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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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친구 중 유독 기억에 남는 아이가 있다. 그 애는 눈이 아주 크고, 남달리 착했다. 순박하고 착한 아이. 성정 때문에 그 친구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실은 다른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그 친구 집에는 볕이 잘 드는 다락방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세상에서 그 다락방만큼 좋은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에는 왜 다락이 없을까,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어른들은 오지 않는 다락방이 갖고 싶다. 이곳이 내 방이면 좋겠다. 여기서 실컷 책 읽다가 자고 또 일어나서 책 읽고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그 애가 없길 바라기도 했는데 친구는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나 혼자 책을 들고 다락에 올라가면 자기는 그런 나를 내버려 둔 채 다른 곳에서 놀고는 했다. 나는 그 애보다 다락방을 더 좋아했다. 유년의 친구는 대개 그렇듯이 특별한 이유 없이 멀어진다. 그러고는 기억에서 잊힌다. 그래서 유년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 그 다락방과 그 애가 좋은 추억으로 남은 까닭은 자연스레 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한때를 함께 보낸 사람이나 공간은 그 시절 그대로 사라져야 퇴색하지 않는다. 기억이 빛바래지지 않기 때문에….

<67번째 천산갑>의 두 주인공, 그와 그녀도 그런 아름다운 유년을 함께 보냈다. 이 둘에게도 나의 다락방 같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침대 매트리스이다. 그- 그러니까 소년은 자신의 아들을 광고 모델로 세워보고자 했던 엄마의 손을 잡고 매트리스 CF 현장에 서게 된다. 잠자는 연기를 하라는 감독의 주문을 받고 그냥 편하게 잠이 들어버리는 소년. 그런 소년의 곁에는 여자 아이가 있어야 어울릴 것이라는 판단 아래 감독은 어린 소녀도 등장시킨다. 소녀 또한 엄마에게 이끌려 이 현장을 찾았다. 잠자는 연기를 하라는데 소녀는 소년 옆에 눕자마자 완전히 잠이 들어버린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녀의 “잠자리 친구”인 셈이다. 그들은 처음 만나자마자 같이 잤고, 그 잠은 처음 만날 날부터 아주 달콤했다. 두 아이가 깊이 숙면을 취하는 이 광고는 타이완에서 크게 히트를 친다. 소년과 소녀, 두 아역 배우들이 유명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와 그녀, 아역 배우로 그토록 유명했던 두 사람은 이제 중년을 넘어섰다. 배우로 줄곧 활동했다면 부와 명성, 어느 것 하나 남부럽지 않을 것 같은데 현실은 어째 영 이상하다. 그는 프랑스의 몹시 비좁은 아파트에서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한물간 배우 취급을 받으며 어느 정치인의 트로피 아내로서 딱히 행복하지는 않은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들이 한 영화제에 초청을 받는다. 두 사람이 어린 시절 천산갑과 함께 찍었던 신비로운 영화가 4K로 복원되어 낭트에서 회고전이 열리게 된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파리에서 재회하는 그와 그녀. 현재의 삶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두 사람이 중년의 나이에 다시 만난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그녀는 오랜만에 그 곁에서 유년의 그때처럼 달콤하기 이를 데 없는 잠을 잔다. 푹 잔다.

평소의 그녀는 왜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가, 배우로서 성공하고도 남을만한 그는 왜 타이완이 아닌. 이 낯선 파리에서 실어증에 걸린 듯, 모든 걸 잃어버린 듯, 꿈도 희망도 없는 사람처럼 그저 슬픔에 젖은 채 이 사람 저 사람과 몸을 섞으며 살아가는 것일까. <67번째 천산갑>은 이 두 남녀의 삶의 궤적을 천천히 좇는다. 그들의 삶의 이력을 지켜보노라면 인간으로 태어나 유년의 달콤한 잠, 어른들이 지켜보는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빠져들던 그 달콤하고도 순수한 잠의 세계를 내내 지켜가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가 왜 천산갑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그 예민하고 수줍음 많은 천산갑이 하필이면 왜 그를 알아봤던 것인지도 어렴풋이 헤아리게 된다.

이 작품에 따르면 천산갑은 양식이 무척 까다롭고 부끄럼을 많이 타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놀라서 전신을 둥글게 만 채 단번에 죽어 버리기 십상이라고 한다. 부끄럼을 많이 타고, 위협을 느끼면 몸을 고스란히 말아버린다는 것, 그리고 단번에 죽어버린다는 성질이 꼭 ‘그’를 닮았다. 그는 반격이라는 걸 도무지 할 줄 모른다. 매번 사람들에게 포위될 때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몸을 움츠리는 것뿐이다. 언제나 자신의 말과 눈물을 조용한 소리로 눌러두고 고통을 참는 데 뛰어나다. 그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녀’의 아들, 그녀의 죽은 딸 ‘팡싼’도 이런 천산갑과 닮았다. 반격할 줄 모르고, 그저 몸을 움츠릴 줄만 아는 사람들….

‘그녀’ 또한 그러하긴 마찬가지이다. 유년 시절부터 아역 배우로 너무나 유명해진 소녀. 그렇지만 그 어린 나이에 남자와 한 침대에서 잤다고 음란하다고 손가락질받는 그녀. 대중으로부터 비난, 동경, 열망을 동시에 받으며 그럴 때마다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하는 그녀. 그저 침묵하고 몸을 움츠릴 뿐이다. 그녀는 엄마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엄마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다. ‘그 광고를 찍고 싶지 않았고, 계속 배역을 따내고 싶지 않았고, 얼굴에 레이저를 쬐고 싶지 않았고, 미백주사를 맞고 싶지 않았고, 변태 제작자와 함께 밥을 먹고 싶지 않았고, 하이힐을 신고 싶지 않았고, 다이어트를 위해 사흘 동안 굶고 싶지 않았지만 한 번도 이런 생각들을 입 밖에 내지’(p.208) 못한다.

천산갑과 닮은 존재들이기에, 천산갑이 신기하게도 마음을 열었던 존재인 ‘그’에게 그들 모두가 마음을 열었던 것은 아닐까. 67번째 천산갑인 그와 그녀, 또는 그와 그녀를 닮은 ‘아들’과 ‘팡싼’-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이 천산갑과 같은 존재를 그저 기묘하다고, 신기하다고 때로는 흉측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남편은 매트리스 광고 포스터를 보고도 “당신을 만났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아내로 맞아 집으로 데려와 한침대에서 자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고 “사춘기 때 항상 당신 포스터를 보면서 권총을 쏘았”(p.203)노라 말할 수 있을 뿐이리라. 그렇게 말하는 많은 남자들-장이판, 쑤다런, 루홍밍, 장하이타오는 그녀에게 모두 같은 사람들일 뿐이다. 배우인 그녀의 얼굴과 몸을 탐할 뿐인 그들. 그러니 누굴 골라 어떤 삶을 살든 큰 차이가 있었을까. 그렇게 불면의 밤이, 불면의 나날이 깊어간다.

그에게는 아버지가 그런 존재이다. 어머니도 그랬으리라. 아들이 보리-그러니까 게이임을 알게 된 후로 극도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아버지- 시골 마을에서는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은 더 수치일 것이다. 그렇게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다시피 한 그가 파리에서 언어를 잃은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그런 그를 온전히 안아준 존재, J가 사라진 이후의 삶은 더 그럴 것이다. 천산갑을 닮은 이들- 그, 그녀, 그녀의 아들, 팡싼 등 이 작품에서는 그들의 삶이 결코 행복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대할 때는 몸을 동그랗게 말지 않는다. 함께 깊고 달콤한 잠을 잘 수 있다. 그런 그들이 비록 그토록 원하던 곳-낭트에 이르지 못한다한들, 낭트라는 꿈을, 천산갑이라는 존재를 품고 살 수 있다면, 서로가 그런 존재임을 알아봐 줄 수 있다면, 그래도 이 스산한 삶을 견딜 수는 있지 않을까. 스크린에 있는 천산갑이 아니라 진짜 살아 있는 천산갑은 아마 그런 그들의 마음속에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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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10-30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글에 다락방이 몇번 나오는거야.. ㅋㅋㅋ 다락방님 좋아하실 듯ㅎㅎ
안타까운 두 사람이네요. 착하고 착한 사람들... 몸을 말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이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잠자냥 2024-10-30 11:17   좋아요 1 | URL
내가 쓰면서도 흠칫흠칫 ㅋㅋㅋㅋㅋㅋㅋㅋ
몸 대신 소맥을 말아야 합니다~ㅋㅋㅋ

다락방 2024-10-30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잠자냥의 중년 친구 다락방 입니다. ㅋㅋㅋㅋㅋㅋ

저는 이 리뷰 읽다보니 나탈리 포트먼 생각나네요. 레옹 촬영당시 열세살 미성년자였는데 남자들이 그렇게나 성적 대상화 시키는 편지를 보내고 그랬다고요. 이상아도 생각납니다. 미성년자 시절 옷을 벗는 촬영을 하라고 임권택 감독이 시켜서 그거 안하겠다고 했더니 너 위약금 낼거냐고 해서 너무 싫은데 찍어야 했다고... 아 너무 똥같은 세상입니다. 대체 왜 미성년자를 굳이 벗겨야 하며 왜 미성년자의 벗은 모습을 생각해야 하고.. 아 빡쳐..

이 책도 담아갑니다. 에휴..

잠자냥 2024-10-30 14:11   좋아요 0 | URL
잠자냥의 미중년 친구 다락방님! ㅋㅋㅋㅋ

그러게요, 이 책 읽다 보니 정말.. 타이완도 참 보수적인 사회구나 싶어지는 부분이 많았어요. 어린 여자 아이가 매트리스 광고 찍었다고 남자하고 잤다고 손가락질을 하다니요!!! 나원참. 그러면서 성적 대상화 성적 소비는 다함. 아휴......

자목련 2024-10-30 1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잘 정리된 훌륭한 리뷰 👍

잠자냥 2024-10-30 14:11   좋아요 1 | URL
자목련 님 리뷰도 잘 읽었습니다~!!
 
연기 대산세계문학총서 189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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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바로 이게 내게 닥친 불행입니다” 사랑이 불행일 수도 있음을 아는 이들에게 투르게네프의 이 문장은 치명적이다. 사랑과 연애 또는 결혼…. 인간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항목처럼 따라다니는 조항이지만 이것으로 인해 행복이 솟구치기는커녕 불행과 절망의 나락으로 끝없이 추락하기도 한다. 물론 행복이 치솟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이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 또는 자신의 사랑이 응답받는 순간 등등. 그렇지만 서로 다른 두 존재의 마음이 늘 같은 크기이거나 같은 깊이일 수는 없으므로 그 마음의 크기가 어긋나는 순간부터 고통과 불행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 마음들이 더는 같은 곳을 바라보거나 꼭 같지는 않더라도 도무지 균형이 맞지 않을 정도로 달라져 버리면 함께 하던 두 존재는 저마다의 길을 가게 된다. 한때 찬란히 빛나던 사랑은 이제 지옥을 헤맬 것이다. 적어도 한동안은.

여기 러시아에도 그런 청년이 있다. ‘그리고리 리트비노프’라는 이름을 가진 사나이. 러시아의 귀족들이 하릴없이 여유로움 또는 잉여로움을 자랑하기 위해 모여든 휴양지 바덴, 리트비노프는 이곳에서 약혼녀 타냐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러나 어쩐지 이곳 사교계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겉돌기만 하는 리트비노프. 그럼에도 그는 귀족과 지식인들이 모여 러시아의 미래에 대해 뜨겁게 토론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는 한다. 왜냐하면 그도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러시아의 새 질서에 적응하며 타냐와 결혼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그 앞에 이 바덴에서 갑자기 “길가의 가벼운 먼지를 흩어버리듯” “그 모든 목적과 계획을 날려버린 사건”(p.71)이 일어나고 만다. 인생, 참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바덴의 사교계에서 얼핏 본 한 여자. 그 여자의 뒷모습이 너무나 그 누군가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설마…. 그러나 설마는 빗나가지 않는다. 그 여자는 바로 한때 리트비노프를 열망에 들떠, 환희에 젖어, 사랑에 빠져 도무지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었던, 행복의 절정에 이르게 해주었던 여자, 리트비노프의 첫사랑 ‘이리나’였기 때문이다. 그가 대학생 시절 너무나 사랑했던 이름 ‘이리나’- 그는 그 여자를 사랑했다. 진심으로 사랑했다. “한 생애에서 되풀이될 수 없고, 또 되풀이되어서도 안 되는 수난”과 같은 첫사랑이었다. 그런데 왜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이곳 바덴에서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고, 리트비노프는 다른 여자, 그러니까 타냐라는 이름의 다른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이리나도 리트비노프를 사랑했다. 처음에는 도무지 사랑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리트비노프를 차갑게 대하던 그 여자, 이리나- 타고난 밀당의 재주꾼인 그녀는 거의 두 달 가까이 리트비노프를 쥐락펴락 괴롭히더니 어느 날 마음을 열어 그를 받아들인다. 둘 사이에는 불길이 확 타오르듯, 뇌우가 몰려오듯 사랑이 덮친다. 달콤한 연인이 된 두 사람은 곧 결혼을 약속한다. 이리나는 섬세하면서도 연약한 리트비노프를 쥐락펴락. 자신을 향한 사랑의 노예로 만든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결혼하여 쑥쑥 애도 여럿 낳고 살아가는 게 행복(?)한 결말일 텐데, 어쩌다가 바덴에서 서로 다른 사람을 곁에 둔 채 재회하게 되었을까.

배신- 두 마음이 같은 곳을 바라보다 한 마음이 떨어져 나가는 일이 그들 사이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배신당한 처지였던 리트비노프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이리나를 미워했다. 증오했다. 이제 겨우 그 상처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새로운 삶을 꿈꾸고 있는데 다시 그녀, 자신을 절망으로 추락시켰던 그 여자가 나타나다니, 이를 어쩌면 좋으랴. 정상적인 사고의 회로를 따른다면 리트비노프는 그녀를 외면해야 했다. 이리나도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리트비노프를 외면했어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 사랑이 하는 일일까? 운명의 장난일까? 이리나가 리트비노프에게 손짓을 한다. 예전처럼 그를 다시 쥐락펴락해보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그 오래전 배신에 대해 사과라도 하고 싶은 것일까.

이리나의 이름은 리트비노프에게는 불가항력이다. 그는 이 운명에 저항하고자 했으나 도무지 저항할 수가 없다. 다시 그녀를 만나고는 예전처럼 강렬한, 예전보다 더 강력한 사랑을 느낀다. 헤어졌다 다시 만난 사람이니 어찌 그 사랑이 운명처럼 느껴지지 않으랴. 그렇지만 예전과 다른 점들이 있다. 리트비노프는 전처럼 자유롭게 그녀를 사랑할 수가 없다. 그를 만나러 저 멀리서 약혼녀가 오고 있는 중이다. 이리나 또한 다른 남자의 아내가 아닌가. 어쩌면 이 장벽들이 그들의 사랑을 더 불타오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심성이 선량하고 연약한 리트비노프는 괴롭기 짝이 없다. 사랑스러운 타냐, 아무것도 모른 채 기쁜 마음으로 약혼자에게 달려오고 있을 타냐를 어이할까!

행복이 아닌 고통과 괴로움이 솟구친다. 그는 자신이 못마땅하다. 룰렛 게임에서 돈을 잃거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기분이다. 자신을 달래보기도 한다. 너는 타냐의 약혼자이다, 너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진중한 어른으로서 호기심의 부추김이나 추억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내면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그를 다그친다. 이리나는 예전처럼 교태를 부리는 것일 뿐이야. 일시적인 기분이고 변덕일 뿐이야…. 결혼한 삶이 따분하고 모든 것에 싫증이 나서 날 낚아챈 거야, 미식가가 갑자기 흑빵이 먹고 싶은 거지. 아무리 자신을 달래고 다그쳐보아도 그는 그녀를 향해 달려가기를 멈추지 못한다. 도무지 그녀를 경멸하고 미워할 수가 없다. 한때 자신을 그토록 절망의 구덩이로 몰아넣었던 그 나쁜 여자를. 리트비노프는 머릿속에서 이리나의 형상을 쫓아내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이제 그는 타냐의 모습을 떠올릴 수조차 없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그를 설득하는 이도 있다. 그 여자는 악마처럼 교만하다고, 누군가가 보기에는 진실할 수도 있지만 사교계 부인들은 아무리 훌륭하다 칭송받아도 뼛속까지 썩었다고. 물론 이리나에게도 좋은 자질, 이를테면 무척 선하고 선심을 잘 쓰는 구석이 있기는 하다고, 그렇지만 그녀가 베푸는 선심이란 “자기에게 필요 없는 것을 남들에게 줘버리는”(p.145) 수준일 뿐이라고. 그렇지만 당신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자는 강하며 우연은 전능”하기 때문에 “단조로운 삶에 만족하기는 어렵고, 자신을 완전히 잊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에 아름다움과 공감이 있고 따스함과 빛”이 있으니 어떻게 저항할 수 있겠느냐고 . 그렇지만 그 빛을 향해 달려가 보았자 “그다음에 냉담, 어둠, 공허가 찾아”올 것이라고. “결국엔 모든 것과 멀어지게 되고,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처음엔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테고, 나중엔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p.146) 것이라고.

리트비노프는 그렇게 이리나에게 저항하지 못한다. 위로도 희망도 없는 환희가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찢어놓는다. 불면의 밤이 깊어간다. 그는 중얼거린다. “비록 나중에 죽는다 할지라도” ‘필시 사랑을 두 번 할 수는 없다’ 그는 생각한다. ‘다른 삶이 네 안에 들어왔고, 네가 그것을 들여보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이 독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이 끈을 끊을 수 없다.'(p.177)고 생각한다. 스스로 독이라고 칭하는 사랑, 그 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랑. 그도 알고 있었으리라. 타냐에게로 가는 삶과 이리나에게로 가는 삶이 얼마나 다를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다. 옳고 잘 정리된 미래를 스스로 놓아버린 패배자이다. 그는 심연 속으로 자신이 무턱대고 뛰어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절규한다. 자기 자신도, 타냐도 잃어버렸노라 절규한다. 모든 것이 망가졌노라고, 자신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노라고, 거기로 당신을 끌고 가고 싶지 않다고, 나를 구해달라고 타냐에게 울부짖기도 한다. 이전의 모든 것, 소중했던 모든 것, 지금껏 그가 의지하고 살아왔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노라, 모든 것이 파괴되고 모든 것이 끊어졌노라 절망한다. “무섭고 저항할 수 없는 다른 감정이 급류처럼” 자신을  덮쳤노라(p.215) 울먹이는 리트비노프.

그는 이 이 이해할 수 없는 어스름 속에서 그만 헤매고 싶다. 그처럼 순진하거나 적극적인 사람은 열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투르게네프는 말한다. “열정은 그들의 삶의 의미를 파괴하기 때문”이라고(p.217) 그렇지만 리트비노프가 다시 찾은 사랑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이리나가 그 앞에 다시 나타난 이유도, 그렇게 운명이 그를 이끈 이유도 무언가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불가항력적으로 또 한 번 첫사랑 여인과 사랑에 빠진 리트비노프의 삶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투르게네프는 말한다. 모든 선택에는 어떤 의미로든 불행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만 본질적으로 모든 것이 똑같다. 모든 것이 급히 어딘가로 서둘러 가고 있지만, 모든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풍향이 바뀌면 모든 것은 반대쪽으로 몰려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똑같이 지칠 줄 모르는, 요란하고 불필요한 유희가 다시 시작된다.”(p.259) 사랑도 어쩌면 이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 덧없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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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0-10 12: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란하고 불필요한 유희.. 그래서 그토록이나 감정적 육체적 소모가 큰것이 사랑인가 봅니다. 아니, 연애인가 봅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항해야 하지만 저항하지 못하는 사랑이란 것에 대해서.....(먼 산)

그럼 이만.

잠자냥 2024-10-10 12:5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해탈한다락방 ㅋㅋㅋㅋㅋ

망고 2024-10-10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어졌다 다시 만나면 또 헤어지던데...ㅋㅋㅋ

잠자냥 2024-10-10 13:52   좋아요 1 | URL
정답!!🤣🤣🤣

다락방 2024-10-10 15:33   좋아요 1 | URL
정답!! (유경험자입니다)

잠자냥 2024-10-10 15:38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자니...?˝에 넘어갔던 다락방 ㅋㅋㅋㅋㅋㅋㅋㅋ

망고 2024-10-10 16:05   좋아요 0 | URL
자니? 에 넘어 갔다가 결국 해탈의 길로...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4-10-10 16:17   좋아요 1 | URL
아프진 않니 많이 걱정돼 행복하겠지만 너를 위해 기도할게 기억해 다른 사람 만나도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 는걸…..

건수하 2024-10-10 16:28   좋아요 2 | URL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서 결혼한 사람도 있는데… 언젠가 헤어지긴 할 거예요 ㅎㅎ

잠자냥 2024-10-10 17:21   좋아요 0 | URL
건조한 팩트😹

독서괭 2024-10-10 17:4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님 댓글 너무 웃겨요.
전 헤어진 사람에겐 미련이 안 남던데.. 흠.. 결과가 안 좋을 게 뻔히 보이는데도 뛰어들게 되는 그 심경은 무엇일까요?

건수하 2024-10-10 18:02   좋아요 1 | URL
글쎄요… 왜 그랬지? 저는 만난 지 얼마 안돼서 헤어졌던지라 서로 잘 몰라서.. 깊이 생각 안하고 다시 만났던거 같아요. 근데 결혼하고 2-3년은 언제 다시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 많이 했었어요.

독서괭 2024-10-10 18:11   좋아요 1 | URL
엉?? 수하님 경험담이었나요! 전 다른사람 얘기하신 줄 알고 ㅜㅜ 그리고 심경 질문은 소설 관련이었어요. 헤어진 뒤 다시 만나는 거 자체야 종종 있죠~ 헤어짐의 이유가 중요한 듯요.

건수하 2024-10-10 18:30   좋아요 1 | URL
대략 봤는데.. 저 비밀댓글은 망고님께 보일겁니다 ^^;;

독서괭 2024-10-10 18:44   좋아요 1 | URL
아 수하님께는 다 안 보이는군요? 어흥 ㅠㅠ

건수하 2024-10-10 19:10   좋아요 2 | URL
어 어쨌든 저는 전혀 기분 안 상했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제가 술술 얘기한 것 뿐 ㅎㅎㅎ

독서괭 2024-10-10 19:23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4-10-11 07:0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나도 다 보여!

페넬로페 2024-10-10 2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한 게 자신에게 닥친 불행~~
사랑이 죄인가요, 가 생각납니다.
근데 투르게네프보다 글 잘 쓰시는 것 같습니다.
아주 절절합니다^^

잠자냥 2024-10-11 07:11   좋아요 2 | URL
투 선생보다 잘 쓴다니요! ㅋㅋㅋㅋ 넘 과찬입니다!! 한강 언니가 짱이죠. (엥?) ㅋㅋㅋㅋㅋ
 
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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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망설이고 있다. 이제 곧 긴 연휴가 시작되고 바로 지금 당신 옆자리의 동료는 퇴근 후 고향 집으로 갈 생각에 들떠 있다.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아직도 망설이는 중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할 수 있다면 피할 수만 있다면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크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사는데도 왜 이토록 집에 가는 것이 싫은가 당신은 곰곰 생각해 본다. 지난봄, 가족에게 들은 몇몇 말들이 큰 상처였음을, 그것이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음을 당신은 안다. 그러나 당신은 또 알고 있다. 귀찮아서 가고 싶지 않은 척하지만, 결국에는 갈 것이며 그리고 거기, 가족이 둘러앉은 자리에서 일상이 평화로운 듯, 아무 일도 없는 듯 웃고 떠들다 집으로 돌아올 것임을, 그러고 나서 당신은 깊은 공허함에 또 한 번 외로워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듬해 설 연휴가 시작될 무렵에는 또 똑같은 망설임 속에 괴로워하리라는 것도.

그럴 즈음 당신은 키건의 소설을 읽는다. ‘작별 선물, 푸른 들판을 걷다, 검은 말, 물가 가까이…‘ 7개의 짧은, 그러나 묵직한 이야기들. 읽을수록 당신은 당신의 가족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당신은 생각한다. 쿤데라의 어떤 말을.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친구”(밀란 쿤데라, 《농담》, p.227)라는 그의 이 통렬한 문장을 또 한 번 떠올린다. 키건이 그려내는 인물들 그러니까 《푸른 들판을 걷다》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외롭다. 아무리 나쁜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외롭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그 세계에서는 사람만이 아니라 개조차도 염소조차도 바람조차도 모두가 외롭기 짝이 없다.

사랑하지 않아서 외롭고, 사랑하는데도 외롭다. 사랑 때문에 외롭고 사랑이 존재하지 않아서 외롭다. 곁에 누군가가 있어서 외롭고, 없어도 떠난 사람 때문에 외롭다. 고통스럽다. 그 외로움은 가장 가까운 존재, 부모나 연인처럼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랑했다고 믿는 존재들이 안겨준다. 그러니 그들의 외로움은 아무리 푸른 들판을 걷고 또 걸어도(<푸른 들판을 걷다>),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배를 타고 아예 다른 곳으로 떠난다면 모를까(<퀴큰 나무 숲의 밤>)- 그러나 그렇게 완벽하게 다른 장소로 떠난다 할지라도 사람이 사람에게 준 상처,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쉽사리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작별 선물>). 그렇지만 그냥 주저앉아 떠나지 않는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 삶은 어떻게 될까. 더 심하게 뒤틀리고 망가지리라.

여기, 사랑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아니 사랑이라는 달콤한 말을 속삭이지 않았어도, 함께 살을 부비고 살아갈 남자이므로,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남자와 결혼해 그의 자식을 아홉이나 낳아준 여인이 있다. 여자는 신혼 초부터 바다가 보고 싶다고 남자에게 수없이 말한다. 여자는 대서양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바다를 보고 나면 마음을 추스를 수 있을 것 같다고 남자에게 조르고 또 조른다. 그러나 남자는 그 말을 듣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 척 외면한다. 그러다 여자가 첫 아이를 갖고 만삭이 되었을 때에야 퉁명스럽게 그녀를 차에 태우고 바다로 데려간다. 한 시간. 여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한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차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남자는 혼자 떠나버릴 것이라고 윽박지른다. 여자는 태어나 처음 보는 바다를 허겁지겁 산책하고 돌아온다. 주어진 시간에서 5분이 지났고 남자는 이미 화가 날 대로 나서 차에 시동을 켜고 출발한다. 여자는 도로로 달려들다시피 해서 차를 세우고 그 차에 올라타 집으로 돌아온다.  

당신이라면, 이 차를 세우고 올라탈 것인가? 아니면 그 차로부터 남자로부터 뒤돌아설 것인가? 여자는 차를 탔다. 집으로 돌아가서는 첫 아이를 낳고 그 이후 여덟을 더 낳는다. 자기를 바닷가에 버리고 가려던 남자의 아이를….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노라고, 누구나 다 그랬다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줄 알았”(<물가 가까이>, 《푸른 들판을 걷다》, p.156)노라고 여자는 딸의 아들- 그러니까 손자에게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말도 덧붙인다. 인생을 다시 산다면 절대 그 차에 올라타지 않겠다고, 집으로 돌아가느니 거기 남아서 거리의 여자가 되겠다고.

여자의 손자는 지금 바닷가에서 아무런 시간의 제약 없이 마음껏 헤엄을 칠 수 있다. 심지어 그의 새 아버지는 이 바닷가에 세워진 리조트의 소유주이다. 시간 제약은커녕 이 바닷가가, 리조트가 어쩌면 그의 소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할머니와는 또 다른 이유로 이 바다를 도무지 만끽할 수가 없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엄마도, 새아버지도, 그들이 베풀어주는 이 풍족함도 낯설고 자기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이 삶 자체가 그러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할머니가 차마 발을 담그지는 못했던 바다에 헤엄을 칠 요량으로 몸을 던져보기도 하지만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서 완벽하게 자기 몸을 던지지는 못한다.



그는 어머니의 어머니를, 그렇게 먼 길을 가서 시간이 한 시간밖에 없는데도 바다에 들어가지 않았던 할머니를 생각한다. 강에서는 수영을 그렇게 잘했는데 말이다. 그가 왜 그랬냐고 묻자 할머니는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서 그랬다고 말했다. (<물가 가까이>, 《푸른 들판을 걷다》, p.160)



무엇하나 남부러울 것 없는 이 청년이, 왜 저토록 부유하는 것일까. 그는 가족 안에서 한없이 외롭다. 부자와 재혼해 하나뿐인 아들에게 재산을 넘겨주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엄마와 그의 근원적인 고독의 원인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서 시종 깐죽대는 새아버지는 분명 그에게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사이이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그는 외롭다.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알지 못함에도 몸을 던져보고 싶다. 헤엄을 치다 어느  순간 그 동작을 멈춰버릴까 유혹을 느낄 정도로 고독감은 크다. <물가 가까이>의 이 청년, 그리고 그의 할머니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아버지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인 성적 학대를 받은 소녀(<작별 선물>)나 그런 남편의 방으로 딸을 들여보냈지만, 그 딸이 자라 떠남으로써 이제 혼자 그 괴물 같은 남자를 상대해야 하는 엄마, 그 지옥 같은 집에서 머슴처럼 일하며 살아야 하는 장남(<작별 선물>)도 마찬가지이다. 사제의 길을 걷고자 선택했으므로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내고, 그 여인의 결혼식을 진행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남자(<푸른 들판을 걷다>)도 있다. 그 또한 어머니의 은근한 부추김으로 사제의 길을 걷게 되지 않았던가. 또 다른 곳에서는 사제의 길을 가려는 남자를 사랑했기에, 시간이 흘러도 그 사랑을 놓지 못했기에 마침내 그의 아이를 가졌으나 남자도 아이도 모두 잃고 마는 여자(<퀴큰 나무 숲의 밤>)도 있다. 애초부터 잘못된 선택으로 사랑하지도 않는 이와 결혼하는 바람에, 자신의 딸에게까지 상처를 주게 되는 여자(<삼림 관리인의 딸>)도 있다. 사랑하는데도, 어떻게 그 사랑을 표현하고 전달할 줄 몰라서 여자를 영영 잃어버리고 고독하게 살아가는 남자도 있다(<검은 말>).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외롭다. 가까운 이에게서 받은 상처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안겨준 상처 때문에.

그들은 모두가 어쩌면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서 그 바다에 덜컥 뛰어들었다가 뜻하지 않은 파도에 휩쓸리기도 하고 그대로 잠겨 죽어버린 것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기도 하고 가까스로 살아남아 해안가로 걸어 나오지만 죽는 게 나았을지도 모를 삶을 지탱해가는 것은 아닐까. 어리석은 선택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차를 타지 말았어야 한다고, 외로움에 그에게 자기 삶을 내주면 안 되었노라고,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면 사랑한다고 손길을 내밀지 말았어야 한다고 또는 그런 사람이 내미는 손을 잡았으면 안 되었노라고,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당신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멀리 떨어진 채 그 삶을 그저 바라보는 당신은 그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도 알고 있다. 당신 스스로도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서 덜컥 몸을 던졌다가 파도에 휩쓸린 적이 종종 있음을, 어쩌면 지금도 그렇게 삶을 부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세상에서 두 사람이 같은 순간에 같은 것을 바라는 일은 거의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인간으로서 가장 힘든 부분이다.”(<푸른 들판을 걷다>, 《푸른 들판을 걷다》, p.52). 그렇기 때문에 여기 이 사람들은 가장 가까이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이들로부터 상처주고 상처받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꺾이지만은 않는다. ‘바람이 강할수록 나무도 강해진다.’ (<작별 인사>, 《푸른 들판을 걷다》, p.21)는 듯이 어쩌면 그런 믿음을 안고서 묵묵히 살아나간다.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자신이 원한다는 사실도 모르는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어’(<퀴큰 나무 숲의 밤>, 《푸른 들판을 걷다》, p.233) 나가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사실 바다는 성내지 않는다. ‘파도는 매번 절벽 앞에서 제동을 걸고 여정이 끝나기 직전에 속도를 늦추는’ 듯하지만 ‘앞선 파도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듯이 다음 파도가 계속 밀려’(<퀴큰 나무 숲의 밤>, 《푸른 들판을 걷다》, p.236)올 뿐이다. 그 바다를 어떻게 마주하느냐는 오롯이 인간의 몫일뿐. 그 깊이를 알 수 없어도 바다를, 파도를 버티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키건의 이 이야기들 속에 존재한다. 당신도 또 한 번의 파도를 넘어야 한다. 묵묵히 소금물을 삼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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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09-13 1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단편을 읽고 있어요. 리뷰는 나중에 읽을게요!

다락방 2024-09-13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저라면 그 차를 타지 않기를 택하겠지만(헐.. 저새끼 쳐돌았네?), 그러나 이십년 전의 저라면 아마도 타지 않았을까 싶어요(아.. 자존심 상하지만 어떡해.. 같이 가야지 ㅠㅠ). 이십년 전의 제가 그 차를 탔다면 그러나, 그 뒤로 오래 그를 미워하고 그 일을 잊지 않고, 이십년 뒤에 그를 떠났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전에...

저는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았는데, 그 점이 참 마음에 드는군요. 후훗.

잠자냥 2024-09-13 12:34   좋아요 2 | URL
ㅋㅋㅋ 저 남자 진짜 쳐돌았죠? 이 책 읽으면 이놈도 쳐돌았고 저놈도 쳐돌았고 ㅋㅋㅋ 다락방님 분노 상승! ㅋㅋㅋㅋ 아무튼 재미나게 읽으세요~

다락방 2024-09-13 15:32   좋아요 1 | URL
남자들은 왜케 다 쳐돌은거에요??

바람돌이 2024-09-13 15: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앞의 명절 이야기는 제 이야기인줄 알았습니다. ㅎㅎ 지금 더 클레어키건 소설 3권 쌓아놨어요. 연휴 끝나고 읽으려고.. 다행히 탑이 매우 낮네요 ㅎㅎ
그래도 명절 잘 보내세요

잠자냥 2024-09-13 15:50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제 이야기입니다~!! ㅋㅋㅋㅋ 이 책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첫 번째 단편이 2인칭으로 쓰였거든요. 그거 한번 따라해봤습니다~!! ㅋㅋㅋ
바람돌이 님도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단발머리 2024-09-13 1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클레어 키건 아끼느라 아직 한 권도 안 읽은.......... 집에 두 권 있고요. 이 책을 먼저 읽고 싶네요.
키건 책은 전부 다 잠자냥님의 이 글처럼 차분하고 따뜻할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Falstaff 2024-09-13 2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의 상찬이구먼요 을매나 기다렸는지...
나도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10월 쯤에 감상을 올릴 거 같네요.
하여튼 잠선생, 글 잘 쓰쎠요, 매력적으로. ㅋㅋㅋ
에휴, 오늘 쇤네가 꽐라라서 이하 생략. ㅎ

Forgettable. 2024-09-13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증의 2인칭..

독서괭 2024-09-14 12: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나는 왜 여태 키건을 읽지 않은 것인가?? 한탄하게 됩니다.
잠자냥님 추석 평안하게 보내시길 바라고, 돌아와서 외롭지 않으시길 바라고,,

moonnight 2024-09-14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 전 불안과 우울이 깊어지는데-_- 클레어 키건의 책을 미리 사두었어야 했는데 말이죠 ㅠㅠ 올 명절엔 술을 좀 덜 마시자(안 마시자는 안됨-_-)라고 결심해봅니다-_-

2024-09-24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9-24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낯선 여인의 키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승주연 옮김 / 녹색광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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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은 일로 삶의 궤적이 달라지는 순간이 있다. 스스로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을 수도 있고 자기의 의지가 발현되지 않았음에도 어쩌다 보니 휩쓸려 그렇게 되기도 한다. 궤적의 크기가 매우 커서 또렷하게 알 수 있을 때도 있고 너무나 미미해 곧 그 흔적이 사라지고 기억에서 쉬이 잊히기도 한다. 때로는 기억 속에 남지 않고 지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한다고, 자각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이 누군가의 인생에 몹시 사소할지언정 조금이라도 삶의 궤적을 바꿔놓았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인지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의 차이일 뿐.

안톤 체호프. 이 미치광이 같은 남자는 인간의 삶에 일어나는 그 뜻하지 않은 일, 그 미미한 균열을 포착해 묘사하는 데 가히 천재와도 같은 솜씨를 발휘한다. 체호프를 나는 이제 미치광이 같은 남자라고 서슴지 않고 부르겠다. 이 세계에서 단편 소설 좀 쓴다는 이들이 하나같이 자신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작가로 꼽으며 흠모하고 사랑하다 못해 그를 뛰어넘어보고자 애 쓰지만 결국 그의 경지에 이를 수 없음을 한탄하다가 끝내 체호프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를 외치며 그에게 바치는 듯한 무수한 단편을 남기고 죽어가는 그 심경을 나는 새삼 또 절감했다. 스물 또는 서른 그즈음에는 느낄 수 없던 그 무엇을 느끼며. 그만큼 내가 인생을 더 살았기 때문인지, 이제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살아온 시절들이 쌓여서 그런 것인지 인간의 생에 불쑥 끼어드는 그 뜻하지 않은 일의 ‘위력’을-때로는 미미할지라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런 것인지 이 검은 단편집 <낯선 여인의 키스>는 한없이 강렬하게 남는다.

키스 이야기부터 해보자. 표제작인 ‘낯선 여인의 키스’는 체호프 마니아를 자처하며, 그의 (국내에 번역된) 거의 모든 작품을 읽었노라 자부하는 나조차도 처음 보는 작품이다. 이 작품 때문에 그의 단편집을 다시 읽었고(‘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벌써 몇 번째인가!), 그로 인해 체호프의 주옥같은 단편들을 다시, 그것도 이 나이에 읽을 수 있었음을 행운으로 여긴다. 그러니까 다시 키스 이야기로 돌아가자. 인간에게는 누구나(는 아닐 수도 있지만 누구나이길 바란다) 첫 키스 경험이 있을 것이다. 생애 최초의 키스이기도 하고(이것은 말 그대로 첫 키스이다), 어떤 대상과의 첫 키스이기도 하다(이것은 대상이 달라질 때마다 매번 그 또는 그녀와의 첫 키스로 갱신된다). 그런데 이 첫 키스를 기점으로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도 그렇지만 관계에서도 그렇다. 눈에 두드러진 변화가 있기도 하지만 몹시 사소해 제 자신도 모를....(수가 있나? 싶지만 아무튼 둔한 사람도 있으니 그렇다 치자)만 한 변화가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어떻든 대부분의 이들에게 첫 키스는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있으리라.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한용운, ‘님의 침묵’) 이런 구절이 그래서 널리 애송되는 것이 아닐까.

<낯선 여인의 키스>에도 그런 이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라보비치’- 너무나 평범하고 애매하게 생겨 도무지 누군가의 애정은커녕 관심도 주목도 받지 못하는 이 남자는 우연히 초대받은 무도회에서 한 여인의 열정적인 키스를 받게 된다.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받은 키스라면 더 없이 좋을 텐데, 하필이면 어두운 장소에서 급박하게 이뤄진 짧은 입맞춤- 단언컨대 그에게 입을 맞추고 사라진 여인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할뿐더러 도리어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서 열정적으로 키스를 퍼붓고 사라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어쩌면 좋으랴, 이 남자는 분명 어느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흠모해 남몰래 입을 맞추고 사라진 것이라 믿고 그날부터 꿈꾸듯 몽상에 잠긴다. 삶이 새롭다. 무료하기 짝이 없던 일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해도 누구일까 공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누군가 그를 다정하게 대했고 행복하게 해주었으며, 자신의 인생에서 무언가 어리석지만 특별한, 굉장히 기쁘고 좋은 일이 생겼다는 것, 그는 꿈속에서도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p.183) 못한다.

그런 데다가 자신감까지 생겨난다. 그 흔한 로맨스는커녕 부대에서 동료들에게조차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던 이 소심한 남자는 낯선 여인의 단 한순간 뜨거운 입맞춤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꿈꾸던 모든 것들, 그러나 어쩐지 자기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모든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본질적으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그러니 자기도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등등의 평범한 인생 그 자체가 가능할 것이라는 자신감까지 얻는다.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사람이며 언젠가는 모두가 겪는 일을 겪게 될 거야"(p.189). 자신이 평범하며 자기 삶 또한 평범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기쁘고 힘이 난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다. 라보비치와 비슷한 경험을 한 모든 이들-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간직한- 모든 이들이 알고 있다. 그 기쁨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심지어 라보비치처럼 원하던 대상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첫 키스가 아니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녀가 누구일까, 과연 나를 사랑하고 흠모해서 일어난 일일까, 나의 로맨스는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홀로 상상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 한 순간 일어난 농담 같은 운명의 기적은 곧 사그라지고 ‘더 이상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게 된 지금, 입맞춤과 관련된 일화, 자신의 조바심, 불확실한 희망과 실망이 또렷하게 교차’하면서 삶은 다시 지리멸렬하고 보잘것없으며 무료하며 초라한 그것으로 남기 마련이다. ‘온 세상과 그의 삶이 이해할 수 없고 목적도 없는 농담’(p.195) 같기만 하다.

리보비치의 삶만 그러하지는 않다. 매일 썰매를 타러 가서 썰매를 탄 채 아래로 내려갈 때만 작은 목소리로 "당신을 사랑해요, 나쟈!"라고 외치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랑 고백을 들으며 바람이 들려준 소리인지 등 뒤의 남자가 고백한 소리인지 또렷하게 알 수 없음에도 그 소리에 포도주나 모르핀에 중독되듯 중독되는 ‘나’와 ‘나젠카’(<농담>), 그들은 이제 이 말을 하지 않고 듣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썰매로 산비탈을 내려오는 건 무섭지만, 공포와 위험은 수수께끼로 남아 나젠카 그녀를 괴롭히는 그 말에 특별한 매력을 부여한다. ‘나’와 바람 중 누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이제 나젠카는 진실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어떤 잔에 술을 따라 마시든 취하기만 하면 된다는 듯이’(p.19)

약속어음을 받으러 찾아간 여자의 묘한 매력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진창’같은 일에 얽매이는 두 남자(<진창>)도 있다. 그들은 돈을 받아내기는커녕 여자에게 홀린 듯 마음까지 빼앗겨 버린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의 ‘구로프’와 ‘안나’는 또 어떠한가! 우연히 만난 바닷가에서 나눈 몇 차례의 대화가 그들의 삶을 지배한다. 한 달이 지나면 그녀 또한 다른 여성들과 똑같이 기억에서 잊히리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흘러 한겨울이 되어도 기억 속 그녀는 마치 어제 헤어진 것처럼 또렷하고 오히려 기억은 점점 더 생생해진다. 벽난로 속에서 눈보라 소리가 들릴 때면 그녀와 함께 했던 모든 일이 떠오른다. 그 짧은 추억은 이루고 싶은 꿈이 되고, 상상은 어느덧 실현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변한다. 마치 낯선 여인의 키스를 받은 라보비치가 꿈꾸던 삶처럼 말이다. 그러나 구로프와 안나에게도 그 꿈같은 날이 부서지는 순간은 찾아올 것이다. 그러고 나면 여전히 단조롭고 느리며 근심 없는 나날이 이어지리라......



구름 속에서는 천둥소리가 들렸고 이따금 바람이 슬픈 듯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자연도 울음소리를 낼 수 있지만 인간의 단조로운 일상을 흔들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그들은 수산나나 약속어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양심에 찔려서 이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렸다. 대신 그들은 그때 일을 회상하고 그녀에 대해 생각할 때면 그들의 삶에 우연히 발생한 우스꽝스러운 농담처럼 그 일을 떠올리며 즐거워했다. 노년에 떠올리면 기분 좋을 법한 일화인 것처럼....(p.80)



“우리는 우리의 평생을 정원에 쏟았지 내 꿈에는 사과나무와 배나무만 나올 정도야. 물론 이건 좋은 일이고, 유익한 일이야 하지만 가끔은 단조로운 삶에 무언가 변화가 있었으면 할 때가 있어.” (p.118) <검은 수사>의 여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삶은 단조롭기 짝이 없다. 평범하고 단조로운 삶도 그 나름으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체호프가 자신의 작품에서 말하듯이 인생은 ‘하찮거나 지극히 평범한 행복의 대가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가, 게다가 ‘살면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는 것이’(p.162) 과연 무엇인가. ‘한마디로 평범한 학자의 위치에 도달하기 위해 15년을 공부하고 밤낮으로 연구하고 정신질환을 앓고 불행한 결혼을 견디고 온갖 종류의 바보 같은 짓과 잊고 싶은 부당한 일을’(p.162) 저지른 후에야 자신이 완전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생 아닌가. 또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출구도 없는 덫에 걸려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고 그의 의지와 달리 우연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게 되는데도 도무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자기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알고 싶어 하면 대답을 듣지 못하거나 그가 알고 싶은 것과 전혀 다른 대답을 듣게‘(p.226)되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체호프는 이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다. 인생이 바로 그렇다는 것을. 그렇기에 때로 “운명이 뜻하지 않게 낯선 여인의 얼굴로 그를 다정하게” 대한다는 것, 바로 우리를 다정하게 대하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이 있음으로 인간은 이 생을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체호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인간은 여름날의 꿈과 장면들을 떠올리며 비록 자신의 삶이 초라하고 보잘것없을지라도 그 꿈에 기대어 또 견딜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 안을 서성이며 추억을 더듬고 미소를” 지으며 “추억은 이루고 싶은 꿈이 되고, 상상은 어느덧 실현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p.39) 변하면서 그렇게 세월이, 생이 흘러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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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8-30 2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사야겠다.

잠자냥 2024-09-02 10:01   좋아요 1 | URL
다락방이 젤 잘하는 말....

은하수 2024-08-31 0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이 책 받았습니다~~ 땡투도 보냈는데 받으셨나요~~~?
리뷰 읽고 나니 얼른 읽고 싶네요.
제가 모으는 흔치 않은 시리즈인데
이렇게 검은색으로 나와서 아닌 줄 알았잖아요.

리뷰도 재밌게 잘 읽었어요!

잠자냥 2024-09-02 10:02   좋아요 1 | URL
녹색광선 이 시리즈 예스24에서는 종종 다른 표지로 나오는 거 알고 계세요...? (응?)

그레이스 2024-09-02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호프 2탄 이네요
지난번에 여러 출판사 번역책 소개하신거 보고 이번에는 체호프다 했는데...^^
그래서 이 책 샀습니다.^^*
10월에는 체호프의 희곡과 단편을 읽을 계획이예요 ^^

잠자냥 2024-09-02 10:02   좋아요 1 | URL
가을...이라(오늘 날씨는 확실히 그렇습니다!) 체호프 작품이 왠지 더 잘 어울릴 거 같아요. 재미나게 읽으세요!

공쟝쟝 2024-09-02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느 여자가 그 순진한 군인의 입술을 촵촵초ㅡㅠ릅리ㅡ흐르릅 했길래 (더러움 뎨송)ㅋㅋㅋㅋㅋ ㅋㅋㅋㅋ 잠자냥에게 잊지못할 첫 키쓰를 쓰게 하는가 ㅋㅋㅋㅋ
체호프 바보!

잠자냥 2024-09-03 09:47   좋아요 1 | URL
아니 설마 그렇게 ˝촵촵초ㅡㅠ릅리ㅡ흐르릅˝하게 했을 리가....
그리고 이거 키스에 관한 글 아니라니까.....

공쟝쟝 2024-09-03 10:06   좋아요 0 | URL
ㅇㄹㅁㄱ 가 끼어가지고 뎨송함다 ㅋㅋㅋㅋ 키쓰해주세용 앞니빨이 쏙 빠지도록 ~ㅋㅋㅋ (ㅋㅋ 쟝쟝 mz맞냐고 댓글 달거죠?)

잠자냥 2024-09-03 11:07   좋아요 1 | URL
아닝...
요즘 사랑에 빠진 분들과 가까이 지내더니.......... *먼산*

공쟝쟝 2024-09-03 19:2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사랑 좋은 거자냥! 하믄 좋은 거다!!!

독서괭 2024-09-05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제야 이 글을 읽었는데,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할 정도예요? (체호프 안 읽은 사람)
잠자냥님이 전달해준 내용이랑 인용문만 봐도 좋을 것 같긴 합니다만. 이런 극찬이라니.
그래서, 잠자냥의 첫키스는 몇살?

잠자냥 2024-09-06 09:55   좋아요 0 | URL
체호프 이제 한번 읽어보셈~

안 알랴줌.... ㅋㅋㅋㅋㅋ 알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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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기러브 2024-09-08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댓글은 처음이네요..항상 잠자냥님 글을 정독했다가 책도 찾아보고 사서 읽기도 했는데 이 글 읽고 울고 말았네요..ㅠ즐거운 댓글들 많은데 민망하지만..; ㅎㅎ 이번 체호프도 꼭 읽어야겠네요 !

잠자냥 2024-09-09 06:56   좋아요 0 | URL
이런 댓글이 큰 힘이 되는 거 아시죠? 감사합니다. 이 책도 꼭 읽어보세요!
 
상실과 발견 - 사랑을 떠나보내고 다시 사랑하는 법
캐스린 슐츠 지음, 한유주 옮김 / 반비 / 2024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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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리는 것들이 많아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상실과 발견>을 읽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일이 없는 나조차도 돌아보면 잃어버린 것들이 떠오른다. 지갑이나 그 지갑 안에 담겨 있던 신분증이기도 하고 핸드폰을 잃어버리기도 했고…. 이런 물건들이 지금까지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잃어버렸을 그 순간의 당혹감이나 잃어버린 물건의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들 말고도 나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사소하고 자잘한 물건들을 잃어버리며 살아왔을 것이다. <상실과 발견>에 따르면 우리가 60세가 될 즈음이면 평균 20만 개의 물건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숫자이다.

어디 물건들만 그러할까, 때로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그것을 잃어버림으로써 다른 것으로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그런 것들-어떤 존재일 수도 있다. 나만의 기록이리라 굳게 믿었으나 그 믿음이 깨져버려 다시는 쓰지 않게 된 일기장, 남다른 추억이 있어 절대 버리지 않으려 했는데 어느 날 사라져버린 낡은 티셔츠, 엄마 손을 잡고 따라나서기를 즐겼던, 그러나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재래시장, 누군가가 가져가 버린 게 틀림없을 빨간 자전거, 집을 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은 강아지… 특별한 기억이나 추억이 깃든 물건과 존재들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섣불리 글자 몇 자로 끼적일 수 없는,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고, 인연이 더는 닿지 않아서 또는 인연을 끊을 수밖에 없어서 나의 삶에서 사라져버린 이들이 있다. 그런 상실은 잃어버린 물건이나 추억이 안겨준 슬픔보다 몇 배는 더 깊고 진하게 생에 새겨져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인간은 살아가야만 한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을 끌어안고, 더는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그 존재를, 대상을 그리워하면서 애달파만 하기에는 인생에는 또 다른 것들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지갑 대신 새로운 지갑을, 핸드폰을 살 수도 있고 그것들이 전에 쓰던 것들보다 더 마음에 와 닿는 일도 종종 겪는다. 물건은 그 안에 담긴 추억을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새로 사는 것들이 더 마음을 사로잡기도 한다. 그렇지만 존재, 생명을 지닌 대상은 어떠할까? 어떤 대상과 대상을 서로 견준다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기도 하지만,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종종 이런 일도 일어난다.

그러나 때로는 견주는 대상 자체가 서로 너무나 다른 존재일수도 있다. <상실과 발견>의 저자 캐스린 슐츠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나보내기 얼마 전, 결혼하게 될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절대적인 사랑을 잃어버릴 즈음, 또 하나의 절대적인 사랑이 나타난 것이다. 이 두 존재-아버지와 반려자는 결코 서로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의 큰 사랑이 나를 떠나려는 순간에, 또 다른 종류의 커다란 사랑이 다가온다는 것은, 그리하여 어쩌면 생의 비극을, 슬픔을 그나마 잊을 수 있게, 그것이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은 이 지난한 인생을 그래도 버티며 견딜 수 있도록 해주는 하나의 위로는 아닐까.

사랑이 또 다른 형태의 사랑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꼭 이렇게 가족을 또 다른 가족으로 대체하는 형태로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에서 잃어버린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그 공허가 외로움이 채워진다. 친구든 연인이든 잃어버리거나 떠난 사랑의 자리는 새로운 사람이 그 빈 공간을 매워주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때는 바로 이 사람이다, 라는 확신, 이 사람이라면 어떨까 싶은 ‘발견’의 시선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즉 “사랑이 우리에게 처음 제기하는 문제는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이며 “누군가를 발견한다는 건 한없이 경이로운”(p.233) 경험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발견에서 “절망이 아닌 경이”를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애도의 이야기 구조가 상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듯, 사랑 이야기는 모두 발견의 연대기이며 특별한 발견의 개인적 역사”(p.112)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견에 이어서는 사랑에 빠지는 상태, 즉 그 대상에 대한 정보를 갈망하는 상태가 된다. 사랑하는 상대를 알고 싶은 갈급함은 지식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져 “사랑에 대한 갈망은, 그것이 육체적이건 감정적이건 지적이건 실존적이건, 언제나 ‘더 많이’ 요구”(p.162)하게 되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발견의 경이로움, 기쁨과 충만함을 던져주던 대상이, 그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 죽을 것만 같던 대상이 어느 날 너무나 익숙해지고 더는 발견의 기쁨을 던져주지 못해 그 대상에 대해 더는 알고 싶지 않은 상태, 아무것도 궁금하지도 않은 상태 또한 찾아온다는 것을…. 그렇게 한 존재를 잃어버리기를 스스로 선택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을…. 이렇게 잃어버림과 찾음, 상실과 발견이 따르기 마련인 사랑이 제기하는 문제는 삶이 꾸준히 인간에게 던져주는 문제이기도 하다. 잃어버리고, 발견하고 다시 또 잃어버리고…. 그렇게 인간은 삶의 모든 단계에서 무언가를 발견하지만 또 잃어버린다. 게다가 “상실은 우리가 나이를 먹을수록 빈번하게, 더욱 파괴적인 내밀함으로 충격”(p.290)을 던져준다.


상실이 더욱 많아지는 인생, 그 쓸쓸한 생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사랑뿐만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모든 것들을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인생의 법칙임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것이 어쩌면 나이듦이 아닐까, 제 나름의 성숙은 아닐까...... 이 세상에서 가장 불화한 존재가 아버지임에도 이 책을 읽는 동안 그, 아버지라는 존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슐츠처럼 아버지를 사랑한 적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었음에도 이제는 꽤 나이가 들었을,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모를 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아버지의 부고를 듣는다면 이제는 조금 애도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일렁거렸다. 평안히 살고 계시기를, 세상 떠나는 그날에는 가까이에서 깊은 애도를 보낼 이들이 그래도 많기를…. 이 모든 생각을 가능하게 한 것은 슐츠의 글이 주는 힘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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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8-21 18: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물건에 대한 건가 20만개라니?? 했는데 사람에 관한 이야기군요.
상실이 더 많아지는 인생에 최근 두명의 친구를 발견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ㅎㅎ 발견의 경이로움! 뭐 얼굴 본 게 최근일 뿐이긴 하지만요..
암튼 5별이군요. 흠.

잠자냥 2024-08-22 09:41   좋아요 1 | URL
물건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기는 하지만 정확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또 새로운 사랑을 찾는 과정을 그린 책입니다. 아버지는 가고, 연인은 오고 그리고...!
엥 제가 발견한 건가요? ㅋㅋㅋ 다락방은 발견인 것 같기는한데.... 은곰탱이는 제가 발견당한 거 같음. ㅋㅋㅋㅋ

다락방 2024-08-21 20:1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전에는 함께였던 적이 없는 두 사람을 하나가 되게 해보라. 어떤 때는 최초로 수소 기구와 열기구를 견인줄로 함께 묶었던 것과 비슷한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추락한 다음 불에 타는 것과, 불에 탄 다음 추락하는 것, 당신은 둘 중 어느쪽이 낫겠는가? 그러나 어떤 때는 일이 잘 돌아가서 새로운 뭔가가 이루어지고, 그렇게 세상은 변한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머지않아 이런저런 이유로 그들 중 하나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빈자리는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의 총합보다 크다. 이는 수학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가능하다.’

잠자냥 님의 이 리뷰를 읽는데 줄리언 반스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가 생각났어요.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빈자리는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의 총합보다 크다.

독서괭 2024-08-21 20:27   좋아요 4 | URL
크~ 이 인용문을 읽으니 이 인용문을 재인용한 명저가 떠오르는군요. <잘 지내나요?> 라고 아실랑가…

다락방 2024-08-21 21:18   좋아요 6 | URL
독서괭 님 지구에서 제일 똑똑하고 매력적이라고 제가 말했던가요?? 💕

잠자냥 2024-08-22 09:42   좋아요 2 | URL
반스의 그 책에 저런 구절이 있었군요?! 다락방 님이 옮겨주시니까 정말 절묘합니다. 왜 저런 구절을 적어두지 않았을까...? 아무튼 소설 천재 다락방!!

Falstaff 2024-08-22 07:1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소설 쪽은 안 읽으셔요? 기다리다 지쳐서....

잠자냥 2024-08-22 08:57   좋아요 5 | URL
ㅋㅋㅋㅋㅋㅋ 곧 읽고 올리겠습니다요.

단발머리 2024-08-23 16: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꼭 죽음이 아니어도 매일, 매순간 겪게되는 이별의 순간이 있겠지요. 그래서 다시는 못 보는 사람이 있고요. 요즘 제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이 ‘잃어버린 사람....‘ 뭐, 이런 주제였거든요. 잠자냥님 글 읽다보니 그걸 어떻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할지 더 많이 알고 싶어지네요. 새로운 ‘발견‘이 그 다음에 어떤 식으로 이어지는지 저는 그 과정에도 관심이 많고요.

이 책도 읽고 싶어요. 저는 처음 듣는 작가거든요. 일단 넣어둡니다. 캐스린 슐츠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4-08-23 15:55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 님 머릿속에 가득한 잃어버린 사람.... 누구일까요? ㅎㅎ 그 이야기도 궁금해지네요.
새로운 발견을 어떻게 연결해 갈 것인지 그것도 각자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겠죠?
저도 처음 듣는 작가였는데, 에세이가 나오면 또 읽어볼 것 같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