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들의 나라 대산세계문학총서 179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황선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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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익숙했던 공간과 사람들을 떠나 완벽하게 새로운 곳으로, 단 한 사람만을 믿고 거주지를 옮긴다는 게 가능할까? 이 한국이 너무 싫어서 가끔 집사2랑 완전히 다른 나라에 가서 살 생각을 하다가도 망설여지는 지점이 조금 있다. 집사2는 나와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거의 비슷한 문화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다른 장소에서 그 사람하고만 살아간다는 게 엄청난 모험으로 여겨진다.

그런 면에서 <타인들의 나라>의 마틸드는 대단하고 용감하다. 또 그래서 한편으로는 무모하기까지 하다. 마틸드는 프랑스 알자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인으로,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고향을 떠나 모로코 메크네스로 향한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곳에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 것 같다. 그의 이름은 ‘아민’- 책을 읽으며 생각한다. 프랑스의 백인 여자가, 모로코의 흑인 남자와 함께 살기 위해 집을, 나라를 떠난다고? 와우- 그렇다 이 여자, 마틸드는 열아홉 살이 되던 1944년에 모로코 남자 아민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아민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39년에 프랑스군소속의 아프리카 원주민 기병부대에 입대해 프랑스로 온다. 프랑스를 독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아민이 입대하기 전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는 아민에게 모로코 메크네스에서 2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넓은 토지를 남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농장을 경영하리라는 꿈에 부풀어 전쟁을 버틴다. 전쟁 중 독일과 인접한 알자스의 한 마을에 아민이 속한 부대가 잠시 주둔하던 중 그곳에서 그는 마틸드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 결혼한다. 전쟁이 끝난 후 마틸드는 드디어 남편이 먼저 가 있는 모로코의 메크네스로 향한다. 그녀는 꿈에 부풀어 있다. 새로운 땅, 사랑하는 남자, 그와 함께 꾸려갈 자기만의 가족, 새로운 미래..... 그런데 정말 마틸드 앞에는 그녀의 기대처럼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까?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은 예상할 수 있다. 마틸드만이 그것을 모를 뿐.



“여기서는 다 그렇게 해.”
이 말을 그녀는 앞으로 자주 듣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마틸드는 자신이 외국인, 여성, 아내, 타인의 뜻에 좌지우지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민은 이제 자신의 고향땅에 있었으므로 규범을 알려주고, 나아갈 길을 일러주며, 염치, 수치, 그리고 예의 등의 경계를 제시하는 사람 또한 그가 되었다. (22~23쪽)


불길한 기운은 그녀에게도 곧 감지된다. 자유로운 프랑스에서 누구보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았던 마틸드- 그런 그녀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모로코는 마틸드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곳에서는 부적절하다는 것을, 감시와 구속의 대상이라는 것을 경고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호텔에 묵을 때조차 아내와 남편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녀, 흑인과 호텔에 묵는 백인 여성을 향한 눈빛은 싸늘하기만 하다. 아민은 더욱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꺼낸다. 계약문제 때문에 아민이 물려받은 농장으로 가 사는 것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아민은 농장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어머니’ 집에서 함께 지낼 것이라고 차갑게 말한다.

마틸드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 호텔에서 지내는 일주일동안 그들은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다. 그런데, ‘아민 같은 남자가, 그러니까 간밤에 그랬던 것처럼 아내와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런 남자가 시어머니 댁에서 지내게 될 거’라고 말하는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것이다. “진심이야?” 묻는 마틸드에게 아민이 말한다. “여기서는 다 그렇게 해.”- 이 말을 할 때 그는 앉은 채로 일어서지 않는다. 마틸드는 아민에 비해 머리 하나 크기만큼 키가 더 크다. 아민은 굳이 이곳 모로코에서 아내와의 신장 차이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 아니, 아내보다 작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 이곳은 자기 땅, 자기 나라, 자기의 모로코이고 여기서는 다 그렇게 한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는 곳이니까-

아민이라는 남자의 이 치졸함에 치가 떨려온다. 마틸드라는 여자의 어리석음에 한탄하게 된다. 아아, 이 어리석은 여자야, 그러니까 어쩌자고 모든 걸 버리고 저 남자, 자기의 작은 키를, 그 열등감을 프랑스에서는 잘도 포장해 숨겼지만 이곳, 자기 땅에 오자마자 돌변하는 저 가련한 남자, 저 치졸한 남자를 믿고 삶의 터전 자체를 바꾸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여자인가, 아무리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방탕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가 억압적이고 차갑게 굴었다 할지라도, 그래서 그런 가족을 빨리 떠나서 자기만의 가족을 일구고 싶었던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아프리카에서 나고 자란, 하필이면 인종도 다른, 하필이면 피식민 땅의 남자와 하필이면 이슬람을 믿는 남자와 결혼해 프랑스를 떠나버리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마틸드는 아민의 눈부신 외모, 너무나 잘생겨서 누군가 낚아채갈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했던 그 외모를 찬양하지만.... 이 여자야 정신 차려, 혀를 끌끌 여러 번 차게 된다. 외모가 밥 먹여주니.

아민은 얼마나 잘생긴 외모인지 모르겠지만 모로코 땅에서는 그냥 그렇고 그런, 흔한 이슬람 가부장제에 찌든 형편없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준다. 아내를 향한 폭력도 망설임이 없다. 그럴 때마다 그는 말한다. “여기서는 다 그렇게 해.”, “여기서는 이런 식으로 일이 돌아간다고.” “여기서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마틸드는 자신이 더는 프랑스에 있지 않음을, 이곳에서 자신은 유럽, 프랑스, 식민자의 나라 출신, 백인, 여성, 외국인, 영원한 타자임을 진저리 날만큼 깨닫는다. 그리고 이 타인들의 나라, 단지 인종이 다르고, 단지 나라가 다르고 단지 종교와 문화 언어가 달라서만 타인이 아닌, 남편이라는 사람마저도 완벽하게 타인인, 그래서 영원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이 타인들의 나라에서 그 남자, 자기보다 훨씬 작은 이 남자에게 예속되어 좌지우지되는 존재라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은 고통 자체이다.

위치의 전복이다. 프랑스에서 마틸드가 아민을 처음 만났을 무렵 그녀는 아민의 안내자이자 보호자였다. 그가 마을에서 보냈던 길고 긴 주간 동안 마틸드는 그와 함께 산책했고, 자신의 친구들을 소개해주었으며, 또 카드놀이를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민의 말, 그의 명령과도 같은 말에 따라야 한다. 순종적인 시어머니 무일랄라를 비롯해 주변 모로코 여성들의 삶이 답답해보여서 조금이라도 바꿔 볼 시도를 해보면 아민은 싸늘히 말한다. “대체 뭐에 대해 불평하는 거지? 당신은 유럽 여자고, 아무도 당신이 하고자하는 일을 막지 않잖아. 그러니까 당신 일에나 신경 쓰라고, 어머니는 건드리지 말고.”(126쪽)

마틸드는 후회한다. ‘여기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자신의 허영심을 탓한다. 모험을 하며 살고 싶었던 사람도, 어린 시절 친구들이 이국적이라면서 부러워했던 그 결혼을 허세를 부리며 성사시킨 사람도,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마틸드는 자신이 어떤 굴욕이나 배신도 당할 수 있는 신세임을 자각한다.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그녀 앞에 놓인 것은 농장 생활이 안겨준 고립감, 자칼들의 울부짖음만이 정적을 깨뜨리는 어두운 밤, 그런 밤의 두려움, 자기 자리가 없는 세계에 산다는 절대적인 고독, 부당한 규칙들에 휘둘리는 세계에 산다는 절망감뿐이다. 이것은 귀양살이이다. 실패와 환멸감만이 마틸드를 감싼다.

이 여자, 마틸드의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까. <타인들의 나라>는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가 총 3부작으로 구상한 작품으로 그중 1부에 속한다. 작가의 가계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어 보이는 이야기로, 마틸드와 아민은 레일라 슬리마니의 할머니-할아버지대의 이야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부부가 다 그런 것인지 저들 부부가 유독 저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저렇게 불협화음속에 살면서도 섹스만큼은 지치지도 않고 해서 이들에게도 자식이 생긴다. 딸 하나, 아들 하나. 딸인 아이샤는 아민처럼 검은 피부에 폭탄처럼 부스스한 머리털을 갖고 태어났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예민하고 똑똑하다. 모로코 땅에서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자각한다. 백인도 흑인도 오렌지도 레몬도 아닌 어정쩡한 존재. 게다가 아이는 이슬람 사회에 살면서 하필이면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게 된다. 마틸다는 명민한 딸을 교육하는 데 관심이 많다. 이 아이샤는 틀림없이 레일라 슬리마니, 즉 작가의 엄마를 모델로 하는 인물이리라. 오렌지나무 줄기에 레몬나무 가지를 접붙여 탄생한 ‘시트랑주’와도 같은 존재인 아이샤, 과육이 딱딱하고 맛이 써서 눈물이 솟구쳐 오를 지경인 시트랑주 같은 아이샤가 펼쳐나갈 세상도 마틸드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더욱 고단해 보인다. 아이샤가 살아갈 타인들의 나라는 또 어떤 모습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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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4-04 10: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그거네요! 필리스 체슬러의 실제 경험담이요. 카불의 신부! 일전에 단발머리 님이 올리셨던 그 내용이 바로 이 내용이네요. 미국에서 만나서 결혼해서 그 남자의 나라로 갔더니 그곳의 문화가 필리스 체슬러를 감금했던.. 결국 시아버지 도움으로 미국으로 다시 올 수 있었다고 햇던 것 같은데요, ‘이곳에서는 동등하고 다정했던 남자‘가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서 개빻아가지고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경우가 그러니까, 그동안 잘 몰랐지만 자주 있겠죠. 필리스 체슬러는 미국 레일라 슬리마니는 프랑스... 그들중 누구라도 한국 남자를 만났다면 또 어떻게 됐을까요....(생각하기 싫구나..)

아.. 리뷰만 읽어도 너무 힘드네요. 그러면서도 아이를 낳은게 너무 싫지만, 그 사이에 태어난 딸 아이의 이야기가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잠자냥 2023-04-04 10:40   좋아요 3 | URL
와우, 역시 다부장님 이것이 필리스 체슬러의 실제 경험담이기도 하군요! 그래도 시아버지가 도와주고 다행입니다.
아이를 낳는 과정은 딱히 그렇게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부부간 섹스의 폭력적인 면도 좀 잘 그리고 있더라고요(부부도 아닌 내가 어찌 잘 아는지 모르겠으나???;; ㅋㅋㅋㅋㅋㅋㅋ)
계속 마틸드의 이야기인가 했는데 아이샤가 그 못지 않게 중요하게 나와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아무래도 작가의 엄마 이야기라 좀 더 내밀하게 쓸 수 있을 듯...

건수하 2023-04-04 13:37   좋아요 1 | URL
시아버지가... 도와줄려고 도와준다기보단... (할많하않)

필리스 체슬러도 그렇긴 한데,

모로코-프랑스는 또 관계가 좀 복잡하잖아요. 모로코와 아프가니스탄은 다르겠지만
별로 덜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ㅠㅠ

4월에 읽을 건데, 언제 시작할 것인가.. 고민됩니다 :)

잠자냥 2023-04-04 14:10   좋아요 1 | URL
네 수하 님 말씀처럼 식민 국가와 피식민국가의 관계도 있고 개인도 거기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테고 그런 복잡한 문제도 잘 그리고 있습니다. ㅎㅎ

시에나 2023-04-07 13:41   좋아요 2 | URL
(왜 이런 뒷담화에만 한마디 보태고 싶은 건지 ㅎㅎ...지나가다가..)

21세기 한국에서도 진행중인 이야기입니다. 요거.. 유학시절엔 그렇게나 동등하던 부부였는데...한국으로 귀국하면 남자가 개빻은 가부장으로 돌변하는 사례들 좀 들었어요. 한국은 가장 큰 변수가 바로 시가!! (지인들의 증언이 꽤 됩니다.;;)

잠자냥 2023-04-07 14:09   좋아요 1 | URL
ㅎㅎㅎ 시에나 님이 말씀하신 사례가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DYDADDY 2023-04-04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트랑주라는 과일에 대해 찾아봤는데 나오지 않네요. 번역의 문제인지 구글의 문제인지. ㅠㅠ
관습집단 외부에서 개인은 자유로울 수 있지만 내부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속해있는 집단에서 자발적으로 떠나고 싶어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결국 정착한 곳은 언제나 또다른 관습집단이라서 이주가 아닌 여행으로 잠깐동안의 자유를 맛만 살짝 보고 온다는 생각도 들어요.

잠자냥 2023-04-04 12:22   좋아요 1 | URL
‘citrange‘로 표기하는 것 같습니다. ㅎㅎ 저는 왠지 맛있을 거 같은데, 처음 교배했을 때보다 품종이 개량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대디 님이 말씀하신 부분때문에서라도 이주와 여행은 완전히 다른 일 같습니다.

건수하 2023-04-04 13:36   좋아요 2 | URL
https://en.wikipedia.org/wiki/Citrange ?

아 잠자냥님이 올려주셨네요 ㅎㅎ

단발머리 2023-04-04 11: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체슬러의 남편은 그렇게나 문학과 음악을 사랑하던 신사였답니다. 이런 말 어떤지 모르겠지만 ‘수준이 맞는다‘라고 생각하고 체슬러가 남편 따라 아프칸으로 들어갔죠. 그것도 유럽 여행하다가 잠깐 찍는다는 느낌으로.... 그러나 파팍!

제가 잠자냥님 추천으로 <마리 앙투아네트> 읽었고요. <프로이트를 위하여> 읽었습니다. 저도 독서계획 있는 사람이라 좀 미루고 싶은데 최근에 돌쇠 출격 사건(<악의 길>)으로 매우 뒤숭숭한데, <타인들의 나라>까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럴 수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4-04 12:24   좋아요 1 | URL
어이쿠야, 그런 신사였군요. ㅎㅎㅎㅎ 이 책의 아민도 프랑스에서는 그랬을 겁니다. 모로코에서도 나름 약간은 깨우친 남자로 나오고요?! 그러나.........
돌쇠 출격 사건을 더 궁금해하시는 것 같으니 그것부터 만나시고 이 책도 조만간....ㅎㅎㅎ

건수하 2023-04-04 13:38   좋아요 1 | URL
그러고보니 카불의 신부도 읽다 말았네요.... 언제 읽나....

망고 2023-04-04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 얼마전에 이거랑 비슷한 이야기 영화로 봤어요 ˝솔로몬의 딸˝이란 영화였는데 미국에서 살땐 다정하고 멀쩡하던 남편이 가족 데리고 자신의 나라 이란으로 가서는 돌변ㅜㅜ 폭력도 쓰고 막 으휴...그러다 미국인 여자는 딸데리고 탈출 성공한다는 내용이었어요 댓글들도 보니 이런 패턴의 이야기가 많네요ㅜㅜ

잠자냥 2023-04-04 13:09   좋아요 1 | URL
인간이 참 그러기가 쉬운 존재인가 봅니다.... 아니 많은 남자들이?? ㅎㅎㅎ
아마 여자가 기댈 곳이 없다고 생각하면 더 폭력적으로 변하는가 봐요. 에휴....

다락방 2023-04-04 13:43   좋아요 0 | URL
모로코 이란 아프간…. 이게 뭡니까!!

잠자냥 2023-04-04 14:09   좋아요 0 | URL
으음 이슬람.......
 
악의 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9
그라치아 델레다 지음, 이현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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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마님이 하인 돌쇠에게 눈독을 들인다. 일 잘하는 우직한 돌쇠를 보니 딴 생각이 자꾸 든다. 저 녀석을 키워서 냉큼 잡아먹어야겠다! 마님은 돌쇠에게만 쌀밥을 그득그득 담아주신다. 돌쇠는 영문을 모르는지 아는지 달콤한 쌀밥 맛에 조금씩 조금씩 넘어간다......... 그라치아 델레다 <악의 길>의 어떤 부분은 돌쇠에게 쌀밥을 퍼주는 마님, 기운 넘치는 돌쇠를 훔쳐보며 왠지 타는 듯한 갈증에 목말라하는 마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마님이 아니라 ‘아씨’에 가깝고, 돌쇠가 젊고 미남인 데다 야성미까지 넘친다는 것이랄까. 아,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점은 애초에 돌쇠가 먼저 아씨에게 눈독을 들인다. 아씨는 자기도 모르게 돌쇠의 매력에 조금씩 넘어가고…….

돌쇠에 속하는 인물은 ‘피에트로 베누’- 소설은 이 피에트로가 마을 선술집에서 술집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누구나 칭찬하는 잘생긴 외모와 숨길 수 없는 야망, 거침없는 태도 등 그는 한마디로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같다. 이 작품의 배경은 이탈리아 사르데냐섬의 한 마을이다. 가진 것이라곤 지나치게 잘생긴 외모와 타고난 육체적 매력뿐인 이 이탈리아 남자 피에트로는, 마을에서는 왕이라고 불리는 가장 부유한 노이나 집안에 일자리를 얻어 볼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이다. 잠깐 선술집에 들러 이 집안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던 중 그는 그 집안에 딸, 정숙함의 거울이라는 ‘마리아 노이나’가 있음을 알게 된다. 피에트로는 거칠게 비웃는다. 아무리 정숙함의 거울이라고 해도 그 나이에 사랑하는 남자는 있겠지! 술집 주인은 딱하다는 듯이 답한다. 천만에 그 콧대 높은 아가씨가 아무하고나 결혼할까!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지적을 받기는 했지만 피에트로는 노이나 집안의 하인으로 일자리를 얻는 데 성공한다. 그러면서 흘끔 쳐다본 그 여자, 정숙함의 거울이라는 그 콧대 높은 아가씨, 주인집 딸은 듣던 대로 아름답다. 사실 피에트로는 잘생긴 외모 덕에 여자들을 꼬시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이 노이나 집안과 가까운 이들 중 피에트로에게 반한 여자가 있었으니, ‘사비나’라는 젊은 처자로 이 아가씬 노이나 집안과 친척 관계이지만 집안이 가난해 신분상으로는 피에트로, 그러니까 돌쇠와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와 사비나는 비슷한 또래에 사촌이라 가깝게 지내지만 마리아는 늘 사비나의 처지- 가난함을 동정하고 안쓰럽게 생각한다.

피에트로는 일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사비나를 사랑한다. 사비나는 청순한 외모에 순박하다. 자신과 신분상의 차이도 크지 않아 언제든 원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사비나 또한 속내를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다. 아씨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집안일-주로 포도농장 일-을 돕다가 피에트로와 몇 번 부딪히면서 그가 꽤 잘생겼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녀에게 구애를 해오는 시시한 남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돌쇠는 잘생겼다. 게다가 저 육체 좀 보라지... 이글이글 작열하는 태양 아래 포도밭에서 일하는 피에트로의 땀방울을 훔쳐보노라면 자기도 모르게 와인이 땡기는 것 같다. 그러나 아씨가 어찌 감히 하인을 좋아할 수 있는가! 콧대 높고 허영심 많은 아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인 그를 경멸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이상하다 사비나의 웃음이, 피에트로를 보며 웃는 사비나의 웃음에 왠지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그리고 마리아는, 피에트로를 향한 마음을 털어놓으며 웃는 사촌 사비나의 행복해하는 모습에, 그 가난하고 보잘것없고 소박한 친척을 처음으로 질투한다. 그 잘생긴 돌쇠 때문에. 그런데 공교롭게도 돌쇠의 마음에도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잡힐 듯 말 듯 사비나는 쉽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고, 그러는 사이에 누군가가 “피에트로 베누. 마리아는 사비나를 질투해”라고 농담처럼 내뱉는데(어디나 뚜쟁이들은 있다), 이 한마디 때문에 돌쇠의 가슴에는 뜨거운 불길이 확 타오른다. 아씨, 손에 넣을 수 없는 아씨를 향한 거침없는 불길이…. 게다가 아씨는 청순하기만 한 사비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데다 도도하고 무엇보다 관능적이다! 자기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눈빛조차 돌쇠를 사로잡는다. 저 여자를 꼭 갖고 말겠어! 그는 이제 아무도, 다른 여자는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마리아, 아씨, 그녀만이 목표가 된다. 부자가 되면 그녀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그녀와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맞아요. 그래요. 당신이에요! 왜 웃는 거죠? 내가 가난한 하인이라서? 그렇다고 당신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니, 다른 남자들보다 당신을 더 사랑할 수 있어요, 마리아. 다른 남자들은 당신을 다른 목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요. 결혼하기 위해, 당신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난 만질 수 없는 뭔가를 바라보듯 당신을 바라보고 있어요.” (111쪽)


아씨 또한 자꾸만 자꾸만 속절없이 무너진다. 저 징글징글하게 잘생긴 놈, 저 야성미 넘치는 놈, 그런데 저놈이 거침없이 구애를 해온다. 이걸 어쩌지..... 아아아........ 저놈, 저 잘생긴 놈이 말까지 잘해! 저렇게 뜨겁고 달콤한 말에 마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무너진다. 아니, 한번 마음을 열어보기로 한다. 어쩌면 욕망이 속삭이는 대로, 저 잘생긴 놈을 나도 한번 가져보지 못할 게 뭐야!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편이 더 맞을 것이다. 탐욕스럽게 돌쇠를 맛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도도한 아씨인 내가 이런 저급한 하인 따위와 놀아나다니 문득문득 자기와 돌쇠를 향한 경멸감이 치솟는다. 나는 이런 놈과 맺어질 수 없어, 부모님이 알면, 마을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비웃을까! 내적 갈등에 시달리다 차곡차곡 다른 남자와 결혼할 준비를 한다. 그런 그녀 앞에 모든 걸 다 가진.......(그러나 얼굴은 못생긴) ‘프란체스코 로사나’가 나타나 구애를 한다. 그는 오래전부터 마리아를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착하고 다정다감하고 부유한 시의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못생겼다. 마리아는 프란체스코를 만나면서도 잘생긴 그놈, 돌쇠를 머리에서 지우지 못한다. 그놈은 어쩌자고 그렇게 잘생긴 것인가. 어쩌자고 그렇게 뜨겁고 야성적인가........ 아아........

부자가 되어 마리아와 결혼할 날만을 꿈꾸던 돌쇠에게 이 소식은 청천벽력이다. 그는 이를 빠드득 간다. 어차피 혼자였던 세상, 잃을 게 없다. 자기의 ‘마음속에 다시 들어와 쌓인 사랑의 감정들은 아무도 따고 싶어 하지 않는 썩은 과일처럼 느껴’(42쪽)진다. 크하 표현 봐라! 돌쇠는 꿈을 꾼다. 그러면 그는 꿈속에서 분노해서 총을 집어 들어 신랑을 쏘곤 한다. 마리아는 마리아 대로 머리를 굴린다.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큰일 날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안다. 마리아는 돌쇠를 쫓아버릴 궁리를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각한다. 그가 복수할 수도 있다고, 주인집을 중상모략하고 그들을 괴롭히고 해를 입힐 수도 있다고, 포도나무를 베어내고 소를 죽이고 곡식에 불을 지를지도 모른다고. 모욕당한 남자는 폭풍과 불길보다 무섭다고, 남자들은 얼마나 경솔하고 불같은지!(117쪽) 진저리를 친다. 아씨와 돌쇠 그리고 사비나, 프란체스코 이 네 남녀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마리아와 피에트로, 피에트로와 사비나, 사비나와 마리아, 마리아와 프란체스코…. 한때 다정했던 마음들, 너그러운 마음과 사랑의 감정들은 각자의 이기적인 욕망이 폭발하면서 저마다의 격렬한 증오로 돌변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런 순간에도 잔인한 열정에 사로잡혀 몸을 떨며 고통스러워한다. 아아아, 잘생긴 돌쇠야, 아아아, 아름다운 아씨여..... ‘사랑을 나누던 행복한 시기’에 그들을 ‘유순하게 만들었던 선한 본능은 봄이 끝나가며 나비의 날개가 떨어지듯 모두 떨어져’ 나간다. ‘죽은 나비 뒤에는 지저분하고 파괴적인 애벌레만 남을 뿐’(189쪽)이다. <악의 길>은 사랑 때문에 선해질 수 있는 마음이 바로 그 사랑, 또는 자기를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사람을 악으로 이끌어 갈 수도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아씨의 쌀밥이 마침내는 돌덩이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음을.



“약혼자가 약혼하기 전과 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 않아 잘 들어. 남자는 무기와 같아서 장전되지 않으면 무해하고 장전되면 위험하지………. 약혼자는 장전된 무기야. 건드리면 안 돼………”  (<악의 길>, 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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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3-24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어… 궁금하네요….

잠자냥 2023-03-24 14:26   좋아요 2 | URL
생각보다 재미났어서 이틀만에 후딱 읽었습니다.
사실 하루만에도 읽을 수 있었는데, 내일을 생각해! 자야 해 자야 해 하면서 끊어 읽었다는.

다락방 2023-03-24 13: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제타입이네요. 야성미에 육체 노동이 곁들여진.... 그런데 여자는 신분도 높고 고결하다.... 이것은 잘만 킹인가! ㅋㅋㅋ
저 이 책 사야겠어요. 누구도 날 막을 수 없어!!

잠자냥 2023-03-24 14:37   좋아요 1 | URL
아주 그냥 흥미진진 쫄깃합니다. 다락방님은 순삭으로 읽어치우실 듯...
그리고 이런 이야기 어찌 보면 좀 흔하잖아요? 그런데 작가가 여성이라서 좀 다르게 쓴 부분도 있었던 거 같아요.

잠자냥 2023-03-24 17:23   좋아요 2 | URL
참 이미 올라온 다른 리뷰 읽지 마세요! 결정적 스포일러 마구 발설하신 분들이 좀 있더라고요.

다락방 2023-03-24 17:33   좋아요 2 | URL
오오 엄청난 팁이네요. 감사합니다!!

책먼지 2023-03-24 15: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아 네 남녀의 운명 어떻게 되나요??? 으으.. 여기서 끊으시다니!!! 이러면 책을 살 수밖에 없잖아요!! 이 글 읽다보니 <알쓸인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했던 말 떠올라요. 어릴 때부터 나만 바라보고 나를 챙겨주는 다정한 소꿉친구, 돈 많고 잘 생겼지만 어두운 과거가 있어서 어딘지 차가운 실장님. 이렇게 상반된 두 남주가 드라마나 소설 소재로 등장하는 게 여성이 인생에서 반려자를 선택해야할 때 그게 현실이면 너무 리스크가 크니까 허구를 통해 미리 선택을 학습하는 거라는 그런 취지의 분석이었는데.. 못생겼지만 모든 걸 다 가진 그놈인가 잘생겼지만 신분이 낮은 저놈인가.. 하아.. 어렵네요, 어려워요

잠자냥 2023-03-24 17:21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제가 쓴 건 아주 일부분이오니 직접 확인하세요. 이 작품은 이탈리아 지방 한 마을의 이글이글 황량한 분위기하고도 아주 어울리게 절묘하게 쓰고 있어서 읽는 맛이 더 좋았거든요. 이미 올라온 다른 리뷰 스포일러 많더라고요. 그건 주의!!

공쟝쟝 2023-03-24 15: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앜ㅋㅋㅋㅋㅋ ㅋㅋㅋㅋ 실제로 읽어도 이렇게 저렴할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비싼척 잠자냥 ㅋㅋㅋ 독후감이 너무 저렴해요 ㅋㅋㅋ 제타입임 ㅋㅋㅋㅋㅋ
제가 아씨면 둘다 안먹습니다 ㅋㅋㅋ 비리거나 느끼하거나 ㅋㅋㅋ

잠자냥 2023-03-24 17:04   좋아요 3 | URL
아니 기본 내용은 좀 통속 저렴 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잘 썼음. 괜히 노벨상 작가가 아니지
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3-24 17:24   좋아요 2 | URL
쟝 아씨, 돌쇠가 아씨 쌀밥은 안 먹는답니다, 페미 아씨 쌀밥 독약 들어 있을 거 같다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3-24 17:41   좋아요 1 | URL
나 향단이라서 밥을 잘해.. 가마솥에 누룽지 박박 긁어서 숭늉도 잘 만들어서 주저 앉힌 돌 쇠가 …. 근데 몸 좋은 돌쇠는 … 아직…

잠자냥 2023-03-24 17:47   좋아요 0 | URL
아 쟝 아씨는 ㅅㅅ 안 하시고 연구만 하신다고 돌쇠가 그거도 저어된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3-24 17:49   좋아요 1 | URL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구나. 김을 참치회에 싸먹도록 하여라. 소주는 조금만 붓도록 ㅋㅋㅋㅋ
(연어 잘못 먹으면 비리고 느끼한테 참지 혼자 먹긴 좀 그렇고 고민되네 저녁 메뉴 ㅋㅋㅋ)

moonnight 2023-03-24 15: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앜!! 잠자냥님ㅠㅠ;;;; 궁금해요 궁금해ㅠㅠ;;;; 그런 선택이 필요없는 재미없는 인생이라 다행이구먼요@_@;;;;;;

잠자냥 2023-03-24 17:04   좋아요 2 | URL
꼭 읽어보세요! 넘나 재밌어요!

독서괭 2023-03-24 17: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악의 길>이라는 제목 보고는 구매를 망설이던 독자가 잠자냥의 리뷰 제목 보고 구매를 결정합니다 ㅋㅋㅋ 주말 뉴스레터에 꼭 들어가야 합니다 ㅋㅋㅋ 줄거리는 많이 본 듯한 흐름인데 자냥님 리뷰가 아주 찰지네요. 아씨의 쌀밥이 돌덩이가 ㅋㅋㅋㅋ
다락방님 바로 주문해서 하루만에 홀딱 읽으실듯요 ㅋ

잠자냥 2023-03-24 18:00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 때로는 저렴한 리뷰가 구매욕을 당깁니다!

책읽는나무 2023-03-24 2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 분위기를 이런 버전으로?ㅋㅋㅋ
근데 마지막 문장!
약혼자는 장전된 무기야. 건드리면 안 돼!
왜 갑자기 컬리의 초인종 소리가 울리는 것 같죠?ㅋㅋㅋㅋ 유부남도 건드리면 안 됑띵똥띵똥!!!
책은 이미 보관함에 퐁당했지요!

잠자냥 2023-03-25 01:31   좋아요 2 | URL
컬리의 초인종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그래서 요즘 어쩐지 컬리 안 시키고 싶더라니…. 다락방 님 오늘은 방해받지 말아야 할 텐데…..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03-25 18: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너무너무 읽고 싶어요, 이 책 ㅋㅋㅋㅋㅋㅋㅋ 읽고 나서 리뷰는 안 쓸거에요. 페이퍼도, 100자평도 안 쓸거에요.
몰래 혼자만 읽을 거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는 잠자냥님 같은 대인배가 아니거든요. 이런 재미있는 책은 무조건 혼자 봐야 제 맛.

잠자냥 2023-03-25 21:09   좋아요 2 | URL
꼭 혼자 읽으시고 말하지 마세요! 특히 가족분들한테! ㅋㅋㅋㅋㅋㅋㅋ

은성 2023-07-26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리뷰 필력이 엄청 나네요ㅋㅋㅋ 책 소개글보다 리뷰 보고서 책이 더 사고 싶어졌습니다

잠자냥 2023-08-02 14:5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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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살이었다. 내가 처음 전철을 혼자 탄 그때는.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였다.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놀다가 문득, “너 나 잡는 척 해봐”하고는 학교 정문 쪽으로 냅다 달렸다. 내가 그대로 정문을 나가버리자 뒤쫓던 친구는 놀라 당황해서 소리쳤다. “야, 너 선생님한테 혼나!”- 무슨 생각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길로 지하철역으로 가 전철에 몸을 실었다. 한 정거장, 두 정거장, 세 정거장… 도시 외곽에서 도심으로 갈수록 내 심장도 더 빠르게 뛰었다. 내 생애 최초의 탈선이자 비행은 그렇게 서울의 도심으로 향하는 전철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뉴욕의 비비언 고닉도 열네 살에 처음 지하철을 탔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쭉 이 도시에 살고 있는 나처럼 그녀 또한 늘 뉴욕에서 살았으면서도 마치 큰 도시에 가보는 게 소원인 소도시의 주민처럼 꽤 긴 시간 동안 뉴욕을 그리워한다. 고닉에게 그녀가 자란 브롱크스는 시골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살던 그 동네도 그랬다. 사춘기에 접어든 고닉이 그 무렵부터 세상엔 중심이라는 것이 있고, 자신은 그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듯이, 그 중심지는 지하철 한 번 타면 갈 수 있는 맨해튼 시내라는 것도 알았듯이 나도 그즈음에 그랬던 것 같다.

고닉은 열네 살 그때 단 한 번의 출발로 맨해튼에 도착했을까? 나는 그렇지는 못했다. 어느 순간 덜컥 겁이 났고 학교가 끝나기 전에는 가방을 챙기러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전철이 시내 중심지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되돌아왔다. 서울의 행정구역상 중심이라면 중구 또는 종로라고 해야 할까? 그곳에 마침내 나 홀로 또는 친구와 함께 발을 디딘 것은 열여섯, 열일곱 그 무렵이다. 호암아트홀에서 보던 전시를 비롯해 그 중심지에 가면 엄청나게 많은 서점과 책이 있었고 수많은 영화관과 동네에선 보기 어려운 다양한 영화가 있었다. “나는 그 도시를 수시로 드나들면서도 늘 안락함과 안도감, 단조로움과 게으름을 맛볼 수 있는 집에 수시로 들락거리며 언젠가 만날 절호의 기회를 호시탐탐”(15쪽) 노렸다. 고닉과 나는 뉴욕과 서울,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무척이나 다른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또 흡사한 그 대도시에서 그렇게 자란다. <짝 없는 여자와 도시>는 이렇게 여기 너머 어딘가에 더 중심이라고 부르는 곳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호기심을 싹 틔웠던 열네 살의 추억을 일깨운다.

서울, 이 도시는 나의 이력이다. 태어난 곳, 학교와 직장을 따라 옮겨 다니고 집을 여기저기로 이사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또 누군가와 함께 있었느냐에 따라 이 도시의 기억도, 동네, 동네에 얽힌 기억도 달라진다. 그러나 서울은 늘 나와 함께였다. 이 빌딩숲, 이 많은 인파, 이 혼잡함과 화려함이, 소란스러움이 문득문득 피곤해 잠시 떠나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지만 산이나 바다, 강, 호수, 자연이 우거진 곳에 가서도 나는 어느 순간 도시의 편안함을 찾는다. 낯선 나라에 가서도 이 도시에서 익숙해진 장소들- 예컨대 스타벅스 같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균일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에 이르러야 비로소 안도감을 느낀다. 고닉이 한때 연애했던 극작가, 알코올의존증 전력이 있고, 도시를 떠나는 데 공포증이 있었다는 그 남자처럼 나 또한 도시를 떠나는 것에 일종의 두려움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와의 연애사를 언급한 고닉 또한 그의 도시를 향한 집착을 누구보다 이해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도시에는 우정이 있다. 고닉의 레너드처럼 나에게도 ‘어떤 상황에서든  영원히 컵에 물이 반밖에 없다고 느끼는’(8쪽) 염세를 주고받으며 자주 만나기보다는 가끔 만나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다 헤어지고 그 대화의 내용도 대부분은 ‘상실, 실패, 패배를 그가 드러내든 내가 드러내든 꼭 한 명은 그러고’(8쪽) 있는 그런 몇몇 친구들이 있다. 그 친구들과 나의 우정은 고닉과 레너드의 그것처럼 서로에게 활기를 불어넣기보다는 다른 하나가 활기가 있어야만 같이 있을 수 있는 관계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함께할 자리를 미리 마련’해 두기보다는 ‘일정 중에 빈자릴 찾는다’(43쪽). 이런 느슨한 관계가 문제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고 고닉은 말한다. 그것은 모두 기질 문제라고. 그리고 이 기질적으로 맞는 우리, 나와 내 친구들은 이 도시에서 느슨한 우정으로 얽혀서 저마다의 시간을, 하루를 보낸다.

이 우정은 서울, 이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나처럼 애초부터 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도 있지만 서울이 아닌 곳에서 태어나 성인이 되어 이곳에 자리를 잡았고 그러다 보니 우정을 나누게 된 친구도 있다. 그리하여 이 도시는 또 다른 우정의 가능성도 늘 열어둔다.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그 우정, 그 느슨한 관계들 속에서는 벌써 몇 번쯤인가는 서로 같은 장소에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같은 강연을 들으면서 스치듯 지나쳤을 인연도 있으리라. 때로는 도시가 주는 익명의 안온함 속에 숨어서 오늘은 그저 수줍게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지만 언제나 다른 날에는 문득 그 앞에 서서 “안녕!”하며 알은체를 하게 될 수도 있으리라. ‘각자의 인생이라는 영토를 힘겹게 횡단하다 국경이 맞닿는 곳에서 이따금 만나 서로에게 정찰기록을 건네는 고독한 두 여행자’(59쪽)들처럼 말이다. 뉴욕이든 서울이든 도시는 그런 느슨하고 유연한 관계를 가능케 한다.

물론 사랑도 있다. 우연히 만난 사이와 헐겁지만 다정한 우정을 나눌 수도 있고, 또 우연히 만난 누군가와 그 무엇에 비할 바 없는 뜨거운 애정을 나눌 수도 있는 곳, 도시. 걷는다, 본다, 느낀다, 생각한다, 쓴다, 만난다, 이야기한다. 웃는다, 사랑한다. 헤어진다, 걷는다. 산다…. 도시에는 비록 외로울지언정 자유가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자유, 혼자 거리를 거닐 수 있는 자유, 그러다가 문득 우연히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자유. 곁에 누군가가 없어도, 그러니까 짝이 없는 여자가 혼자 이 거리 저 거리 거닐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곳은 이런 대도시뿐이 아닐까. 그리고 그 고독과 자유에서는 시선이 탄생한다. 고닉은 바로 그 지점에서 뉴욕 곳곳을 발견하고 그 도시와 사랑에 빠진다.

번잡한 도시는 인간관계에 단절을 불러일으킨다고, 그래서 현대인은 고독하고 외롭다고 말하지만 바로 그 외로움과 고독 속에 엄청난 자유가 있음을 도시를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가 안다. 때문에 비록 ‘외로움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지만 불가해하게도 우리는 그 외로움을 포기하길 망설인다.’(105쪽) 기꺼이…. 고닉의 친구 레너드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외로움을 쓸모 있는 고독으로 바꿔내지 않는 이상  그녀는 영영 엄마의 딸일 거라고-레너드의 이 말에는 무심한 척하면서도 친구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담겨 있다. 엄마를 향한 ‘사나운 애착’의 시기를 지나  뉴욕 거리 곳곳을 거닐고 거기에서 만난 다양한 이들과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고 그 안에서 느슨하게 거리를 두고 혼자 있는 법, 외로움 속에 자기 존재를 발견한 비비언 고닉, 자신과의 대화를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던 그녀는 결국 이런 빛나는 글들로 전 세계의 독자를 만나고 있는 게 아닐까. 누구나 말을 건넬 수 있지만 또 누구나 금방 무심히 돌아설 수 있는 도시. 느슨한 관계에서 느껴지는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자유라는 기질을 갖춘 도시- 전 세계의 도시들은 대부분 이런 사람들이 빚어낸 무수히 많은 목소리가 층층이 쌓아 깃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풍성한 에너지가 오늘을 살아가게 한다. 나도 그리고 또 도시의 삶을 사랑하는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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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3-09 16: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휴 읽는데 리뷰 분위기가 너무 좋네요. 마지막 단락에서는 영화처럼 눈 앞에 군중속에서 고독함을 느끼는 누군가가 보이는 것도 같아요. 수많은 사람들속에서 고독한 한 사람, 그러나 그게 싫지 않은... 그건 접니다..

잠자냥 2023-03-09 16:32   좋아요 1 | URL
저기 사실 다부장님 이야기도 있어요. 눈치챘는가? ㅋㅋㅋㅋ 근데 글에 다부장, 다락방 언급하니까 갑자기 코미디가 되어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3-09 16:38   좋아요 3 | URL
‘우연히 만난 누군가와 그 무엇에 비할 바 없는 뜨거운 애정을 나눌 수도 있는 ‘

여기 제얘기 아니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막 이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3-09 16:39   좋아요 4 | URL
아니 너 은오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3-09 16:47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이름만 언급해도 코미디가 되는건 큰일이네요. 원래대로 지적이고 냉철한 카리스마 다락방으로 돌아와야겠어요. 말리지마세요. 흥!!

거리의화가 2023-03-09 16: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지금보다 나이가 들고 이제 더는 이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시골 내려가는 건 어때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저는 단호하게 ˝NO˝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도시 속의 개인은 지극히 외로운 존재이지만 그럼으로서 자유롭기도 하단 이야기에서 공감이 가네요~^^

잠자냥 2023-03-09 16:48   좋아요 3 | URL
네 저도 지치고 스트레스 극강으로 받았을 땐 애인하고 저어기 다른 지역 가서 사는 건 어떨가 생각해보는데요, 예를 들면 제주도 같은......... 근데 결국 아아, 우린 안 될 거 같다로 결론내립니다.ㅎㅎㅎ 그러기엔 도시를 너무 사랑함;;

책먼지 2023-03-09 16: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닉 에세이 세 권 중에 이번 책이 가장 잘 안 읽히는데.. 고닉 읽어주는 자냥님 글은 너무 잘 읽히네요!! 대도시만의 그 역학 때문에 굳이 여기 있을 필요가 없을 때도 여기를 못 떠나는 것 같아요ㅠㅠ

잠자냥 2023-03-09 16:59   좋아요 4 | URL
이번 에세이가 흐름없이 뚝뚝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왔다 갔다 해서 그런 거 같아요!
고닉 읽어주는 자냥 올림. ㅋㅋㅋㅋㅋㅋㅋ

책먼지 2023-03-09 17:1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조만간 다락방님 댁에도 고급스런 별칭 하나 놔드려야겠어요!! 이대론 안 된다!!!

잠자냥 2023-03-09 17:20   좋아요 3 | URL
그건 무리다….. 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3-09 18: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짝 없는 여자와 도시 오늘 받았는데 이미 읽은 듯한 이 느낌…

저는 제 얘기는 별로 안 쓰고 싶은데 그러면서 이 책들 리뷰를 쓰긴 어렵겠어요
(슬슬 포기하는 마음)

잠자냥 2023-03-09 23:06   좋아요 2 | URL
그래서 책 다 읽기 전에는 리뷰 읽기 금지!

단발머리 2023-03-09 18:4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서울에서 나서 서울에서 자랐고 서울의 번잡함과 자유로움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 글을 좋아합니다^^

건수하 2023-03-09 22:06   좋아요 1 | URL
저도 찌찌뽕!

잠자냥 2023-03-09 23:07   좋아요 1 | URL
네, 그런 사람은 이 책 좋아할 거예요.

책읽는나무 2023-03-09 21: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차도녀들이 공감할만한 리뷰네요ㅋㅋㅋ
시골에서 나고 자란 책나무는 대도시도, 시골도 어디든 다 외로운 곳이란 생각이 들어 어디서 살래? 물어본다면 실로 난감합니다.
저는 그저 조용한 곳에서 잠 자고, 멍 때리다가, 가끔 심심하면 도시에 가서 먹고, 보고, 놀고만 오고 싶은 놀도녀(놀기만 하는 도시 여자!)가 되고 싶네요.
근데도 자냥님 리뷰를 읽으면 왠지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은 맘이 들기도 합니다.
짝이 없는 여자가 혼자 거니는 건 아무래도 도시에서만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시골에서 혼자 걸으면 동네 사람들 다 쳐다보면서 저 처자 왜 자꾸 돌아다닌대? 할테니까요ㅋㅋㅋ
시골엔 익명이 없어요ㅜㅜ
그리고 대도시엔 똠양꿍이 있으니까~^^

잠자냥 2023-03-09 23:08   좋아요 2 | URL
ㅎㅎ 네 말씀하신 것처럼 시골(?) 같은 데서는 아마 여자 혼자 있으면 온갖 관심과 구설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ㅎㅎㅎㅎㅎ 혼자 있어도 괜찮은 도시, 라는 건 참 편리하다 싶어요.

자목련 2023-03-10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나운 애착 끝내고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어요. 우선은 좋아요!!!

잠자냥 2023-03-10 09:39   좋아요 0 | URL
사나운 애착에서의 어머니 여기서도 등장하십니다. ㅎㅎ 재미나게 읽으세요.

독서괭 2023-03-10 09: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쉽게 만남을 허락치 않는 차갑고 고독한 도시여자!! 하지만 집에는 고양이 6마리로 고독과 자유를 느낄 새가 없는데… ㅋㅋㅋ
도시에서 느끼는 자유 공감합니다. 아예 시골은 안 될 것 같고 저는 중소도시 정도는 좋더라구요.

잠자냥 2023-03-10 09:40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ㅋㅋ 집에서는 고독할 틈이 없기는 해요. 오늘 아침도 문 열고 나가니 6호가 그릉그릉 ㅋㅋㅋ

그레이스 2023-03-10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리뷰쓰기 전이라 그냥 잠자냥님 쓰셨구나 하고 지나갑니다.
좋아요만!

잠자냥 2023-03-10 10:18   좋아요 2 | URL
ㅎㅎ 저도 제가 리뷰 쓰려는 책의 다른 분 리뷰는 글을 다 쓰기 전에는 읽지 않습니다. 현명하신 판단!

공쟝쟝 2023-03-10 16: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앙콤한 프랑스고양이!!! 뉴요커인척 하지만 빠리지앵인거 나 다알아요~~~
내가 이런다고 이 책을 살 것 같으냐!!!!!!!!!!!!!!!!!!!!!!!!!!!!!!!!!!!!!!!!!!!!!!!!!!!!!!!!!!!!!!!!!!!!!!!!!!!!!!!!!!!!!!!!!!!!!!!!!!!!!!!!!
!!!!!!!!!!!!!!!!!!!!!!!!!!!!!!!!!!!!!!!!!!!!!!!!!!!!!!!!!!!!!!!!!!!!!!!!!!!!!!!!!!!!!!!!!!!!!!!!!!!!!!!!!!!!!!!!!!!!!!!!!!!!!!!!!!!!!!!!!!!!!!!!!!!!!!!!!!!!!!!!!!!!!
외로움. 고독. 걷기. 짝 없음. 여자. 이거 다 내 이야기라서~~~ 비비언 고닉 읽으면 동일시 너무 심해버려서~~~~
당분간은 안삽니다 안사요 흥흥흥흥흥

근데 이 문장 너무 좋아요.
때문에 비록 ‘외로움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지만 불가해하게도 우리는 그 외로움을 포기하길 망설인다.’(105쪽) 기꺼이….
내가 비비언 고닉 변태인거 알아봤는 데, 이 문장에서 변태 공명함. ㅋㅋㅋㅋ 외로움을 포기할 수 없음. 고통스러운뎈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3-10 19:47   좋아요 1 | URL
나 파리지앵은커녕 ㅋㅋㅋㅋㅋㅋ ㅇㅇ지앵(울 동네이름) ㅋㅋㅋㅋㅋㅋ 고닉쟝아 사서 봐봐 ㅋㅋㅋㅋ

공쟝쟝 2023-03-11 10:36   좋아요 0 | URL
하아 앙대…. 어제 위기였음 …

자목련 2023-03-14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결같이 좋은 리뷰!!
열네 살의 탈선, 열 여섯, 일곱에 호암아트홀이라니요. 저는 감히 상상도 못한 일상입니다.
자냥 님의 서울과 고닉의 뉴욕은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자쟝 님 곁에 집사 2 님이 계신 건 빼고요.
서울에서 사는 분들,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잠자냥 2023-03-14 10:35   좋아요 0 | URL
전철이라는 교통수단이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이제 10대인 제 조카들도 그래서 그렇게 잘 돌아다니는 거 같고... ㅎㅎ
그나저나! 정말 자목련 님 말씀처럼 집사2만 없었으면 ㅋㅋㅋㅋㅋㅋㅋ 고닉의 저 에세이에 더 빙의했을 텐데 조금 아쉽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흰옷을 입은 여인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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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에, 방 안 내 침대 위에 누워 있을 때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기분이 들지만 그럼에도 나는 거의 매일 같이 외출을 한다. 해야 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일주일간 집 안에서 격리할 때도 크게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어떤 점에서는 오히려 좋기도 했다. 그럼에도 가끔은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좀 걷고 싶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집 안에서만 지낼 수 있는 최대한의 기간은 어느 정도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무리 타인과의 접촉을 꺼려하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어느 순간 밖으로 나오고 싶을 때가, 다른 누군가와 소통을 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에밀리 디킨슨은 그런 면에서 지존이라고나 해야 할까. 55년의 생, 아주 짧지도 그렇다고 또 아주 길지도 않은 그 생애 동안 그녀는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집 밖을, 아니 어떤 특정한 시기에는 아예 자기 방 밖을 나가지 않았다. 밀리센트라는 이름의, 에밀리에겐 조카뻘이 되는 한 소녀의 눈에 은둔자 에밀리는 이렇게 묘사된다. “어린 소녀의 기억 속 에밀리는 집 밖으로 전혀 외출하지 않는, 붉은 머리에 흰옷을 입은 신비로운 여인이다. 때때로 이층 자신의 방, 반쯤 열린 덧문 사이로 버들과 주리를 줄에 매달아 내려뜨리곤 하던 여인. 이웃집 아이에게 주려고 화덕에서 갓 꺼낸, 따뜻한 생강 빵이 담긴 광주리다.”(<흰옷을 입은 여인>, 12쪽) 무엇이 그토록 그녀, 에밀리 디킨슨을 방 밖으로, 집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녀는 그다지 외롭지 않아 보인다. 늘 자기 영혼을 마주하고 시(詩)를 써내려가기 때문이다. 비록 그 시가 자신의 서랍 안에서 고이 잠들게 될지라도 그녀는 쓰고 또 쓴다.

에밀리 디킨슨, 그 영혼의 기록을 내가 처음 접했던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쩐지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알아서 ‘세계의 명시(名詩) 100선’ 같은 두꺼운 시집에서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처음 접했다. 그 시는 너무나도 유명한, “내가 만약 한 애타는 마음을 멈출 수 있다면/ 나는 헛되이 사는 것이 아니리....”라는 구절의 ‘내가 만약 If I can’이라는 시였다. 어린 마음에 보기에 아름답기는 하지만 너무 소녀 감성이라 유치하단 생각과 함께 딱히 좋아하지는 않던 시였다. 그러나 그 시에 그토록 많은 의미가 있을 줄, 그 어린 날의 내가 어찌 알았으랴. 하긴 지금도 에밀리 디킨스의 시 구절구절 담긴 그 생각의 파편들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그럼에도 ‘내가 만약 한 생명의 아픔을 덜고/한 괴로움을 달래주고/기진맥진해서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를/다시 둥지에 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나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라는 시구에서 어렴풋이나마 그녀의 고독했던 삶을, 창공을 날아가기엔 너무나도 기진맥진해서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 다시 둥지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던 그 울새 한 마리가 그녀 자신의 영혼이었음을, 에밀리와 마찬가지로 유폐된 생활, 고독자의 생활, 은둔자의 생활을 기꺼이 찾아나선 보뱅의 <흰옷을 입은 여인>을 읽고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흰옷을 입은 여인>에서는 두 은둔자이자, 두 아름다운 시인을 만날 수 있다. ‘흰옷을 입은’ 에밀리 디킨슨 그녀와 이 에밀리를 흠모하여 기꺼이 그녀의 일생을 좇아 기록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독특한 한 편의 시이자 전기이자 에세이를 쓴 크리스티앙 보뱅 그가 바로 주인공이다. 어떤 문장은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서 따오기도 했지만 그 문장을 전하는 보뱅의 또 다른 문장과 한데 어우러져 저 기진맥진해서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조차 그 아름다움에 반하여 날아갈 힘을 얻어 둥지로 무사히 돌아오게 할 정도이다.

보뱅은 에밀리의 어떤 점에 사로잡혔을까. 물론 그녀의 시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가 탄생하게 된 그녀의 삶의 방식, 어느 순간에는 은둔을 자처한 그 맑고 깨끗한, 상처받기 쉬운 영혼에 사로잡혔던 것은 아닐까. 보뱅의 글을 통해 발견한 에밀리의 영혼은 애초부터 상처받기 쉬웠다. 그녀의 부모- 그들은 서로 너무도 다른 사람이라, 아버지의 세상은 돈과 명예, 소음, 계산으로 이루어진 세계였고, 사랑하는 존재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일찌감치 마음에 심각한 결함이 생긴 어머니는 ‘죽음들로 얼룩진 태양 아래’ 딸, 에밀리를 낳는다. 출산을 앞둔 에밀리의 어머니는 방 벽지를 갈면서 방에 생기를 부여하고자 애쓰지만 그것만으론 갓 태어난 딸에게 활짝 열린 삶을 부여하지 못한다. 보뱅은 이 순간 에밀리의 탄생을 이렇게 말한다. “망령들이 에밀리의 요람 위로 몸을 숙이고, 자신들의 말을 받아 적게 될 아이를 바라본다. 부재와 존재 사이에 가로놓인 벽, 그 방심의 벽을 통과하는 빛나는 감수성이 이미 아이에게서 전해져 온다.”(39쪽)  

숫자와 명예로 이루어진 자신의 세계를 넓히고 구축하기 위해 바쁜 아버지와 마음이 병들어 침묵하는 어머니 그 사이에서 소녀는 ‘주변 사람들이 저마다 야심을 드러내며 무언가가 되고 싶어 할 때 그 무엇도 되지 않고 이름 없이 죽겠다는 당당한 꿈을 꾼다. 겸손이 그녀의 오만이며, 소멸이 그녀의 승리이다.’(33쪽)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의 목록을 남몰래 적어나간다. 시, 태양, 여름, 천국…. 그것들이 전부이다. 그러나 에밀리에게는 “첫 번째 단어로 족하다. 시인은 태양보다 더 순전한 태양을 낳으며, 그들의 여름은 영원히 기울지 않고, 천국은 그들에 의해 그려질 때만 아름다우니까.”(56쪽)

있으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어머니의 부재. 그리고 또한 마찬가지의 의미로 있으나 없는 것과 같은 아버지라는 존재. 그러한 “결핍은 세상의 벽에 뚫린 구멍”이며 에밀리에게 “글쓰기는 그에 대한 응답이다.”(104쪽) 그중에서도 “시는 글쓰기의 한 양식이기 이전에 그녀의 삶에 방향을 제시”(60쪽) 한다. 그러는 중에도 몇몇 사랑이, 그 뜨거운 열정이 에밀리의 가슴속에 찾아왔다가 덧없이 사라져가고 그 응답받지 못하는, 또는 어느 순간 어긋나 소멸하고 마는 마음은 또 다른 시를 낳는다. 그럼에도 에밀리의 머리엔 “살아생전 천재의 면류관이 씌워지지 않는다. 그녀의 글들은 모두 그녀의 가시 면류관과 함께 머리맡 탁자 서랍 깊숙이 묻혀”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에밀리가 만일 사랑했던 대상 그 누구에게라도 그녀 마음의 크기만큼의 응답을 받았더라면 그토록 고독하게 자신을 유폐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뱅이 기록한 그녀의 생을 좇다보면 결국 에밀리 그녀는 ‘천진하지 못한 삶’에 대한 탐욕스러운 취향을 접어두고 그녀 시의 제목들처럼 고독은 감히 그 깊이를 잴 수 없을지언정(The Loneliness One Dare Not Sound), 그녀 스스로 자기 영혼이 머물 곳을 선택하여(The Soul Selects Her Own Society) 하얗고 안전한 방 안에(Safe in Their Alabaster Chambers) 머물기를 선택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그 고독의, 은둔의 기쁨을 아는 보뱅이었기에 에밀리에게 기꺼이 이 아름다운 헌사의 글을 남겼으리라. 고독의 기쁨, 거기서 나오는 ‘명상의 빛나는 모티브’를 발견할 줄 아는 이 두 시인들, 그들은 분명, 천국을, “불안을 달래 줄 무언가가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는 장소”(84쪽)인 그 천국을 발견한 사람들이리라. 그리고 하느님은 이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 그래서 늘 이 세상살이에 패하기 마련인 그들을, “그런 그들을 총애해서, 침으로 얼룩진 그 얼굴을”(134~135쪽) 기꺼이 닦아 주실 것이다. 에밀리 디킨슨과 보뱅의 글을 읽고 공명할 또 다른 고독한 당신의 얼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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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 2023-02-27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윌키 콜린스 책인 줄 알았는데 궁금해졌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리뷰라뇨.
읽고 싶어지네요.

잠자냥 2023-02-27 10:06   좋아요 1 | URL
네 공교롭게도 윌키 콜린스 작품과 제목이 똑같네요. ㅎㅎ
그러나 아마도 그 느낌은 많이 다르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보뱅의 본 작품은 더 아름다우니 꼭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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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일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9
기 드 모파상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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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유치원에서 소풍을 간 적이 있다. 거창한 소풍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치원 근처 동네에 있던 ‘밤나무골’이라는 이름의, 그 시절 흔하디흔한 밤나무가 많던 숲으로 그냥 하루 야외 학습을 간 것이다. 그래도 소풍은 소풍이었다. 어린 마음에 소풍이라는 말은 늘 설레지 않은가. 소풍이니까 집에서는 당연히 김밥을 싸 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소풍날, 점심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신이 나 도시락을 열었다. 당연히 다들 김밥이 담긴 도시락이었다. 아마 나도 들떠서 도시락을 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 도시락엔 그냥 맨밥과 총각무김치가 담겨 있을 뿐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당황스러웠다. 이게 뭐지? 하는 심정. 어쩐지 창피하기도 했다. 가난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거 같아 싫었다. 엄마가 미웠던 것 같기도 하다. 우습게도 그때 그 장면을 찍은 사진 한 장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유치원에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남기고 싶었으리라. 사진 속에서도 내 도시락은 총각무와 밥뿐이다. 그 사진 속에서 난 다른 아이의 도시락을 힐끗 쳐다보고 있다. 뭔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저 총각무만 덜렁 들어 있던 도시락. 그 도시락 같다고… 인생이….

엄마는 무슨 무대뽀로 그런 도시락을 싸준 거야? 아니, 대여섯 살밖에 안 된 애가 소풍을 가는데 그렇게 성의 없는 도시락을 싸준 건 진짜 심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선명하지 않은 나인데도 이날의 기억만큼은 너무나 강렬했는지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날은 엄마에게 따지듯 묻기도 했다. 나는 아이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라 그런 엄마의 심정을 헤아릴 수도 없고 대충 고양이 여섯을 돌보는 심정으로 유추해보아도 그날의 엄마처럼 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막내가 고양이 유치원에서 소풍을 가, 잔뜩 들떴어! 집사가 도시락에 맛난 캔하고 츄르하고 과자(아니 6호가 좋아하는 보족세트)를  잔뜩 넣어줬으리라 기대했는데 도시락을 열었더니 건사료만 덜렁 들어있다고 생각해 보라. 하, 나는 그때 6호 표정이 그려져서 도저히 못 그럴 거 같다.

“엄마가 그땐 사는 게 너무 힘이 들어서…. 너네 아빠하고 사이도 안 좋고 정신이 없어서 그랬지…. 얼마나 정신이 없었냐면 내가 너 소풍 따라간 날 쓰레빠를 신고 갔더라.”


엄마는 총각무 도시락을 싸준 소풍날과 다른 소풍날을 같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다른 날인데, 여튼 그랬다. 엄마와 내가 나란히 찍은 사진을 보면 우리 엄마는 분명히 쓰레빠를 신고 있다. 소풍날 총각무나 쓰레빠나 그게 그거다. 엄마는 미안하고 머쓱해하면서도 미안하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하긴 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는가 어쩌면 엄마는 자기 인생한테 미안해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런 남자를 왜 만났느냐고.....엄마 인생 최대 실수다.”
“그럼 너네가 없었잖아....”
“아유, 됐어.



“아아, 내겐 운이 없었어. 뭐 하나 되는 일이 없었어. 운명이 일생 동안 악착같이 괴롭혔지.”
그러나 로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마님, 그런 말씀 마시라고요. 마님은 결혼을 잘못하셨어요. 그뿐이죠. 구혼자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그렇게 혼인하는 게 아닌데요.” 모파상, <여자의 일생>, 302쪽


“그런 말씀 마세요. 마님, 그런 말씀 마시라고요. 마님은 결혼을 잘못하셨어요. 그뿐이죠.” 엄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여자의 일생>- 오래전 엄마의 책꽂이에 꽂혀있던 전집, 새로쓰기로 된 그 전집 중에서 보았던 제목의 책이다. 엄마는 소싯적 그 책을 읽었을까? 읽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주인공 잔느의 인생에 얼마나 자기 자신을 대입하면서 읽었을까? 잔느도, 나의 엄마도 운이 없었던 게 아니다. 운명이 일생 동안 악착같이 괴롭혔던 것도 아니다. 단지 그저 아주 신중했어야 할 순간, 결혼하는 그 순간 잘못된 남자를 선택한 그 잘못 때문에 인생이, 소풍날의 김밥 도시락 대신 총각무 도시락이 되고 만 것이다.

그 시절 엄마의 책꽂이에서 이 책을 꺼내 읽었던가? <여자의 일생>이라는 제목, 상투적인 내용이 딱히 와 닿지는 않아서 조금 읽다가 내려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문득 읽고 싶어진 이 책- 어떤 인생(Une Vie) 그대로 번역했어도 좋았겠으나 ‘여자의 일생’이라 옮긴 그 제목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는 듯하다. 잔느, 그 꿈 많던 소녀의 망가져가는 일생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담담히 그려지기 때문이다.

잔느의 인생도 처음부터 총각무 도시락 같지는 않았다. 부유한 집안에서 외동딸로 태어났고 부모님의 사랑을 담뿍 받았으며 잘생긴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꿈도 꾸었고 바로 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기도 한다. 하, 그러나 그 결혼은 서로 잘 알지도 못한 채 이루어진 결합이었으니, 설레던 소풍날, 도시락 뚜껑 열었더니 총각무만 덜렁 들어있던 바로 그 순간이 이윽고 잔느를 덮친다. 사랑하는 사이에 이뤄지는 결합이니 당연히 좋아야하는데 이게 무슨 곳통이란 말인가. 짐승같이 덤벼드는 저 남자! 그놈에게 몸을 내주고 밀려드는 것은 환멸, 환멸뿐이다. 그런데도 제 욕심만 채우고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잠든 저 동물 같은 남자가 내 남편이라니! 싫다는데도 그놈은 계속 육욕만 채우려 덤빈다. 하, 엄빠에게로 나 돌아갈래! 계속 그렇게 산다면 인생이 얼마나 엿 같으랴. 그래도 다행이랄까 간혹 좋은 순간도 찾아온다. 맛없는 총각무 도시락 낼름 먹어치우고 보물찾기 놀이를 하던 그 순간처럼 잔느에게도 생의 희열과 기쁨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그러니까 거듭된 섹스 끝에 마침내 찾아온 오르가슴의 기쁨 뭐 이런 것이랄까. 그런데 잔느는 몰랐을 것이다. 잔느여, 그건 다른 놈에게서도 아니 다른 놈한테서 더 잘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그런 종류의 하찮은 기쁨이란다.

잔느, 그녀에게 얄팍한 오르가슴과 함께 얄팍한 사랑의 기쁨을 선사했던 그놈 쥘리앵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언제 내가 너의 육체를 탐했냐는 듯이 흥미가 짜게 식어 아내로부터 멀어져간다. 당연히 그럴 것이, 그에겐 이미 다른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번 그런 놈은 지 버릇 남 주는 일 없듯이 잔느와의 결혼 생활 내내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판다. 어디 그뿐이랴, 인색하기 비할 데 없는 구두쇠라 내 돈은 내 돈 아내 돈도 내 돈, 처가 돈도 내 돈- 후안무치가 따로 없다. 이런 남편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잔느에게는 어느덧 남편을 생각할 때면 환멸과 경멸이라는 감정만이 자리하고, 남편에게 가야 할 애정은 하나뿐인 자식, 아들 폴에게로 향한다. 그런데 또 이 여자 잔느는 어리석었으니 이 주체할 길 없는 애정 또는 집착은 아들 폴을 그릇된 길로 이끌고 이 아들은 지 애비와 마찬가지로 잔느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잔느는 환멸과 고통, 비애만 남은 삶 속에서도 내일은 좀 다르리라, 내일은 아들이 좀 달라지리라 기대하면서 삶을 향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것도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닙니다.” 잔느의 마지막 말에서 어차피 죽음으로 향하는 인생, 그럼에도 내일은 조금 다르리라는 희망을, 소풍날의 김밥 도시락을 꿈꾸던 어린 아이의 심정으로 기대하며 살아가는 이 어리석은 인간들, 그들 모두의 비루한 삶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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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2-08 14: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뭔가 엄청난 스트레스의 기운이 감도네요. 저도 가끔 엄마에게 그러게 왜 아빠랑 결혼했어! 하는데, 그러면 엄마가 잠자냥님 어머님처럼 ˝그래서 너네가 있잖아˝ 라고 하십니다. 그게 위안이 정말 되는건지 잘 모르겠어요. 하여간 어제도 엄마에게 그랬습니다. 왜 아빠랑 결혼했어..

아무튼 저는 안하는 걸로..

잠자냥 2023-02-08 14:42   좋아요 2 | URL
저도 결혼은 안 하는 걸로....

다락방 2023-02-08 14:59   좋아요 3 | URL
알라딘에서 우리 알콩달콩 지냅시다! ㅎㅎ

망고 2023-02-08 15: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소풍일화로 갑자기 제 유치원 소풍기억이 떠올랐어요 저는 당시 엄마가 워킹맘이셔서 소풍이란걸 깜박 잊으시고 빵을 사주셔서ㅋㅋㅋㅋ도시락으로 빵들고 갔는데요ㅋㅋㅋ큐ㅠ막판에 해피엔딩이긴 했지만 그 남들 김밥 도시락 먹을때 빵봉지 뜯던 순간을 잊지못해요ㅋㅋㅋ🤣😂

잠자냥 2023-02-08 15:25   좋아요 1 | URL
어린 마음에도 그런 기억은 참 잊히지 않지요? ㅎㅎ
망고 님도 지금은 웃지만 그땐 심정이 참 복잡했을 거 같아요. ㅎㅎㅎ

건수하 2023-02-08 1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 아빠랑 결혼했어‘ 는 딸들의 단골 멘트인가봅니다.. ㅠㅠ

여자의 일생 읽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봐요... @_@
진주 목걸이만 읽었나;;;

잠자냥 2023-02-08 15:28   좋아요 2 | URL
제 주변에도 저마다 다양한 문제를 지닌 아버지들이 있고, 딸들은 대게 자기 아버지 좋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ㅎㅎㅎㅎ
<여자의 일생>도 많은 사람들이 읽은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 책 중 하나가 아닌가 싶어요. 저도 읽었는지 읽은 것으로 착각한 것인지 아리까리해서 이번에 그냥 읽었습니다. 모파상의 작품이 대부분 그렇듯이 재미는 있어서 금방 읽어요.

페넬로페 2023-02-08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 엄마 돌봐주시는 요양보호사님이 매일 엄마에게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 노래 틀어줘요~~ㅠㅠ
그냥 제목만 들어도 짜증나네요^^
근데 읽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ㅎㅎ

잠자냥 2023-02-09 07:23   좋아요 1 | URL
오, 이미자의 노래 제목 중 그런 게 있군요. 가사가 궁금해서 검색해 보겠습니다…. ㅋㅋㅋ

책읽는나무 2023-02-09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의 일생!
남자 하나로 여자의 일생이 좌지우지 된다는 건 참 마리오네트 인형 같은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 이 책 아직 안 읽었어요.ㅋㅋㅋ

잠자냥 2023-02-09 07:22   좋아요 1 | URL
이 책 읽으면 복장터지는 재미가 있습니다. ㅎㅎ

은오 2023-02-09 07: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빠가 나 졸업식때 혼자만 꽃다발 안사온거 생각나네 그걸로 두고두고 갈구다가 요즘 잊고살았는데 이 글 읽으니까 또 생각난다 오늘 전화해서 또 화내야지

잠자냥 2023-02-09 09:56   좋아요 0 | URL
아니 그깟 꽃다발~ 잊으시게.

잠자냥 2024-04-09 13:21   좋아요 1 | URL
˝화내야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귀여운데......

은오 2024-04-11 10:54   좋아요 1 | URL
변태.......

잠자냥 2024-04-11 11:11   좋아요 1 | URL
그 변태 좋아하는 더 변태.....

은오 2024-04-11 11:36   좋아요 1 | URL
🙆‍♀️🙆‍♀️🙆‍♀️

coolcat329 2023-02-09 0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총각무보고 상처받은 어린 잠자냥님의 모습이 그려져 ‘어머니 넘 하셨다...‘했다가 어머니의 사연을 듣고 ‘아...그러실 수 있지. 얼마나 힘드셨으면...‘하고 생각했네요.

저 이 책 책 안 읽던 시절 읽었던 유일한 고전인데 너무 어려서 아무 느낌이 없었던 거 같아요.
이젠 여자의 일생이 뭔지 좀 아니 다시 읽으면 속 터질듯요.

잠자냥 2023-02-09 09:57   좋아요 0 | URL
ㅋㅋㅋ 총각무 이야기 하면 엄마도 민망해 합니다! ㅋㅋㅋㅋ 내가 용서한다! ㅋㅋㅋㅋ
쿨캣 님이 여자의 일생이 뭔지 좀 안다고 하시니까 왠지 빵! 터집니다. 웃프네요. ㅎㅎ

2023-02-11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12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