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지도자 - 루쉰 산문집『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요즘 들어 청년이란 말이 유행이다. 입만 열면 청년이요, 입을 닫아도 청년이다. 그러나 청년이라 하여 어찌 일률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중에는 깨어 있는 자도 있고, 잠자고 있는 자도 있으며, 혼미한 자도 있고, 누워 있는 자, 놀고 있는 자도 있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물론 전진하려는 자도 있다.

  전진하려는 청년들은 대체로 지도자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그들은 영원히 지도자를 찾지 못할 것이다. 찾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행운이다, 자기 스스로를 아는 자라면 지도자의 자리를 사양할 것이다, 지도자이길 자임하고 나서는 자가 과연 나아갈 길을 진정으로 알고 있을까? 길을 안다고 나서는 자들은 대개 30세가 넘고, 빛이 바래고 노티가 흐르는 자들로, 그저 원만하다는 것뿐인데 자신이 길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정말 길을 알고 있다면 자신이 벌써 자기의 목표를 향해 전진하였을 것이고, 지금껏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을 리 없다. 불법을 설교하는 스님이든 신선의 약을 파는 도사이든, 언젠가는 우리와 똑같이 백골로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에게 극락으로 가는 이치를 묻고, 하늘나라에 갈 비결을 구하려 하니, 실로 가소로운 일 아닌가!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을 모조리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들과 그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그럴 수 있다. 말하는 사람은 그저 이야기나 할 줄 알고, 붓이나 놀리는 사람은 그저 붓이나 놀릴 줄 안다. 그런데 누가 그더러 주먹을 쓰라고 하면 그것은 시키는 사람 잘못이다. 주먹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진작 주먹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아마 재주넘기를 하라고 할 것이다.

  일부 청년들은 각성한 것처럼 보인다. 『징바오푸칸 京報副刊』에서 청년들의 필독서를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이 투덜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믿을 건 自己 자신밖에 없어!” 비록 살벌한 상황이지만 나도 대담하게 한 마디 한다면, 자기 자신조차도 꼭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들은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다. 이것 역시 인생에 특히 중국에서는 고통스러운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럴 것이다, 기억력이 좋으면 아마 그 무거운 고통에 짓눌려 압사할 것이다. 기억력이 나빠야 적자생존할 수 있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우리들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어찌어찌하여 오늘은 옳은데, 어제는 잘못되었다거나 겉과 속이 다르다거나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싸운다거나 하는 일을 떠올린다. 우리들은 아직 굶어 죽을 정도로 배가 고파서 아무도 없을 때 남의 밥그릇을 넘본 적이 없다, 죽을 정도로 가난하여 남몰래 남의 돈을 넘본 적이 없고, 성욕이 넘쳐서 이성을 보고는 아름답다고 느낀 적도 없다. 그러기에 나는 큰소리를 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본다. 기억력이 좋다면 나중에 그때에 가서 얼굴이 붉어질 테니까.

  혹시 자신을 믿을 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도리어 믿음직스러울지도 모른다. 청년들이 금 간판이나 내걸고 있는 지도자를 찾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차라리 벗을 찾아 단결하여, 생존의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나으리라. 그대들에게는 넘치는 활력이 있다. 밀림을 만나면 밀림을 개척하고, 광야를 만나면 광야를 개간하고, 사막을 만나면 사막에 우물을 파라. 이미 가시덤불로 막힌 낡은 길을 찾아 무엇 할 것이며, 너절한 스승을 찾아 무엇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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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무덤

         보편성과 영원성, 완전함. 이 세가지는 자연 대단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작가의 무덤이어서 작자를 죽게 만든다.

 

 

의심많은 중국인

         중국인들은 의심이 많다.

         어느나라 사람이나 이를 두고 우스운 결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회의는 나쁜 것이 아니다.

         의심만 하고 판단을 내리지 않는것. 이것이 결점이다.

 

 

누가 복고를 원하는가

         전에 잘 살았던 사람은 복고를 원하고

         지금 잘 살고 있는 사람은 현상 유지를 원하고

         아직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은 혁신을 원한다.

         대체로 이러하다. 대체로...

 

 

노예의 만족

          우리는 아주 쉽게 노예가 되며, 노예가 된 뒤에도 아주 좋아한다.

 

 

절망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하듯이

 

 

꿀벌과 시니스트

           꿀벌은 침을 일단 사용하면 자기 생명을 잃는다

           시니스트cynist는 침을 일단 사용하면 자기의 생명이 연장된다. 그들은 이처럼 다르다

 

 

위험

           위험은 사람을 긴장시킨다

           긴장은 자기의 생명력을 느낄수 있다. 위험속에서의 만유漫遊는 좋은 것이다

 

 

자유와 위험

           소극적으로 편안하게 사는데는 자유가 없다

           자유를 가지려면 다소 위험을 겪어야 한다.

           단지, 여기서의 '자유'는 사람들이 그러하다고 느끼는 그것일 뿐이다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朝花夕拾)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하듯.

 

우승자를 존경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뒤떨어졌으되 기어이 결승점까지 달려가는 주자와 그런 주자를 진지하게 보는 관객, 그들이야말로 중국 미래의 대들보이다.  p44

 

어린 아이가 어느 일에서든 자신을 남만 못하다면서 주눅이 들어 굽신거리거나 얼굴에는 언제나 알랑거리는 웃음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음모를 꾸미는 그런 아이들보다야 차라리 대놓고 <이게 무슨 아빠야>라며 대드는 아이가 나는 더 좋다.  '내<반동>자식을 보며'에서 p48 
 
꼴찌를 부끄러워 않는 사람이 많은 민족은 어떤 일에서건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듯 그렇게 일시에 무너지지는 않는다.                 '선등과 꼴찌'에서 p53

 

힘으로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자는 결코 마음을 복종시키지는 못한다  p56

 

일을 한 차례 겪고 나면 그만큼 지혜로워진다.  p58

 

사람들은 사교의 필요 때문에 한 곳에 모여 살고, 또한 각기 싫어하는 많은 성격과 흉한 결함 때문에 떨어져 산다.  p59

 

우리는 많은 죄인들을 <누군가에게 밉게 보인 사람들>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p62

 

<지상의 천당은 성인의 경전과 말잔등, 그리고 여인의 가슴에 있다.>  p68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p73

 

독이 없으면 대장부가 아니다. 그러나 글로 나타내는 독은 단지 小毒일 뿐, 최고의 경멸은 無言이다. 그것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채로의 무언  '독이 없으면 대장부가 아니다.' p84

 

울분은 어쨌든 변혁의 방아쇠다. 그러나 먼저 자신부터 변혁한 다음 사회를 변혁하고 세계를 변혁해야 한다. 그저 울분만 품고 있어서는 안된다.    '분에 못이겨 죽다.' p91
 
한밤중에 문득 부끄러움을 느끼고 새벽녘에 뉘우쳐 본 적은 있는가?  p90

 

이전에 잘 살았던 사람들은 복고를 주장하고 현재 잘 사는 사람들은 현상유지를 주장하며, 아직 잘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혁신을 주장한다.  p96

 

인류의 슬픔과 기쁨은 상대방에게 통하지 않는 법이다. 내게는 단지 그들이 법석을 떨고 있다고 느껴질 뿐이다.  p97

 

사람이 적막을 느낄 때 창작은 탄생한다. 마음속이 깨끗할 때 창작은 탄생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창작의 뿌리는 사랑이다.  pp88~99

 

중국인들이 사서 고생하는 근본원인은, 받들어 올리기만 좋아하는데 있다. 복이 저절로 굴러들게 하는 길은 내려 파는 방법이다. 사실 어느 쪽이나 드는 힘은 비슷하다. 그런데도 타성에 젖은 사람은 역시 받들어 올리는 쪽이 힘이 덜 든다고 생각하고 있다.     - '받들어 올리기와 내려 파기' p106

 

용감한 자는 분노하면 칼을 빼어들고서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달려든다. 비겁한 자는 분노하면 칼을 들고서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달려든다. 구원의 가망이 없는 민족에게는 아이들한테만 눈을 부라리는 영웅들이 수두룩하다.   p125

 

빛이 어둠과 단호히 투쟁하지 않으며 순진한 사람들이 악에 대한 방임을 관용이라 잘못 생각하며 계속 고지식한 태도를 유지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혼돈 상태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p147

 

먹으로 쓴 거짓이 피로 쓴 사실을 가릴 수는 없다. 피의 빚은 반드시 같은 것으로 갚아야 한다. 그 빚은 갚음이 늦으면 늦을수록 이자가 늘어나기 마련이다.   - '꽃 없는 장미' p153

 

총에 맞아 청년의 피가 쏟아졌다. 피는 먹으로 쓴 거짓으로는 가릴 수 없으며, 먹으로 쓴 만가(輓歌)로도 취하게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위력으로도 짓누를 수 없다. 그것은 더 이상 속지도, 죽지도 않기 때문에!  p154

 

만일 인민 대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고, 그들의 풍속과 습관을 연구, 해부하지 않으며, 그 좋고 나쁨을 분별하여 존폐의 기준을 세우지 않는다면, 어떤 개혁이든 습관의 바위돌에 눌려 으깨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표면에서 부유하는데 머물 뿐이든지. 서재에서 책을 떠받들면서 종교를 논하고, 법률을 논하고,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논한다 해도 민중의 습관과 풍속을 알아야하며, 아들의 어두운 측면을 직시할 용기와 강인함이 있어야 한다.

개혁의 길은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저 미래의 광명만을 외치는 것은 , 게으른 자신과 게으른 청중을 기만하는 일일 뿐이다.  '민중속으로' p181
 

천재가 나오기를 요구하기 전에 천재를 기를 수 있는 민중이 있기를 요구해야 한다. 튼튼한 나무를 얻거나 고운 꽃을 보려면 반드시 좋은 흙이 있어야 한다. 흙이 없으면 꽃도 나무도 있을 수 없다. 그러기에 꽃이나 나무보다 흙이 더 중요하다.  p194

 

배부른 사람들은 배고픈 사람을 사랑할지 몰라도 배고픈 사람은 배부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p207
 
노동자. 농민이 해방되지 않는 한 노동자. 농민의 사상은 여전히 지식인의 사상 그대로입니다. 노동자. 농민이 진정한 해방을 획득한 후에야 진정한 민중문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진정한 민중문학을 위하여'p217

 

추억이란, 사람을 즐겁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쓸쓸하게 만들기도 한다. 지나가버린 쓸쓸한 시간을 마음속의 실 한 올로 매어둔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오히려 그것들을 완전히 잊어버리지 못한데서 고통을 느낀다.  p223

 

정신을 개혁하는데 가장 좋은 것은 문예다.  p225

 

한 사람의 주장이 남의 찬성을 얻으면 전진이 촉진되고, 반대를 얻으면 분발이 촉진된다.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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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의파들의 위선>

사람은 생존해야 한다. 하지만 그 목적은 진화를 위해서다.

괴로움을 견디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목적은 장래의 모든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전투도 더욱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목적은 개혁을 위해서다.

남의 자살을 비난하는 자는 비난을 가하는 한편 사람을 자살로 내모는 환경에 도전하여 공격을 가해야한다.

암흑의 중심 세력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화살 하나 날리지 않으면서 약자에게만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 자가 있다. 그가 아무리 정의파라고 하더라도,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고, 나는 정말 참을 수 없다. 그들이야말로 살인방조자들이라고.

루쉰 [희망은 길이다-루쉰 아포리즘], 이욱연 편역, 이철수 판화 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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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1-09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적 때문에 비관, 자살하는 아이들이 한해 평균 200명이라고 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자신의 삶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그 아이들이 생각났다. 사람들은 '다른 아이들은 다들 잘 견뎌내는데 의지가 약한 것'이라고 자살한 아이들을 비난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그리 약하게 길러내는 학교 교육'을 다시 비판한다. 죽음이라는 극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회환경에 대해 공격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란다. 적자생존의 원칙이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그 지독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자 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단다. 살인방조자.. 어쩌면 우리 모두는...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험 좀 못치고 성적 좀 못나와도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작은 것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아이들... 아이들을 그렇게 가르키는 그런 학교였으면 좋겠다.

물만두 2004-11-09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하죠. 우선 자신부터 내성을 기르는 것이 첫째요, 부모의 가치관이 바뀌는 것 또한 첫째요, 사회와 교육이 바뀌는 것이 첫째라 생각됩니다. 이것이 모두 맞물릴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겠지만 쉬운 일 아니죠. 그러니 적자생존이라는 말 마따나 내 자신 내가 제일 귀하게 여기는 것을 스스로 알아가는 것, 그것이 우선 길이라 생각됩니다. 어른들이 바뀌기를, 사회가 바뀌기를 바라기보다 그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싶네요. 좌절 금지. 비관 금지. 나를 사랑하기... 이것이라도 우선 가르치심이...
 

하나    길이란 무엇이던가? 없던 곳을 밟고 지나감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니던가. 가시덤불을 개척함이 아니던가. 길은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다. <生命之路>, <<熱風>>, 1:368, 1919.

둘        세상에 분투없이 열리는 길은 없다. <방황>, <<傷逝>>, 2:121, 1925

셋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故鄕>, <<납함>>, 1:485, 1921

*납함(口內喊) : 적진을 향하여 돌진할 때, 군사가 일제히 고함지름.

넷        인생이라는 기나긴 길을 갈때 가장 쉽게 직면하는 것은 두 가지 난관이다. 그 하나는 기로에 섰을 때이다. 묵자는 통곡을 하고서 돌아섰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울지도 않고 돌아서지도 않을 것이다. 먼저 갈림길 머리에 앉아 조금 쉬거나 한숨 잔다. 그런 뒤 갈 수 있어 보이는 길을 택해 간다. 만일 진실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의 먹을 것을 빼앗아 배고픔을 면할 것이다. 하지만 길을 묻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호랑이를 만나면 나무에 올라가 호랑이의 허기가 사라지고 지나간 뒤에 내려올 것이다. 가지 않으면 나는 나무 위에서 굶어죽을 것이다. 그리고 끈으로 내 몸을 나무에 묶에 시체조차도 호랑이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다. 나무가 없으면 방법이 없다. 잡아먹으라고 하는 수밖에. 하지만 호랑이를 한 번 물어도 괜찮을 것이다. 다름은 막다른 길이다. 완적선생도 크게 울고 돌아섰다고 한다. 하지만 난 기로에 섰을 때처럼 계속 나아갈 것이다. 가시덤불 속을 한동안 걸을 것이다. 온통 가시밭이고 갈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그런 곳을 만난 적이 없다. 세상에 본디 막다른 길이란 본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운이 좋아 만나지 못했거나. <兩地書250312>, <<兩地書>>, 11:15, 1925

 

루쉰 [희망은 길이다-루쉰 아포리즘], 이욱연 편역, 이철수 판화 2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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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은 저절로 생기지도 않지만 억지로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길은 길이 아닌 곳을 오래오래 다님으로써 길게 이어진다. 길은 인간이 지상에 남긴 자취들 중에서 가장 강인하고 가장 겸손하다. 길은 마침내 산하를 건너가지만 산하와 대결하지 않는다. 산맥을 넘어갈 때, 길은 산맥의 사나움을 건드리지 않는다. 길은 땅의 가장 여리고 순한 곳을 찾아서 구불구불 돌아나간다. 지금은 폐도가 되어버린 대관령의 아흔아홉 굽이나 문경새재의 옛길, 그리고 김정호(金正浩)가 대동여지도 목판에 칼끝으로 새겨넣은 전국의 역참로는 모두 그렇게 강인하고도 겸손한 길이었다.

  18세기 조선의 지리학자 신경준(申景濬)은 [도로고(道路考)]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무릇 사람에게는 그침이 있고 행함이 있다. 그침은 집에서 이루어지고 행함은 길에서 이루어진다. 맹자는 말하기를 인(仁)은 사람의 집안을 편안케 하고 의(義)는 길을 바르게 한다고 하였으니 집과 깊은 그 중요성이 같은 것이다. 길은 원래 주인이 없고 오직 그 위를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신경준의 길은 아직 상징성을 걷어내지 않은 길이었는데, 그 길은 자연과 인륜, 밀실과 광장, 존재와 존재 사이를 소통시키는 공적 개방성 속으로 겨우겨우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길은 산맥과 강을 이리저리 비켜서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이쪽에서 저쪽으로 오고가는 일의 지엄함을 가르쳐주는 길이었다. 그래서 그 길을 가는 자가 그 길의 주인이고, 여행자는 소통의 주체로서 그 길을 가고 또 돌아온다. 그러므로 길은 구조물이 아니고, 인간과 외계 사이의 교섭의 자취다. 길은 그 위를 가는 자에게는 통로이지만, 길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풍경이다. 그 풍경은 인간과 자연의 사이를 비집어가면서 가늘게 이어진다. 정동진의 바다가 풍경으로서 아름다운 까닭은 산과 바다 사이로 한 줄기 길이 뻗어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이 산과 바다를 사람의 마을 쪽으로 끌어당겨 준다. 그 길은 갈 수 있는 땅의 맨 가장자리에서 갈 수 없는 곳의 아름다움을 알게 한다.

  고속도록는 길이라고 할 만한 굴곡이나 표정을 거느리지 않는다. 고속도록에서는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의 여정이 축적되지 않는다. 서울과 부산의 사이가 증발해 버린다, 서울이 있고, 그 다음이 부산이다. 고속도로는 길이라기보다는 벽과 벽 사이에 뚫린 편리한 구멍과도 같다. 고속도로는 산을 돌아가지도 않고 산을 넘어가지도 않는다. 고속도로는 산밑을 뚫고 간다.   .....

김훈, [김훈세설 -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생각의 나무, 2002, 149쪽~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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