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나 꽃이 되어

 

나 하나 꽃이 되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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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글샘 > 공직자에게... 다산 정약용의 글

  꿈과 이상이 높던 다산, 세상이 올바르게 돌아가고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도 바랐습니다. 그런 모든 꿈을 다산은 공직자들에게 걸었습니다. 공직자들만 청렴하고 깨끗해지면 원하는 세상이 온다고 굳게 믿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500권이 넘는 다산의 저서는 대부분 공직자들에게 고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선 4지(四知)를 가르쳐줍니다. 내가 알고 있고, 네가 알며,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있어 아무리 비밀스럽게 주고받는 뇌물일지라도 반드시 들통이 날 수 밖에 없음을 고지해줍니다. 다음으로 4외(四畏)를 가르쳐줍니다. 공직자라면 감독관청과 정부를 두려워하고 백성과 하늘을 두려워하라고 고합니다. 감독관청과 정부야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두려워하면서, 가장 무서운 백성과 하늘은 두려워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공직자들을 책망까지 했습니다. 

  다음으로 징계권을 지닌 공직자들에게는 4형(四刑)을 고해줍니다. 하급관료가 죄를 지어 형벌로 징계할 때에 네 가지로 구분하여 징계하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상형(上刑)이니 민사(民事)에는 가장 무거운 형벌을 내리고, 공사(公事)에는 중형(中刑)을, 관사(官事)에는 하형(下刑)을 내리고, 사사(私事)에는 일체의 징계를 하지 말라고 고합니다. 

  그러면서 민사, 공사, 관사, 사사가 무엇인가도 자세히 풀어서 설명합니다. 백성들의 이해(利害)에 관한 일에 잘못하면 가장 무거운 상형, 징계권자 개인의 일에 공직자가 잘못한 경우에는 일체의 징계를 금하라는 권고이니 너무도 타당한 주장이 아닌가요. 군수나 시장의 집안일이나 가족의 일에 하급관료가 등한하고 실수를 했기로서니 처벌을 한다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사지, 사외, 사형의 원리만 제대로 이해해서 그대로 실천에 옮긴다면 세상이 얼마나 깨끗해지고 맑아지겠습니까. 이 시대의 공직자들도 다산의 고함에 귀 기울여 실천으로 옮겨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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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글샘 > 쓸 데 없는 걱정...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다.
걱정의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다.
걱정의 22%는 사소한 고민이다.
걱정의 4%는 우리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한 것이다.
걱정의 4%는 우리가 바꿔놓을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다.
- 어니 젤린스키의 《모르고 사는 즐거움》 중에서 -
한마디로 걱정이라는 것은 그 100%가 쓸데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부질없는 걱정일랑 하지말고 낙천적으로 사십시오.
그렇다고 낙관적으로 살지는 마십시오.
낙천적(樂天的)인 것과 낙관적(樂觀的)인 것은 전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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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글샘 > DIY...네 일은 스스로 결정해라.

따돌림을 받을까 두려워서
집단에 맹목적으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
네가 할 일은 네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 고승제의 《구멍가게 둘째딸 마가릿 대처》 중에서 -

영국의 전 수상 마가릿 대처의 아버지 알프레드가 대처에게 한 말입니다. 이 말은 대처가 평생 간직한 인생 철학이 되었다고 합니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한번쯤은 따돌림을 당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따돌림이 주는 고통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돌림을 당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스스로 행동하라”는 것이 대처 아버지가 딸에게 준 충고입니다. 집단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보다 따돌림이 차라리 낫다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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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들고

지을 수 있는 모든 얼굴을 지어보네

울다 지친 때

 

거울 가게 앞을 지나다가

문득 놀라네

초라한 모습으로 걷고 있는 내 모습에

 

~1915년에 그린 <이중 자화상>은 실레의 자화상 중에서도 가장 기발한, 하나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이는 어깨 위, 아니 거의 목 위쪽만 있는 두 개의 상을 조합한 것인데 아래쪽의 얼굴은 눈을 부라린 채 오로지 한 점을 응시하고 있다. 위쪽의 인물은 음울하고 고통스런 표정의 사내가 사랑스럽다는 듯, 아래쪽 사내의 머리에 볼을 갖다 붙인 채 앞쪽을 보고 있다. 그 역시 눈을 크게 뜨고 있으나 응시의 시선이라기보다는, 그림을 보는 사람의 반응을 은밀하게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아래쪽의 인물이 오로지 자기 내면에만 골몰해 있다면, 위쪽의 얼굴은 반은 아래쪽 인물에게 마음을 빼앗 채, 반은 과연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눈빛으로 주위의 반응을 엿보고 있는 느낌을 준다.

  둘다 실레의 자화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표정이다. 아래쪽의 얼굴은 심각한 계열에, 위쪽의 얼굴은 다소 익살맞은 유형에 속한다. 따라서 위든 아래든 한쪽을 손으로 가린 채 다른 한쪽만을 보면 여느 때오 같은 실레의 자화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양쪽이 동시에 보이는 순간, 뭐라 말할 수 없는 묘하고 이상한 분위기가 배어 나온다. 만일 두 사람이 남자와 여자였다면 아래쪽은 사랑을 받는 남자, 위쪽은 사랑을 주는 여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받는 자의 무겁고 고통스런 표정이 훨씬 윤곽도 진하고 입체적이며 실질적으로 느껴짐에도 한참 동안 보고 있으면 눈길을 강렬하게 끄는 것은 오히려 사랑을 주는 자의 평면적인 얼굴임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 자화상의 주요 모티프는 사랑하는 쪽에 있다. 그러헥 볼 때 이는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근친상간적 그림이 아닐까. 분석하거나 구성하는 식의 지적인 인상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실레 내부에서 두 개의 육체가 생생하게 뒤얽혀 있는 것을 그대로 옮겨 온 듯한 느낌이 든다. 더구나 그들의 표정의 밑바닥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왠지 모를 성性의 냄새이다.

이 작품이 나르시시즘의 색채를 풍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기색은 전혀 없다. 여백안에 떠오른 두 사람은 서로 몸을 붙이고 서로의 고독에 기댐으로써 쓸쓸함의 작은 둔덕이라도 세우려는 듯하다.


 

-구로이 센지 지음, 김은주 옮김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 2003. 87~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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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4-11-12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노래방에서 보던 에곤 실레 책은 환상이던걸요... ㅋㅋ

느티나무 2004-11-12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어제는 샘 덕분에 무사히 잘 왔네요. 샘이 하신 일 덕분에 우리가 잘 하고 있다는 칭찬도 받고... ㅋㅋ

해콩 2004-11-12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상?...! 어느 부분을 보신건데요? (노골적이고 아주 솔직한 그림이 대부분이던데..ㅋㅋ) 제가 한 일? 무엇? 혼자 한 일은 없는디요. 다 '짱'님이 하자는데로 시키는데로 했을 뿐인뎁쇼.. 버튼도 샘이 다 고생했고.. 멜 보내는 것도 저는 따라만 할 뿐이죠. 근데.. 내년이 좀 걱정이예요. 샘 의중은 어떠신지 궁금하네요.

해콩 2004-11-12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참, 그리고 담부터 그렇게 늦게 택시 탈 일 있으면 꼭 집앞까지 타고 가세요. 일부러 너무 많이 걷지 마시고요. 그 시간에 그렇게 내려주고 가는 맘이 편칠 않던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