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못하는 사람들 - 우리의 인간다움을 완성하는읽기와 뇌과학의 세계
매슈 루버리 지음, 장혜인 옮김 / 더퀘스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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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 먹는다, 싼다, 읽는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거의 꾸준히 하고 있는 행위이다. 이 가운데 ‘읽는다’는 자고 먹고 싸는 일에 비해 조금 뒤늦게 시작했다. 언제부터 읽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한글을 빨리 익힌 편은 아니라서 읽기도 그다지 빠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글씨를 알고 난 후부터는 늘 읽었다. 말없이 얌전히 책만 읽는 아이-내 유년 시절의 초상화를 그린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또래와 노는 일보다 책 읽기가 더 좋았고 그런 성향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기보다, 그 공허하게 느껴지는 시간보다 혼자 책 읽는 시간이 좋다.

‘지상의 다락방’- 알라딘의 내 서재 이름이다(다락방 생각해서 지은 거 아님). 홀로 책 읽기 좋았던 어린 날의 그 다락을 떠올리며 지은 이름이다. 내가 좋아하는 책 속의 한 구절,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와도 일맥상통한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못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치는 게 아니라, 마음에 가시가 돋는다. 한 글자도 읽지 못하는 날은 괴롭다. 고통스럽다. 에이, 거짓말! 반문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런데 정말이지 나는 그렇다. 그게 무엇이든 한 글자라도-아니 이건 너무 부족하다- 몇 쪽이라도 읽다 잠들지 않는 날은 잘못 산 기분이다. 술에 취한 날도 무조건 읽다 자야 한다. 읽지 못할 것 같은 날에는 아침이든 점심이든 그 어느 때라도, 어디서라도, 틈을 내서라도 조금이라도 읽어야 한다.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강유원, <책과 세계>)라는 말도 있는데 이 정도면 병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읽지 못하면 우울하다. 나는 책 읽기를 왜 이토록 좋아하는 것일까.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책을 펼치면 그곳이 어디든, 누구와 함께 있든 혼자만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하고는 크게 공감한다. 혹시 나도 이랬던 것은 아닐까? “예부터 세상 속에 섞여 살기가 버거운 사람들은 책 속으로 도피해왔다.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은 사람보다 책과 함께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 아스퍼거증후군 초기 사례연구에는 책에 파묻혀 병동 구석에 앉아 있던 여덟 살 소년이 등장한다. (...) 인간의 행동은 불안정하고 예측하기 어렵지만 책은 언제나 한결같다. 이 소년이 학교 친구들보다 책을 더 편안하게 느낀 이유도 비슷하다. (<읽지 못하는 사람들>, p.149) 공교롭게도 내 오래된 일기 속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한다. ‘인간과 책_ 인간은 너무 가변적이다. 역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사는 수밖에 없다. 책은, 그것도 오래된 책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어쩌면 책을 읽는 이유(2017년 11월 6일)’   

그런데 이토록 내게 절대적인 책을 못 읽게 된다면, 아니 읽을 수 없다면 내 삶은 어떻게 될까? 그 생이 살아갈 가치가 있을까? 한 번도 읽지 못하는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읽지 못하게 될까 봐, 눈을 다칠까 봐 조심하고, 시력이 떨어질까 봐 눈에 좋은 영양제만큼은 열심히 챙겨 먹으면서도 단 한 번도 읽지 못하게 될 내 인생을 상상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읽고 나서 ‘읽지 못하는 삶’을 심각하게 떠올려보고는 그것이 아주 잠깐의 가정(假定)에 속했을지라도 진저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당신도 언제든지 문해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어느 날 갑자기 읽기 능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당신도 ‘실독증’이라는 덫에 걸릴 수 있다고 위협한다. 경고한다.

실독증? 난독증은 들어봤는데 실독증은 또 뭐람?! 이 책에 따르면 실독증은 “더 이상 손글씨나 인쇄된 언어를 읽을 수 없지만 보거나 말하는 등의 다른 일은 계속할 수 있는 신경학적 증후군”을 뜻한다. 읽기능력 상실은 보통 뇌졸중, 종양, 머리손상, 퇴행성 질환으로 인한 뇌손상 때문에 일어난다. 어린이가 읽기를 배우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난독증과는 달리 실독증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성인에게 영향을 끼친다. 평생 책을 읽어온 사람이 갑자기 읽은 것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후천적 문맹이라고도 한다. 갑자기 읽을 수 없게 된 사람을 설명할 용어가 마땅치 않으므로 이 책에서는 이런 환자를 ‘문해력 상실인’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사실 이 책은 ‘읽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 보통의 사람들이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들, 그러니까 난독증처럼 글씨를 인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부터 살펴본다. 그러나 난독증을 다룬 1장은 나와는 관련이 없는 듯해 관망하듯이 읽었다. 그런데 실독증, 문해력 상실인을 다룬 3장은 남의 일 같지만은 않아서 제아무리 지금 잘 읽고, 읽은 것을 잘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든지 그 능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고, 인간은 그렇게 나약한 존재라고 새삼 깨달으며 몰입해 읽었다. 이 장에서는 읽기능력을 상실한 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들의 사례가 여럿 소개된다. 저자에 따르면 작가나 학자, 편집자처럼 읽기가 거의 한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던 사람들일수록 문해력 상실인이 된 이후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경향이 크다고 한다. 신경의학자이자 작가인 올리버 색스는 좌골신경통 때문에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자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한다. “나는 읽어야 한다. 내 삶의 대부분은 읽기다”라고 말했던 그였기에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했다는 게 어쩌면 당연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갑자기 읽기능력을 잃어버린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읽기능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학습 기술을 잃는 것에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하는 것에 가깝다. 읽기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은 더는 자신을 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독증을 겪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 이런 사람들은 더는 읽을 수 없는 상황이 사형선고처럼 느껴진다. “읽기와 문해력으로 얻을 수 있는 사회, 문화, 경제적 혜택”을 비롯해 “현대 사회에서 읽기는 의사소통, 오락, 지식의 원천으로 널리 인식되며 많은 이가 읽기를 의미 있는 삶에 필수적인 지혜의 원천”(p.170)이라는 것을 체득했던 이들이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실독증 사례에서 보듯이(물론 난독증이나 과독증과 같은 자폐아들의 읽기, 공감각, 환각, 치매 등 이 책에서 다루는 다양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간은 단지 눈만이 아니라 뇌로도 본다는 사실을 곧잘 잊곤 한다. 읽지 못하는 날이 올까봐 그저 눈 영양제나 챙겨먹고 시력이 나빠질까, 눈이 다칠까 조심하는 나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읽기는 ‘수많은 감정적‧인지적‧지각적‧생리적 과정을 동기화하며 일어나는 복잡한 행위’이다. 때문에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읽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도리어 누구나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경이롭다. 그렇지 않은가? 이런 면에서 실독증은 읽기가 지적 활동일 뿐 아니라 생리적 활동이며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수많은 신체 교환이 제대로 이뤄져야 하는 체화된 행동이라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읽기장벽은 누구나의 삶에 끼어들 수 있으며 문해력 상실인은 매끄럽게 이뤄지던 읽기가 시각 인식부터 해독, 의미 생성까지 다양한 신경 활동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조합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낸다. 또한 이런 활동이 언제든 오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체 ‘읽기’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눈으로 글자를 좇아서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만이 읽기일까? 이 책에서 소개하는 어떤 사람은 뇌졸중으로 인해 단어의 첫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 그는 사라진 글자를 손으로 따라 쓰는 등 다른 방법을 이용하면 계속 정확하게 읽을 수 있지만 도무지 이런 기술을 사용하려 들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런 방법은 정상적인 읽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대안적인 문해가 문맹보다 나쁘다고 판단하고는 이런 읽기 방식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과연 정상적인 읽기일까? 이 책은 온갖 읽기장벽에 부닥친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읽기 과정이 순조로이 작동할 때는 감춰졌던 읽기의 다양한 측면을 살펴보면서 읽기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성찰한다.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개탄하는 시대이다. 한 인지신경과학자의 “문해는 문화가 발명한 것”이라는 말도 곰곰 생각해볼 만하다. 읽기는 말하기와 달리 인간의 뇌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읽기가 지위, 특권, 권력을 나타내는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이자 의미 있는 삶의 전제조건으로 여겨지는 오늘날, 읽기차이가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더 잘 이해하려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또 이제는 읽기가 단순히 언어기호를 해독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에서 그치는 과정이라고 보는 좁은 관점도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다양한 인지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신경 다양성 운동의 핵심 통찰을 바탕으로 병적이거나 비정상적이거나 ‘읽기가 아닌 것’으로 치부된 활자와의 상호작용 방식에 주목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p.335)는 이 책의 말처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읽기’만이 아닌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세계, 아울러 읽을 수 없는 삶의 고통 또는 읽을 수 있음의 축복까지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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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4-06-27 1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안적인 문해가 문맹보다 나쁘다고 (판단했다고)요?! 읽기 장벽이 무너지는 것만 생각해봤지 반대의 경유는 생각 못해봤거든요. 읽을 수 있는 곳으로 넘어간다고.. 그게 비가역적이리라고 생각해왔던 나를 발견함…진짜 흥미롭네요. 이 서평 너무너무너무 좋아요. 이 책을 빌려온다음에 고대로 갖다 준 “읽지 못한 사람”으로서.. 너무 재밌게 읽고 갑니다.

잠자냥 2024-06-27 16:13   좋아요 1 | URL
네 저 사람은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저라면 대안적인 문해가 문맹보다는 나을 거 같은데... 읽지 못하는 곳통! 으아아. 그렇지 않나요? 정상적인 읽기 행위에 매몰되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요. 이 책 제 리뷰보다 당연히 더 좋은데 ㅎㅎㅎ 나중에 다시 읽어보세요! 제가 쓰지 않은 내용 중에 흥미로운 내용 정말 많아요- 책 읽으면 글자가 다양한 색깔로 보이거나 책을 읽으면서 맛이나 냄새를 느끼는 사람도 있고요...우리의 나보코프는....!

바람돌이 2024-06-27 1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독증이란것도 있다구요? 아 진짜 그건 죽음이에요. 사람들은 저한테 퇴직하면 뭐할거냐고 심심하지 않겠냐고 하는데 저는 몇년 안 남은 퇴직이 너무 너무 기다려지거든요. 그건 순전히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생기는 것 때문인데 실독증도 있다니... ㅠㅠ 😭

잠자냥 2024-06-28 10:19   좋아요 0 | URL
그쵸? 상상만 해도 죽음이죠?! 으아 정말 상상하기 싫습니다.... ㅠㅠ
대부분 실독증은 사고로 인한 뇌손상이나 건강 문제로 발생하는 거 같아요. 건강해요... 우리... 잘 읽기 위해서!

독서괭 2024-06-27 1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독증이라구요...??? 헉.. 너무 무서운데요?? 저는 잠자냥님만큼 책을 읽지 않으면 괴로운 정도는 아니지만, 읽는 대상이 책 뿐은 아니니까요. 와, 너무 힘들 것 같은데..

잠자냥 2024-06-28 10:20   좋아요 1 | URL
˝와, 너무 힘들 것 같은데˝에서 진심 느껴짐ㅋㅋㅋㅋㅋ 건강 관리 잘해요!
실독증은 대부분 (사고로 인한) 뇌손상이나 뇌졸중, 치매 등으로 오는 거 같아요.. 으아.

다락방 2024-06-28 1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기를 어릴 때부터 워낙 좋아하기도 했지만 읽기는 또 저랑 가장 오래 함께 할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막연히 그랬지요. 그런데 몇 해전, 핸드폰을 보다가 초점이 안맞아 눈에서 좀 떨어뜨리면서 갑자기 너무 놀랐어요. 이게 뭐지? 왜 잘 안보였지? 왜 뒤로 핸드폰을 밀어야 했지? 근무중이었는데 벌떡 일어나서 보쓰에게로 가 ‘병원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부랴부랴 그 길로 안과를 갔어요. ‘내가 읽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라는 두려움이 찾아와서였어요. 그건 ‘보이지 않는‘데에서 시작했죠. 이대로 안보여서 못읽게 되면 어떡하지? 읽기를 못할 수도 있다는 건 너무 큰 공포였어요. 아 안돼 어떡하지, 읽지 못하면 대체 뭘 하라는 거야. 너무 두려웠어요. 침착하자, 오디오북도 나오고 있으니까 다른 식으로 책을 읽을 수 있을거야. 그렇지만 그건 그게 아닌데...
병원에서는 저에게 노안이 왔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너무 안타까워서 ‘선생님, 제가 뭘 하면 될까요, 루테인 먹을까요?‘ 했는데, 이미 노안이 온 이상 아무것도 할 게 없다고 하더라고요. 받아들이다가 돋보기를 쓰는 것 뿐이라고... 여전히 읽기는 할 수 있지만, 그런데 예전보다 좀 힘들긴 해요. 이건 보이지 않아 읽을 수 없는 경우에 관한 것인데, 그렇죠, 읽기는 눈만이 하는게 아니죠. 보이더라도 읽을 수 없기도 하는거네요. 그럴 때는 오디오북도 소용이 없는 거겠죠? 그건.. 너무 무섭네요 ㅠㅠ 그러면 어떡해요?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이 책 무섭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잠자냥 2024-06-28 12:59   좋아요 1 | URL
엥? 그냥 페이퍼를 써 이 사람아! ㅋㅋㅋㅋㅋㅋㅋㅋ 댓글 길이 좀 봐! ㅋㅋㅋㅋㅋ
다들 실독증에 충격 ㅋㅋㅋㅋ 계속 읽기 위해서는 눈만 관리할 게아니라 뇌 관리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뇌가 참 뜻대로 관리하기 어려운 영역이기는 하죠.... -_-;;
뇌의 영역이 고장나면 오디오북도 소용이 없기는 합니다..... 뇌의 서사를 구성하는 영역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치매 환자들의 경우) 계속 읽고 또 읽고..... 같은 페이지에서 머물기도 한답니다;;;

구단씨 2024-06-28 14: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 번째 단락 소개해주신 인용구.
시기와 이유는 조금 다르지만, 책에게 향하는 마음은 비슷한 시작인 것 같아요.
책이 도피처가 될 수는 없지만, 도피처가 되어버리고 마는 순간도 있는 듯 하고요.
활자잔혹극 다시 읽다가 실독증, 문맹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리뷰 보니까 더 깊어지는 주제가 되어버렸어요. ^^

잠자냥 2024-06-28 14:38   좋아요 1 | URL
책이 도피처가 되니까 책에 파묻히는 사람들 사례도 나오는데, 책이 도피처가 되기에는 그럴 만한 상태여야 한다는 내용에도 공감했어요. 너무 우울하거나 생활에서 극단적인 일이 일어나면 책으로 도피할 수조차 없는 거죠(<한낮의 우울> 앤드류 솔로몬의 이야기도 잠깐이지만 나오거든요) .
오잉? 활자잔혹극에도 실독증 이야기가 나오는가보군요? 그 책도 재미나 보여요.

희선 2024-06-29 0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눈만 괜찮으면 오래 책을 볼 수 있겠지 했는데... 책을 죽 읽으면 뇌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군요 뇌를 다치거나 뇌가 아프면 책을 못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런 일은 없기를 바라는데... 뇌를 건강하게 하려면 운동도 조금 해야겠군요 조금이라니...


희선

잠자냥 2024-07-02 10:30   좋아요 1 | URL
네, 보통은 책을 본다고 하니까 눈만 소중하게 생각하기 십상인데 뇌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었어요. 뇌를 건강하게 하려면.. 저는 일단 술을 끊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ㅎㅎㅎㅎ

관찰자 2024-07-01 16: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것과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지만 오래 읽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달리기를 하시던 어느 어르신의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가만히 앉아서 읽는 일인데, 그 일을 위해서 하루에 몇시간씩 달려야하다니.. 나는 너무 힘들어서 싫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 정도의 노력은 있어야줘야 평생 건강하게 읽을 수 있는 걸까요.ㅠㅠ 실독증, 정말 무섭네요.

잠자냥 2024-07-02 10:31   좋아요 0 | URL
책 읽는 걸 좋아하는 분들이 많은 공간이라 그런지 다들 실독증에 엄청난 공포를 느끼시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걸 꾸준히 오래 하기 위해선 역시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쟝쟝 2024-07-01 2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 솔찬히 읽는 것이 좋아지긴 했지만, 세상에는 읽는 것보다 재밌는게 너무 많아요!! 잠쟈냥님의 읽기를 포함한 ’세상 읽기‘를 응원합니다. 가끔은 책을 딱 덮어버리고 영화도 집어치우고 하늘을 감상하셔요~!!

잠자냥 2024-07-02 10:32   좋아요 1 | URL
ㅋㅋ 솔찬히 읽는 것이 좋아졌으면서 아직 읽기보다 더 재미닌 게 많은 공쟝쟝, 어쩌면 그대가 삶을 더 잘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루시 게이하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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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생김새나 체형 등 외적인 면이 먼저 떠오른다. 성격이나 취향, 가치관이나 생각 등 그 사람의 내면이 마음에 들거나 자신과 잘 맞아서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능력? 지위? 재산이나 배경 등 그가 가진 것들을 보고 마음에 드는 일도 있을 것이다. <루시 게이하트>의 ‘루시’- 이 소녀, 아니 스물한 살의 이 여자. 그녀가 사랑에 빠져버린 그 대상으로부터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랑이라기보다는 동경에 가까웠을 그런 감정은 아니었을까. 그녀가 서배스천으로부터 보았던 그 빛…. 책을 덮고 거리로 나섰는데 볕이 뜨거운 여름이다. 그럼에도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한겨울 강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두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루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루시 게이하트>가 이토록 내 마음을 뒤흔든 이유는 무엇일까.

플랫강 유역의 작은 마을 해버퍼드에 사는 루시- 춤을 추고 스케이트를 타고 앞만 바라보며 발 빠르게 걸어가는 루시- 집은 부유하지 않지만 총명하고 재능 있는 루시가 이 마을에서만 살아갈 것 같지는 않다. 얼음을 지치는 루시 곁에 해리가 나타났을 때는 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생각하듯이 루시와 해리, 이 둘은 모두가 인정하는 선남선녀 커플이로구나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해리는 루시를 자기의 여자로 점찍는다. 루시에 비해, 아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진 것이 많은 해리, 집안의 재력은 물론 젊고 튼튼하고 잘생긴 자신의 매력을 잘 알아 자기가 원하면 루시가 아닌 다른 여자와도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으리라는 걸 잘 아는 이 남자 해리.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에게 깊은 짜릿함을 선사하는 여자는 항상 보는 루시, 교회 쥐처럼 가난하며 좀처럼 자기를 칭찬하지 않는 데다가 종종 비웃기까지 하는 루시뿐이다. 그녀와 함께할 때면 삶이 사뭇 달라진다. 해리는 루시를 갖고 싶다.

루시도 물론 해리를 좋아한다. 해리가 가진 싱그러운 매력을 잘 안다.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해리의 고백에 일순간 우쭐하기도 하지만 루시는 이 조그만 마을에서 그의 아내가 되어 그의 여자로 살아갈 생각은 딱히 없는 것 같다. 인생이, 운명이 어떻게 흐르느냐에 따라 그렇게 살 수도 있을 테지만…. 그러나 루시는 생의 흐름 자체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아니다. ‘무언가를 지향하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루시에게 그 무언가는 피아노, 그러니까 음악이었다. 음악을 공부하러 시카고로 떠나는 루시. 재능은 있으나 무사태평해서 앞날을 진지하게 고민하지는 않는 소녀, ‘경력’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던, 음악은 자연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던 평범한 소녀 루시. 그런 그녀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서배스천이라는 이름과 함께. 서배스천의 공연을 본 순간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해리와 함께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즐거워하던 천진난만한 소녀가 아니라 한 예술가의 목소리에 감응하고 생의 진실을 깨닫는 여자가 된다.

이 표현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루시는 서배스천의 목소리를 듣기 전부터 그의 매력에 감응했기 때문이다. 그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그의 모든 것이 그녀에게 매력으로 다가온다. 서배스천은 젊고 잘생긴 해리와는 전혀 정반대의 사람이다. 결코 젊지 않은 중년의 남자, 표정도 어둡고 심각하면서 커다란 눈은 지쳐 보이고. 키가 크고 퉁퉁한, 덩치가 아주 큰 사람. 루시는 그를 보자마자 중얼거린다. “그래, 위대한 예술가라면 저런 모습이어야 해.” 서배스천의 목소리를 들은 이후로는 그 무엇에도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 전에는 결코 겪어본 적 없던 감정 때문이다. 루시는 서배스천이라는 한 존재가 내뿜는 새로운 매력에 빠지면서 그 이상의 것을 그때 깨닫는다. “사랑은 그저 말랑말랑한 감정이 아니라 비극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새카만 물처럼 인간을 집어삼키는 열정”임을 깨닫는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바깥세상이 어둡고 끔찍한 곳인 것만 같고 온 세상이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제대로 깨닫게 된 것 같다. 이 강렬한 감정을, 해리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비교할 수 있다면, 견줄 수 있었다면 루시에게 서배스천을 운명이라 말할 수는 없으리라.

그래, 처음에는 동경이라고 생각했다. 피아니스트가 반해버린 성악가- 음악으로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 음악으로 이어진 그들. 그러니까 분명 동경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루시의 마음은 아무래도 그것이 아닌 듯하다. 한 사람의 많은 것을 파괴하는 또 다른 한 사람이라면 그것을 단지 동경이라 부를 수 있을까. 서배스천은 루시의 많은 것을 파괴한다. “어떤 사람들은 신변과 재산에 일어난 변화로 인생이 바뀌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운명이란 감정과 생각에 일어난 변화”이다. 서배스천이 루시에게 그렇다. 루시는 고민한다. 그 사람이 나의 미숙하고 무지하고 그다지 총명하지 못한 면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그의 다정함 역시 꿈은 아닐까,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면 세상과 단절된 채 안개로 둘러싸인 산속의 외딴 언덕에 단둘이 있는 것만 같다. 그의 생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속 깊은 종을 두드리는 듯해서 듣지 못하는 것까지 전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와 보낸 몇 주가 그전까지 살아온 21년보다 더 풍요롭다고 느낀다. 처음 그의 목소리를 들었던 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고 그 전까지 자기의 손에 들려 있던 것들은 전부 하찮고 허무맹랑하다고 느낀다. 루시는 서배스천에게 장미를 보낼 권리가 있는 미지의 여자를 질투하고 심지어는 서배스천의 집사 주세페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내가 주세페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랴.

서배스천 또한 이 작고 어린 루시에게 자신의 마음을 끝끝내 숨기지는 못한다. 루시의 빨간색 깃털이 길 위로 동동 떠내려 오는 모습을 보면 설레고, 그 깃털이 보이지 않으면 낙담하고. 루시가 한 시간만이라도 옆에 있었다면 그토록 울적하지는 않을 텐데, 지루하고 숨 막히던 시카고의 아침이 루시 덕분에 감미롭기만 하다. 루시가 문을 두드리면 꼭 봄이 찾아온 것만 같다. 루시의 마음은 그가 지금껏 마주쳤던 수많은 위장된 감정들과는 사뭇 달라서 그 자체로 완전해 상대로부터 무언가를 취할 필요가 없는 감정라고 믿는다. 때문에 그가 루시에게 너는 정말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 단지 자라나는 과정이며, 인생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그리고 또한 나는 젊음의 싱그러움에 빠진 것일 뿐이라고 둘러대도 그의 마음이 사랑임을 모두가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짧은 포옹이 너무나 애틋하고 격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루시도 서배스천도 이것이 영원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안다. 그렇지만 이것이 한평생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아름다운 것은 오래가지 않는 법. 서배스천이 사라진 후 루시의 마음은 얼어버리고, 세상도 부서져 버린다. 기억으로 되살린 예전의 그 세상에서만 숨 쉴 수 있다. 그런 루시에게 생은 짧다고, 살아가는 것 외에 중요한 것은 없다고, 봄에 힘든 일이 있을지언정 낙담하면 안 된다고, 너의 앞에는 긴 여름이 찾아 올 것이므로 할 수 있을 때 장미 꽃잎을 그러모아야 한다고 누군가가 충고한다 하더라도 그 말들이 그녀의 가슴속에 다가와 박힐 리가 없다. 그저 흘러갈 뿐이다. 어쩌면 루시에게는 여름이 펼쳐지지 않았어도 괜찮았을지 모른다. 그녀는 이미 인생의 장미 꽃잎을 한 번에 다 가졌었기 때문에. 온 마음을 바쳐 가질 수 있었던 그 장미 꽃잎을 다 가졌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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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6-21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 ㅑ ~ 이미 인생의 장미 꽃잎을 한 번에 다 가졌었다는 표현이 정말 딱입니다.
좋은 리뷰, 감사히 읽고 갑니다.

잠자냥 2024-06-21 16:29   좋아요 1 | URL
다락방은 주말의 장미 꽃잎(=편육/잠봉) 다 가진 자이므로 주말을 아름답게 보내십시오~

자목련 2024-06-21 16: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리뷰 👍
저도 이런 리뷰 쓸 수 있었음 좋겠어요~

잠자냥 2024-06-21 17:36   좋아요 0 | URL
자목련 님은 왜 100자평만 쓰셨죠… 훌쩍😭

2024-06-21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21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4-06-21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 뭐예요? 이 아름다운 리뷰 뭐예요? 다들 극찬하시는 루시 게이하트 뭐예요? 그래서, 잠자냥님은 장미꽃잎을 다 가져보았습니까?(마이크)

건수하 2024-06-21 22:03   좋아요 2 | URL
그래서 그 마음을 아는 것 같습니다 🙂

잠자냥 2024-06-22 10:32   좋아요 1 | URL
루시 이 책 알라딘 소설마니아들의 5별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능…

장미꽃잎? 안 알랴줌!!😛

건수하 2024-06-21 22: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마구 읽고 싶어지는 리뷰를 만났네요. ❤️

잠자냥 2024-06-22 10:32   좋아요 2 | URL
헐 건수하의 하트라니!!❤️

희선 2024-06-22 0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라디오 방송에서 소개해준 책이네요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그 방송 오늘 재방송 하는군요 스치듯 또 들을 것 같습니다


희선

잠자냥 2024-06-22 10:33   좋아요 1 | URL
오! 라디오 방송에도 나왔군요?! 좋은 작품입니다. 희선 님도 꼭 읽어보세요!

은오 2024-06-24 17: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막냉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랴.

서배스천을 향한 루시의 사랑보다 잠자냥님을 향한 제 사랑이 더더더 큰 거 같읍니다~!!

잠자냥 2024-06-24 17:20   좋아요 1 | URL
오랜만에(?) 나타나서 여전히 영역표시 곰탱이!
문학에 좀처럼 감응하지 않는 곰탱이도 5별 준 루시 게이하트!! ㅋㅋㅋㅋㅋㅋ

막냉이 오늘도 뽀뽀받을 예정인데….😛

호시우행 2024-06-30 1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의 독서생활에 유익한 자극을 주네요.
 
어떤 미소 프랑수아즈 사강 리커버 개정판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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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것을 알면서도 함께 여행을 떠난 사람이 있다. 이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헤어지자, 그러니까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여행이다 약속-참으로 기묘한 약속을 하고 함께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이 여행이 끝나고, 이 여름이 끝나고 나면 너는 너대로의 삶을 나는 나대로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때- 그렇기에 그 여행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필요도 없었고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이어서는 더 안 되었다. 그저 눈이 부시게 투명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기다란 튜브 위에 누워 수영장 위를 둥실 떠다니며 머리 위로 쏟아지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아침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를 바라보면서 이게 마지막이지, 더는 저 사람하고 이런 곳에 오지 않는다는 거지,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고 다독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괜찮았다. 우리 저거 한번 타볼까? 다른 곳이었다면, 다른 때였다면 절대로 시도해보지 않았을 텐데,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에, 어쩌면 그 바다가 태평양이었기 때문에, 모험하듯이 제트스키에 몸을 실었다. 이 바다에 빠져버리면 죽는 것일까? 공포와 스릴, 알 수 없는 해방감 속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다 신이 나서 웃다가 끝내 눈물을 흘렸다. 돌아가면 우리는 헤어진다. 더는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 당신은 당신, 나는 나로 돌아간다…

사강의 <어떤 미소>를 읽고 나니 문득 이십 대의 나, 그때 그 여름의 바닷가가 떠올랐다. 이십 대의 ‘도미니크’는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뤽과 사랑에 빠지고 그로부터 일주일간 함께 여행을 떠나자는 제안을 받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떠나는 여행이니 뭐 망설일 게 있을까 싶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뤽은 도미니크보다 스무 살이나 더 많은 40대의, 게다가 유부남이다. 심지어 도미니크가 사귀고 있는 베르트랑의 외삼촌이고 도미니크는 뤽의 아내인 프랑수아즈와도 안면을 튼 사이이다. 하필이면 프랑수아즈는 도미니크에게 여러 가지로 호의를 베풀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런 사이의 뤽이 도미니크에게 속삭인다, “우리” 둘이서만 함께 일주일간 여행을 가자고. 연인 사이를 비롯해 호감을 느끼는 두 존재가 어딘가로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하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어떤 새로운 곳을 너와 함께 보고 싶다기보다는 그 새로운 곳에서, 너를, 당신을 나의 눈으로 발견하고 싶다는, 그 기간 동안만큼은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너를, 당신을 독점하고 싶다는 의미가 가장 클 것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연인들이 사랑에 빠지거나 서로 사랑을 확인하게 되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자고 속삭이는 게 아닐까.

그런데 도미니크처럼 명백하게 위험한 제안-그러니까 일주일간 한 유부남의 애인, 정부(情婦)로서의 자리를 제안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은 이 스무 살의 어린 여대생에게 정신 차리라면서 훈계를 늘어놓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어른인 뤽에게 도덕적 비난을 가할 것이다. 유부남 주제에 어린 여자를 꾀어서 일주일간 실컷 즐기고 차버릴 심산이라니, 저런 썩을 놈이 다 있나 혀를 끌끌 찰 것이다. 도미니크, 제정신이야! 저 남자가 원하는 것은 너의 젊음, 너의 육체뿐이다 그러니까 거절해! 달아나! 도미니크도 안다. 이 제안의 위험성, 이 관계의 위태로움, 이 짧은 사랑의 덧없음, 그 후 남겨질 자신의 고통…. 아무리 일주일간 서로에게 충실하더라도 그 기간이 지나면 그는, 뤽은 나를 사랑하지 않기에 떠날 것임을 안다. 그럼에도 도미니크는 뤽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누구도, 그 자신도 열망을 막을 수가 없다. 모든 도덕적 비난과 현실적인 제한을 헤아리기에는 그것들보다도 더 크게 그를 사랑하니까, 원하니까.

칸의 어느 호텔에서의 일주일은 훌쩍 지나간다. 도미니크와 뤽은 함께 수영하고 바닷가를 거닐고 햇볕에 그을리고 위스키를 마시고 방 안에서 사랑을 나누고 함께 잠든다. 키스를 하다 잠든 새벽 내내 키스를 하고 싶다. 잠들 때도 그가 옆에 있고 눈을 떴을 때도 그가 옆에 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열망과 욕망의 대상이 일주일, 168시간 가까이 온전히 내 소유인 셈이다. 내가 정말로 열망하는 사람이 이런 제안을 해온다면 그 제안을 뿌리칠 수 있을까. 일상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헤어지는 것이다, 헤어질 것이다, 다시 만나지 않을 것임을 안다 해도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쉽사리 하지 않는 뤽은 그 일주일이 지나간 후에는 일주일만 더 같이 있지 않을래? 망설이듯 입을 연다. 도미니크보다 연애 경험도 많고 사랑에 냉소적인 그이지만 그 자신조차도 이 사랑을 거부하지는 못한다. 이 주일간의 완벽한 둘만의 시간. 사랑으로 가득한 이 시간이 인생에서 존재했다면 이 사랑을 잃고 나서도 아무리 고통스럽다 한들 그 기억만큼은 어떻게든 행복하게 간직할 수 있지 않을까. 권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권태로운 삶에서 그토록 열망했던 대상, 그 사람과 보내는 며칠은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선물과도 같은 시간일 것이다. 그러기에 도미니크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더 많이 사랑하고, 아무 일 없는 것보다는 더 행복했다가 더 불행해질 거”(p.82)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그 시간이 아무리 짧았다 한들, 한 사람을 사랑했던 사람으로서 얼굴을 찌푸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그 여름 바다 위에서 웃다가 끝내 눈물을 흘렸지만 이제는 그 시절을 돌아보면서 미소 지을 수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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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5-30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께서 생각보다 사강의 책 많이 읽으시네요.
일주일이라 그런거 같은데요. 시간 지나면 다 똑같아 질 것 같습니다.
근데 잠자냥님은 그때 바로 헤어졌나요? ㅎㅎ

잠자냥 2024-05-30 19:00   좋아요 2 | URL
사강 책 국내 번역작은 거의 읽은 거 같아요. ㅋㅋㅋㅋ 사강, 뒤라스 저는 계속 읽게 되더라고요. 다락방과는 달리?! ㅋㅋㅋㅋㅋ
네 그 사람하고는 그해 가을에 헤어졌습니다.

다락방 2024-05-31 23:02   좋아요 2 | URL
어쩐지 그 분에게서 과메기 향이 나는듯 합니다....

독서괭 2024-05-30 1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헤어질 걸 알면서 떠나는 여행이라니.. 어떤 마음일지.. 여행지에서의 장면 하나하나가 남다르게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잠자냥님 최근 글 못 쓰셨는데 어제부터 연달아 두 편~ 이제 읽고 쓰실 여유가 좀 생기신 걸까요? 그렇다면 다행이예요!

잠자냥 2024-05-31 10:20   좋아요 1 | URL
괭 어제 댓글 두 개 다 ˝오˝로 시작함 ㅋㅋㅋㅋㅋ
여행지에서의 장면 하나하나 지금은 몇몇 장면만 기억에 남고 다 잊혔습니다요- ㅎㅎ
근데 그 여행지는 또 가지는 않을 것 같아요. ㅎㅎㅎㅎㅎ
여유라기보다는 안 쓰니까 더 답답한 기분이라서 쓰고 있어요!

달자 2024-05-30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여행이라는 걸 알고 떠나는 여행을 저도 전애인과 해본 적이 있는데, 잊고 있던 기억이 잠자냥님 글을 읽고 되살아났어요. 뭔가 저도 잠자냥님과 비슷한, 먹먹한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흠 그리고 책 내용으로 돌아가서, 제가 만약 도미니크였다면, 뤽이 20살 연상이라는 설정만 빼면 (저랑 동갑이거나 연하라면) 저도 기꺼이 일주일살이 불나방이 되어...불 속에 제 몸을 던졌을 것 같네요

잠자냥 2024-05-31 10:22   좋아요 1 | URL
먹먹하죠... 그 먹먹함을 잊을 수 없을 거 같기도 하고.... 근데 시간이 흐르면 다 잊히더라고요! ㅎㅎㅎㅎ 인생... ㅋㅋㅋㅋㅋ 일주일살이. ㅋㅋㅋ 저 두사람은 결국 일주일 더 있자고 해서 이주일살이했어요. 사실 사랑하는 사람하고라면 이주일도 후딱 갈 거 같아요.

자목련 2024-05-31 10: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 사강 좋아하는 걸까요?
그나저나 이별로 이어지는 여행을 떠나는 마음은...
<마지막 욕망>과 <어떤 미소>까지, 대체 사랑이 뭔지.

잠자냥 2024-05-31 10:25   좋아요 1 | URL
ㅋㅋㅋ 사강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계속 읽고, 이 작품은 사실 구판으로 예전에 읽기는 했던 건데 또 읽은 걸 보면 좋아하는 건가? 막장드라마 같은 소재도 사강이 쓰면 막장드라마 같지 않아서 그런 점에서는 확실히 잘 쓴다는 생각은 들더라고요. 사랑에 빠진 사람들 심리 묘사도 잘하는 것 같고요.

은오 2024-06-05 14: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너무 아름다워요...ㅠㅠ

잠자냥 2024-06-05 14:5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살아 있었네 곰탱이?

2024-06-05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05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05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오 2024-06-05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차오르는 결혼욕구
결혼욕구 잠재우려면 잠자냥님 글을 읽지 말아야 함.. 아니 잠자냥님이 안써야 함..

잠자냥 2024-06-05 14:54   좋아요 1 | URL
곰탱이도 글좀 써보세요. 언니들이 기다릴 텐데....
책만 무쟈게 읽고 있네.....

은오 2024-06-05 15:02   좋아요 1 | URL
전...요즘
머릿속에 잠자냥님밖에없어서..
연애편지가아니면 글이라는걸 도무지 쓸수없는 상태입니다..

잠자냥 2024-06-05 15:06   좋아요 0 | URL
아니 그럼 모든 리뷰를 연애편지 형식으로 써 보든가....
맞춤법 연재 예문처럼!!!! ㅋㅋㅋㅋㅋㅋ

은오 2024-06-05 14: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근데 뤽은 진짜 개새끼다!!
도미니크의 선택은 이해할 만하지만...
애초에 그런 제안한 뤽이 너무 개새끼...-_-

잠자냥 2024-06-05 14:56   좋아요 1 | URL
뤽 너무 개새끼라고 욕하면서 읽었어요? ㅋㅋㅋㅋㅋ
은오는 도미니크처럼 뤽 같은 아재 따라가면 안 됩니다~!! ㅋㅋㅋㅋㅋㅋ

은오 2024-06-05 15:04   좋아요 0 | URL
네 ㅋㅋㅋㅋㅋㅋ 도미니크 힘들어할때 진짜 욕나옴 ㅠㅠ
못따라가게 잠자냥님이 결혼으로 막아주십시오~!!

잠자냥 2024-06-05 15:07   좋아요 0 | URL
ㅋㅋㅋ 한국 이대녀 프랑스 이대녀에게 극공감 ㅋㅋㅋ
도미니크 그 개새끼 프남충 따라가지 마! ㅋㅋㅋㅋ
 
리틀 라이프 1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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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라는 한마디. 내가 너를,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에는 수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이 세계에 넘치도록 부유하는 저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할까. 내가 원하고 욕망하는 대상으로부터 사랑한다는 응답을 받는 순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언제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행복이나 기쁨보다는 고통이나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리틀 라이프> 1권을 읽고 나서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혐오했다. 그 순간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온갖 폭력과 착취를 떠올릴 수밖에 없어서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조차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졌다. 이 사랑이라는 말은 과연 기쁨을 주는 단어인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 그 또한 하나의 이기적 욕망의 발현일 뿐이지 않을까. 사랑이 그토록 끔찍하게 다가온 순간도 없었다.

<리틀 라이프>는 출간된 지 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처음 표지를 보았을 때 남자의 기묘한 표정 때문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금 고통스러운 것일까 아니면 극도의 쾌락을 느끼는 중일까? 고통이든 쾌락이든 어떤 쪽으로든 극한의 체험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다. 책 표지가 거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해서 어떤 의미로든 그의 사연을 굳이 알고 싶지는 않았다. 달자 님이 읽고, 달자 님의 평을 본 은오가 읽고 은오가 읽은 후 나에게 이 책을 선물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렇게 저 남자의 표정은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 기억 속에서 잊혔을 것이다. 고통이든 쾌락이든 그의 사연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고 표지를 다시 보고 또 봤다. 아, 그는 지금 고통스러운 것이구나, 단지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것만이 아닌 육체, 그 자체가 고통스러운 지경이구나. 그 남자의 이름은 ‘주드’- 토머스 하디의 <이름 없는 주드>가 떠오르기도 한다. “승산 없는 것들의 성자”이자, 낙심한 자들, 희망을 잃어버린 자들, 절망에 빠져버린 이들의 성자인 ‘주드’- <리틀 라이프>는 이 주드라는 청년의 절망스러운 생을 훑는다. 그의 사연을 좇다보면 책장을 얼마 넘기지 않고도 그가 어린 시절에 겪은 일들이 무엇일지 가늠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어린 시절이 사라진 사람, 도리어 그 시절이 너무나 참혹해서 현재의 고통의 기반이 되어버린 사람. 안전에 대한 광적인 집착, 주위 사람을 통해 학습하듯이 유년 시절을 새로 창조해 내려고 애쓰는 모습, 타인과의 신체 접촉에 극도로 공포를 느끼는 모습, 자기 몸을 드러내기를 몹시도 꺼리는 모습 등등에서 그가 겪은 일들을 유추할 수 있다.

사랑한다
그리고 루크 ‘수사’라는 단어를 통해 주드가 어린 시절 학대를, 그것도 여러 명의 수사들에게 지속적으로 구타와 강간 등의 참혹한 일을 겪었음을 곧 알게 된다. 그러나 <리틀 라이프>는 그 예상의 정도를 넘어선다. 수사들의 지속적인 강간이나 구타도 역겹고 지켜보기 힘겨운데, 루크와 수도원을 탈출해 주드가 겪는 일들은 일은 차라리 지옥이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이 ‘사랑한다’는 말 아래 이루어진다. 일찍이 버림받아 기댈 곳도 없고 어떤 가치판단도 할 수 없는 아이에게 부당하게 가해지는 폭력과 억압. 아이는 왜 자신이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때 다가오는 선한 미소의 그 사람은 진짜 천사일까. 작품 밖에서 지켜보는 눈은 루크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더 지독한 악마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주드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그리고 그가 그토록 어린 아이라면 루크의 사랑이 세상의 전부일 것이라고, 그 사랑에 응답하고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그를 놓치면 절대 안 된다는 절박함이 당연히 싹틀 것이다. 그 때문에 더 없는 고통을 겪는다하더라도 저 사람 만큼은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끝까지 믿고 싶을 것이다..... 루크는 주드를 “사랑한다” 말한다.

사랑해
첫 번째 책을 덮고는 사랑이 혐오스러워진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일어나는 온갖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이 세상에 실재함을 알기 때문에 더 그 사랑이 역겹다. 그런데 사랑은 때로 완전히 다른 가능성을 같은 사람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윌럼과 주드, 그리고 맬컴, 제이비 이 네 사람은 이십 대 때부터 친구이다. 인종도 성정체성도 나고 자란 환경도, 계급도 다양하다. 그럼에도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오랜 세월을 함께 한다. 그런 중 어떤 두 사람은 마침내 자기의 필생의 사랑이었을 그 사람을 조금 늦게 알아본다. 정상을 가장해야 해서 늘 피곤했던 주드는 더 이상 그 앞에서는 정상을 가장하지 않아도 된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어도 된다. 그들 각자의 필요 또는 욕망 때문에 이루어진 이 사랑은 상호의존적이다. “결코 성문화할 수 없는 결합에 대한 상호 간의 헌신에 의해 묶여 날마다 계속 함께” 있기를 선택한다. “다른 사람이 가장 비참한 순간들에 함께 있을 수 있는 특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그 대신 자기도 그 사람 옆에서 비참한 모습을 보여도 되는”(2권 p.333) 그런 관계이기도 하다. 이 때의 두 사람도 서로 “사랑해” 하고 말한다.

사랑한다
주드를 둘러싼 “사랑해”의 세계에는 여러 사람이 존재한다. 다 큰 성인을 선뜻 양자로 입양하는 해럴드와 줄리아가 있고, 늘 헌신적인 앤디가 있기도 하고 맬컴이나 리처드처럼 조금 떨어져서 묵묵히 지지와 응원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제이비에 대한 마음은 나도 좀 복잡해서 이런 친구의 “사랑해”를 감히 윌럼이나 해럴드, 애너, 앤디, 맬컴, 리처드와 동일선상에 두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그 또한 주드에게 사랑을 말한다. 그런데 이들의 사랑은 루크 수사의 사랑한다와 무엇이 다를까.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주드를 사랑한다. 욕망, 필요 또는 헌신…. 사랑한다는 말 자체는 똑같다. 심지어 케일럽. 그 또한 어떤 형태로는 주드를 사랑했을 것이다. 주드 또한 케일럽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부정할 수 있을까. 절대 상처주지 않을 게 확실했던 사람들, 친절하다고 정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둘러 싸여 살다가도 주드는 케일럽을 선택한다. 그가 나쁜 사람임을, 나쁜 냄새를 풍기는 사람임을 알면서도 그 위험을 감수한다. 망가진 사람과 망가뜨리는 사람, 쓰레기 더미와 그 주위를 킁킁대는 자칼이라는 걸 알면서도 선택한다. 그와 함께 있으면 도리어 “살짝 더 인간다워진 느낌”(p.472)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트레일러 박사와 윌럼을 같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가브리엘 신부와 앤디는? 루크 수사와 해럴드는? 첫 번째 집단에 존재하는 것들이 두 번째 집단에도 존재하나? 그렇다면 두 번째 집단은 어떻게 다른 길을 갔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었단 말인가?” (p.202) “‘당신을 많이 사랑해요‘와 ‘당신을 많이 사랑했어요‘ 그리고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와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려고요‘ 사이에는 서로 다른 사랑의 세계가 존재”(프랑수아즈 사강, <길모퉁이 카페>, p.153)하듯이 똑같은 “사랑해”에도 서로 다른 사랑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해
이 책을 읽은 어떤 이들은 주드의 끝 모를 자기 파괴적 성향과 자기혐오를 징징거림 정도로 치부하고 있어서 조금 놀랍기도 하다. 주드 같은 생을 살았는데 그렇게 자기를 파괴하면서까지 견디고 버틴다는 것 자체가 놀랍지 않은가. 게다가 그 모든 일들이 자신이 선택을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온전히 용서하고 사랑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주드의 머릿속에는 끊임없는 투쟁이 일어난다. ‘만약에 내가 그때 루크 수사를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트레일러 박사에게 잡혀가지 않았다면, 케일럽을 집 안으로 들이지 않았더라면, 애너 말을 좀 더 들었더라면...’ 그는 계속한다. 비난이 규칙적으로 울린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윌럼을 절대 만나지 못했더라면, 해럴드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줄리아나 앤디나 맬컴이나 제이비나 리처드나 루시엔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의 인생에서 일어난 “가장 끔찍한 ‘만약‘들은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다. 모든 좋은 ‘만약‘들도 마찬가지다.”(p.401)

주드는 생을 사랑해보려 애썼음에도, 그 자신에게 “사랑해”를 끝까지 말하지 못한다. 실패한다. 학대에 익숙해지고 자신이 무가치한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루크의 또 다른 형태인 케일럽에게 자기를 내맡긴다. “경솔하게 자신을 맡긴 사람, 너무 큰 희망을 걸었던 사람, 자기에게 구해주길 바랐던 사람,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게 분명해졌을 때도, 희망이 썩어 들어갔을 때도 그는 빠져나올 수가 없다. 떠날 수가 없다”(p.477)…. 이것을 단지 철부지의 징징거림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너무나 참혹한 인생이라 주드에게 잠깐 햇볕이 들고 행복한 순간이, 기적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 세월들이 끝난 후에는 그가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린 것은 당연한 수순 같기도 하다. 그렇게 버틴 것만으로도 당신은 생의 의무를 다했노라 말해주고 싶기도 하다.

“물건들은 깨지고, 때로는 수리되고, 대부분의 경우엔 망가지더라도 삶이 스스로 변화하면서 그 상실을 보상”해준다. 주드의 생에 찾아온 그 잠깐의 행복한 순간들도 보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차라리 그토록 눈부신 보상 없이 그저 지루해도 안온한 생이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잠깐의 보상의 기대어 이 덧없고 고통스러운 삶을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버티고 견딘다. 인생이란 참으로 슬프기 짝이 없다. 너무 슬프지만 그래도 사람은 그렇게 살아간다. 삶에 매달리고 위안거리를 찾으며… 그리고 그 위안거리에는 역시나 사람과 사랑이 가장 큰 크기로 존재한다. 윌럼이 말했듯이 “좋아하는 일과 살 곳,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2권 p.146)이 있다면 이 생 자체가 견뎌볼 만한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도 자기만의 “사랑해”를 찾아나서는 것이겠지..... 주드와 윌럼의 그 나이로 나도 조금씩 더 다가가고 있다. 여전히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듣는다. 이 보잘것없는 생, 극도의 쾌락인지 고통인지 알 수 없는 이 생에서도 좋은 “만약”을 알아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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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4-05-01 18: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진짜....너무 좋아....😭 세번 읽었읍니다.
예전엔 제가 좋아하는 가수가 이 세상의 모든 노래를 불러줬으면 싶었는데 이제는 잠자냥님이 제가 읽은 모든 책의 리뷰를 써주셨으면 싶네요. 잠자냥님 덕질 매일 새로워 매일 짜릿해!!!!!

주드의 과거에 대해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해 묘사한 건 주드의 성격 행동 습관 선택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진짜 다 알고 보면 절대 징징거림이라고 할 수 없음. ㅠㅠ 전 이 책 읽고 비로소 자해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읍니다..
또 제이비가 중간중간 주드 질투하는 거 보고 좀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살면서 윌럼이 주드한테 주는 것과 같은 애정을 타인으로부터 받는다는 게(또 본인도 그런 애정을 줄 기회가 있다는 게) 사실 누구한테나 주어지는 행운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굉장히 드물고. 이런 점에 있어서는 주드의 인생도 제이비 같은 사람이 보기엔 부러운 인생이 될 수 있겠구나 했던.

그리고 잠자냥님...사랑해요...♥️

잠자냥 2024-05-02 09:59   좋아요 1 | URL
헐 이 긴 걸 세 번이나…?! 제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 아니 그건 아니고 고양이 한 천 마리는 살렸나 봅니다?! 이런 덕질을 다 받아보고…?!

곰탱이가 읽은 책 중에 문학은 되도록 써보겠읍니다….

주드의 자해는… 그렇게 무가치한 대우를 받고 살다보면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순간 만큼은 고통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고통을 가하는 그 순간 만큼은 내 몸은 내 거,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 그런 거 같기도 해요. 또 워낙 소심한 사람이라 분노를 자기에게 푸는 수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 리뷰에서 이거 쓰려다 까먹었네요!!! 커피를 끊게하고 자기 몸에 면도칼을 긋게하는 사랑이라니… 윌럼의 애정을 받은 주드는 그런 면에서는 행복했던 사람 맞습니다! 커피를 끊다니….😭😭😭

그리고 은오야 ♥️

은오 2024-04-30 23:19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 덕질한 사람들이 이미 많았던 걸로 알고 있읍니다~!!

저도 잠자냥님 위해서라면 커피 끊을 수 있는데...?! 한가지만 빼면 완전 윌럼그자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쪽쪽♥️♥️

독서괭 2024-05-01 18:53   좋아요 3 | URL
헐 은오님 본인은 리뷰 안 쓰고 읽고 좋았던 책 잠자냥님께 선물해서 대신 리뷰 쓰게 하는 전략을... 역시 똑똑하다..

은오 2024-05-01 18:5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거 딱 지적하신 괭님이 더 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저번에 잠자냥님이랑 저나하다가... 잠자냥님이 읽은 책 내용 설명해주셨는데 그게 제가 직접 읽는 것보다 재밌어서 모든 책을 안읽고 잠자냥님 요약으로 듣고싶다고도 했읍니다...

독서괭 2024-05-01 19:00   좋아요 4 | URL
말로 요약설명도 잘한단 말이예요? 역시 잠자냥님 유튜브나.. 라디오나.. 팟캐스트라도 하나 하셔야..

은오 2024-05-01 20:08   좋아요 1 | URL
네!!!!ㅠㅠㅠ 그니까요 아 징짜 제 약혼자분 왤케 멋있어요??!?!?!?
회장님 어서 뭐라도 추진을....

독서괭 2024-05-01 20:10   좋아요 1 | URL
흠 추진 전에 미리 검증을 해야하니까 잠자냥님은 녹음파일을 보내십시오. 아니면 은오님이 잠자냥님과의 통화내용을 녹음하여 보내십시오.

은오 2024-05-01 20:17   좋아요 1 | URL
하... 잠자냥님 목소리 들으면 회장님도 반하실 거 같은데... 어떡하지?! ㅠㅠ

잠자냥 2024-05-02 06:55   좋아요 1 | URL
🤯

잠자냥 2024-05-02 08:48   좋아요 1 | URL
우리 통화 내용 들으면 간지러워서 죽을지도 모를 텐데….🤣🤣

은오 2024-05-02 16:24   좋아요 1 | URL
토하실듯....

잠자냥 2024-05-02 16:5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댓글만 봐도 토하고 있는 거 아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4-05-01 1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이 책은 읽는 동안 그리고 읽고 나서 완전 지치게 할 것 같은데요. ㅜㅜ

잠자냥 2024-05-01 17:22   좋아요 1 | URL
전 울다 지쳤다는 ㅋㅋㅋㅋㅋ 감정적으로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독서괭 2024-05-01 18: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유년시절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이야기는 읽기 괴로울 것 같아요 ㅜㅜ 얼마전에도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가 그렇지 않았나요? 잠자냥님 마음도 좀 쉬어야 할 듯!!

잠자냥 2024-05-01 20:00   좋아요 2 | URL
헐 독서괭은 역시 천재 ㅋㅋㅋㅋㅋ 비슷한 내용입니다!!! ㅋㅋㅋ ㅠㅠ 슬포

유재명 2024-05-14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 이 세상에 대한 편식의 또다른 표현이 되버린 시대에 사랑없이 어떻게 살아? 란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희귀해졌습니다. 사람도 동물이고 중도 사람. 중처럼 동물처럼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시대에 인간의 보편성이 비범함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는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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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종종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숙연해질 때가 있다. 가장 최근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레이첼 모랜의 <페이드 포>를 읽을 때였다. 성매매 여성이었던 모랜은 열다섯 살 때부터 7년 동안 겪은 지독한 성착취의 경험을 글로 남겼다. 고백 자체도 대단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놀랐던 점은 인간의 가장 밑바닥을 경험했음에도 사랑할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구매자들로부터 온갖 폭력을 경험했고 인간이라는 종(種) 자체에 환멸을 느낄법한데도 그녀는 사랑할 능력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성을 구매했던 남성이라는 존재에 극도의 혐오감을 느낄 만도 한데 그녀는 그렇지 않은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나는 그 점이 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다. 인간의 치유 능력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저런 경험을 하고도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음, 사랑이 바닥나지 않았음, 사랑이 다시 샘솟을 수 있다는 것- 인간이라는 존재는 때로 참 대단하구나, 저 사람은 정말 강하구나… 그런 생각들.

배리 로페즈의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를 읽으며 또 한 번 그런 생각을 한다. 인간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인간이라는 종은 환멸과 혐오의 감정을 안겨줄 때가 더 잦지만 인간의 이런 고통에 대한 반응과 치유 능력은 어느 땐 너무나 대단해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배리 로페즈를 잘 알지 못했다. 이 책의 소개 문구에서 ‘현대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라든가 또 다른 ‘월든’이라는 단어를 마주하고는 지레 짐작으로 아, 자연 예찬, 환경 예찬, 기후 위기를 맞은 지구 보호를 외치는 그런 글 모음집이려니 생각했다. 온전한 감상을 위해 이 책의 앞에 실린 리베카 솔닛의 서문도 읽지 않았다. 그래서 ‘하늘’ 챕터에 실린 로페즈의 첫 번째 에세이 ‘캘리포니아를 그리며’를 읽다가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속적인 성폭행”이라는 단어가 눈에 뜨였기 때문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을 묘사한 부분에서 부모의 이혼, 성인 남성으로부터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했다는 표현을 읽고는,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던, 성 학대에서 살아남은 아동의 기록이기도 하구나 싶어져서 아연해졌다.

로페즈의 이 엄청난 트라우마는 페이지가 흐를수록 점점 강도를 높이면서 그 베일이 벗겨진다. ‘하늘 한 조각’이라는 제목의 글은 이 먼 나라의, 생면부지의 독자가 읽기에도 참혹하다. 어린 로페즈는 일곱 살이 되던 해부터 마을의 명망 있는, 의사로부터 수년 간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했다. 그는 아픈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선한 이웃의 얼굴을 하고 로페즈의 집에 찾아온다. 도움을 주는 척하면서 아이의 엄마를 교묘히 따돌리고는 로페즈를 지속적으로 성폭행한다. 그 묘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참혹하다. 읽는 나도 이런데 그걸 기억하고, 일흔이 다 된 나이에 고백하는 작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어린 시절 아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눈물이 나올 것 같다. 폭행을 당한 뒤 인형처럼 내던져져 침대에 옆으로 누워 바라본 ‘하늘 한 조각’의 기억.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을뿐더러, 나만 참으면 엄마도 동생도 지킬 수 있으리라 믿었던 이 소년의 고통. 그 심정을 누가 헤아릴까. 나도 모르게 분노에 들끓어 이 오십 대의 대머리 악마를 총으로 쏴죽이고 싶어지는데, 로페즈는 담담히 말한다. 흔히 성학대 생존자들이 가장 바라는 응징의 방식이 돈과 정의일 것이라고, 대부분은 복수나 돈을 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자기의 말을, 증언을 믿어주고 공감해주는 것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그들은 “존엄의 감각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토대”(107쪽)를 원한다고. “자기 존중의 회복”이 돈이나 복수보다 더 중요하다고. 그러나 로페즈는 그 기회마저 영영 잃어버렸다. 최초로 털어놓은 새아버지도, 새아버지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엄마도 로페즈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더 참혹한 것은 로페즈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남동생마저도 훗날 알고 보니 그로부터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성추행을 당했던 것이다.....

이럴 경우 이 소년의 인생은 망가지기 쉽다. 인간을 믿을 수 있을까? 의지할 수 있을까? 심지어 어린 로페즈는, 성인이 되어서도 어머니의 반응을 이해하기 어려워 엄마는 알면서도 침묵했던 것이 아닐까 의심한다. 인간에 대한 혐오가 싹틀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실제로 이 마을에서 로페즈처럼 저 남자로부터 마찬가지로 성폭행을 당했던 다른 소년들은 모두 엉망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로페즈는 그렇지 않았다. 무엇이 그를 살게 한 것일까. 이 엄청난 트라우마와 그 고통, 절망, 분노, 우울 속에서도 무엇이 그를 세상을 미워하지 않고 인간을 혐오하지 않고 스스로 상처받을지언정 삶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든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 참혹한 순간에 바라본 “하늘 한 조각”의 기억 때문이다. 또한 ‘마치 총에 맞은 것처럼 일부러 날기를 포기하고 곤두박질치던’ 그러다가도 ‘지면까지 불과 몇십 센티미터를 남겨두고 그 하강에서 벗어나 다시 날개에 힘을 주고 너른 하늘로 솟구치던’(32쪽) 그의 비둘기들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자연이 주는 위로를 한껏 누릴 수 있던 곳에서 자란 이 소년은, 자신의 비둘기들, 새, 빛, 하늘, 강물의 흐름, 숲속에서 만나는 다양한 동물들과 함께 삶을 견딘다. 그것이 당장 트라우마를 치유할 정도로 강력하게 작동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견뎌나갈 힘을 주었으리라. 이런 고통스러운 성장 배경을 지녔기에 그가 극지나 오지 사막, 섬과 같은 문명이 동떨어진 곳으로 여행을 떠나며, 매번 저 멀리 세계의 끄트머리로 가 회복의 감각을 되찾으려고 했던 것은 당연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는 이런 장소들- 그러니까 오스트레일리아의 타나미사막이나 아프리카 남서부 해안의 나미브사막, 캐나다 북극권의 엘즈미어섬과 같은 곳에서 가장 고양되는 안도를 느끼고 타인을 향한 공감이 깊어짐을 느낀다. 그런 자연 속에서 그는 “끔찍한 경험, 성적 학대의 트라우마, 폭력적인 결혼과 이혼,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준 상처” 등등을 조금씩 치유해 나간다. 비록 수십 년이 걸릴지라도 그렇게 살아남고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애쓰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랑이 있다. 로페즈는 그 스스로 “권력을 쥐는 것보다 사랑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254쪽) 말한다. 이 사랑은 한 사람이 또 다른 타인을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넘어서서 멸종이나 인종 청소, 해수면 상승 시대에 그저 순응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지닌 대상을 향한 절절한 사랑이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절망 속에서 죽기보다 앞에 놓인 가능성을 위해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254쪽)는 로페즈의 증언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누구나 할 수 있을 법한 소리, 자연의 치유 능력을 믿어보라고 영혼 없이 말하는 하나마나한 소리가 아니다. 그 자신이 그토록 참혹한 고통 속에서도 사랑할 능력, 공감할 능력, 다른 생명체에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는 능력을 잃지 않고 그에게 주어진 것을 알고 사랑하고, 타인에게도 그 가치를 똑같이 추구하는 것을 스스로 행했기에 로페즈의 이 증언은 진실 그 자체로서의 힘을 지닌다.

사막, 평원, 숲을 걸으며 고통을 치유했던 그는 여행 자체가 날마다 “우리에게 이제껏 보지 못한 무언가를 소개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여행을 그다지 즐기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대도시 여행은 더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그럼에도 주기적으로 자전거 여행은 떠난다. 그건 아마도 사람들이 많지 않은 자연을 걸었던 로페즈의 그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내 두 발로 페달을 밟으면서 자연 속에서 빛과 바람을 맞으면서 달리는 일…. 로페즈의 글을 이 읽다 문득 몇 해 전 남한강을 자전거로 여행하던 때가 떠올랐다. 사람이 거의 없던 한적한 길을 따라 두 발로 페달을 열심히 밟고 있는데 내 앞에 누워서 타는 리컴번트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한 중년 남자가 보였다. 대개 자전거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그 힘든 여정을 알기 때문에 마주치면 목례로 가볍게 인사하거나 엄지를 치켜세워주면서 서로 북돋아주고는 한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두 발이 아닌 두 팔로 페달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로 페달을 밞으면 더 쉬울 텐데 굳이 두 팔로....? 머릿속에 한줄기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가는데, 계속 오르막길이다. 그는 가녀린 두 팔에 의지하여 오르막을 겨우 오른다. 이 튼튼한 허벅지로도 버거운데, 저 두 팔로? 정말 대단하다 싶은 순간 나는 무언가를 보고 말았다. 그는 두 다리가 없었다. 그가 입은 자전거용 반바지의 허벅지 아래로는 거의 비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팔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를 섣불리 추월할 수도 없어서 뒤에서 가고 있었는데 이윽고 정말 가파른 고개를 맞닥뜨리고 말았다. 자전거에서 내려서 끌고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도 자전거를 세웠다. 그즈음 나는 또 한 번 놀라운 광경을 맞닥뜨렸다. 그 고개를 넘기 바로 전, 빈터가 있었는데, 거기에 한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온 남자는 여자에게 무심히 말을 건넸고, 여자 또한 무심히 말을 건넨다. 부부였다. 여자도 다리가 불편한지 목발을 짚고 있었다. 빈 터에는 자동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순간 모든 정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고개만큼은 두 팔에 의지해서 넘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아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들에게 인사조차 못하고 자전거를 끌고 고개를 넘어가는데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라왔다. 고개를 넘느라 숨이 찬 데다가 울음을 참으려니까 자꾸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가녀린 두 팔에 의지해 국토종주를 하는 사람과 힘겨워 보이는 코스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한 사람. 애써 참았던 눈물이 어느 순간 터졌다. 묵묵히 페달을 밟았고 어느덧 석양이 깔리기 시작했다. 자연만큼이나 경이로운 인간의 의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을 생각할 수밖에 없던 길이었다. 로페즈는 길에서, 숲에서, 사막에서, 동물들로부터 “타인의 악몽에 공감할 수 있는, 보다 큰 포용력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자신을 옥죄던 해결되지 않은 공포와 분노를 연민으로 바꾼다. “모든 인간이 인생의 어느 시점에 어느 수준으로든 역경을 맞닥뜨린다는 걸 이해”하는 사람이 된다. “이 불타는 세계에서 두려움 없이 부둥켜안을 수 있는 힘, 어색하지 않고 열렬하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일”의 위대한 가능성을 깨닫는다. 그리고 길에서의 그 모든 발견, “이것은 사랑을 길러나가는 법에 관한 이야기”(341쪽)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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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3-25 15: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휴 리뷰 읽다가 눈물 나네요 ㅠㅠ
이 책 읽기 겁나네요. 대성통곡할 것 같아요 ㅠㅠ

잠자냥 2024-03-25 15:39   좋아요 0 | URL
눈물 뚝~!! 니가 만든 탄빵을 생각해보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4-03-25 15:56   좋아요 0 | URL
˝햐늘 한 조각˝은 각오하시고 읽으셔야 할 듯;;

페넬로페 2024-03-25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는 탓인지 마음이 더 무겁고 먹먹해져요.
세상에 나쁜 놈들이 왜 이리 많고 불평등 한건지 모르겠네요 ㅠㅠ
근데 국토 종주 좋은데, 그것을 위해 자기 옆의 사람이 힘들어지는 건 아니겠죠!

잠자냥 2024-03-25 15:54   좋아요 2 | URL
휴... 저 악마놈이 제대로 벌받지 않은 거 같아서 더 답답하긴 해요....ㅠㅠ 젠장....
그나저나 ㅋㅋㅋㅋㅋ 저도 그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닌데, 분위기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뭐랄까 진짜 인생의 동반자 같은 느낌!
국토종주하다 보면 가끔 아주 어렵거나 힘든 코스에서 가족 중 누구 한 사람이 차 갖고 나와서 기다리는 일이 있더라고요. 하필이면 저날 아침에는 한 여성이 아이를 남편한테 맡기고 혼자 자전거 타고 국토종주 시작하는 장면을 봐서 부부(또는 파트너)에 대해 좀 더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

망고 2024-03-25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달엔 이 책도 사야겠네요ㅋㅋㅋㅋ

coolcat329 2024-03-25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 잠자냥님 리뷰 감동 그 자체입니다. 운동 중이었는데 눈물이 나오려고 해요. ㅠㅠ

잠자냥 2024-03-26 09:41   좋아요 1 | URL
땀인 거 아니죠? ㅋㅋㅋㅋㅋㅋ

희선 2024-03-26 0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해자가 여러 사람이었다니, 거기 사람들은 다 몰랐을지... 동생까지... 범죄소설을 보면 어릴 때 학대 받은 사람이 범죄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그런 사람만 있는 건 아니겠지요 사람뿐 아니라 자연, 모든 걸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다니... 자신을 사랑하려고 많이 애썼을 것 같습니다


희선

잠자냥 2024-03-26 09:45   좋아요 0 | URL
읽으면서도 조마조마했어요. 남동생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에 왠지 남동생도 무사하지 않을 거 같았는데...... ㅠㅠ 역시나;; (마을 사람들은 그 범죄자가 평소에 좋은 일을 했다는 것으로 그 엄청난 범죄하고 그 사람의 인간 됨됨이는 별개로 치던데.... 이걸 작가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워하더라고요. 저도 그렇고요.)
아무튼 이 작가를 보면 사람이 참 저렇게 강할 수도 있구나 싶어지더라고요.... 내면은 거의 일평생 그 일에 시달린 거 같은데 그래도 참 잘 버티면서 살았구나.... 그렇습니다.

은오 2024-03-26 2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은바오도 어려운 코스에서 잠자냥님을 기다리고 있겠읍니다~!!
잠자냥님이랑 이런 사랑을 해야지....

잠자냥 2024-03-26 20:31   좋아요 1 | URL
왜 같이 국토종주한다더니 기다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생각만 해도 근육 딸리지?🤣🤣🤣

은오 2024-03-26 20:35   좋아요 1 | URL
근육딸려서 그러는건 절대아닙니다
저는 단지 잠자냥님이 힘들까봐...
진짜~!!

잠자냥 2024-03-26 20:43   좋아요 1 | URL
그럼 이화령고개에서 기다려. 가장 난코스임 ㅋㅋㅋㅋㅋㅋㅋㅋ

호시우행 2024-03-26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폭행범에게 가장 적절한 처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전자발찌.에휴ㅠㅠ 채워야 할 곳은 따로 있는데...

잠자냥 2024-03-26 20:57   좋아요 1 | URL
ㅎㅎ 전자발찌는 소용 없는 거 같고요… 아동 성범죄자는 징역 789년 이렇게요. (외국은 실제로 이렇게 집행하죠)

은하수 2024-03-26 2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 리뷰 읽으면서 저도 정말 너무너무 공감했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해주셔서 너무 시원하네요.
전 그 ‘하늘 한 조각‘의 여운과 반향이 너무 컸나봐요. 진도를 못나가겠어요!
저리 아름다운 단어 몇 개인데 어떻게 그런 무섭고 끔찍한 폭력을 품고 있는 건지...
가슴이 너무 아프고 쓰리더라구요. 동생의 일도 아프고 엄마와 새아버지도 용서가 안되네요.ㅠ.ㅠ
너덜너덜한 삶을 치유하고 이런 글이 나온 것도 넘 멋집니다!

잠자냥 2024-03-27 09:48   좋아요 1 | URL
은하수 님이 하고 싶은 말 제가 다했다고 리뷰 안 쓰시는 거 아니죠?
‘하늘 한 조각‘ 그거 정말.. 읽고 나면 진도 나가기 좀 어렵죠... ㅠㅠ
엄마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ㅠㅠㅠㅠㅠㅠ
(제가 엄마라면 애를 그렇게 그 남자랑 단 둘이 혼자 내보내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공허하지 않은 아름다운 문장이 많았던 책으로 기억될 거 같아요.

그레이스 2024-03-26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잠자냥 2024-03-27 09:46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 님도 이 책 깊이 있게 잘 읽으실 것 같습니다.

자목련 2024-03-29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번 느끼지만 잠자냥 님은 제가 발견하지 못하는 부분을 일깨워줍니다.
좋은 리뷰를 읽을 수 있어 감사하고요. 마냥 쉽게 읽을 수 없는 책이었지만 참 좋았던 책이었어요.

잠자냥 2024-03-30 09:19   좋아요 0 | URL
마음이 버거워지는 지점이 있었는데 자목련 님도 잘 읽으신 거 같아 다행입니다! 리뷰도 써주셨고요~!!

오우아 2024-03-31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시대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라는 찬사라는 말이 정직했습니다. 우리 모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 비인간은 같은 운명이라는 것을 배웠으며 또한 공감했습니다.

독서괭 2024-04-03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우 이 리뷰 이제야 읽었는데,,, 눈물 나네요 ㅜㅜ 제목이랑 부제만 봤으면 별로 관심 안 뒀을 책일 것 같아요. 잠자냥님은 정보 전혀 없이 읽으셨다니 타격이 크셨을 듯...
어떤 사람은 이렇게나 힘을 내어 견디고 멋지게 살아내는데.. 어떤 사람은 영영 극복을 못하고.. 참 인간이란 신기한 것 같아요.

잠자냥 2024-04-04 10:42   좋아요 0 | URL
어우 이 리뷰를 이제야 읽다니 눈물 나네요 ㅜㅜ
회장님 미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