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보았던 영화 중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작품이 종종 있다. 어린 시절에 봤기 때문에 더 인상 깊었는지도 모르겠다. 잉그리드 버그먼이 주연을 맡아 열연했던 영화 <가스등Gaslight>도 그중 하나이다. 지금이야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지만(최근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남편이 아내에게 자신을 가스라이팅한다고 말해서 어처구니없었던 기억이 난다. 상황은 정반대였는데, 도리어 남편이 적반하장으로 나오기에, 이젠 개나 소나 가스라이팅 운운하는구나 싶었다.-<이혼숙려캠프>, 12기 주정부부 편-). 아무튼 내가 이 영화를 보던 때만 하더라도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은 보기 드문 단어였다. 그런데 내가 이 ‘가스라이팅’을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하면, 고딩 때 영화 <가스등>을 본 다음, 아주 또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가스등 이펙트>라는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가스등 이펙트’란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을 조종하려는 가해자와 그 상대방을 이상화하고 그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피해자가 만들어내는 병리적 심리 현상을 뜻한다. 이 용어는 앞서 언급한 영화 <가스등>에서 따왔다. 이 영화에서 남편은 아내의 유산을 빼앗기 위해 그녀를 서서히 정신병자로 몰아간다. 그가 보석을 찾기 위해 다락방에 불을 켜면, 그 때문에 아내의 방에 있는 가스등이 희미해지곤 하는데, 아내가 아무런 이유 없이 흐릿해지는 가스등에 관해 이야기하면, 남편은 그녀가 미쳤기 때문에 환각을 보는 것이라고 매도한다. 혼란스러운 아내는 겁에 질린 나머지 점차 히스테릭하게 행동하고, 남편이 끊임없이 이야기하면서 주입하듯이 실제로도 무기력하고 방향 감각이 없는 사람이 되어간다. 이 영화로 말미암아 이러한 가학-피학적 인간관계를 ‘가스등 이펙트(Gaslight Effect)’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돌고 돌아 마침내 나는 영화 <가스등>의 원작인 패트릭 해밀턴의 <가스등>을 읽게 되었다. 영화를 본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 희미해졌던 장면이나 대사들이 이 작품을 통해 생생히 되살아났다. 심지어 고딩 시절에 비해 타인에 의한 심리적 조종, 즉 가스라이팅에 관해 좀 더 잘 알게 된 지금, 게다가 그 시절에 비해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개념까지 알게 된 지금에 이 책을 읽으려니 남편 ‘매닝엄’의 기가 막힌 가스라이팅 솜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자, 남편 매닝엄의 가스라이팅 솜씨를 한번 살펴보자.
매닝엄: 자 어서 대답해 봐요. 하인이 왜 필요한 거지?
매닝엄 부인: (마지못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우리를 위해 일하기 위해서겠지요.
매닝엄: 바로 그거요. 그런데 왜.....?
매닝엄 부인: 그렇지만 그들도 조금은 배려해 줘야 하잖아요. 그것뿐이에요.
매닝엄: 그들을 배려해 준다고? 바로 그런 점이 당신의 착각이라는 거요. 마치 그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 우리를 위해 일하고 있는 듯 말하잖아. 나는 엘리자베스한테 일 년에 16파운드씩 지급하고 있다고. 낸시애게는 10파운드. 둘의 보수를 합하면 일 년에 26파운드라는 말이오. 그게 다른 무엇보다 정확하고 현실적인 배려가 아니면 대체 뭐가 배려라는 말이오.
매닝엄 부인: 알겠어요. 여보,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매닝엄: 당연하지. 달리 생각하자면 그건 당신 마음이 너무 약해서 그런 거요.(<가스등>, p.14)
매닝엄과 그의 아내 벨라는 매일 이렇게 사소한 일로 입씨름을 벌인다. 아니, 입씨름이라는 소리는 잘못 되었다. 일방적으로 매닝엄이 벨라에게 훈계하듯이 가르치고, 윽박지르고, 비아냥거린다. 저 상황도 지극히 별일 아니었다. 난롯불이 꺼져가고 있어서 석탄을 넣기만 하면 되는데, 매닝엄은 굳이 종을 울려서 하인을 부르라는 것이다. 벨라는 석탄쯤 자기가 넣을 수 있다며 하인을 부르지 않겠다고 하는데, 매닝엄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일대 잔소리를 쏟아낸다. 사실 석탄 정도야 아내.... 아니 매닝엄 니가 니 손으로 넣으면 되지 않겠니? 그런데도 그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 아내에게 굳이 종을 울려서, 굳이 하인을 불러서 석탄을 넣으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돈을 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 런던의 한 가정의 모습이지만 이와 비슷한 장면은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다. 돈을 버니까 왕처럼 군림해도 된다는 가부장의 꼴사나운 모습.
덕욱이 매닝엄과 벨라의 나이 차이는 열 살이 넘는다. 매닝엄은 45세, 벨라는 34세. 사사건건 지적질하면서 훈계해도 나이 어린 아내는 모두가 자기 잘못이려니 전전긍긍할 뿐이다. 심정이 착하니 더 조종하기 쉽다. 매닝엄은 벨라가 자꾸만 이런저런 물건을 숨기거나 잘 까먹고, 심지어 기르고 있는 강아지를 괴롭히고도 시치미를 뗀다고 몰아세운다. 게다가 벨라의 엄마는 정신병을 앓다가 돌아가셨으므로 정신병은 집안 내력일지도 모른다고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다. 벨라는 억울하기만 하다. 내가 강아지를 학대하다니! 남편 몰래 액자를 치운 적도, 영수증을 잃어버린 적도 없다! 그런데 남편은 왜 자꾸 날더러 미쳤다고 윽박지르고 심지어 하인들 앞에서도 망신을 주는 걸까? 매닝엄이 화를 내고 집을 나가버리면 어김없이, 방 안을 비추던 가스등이 희미하게 흔들린다. 이윽고 위층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발소리. 유령일까? 정말 내가 미친 건 아닐까? 벨라는 조금씩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매닝엄: 나는 지금 나갔다가 10시에 돌아올 거야. 그동안 영수증을 찾아 놔. 그리고 내게 거짓말을 했으며, 사실은 일부러 감췄다는 걸 인정할 준비를 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조만간 당신은 의사를 만나게 될 거야.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을 말이야. 그들이 당신 상태를 진단해주겠지. 내 말 알아들었어? (p.34)
매닝엄. 지금 어떻게 그런 걸 물을 수 있지? 아니 벨라 그런 일은 없을 거요. 당신이 나를 기분 좋게 해 주면 나 역시 당신을 기쁘게 해 줄 거야. 하지만 당신이 나를 거스른다면 그리하여 당신과 내가 적이 된다면 당신은 결코 평안할 수 없을 거야. (p.34)
매닝엄: 그래 지쳤을 테지. 그래서 더는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거야. 그저 꿈을 꾸고 있을 뿐. 하루 종일 꿈속을 헤매며 온갖 걸 상상해 내는 거야. 끊임없이 사악한 상상을 해 대는 거지. 이젠 당신이 그러고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있겠어? 몽유병 환자 같은 멍청이! 오늘 밤엔 어떤 꿈속을 헤매느라 내 책상을 강제로 뜯어내 들여다 본 거지? 오늘 밤에 또 어떤 병적인 꿈을 꾼 거야, 응? (p.102)
매닝엄의 말처럼 벨라는 꿈속을 헤매는 것일까? 그토록 자주 병적인 나쁜 꿈을 꾸며 헛소리를 해대는 것일까? 로빈 스턴의 <가스등 이펙트>에서는 실제 인간관계에서는 상대방을 조종하는 사람이 비록 결과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치더라도 처음부터 사악한 의도를 갖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한다. 단지 그들은 주로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만을 생각한다고, 그들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에 어긋나는 작은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다고. <가스등>의 매닝엄도 그런 부류의 조종자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어떤 의도가 엿보인다. 그런 조종자 매닝엄의 말대로 벨라는 집안 내력 때문에 서서히 미쳐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매닝엄이 어떤 목적이 있기에 벨라를 미친 여자로 몰아가는 것일까? 의도한 가스라이팅이라면 어떤 목적 때문일까? 그리고 매닝엄은 그 목적을 이루게 될 것인가? 벨라는 이대로 매닝엄의 손아귀에서 시든 장미처럼 빛을 읽고 죽어갈 것인가? <가스등>은 흥미진진하게 책장이 넘어간다.
영향력이란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자신이 항상 옳다고 여기며 자존심을 세우고 힘을 과시하는 가해자와 상대방이 자신의 현실감을 좌우하도록 허용하는 피해자 사이에서 일어난다. 피해자들은 가해자를 이상화하고, 그들의 인정이나 사랑, 관심이나 보호 등을 받기 위해서 가해자가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한다. 영향력 행사는 성별에 구분 없이 모든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다. (<가스등 이펙트>, p.22)
문제는 상대방의 영향력이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생겨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이해와 인정, 사랑을 받고자 하는 소망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걱정에서 상대방의 영향력이 생겨난다. 우리가 신뢰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상대방이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할 때, 특히 그 말 속에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을 때 그것을 불신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특히 우리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을 이상적인 존재로 생각한다면, 즉 그들을 인생의 동반자나 존경할 만한 상사 혹은 훌륭한 부모로 생각한다면 그 앞에서 우리의 생각을 고집하기는 쉽지 않다.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고, 영향을 받는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어 할 때, 상대방의 영향력이 시작된다. (<가스등 이펙트>, p.25)
<가스등 이펙트의> 저자 로빈 스턴은 가스라이팅 가해자의 유형을 크게 ‘난폭한 유형’ ‘매력적인 유형’ ‘선량한 유형’의 세 가지로 나눈다. ‘난폭한 유형’은 소리를 지르며 피해자를 비난하기 때문에 알아채기 쉽다. 피해자는 그가 언제 감정을 터뜨릴지 몰라 항상 눈치를 살피며 전전긍긍한다. 폭력적인 남편이나 남자친구, 억압적인 상사를 예로 들 수 있다. ‘매력적인 유형’은 대체로 연인에게서 볼 수 있는데, 불안정하고 예민한 성향은 이성에게 오히려 연민과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는 그의 자아도취적 성향을 낭만적인 사랑으로 오해하고, 그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서는 갖가지 해석과 추측을 달아 자신이 원하는 신비로운 이미지로 재창조한다. 마지막으로 ‘선량한 유형’은 부모나 단짝 친구, 충실한 배우자처럼 피해자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알아채기가 가장 어렵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피해자를 위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애쓰는 것이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기 때문에 피해자는 불평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비참해지고 무기력에 빠진다. 벨라의 남편 매닝엄은 난폭하면서도 선량하고, 매력적인 유형 이 세 가지에 다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벨라는 잘생긴 남편의 사랑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점점 피폐해진다.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은 과연 주어질 것인가? 확실한 점은 그녀 스스로 자신을 믿지 못할 때 병-마음의 병은 더 깊어진다는 것이다. 패트릭 해밀턴의 <가스등>에는 가해자의 심리적 지배를 벗어나는 방법,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극적으로 묘사된다. 그 방법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지금 이 책을 펼쳐보시라.
내가 <가스등 이펙트>를 읽은 것은 2008년인데, 그 이후 이 책은 개정 1판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를 거쳐 현재 개정 2판 <친밀한 파괴자>로 나와 있는 것 같다. 이 책 또한 꽤 흥미진진하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