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잉글랜드 수녀 미네르바 1
메리 E. 윌킨스 프리먼 지음, 최순영 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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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킨스 프리먼의 단편집 《뉴잉글랜드 수녀》에서는 표제작인 ‘뉴잉글랜드 수녀’ 못지않게 좋은 작품을 여럿 읽을 수 있었다. ‘뉴잉글랜드 수녀’는 다시 읽어도 그 혼자만의 고즈넉한 삶, 정갈한 삶을 선택한 루이자의 선택에 흐뭇해진다. 루이자처럼 혼자 있기를 선택하거나 또는 연인이 있든, 결혼을 했든 나이가 많든 어리든 중년이든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 단편집에서 이번에 읽으면서 완전히 반한 작품은 ‘노파 마군(Old Woman Magoun)’이다. 이 작품은 처음 읽었을 때는 그 끝을 알지 못해서 아, 성질 괴팍한 할머니랑 착한 손녀가 외진 산골에서 서로 의지해 살아가는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뭔가 서늘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더니 아아아........ 나는 이 작품 마지막에 약간 눈물을 찔끔 흘렸다. 지금도 마음이 너무 서늘하다....... 그러고 나서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은 더 읽었다. 읽을수록 마음이 너무 아프다.

앞서 이야기했듯, 늙은 마군은 손녀딸 릴리와 함께 아주 작은 마을인 배리스 포드에서 살고 있다. 배리스 포드는 산 사이의 깊은 골짜기에 위치하는데, 이 마을 초입에는 물살이 거칠어도 건널 수 있는 얕은 강이 흐르고 있다. 그런데 볼품없기는 하지만 이 강을 건널 다리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이 늙은 여인 마군이다. 노파는 위스키나 담배 등을 파는 작은 식료품 잡화점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거기서 그녀는 게으르기 짝이 없는 사내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앉아 잔소리를 늘어놓곤 한다. “저 다리는 올여름에는 꼭 놓아야 해.”

그러면서 그녀는 “내가 남자였다면 말이야. 지금 바로 나가서 가장 먼저 통나무를 놓겠어. 내가 아무리 빈둥빈둥 게으름 피는 남자들 무리에 있더라도 난 평생 한번은 뭐라도 시작해 봤을 거야“ ”저놈들은 꼭 그래야만 기운을 차릴 수 있는지, 술을 마시고 담배를 씹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한단 말이야” 잔소리를 해댄다. 노파의 지적대로 이 마을 남자들은 대체로 게으르고 형편없다. 그래서 대부분은 마군의 이런 잔소리를 들으면 다들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고는 하는데 단 한 사람 ‘넬슨 배리’만은 예외이다. 그는 노파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는 유일한 남자로, 마을 사람들은 그 앞에서는 왠지 주눅이 든다. 이 마을 사람들은 그 오만한 남자를 마치 ‘사악한 신神’이라도 되는 듯이 우러러본다. 그런데 노파 마군은 넬슨 배리에게조차 굴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마군이 어떻게 그에게도 그처럼 당당히 굴 수 있는지 의아해 한다.

노파가 끔찍하게 사랑하는 손녀 릴리. 릴리는 이제 열네 살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릴리를 마을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지 못하게 한다. 그런 틈틈이 마군은 아이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것, 주로 영적인 성장을 돕는 것들을 가르쳤다. 거짓말을 해서도 훔쳐서도, 할머니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도 결코 해서는 안 된다. 게으름은 금물이다. 그런 릴리는 열네 살인데도 늘 낡은 헝겊 인형을 꼭 끌어안고 다닌다. 작은 체구도 체구이지만 이렇게 인형을 안고 다니기 때문에 더 어린 아이로 보인다. 이웃 여자는 마군의 교육 방침에 문제가 있다는 듯 혀를 찬다. 아직도 애를 인형을 들고 다니게 하느냐, 저 또래 여자애들은  헝겊 인형 대신 남자친구를 생각한다 등등. 거기에 마군은 화가 나서 항변한다. “릴리는 또래에 비해 크지도 않고 나이가 어려서 그래. 나는 릴리를 서둘러 결혼시킬 생각이 전혀 없어. 튼튼하지도 않은 애를.” 이웃은 다시 말한다. 언제쯤이면 저 애를 자라게 할 것이냐고. 마치 늙은 할머니가 아이를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그러나 마군은 그저 “주님의 뜻에 따라 다 때가 되면 자랄 거”라고 답할 뿐이다. 그런데 그 목소리에는 어쩐지 슬픔이 깃들어 있다.

왜 노파 마군은 손녀 릴리가 아이일 뿐이라고, 아직 자라지 않았다고, 때가 되면 다 자랄 것이라면서 손녀가 자라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태도일까? 그리고 왜 마을 사람 모두가 경원해하는 넬슨 배리에게 혼자만이 당당하게 굴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여기엔 슬픈 사연이 담겨 있다. 마군의 딸, 그러니까 릴리의 엄마는 열여섯 살에 결혼했다. 그런데 딸이 결혼한 상대는 다름 아닌 그 문제의 ‘넬슨 배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군의 말에 따르면 그와 결혼했지만 그가 딸을 버렸고, 그 때문에 딸은 어머니의 집, 즉 마군의 집에서 살았으며 릴리도 거기서 태어났다. 헌데 릴리가 태어나고 얼마 뒤에 딸은 세상을 뜬 것이다. 이로써 마군과 릴리, 넬슨 배리의 관계가 설명이 된다. 마군이 손녀딸 릴리가 자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짐작이 간다.

이 작품은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느 날 마군은 릴리를 심부름 보내는데, 하필이면 심부름을 보낸 곳에서 릴리는 넬슨 배리, 그리고 또 다른 남자(릴리가 보기에는 젊고 잘생긴)를 마주치게 된다. 그때까지는 딸을 나 몰라라 했던 이 무심한 아비란 작자는 딸과 마주치고, 딸이 제법 성장한 것을 보고 놀라워한다. “내가 이렇게 작고 예쁜 딸이 있는 축복을 받았는지 그동안 몰랐었구나.” 씨부렁거리면서 모자 아래로 드러난 릴리의 분홍빛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그 손 치워!!!!) 나이를 물어보고는 열네 살이란 말에 놀라면서도 감탄한다. 그는 자기가 릴리의 엄마와 결혼했던 나이를 잊지 않고 있다! 넬슨 배리와 같이 있던 남자의 눈길도 예사롭지 않다. 그 나이에 인형을 안고 다니느냐면서 인형을 버리라면서 ‘사탕’을 사준다. 영문을 모르는 순진한 릴리는 집으로 돌아와서는 가게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고, 이 이야기를 들은 노파 마군은 ‘오랫동안 예상해 온 어떤 재난이 마침내 닥쳐온 것에 타격을 입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짓는다.

아니나 다를까, 일은 마군의 예상대로 흘러간다. 마군이 보기에는 ‘술에 취한 돼지 떼’와 같은 놈들, 그놈들이 릴리를 탐하기 시작한다. 이제껏 나 몰라라 하던 애비란 놈이 느닷없이 마군을 찾아와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자신의 딸이라고 윽박지른다. 그는 왜 난데없이 딸을 데려가겠다는 것일까? 없던 부성애가 인형을 끌어안은 릴리를 보더니 갑자기 퐁퐁퐁 솟아난 것일까? 그는 노파를 협박한다. 릴리를 자신이 데려가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당신이 아기처럼 만들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아이는 미인인 데다 아가씨가 다 됐다”고 협박한다. 노파여, 당신은 “영원히 사실 수도 없다”고. 그러면서 아이를 데리러 올 날짜까지 통보한다. 옷가지나 잘 싸두라는 싸가지 없는 소리와 함께. 마군은 이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열여섯 살에 결혼한 딸을 잃은 노파 마군, 열네 살 손녀가 자라고 있다. 그 나이에 이르려고 한다. 그러기도 전에 이놈 저놈이 아이를 탐한다. 늙은 마군은 영원히 살 수도 없고, 아이가 자라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그런 세계에 손녀를 홀로 내버려 둘 수 없던 마군은 이리저리 해결 방안을 찾아 뛰어다닌다. 그리고 릴리에게 약속한다. 릴리가 이제 가게 될 곳은 “아름다운 곳, 꽃들이 높게 자라는 곳.”이며 릴리가 가장 좋아하는 파란색 꽃들이 피는 곳이라고. 그리고 그곳에서는 그 푸른 꽃들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고. 꽃이 지는 일도 결코 없다고. “꺾지만 않는다면 절대 시들지도” 않는다고. “꺾지만 않는”다면…. 늙은 할머니의 이 약속은 끝끝내 마음을 울린다. 너무나도 서늘하게. ‘노파 마군’은 읽을수록 안타깝다. 지금도 어린 소녀들이 차라리 자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얼마나 많을까. 《뉴잉글랜드 수녀》에는 괴팍한 ‘노파 마군’ 말고도 ‘크리스마스 제니’나 ‘고귀한 존재’의 주인공들처럼 보통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기묘한 인물이지만, 결국에는 손가락질하는 그 보통 사람들보다 숭고한 마음을 지닌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 여성들의 이야기에 울었다, 웃었다, 한없이 따뜻해졌다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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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5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25 16: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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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5 16: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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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5 17: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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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5 17: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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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5 1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Falstaff 2022-11-25 19: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흠. 이달의 리뷰 작품이라는데 마넌 겁니다. ㅋㅋ 정말 할 말이 없게 잘 쓰셔요.

잠자냥 2022-11-25 21:47   좋아요 2 | URL
오호 만 원! 입금 준비하세요!

공쟝쟝 2022-11-26 11:49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두분이 서로 칭찬하는 모습을 보면 좀 뭐랄까 웃깁니다. 웃음이 지어져 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12-08 07:4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 아, 나도 잘난 척 좀 해도 되는 거 같아요!

잠자냥 2022-12-08 08:33   좋아요 1 | URL
앗 아니 만 원 제가 입금해야 합니까! 앗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2-11-25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저도 마넌 ^^ 생전 처음 보는 작가인데 읽고 싶게 만드는 리뷰입니다. ^^

잠자냥 2022-11-26 11:31   좋아요 1 | URL
<뉴잉글랜드 수녀>라는 단편은 꼭 읽어보세요~ ㅎㅎ

책읽는나무 2022-11-25 23: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늘 잠냥님 리뷰를 읽고 느끼는 거지만, 책을 잠자냥화 시켜 리뷰를 쓰시는 것 같아요.
잘 읽고 갑니다. 안녕~👋

잠자냥 2022-11-26 11:31   좋아요 1 | URL
잠자냥화! ㅋ 고마워요. 안녕? ㅋㅋㅋ

여름아 2022-11-27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만 읽는데 눈물이 찔끔납니다!ㅠ

잠자냥 2022-11-27 09:49   좋아요 0 | URL
아아, 본 작품도 꼭 한번 읽어보세요… ㅠㅠ

독서괭 2022-11-29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글 폰으로 읽고 댓글을 못 달았네요. 잠자냥님 리뷰 읽으면 해당 책이 너무 매력적으로 보여서 문제예요, 문제. 마군과 릴리 이야기, 넘 마음 아파요. 전 역시 단편보다는 장편을 좋아하지만, 읽어보고 싶어져서 찜합니다!~

잠자냥 2022-11-29 20:36   좋아요 1 | URL
잠자냥 이웃 주머니 생각해 리뷰 절필 선언! …….. ㅋㅋㅋㅋㅋ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 지음, 윤진 옮김 / 엘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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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좋아하고, 소설 몇 편을 끼적거려보기도 했지만 문학 자체가 누군가의 삶을 아주 크게 바꿔놓을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어떤 이가 인생을 바꾼 단 한 권의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거기에도 선뜻 답하기 어렵다. 대답보다는 아마도 머릿속으로는 책 한 권으로 얼마나 삶이 달라질까 회의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어떤 책 한 권이 그의 삶 전체를 뒤흔들 수도 있다고는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조금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사람이 되었을지 몰라도, 나도 한때는 책 한 권에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뜨거웠던 적이 있으므로.

여기 바로 그런 인물이 있다. 그의 이름은 ‘디에간 라티르 파이’- 이십 대의 뜨거운 청년인 그는 문학에 이끌려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품었었고, 그 꿈은 젊은 나이에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작가로 데뷔해 파리에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여전히 위대한 소설을 쓰겠다는 야망을 품은 채. 그런 그에게는 하나의 꼬리표가 늘 붙어 다닌다.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문학의 유망주”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파리에서 지내지만 그는 세네갈 출신의 흑인이다. 프랑스 제도권의 인정을 받기는 했으나 과연 그것이 온전히 그의 글쓰기 능력 때문인지, 아니면 ‘흑인 치고는’ 또는 ‘아프리카 출신 치고는’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는 용인인지 그로서도 자신할 수 없다. 이 지점은 꽤 흥미로운데 사실 디에간이라는 인물은 이 책,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으로 2021년 공쿠르상을 수상한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 작가 그 자신과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음부가르 사르는 1990년에 세네갈에서 태어나 세네갈에서 고등학교까지 프랑스어로 정규 교육을 받았고, 그 후 프랑스 파리의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공부하다가 박사학위 논문을 중단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한 이력이 있다. 네 번째 장편인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으로 공쿠르상을 수상했는데, 이것은 100년 만의 흑인 작가 수상이며,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출신 작가의 역대 최초 수상이고, 1976년 이후 역대 최연소 수상(31세)이라고 한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이런 수식, 그러니까 작가가 어디 출신이며 어떤 성장 과정을 겪었고, 흑인인지 백인인지, 황인인지, 작가의 성 정체성이 어떤지 등등 작품 외의 작가와 관련한 요소에 집중한다는 것이 얼마나 한 작가 또는 그의 작품에 모욕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은 이런 언급을 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문학과 글쓰기에 관한 소설이면서도 동시에 인종차별과 식민주의(제국주의)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음부가르 사르, 즉 작가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는 이 ‘디에간’은 책 한 권에 완전히 꽂혀 있다. <흑인 문학 개설>에서 알게 된 한 낯선 세네갈 작가 때문이다. T.C. 엘리만이라는 수수께끼의 인물, 그의 책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는 완전히 디에간을 사로잡고, 그는 엘리만의 정체를 밝히는 일에 골몰하게 된다. 엘리만도 디에간처럼  세네갈 출신에 그 또한 파리에서 공부하던 중 1938년에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 단 한 권을 출간하고 홀연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 후로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엘리만- 디에간은 우연히 세네갈 출신의 여성 작가 ‘마렘 시가 D.’가 이 책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책의 가치를 자신 만큼이나 높이 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녀와 가까워진 그는 엘리만과 <비인간 적인 것의 미로>에 관한 이야기를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디에간이 엘리만의 행방을 추적하는 형식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시가 D와 엘리만은 어떤 관계이기에 그녀는 그에 관해 이토록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엘리만은 어쩌다 사라졌는지, 무엇이 그를 영원히 은둔하게 만들었는지 궁금증에 책장이 빠르게 넘어간다. 그리고 엘리만의 비밀이 하나씩 벗겨질수록 이 작품이 단 한 권의 책에 관한 소설이 아님을, 이 세상에서 흑인 또는 유색인종으로 살아간다는 것, 한때 식민지였던 나라에서 태어나 자신들을 지배했던 나라에 편입되기를 바라는 피식민지인들의 슬프고도 씁쓸한, 아이러니한 삶을 마주하게 된다.

엘리만은 더없이 뛰어난 흑인이었다. 그가 쓴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는 주제, 문체, 그리고 작가까지 모든 면에서 놀라운 작품이라고 극찬받는다. 한 저명한 비평가는 그 누구도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스물세 살의 아프리카 작가의 뛰어난 재능을 기려 그를 ‘흑인 랭보’라고 칭하기까지 한다. 이 책을 지지하는 측과 비난하는 책이 생겨났고, 그런 상태가 몇 주 동안 이어졌을 즈음, 흑인 아프리카 지역 탐험가이자 민족학 전문가인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 ‘앙리 드 보비날’이 언론에 엘리만의 소설은 세네갈 종족의 한 기원 신화를 표절했다는 글을 발표한다. 설상가상으로 며칠 뒤 역시 콜레주 드 프랑스의 문학교수가 엘리만의 책 속에서 다른 문학 작품으로부터 차용된 것을 수없이 많이 찾았다고 고백한다. 엘리만의 책은 최소 절반 이상이 다른 책들에서 인용된 것이다. 거기에 자신이 쓴 글을 정묘히 섞어놓은 콜라주였다. 제미니 출판사를 상대로 소송이 이어지고, 출판사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손해배상을 한 뒤 출판사 폐업하고 만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정작 작가인 엘리만은 그 어디에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는다. 이 지경이 되자 엘리만이 실재하는 작가인지 의심을 품는 무리까지 생길 정도이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사라진다.

엘리만은 왜 침묵을 고수하고, 그대로 잊히는 쪽을 선택했을까. 몇 가지 밝혀진 진실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도 침묵한다. 그의 침묵이 이해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어차피 영원히 세네갈 출신의 예외적으로 뛰어난 흑인일 뿐, 예외적으로 뛰어난 작가로 인정받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프랑스의 문단의 그들에게 ‘흑인 랭보’일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랭보를 어느 흑인 시인에 빗대어 설명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백인들, 아니 전 지구의 백인들은 어느 뛰어난 유색 인종을 늘 백인에 빗대어 설명한다. 세상의 모든 기준은 백인이고, 그 나머지는 예외적인, 그래서 의심스럽고 그럼에도 인정할만한 존재로 설명하고는 한다. 세상은 작품 자체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말하듯이 작품을 쓴 그의 배경, 미디어를 장식할 만한 하나의 현상에 더 주목한다. ‘A는 이런저런 문학상을 받은 이런저런 협회에 들어간 최초의 흑인 소설가’이며 ‘B는 포괄적 글쓰기로 이루어진 책을 출간한 첫 레즈비언 작가’이며 ‘C는 목요일에는 무신론자 양성애자이고, 금요일에는 회교를 믿는 시스젠더로 그가 쓴 이야기는 경이롭고 감동적이며 전적인 실화’(357쪽)이다 등등. 그의 글에 대해서, 그의 글쓰기나 창작에 대해서 말하기보다는 피부색에 주목하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는 한 엘리만은 차라리 영원히 침묵하는 것이 나으리라.

이 책은 그것 외에도 또 다른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엘리만은 정말로 표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의 작품은 표절이 아니라 콜라주일까? 엘리만의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심오한 독창성’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기존의 책들을 모조리 합해 놓은 책’이기도 하다. 절반 가까이는 호메로스부터 시작해 세상 모두가 알만한 작품들을 인용하고 절반은 자기의 이야기를 쓰면서 그 인용에 의도적으로 인용 부호를 밝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명백히 표절이 아닐까?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를 편집하고 출판한 ‘샤를’이 말했듯이 문학을 약탈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엘리만은 문학은 ‘원래 약탈의 유희’라고, ‘창작의 이상을 위해서는 모든 걸 희생할 수 있다’(271쪽)고 항변한다. 엘리만의 주장처럼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는 독창적인 콜라주로 볼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엘리만이 그러한 방식을 채택한 것은 ‘그’라는 인물, 세네갈의 지식인들의 단편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유럽인도 백인도 아니지만 유럽인과 백인 문화를 콜라주한 식민지 대륙 출신의 인물들….

엘리만은 누구였을까? 이 책에서 말하듯이 ‘절대적인 작가? 수치스러운 표절 작가? 천재적인 사기꾼? 미스터리한 암살자? 남의 영혼을 집어삼키는 인간? 영원한 방랑자? 고상한 난봉꾼? 아버지를 찾는 아이? 삶의 좌표를 잃고 길을 잃은 불행한 유배자?’(379쪽)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를 콜라주로 볼 수 있을지 그저 유럽인들의 생각과 사상을 짜깁기한 표절에 지나지 않는지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서 엘리만이라는 인물을 평가하는 것도 저마다 달라질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제국주의 식민지화가 만들어낸 비극적인 인물임은 틀림없다는 것이다. 백인이 되고 싶었고, 어쩌면 백인보다 백인 문화에 통달했던 엘리만. 그래서 백인들이 쓴 온갖 문학을 짜깁기해서 또 하나의 문학을 빚어냈지만 그것은 결국 그의 오리지널리티가 아니다. 세상 또한 그를 백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너는 흑인이라고, 그래봐야 ‘흑인 랭보’일 뿐이라고, 어쩌다 나온 예외적인 인물이라고 한계 지을 뿐이다. ‘식민지화가 이루는 가장 악마적인 성공은 바로 자신들을 파괴하는 바로 그것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심는 것. 소외의 슬픔(496쪽)’이라는 문장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가고 바로 그들에게 인정받고자 애썼던 이 땅의 문인들이 생각나 더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시 책 바깥의 이야기로 돌아와, 이 책의 작가 음부가르 사르는 이 작품으로 공쿠르상을 수상하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이 책의 주인공 디에간은 작품 초반에 이렇게 말한다. “아프리카 게토를 벗어나면 아무도 날 작가로 알아주지 않거든. 유명한 신문에 기사가 난 적이 있는 유망주 작가이고 뭐고 신문 자료보관소는 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어. 난 그냥 아프리카 작가고 바깥세상에서는 문학적 명성 따위 하나도 없어.” 디에간은 ‘바깥’에서 명성에서 얻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바깥이란 문화적으로 척박한 세네갈이 아니라, 프랑스일 것이고 더 나아가 유럽일 것이다. 그는 말한다. “프랑스 문단의 서임식은 우리 중 많은 이들의 꿈이다. 심지어 몇몇에게는 꿈 그 자체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수치를 안기지만 또한 우리가 꿈꾸는 영광이다. 우리의 종속이고, 상징적 상승이라는 독배의 환상이다.”(82쪽) 음부가르 사르는 이 독배의 잔을, 독배의 영광을 기꺼이 받았다. 프랑스는 어떤 생각으로 이 예외적인 흑인 작가에게 상을 주었을까? 이 책에서 말했듯이 자신들의 너그러움을 과시하기 위한 하나의 사례일까?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은 책을 덮고도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인정받은 너희 같은 아프리카 작가들, 지식인들은 조심해야 해. 프랑스 부르주아들이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너희 중 일부에게 영예를 안기기도 하니까. 실제로 성공하거나 본보기가 된 아프리카인들도 있지. 하지만 내 말 잘 들어 너희의 작품이 어떤 가치를 갖든 결국 너희는 이방인이고 영원히 그럴 거야. 이곳 사람이 아니라고.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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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11-08 17: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별 네개 주셨는데 이렇게 읽어보고 싶게 리뷰를 쓰시면 어떡합니까?(왠지 항의하고 싶) ㅋㅋ 작가에 대해 추적하는 과정도 흥미롭고, 던져주는 메시지는 굉장히 묵직하네요. 문학 자체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까지.. ‘그래봐야 흑인 랭보일 뿐‘이라는 말이 가슴 아픕니다.

잠자냥 2022-11-08 20:36   좋아요 1 | URL
별다섯 줘도 괜찮은 작품인데 별 하나 뺀 이유는 제가 유독 약한 부분(못 참는 부분)이 있는데 이 소설에서 그런 부분이 있어 가지고 ㅋㅋㅋㅋㅋ 개인적 취향으로 하나 뺐어요. 그게 뭘까요?! :p 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2-11-08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소설도 쓰시나요? 와 어쩐지 리뷰들이 심상치 않게 좋은데는 이유가.... ^^
이 책 어떤지 궁금했는데 잠자냥님 리뷰를 보니 무조건 읽어야 할 책이네요. ^^ 별 하나 뺀 이유는 저도 궁금하네요. 혹시 저 양성애자 어쩌고 하는데서 주인공의 성생활이 심히 자유로울까요? ㅎㅎ

잠자냥 2022-11-08 22:52   좋아요 1 | URL
걍 소싯적에 좀 써봤어요… ㅠㅠ ㅋ 별 하나 뺀 이유는 직접 읽어보시고 유추해 보세요! ㅋ 주인공 성생활은 뭐 자유로운 편인데, 주인공이 양성애자는 아닙니다. ㅎㅎㅎㅎ

케이 2022-11-09 0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독 못참으시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요?!?!?!?! 아 너무너무 궁금합니다.

잠자냥 2022-11-09 09:46   좋아요 3 | URL
ㅋ 제가 이 책에서 두 가지 부분이 걸려서 결국 별 한 개를 뺐는데요, 하나는 개인 취향으로 정말 못 참겠는 설정이 있어서 그렇고, 또 한 가지 이유는 아, 이 부분은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서 그랬습니다.

처음에 리뷰 쓸 때는 별 하나를 줄이게 된 이 결정적 두 가지 이유를 밝히려 했으나 글쓰다 보니 그냥 묻어뒀는데, 아니 이게 그렇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네요?! ㅋ

퀴즈 대회할까요? 이 책을 읽고 잠자냥이 별 하나를 줄이게 된 결정적 이유 2가지는?!
맞히신 분에게는 소정의 상품을..........ㅋㅋㅋㅋ

하나는 제 서재에서 글을 열심히 읽은 분들이라면 제가 잘 못 견디는 설정을 금방(?) 아실 거 같고요(이건 책 안 읽어도 대충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결국 이 책을 읽어야만 알 수 있는 설정이네요... ㅎㅎㅎ

저 위에 바람돌이 님 댓글에도 달았지만 주인공의 성생활때문은 아닙니다! ㅋㅋㅋ

coolcat329 2022-11-11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도대체 뭘까요?
유독 못 견디는 점이 뭔지...예전에 잠자냥님 글에서 본 기억은 나는데...답답😣

잠자냥 2022-11-12 13:33   좋아요 1 | URL
ㅋㅋㅋ 나중에 꼭 알려드릴게요!

공쟝쟝 2022-11-12 0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 응? 성생활 때문이 아니라고요?......... 뚜........

그렇다면.
1. 소설을 읽고 보니 대체로 나빼썅(나빼고 다 썅놈)이었다 (자기만 너무 고고함, 자의식의 숭고함이 하늘을 찌름) 남자 주제에 잘난척 한다? ㅋㅋㅋㅋㅋㅋ
2. 소설이 소설이 아니었다... 소설 인물과 작가가 분리가 잘 안됨ㅋㅋ 거기에 자기미화, 혹은 과한 자기 합리화까지 함ㅋㅋ

잠자냥 2022-11-12 13:23   좋아요 1 | URL
책을 읽읍시다…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11-12 14:23   좋아요 0 | URL
그래요 난 소설을 좀 읽어야겠다… 😅

coolcat329 2022-11-12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소설 주인공에게 작가의 분노가 너무 많이 보인다?
2.인종차별을 소재로 한 소설들은 거의 다 비슷하다?

잠자냥 2022-11-12 13:2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아닙니다.

다락방 2022-11-18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전!

1. 미성년자 성폭행
2. 동물 학대


잠자냥 2022-11-18 12:4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아 이렇게 막 찍는 분들 있다니까..ㅋㅋㅋ
1번은 다락방 님이 싫어하는 설정이잖아요! ㅋㅋㅋ
1, 2번 둘 다 이 책에서 안 나와요. 땡..
암튼 2번은 책을 읽어야만 유추할 수 있는 문제라...ㅎㅎㅎㅎㅎ

독서괭 2022-11-18 13:29   좋아요 0 | URL
으아 궁금하다…

독서괭 2022-11-18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늙고 찌질한 남자를 향한 이해할 수 없는 여자(들)의 순애보?? (맥락없는 인기랄까..) 같은 맥락에서, 작가라는 이유로 딱히 이유도 없이 여자들에게 인기 최고라는 설정?
지나친 종교적 관념??
밑도 끝도 맥락도 없이 튀어나오는 정사장면?
등등.. 이중에 없나요? 너무 궁금해욧!! ㅠㅠ

독서괭 2022-11-18 20:18   좋아요 0 | URL
잠자냥님 왜 안 와유.. 왠지 첫번째거가 맞을 것 같은데!! 아 궁금해!!

잠자냥 2022-11-18 22:0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이 작품에 늙고 찌질한 남자는 안 나옵니다. ㅋㅋㅋㅋ 주인공 작가가 그렇게까지 인기 남으로 그려지지도 않고요. 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11-19 07:15   좋아요 0 | URL
이럴수가… OTL

미미 2022-12-02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 번 던져봅니다🖐
1. 예전에 잠자냥님 글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소설에서 작가가 주장하는 바를 너무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
2. 또 하나는 모르겠지만 그냥 찍어보자면... 삼각관계? (>.<)

잠자냥 2022-12-02 20:28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정답은 투비 컨티뉴……ㅋㅋㅋ
 
캄캄한 낮, 환한 밤 - 나와 생활의 비허구 한 단락 대산세계문학총서 178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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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명리名利를 추구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성취할 수 있기를 갈구한다.” 옌롄커의 《캄캄한 낮, 환한 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50세 생일을 하루 앞두고 옌롄커에게는 문득 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래,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서 ‘글쓰기의 적막과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세계 영화예술의 거장이 돼보자!’하는 생각이다. 세계적 작가가 ‘가난’ 운운하니 사뭇 의아하기도 하지만 문학이 처한 현실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이 작품에서도 여러 차례 말하듯이 아무리 유명한 작가라고 할지라도 어디 영화만큼 큰돈을 벌 수 있으랴. 옌롄커는 영화를 “예술이 돈과 명성, 정신, 영혼을 하나로 뒤섞어 분명하게 구분되지 못하게 하는 마술 상자”(14쪽)라고 말하고는 자신의 작품을 직접 영화로 만들어 돈과 명성을 한꺼번에 얻고자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아니, 그런데 이 사람 참 욕심도 많지. 시나리오와 감독은 물론 자신이 직접 주연까지 맡아 명예와 부를 얻겠노라 참으로 야무진 꿈을 꾼다. 이쯤에서 잠깐 옌롄커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그가 야심차게 영화로 만들 계획을 세운 이야기는 무엇인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과 한 고향 사람인 ‘리좡’의 삶과 사랑을 영화를 만들고자 생각한다. 리좡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데? 아니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 즈음, 그는 리좡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 <캄캄한 낮, 환한 밤>을 들고 이 영화를 함께 찍고 싶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먼저 그 단편을 읽게 한다. 그런데 이 단편은 좀 맥이 빠진다. 리좡이란 인물도 딱히 호감 가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싫어할 만한 인물이다. 영화 <캄캄한 낮, 환한 밤>의 바탕이 될 단편의 주된 내용은 이 리좡이란 인물이 십대 시절 한 소녀를 강간한 사건에서 출발한다. 단편을 읽은 이들은 심히 어두운 얼굴로 옌롄커에게 되묻는다. 정말 이 시시한 작품으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당신 제정신이야? 덩달아 나도 그렇게 묻고 싶다.

곧 옌롄커가 대답한다. 다행이다. 당연히 아니란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캄캄한 낮, 환한 밤>에 나오는 먀오쥐안을 강간한 리좡이 지금 베이징대학교 교정의 북쪽에서 일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중에 누구도 그런 사실을 미처 생각지도 못했겠지요. 저와 같은 고향 사람인 이 농민공은 이미 중년의 나이가 되었지만 베이징에서 몇 년 째 막일을 하고 있어요. 줄곧 건축공사팀을 따라다니며 베이징대학교와 칭화대학교, 인민대학교 교정에서 보수공사를 하기도 하고 건물을 올리거나 담을 쌓는 일을 해왔지요. 학교에서 막노동을 하다 보니 뜻밖에도 우연히 베이징대학교의 뛰어난 재원인 한 여성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나이 차가 스무 살이 넘는 데도 말이지요. 제 고향에서는 글씨도 몇 자밖에 쓸 줄 모르던 농민공이 재색을 겸비한 베이징대학의 한 대학원생을 좋아하게 된 거예요. 베이징에서 벌어진 리좡의 이런 이야기를 영화로 각색하는 데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가장 촌스럽고 지식수준도 가장 낮을 뿐만 아니라 가장 가난하고 못생긴 북방의 중년 남자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대학교에서 가장 아름답고 전도유망한 남방 여자 대학원생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105~106쪽)

사람들은 그 시시한 단편을 영화로 만들 계획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지만, 그러면서도 의혹을 뿌리 뽑지는 못한다. 아니 50대 농민공과 20대의 베이징대학원생이 사랑에 빠진다고? 그게 가능해? 그래서 옌롄커는 자신의 고향 사람과 그의 ‘신기한 사랑’을 영화로 만들 것이라고 애초부터 밝혔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런데 ‘신기한 사랑’이라면, 그 둘이 정말 사랑했다는 말이야? 자못 호기심이 동한다. 그게 정말 사실이야? 허구가 아니고? 궁금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그런데 앞의 강간 사건을 담은 단편은 왜 보여준 것일까? 이 단편과 영화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이 점 또한 궁금해진다. 이 책은 이렇게 유명 작가 옌롄커가 직접 화자로 나서서 자신의 고향 인물인 리좡과 그의 사랑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옌롄커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리좡을 비롯해 그 주변 인물들을 한 사람씩 인터뷰하게 된다. 그런데 이 인터뷰 과정이 꽤 흥미롭다. 강간범 리좡의 면모도 인터뷰를 할수록 달라지고, 20대의 대학원생 ‘리징’ 또한 그렇다. 이 작품은 이렇게 장편과 단편, 인터뷰, 시나리오 네 개의 장르를 한 번에 다 볼 수 있는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단편에서는 강간범임이 확실했던 리좡이 본인을 비롯해 여타 인물들을 만날 때마다 그의 범죄 행위가 아리송해진다는 점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단편’에서부터 그의 범죄가 아리송하기는 하다. 목격자가 있기는 한데 하필이면 그 목격자가 동네에서 누구나 다 인정하는, 알아주는 ‘바보’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화자가 강간 사건의 유일한 증인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바보의 증언은 정말 믿지 못할 말인가 독자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리좡이 먀오쥐안을 강간한 사건이 아리송해질 무렵 독자는 또 하나의 사건이 허구인지 진실인지 헷갈리게 된다. 그 사건으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후 50대에 접어든 리좡이 20대의 리징이라는 여성을 사랑하게 된, 만나게 된 사연이 바로 그것이다. 인물마다 각자의 관점과 처지, 생각에 따라 서술하기 때문에 과연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과장이며,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내내 머리를 굴리게 된다.

이 장편 속의 옌롄커는 시나리오 <캄캄한 낮, 환한 밤>을 쓰기 전에 “이 이야기는 중국 빈부 격차와 각 계층의 문화 수준 차이, 남방과 북방의 지역 차이, 농촌과 도시의 차이 및 갈등을 날카롭게 반영”할 것이라 포부를 밝힌다. 한술 더 떠서 작가는 이 시나리오가 “지난 40년에 걸친 중국의 개혁 개방과 이에 따른 인민의 정신분열과 천지개벽 같은 관념의 변화를 반영”할 것이며 “베이징과 베이징에서 가장 유명한 최고 학부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중국의 사회 제도와 교육 상황, 권력의 영향,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옛 베이징 문화의 침식과 자양을 표현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정신적 변화가 각 개인의 몸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도 표현”(123~124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야심차게 기대한다.

정말 그의 시나리오는 그가 밝힌 포부를 모두 아우르는 작품이 되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못한 것 같다. 참 이상하게도 이 책에 담긴 여러 이야기, 그러니까 단편 <캄캄한 낮, 환한 밤>을 비롯해 각 인물들을 만나서 기록한 인터뷰 등등보다도 그가 야심차게 기획한 이 시나리오가 가장 맥빠져 보인다. 지나치게 작위적이어서 사실이라기보다는 지어낸 이야기라고 절로 생각하게 된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었는지 시나리오를 읽은 다른 이들의 반응도 떨떠름하긴 마찬가지이다. 그중 누군가는 이렇게 묻는다. 리좡과 리징 두 사람의 왜곡된 사랑 이야기를 쓰기로 결정하지 않았느냐고. 거기에 옌롄커 “생활의 진실이 쓰지 못하게 막은”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반문했던 이가 다시 묻는다. “예술이란 생활의 진실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요?”(379쪽) 이 두 사람의 대화처럼 진정한 예술은 생활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생활의 밑바닥이나 내부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어 가야 하는 것일까?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 장편 속의 인터뷰들이 비허구, 그러니까 진실이라면 그 진실이, 즉 생활의 진실이 예술(이 작품 속의 ‘단편’이나 ‘시나리오’)보다도 강력하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옌롄커는 생활의 진실이 쓰지 못하게 막았다고 자조적으로 말한 게 아니었을까.

또 다른 의문도 든다.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인물들은 어디까지가 작가의 창작을 통해 재탄생한 인물일까? 실제 리좡은 정말 강간범인가? 그리고 그는 그런 과거가 있으면서도 이제는 오십대에 이십대의 여성을 스토킹하는 인물이 된 것인가? 만일 이게 진실(비허구)이라면 그는 자기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 변명하고 꾸며대기에만 급급한 참으로 나쁜 인간이다. 그러나 만일 그게 아니라면? 리좡이 자기의 목소리를 냈듯이 옌롄커 그 자신이 작가라는 명분 아래 주변 인물을 나쁘게 묘사하고, 또 자기의 고향(크게는 중국)을 나쁘게만 그리는 데 전력을 기울여 온 작가라면? 그렇다면 그의 마을을 비롯해 그 마을에서 나고 자란 대부분의 인물들은 옌롄커의 붓(글)에 희생당한 소시민들일 뿐이다. 이런 의심이 합당하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은 그가 그린 이십대의 여성 ‘리징’의 캐릭터가 참으로 단순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리징도 이 책에서 옌롄커를 조롱하고 있는 게 아닐까. 리징뿐만 아니라 배움이 없는 막노동꾼 ‘뤄마이쯔’ 같은 인물도 “아저씨처럼 마구잡이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걸로 돈을 버는 직업은 정말 이상”한 것 같다고 말한다. “매일 되는대로 이야기를 지어내면서 뭐든지 진짜처럼 꾸며”내고 “이런 유언비어에 의지해서 밥을 먹고” 살지 않느냐고, 그런데도 “아저씨 같은 사람들은 유언비어를 책으로 만들어도 정부로부터 격려를 받고 상장과 상금을 받”는다고 “유언비어가 입에서 나오면 범죄가 되고 책으로 나오면 학문”(185쪽)이 되는 세상이 참 이상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아마도 이런 자조석인 질문과 의혹들을 통해 작가는 스스로 내가 지금 나 ‘자신의 내면을 만족’ 시키고 있는 작품을 쓰고 있는지, 되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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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10-25 16: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옌렌커 얼굴 검색하고 온 사람... (성실한 독후감 독자 1인)............ 젠장.
..........그래서 마지막 문장............ 에 저 괜히 한 표.....(일단 20대 녀와 50대 남의 사랑은 그만 써... 그만써라.... 2000년대에선 박범신으로 좀 끝내라ㅋㅋㅋㅋㅋ 는 건 저의 망상이니까욬ㅋㅋ) 자기자신에 대한 질문에 이은 합리화 거기까지 할 수 있는 언어적 능력을 가진 1인인 것 아닌가. 그럼에도 잘 썼을 것 같다는 생각은 좀 들고. 문학이란 그런 걸 잘써준 걸로 쳐줄 수 밖에 없는 건가?
암튼 이 독후감의 독후의 감은요. 망상자와 작가는 한 끝 차이 인 걸까요?

잠자냥 2022-10-25 16:54   좋아요 2 | URL
검색하지마 알라딘 작가 소개란에도 사진 있는데 왜! 버럭!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잘 쓰고 재미난 책입니다.... 망상자와 작가의 차이는 정말 한 끝 차이? 나도 모름 ㅋ

공쟝쟝 2022-10-25 16:55   좋아요 2 | URL
망상을 글로 쓰느냐 마느냐… 쓸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

다락방 2022-10-25 17: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옌렌커 얼굴 검색하고 온 사람. 검색하고 난 뒤 생각했어요. 누구든 배우는 할 수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흠흠.

잠자냥 2022-10-25 21:20   좋아요 2 | URL
때아닌 옌롄커 얼굴 화제에 올라…. ㅋ

coolcat329 2022-10-25 2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중간까지 읽다가 정말 궁금하고 재미나서 중단했습니다. 네 개의 장르에 담은 다른 이야기라니 오~넘 흥미롭네요. 그리고 리좡의 범죄를 둘러싸고 무엇이 진실인지 아리송한 것도 넘 재미납니다.

잠자냥 2022-10-25 21:20   좋아요 2 | URL
네 잘하셨습니다! 책으로 꼭 읽어보세요! ㅎㅎ

책읽는나무 2022-10-26 21: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옌롄커 얼굴 확인!!!!
한국 배우 중에 누구랑 닮은 것 같은데 누군지 이름을 모르겠다????계속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엉뚱한 곳에서 오리무중??
여적 리뷰 읽다가 이 무슨??ㅋㅋㅋ
책은 또 일단 보관함에 넣겠습니다^^

잠자냥 2022-10-26 21:57   좋아요 3 | URL
잠자냥 덕분에 옌롄커 한국에 얼굴 알려져… 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2-10-26 22: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뭔가 옌렌커의 기존의 소설과는 좀 다른 느낌이네요. 옌렌커도 하나씩 도장깨기 하듯 보고 싶은데 왠지 이 책은 제일 마지막 리스트로 넣어야 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 ㅎㅎ

잠자냥 2022-10-26 22:27   좋아요 2 | URL
네 이 작품은 또 색다른 시도를 했다고 합니다!

mini74 2022-10-30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이 자냥오별 ! 인가요. 옌렌커 얼굴. 확인했습니다 ㅠㅠ

잠자냥 2022-10-31 09:43   좋아요 1 | URL
ㅎㅎㅎ 네 재미난 작품입니다. 옌렌커 얼굴 ㅋㅋㅋ 그가 주연으로 하려던 인물하고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해요.
 
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가장 나다울 때와 그렇지 못할 때는 언제였던가? 보뱅의 <가벼운 마음>을 읽노라니 그런 생각이 문득 든다. 나다운 순간은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지만, 정말 나답지 않았던 순간들은 명확하게 기억한다. 나를 나답지 못하게 만들었던 장소도 단언할 수 있다. 두 장소 모두 공교롭게도 종교 시설이었다. 한 곳은 성당, 한 곳은 어느 교회. 나는 어느 신도 믿지 않는 비종교인이며 신의 존재도 명확하게 있다 없다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한국의 어떤 종교는 그 종교가 설파하는 주의주장 때문에 조금은 혐오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 내가 그 어느 시절에는 왜 성당이니 교회에 앉아있었을까?

기억은 오래전으로 거슬러간다. 성당을 오가던 나는 스무 살이다. 어느 교회 의자에서 불편한 심정으로 그러나 애써 덤덤한 척  앉아 있던 나는 서른 살이다. 둘 다 그 무렵 내게는 아주 가까웠던 이들의 요구로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완벽한 불협화음- 스무 살의 나에게 성당을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던 그때 그 아이는 천주교 신자였다. 그 어린 나이에는 좋아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는 무엇이나 들어주고 싶었다. 일주일에 고작 한 번 가는 건데 뭐, 그땐 그게 그 아이를 사랑하는 내 마음의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시절에는 서른이 넘어서도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나를 사랑하는데 그것도 못해줘?” 말하면서 교회에 같이 가기를 말하던 사람을…. 그즈음엔 나도 스무 살의 내가 아니었던 터라 싫다고 거절도 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기도 했지만 집요한 그 요구-특히 그것으로 사랑을 확인하려는 태도-에는 질려버렸는지 또 다시 나는 일주일에 한번쯤은 교회에 나가 그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현재의 나라면 아마도 내가 만나는 사람이 그런 요구-특정 종교를 강요하는 행위-를 해온다면 “나 전도하려고 만나니?”라는 말과 함께 그 길로 돌아서지 않을까. 그 시절, 그때 그 공간에서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난다. 더불어 그런 요구를 했던 이들도.

<가벼운 마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그들에게 저항하는 건 훨씬 어렵다.”고 “당신이 원하는 것과 반대로 하도록 당신을 이끄는 데 있어서 친구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169쪽)고- 생각해 본다. 성당이나 교회에 함께 가기를 바랐던 나의 옛 사랑들, 내가 가고 싶지 않은 학과를, 또는 학교를 권했던 부모, 한때는 내가 결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권하기도 했던 부모,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 신고 싶지 않은 신발을 입고 신어보라고 권했던 부모, 내게 결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권했던 친구, 연인…. 나를 미워하거나 또는 내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이들이 결코 하지 않을 것들을 요구했던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기에,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러한 요구를 하는 것이리라 의심하지 않고 그 요구를 들어주던 나. “그들에게 저항하는 것은 훨씬 어렵다.” 어디 나만이 그러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자기를 잃어버린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이 행복인 줄, 사랑인 줄 알고 눈 감은 채 살아간다.

<가벼운 마음>의 주인공 ‘뤼시’는 그런 관계에 철저히 맞선다. 엄밀히 말하면 ‘철저히’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듯, 그렇지 않은 듯, 마치 너무나 가볍게 불어서 부는지조차 모르는 미풍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그 어느 관계에도 얽매이지 않으려 애쓴다. 얽매이지 않는다. 서커스단 한가운데서 자란 소녀, 뤼시는 말한다. ‘내 첫사랑은 누런 이빨을 가지고 있다. 두 살, 두 살 반인 나의 눈 안으로 그가 들어온다.’ 이 어린 나이에 첫사랑을 인지하고 말하는 소녀라니 그 첫사랑은 누구인가-그는 늑대이다. 뤼시의 첫사랑은 늑대이다. 서커스단의 철창 속에 머무는, 산처럼 풍성한 검은 털에 노란 별빛의 눈을 가진 진짜 늑대와 사랑에 빠진 아이- 왜 늑대일까. 늑대는 무리지어 살기는 하지만 스스로 고독을 자처하는 외톨이 늑대도 분명 존재한다. 철창 속에 갇혀 있어도 쉬이 길들이기 어렵다. 개와 거의 비슷한 유전자를 지녔지만 개처럼 길들이고 인간과 사교적인 관계가 되기 어렵다. 어린 뤼시가 늑대를 사랑했던 것은 애초부터 그녀의 길들일 수 없음, 관계 속에서 머물기보다는 자유롭게 고독하게 떠도는 방랑자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그녀의 앞날을 상징했던 것은 아닐까.

서커스단의 떠돌이 삶조차도 뤼시의 자유를 향한 갈망을 채울 수는 없다. 아이는 빛을 따라서 쉼 없이 움직이는 것이 제 임무라고 여기는 듯 가출을 일삼고 그때마다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빚어내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또 쉽게 떠나보낸다. 뤼시의 이런 방랑에 아버지는 침묵하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웃음으로 되돌아온 딸을 반겨준다. 어머니의 이 여유로움, 넉넉함이 뤼시의 영혼을 풍족하게 해준 것은 틀림없으리라. 그러나 어린 뤼시도 성장하고 어머니의 여유로운 웃음으로도 보호받지 못할 세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사랑,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뤼시는 로망을 만나 결혼해 파리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어머니는 일찌감치 뤼시의 이 결혼에 걱정스러운 말로서 우려를 표명한다. “딸아, 결혼은 너에게 너무 일러. 조심해라. 감방은 매력적이고 편안하다고 해도 여전히 감방일 뿐이야. 들어가기는 쉽지만 거기서 나오려면 크나큰 대가를 치러야 해. 로망이 네 교도관이 될 거라는 말은 아니야. 나는 더 안 좋은 경우를 말하는 거란다. 그건 너희 둘 다 감방에 갇히게 될 거라는 거야. 교도관도 없고, 문도 없고, 창살도 없고 자물쇠도 없지만 감방은 그래도 감방이지.”(97쪽)

아, 어머니, 어머니는 어쩌면 이다지도 현명하신가요. 뤼시는 곧 어머니의 말대로 로망도, 결혼도 감방임을 깨닫는다. 아니 깨닫는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뤼시는 알고도 그러기를 선택했다. 로망의 부모, 그 속물스러운 이들을 만났을 때부터 로망과의 결혼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이 영특한 아가씨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뤼시의 마음이 한없이 ‘가볍기’ 때문이다. 뤼시는 로망을 사랑하지 않는다. 단 한순간도 사랑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그 관계에 자기를 넣을 수 있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므로 뤼시 그녀에게 어떤 영향력도 끼칠 수 없다. 뚱보 바흐의 음악을 유독 좋아하는 뤼시, 뤼시는 바흐의 음악에서 ‘감정을 해방’을 느낀다. ‘슬픔도 후회도 우울함도 없이, 단지 똑딱거리는 벽시계 추 같은 음표의 수학만’ 있는 그 음악에서 감정의 해방을 느낀다. 그런 그녀이기에 로망과의 결혼생활은 고통스럽지 않다.

‘감정의 깊이는 사랑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가 많고, 모두 이기심과 연관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우리가 우는 것은 자기 자신 때문이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116쪽)이라고 생각하는 뤼시, ‘마음이 가닿지 않는 한 육체는 처녀지로 남아’(124쪽) 있기에 자신은 결혼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뤼시. 그런 그녀에게 마침내 사랑이 찾아온다. 그 사랑 속에서 처음으로 뤼시는 ‘영원한 나이’를 갖는다. 사랑에 빠진 뤼시는 그 관계 속에서 로망이 그러했듯이 고통에 빠지게 될까? 그러나 뤼시는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법을 아는 소녀이다. 무리 속에서도 고독을 아는 늑대, 길들여지지 않는 늑대를 사랑했던 소녀- ‘열 살과 열일곱 살 사이에, 내 마음은 바람이 드나드는 통로’가 됨을 알았던 소녀 그 통로로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알았던 소녀. 제 아버지의 묵직한, 비난하는 듯한 침묵이 아니라, 쥐라산매 숲속의 침묵, 백지 같은 침묵을 지키면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소녀. 그녀는 ‘침묵하게 하고 도망가게 하며 비사교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 그 수호천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런 삶을 선택하고 살아간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요구에 부응하느라 애쓰며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도 없으며, 헛된 명성으로 얻은 헛된 기쁨도 없으며 오직 해방된 자유로움, 혼자 있기에 완전히 자유로운 고독만이 있을 뿐이다. 글을 쓸 때 잉크 대신 가벼움으로 쓴다는 뤼시. 그녀의 말대로 가벼움을 파는 상점은 없다. 그러나 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여름비의 도도한 서늘함에, 침대 맡에 팽개쳐둔 펼쳐진 책의 날개들에, 일할 때 들려오는 수도원 종소리에, 활기찬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음에, 풀잎을 씹듯 수천 번 중얼거린 이름에 쥐라산맥의 구불구불한 도로에서 모퉁이를 돌아가는 빛의 요정 안에, 슈베르트의 소나타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가난 속에, 저녁마다 덧창을 느릿느릿 닫는 의식에, 청색, 연청색, 청자색을 입히는 섬세한 붓질에, 갓난아기의 눈꺼풀 위에, 기다리던 편지를 읽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이다 열어 보는 몽글몽글한 마음에.”(69쪽)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 가벼움을 찾지 못하는가. 뤼시는 말한다. “그 까닭은 어디에나 있는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기술이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뱅의 <가벼운 마음>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거기서 떨어져나가기를, 그리하여 침묵과 고독 속에서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기를 조용히 권한다. ‘우리는 우리와 가까워진 사람들을 죽이느라 세월을 보내고 우리 역시 죽임을 당한다.’(146쪽)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장할 수 없다.’고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품은 사랑, 우리를 충분히 안다고 믿는 사랑에서 벗어나야만 성장할 수 있다.’고 ‘우리는 그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들을 할 때야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177쪽)고, 그러므로 ‘가장 위대한 기술은 거리두기의 기술’이라고 ‘너무 가까우면 불타오르고, 너무 멀면 얼어’ 붙기에 ‘정확한 지점을 찾아서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145쪽)고….  이 한편의 길고도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시(詩)는 그렇게 진정한 삶, 참다운 나를 찾는 법을 조용히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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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10-14 17:1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직 다 읽지 못하고 뒷부분이 남아 있어서 앞쪽 절반과 맨 마지막 문단을 읽었는데 잠자냥님의 리뷰도 참 좋네요.
저도 전도란걸 해본 사람인데 안내켜하는데 억지로 데려가는것도 반대로 제가 억지로 뭔가를 해야하는것도 반감이 들더군요. 그것도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트라우마로 남아 영영 싫어하게 되는건데...역시 생각꺼리를 던져주는 글입니다. 보뱅의 이 책을 읽으면 그런 완고한 사람들도 또 제안의 완고함도 좀더 자유로워질것 같아요 잘읽었습니다^^*

잠자냥 2022-10-14 17:19   좋아요 5 | URL
책 꼭꼭 씹어서 읽으세요. 보뱅의 문장 정말 여러 번 꼭꼭 씹게 됩니다. 아 그의 글에 비하면 저의 리뷰 따위…….

coolcat329 2022-10-14 18: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머 마지막 발췌 문장들... 지금 저에게 필요한 내용들 입니다. 참 좋네요. 책을 읽고 다시 잠자냥님 리뷰 읽어보겠습니다.

잠자냥 2022-10-14 23:46   좋아요 4 | URL
저의 리뷰는 이 책에 비하면 사족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그냥 가지세요. 가지시고 사는 내내 읽으세요. 제가 그러려고요…

미미 2022-10-14 23:49   좋아요 4 | URL
저도 두고 두고 읽고 또 읽고 할꺼예요~♡

잠자냥 2022-10-15 00:10   좋아요 4 | URL
미미 님 그쵸? 저는 이 책 사실 빨리 읽고 되팔려고 했는데요, 두고두고 읽으려고 남겨둡니다….

coolcat329 2022-10-15 06:58   좋아요 4 | URL
네~제 생각에 이 책은 선물로도 아주 좋을 거 같습니다😊

그레이스 2022-10-15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은 파티 드레스 반정도 읽고 멈췄는데 빠졌어요, 보뱅에,,, 또 사들이겠죠,
부드럽게 핵심을 찌르는 글!
어떤 내용일지 알듯합니다.

잠자냥 2022-10-15 23:48   좋아요 2 | URL
네 한 권 읽으면 계속 찾아 읽게 되는 작가더군요!

자목련 2022-10-17 10: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니는 현명하고 멋졌어요. 할머니도 그렇고요.
자냥 님의 리뷰로 한 번 더 아름다운 소설을 감상합니다.
아, 보뱅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넘 좋습니다.

잠자냥 2022-10-17 11:31   좋아요 1 | URL
네, 정말 아, 보뱅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정말 너무 좋습니다!

독서괭 2022-10-18 15: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살래요(선언). 리뷰 뒤늦게 읽었는데 너무 좋아요. 특히 어머니의 ‘감방 발언‘에 바로 읽고 싶어졌습니다 ㅎㅎ 관계에서 마음을 가볍게 가지라니, 신선해요!
사랑하는 사람이 제일 위험하다는 말씀, 특히 부모 자식 관계에서 진리 같습니다.. 저는 애인에게 전도당한 적은 없네요. 종교에 진심인 사람이랑 만나본 적이 없어서;; 지금은 칼거절하겠지만 저도 스무살 때라면 갔을 거예요. 뭐 그렇게 해서.. 지금의 굳건한 비종교인 잠자냥님이 되신 거 아닐까요? ㅎㅎ 반갑습니다 저도 마찬가지 ㅎㅎ
이책 신간이죠? 중고 없을테니 잠자냥님께 땡투 예약할게요~ 10월 살 책 1권 엄청 고민하고 있었는데 자냥님 리뷰로 충동 결정 ㅋㅋ

잠자냥 2022-10-18 20:09   좋아요 2 | URL
아 아 책 정말 아름답습니다! 강추이옵니다. 꼭꼭 음미하면서 읽으세요!

독서괭 2022-10-19 21:36   좋아요 1 | URL
제 땡투 잘 받으셨죠?😘

라파엘 2022-10-25 2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믿고 보는 잠자냥님의 리뷰 덕분에, 이렇게 크리스티앙 보뱅을 만나게 되는군요. 둘 다 가톨릭 작가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올해는 엔도 슈사쿠를 읽었다면, 내년에는 크리스티앙 보뱅을 읽어야겠어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도 제목을 다시 직역해서 1984books에서 재출간 되었으면 좋겠네요. 좋은 글들 항상 감사합니다!! ^^

잠자냥 2023-02-12 11:58   좋아요 1 | URL
아아니, 이 댓글을 이제 봅니다. 라파엘님 올해는 보뱅! 만나세요~

은오 2023-02-23 00: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어떻게 이렇게 쓰십니까!?

잠자냥 2023-02-23 00:32   좋아요 1 | URL
밥 먹고 책만 보다 보면….
 
그림의 이면 을유세계문학전집 122
씨부라파 지음, 신근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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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 참 흔하디흔한 말이다. 그럼에도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 타이밍이 서로 맞아떨어져야지만 사랑이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누구나 알듯이 꽃은 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랑도 영원하지 않다. 어딘가에는 영원한 사랑이 있다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당신은 참 젊다. 젊기에 아직 영원한 사랑을 믿을 수 있는 것이리라. 여기 <그림의 이면> 의 주인공 ‘놉펀’처럼.

<그림의 이면>은 태국 작가 씨부라파의 대표작으로 스테디셀러라고 한다. 아름다운 문체와 서정적인 내용, 거기에 최루성 멜로라는 점 때문에 태국은 물론 동남아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단다. 최루성 멜로라는 점 때문에 약간 주저하면서도 태국 작품이라는 말에 솔깃해서 읽기 시작했다. 작품은 한 남녀의 평범한 대화로 시작한다. 남편이 어디선가 그림을 가져왔는데, 아내가 의아한 듯, 그림의 출처를 묻는다. 썩 잘 그린 그림도 아니고 특별히 아름답지도 않다. 더군다나 남편의 취향도 아닌데, 그런 그림이 남편의 서재에 걸려 있는 게 이상하다. 남자도 아내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스스로 결코 돈을 주고 살 것 같은 그림이 아니다. 그렇게 잘 그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는 이 그림에 관해 아내가 질문하는 순간부터 ‘움찔’하며 짐짓 무대 위에서 조심스럽게 말하는 배우처럼 ‘친구가 그려준 그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이 그림을 책상에 앉아서 일할 때는 등 뒤에 둔다. 처음 마음먹은 대로 정면에 두었다면 아마도 그림에 몹시 신경이 쓰일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너무나 평범한, 아내뿐만 아니라 모두가 관심을 두지 않는 이 그림을 두고 그는 생각한다. ‘그 그림의 이면에는 인생이 있고 그 인생이 자신의 마음에 새겨져 있음’을 잘 안다고.  그림 하단 한 모서리에 ‘미타케’라고 조그맣게 쓰인 글씨와 6년 전의 어느 한 때를 기록한 날짜가 보인다. 이 그림에는 어떤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것일까. 그림은 그를 과거로, 추억으로 이끌어간다.

이 서장(序章)만 읽고도, 대부분의 독자는 이 그림이 남자의 지나간 시절과 관련 있으며 그림을 그려준 이와 그가 평범한 사이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윽고 이 그림을 그려 준 사람이 여성, 그것도 그와는 신분 차이가 꽤 나는 여성이 그려준 것임이 곧 드러난다. 남자의 이름은 ‘놉펀’- 스물두 살인 그는 일본에 유학 와 있다.  어느 날 아버지의 친구인 아티깐버디 공(公)이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오는데, 그는 그 부부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가이드 역할을 해줄 것을 부탁 받는다. 공항으로 마중 나간 놉펀은 공의 곁을 따르는 두 여인 중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쪽(중년에 가까운 나이의)을 공의 아내로 생각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훨씬 젊은 쪽이 공이 새로 결혼한 아내가 아닌가. 왕족 출신의 ‘끼라띠 여사’- 그녀가 바로 공의 아내이다.  놉펀은 그녀의 눈부신 미모에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만다.

일본 유학 중인 스물두 살의 남자, 오십 대의 남자와 갓 결혼한 이십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성. 일본이라는 공간에서 두 달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체류 기간, 그 시간 내내 그들 부부의 가이드 역할을 해야 하는 남자…. 아, 이 남자 ‘놉펀’과 ‘끼라띠 여사’가 결국 사랑하는 사이가 되겠구나. 그러나 끝내 헤어질 수밖에 없어서 서로 마음을 정리하고 남자는 이제 여자가 그려준 그림을 들여다보며 6년 전의 일을 회상하는 것이구나…. 초반 몇 장만 읽어도 이야기의 밑그림이  그려진다. 실제로 이 예상은 거의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이 흔하디흔한 불륜, 금지된 사랑 이야기가 남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작품에서는 간혹 반전(?) 아닌 반전이 등장하는데 첫째로 ‘끼라띠 여사’의 나이가 그렇다. 놉펀은 끼라띠가 자신보다 고작 서너 살 위일 거라고 짐작하고는 친구처럼 가까워진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의 나이는 서른다섯. 자신보다 무려 열세 살이나 연상이다. 놉펀은 이 사실을 알고 당황하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그녀에게 빠져버린 뒤이다. 놉펀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과 끼라띠의 결혼을 순수하게 ‘사랑’ 때문에 이뤄진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토록 젊은 미인과 다 늙은 남자가 서로 사랑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개 결혼과 사랑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놉펀은 끼라띠가 돈의 위력이나, 이런저런 압박 때문에 마지못해 늙은 남자와 결혼한 것이라고는 쉽사리 생각하지 못한다. 그녀는 꽤 결혼에 만족해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왕족인 끼라띠가 왜 이 늙은 남자와 결혼한 것일까? 어떤 면에서는 독특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는 끼라띠의 베일에 쌓인 듯한 성장 과정과 결혼하게 된 사연을 조금씩 알아가는 재미도 이 작품을 흥미롭게 만든다.


“제가 계속 온 마음을 기울여 여사님을 사랑해도 됩니까?”
“그것은 자네의 정당한 권리야.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네는 자신의 듯으로 그 권리를 포기할 테지.”
“저는 여사님을 향한 저의 사랑이 결코 사그라지지 않을 거라 확신합니다.”
“자네처럼 어린 나이에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매우 자신감을 갖지. 하지만 우리는 계속 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존재야. 자네의 자신감에 축복을 비네.” (98쪽)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이 장면에서 탄식하고 말았다. 스물 둘 이제 처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남자는 영원한 사랑을 말한다.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보다 십여 년은 더 산 여자는 그 남자가 그 정당한 권리를 그 스스로 포기하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그렇게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는 그의 젊음에, 자신감에 축복을 빈다. 내가 만일 놉펀과 비슷한 나이에 이 책을 읽었다면 영원한 사랑을 말하는 그의 편에 서서 이 금기의 사랑이 꺼지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서른다섯의 여자는 이 세상에 사그라지지 않는 것은 없다고, 언젠가 당신은 스스로 그 마음을 포기하게 되리라고 달관하듯이 말한다. 인생의 덧없음, 사랑의 덧없음을 말하는 끼라띠의 말에 나는 마음이 무너지고 만다.

처음에 놉펀은 끼라띠와 공(公)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서 그들이 결코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자신이 자기보다 열세 살 연상인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끼라띠는 또 어떤가,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설명할 때 그녀 또한 많은 나이 차이를 들면서 “그건 마치 우리의 사랑 사이를 막는 큰 산과 같아서 우리의 사랑이 만나지 못하게” 만든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나이 든 남자와 젊은 여자 사이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런 사랑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지”(62쪽) 않는다. 그렇다면 그 반대는 어떨까? 열세 살 연하의 남자와의 사랑을 그녀는 믿을까? 가능하다고, 존재한다고 생각할까? 사랑은 이런 기존의 믿음을 뒤흔든다. 그러나 그런 사랑조차 또 그렇게 쉽게 지기도 한다.

인간은 종종 타인을 사랑할 때 당신을 향한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고 맹세하고 다짐하고 확신한다. 어떤 이들은 그 사랑이, 그 맹세가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또 어떤 이들은 그러한 맹세와 사랑의 덧없음을 알면서도 믿는 척한다. 그러다가도 어느 틈엔 남들의 사랑은 그렇지 않더라도 나의 사랑만큼은 그럴 것이라 섣불리 확신하거나 희망하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영원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기에 문학이나 영화, 드라마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고자 한다.

끼라띠는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 행복의 어머니라고 믿지. 내 생각엔 그게 항상 진짜는 아니야. 사랑은 인생에 고통 또는 온갖 상처가 생겨나게 할 수도 있어.”(62쪽) 그녀는 사랑이 행복의 원천이라고 믿지도 않고, 사랑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차라리 그것이 “행복 없는 사랑을 갈망하고 근심하는 것보다 나을”(63쪽)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림에는 이면이 깃들어 있듯이 이렇게 확신했던 끼라띠도, 놉펀도 자기의 생각, 믿음, 바람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아니, 그러지 못한다. 마음은, 인생은 그들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영원히 사랑하리라 숭배하던 대상도 시간이 흐르면 여느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지고, 그 사람이 아니면 죽을 것만 같던 열정도 그리움도 낯설게 다가온다. 처음 만날 때 입었던 하얀 꽃송이 가득한 남색 옷이 더는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사랑이 이미 끝났음을, 저버렸음, 그렇게 한 시기가 지나갔음을 안다. 인간 모두의 사랑이 그렇게 되리라는 것도 안다.

끼라띠는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아름다움은 결점과 시듦이 없는 상쾌한 감정”(48쪽)을 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아름다운 것들은 결국 시들고 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아름다움이 가장 빛나는 순간에 더 집착했던 것은 아닐까. 내게 <그림의 이면>이 가르쳐 준 생의 비밀은 결국, 무상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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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0-11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 참 작가의 이름이
발음하기 거시키하네요.

coolcat329 2022-10-11 17:38   좋아요 0 | URL
아 저도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2-10-11 22:22   좋아요 0 | URL
씨부라파! ㅋㅋㅋ

그레이스 2022-10-12 22:40   좋아요 0 | URL
레삭메냐님때문에 자각했습니다.^^;;
요즘 동남아 문학이 조금씩 알려지는 듯요.
내용으로 봐서는 우리나라 1970년대 작품으로 느껴지네요^^

coolcat329 2022-10-11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에 미스터리 요소가 있는 거 같아요. 제목도 미스터리하고요.

잠자냥 2022-10-11 22:23   좋아요 1 | URL
미스터리라면 미스터리일까요? ㅎㅎㅎ 미스터리에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Falstaff 2022-10-11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일찌감치 보관함에 모셔놨는데요, 아후, 작가 이름 발음하기가... 어려운 건 아닌데 자꾸 입에서 이상하게 나와 그게 한 가지 흠이더라고요. 흑흑흑..... 꼭 아파트 이름 리젠씨빌 같아요. ㅠㅠ

잠자냥 2022-10-11 22:2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씨부라파 리젠씨빌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10-12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그러고보니 태국 소설을 안읽어본 것 같은데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조만간 땡투 들어오면 또 우리 다락방이 경제적 도움을 주었구나,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그러고보니 태국 갔을 때 무슨 전시 보고 그 전시에 해당하는 책을 사놓긴 했었거든요. 그 책은 어디있나 모르겠네요. 흠흠. (지금 제 서재 가서 검색해보니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 였네요. 태국의 고전문학 이라네요. ㅋㅋ 별 걸 다 사둔 사람..)

잠자냥 2022-10-12 08:40   좋아요 0 | URL
ㅋㅋㅋ 다부장님이 경제에 큰 도움 주고 계십니다. 저도 태국 문학은 처음이었어요. 근데 다부장님은 진짜 별걸 다 사두네요?!

2022-10-12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2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2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2-10-12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림에 대한 사연이 있는 이야기네요 ^^ 왠지 흥미가 땡깁니다. 게다가 최루성 멜로라니 제가 좋아하는건 다 들어있는 작품이군요~!!

잠자냥 2022-10-12 15:47   좋아요 1 | URL
네, 새파랑 님은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를 좋아하셨으므로 이 책도 좋아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바람돌이 2022-10-12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국문학은 진짜 소개된것도 처음 보는듯하네요. 동남아시아쪽의 문학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쪽에서는 아프리카 문학보다 더 모르는듯요. 저도 찜해갑니다

잠자냥 2022-10-13 09:52   좋아요 0 | URL
네, 바람돌이 님 말씀처럼 아프리카문학보다도 더 덜 알려진 것 같습니다. 바람돌이 님도 태국 문학 꼭 한번 만나보세요~

다락방 2022-10-14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 아침에 땡투 들어올겁니다, 잠자냥 님 ㅋㅋㅋ 잘 받으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2-10-14 16:07   좋아요 0 | URL
다부장님도 낼 아침에 땡투~ 들어갈걸요? 그걸로 정답 찾으세요! 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11-09 16: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이 리뷰 이제 읽었는데, 무상함! 흔한 소재를 특별하게 그려냈다니 좋은 소설일 듯 합니다.
외국 작가 이름 보고 웃으면 실례인데..그래도 씨부라파 ㅋㅋㅋ

잠자냥 2022-11-09 17:21   좋아요 1 | URL
앗 씨부라파 ㅋ 오랜만(?)에 다시 그 이름 들으니 저도 웃음이… ㅋ 괭님도 추카추카~

은오 2023-02-23 0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년만 더 일찍 알라딘 올걸.... 테니스를 배울걸....

잠자냥 2023-02-23 00:3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중딩 때?!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