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나다울 때와 그렇지 못할 때는 언제였던가? 보뱅의 <가벼운 마음>을 읽노라니 그런 생각이 문득 든다. 나다운 순간은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지만, 정말 나답지 않았던 순간들은 명확하게 기억한다. 나를 나답지 못하게 만들었던 장소도 단언할 수 있다. 두 장소 모두 공교롭게도 종교 시설이었다. 한 곳은 성당, 한 곳은 어느 교회. 나는 어느 신도 믿지 않는 비종교인이며 신의 존재도 명확하게 있다 없다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한국의 어떤 종교는 그 종교가 설파하는 주의주장 때문에 조금은 혐오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 내가 그 어느 시절에는 왜 성당이니 교회에 앉아있었을까?
기억은 오래전으로 거슬러간다. 성당을 오가던 나는 스무 살이다. 어느 교회 의자에서 불편한 심정으로 그러나 애써 덤덤한 척 앉아 있던 나는 서른 살이다. 둘 다 그 무렵 내게는 아주 가까웠던 이들의 요구로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완벽한 불협화음- 스무 살의 나에게 성당을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던 그때 그 아이는 천주교 신자였다. 그 어린 나이에는 좋아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는 무엇이나 들어주고 싶었다. 일주일에 고작 한 번 가는 건데 뭐, 그땐 그게 그 아이를 사랑하는 내 마음의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시절에는 서른이 넘어서도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나를 사랑하는데 그것도 못해줘?” 말하면서 교회에 같이 가기를 말하던 사람을…. 그즈음엔 나도 스무 살의 내가 아니었던 터라 싫다고 거절도 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기도 했지만 집요한 그 요구-특히 그것으로 사랑을 확인하려는 태도-에는 질려버렸는지 또 다시 나는 일주일에 한번쯤은 교회에 나가 그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현재의 나라면 아마도 내가 만나는 사람이 그런 요구-특정 종교를 강요하는 행위-를 해온다면 “나 전도하려고 만나니?”라는 말과 함께 그 길로 돌아서지 않을까. 그 시절, 그때 그 공간에서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난다. 더불어 그런 요구를 했던 이들도.
<가벼운 마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그들에게 저항하는 건 훨씬 어렵다.”고 “당신이 원하는 것과 반대로 하도록 당신을 이끄는 데 있어서 친구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169쪽)고- 생각해 본다. 성당이나 교회에 함께 가기를 바랐던 나의 옛 사랑들, 내가 가고 싶지 않은 학과를, 또는 학교를 권했던 부모, 한때는 내가 결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권하기도 했던 부모,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 신고 싶지 않은 신발을 입고 신어보라고 권했던 부모, 내게 결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권했던 친구, 연인…. 나를 미워하거나 또는 내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이들이 결코 하지 않을 것들을 요구했던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기에,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러한 요구를 하는 것이리라 의심하지 않고 그 요구를 들어주던 나. “그들에게 저항하는 것은 훨씬 어렵다.” 어디 나만이 그러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자기를 잃어버린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이 행복인 줄, 사랑인 줄 알고 눈 감은 채 살아간다.
<가벼운 마음>의 주인공 ‘뤼시’는 그런 관계에 철저히 맞선다. 엄밀히 말하면 ‘철저히’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듯, 그렇지 않은 듯, 마치 너무나 가볍게 불어서 부는지조차 모르는 미풍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그 어느 관계에도 얽매이지 않으려 애쓴다. 얽매이지 않는다. 서커스단 한가운데서 자란 소녀, 뤼시는 말한다. ‘내 첫사랑은 누런 이빨을 가지고 있다. 두 살, 두 살 반인 나의 눈 안으로 그가 들어온다.’ 이 어린 나이에 첫사랑을 인지하고 말하는 소녀라니 그 첫사랑은 누구인가-그는 늑대이다. 뤼시의 첫사랑은 늑대이다. 서커스단의 철창 속에 머무는, 산처럼 풍성한 검은 털에 노란 별빛의 눈을 가진 진짜 늑대와 사랑에 빠진 아이- 왜 늑대일까. 늑대는 무리지어 살기는 하지만 스스로 고독을 자처하는 외톨이 늑대도 분명 존재한다. 철창 속에 갇혀 있어도 쉬이 길들이기 어렵다. 개와 거의 비슷한 유전자를 지녔지만 개처럼 길들이고 인간과 사교적인 관계가 되기 어렵다. 어린 뤼시가 늑대를 사랑했던 것은 애초부터 그녀의 길들일 수 없음, 관계 속에서 머물기보다는 자유롭게 고독하게 떠도는 방랑자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그녀의 앞날을 상징했던 것은 아닐까.
서커스단의 떠돌이 삶조차도 뤼시의 자유를 향한 갈망을 채울 수는 없다. 아이는 빛을 따라서 쉼 없이 움직이는 것이 제 임무라고 여기는 듯 가출을 일삼고 그때마다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빚어내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또 쉽게 떠나보낸다. 뤼시의 이런 방랑에 아버지는 침묵하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웃음으로 되돌아온 딸을 반겨준다. 어머니의 이 여유로움, 넉넉함이 뤼시의 영혼을 풍족하게 해준 것은 틀림없으리라. 그러나 어린 뤼시도 성장하고 어머니의 여유로운 웃음으로도 보호받지 못할 세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사랑,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뤼시는 로망을 만나 결혼해 파리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어머니는 일찌감치 뤼시의 이 결혼에 걱정스러운 말로서 우려를 표명한다. “딸아, 결혼은 너에게 너무 일러. 조심해라. 감방은 매력적이고 편안하다고 해도 여전히 감방일 뿐이야. 들어가기는 쉽지만 거기서 나오려면 크나큰 대가를 치러야 해. 로망이 네 교도관이 될 거라는 말은 아니야. 나는 더 안 좋은 경우를 말하는 거란다. 그건 너희 둘 다 감방에 갇히게 될 거라는 거야. 교도관도 없고, 문도 없고, 창살도 없고 자물쇠도 없지만 감방은 그래도 감방이지.”(97쪽)
아, 어머니, 어머니는 어쩌면 이다지도 현명하신가요. 뤼시는 곧 어머니의 말대로 로망도, 결혼도 감방임을 깨닫는다. 아니 깨닫는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뤼시는 알고도 그러기를 선택했다. 로망의 부모, 그 속물스러운 이들을 만났을 때부터 로망과의 결혼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이 영특한 아가씨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뤼시의 마음이 한없이 ‘가볍기’ 때문이다. 뤼시는 로망을 사랑하지 않는다. 단 한순간도 사랑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그 관계에 자기를 넣을 수 있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므로 뤼시 그녀에게 어떤 영향력도 끼칠 수 없다. 뚱보 바흐의 음악을 유독 좋아하는 뤼시, 뤼시는 바흐의 음악에서 ‘감정을 해방’을 느낀다. ‘슬픔도 후회도 우울함도 없이, 단지 똑딱거리는 벽시계 추 같은 음표의 수학만’ 있는 그 음악에서 감정의 해방을 느낀다. 그런 그녀이기에 로망과의 결혼생활은 고통스럽지 않다.
‘감정의 깊이는 사랑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가 많고, 모두 이기심과 연관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우리가 우는 것은 자기 자신 때문이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116쪽)이라고 생각하는 뤼시, ‘마음이 가닿지 않는 한 육체는 처녀지로 남아’(124쪽) 있기에 자신은 결혼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뤼시. 그런 그녀에게 마침내 사랑이 찾아온다. 그 사랑 속에서 처음으로 뤼시는 ‘영원한 나이’를 갖는다. 사랑에 빠진 뤼시는 그 관계 속에서 로망이 그러했듯이 고통에 빠지게 될까? 그러나 뤼시는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법을 아는 소녀이다. 무리 속에서도 고독을 아는 늑대, 길들여지지 않는 늑대를 사랑했던 소녀- ‘열 살과 열일곱 살 사이에, 내 마음은 바람이 드나드는 통로’가 됨을 알았던 소녀 그 통로로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알았던 소녀. 제 아버지의 묵직한, 비난하는 듯한 침묵이 아니라, 쥐라산매 숲속의 침묵, 백지 같은 침묵을 지키면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소녀. 그녀는 ‘침묵하게 하고 도망가게 하며 비사교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 그 수호천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런 삶을 선택하고 살아간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요구에 부응하느라 애쓰며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도 없으며, 헛된 명성으로 얻은 헛된 기쁨도 없으며 오직 해방된 자유로움, 혼자 있기에 완전히 자유로운 고독만이 있을 뿐이다. 글을 쓸 때 잉크 대신 가벼움으로 쓴다는 뤼시. 그녀의 말대로 가벼움을 파는 상점은 없다. 그러나 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여름비의 도도한 서늘함에, 침대 맡에 팽개쳐둔 펼쳐진 책의 날개들에, 일할 때 들려오는 수도원 종소리에, 활기찬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음에, 풀잎을 씹듯 수천 번 중얼거린 이름에 쥐라산맥의 구불구불한 도로에서 모퉁이를 돌아가는 빛의 요정 안에, 슈베르트의 소나타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가난 속에, 저녁마다 덧창을 느릿느릿 닫는 의식에, 청색, 연청색, 청자색을 입히는 섬세한 붓질에, 갓난아기의 눈꺼풀 위에, 기다리던 편지를 읽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이다 열어 보는 몽글몽글한 마음에.”(69쪽)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 가벼움을 찾지 못하는가. 뤼시는 말한다. “그 까닭은 어디에나 있는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기술이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뱅의 <가벼운 마음>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거기서 떨어져나가기를, 그리하여 침묵과 고독 속에서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기를 조용히 권한다. ‘우리는 우리와 가까워진 사람들을 죽이느라 세월을 보내고 우리 역시 죽임을 당한다.’(146쪽)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장할 수 없다.’고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품은 사랑, 우리를 충분히 안다고 믿는 사랑에서 벗어나야만 성장할 수 있다.’고 ‘우리는 그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들을 할 때야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177쪽)고, 그러므로 ‘가장 위대한 기술은 거리두기의 기술’이라고 ‘너무 가까우면 불타오르고, 너무 멀면 얼어’ 붙기에 ‘정확한 지점을 찾아서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145쪽)고…. 이 한편의 길고도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시(詩)는 그렇게 진정한 삶, 참다운 나를 찾는 법을 조용히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