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망설이고 있다. 이제 곧 긴 연휴가 시작되고 바로 지금 당신 옆자리의 동료는 퇴근 후 고향 집으로 갈 생각에 들떠 있다.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아직도 망설이는 중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할 수 있다면 피할 수만 있다면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크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사는데도 왜 이토록 집에 가는 것이 싫은가 당신은 곰곰 생각해 본다. 지난봄, 가족에게 들은 몇몇 말들이 큰 상처였음을, 그것이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음을 당신은 안다. 그러나 당신은 또 알고 있다. 귀찮아서 가고 싶지 않은 척하지만, 결국에는 갈 것이며 그리고 거기, 가족이 둘러앉은 자리에서 일상이 평화로운 듯, 아무 일도 없는 듯 웃고 떠들다 집으로 돌아올 것임을, 그러고 나서 당신은 깊은 공허함에 또 한 번 외로워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듬해 설 연휴가 시작될 무렵에는 또 똑같은 망설임 속에 괴로워하리라는 것도.
그럴 즈음 당신은 키건의 소설을 읽는다. ‘작별 선물, 푸른 들판을 걷다, 검은 말, 물가 가까이…‘ 7개의 짧은, 그러나 묵직한 이야기들. 읽을수록 당신은 당신의 가족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당신은 생각한다. 쿤데라의 어떤 말을.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친구”(밀란 쿤데라, 《농담》, p.227)라는 그의 이 통렬한 문장을 또 한 번 떠올린다. 키건이 그려내는 인물들 그러니까 《푸른 들판을 걷다》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외롭다. 아무리 나쁜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외롭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그 세계에서는 사람만이 아니라 개조차도 염소조차도 바람조차도 모두가 외롭기 짝이 없다.
사랑하지 않아서 외롭고, 사랑하는데도 외롭다. 사랑 때문에 외롭고 사랑이 존재하지 않아서 외롭다. 곁에 누군가가 있어서 외롭고, 없어도 떠난 사람 때문에 외롭다. 고통스럽다. 그 외로움은 가장 가까운 존재, 부모나 연인처럼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랑했다고 믿는 존재들이 안겨준다. 그러니 그들의 외로움은 아무리 푸른 들판을 걷고 또 걸어도(<푸른 들판을 걷다>),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배를 타고 아예 다른 곳으로 떠난다면 모를까(<퀴큰 나무 숲의 밤>)- 그러나 그렇게 완벽하게 다른 장소로 떠난다 할지라도 사람이 사람에게 준 상처,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쉽사리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작별 선물>). 그렇지만 그냥 주저앉아 떠나지 않는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 삶은 어떻게 될까. 더 심하게 뒤틀리고 망가지리라.
여기, 사랑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아니 사랑이라는 달콤한 말을 속삭이지 않았어도, 함께 살을 부비고 살아갈 남자이므로,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남자와 결혼해 그의 자식을 아홉이나 낳아준 여인이 있다. 여자는 신혼 초부터 바다가 보고 싶다고 남자에게 수없이 말한다. 여자는 대서양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바다를 보고 나면 마음을 추스를 수 있을 것 같다고 남자에게 조르고 또 조른다. 그러나 남자는 그 말을 듣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 척 외면한다. 그러다 여자가 첫 아이를 갖고 만삭이 되었을 때에야 퉁명스럽게 그녀를 차에 태우고 바다로 데려간다. 한 시간. 여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한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차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남자는 혼자 떠나버릴 것이라고 윽박지른다. 여자는 태어나 처음 보는 바다를 허겁지겁 산책하고 돌아온다. 주어진 시간에서 5분이 지났고 남자는 이미 화가 날 대로 나서 차에 시동을 켜고 출발한다. 여자는 도로로 달려들다시피 해서 차를 세우고 그 차에 올라타 집으로 돌아온다.
당신이라면, 이 차를 세우고 올라탈 것인가? 아니면 그 차로부터 남자로부터 뒤돌아설 것인가? 여자는 차를 탔다. 집으로 돌아가서는 첫 아이를 낳고 그 이후 여덟을 더 낳는다. 자기를 바닷가에 버리고 가려던 남자의 아이를….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노라고, 누구나 다 그랬다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줄 알았”(<물가 가까이>, 《푸른 들판을 걷다》, p.156)노라고 여자는 딸의 아들- 그러니까 손자에게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말도 덧붙인다. 인생을 다시 산다면 절대 그 차에 올라타지 않겠다고, 집으로 돌아가느니 거기 남아서 거리의 여자가 되겠다고.
여자의 손자는 지금 바닷가에서 아무런 시간의 제약 없이 마음껏 헤엄을 칠 수 있다. 심지어 그의 새 아버지는 이 바닷가에 세워진 리조트의 소유주이다. 시간 제약은커녕 이 바닷가가, 리조트가 어쩌면 그의 소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할머니와는 또 다른 이유로 이 바다를 도무지 만끽할 수가 없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엄마도, 새아버지도, 그들이 베풀어주는 이 풍족함도 낯설고 자기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이 삶 자체가 그러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할머니가 차마 발을 담그지는 못했던 바다에 헤엄을 칠 요량으로 몸을 던져보기도 하지만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서 완벽하게 자기 몸을 던지지는 못한다.
그는 어머니의 어머니를, 그렇게 먼 길을 가서 시간이 한 시간밖에 없는데도 바다에 들어가지 않았던 할머니를 생각한다. 강에서는 수영을 그렇게 잘했는데 말이다. 그가 왜 그랬냐고 묻자 할머니는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서 그랬다고 말했다. (<물가 가까이>, 《푸른 들판을 걷다》, p.160)
무엇하나 남부러울 것 없는 이 청년이, 왜 저토록 부유하는 것일까. 그는 가족 안에서 한없이 외롭다. 부자와 재혼해 하나뿐인 아들에게 재산을 넘겨주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엄마와 그의 근원적인 고독의 원인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서 시종 깐죽대는 새아버지는 분명 그에게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사이이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그는 외롭다.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알지 못함에도 몸을 던져보고 싶다. 헤엄을 치다 어느 순간 그 동작을 멈춰버릴까 유혹을 느낄 정도로 고독감은 크다. <물가 가까이>의 이 청년, 그리고 그의 할머니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아버지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인 성적 학대를 받은 소녀(<작별 선물>)나 그런 남편의 방으로 딸을 들여보냈지만, 그 딸이 자라 떠남으로써 이제 혼자 그 괴물 같은 남자를 상대해야 하는 엄마, 그 지옥 같은 집에서 머슴처럼 일하며 살아야 하는 장남(<작별 선물>)도 마찬가지이다. 사제의 길을 걷고자 선택했으므로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내고, 그 여인의 결혼식을 진행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남자(<푸른 들판을 걷다>)도 있다. 그 또한 어머니의 은근한 부추김으로 사제의 길을 걷게 되지 않았던가. 또 다른 곳에서는 사제의 길을 가려는 남자를 사랑했기에, 시간이 흘러도 그 사랑을 놓지 못했기에 마침내 그의 아이를 가졌으나 남자도 아이도 모두 잃고 마는 여자(<퀴큰 나무 숲의 밤>)도 있다. 애초부터 잘못된 선택으로 사랑하지도 않는 이와 결혼하는 바람에, 자신의 딸에게까지 상처를 주게 되는 여자(<삼림 관리인의 딸>)도 있다. 사랑하는데도, 어떻게 그 사랑을 표현하고 전달할 줄 몰라서 여자를 영영 잃어버리고 고독하게 살아가는 남자도 있다(<검은 말>).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외롭다. 가까운 이에게서 받은 상처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안겨준 상처 때문에.
그들은 모두가 어쩌면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서 그 바다에 덜컥 뛰어들었다가 뜻하지 않은 파도에 휩쓸리기도 하고 그대로 잠겨 죽어버린 것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기도 하고 가까스로 살아남아 해안가로 걸어 나오지만 죽는 게 나았을지도 모를 삶을 지탱해가는 것은 아닐까. 어리석은 선택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차를 타지 말았어야 한다고, 외로움에 그에게 자기 삶을 내주면 안 되었노라고,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면 사랑한다고 손길을 내밀지 말았어야 한다고 또는 그런 사람이 내미는 손을 잡았으면 안 되었노라고,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당신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멀리 떨어진 채 그 삶을 그저 바라보는 당신은 그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도 알고 있다. 당신 스스로도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서 덜컥 몸을 던졌다가 파도에 휩쓸린 적이 종종 있음을, 어쩌면 지금도 그렇게 삶을 부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세상에서 두 사람이 같은 순간에 같은 것을 바라는 일은 거의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인간으로서 가장 힘든 부분이다.”(<푸른 들판을 걷다>, 《푸른 들판을 걷다》, p.52). 그렇기 때문에 여기 이 사람들은 가장 가까이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이들로부터 상처주고 상처받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꺾이지만은 않는다. ‘바람이 강할수록 나무도 강해진다.’ (<작별 인사>, 《푸른 들판을 걷다》, p.21)는 듯이 어쩌면 그런 믿음을 안고서 묵묵히 살아나간다.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자신이 원한다는 사실도 모르는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어’(<퀴큰 나무 숲의 밤>, 《푸른 들판을 걷다》, p.233) 나가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사실 바다는 성내지 않는다. ‘파도는 매번 절벽 앞에서 제동을 걸고 여정이 끝나기 직전에 속도를 늦추는’ 듯하지만 ‘앞선 파도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듯이 다음 파도가 계속 밀려’(<퀴큰 나무 숲의 밤>, 《푸른 들판을 걷다》, p.236)올 뿐이다. 그 바다를 어떻게 마주하느냐는 오롯이 인간의 몫일뿐. 그 깊이를 알 수 없어도 바다를, 파도를 버티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키건의 이 이야기들 속에 존재한다. 당신도 또 한 번의 파도를 넘어야 한다. 묵묵히 소금물을 삼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