삿포로역까지, 각 지방의 거점역에는 신칸센부터 특급·급행·보통·완행까지 하루 수백 편의 열차가 나가고 들어온다. 역마다 대부분 20개가 넘는 플랫폼이 이용되고 있다.

하카타역에서 다시 신칸센을 타고 오사카로 들어가면 도착역은 신오사카역이다. 관서지방을 비롯해 서일본의 중심도시인 오사카는 거점인 철도역도 두 곳이다. 신오사카역은 신칸센을 비롯해 특급과 급행, 보통 등을 아우른다. 오사카역은 신칸센은 없지만 명실상부한 서일본 교통의 중심역이다. 일본의 제2도시로 꼽히는 오사카의 철도교통망에서 심장과도 같은 역이다. 오사카역에서는 사방팔방으로 뻗어가는 일본 철도의 역동적인 모습이 느껴진다. 새벽 5시부터 이튿날 새벽 1시까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일본은 자동차 산업의 강국답게 도로가 잘 연결된 편이지만, 국내의 교통 체계는 국가기간 교통망부터 산골 지역의 기초 시·군까지 철도가 기본적인 교통수단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메이지 시대의 근대화 때부터 철도를 건설했고, 태평양전쟁 이후의 고도성장기에도 철도 우위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합의가 유지됐다. 일본은 장거리 출장이나 여행, 일상생활의 이동에서 철도가 도로보다 확고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쭉 뻗은 신칸센과 간선·지선의 연결

 
 


» 오사카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초등학교 학생들. 일본에서 철도는 생활이자 문화다.
 
 
 


오사카에서 신칸센으로 갈아타고 도쿄에 들어간다. 1964년 도쿄올림픽과 동시에 개통된 도쿄∼오사카 신칸센은 전쟁 이후 고도성장의 상징이자, 일본 교통의 상징이기도 했다. 일본의 경부선인 도카이선은 도쿄∼나고야∼오사카로 이어지며, 일본의 주요 3대 도시가 망라돼 있다. 도쿄역은 일본 철도의 정점이자 출발지다. 모든 철도선은 도쿄역을 중심으로 놓고, 나가면 하행선이고 들어오면 상행선이다.

도쿄에는 도쿄역 외에도 신칸센이 정차하는 우에노역과 시나가와역이 있으며, 이 밖에 교통 거점이 되는 신주쿠역과 이케부쿠로역 등 2개소가 더 있다. 이 역들에는 하루 수천 편의 열차가 오가면서 시민들의 발이 되고 있다. 일본의 심장 도쿄역에서 보면, 사통팔달인 철도 노선의 다양성과 그것에 기반한 편리성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기후변화의 시대에 이산화탄소 배출 감축이라는 국가적 의무에서도 일본은 이미 철도를 통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도쿄에서 북쪽으로 혼슈 최북 지역이자 동북 지역의 주요 광역지자체인 아오모리현 하치노헤역까지 신칸센이 이어진다. 여기에서 현청 소재지인 아오모리역까지는 특급과 나머지 열차들이 다닌다. 아오모리역은 아오모리현의 교통 요지이자 혼슈와 홋카이도를 연결하는 철도망의 핵심 거점 중 하나다. 혼슈와 홋카이도는 아직 신칸센이 연결되지 않았으나 2015년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두 섬을 오가는 모든 열차의 출발·종착은 아오모리역에서 이뤄진다. 아오모리역을 출발한 열차는 세계적인 해저터널인 세이칸터널을 지나서 홋카이도로 연결된다. 이 터널은 53.85km의 해저 구간을 관통하는 터널로, 철도와 도로를 망라해 세계 최장 터널이다.

홋카이도로 들어간 특급열차는 홋카이도의 남쪽 관문이자 어업도시인 하코다테를 지나서 삿포로로 들어간다. 삿포로역도 다른 지역의 중심역처럼 홋카이도의 모든 철도망의 중심이다. 겨울이 한 해의 절반 가까이 되고 겨울엔 상상을 넘는 폭설이 일상인 홋카이도에서 철도는 도로와 비교가 안 되는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곳곳에 드넓은 평원을 자랑하는 일본의 곡창지대 홋카이도에서 철도는 시골 마을마다 연결된 그림 같은 노선을 자랑한다. 평원과 습지를 가로질러 가는 1량짜리 열차가 지긋이 철길 위를 미끄러져간다.

삿포로에서 특급으로 다시 북쪽을 향해 5시간가량 올라가면 일본 철도 최북단 역인 와카나이역에 도착한다. 일본 영토 최북단의 도시이자 철도 최북단인 와카나이는 위도상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북쪽에 있다. 사할린과는 약 15km 떨어졌다. 어업이 중심인 이 도시까지 철도가 연결돼 있는 것이다. 역 플랫폼 맨 끝에서 철길이 끝나고 그곳에 ‘일본 최북단 역’이라는 표지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어업 전진기지인 와카나이시에는 일본 최북단 역을 보기 위해 방문하는 관광객만 하루 20~30명에 이른다.

일본에선 시골의 구석을 지나는 노선에서 철도 마니아들을 간혹 만나게 된다. 철도가 일상이자 삶이기 때문에 평소 가보지 못한 수많은 아름다운 간이역들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다. 열도 최남단에서 최북단까지 종단철도를 통해 바라본 일본 사회의 철도는 생활이자 문화였다.




 


일본 철도 종단 안내


JR패스와 〈JR시각표〉를 챙겨라


일본 최남단에서 최북단까지 철도 종단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스스로의 힘으로 여행할 준비나 자세가 돼 있다면 길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은 필요하다. 일주일 이상은 들여야 그나마 스쳐가면서라도 각 지역을 어느 정도 느껴볼 수 있다. 이런 요구를 깜찍하게 받쳐주는 할인철도권이 있다. JR패스다. 일본 철도를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외국인 전용 패스인 이 할인권은 이용 기간이 7일이다.

돈 걱정 없는 이를 빼고는 이 패스가 일본 철도를 종단하는 방편으로 가장 적당하다. JR패스가 아닌 일반 요금으로는 최남단에서 최북단까지 교통비만 최소 100만원 이상이 필요하다. JR패스는 일본에선 구할 수 없고 미리 사가야 하는데, 인터넷이나 일본 여행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최남단에서 최북단으로 가든지 아니면 거꾸로 최북단에서 최남단으로 가든지 기본 방법만 터득하면 어렵지 않다. 최남단에서 최북단으로 가려면 먼저 후쿠오카로 들어가는 것이 편리하다. 후쿠오카로 들어간 뒤 하카타역에서 남쪽으로 가고시마역을 거쳐 니시오야마로 가서 시작하는 것이 편리하다. 니시오야마부터 시작해 홋카이도의 와카나이까지 가는 노선 중 가장 빠른 것은 후쿠오카, 오사카, 도쿄, 센다이, 하치노헤, 아모모리, 삿포로 등 각 지역의 거점을 거치는 노선이다. 신칸센과 특급, 급행 등을 이용하면 된다.

일본 종단 철도의 기본 거점을 거치지 않고 노선을 변형하는 방법도 추천하고 싶다. 기본 종단 노선이 아닌 다양한 변형 노선은 그야말로 ‘마음 내키는 대로’다. 마음 가는 대로, 발길 가는 대로 가다 보면 알려진 것과는 또 다른 다양한 일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 일본 철도 여정에서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JR시각표〉라는 월간지인데, 일본 공영 철도망과 여기에 연결되는 대중교통망이 모두 나와 있다. 이 책을 잘 활용하면 일본의 웬만한 관광지는 철도를 이용해 다 다닐 수 있다. 역무원이 있는 모든 역에 비치된 JR시각표를 볼 줄 알면, 일본 종단은 물론이고 변형된 어떤 노선의 여행도 반 이상은 해결된 셈이다. 책의 앞부분에 있는, 철도 노선을 펼쳐놓은 개념도를 보면 노선마다 해당 페이지가 표시돼 있고, 그 페이지를 찾아서 다시 펼치면 상하행선 시간이 빼곡히 정리돼 있다.

일본 철도 종단은 여행자의 시각으로도 유익한 체험과 나름의 기쁨을 줄 것이다. 거기에다 조금만 인식의 눈높이를 보태면, 교통에서 지속 가능한 사회를 실현하고 있는 일본 사회의 실상이 그대로 보인다.



 






글·사진 서재철 녹색연합 녹색사회국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겨레

출소하자마자 ‘오야코돈부리’부터?


기사입력 2008-07-26 15:07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매거진 esc] 도쿄 백년 맛집 이야기 다마히데

200년 전통 닭요리집의 그 전설적 메뉴, 영계 대신 170일 넘은 투계만 사용


200년 넘은 닭요리집 다마히데(玉ひで)는, 장어(우나기)를 요리하는 이즈에이 혼텐(伊豆榮 本店)과 함께 가 취재한 시니세 가운데 가장 역사가 깊다.

다마히데는 18세기 막부 시절 도쿠가와가를 수행하던 하급 무사 야마다 데쓰에몬이 ‘투잡’을 위해 만든 것이었다. 야마다 데쓰에몬은 도쿠가와 가문이 사냥에 앞서 학의 목을 치던 의식을 담당하던 하급 무사였다. 학의 긴 목을 칼로 내리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하급 무사의 봉록만으로 먹고살기 힘들어 그는 1760년 다마히데를 창업했다. 8대손인 야마다 고노스케(47)는 “아마 학을 죽일 때 칼을 쓰셨던 분이니까 닭요리를 하는 게 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의 목을 치던 무사의 후손이 닭을 치다

애초 다마히데는 현재의 위치에서 북쪽으로 약 30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1883년(메이지 16년) 무렵 4대손이 본점을 유지한 채 현재의 위치에 지점을 만들어 5대손에게 물려줬다. 2차대전 때 미군이 도쿄 공습을 감행할 당시 원래 자리에 있던 본점은 불탔고 5대손이 경영하던 지점이 외려 본점이 됐다.

어쨌거나 반경 300미터 안에서 200년 넘는 세월 똑같은 식당이 한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한국의 수원화성도 비슷한 시기인 18세기 말에 지어졌다. 그 뒤부터 수원 토박이라면 몇 세대에 걸쳐 “○시에 수원화성 앞에서 만나자”고 말해 왔을 것이며, 몇 세대에 걸쳐 할머니와 어머니와 손녀가 수원화성에 나들이했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을 게다. 지역주민의 피부와 일상에 각인된 존재인 셈이다. 마치 수원화성처럼 지역주민들의 입맛을 책임진 시니세 다마히데의 존재감은 ‘참을 수 없게’ 큰 게 아니었을까?


야마다 고노스케 사장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은 전혀 전통의 무게에 짓눌려 보이지 않는다. “언제 처음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느냐”고 묻자 대뜸 “이야이야 주산사이”라고 말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싫어 싫어, 열세 살”이라는 말이다. 가업을 잇기 너무 싫었지만 할 수 없이 중학교 때 일을 배우기 시작했단다. 직업으로 가업을 잇기 시작한 것은 대학을 졸업한 뒤. 대학 땐 요리와 무관한 매스미디어 이론과 노동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는 “공부는 안 하고 마작만 했다. 졸업하고 할 게 없어서 가업을 이었다”고 장난스레 말했다.



야마다 고노스케는 “가업을 잇도록 정해져 있었다”는 표현을 반복했다. 결정은 누가 했을까? 주어를 알 수 없는 수동태의 문장에 스스로의 우유부단을 감춘 것이 아닌가 못된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하기 싫으면 그만인데 왜 하느냐”고 짐짓 추궁하듯 질문을 던졌다. 얼굴에 장난기를 거둔 야마다 사장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어릴 때 왜 내가 가게를 이어야 하는지 몰랐다. 내 주변에 가부키 배우의 자식인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나는 우리 집 가업 잇고 싶지 않다. 그런데 넌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가업을 이었냐?’고 물었다. 나도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정말 알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다 자식들이 태어났다. 첫딸을 낳았을 땐 주위 친척과 동네 사람들이 그저 ‘축하합니다’라고만 했는데 아들이 태어나니 주변에서 던진 첫마디는 ‘아, 이제 얘가 9대째가 되는군요?’였다. 하루는 아버지(야마다 고지)가 손자를 안고 동네를 돌았다. 닌교초 거리의 사람마다 아버지를 보고 ‘아~ 이 아이가 9대째군요?’라고 묻더라. 그것뿐이 아니었다. 아들을 유치원에 보냈더니 유치원 선생님도 아들을 보고는 ‘아, 네가 다마히데의 9대손이구나’라고 말하더라.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아, 나도 어릴 때 자연스럽게 주변 환경에서 다마히데 가업을 잇도록 만든 거구나라고 말이다. 그걸 내 아이를 보며 알게 됐다.”

‘에도시대의 맛’으로만 굳어질까 두려워

그러나 그는 자식에게 가업을 잇도록 강요할 생각은 없는 ‘신세대’ 아버지다. 아들이 물려받기 바라지만 강요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아들이 가업을 이을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건 자신의 능력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솔직히 가업 이어받으면 편하다. 계승하는 순간 유명인이 된다. ‘네가 이걸 해야 된다’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자식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가게를 잘 운영하지 못하면 그건 내 책임이다.”

야마다 고노스케는 “내 자식이 가업 잇기를 거부할 땐 내 여동생의 자식이나 다른 친척이 가업을 이어도 좋다. 다마히데라는 것만 계속되면 된다”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다른 친척도 가업을 이을 생각이 없을 땐 다마히데의 간판을 내릴 계획이라고 그는 말했다.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손님에게 얽힌 추억이 없을 수 없다. 기타노 다케시가 다시 영화화한 영화 <자토이치>의 원작에서 주연을 맡았던 가쓰 신타로라는 영화배우는 1990년대 초 범죄에 연루돼 교도소에서 잠시 복역했다. 출소하자마자 그는 집에 가는 대신 다마히데로 달려왔다. 도쿄 시내를 곡예 주행하며 교도소 앞에서부터 자신을 따라다니던 기자들을 뿌리쳤다. 현관에서 야마다 사장과 눈이 딱 마주친 가쓰 신타로는 웃으며 “아내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말하며 오야코돈부리(닭고기덮밥)를 욱여넣었다.

야마다 사장은 요리학교는 다니지 않았지만 <미슐랭 가이드> 도쿄판에서 별 세 개를 받은 최고급 일본요릿집 하마다야 등 여러 요릿집에서 3년 넘게 요리 수행을 했다. 요리를 하면서 그가 겪는 어려움은 무게감이다. 다마히데가 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이기 때문에 ‘다마히데의 맛=에도시대의 맛’처럼 돼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다마히데의 맛을 유지하면서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는 게 힘들다고 그는 털어놨다. 사람들은 오로지 전통만 먹으러 식당을 찾지 않는다.

200년 넘은 맛의 비밀은 와리시타에 숨어 있다. 와리시타는 오야코돈부리나 닭고기전골(스키야키)에 사용되는 소스다. 미림(소주에다 찐 찹쌀과 쌀 누룩을 넣어 양조한 조미료)과 쓰유(간장)를 어떻게 섞느냐를 가지고 다마히데의 독자적인 맛을 표현해야 한다.


영계 대신 170일 넘은 투계만 사용



신선한 닭고기를 쓰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80년부터 도쿄도 내의 한 축산장과 공동개발 협약을 맺고 닭을 직접 기른다. 달걀은 한 가게에서 35년째 공급받고 있다. 축산 개발한 닭 외에 닭고기를 구입할 땐 거래관계가 100년 넘은 업체에서 공급받는다. 한국인이 ‘영계’를 좋아하는 것과 달리, 다마히데의 닭은 170일 넘은 투계 품종을 쓴다. 쫄깃한 질감이 닭고기의 생명이라 믿는 까닭이다.

오야코의 ‘오야’는 어머니이고 ‘코’는 아들이란 뜻이다. 달걀이 닭의 자식이므로 닭고기와 달걀이 함께 들어가는 덮밥을 오야코돈부리라고 일컫게 됐다. 오야코돈부리를 한 입 떠넣자 기자와 사진기자, 통역 모두 입 맞춰 “한국에서 장사하면 대박 나겠다”는 말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적당히 달큼하고 적당히 짭조름한 고기를 씹으며 기자는 ‘인간적인 맛’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 주소·연락처 : 도쿄도 주오구 니혼바시 닌교초 이치-주시치-주(東京都 中央區 日本橋 人形町 1-17-10). 영업시간 오전 11시30분~오후 1시, 오후 5~9시. 토요일은 오후 4~8시. 일요일·휴일 휴무. 03-3668-7651.

⊙ 대표 메뉴와 가격 : 오야코돈부리 1300엔(1만3000원). 단, 오야코돈부리만 단품으로 주문할 수 있는 것은 점심때뿐이다. 이 밖에는 모두 코스요리다. 투계 스키야키 코스요리는 5800엔(5만8000원)인데, 오야코돈부리는 포함돼 있지 않으므로 원하면 따로 주문해야 한다. 처음부터 오야코돈부리가 포함된 코스요리는 1만1000엔(11만원).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겨레

“1885년부터 그냥 알아서 줘요”


기사입력 2008-07-26 15:07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매거진 esc] 도쿄 백년 맛집 이야기 스시코 혼텐

메뉴판이 없는 희한한 맞춤초밥집… 나이·성별·국적 따라 크기·모양이 달라



주토로(참치 옆구리살)가 길게 밥을 덮고 있다.

밥의 양이 턱없이 많기 십상인 한국의 초밥과 다르다. 입에 넣자 주위는 금세 명품거리 긴자가 아니라 도쿄만이 된다. 이렇게 시작된 스시코 혼텐(壽司幸 本店)의 점심 코스는 요리사가 서로 다른 재료로 직접 눈앞에서 만들어주는 초밥으로 이어졌다. 가자미, 오징어 초밥으로 이어진 코스는 성게 초밥에서 금세 절정에 달했다. 혀는 개펄이었고 개펄로 밀물이 몰려왔다. 흰새우, 아나고(붕장어), 고히다(중간 크기 전어), 다마고야키(달걀), 표고버섯, 참치살 마구로가 심처럼 박힌 데카마키가 이어졌다. 여기까지가 보통의 1인분이었지만, 조금 더 달라고 말하자 이쿠라(연어알), 새우, 가다랑어 초밥이 더 나왔다. 2008년 <미슐랭 가이드> 도쿄판이 스시코 혼텐에 별 하나를 주며 “에도마에 스시(에도 앞바다에서 잡은 생선으로 만든 초밥)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고 찬양한 맛이다.

까다롭고 까다로운 최상급 쌀 확보작전

창업자의 4대손인 스기야마 마모루(55)에게 요리 비법을 묻자 그가 되묻는다. “쉰 살 남성과 그의 20대 딸과, 여든 살 할머니가 가게를 찾았다. 초밥의 크기가 똑같을까?”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스기야마 마모루는 날카로운 학자 인상이다. 그는 차분한 말투로 50대 남자의 초밥이 이 정도 크기라면 20대 여성에게는 그것의 3분의 2 정도로, 할머니에게는 그보다 더 작게 만들어 준다고 설명했다. 손님에 따라 고추냉이의 양, 밥의 양, 생선 크기도 다 달라진다. 여성 가운데 고추냉이에 약한 손님이 올 땐 그 양을 줄인다. 이런 ‘맞춤 요리’는 서양인의 경우도 마찬가지. 서양인들은 젓가락질이 서툴러 초밥이 부스러지기 쉬우므로 밥을 상대적으로 딱딱하게 지어 생선과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쓴다.


이 ‘맞춤 요리 철학’에서 따로 가격표를 만들지 않는 스시코 혼텐의 정책이 태어났다. 그러니 〈esc〉를 따라 시니세 여행을 온 독자는 스시코 혼텐에 갔을 때 메뉴판이 없어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이달 2일 스시코 혼텐을 방문한 시간은 점심 무렵이었지만, 내부의 조도는 낮아 아늑했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어떤 식재료도 전시하지 않는다. 손님이 들어왔는데 메뉴판도, 전시된 음식도 없다면 손님은 어떻게 주문할까? 그냥 ‘알아서 주세요’라고 하면 된다. 처음 온 분도, 열 번 이상 온 분도 그날 먹고 싶은 게 다를 수 있고, 매일 들어오는 생선의 상태가 조금씩 다르다.” 1대 창업자부터 가격표가 없었다고 한다. ‘맞춤 초밥’에 질 좋은 생선은 기본이다. 같은 업자로부터 50년 넘게 생선을 공급받고 있다. 최상급 쌀을 확보하기 위해 유명한 쌀 산지의 농가 서너 곳과 동시에 계약을 맺고 그해 가장 작황이 좋은 쌀을 공급받는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좋은 재료를 준비하는 게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손님에게 많은 돈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점심 코스가 일인당 약 9000엔(약 9만원)이니 싸지는 않다.

1885년(메이지 18년) 스시코 혼텐을 창업한 1대 역시 메이지유신으로 월급이 사라진 하급 무사였다. 하급 무사는 먹고살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칼을 놓고, 사람을 먹이는 칼을 잡았다. 첫 자리는 긴자가 아닌 신바시였다. 1952년 긴자로 옮겼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삼형제 중 막내여서 자신이 가업을 이으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 때 돈 많이 드는 골프 동아리 활동비를 대려고 주방에서 잠깐씩 일했을 따름이었다. ‘예정대로’ 장남인 큰형이 초밥을 만들었지만, 덜컥 몸이 아파 드러누웠다. 둘째형은 이미 취직해 직장인이었다. 아버지 스기야마 야스조는 셋째아들이 가업을 잇길 바랐다.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던 그는 2대손의 사위였다. 가업을 잇길 바라는 장인의 뜻에 따라 성을 부인의 성으로 바꾸고 양자가 됐다. “남은 게 나밖에 없었다”고 말하며 스기야마 마모루는 처음으로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서른여섯 되던 90년대 초반부터 경영을 책임졌다.

재산은 다 타버려도 손님은 남더라

53년생인 그는 단카이 세대(47~49년 태어나 60년대 후반 격렬한 좌파운동을 경험한 세대)에 가깝다. 아버지와 사고방식이 다르다. 딸만 둘인 그는 “아버지는 ‘내가 양자니까 여기를 망하게 할 수 없었다’고 하셨다. 나는 본류(아들)니까 상황이 안 되면 끝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가족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이어도 된다. 가족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시니세가 지속되는 비결을 물었다. “23년 간토(관동)대지진, 전쟁, 거품경제가 꺼지면서 물게 된 엄청난 상속세. 이 세 가지가 가장 큰 시련이었다. 90년대 초 상속세를 지급하지 못할 상황이 닥쳤다. 그때 내게 남은 게 딱 하나 있었다. 손님들이었다. 손님들은 간토대지진 뒤에도 일부는 살아남았고 전쟁 뒤에도 예전 손님의 3분의 1은 찾아왔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손님이 바뀌기도 했지만, 중심적인 손님들이 있었다. 손님들이 와준다는 건 맛도 있겠지만 우리 집을 신용해주는 것이도 하다. 재산이 타버린다 하더라도 손님은 남아 있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말을 마치고 조용히 칼을 잡았다.






■ 주소·연락처 : 도쿄도 주오구 긴자로쿠초메 산반 하치고(東京都 中央區 銀座6丁目 3番8호). 영업시간 오전 11시30분~밤 10시30분. 03-3571-1968.

■ 대표 메뉴와 가격 : 일인당 점심 약 9000엔(9만원), 저녁식사 2만5000엔(25만원). 정해진 메뉴판이 없어 가격에 변동이 있으며, 대개 이보다 덜 나온다. 1만엔(10만원) 수준의 와인을 중심으로 와인 리스트도 갖추고 있다.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事实 2008-08-29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很好啊

해콩 2008-08-29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眞的?
 

한겨레

당당한 수타면, 1000인분을 쳐라!


기사입력 2008-07-24 17:07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매거진 esc] 도쿄 백년 맛집 이야기 간다 마쓰야

100년 인테리어 분위기 속에 먹는 100년 소바…“사위·딸에겐 절대 가업 못 물려줘”


일본으로 떠나오기 전 머릿속에 상상했던 시니세.

6월30일 저녁 8시 땅거미 진 거리에서 바라본 소바(메밀국수)집 간다 마쓰야(紳田 まつや)의 이미지가 딱 그랬다. 농구선수 사이에 선 일반인처럼 현대식 빌딩 사이에 끼인 듯 서 있는 건물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연방 흘러나왔다. 고동색 색감의 목조건물에서 시간과 유행에 완강하게 버티는 고집이 느껴졌다.

상상 속의 시니세와 딱 떨어지는 느낌

상상의 시니세와 현실의 시니세 이미지의 놀라운 일치는 6대손에 해당하는 고다카 다카유키(43)의 외모에도 이어졌다. 앙다문 입술과 180㎝에 90㎏이 넘어 보이는 커다란 덩치에는 ‘듬직하다’는 형용사가 잘 어울렸다. 식당 주방 옆에 1평이 채 안 되는 작업실에서 고다카 다카유키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밀가루 반죽을 쾅쾅 도마에 내리친다. 작업실 사방은 나무칸막이로 막혀 있지만 손님들이 수타면을 만드는 광경을 볼 수 있도록 위쪽은 유리로 돼 있다. 반죽을 내리칠 때마다 삼두박근과 상완근이 꿈틀거렸다. 짙은 눈썹의 사내는 내리친 반죽을 봉으로 밀어 얇게 편 뒤 다시 말았다. 온 신경을 집중해 조심조심 손바닥만한 철판 모양의 소바칼(소바보초)로 반죽을 썰 때마다 간다 마쓰야의 전매특허인 수타소바가 탄생했다.

왜 시니세를 물려받았느냐고 물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고다카 다카유키의 대답 역시 교과서적이다. 그는 “어느새 (소바 만드는 게) 내 일이 돼 있었다. 내 갈 길이 정해져 있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아버지가 ‘너 이거 해야 된다’ ‘이 길을 가라’ ‘요리사가 되어라’ 이런 말은 한 번도 안 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이 일을 돕게 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여기까지 왔다.” 그는 대학 졸업 뒤 3년 정도 다른 일을 경험해볼까도 생각해봤고, 다른 소바집에서 요리 수련을 쌓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만뒀다. “본격적으로 하려면 대학 졸업 직후 바로 시작하라”는 아버지 고다카 도시의 충고를 그대로 따랐다.

내친김에 자식에게도 가업을 잇게 할 것인지 물었다. 고다카 다카유키는 여전히 웃음 없이 무덤덤하게 “3녀1남인데 아직 누가 이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이 원하면 이 가게를 물려줄 생각이다. “속으로는 먼저 말해주길 바란다. 자발적으로 한다면 그것보다 좋은 건 없다. 아마 한다고 할 것 같다”는 대답이 이어졌다.

도쿄의 시니세는 서로 알고 지내는 곳이 많다. 고다카 다카유키는 스시코 혼텐의 스기야마 마모루 사장과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다. 그러나 가족 외 다른 사람이 시니세를 이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서 고다카 다카유키와 스기야마 마모루 사장의 철학은 다르다. 고다카 사장이 ‘강경파’라면 스기야마 사장은 ‘온건파’에 해당한다.





거울과 계산기까지 고풍스런 분위기에 한몫

고다카 다카유키는 아들이 가업 잇기를 거부한다면 간다 마쓰야 간판을 내릴 생각이다. 수타면을 직접 만들고 가게를 경영하는 일은 딸들이 하기엔 너무 어렵다고 그는 말했다. “스시코 혼텐처럼 사위에게 가업을 잇게 할 수 있지 않으냐”고 묻자 “사위가 계승한다고 해도 맛은 그렇게 쉽게 계승되는 게 아니다. 맛이 달라질 게 불 보듯 뻔한데, 그리고 손님들한테 ‘맛이 달라졌다’는 말을 들을 게 뻔한데 그걸 그대로 용납할 순 없다”고 말했다. 딸과 사위가 소바집을 연다면 맛에 대한 도움은 주겠지만 간다 마쓰야란 이름은 쓰지 못하게 할 것이란다.


간다 마쓰야는 1884년 후쿠시마라는 성을 가진 평민이 처음 열었다. 23년 간토대지진으로 건물이 다 무너지고 일대가 폐허가 됐다. 간다 마쓰야도 문을 닫을 처지가 됐는데, 당시 근처에서 술집을 경영하던 고다카 다카유키의 증조할아버지가 이를 인수했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고다카 다카유키는 인수자의 4대손이며, 연대기상 간다 마쓰야 창업자와의 나이차를 계산하면 약 6대째에 해당한다.

가업을 잇는 데는 게이오대학 법학부에서 수학한 아버지 고다카 도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도 장남이었다. 대신 동생들은 회계사와 판사가 됐다. 고다카 도시는 “다른 소바집은 일하는 게 힘들어서 장남들이 많이 도망가 차남이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집은 운이 좋아 계속 장남이 가업을 잇고 있다”고 말했다.

의자와 탁자가 모두 오래된 질감의 목재로 만들어져 있다. 입구에 걸린 거울은 소바집을 인수한 증조할아버지가 술집을 운영할 때 쓰던 100년 가까이 된 ‘보물’이다. 고즈넉하다. 소바를 한 젓가락 먹을 때마다 ‘지금 당신은 100년 넘은 소바집에서 100년 넘은 맛을 먹고 있습니다’라고 일깨워주는 느낌이랄까? 계산대의 독일제 젠마크 계산기 역시 고풍스런 분위기에 한몫한다. 쇼와 5년(1930년)부터 썼다는 계산기를 아직 사용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묻자, 고다카 도시는 심드렁하게 “그냥 버리지 않아서 쓴다”고 답했다.

고다카 다카유키가 심각한 표정으로 정성스레 만든 모리소바(찬 소바)는 본가다랑어 국물로 만든 쓰유(간장)에 적셔 먹었다. 짭짤하고 시원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온면에 해당하는 가시와 난반 국물을 떠넣었다. 첫맛은 약간 비릿했지만, 뒷맛은 구수했다. 가시와 난반의 국물은 ‘고등어 부시’(고등어를 말려 가루로 낸 것) 등 세 종류의 서로 다른 부시(가루)로 맛을 낸다. 자극적이지 않고 웅숭깊었다.

메밀 공급하는 가게와 5대째 관계

100년 넘은 맛의 비결에 대해 고다카 다카유키는 좋은 재료를 강조했다. 이와 함께 수타법 기술은 면을 기계로 뽑는 다른 소바집과 비교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간다 마쓰야는 소바 시니세 연합에 속해 있다. 소바집 가운데 3대 넘게 이어진 가게들이 연합회를 만들었다. 이 시니세 연합 안에서도 수타면을 고집하는 곳은 간다 마쓰야를 포함해 서너 곳뿐이라고 고다카 도시는 설명했다. 고다카 다카유키를 포함한 요리사 5명은 손님이 몰리는 토요일엔 이렇게 일일이 손으로 1천인분의 소바를 만들어낸다. 좋은 재료는 이번에 취재한 모든 시니세의 기본 덕목이었다. 간다 마쓰야도 메밀을 공급받는 가게와 5대째 관계를 이어간다.

밤 10시. 인터뷰가 끝나갈 때쯤 ‘강경파’들은 어느새 이웃집 아저씨·할아버지로 변해 있다. 고다카 도시는 “시니세 하면 교토다. 도쿄는 시니세가 적다. 교토에서는 100년 됐다고 시니세에 안 끼워준다. 300~400년은 돼야지”라고 말하며 웃는다. 그 옆에서 험상궂은 고다카 다카유키도 그제야 입가에 보일락 말락 웃음을 띤다. “돈가스 시니세 ‘호라이야’도 취재한다고? 거기 우리도 종종 간다. 고기가 아주 두껍지. 스시코 혼텐에 가면 아들 고다카 다카유키 안부 전해주고, 다마히데(玉ひで)에 가면 내 소식 전해줘!” 떠나는 취재진에게 고다카 도시가 손을 흔들며 부탁했다.






⊙ 주소·연락처 : 도쿄도 간다스다초 이치-주산(東京都 神田須田町 1-13). 영업시간 오전 11시~저녁 8시. 토요일 축일(휴일)은 저녁 7시까지. 일요일 정기휴무. 03-3251-1556. www.kanda-matsuya.jp. 기치조지의 도큐백화점에 지점이 있다.

⊙ 대표 메뉴와 가격 : 모리소바(찬 소바) 600엔(6000원), 가시와 난반 950엔(9500원).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