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설은 첫 문장만 읽고도 그 세계에 깊이 빠져든다. 존 밴빌의 <오래된 빛>이 그랬다.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빌리 그레이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나는 그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졌다. Billy Gray was my best friend and I fell in love with his mother.’ 이 도발적인 첫 문장만으로도 오호라? 싶은데 그다음 이어지는 문장들은 더욱 흥미롭다. 잇따라 좋은 문장들의 향연이 펼쳐지기에 알 수 없는 흥분에 싸인다. 이건 정말 틀림없이 대단한 작품이겠구나 싶은 그런 예감이 고개를 든다. <오래된 빛>의 첫 페이지가 나에게 선사한 느낌이다.
빌리 그레이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나는 그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졌다. 사랑은 너무 강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이 경우에 적용될 더 약한 말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 모든 일은 반백 년 전에 일어났다. 나는 열다섯 살이었고 미시즈 그레이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말하기는 쉽다. 말 자체는 수치를 모르고 절대 놀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른다. 아마 지금은, 어디 보자, 여든셋, 여든넷이려나? 그 정도는 고령도 아니다. 요즘에는. 내가 그녀를 찾아 나선다면 어찌될까? 그건 탐구가 될 것이다. 나는 다시 사랑하고 싶을 것이다.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을 것이다. 딱 한 번만 더. 우리는, (존 밴빌, <오래된 빛>, p.13)
열다섯 소년과 서른다섯 성인의 사랑. 가장 친한 친구의 엄마와의 사랑. 이런 소재라면 거부감이 먼저 들 수 있다. 성인과 미성년자의 사랑이 어떻게 사랑이 될 수 있느냐고, 심지어 친구의 어머니, 미시즈 그레이는 유부녀이다. 남편, 그러니까 빌리의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있다. 빌리를 홀로 키우는 싱글맘도 아닌 것이다. 성인이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착취하고는 사랑이라고 윤색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어 눈살이 찌푸려질 수 있다. 그런 이야기 중 으뜸으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있다. 밴빌의 <오래된 빛>의 시작 부분을 읽노라면 자연스레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떠오른다. 헌데 나는 <롤리타> 또한 전체적인 감상평은 ‘아름답다’로 남겼다. 그 작품 또한 첫 문장이 강렬하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문학동네, 2013, p.17) <롤리타>는 <오래된 빛>의 소년과 성인 여성의 그것처럼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부적절한 감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그 작품을 아름답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년이라는 기필코 지나가 버릴 세계, 지나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세계, 열망하지만 좀처럼 가질 수 없는 세계, 이미 잃어버린 세계, 영원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끝없는 열망, 동경… 이런 것들이 한 편의 시(詩)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문체가, 문장이, 표현이 아름다우면 그 내용이, 소재가 어떤 것이라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미성년자와 성인의 사랑을 사랑이라고 묘사하는 것, 그것을 찬양하거나 옹호함으로써 그 세계를 동조하는 것은 하는가? 이는 윤리적,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닌가? 이런 세계를 인정하고 동조하는 사람은 현실에서 그런 일이 실제로 발생했을 때 침묵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들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예술, 특히 문학을 도덕적 윤리적 잣대로 평가하는 것, 특히 그러한 잣대를 가장 큰 기준으로 삼고 판단하는 것을 반대한다. 얼마 전 읽은 제임스 우드 또한 그렇게 말한다.
소설은 수집할 수 없는 데이터에 대한 멈추지 않는 실험이다. 내가 소설을 사랑해왔고 지금도 사랑하는 이유는 종교적인 텍스트와 근접하면서도 최종적으로는 다르다는 점이었다. 소설에서의 진실은 언제나 믿음의 문제이고 그것을 검증하고 확인하는 것은 독자에게 달렸다. 우리는 믿으라는 요청을 받지만 언제라도 그 요청을 자유롭게 거부할 수 있다. (...) 소설에서의 믿음은 언제나 ‘마치.....인 것처럼’의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은 은유적 믿음이며 실제 믿음과 유사할 뿐이다. (제임스 우드,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 p.45)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세속적 태도와 종교적 태도 사이를, 삶의 순간들과 삶의 형식이라 할 만한 것들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일이다. 소설의 세속적 충동은 인생을 확장하고 연장하는 것이며, 소설은 평범한 인간의 일상이라는 주식을 거래하는 위대한 상인이다. (같은 책, p.50)
그렇다. 내가 소설을 사랑하는 까닭은 문학은 종교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는 결국 한없이 많은 자유가 주어져있기 때문이다. 험버트가 롤리타를 탐하는 것은 죄이다. 미시즈 그레이가 앨릭스를, 또는 앨릭스가 친구의 어머니를 욕망하는 것은 죄이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윤리에 어긋나며 도덕적으로도 지탄받아 마땅한 죄이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이기에 자신이 저지르는 마음속의 죄를 알고 번민한다. 고해성사를 통해 속죄한다. 여러 번 그 죄를 그치기를, 죄로부터 멀어지기를 간구한다. 그러나 그 바람은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그들의 갈등과 번뇌에 동조하다가도 실패하고 마는 그 순간 안타까워하거나 함께 절망하거나 또는 갑자기 근엄한 표정으로 그들의 죄지음에 손가락질을 하기도 한다. 제임스 우드의 저 말처럼 ‘세속적 태도와 종교적 태도 사이를, 삶의 순간들과 삶의 형식이라 할 만한 것들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소설의 세속적 충동’을 목도하면서 우리 ‘인생을 확장하고 연장’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의 삶도 반추하는 것이라.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또 당신의 삶을 내가 어떻게 그 종교적 잣대만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와 같은 것들.
그렇게 나는 열다섯 소년 앨릭스와 서른다섯 유부녀 미시즈 그레이의 삶으로 들어간다. 사춘기 소년에게 어떻게 친구의 엄마가, 서른다섯의 여자가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일까? 어린 시절, 저 나이의 내게 서른이 넘은 어른들은 늙음 그 자체였다. 어떻게 저 나이가 되도록 살아가고 있는지가 궁금한 존재. 앨릭스 또한 미시즈 그레이를 처음 봤던 때를 잘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들은 우리가 그다지 눈여겨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형제들은 달랐다. 누이들까지도. 하지만 어머니들은 아니었다. 모호하고 형체 없고 성별 없는 어머니들은 앞치마와 약간 삐져나온 헝클어진 머리, 희미하지만 똑 쏘는 땀 냄새에 불과했다. 그들은 늘 배경에서 희미한 정체로 빵 굽는 그릇이나 양말을 들고 무슨 일을 하느라 바빴다. 미시즈 그레이를 특별히, 분명하게 의식하기 전에도 나는 틀림없이 그녀 근처에 수도 없이 있었을 것이다.’ (p.26)
그런 존재를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 것인가? ‘그러니까 자전거를 탄 여자가 그녀가 아니었다면’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앨릭스는 열다섯 이전, 열 살인가 열한 살 즈음에 우연히 동네에서 자전거를 타고 성당에 가는 여인을 목격한다. 성당 앞 마당가에 다다른 자전거. 4월의 어느 봄날, 봄바람에 자전거 탄 여인의 치마가 허리까지 훌렁 올라간다. 그 광경을 줄곧 지켜본 어린 소년, 앨릭스와 눈이 마주친 여자는 망설임도 없이, 당황한 기색도 없이 입술을 알파벳 ‘O자’로 만들면서 경쾌하게 웃고 지나간다. 이 강렬한 기억…. 수년 후, 빌리의 집에서 느림보 빌리를 기다리다 미시즈 그레이를 마주치게 된 앨릭스는 미시즈 그레이가 바로 그때 그 여자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기억은 불확실하다. 앨릭스는 자전거 탄 여자가 미시즈 그레이인지 아닌지 확신하지는 못한다. 단지 그때의 그 강렬한 인상의 여인이 미시즈 그레이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지만 첫 사랑의, 소년의 첫 사랑의 신화가 신화로서 탄생해, 오롯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느림보 친구 때문에 등굣길이면 늘 빌리의 집에서 기다리는 처지가 되는 앨릭스. 앨릭스에게 빌리의 이 느림은 축복이었을까 저주였을까. 그날 또한 빌리를 기다리다 우연히! 앨릭스는 방문이 조금 열린 빌리 부모의 침실 안 부부욕실에서 벌거벗은 채 목욕을 하고 있는 미시즈 그레이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목격한다. 일은 그렇게 벌어지게 예정된 것이었을까? 이때부터 앨릭스는 거침없이, 완벽하게 그레이 여사, 친구의 엄마, 빌리의 엄마, 미시즈 그레이를 욕망하게 된다. 아니 그런데, 뭐 벌거벗은 여자의 몸을 한번 흘낏 봤다고 사랑에 빠진다고? 당신은 코웃음을 칠 수도 있다. 앨릭스, 아니 밴빌은 이렇게 쓴다. ‘만일 당신이 코웃음을 치며 그래 봐야 벌거벗은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된 것뿐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리다는 것, 경험을 갈망한다는 것,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갈망한다는 게 무엇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p.55)
그렇게 해서 앨릭스와 미시즈 그레이는 몇 번의 마주침과 우연한 순간들이 부딪쳐 가까워지게 되고 빌리와 빌리의 여동생, 아버지가 모두 집을 비운 그날 그 집에서 마침내 정사를 나누게 된다. 이런 일이 한 번에 그쳤다면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하리라. 해프닝쯤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은 그 여름 내내 이어진다. 앨릭스가 숲속의 한 폐가, 그들이 ‘코터의 집’이라고 부른 그 장소를 발견하면서 두 사람의 만남은 때로는 빌리 가족이 모두 집을 비운 그곳에서, 또 때로는 미시즈 그레이가 몰고 온 차 안에서 또 때로는 코터의 집에서 등등으로 이어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사랑은, 욕망은 불꽃을 피운다. 이 두 사람의 일탈은, 이웃끼리 너무나 잘 알고 지내는 이 작은 마을에서 계속 비밀리에 유지될 수 있을까? 아직 미성숙한 앨릭스는 앨릭스대로, 그런 앨릭스를 번번이 유혹하고 그 욕망에 굴복하고 마는 서른다섯의 성인 미시즈 그레이는 그녀대로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위험한 관계를 끊지 못한다. 그리고 독자는 그들의 금기와도 같은 사랑을 지켜보면서 그 세속적 충동을 목격하면서 ‘인생을 확장하고 연장’하는 기쁨 또는 슬픔을 맛보게 된다.
<오래된 빛>에는 앨릭스와 미시즈 그레이의 사랑뿐만이 아니라 여러 형태의 인간관계가 등장한다. 앞서 이 작품의 첫 페이지를 통해 유추할 수 있듯이, 화자인 나(앨릭스)는 이미 육십이 넘은 나이로 퇴물 연극배우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에게 한 영화제작사가 주연 배우로 출연해줄 것을 의뢰해오면서 앨릭스의 현재의 삶과 과거, 소년 시절 그 오래된 기억 속의 일들이 교차하면서 펼쳐진다. 그 모든 관계들의 공통점은 대부분은 그들 각자의 관계에 나이 차이가 크게 난다는 점이다. 소년 앨릭스와 미시즈 그레이가 그러했고 앨릭스의 딸 ‘캐스’와 딸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악셀 판더’와의 나이 차이도 그러하며, 하필이면 딸의 연인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해체주의 비평가 ‘악셀 판더’ 전기 영화를 찍기로 결정한 앨릭스 앞에 나타나는 또 다른 주연 여배우 ‘돈 데번포트’의 나이 차이 또한 그러하다. 그 각각의 관계는 사랑이기도 하고 이해(理解)이기도 하고 추앙이기도 하며 또 때로는 그리움이기도 하다. 그리고 저마다의 상실이 존재한다. 꽃피는 생이 있으면 시들어 가는 인생도 있으며, 이미 저물어 버린 생도 있다. 찬란한 여름이 가고 쓸쓸한 가을이 오듯 모두가 언젠가는 “이제 집에 가야 할”(p.321) 때가 온다. ‘방황하는 아이’들 모두가 그러하다. 소년은 그렇다 쳐도 미시즈 그레이는 왜 그랬을까? 그녀에게 앨릭스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을 읽을 때쯤, 그 비밀이 밝혀져 한층 더 처연하고 쓸쓸하게 다가온다. 모든 것은 ‘한 해가 찬란한 절정에 오른 그때 이미 이울 채비를 하고’ 있었구나....
6월이고 한여름이었다. 끝나지 않는 저녁과 하얀 밤의 시간이었다. 소년으로 존재하며 세상의 그런 날씨 속에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내가 아직 너무 어려서 알아보지 못했던, 또는 인정하지 못했던 것은 한 해가 찬란한 절정에 오른 그때 이미 이울 채비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시간과 시간의 사라짐을 제대로 보았다면 아마 나의 심장을 가시처럼 찔러대는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렸고 시야에 끝이 없었고, 어떤 것에도 끝이 없었고, 여름의 슬픔은 무르익어 빛나는 사랑이라는 사과의 뺨에 번지는 희미한 혈색, 흐릿한 거미집 그늘에 불과했다. (p.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