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1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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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은 신기한 소설이다. 흑인 소년이 수풀 뒤에 숨은 듯 살짝 얼굴을 내민 표지 이미지와 ‘압둘라자크 구르나’라는 작가의 이름과  얼굴만 보면 굉장히 익숙한 내용이 펼쳐질 것만 같다. 아프리카 대륙을 배경으로 한, 억압받는 흑인 노예의 삶이 펼쳐지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백인들에게 수탈당하고 고통받는 흑인들의 삶, 인종 차별에 시달리는 흑인들의 삶이 그려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그래서 사실 나는 이 책을 선뜻 읽게 되지 않았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이 책은 아프리카 대륙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전까지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그 어떤 작품과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분명 흑인도 나오고 백인도 나오는데, 그들만이 아니다 좀 더 많은 인종이 등장한다. 아랍인, 인도인, 남아시아인 등등 아, 아프리카, 동아프리카에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구나, 내가 너무 아프리카를 몰랐구나 몇 페이지만 넘기고도 깨닫게 된다. 그런 데다가 백인이 화자가 아니다. 백인의 눈으로 이 땅을 묘사하지 않는다. 도리어 아프리카 대륙 출신인 소년 ‘유수프’의 눈으로 그 땅에 발을 디딘 백인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소년의 눈에는 낯설기만 한 그들의 모습은 ‘대상화’되어 스치듯 묘사되기에 이 시선은 때로 무척 전복적으로 느껴진다.


그렇다고 유수프가 겪는, 바라보는 아프리카 땅이 지상 낙원이기만한 것도 아니다. 거기에도 분명 착취와 피착취가 있고 부자가 있으면 가난한 사람도 있고, 민족 간의 다툼과 분쟁도 있으며, 백인의 노예가 아니더라도 다른 민족이나 돈이 많은 자에게 노예처럼 팔려가 하인 노릇을 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유수프도 그런 이들 중 하나이다. 소년에게는 부유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먹고살만한 집과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 게다가 그가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르는 부유한 상인 ‘아지즈’도 있다. 풍요롭지는 않지만 소년에게 이 집이라는 공간은 그가 태어나 별다른 결핍을 느끼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었던 첫 번째 낙원이다.

그런데 낙원은 영원하지 않다. 어쩌면 그래서, 부서지고 깨지기 쉽기 때문에 낙원을 낙원이라 부를 수 있던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년의 행복한 삶은 곧 깨지고 만다. 여느 때처럼 아지즈 아저씨가 그의 집을 방문한 어느 날, 소년은 아저씨가 떠날 때면 으레 주곤 하는 동전을 받을 생각에 들떠 있는데, 그날따라 어머니는 자신을 품에 꼭 껴안고 슬픈 표정을 짓는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대상(隊商) 즉, 잘나가는 카라반인 아지즈에게 큰 빚을 졌고, 그 빚을 갚을 수 없자 아들인 유수프를 노예로 보내게 된 것이다. 사실 아버지는 애초부터 아들을 담보로 아지즈에게 돈을 빌리고, 또 빌렸다. 갚을 수도 없을 만큼의 돈을…. 그렇게 낙원과도 같았던 집을 떠나게 되는 소년 유수프-

이 작품은 유수프가 집을 떠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소년은 카라반인 아지즈를 따라 아프리카 내륙을 여행하면서 집 가까이에서만 보아오던 것과는 다른 풍경을 마주하고, 온갖 사람들(다양한 인종)을 만나고,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면서 세상에 눈을 떠간다. <낙원>은 이렇게 여기저기 떠도는 소년의 눈을 통해 그간 우리가 알던 아프리카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낯선 세계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예컨대 그 땅은 단지 흑백 대결만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 이슬람교도들과 인도 상인, 유럽인 농부, 원주민 부족들 간의 적대감으로 늘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곳이며 서양의 백인들(영국국과 독일군이)이 호시탐탐 이 땅을 노리고 있어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긴박한 곳이다.



어디를 가나 그들은 유럽인들이 자신들보다 먼저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장사꾼들은 유럽인들에 대해 얘기하며 놀라워했다. 그들의 잔인함과 무자비함에 기가 질려 있었다. 그들은 한 푼도 내지 않고 최고의 땅을 가져가고 이런저런 술수를 부려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일하게 만들죠. 그 사람들은 아무리 질기고 냄새가 나도 그냥 아무것이나 먹어요. 그 사람들 식욕은 메뚜기떼처럼 끝도 없고 품위도 없죠. 여기도 세금, 저기도 세금을 매기고 어기는 자는 감옥에 처넣거나 매질을 하고 심지어 목매달아 죽여요. 그 사람들이 세우는 첫 번째 것은 감옥이고, 다음은 교회고, 다음은 모든 거래를 지켜보고 세금을 매기기 위한 시장 건물이죠. 살 집을 짓기도 전에 그런 것부터 만드는 거죠. (100쪽)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말하는 유럽인이란 위 구절과 같다. 이제까지 주로 백인의 눈으로 그려졌던 아프리카인의 묘사 방식과 아주 다르다. 게다가 그들은 백인의 속셈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유럽인들은 “땅을 번창시키는 문제로 싸우다가 결국에는 우리 모두를 짓뭉갤” 것이며 “그들이 노리는 건 장사가 아니라 땅 자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우리”이다. “그들에게 가치 있는 것은 금과 다이아몬드뿐”으로 그들은 “논쟁하고 말다툼하고 이런저런 것들을 훔치고 소규모 전쟁을 몇 번 하고 나서 지치면 집으로 갈 것”(119쪽)이다. 이 얼마나 날카로운 묘사인가. 그러나 아프리카의 문제가 꼭 백인들의 알력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부족끼리도 칼을 겨누고, 계급 차별도 존재하며, “노예들조차 노예제를 옹호”(121쪽)하는 모순도 갖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어쩌면 가장 약자는 이 가진 것 없는 소년, 아버지의 빚으로 인해 자유를 잃어버린 소년이 아닐까. 유수프처럼 부모가 빚을 지는 바람에 담보처럼 ‘아지즈’에게 팔려온 아이들은 또 있다. 유수프와 비슷한 처지인 칼릴은 아지즈를 아저씨라 부르며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유수프에게 끊임없이 경고한다. 너는 그의 실체를 모른다고.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그런데 정말 아지즈의 실체는 어떤 모습일까? 유수프의 눈에는 부와 성공을 거머쥔,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이 ‘사이드 아지즈’의 비밀을 추적하는 데에도 이 책의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사이드의 집, 정확히 말하면 그의 정원에서 두 번째 낙원을 발견한 유수프는 어느덧 자신이 떠나온 집, 고향을 잊어가면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 나간다. 그리고 그 정원에서 어쩌면 진짜 낙원이라고 여길만한 존재도 발견한다. 그러나 첫 번째 낙원이 소년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서져버렸듯이 이 두 번째 낙원도 영원히 소년의 것일 수 없다.  소년이 살아가는 세계는 ‘음모와 증오와 보복적인 탐욕이 단순한 미덕들조차 교환과 교역의 상징’이 되어버린 곳이기 때문이다. 탄탄한 삼나무들과 끊임없는 수풀, 과일나무들과 화사한 꽃들이 있는 담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정원- 오렌지나무 수액의 쌉싸름한 향과 재스민향, 한낮의 더위를 식혀주는 대추나무 숲 등 유수프에게는 천국과도 같았던 그 정원은 억압과 착취, 탐욕을 배제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낙원일 수 없는 그런 공간이다. 그렇기에 소년은 더 나은 곳을 찾아 또다시 떠날 수밖에 없다. 모든 억압적인 것들을 피해서….

소년의 이 또 다른 떠남은 성공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시 발견하는 낙원 또한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소년은 또 다시 거기에서 길을 떠날 것이다.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살고자’ 또 떠날 것이다. 유수프의 이 끝없는 떠남의 반복은 더 나은 삶, 더 안락한 삶, 자기만의 낙원을 꿈꾸며 나날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그 삶과 닮았기에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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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25 2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지금 이 책 읽으려고 내놔서 흐린 눈으로 리뷰 읽고 갑니다. 다보고 와서 다시 볼래요. ^^

잠자냥 2022-06-27 16:04   좋아요 0 | URL
네~ 흐린 눈~ 잘하셨어요. 다 읽으신 후 리뷰도 올려주세요!

케이 2022-06-27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계사를 접할 때마다 유럽놈들은 전쟁에 미쳐버린 놈들 아닐까? 하는 생각 자주 했어요. 잘 살고 있는 나라 쳐들어가서 약탈 강간 전쟁만 일삼은 주제에 세상 고상한 척 다 하며 시혜를 베푸는 듯 구는 모습을 보면 울화가 치밉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쓴 책이 압도적으로 많이 번역되어 있다보니...그들 시선으로만 세상을 읽게 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인사가 늦었어요. 잠자냥님 저는 여전히 육아에 찌들어 살고 있고 여전히 잠선생님 글 잘 읽고 있어요. 눅눅한 계절 상쾌하게 지내시길.

잠자냥 2022-06-27 16:05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 말입니다. 요즘도 아주 그냥 시혜를 베푸느라 바쁘신 그들. 나참....
그래서 비백인 남성들이 쓴 책 읽다 보면 가끔 깜짝 놀랍니다. ㅎㅎㅎ
더운데 육아하느라 힘들죠? 아기들이 건강하게 빨리 크길 바랄게요! ㅎㅎㅎㅎ
 
창백한 말 페이지터너스
보리스 사빈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빛소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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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빈코프의 <창백한 말>은 좀 신기한 소설이다. 이 작품의 명성(?)만 듣고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에 나는 이 작품을 좋아할 수 없는 독자 중 한 사람이 되겠구나 싶었다. 주인공 ‘나’가 도무지 좋아할 수 없는 유형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자아도취적인 모습도 거슬렸고 어떤 면에서는 조금 실소가 나오기도 했다. 이 책을 10대나 20대에 읽었더라면 정말 좋았을 것 같은데, 지금 내 나이에 읽기엔 테러리스트이자 혁명가인 ‘나’의 뜨거움과 허무, 냉소가 공존하는 삶의 태도와 그러면서도 자기만 혼자 지나치게 비장한 모습이 종종 중2병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200쪽 남짓 이 짧은 소설을 후딱 다 읽고 나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문장을(거기에 담긴 작가의 생각을) 다시 곱씹어보고 있는 게 아닌가.

<창백한 말>은 ‘어느 테러리스트의 수기’라는 부제를 달아도 어울릴 만큼 테러리스트이자 혁명가의 삶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인 ‘나’- ‘조지 오브라이언’은 사회주의자로서 러시아 황실의 압제에 핍박받는 민중들을 해방하기 위해 테러를 행한다. 그의 이번 암살 대상은 모스크바 총독이다. 그와 함께 이 위험한 일에 뛰어든 단원들로는 ‘바냐’, ‘표도르’, ‘하인리히’, ‘에르나’가 있다. 표도르, 바냐, 하인리히는 마차의 마부들로 신분을 위장한 채 끊임없이 총독을 따라다니며 각자 관찰한 정보를 ‘나’에게 가져다준다. 에르나는 화학자로 총독을 암살할 폭탄을 만든다. 그들이 이 암살 행위에 가담한 이유는 제각각이다. 하인리히는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해, 표도르는 아내가 살해당했기에, 에르나는 사는 것이 수치스러워서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바냐의 이유는 조금 복잡하고, ‘나’는 자신이 왜 테러의 길을 가는지 알 수 없다고 읊조린다.

‘나’는 불법적인 삶에 익숙하고 고독에도 익숙하다. 미래를 알고 싶지 않으며 과거를 잊으려 애쓴다. ‘나’에게는 조국도 이름도 가족도 없다. ‘나’는 단지 노예가 되는 것을 원치 않고 사람들이 노예가 되는 것 또한 원치 않는다. 그렇기에 혁명을 원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실존적인 고민이 늘 따라다닌다. ‘사람들은 살인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장관을 죽이는 것은 괜찮고, 혁명가는 죽이면 안 된다’고 한다. 혹은 그 반대로 말하기도 한다. 나는 어째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어째서 ‘자유의 이름으로 살인하는 것은 좋고 독재 권력의 이름으로 살인하는 것은 나쁜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14쪽)

그는 테러가 아니면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안다. 그 자신이 평화로운 삶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아편을 피우지도 않고 행복한 꿈을 꾸지도 않는다. 그러나 테러가 없는 자기 인생은 상상할 수가 없다. ‘투쟁이 없다면, 세상의 법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즐거운 자각이 없다면’ 그 자신의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나’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문득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법을 어기고, 그저 투쟁하는 것, 오직 테러를 위해 테러를 자행하는 것인가? 대의명분은 그럴듯하지만 사실 그는 그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살인을 자행하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 ‘나’와 달리 ‘바냐’는 ‘사랑’을 위해 테러에 가담한 사람으로, 조지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위해, 테러를, 그러니까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에 몸을 던지다니 이 또한 모순이다 싶어지는데 바냐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봐, 만약 자네가 사랑한다면, 많이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러면 살인도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정말로 할 수 있나?”
나는 말한다.
“살인은 언제나 가능해.”
“아냐, 언제나 가능한 건 아냐. 살인은 중죄야. 그러나 기억해 둬. 타인을 위해서 자기 영혼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어. 목숨이 아니라 영혼 말이야. 이해해 봐.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결단해야 해.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랑으로, 사랑을 위해서라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다시 스메르댜코프야. 스메르댜코프를 향해 가는 길이야.”(20쪽)


여기서 스메르댜코프는 <카라마조프 형제들>에 나오는 악의 화신 같은 인물이다. 즉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그 모든 행위는 악(惡)을 향해 가는 길일뿐이라는 것이다. 바냐는 사랑하기 때문에 살인하지 않을 수 없어 살인의 길을 가고 그럼에도 그 때문에 그의 영혼은  죽음과 같은 비탄에 잠겨 있다. 이때 그의 이 사랑은 개인을 향한 사랑이 아니다. 사람들이 노예가 되는 것이 싫어 테러를 한다는 조지처럼 바냐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암살하는 일에 동참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바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과연 세상에 사랑이란 있는가?’ 반문하며 스스로 ‘나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할 수도 없고 그 방법도 모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사랑 따위는 할 가치가 없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에르나를 곁에 두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차갑게 말하면서도 그녀를 안는다(이런 모습도 싫다). 에르나를 보면서 ‘언젠가 오래전에 그녀는 마치 여왕처럼 내게 몸을 맡겼다.’고 하더니 이제 ‘그녀는 마치 거지처럼 사랑을 구걸’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에르나 앞에서 대놓고 자기는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한다(쿨병 걸린 놈). 그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엘레나’는 유부녀이다. 그는 엘레나를 1년 전에 처음 보았고,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녀 곁에 다른 남자가 있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어 괴롭다. 그런데 내가 조지, 그가 엘레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고 표현한 까닭은 그는 정말 누군가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엘레나를 향한 열정은 있지만 그 사랑이 과연 정말 사랑일까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의 그 사랑은 뜻하지 않은 결말을 불러온다. 이 작품의 재미 는 테러리스트 저마다의 생각과 그 삶을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조지와 에르나, 엘레나, 그리고 그녀의 남편 네 사람의 관계 변화를 지켜보는 데에도 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대신 멀리 있는 사람들만 사랑한다고 말하지. 주위 사람에 대한 사랑도 없는데 어떻게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나? 진흙 속에 피투성이로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거 아나, 다른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거, 사람들에게 자기 죽음을 바친다는 건 쉬워. 삶을 바치는 쪽이 더 어렵지. 매일, 매일, 일 분 일분을, 사랑으로, 살아 있는 사람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산다는 거 말야. 자기 자신에 대해 잊어버리고, 자기를 위해 혹은 멀리 있는 누군가를 위해 삶을 구출하지 않는 것.” (45쪽)


자기 가까이 있는 사람, 즉 엘레나도, 에르나도 진정으로 사랑할 줄 몰랐던 에고이스트, 조지 오브라이언- 그의 혁명은 그래서 기술적으로는 성공할지는 몰라도 사상적으로는 실패일 수밖에 없다. 그의 이런 모습은 함께 테러를 자행하다 목숨을 잃은 동료를 생각할 때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바냐는 그런 조지의 빈틈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너는 진심으로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조지의 그런 텅 빈 마음에 사랑의 중요성을 불러일으키고자 애를 쓴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말하면서….

이런 바냐와 조지의 모습은 작가 사빈코프 그 자신의 양면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사빈코프는 귀족 집안 출신이었음에도 일찌감치 사회주의를 접하고 혁명 활동에 들어섰다. 열여덟 살에 처음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고 그 이후로도 석방과 체포를 거듭하던 중 감옥에서 탈출해 제네바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활동 중이던 러시아 혁명가들을 만나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테러에 뛰어들었다. 러시아로 돌아와 1904년 재무장관 플레베 암살, 1905년 당시 모스크바 총독이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왕자 암살에 성공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이런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때문에 대의를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으면서도 늘 윤리적으로 그 행위가 정당한지 끊임없이 스스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 그의 고뇌가 <창백한 말>의 바냐와 조지의 대비를 통해 형상화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사빈코프 그 자신은 암살을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을까 늘 주저하던 ‘바냐’의 모습에 더 가까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진흙 속에 피투성이로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던 혁명가, ‘사람들에게 자기 목숨이 아닌 삶’을 바쳤던 혁명가 ‘바냐’의 모습에서 사빈코프의 모습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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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5-31 12:3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음 인용하신 20쪽 읽으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왜냐하면 ‘절대 살인은 안돼‘는 제 생각이나 다짐, 관념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주어진다면 거기에서는 또 제 신념과는 다른 행동을 어쩔 수 없이 하게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20쪽 인용문 보니 ‘이사카 고타로‘의 <골든 슬럼버> 생각이 뜬금없이 나네요. 거기서 남주의 아버지가 남주에게 그러거든요. ‘살인은 명분이 있을 수 있지만 성범죄는 명분이 있을 수 없다‘고요.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서 고개 끄덕인 경험 때문인지, 20쪽 인용문에, 그럴 수 있지, 라는 생각이 들어요. 살인이 나쁘다는 걸 몰라서가 아니라 말입니다.

잠자냥 2022-05-31 12:56   좋아요 3 | URL
성범죄는 정말 살인에 비해 더 명분이 없는 것 같아요.... 음. 계속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요즘 댓글로 지성미 뿜뿜 다부장. 오늘은 네 가지 메뉴를 허하노라 ㅋ

공쟝쟝 2022-05-31 13: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이 리뷰 굉장히 묵직하게 읽었어요. 소설 <밀크맨>도 생각 나구요. 좋은 소설일 것 같다는.
대학 다닐 때, 어떤 사람들의 죽음에 빚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난 후에 사는 게 되게 무거워졌던 기억이 있어요. 전 거리 두기가 잘 안됐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가 잘 안되더라고요. 왜 그랬는 지 모르겠는 데 그땐 그랬어요. 그러다가 누군가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것을 구실 삼아 내 삶의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소설 속의 삶을 바치는 쪽이 더 어렵다는 말에 조금 더 많이 동의해요.
지금은~ 삶이든 순간이든 꼭 바칠 필요가 있나 싶다고 보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그렇지만 (연결되는 이야기인 데) 천착해야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어요. 어떤 것에 귀의하거나 바쳐야 하는... 천착해야만 하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다는 걸 알아요. 뭐랄까 저는 아직 그런 사람들이 서글픈 데, 나중에는 힘껏 응원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해지고 싶습니다!

잠자냥 2022-05-31 14:16   좋아요 3 | URL
이 리뷰를 핸폰으로 누워서 읽는 내내 쟝쟝 님 배 위에 홉스가 올라가 있던 것은 아닙니까? ㅋ (자냥, 썰렁해 하지마!)
죽음보다는 삶을 바치는 쪽이 더 어렵다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것에 삶을 바치는 사람이 있기에 우리 보통 인간들의 삶이 좀 더 나아지는 것이겠지요?
쟝쟝 님은 지금 단단해져가는 과정이라고 믿습니다~

공쟝쟝 2022-05-31 15:51   좋아요 3 | URL
썰~러엉~ 일하려고 대왕 모니터 앞에서 안경까지 끼고 pc로그인으로 진지하게 읽었사옵니다. (오늘 죙일 집중안하고 딴짓 중이네요 ㅋㅋㅋ) 보통의 쟝쟝은 단단한 허벅지의 잠자냥을 좋아합니다..* 😭

바람돌이 2022-05-31 16: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뭔가 좀 뻔하지 않을까 싶은 소개글을 보다가 이 소설이 작가의 실제 삶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는 말에 또 급관심이 가네요.
세상의 모든 일들은 언제나 한 면만을 가진 일은 없잖아요. 보기에 너무 단순해 보이는 결정이나 사람의 경우에도 그 내면에서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왜인지 이 소설 끕 땡겨요. ^^

잠자냥 2022-05-31 16:58   좋아요 2 | URL
네, 뻔할 수 있는 내용인데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 진솔함이 남다르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2-05-31 1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논책!
얼른 읽고 싶네요^!^

잠자냥 2022-05-31 22:18   좋아요 1 | URL
오, 사셨군요. 즐겁게 읽으세요.

독서괭 2022-05-31 23: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죽음을 바치는 것보다 삶을 바치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참 맞아요.
모든 걸 육아서로 읽는 단발머리님처럼 저도 모든 걸 육아와 관련짓는데, 아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상황이면 기꺼이 바치겠다고 생각하지만 당장 앞에서 고집부리며 난동부리는 아이를 보면 도망가고 싶단 말입니다...ㅋㅋㅋ
주인공 ‘나‘가 작가의 모습이 투영된 게 아니라서 ‘나‘의 비호감이 자냥님의 점수를 덜 깎아먹게 된 것일까요?

잠자냥 2022-06-01 09:19   좋아요 3 | URL
ㅎㅎㅎㅎ 모든 걸 육아서로 ㅋㅋㅋㅋ
네 아마도 작가의 모습이 ‘나’ 그대로였다면 이 책을 덜 좋아했을 거 같습니다…. (싫었을지도 ㅋ)
 
아담, 너는 어디에 가 있었나
하인리히 뵐 지음, 곽복록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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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키스해 주시겠소.” 하고 그가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발을 멈추었다. 거리는 한산하고 조용했다. 두 사람은 시들어 버린 붉은 가시덤불이 드리운 벽에서 멈춰 섰다.
“키스는 왜 하지요?”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슬프게 그를 쳐다봤다. 그녀가 울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사랑이 두려워요.”
“왜 두렵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랑이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죠. 순간을 위해 있을 뿐이죠.”
“순간을 위해 있는 것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죠.” 하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방을 땅 위에 내려놓고는 그녀의 손에서 케이크 상자를 뺏어 버렸다. 그러고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목, 귀 뒤에까지 키스를 했다. 그러자 자기 볼에 그녀의 입술이 와 닿는 것을 느꼈다. “가지 말아 줘, 제발 가지 말아 줘. 전쟁 중인데 가면 안 돼. 여기 있어 줘.” 하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고는, “어쩔 수 없어요. 제가 정각에 오지 않으면 어머님은 무서워서 죽으실 거예요.” 그의 볼에 다시 한 번 키스를 하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이상하게 생각됐다. 사랑이란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115~116쪽)


하인리히 뵐의 <아담, 너는 어디에 가 있었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저토록 간절히 사랑하는 두 연인, 남자와 여자는 만난 지 3일밖에 되지 않은 사이이다. 남자의 이름은 ‘파인할스’, 여자는 ‘일로너’- 여자는 남자의 뜨거운 관심, 금방이라도 자기를 집어삼킬 것 같은 그 무시무시한 열정이 무서워서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섣불리 그 곁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이 기대했던 그 놀라운 감정이 자기 내부에서도 일어났음을 깨닫는다. 남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순간, 어째서, 왜, 그런 순간에 사랑을 느끼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 그녀가 ‘경이’라고 부르고 싶은, 그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이름도 모르는 군인이 자신의 곁에 서서 지도를 펴 놓고 작은 기를 꽂아 넣을 때 일로너는 그 ‘경이’를 느낀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드디어 입을 맞춘다. 그토록 열망하던 사람을 품에 안은 남자는 여자의 손에 들린 케이크 상자, 조금 전 자신이 그녀에게 준 그 상자를 난폭하게 빼앗아 던지고는 여자를 더욱 꽉 끌어안는다.

만난 지 3일 만에 그들이 그토록 격정적으로 끌어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곧 설명이 된다. 전쟁 중이다. 전쟁 중이므로 가지 말라는 남자의 말, 곁에 있어달라는 말은 더욱 애틋하게 들린다. 여자, 일로너는 그에게 곧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그 자리를 떠난다. 그녀는 다시 파인할스 곁으로, 약속을 지켜서 돌아올 수 있을까? 파인할스는 그녀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분명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처음에는 그녀를 따라가겠노라 고집을 부리지만 일로너가 그것만은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부한다. 왜 안 되는 것일까? 사실 일로너는 게토에 사는 유태인 여성이다. 파인할스는 동부전선, 그것도 헝가리에 배치된 독일 병사이다. 그런 그가 일로너를 따라서 그녀와 그 가족들이 함께 거주하는 게토 지구에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적어도 일로너에게는 그렇다. 때문에 일로너는 파인할스에게 어느 선술집에서 기다리라며, 꼭 그곳으로 가겠노라 약속하고는 집으로 향한다.

파인할스는 기다린다. 그녀가 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는 게 안타까워 서둘러 작은 선술집으로 간다. 그곳에서는 아주 비참하고 허전한 기분이 든다. 무엇인가 소홀히 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불확실한 전쟁터에서 기다린다는 것, 그것도 유태 여인을 사랑하고, 그녀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알지만 그래도 기다린다. 그는 그녀의 주소조차 알지 못한다. 오직 두 사람을 맺어 줄 유일한 것은 그녀가 손으로 가리킨 이 작은 선술집이다. 그렇기에 한 시간, 아니 밤을 새워서라도 그는 기다려야 한다. 그는 잠시 동안은 그녀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는다. 오면 둘이 함께 어디로 갈 것인지 상상해 본다. 두 사람은 어딘가에 가서 방을 잡고, 문 앞에서 그는 그녀에게 당신은 내 아내라고 말할 것이다. 그 방은 어둡고 그 속의 갈색 침대는 오래되고 넓을 것이다.... 파인할스의 이 고통스러울 만치 행복한 상상은 이루어질 것인가.

그러나 우리 모두가 어쩐지 예상하듯이,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한다. 전쟁의 참상을 그린 하인리히 뵐의 이 작품은 담담한 어조로 병사 파인할스와 그가 스쳐가는 사람들의 삶을 스케치하듯 묘사하지만 그 누구도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한다. 스펙터클하게 전쟁 장면을 묘사하지도, 누군가를 영웅으로 그리지도 않고, 비참하고 참혹하게 전쟁터를 그리지도 않는다. 그저 단지 파인힐스를 비롯한 몇몇 병사들의 삶과 그 주변인들의 삶을 담담하게 그릴 뿐이다. 전쟁터임에도 그들은 심지어 간혹 행복하고 간혹 즐겁기도 하다. 그런데도 대부분은 결국 그들이 진정으로 간절히 바라던 것을 얻지 못한다. 그들에게 가장 아름답던 한 순간은 끝내 부서지고 만다.

내가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일로너와 파인할스의 사랑이 드디어 서로의 마음에 불꽃을 일으킨 그 장면을 잊지 못하는 까닭은 그 아름다운 순간이 끝내 전쟁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파인할스는 알고자 했다면 일로너의 주소를 알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일하는 학교를 찾아가 주소를 물어보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는 참고 기다린다. 아니 그러기를 선택한다. 왜냐하면 참고 기다리기, 그것이야말로 순수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는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의 주소를 나누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전쟁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그는 안다. 전쟁 중에는 그 무엇도 약속할 수 없음을, 약속하더라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차라리 그녀와 함께 있었을 방을 생각하기를 선택한다. 그 생각은 누구도 파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때 수도원에서 지냈지만 한 남자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삶을 더 바랐기에 수도원 생활을 접고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 아이들과 합창단을 만들고, 언젠가는 자기 아이를 낳기를 꿈꾸던 일로너- 남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 아닌, 무언가 ‘경이’라고 부를만한 사랑을 기다리던 그녀에게 나타난 남자 파인할스. 전에는 남자와 아이를 함께 생각하곤 했지만 그가 입을 맞추는 순간, 아이는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사랑’ 그 자체에 충실하게 된 그 여자. ‘자기를 슬프게 만들었으나 사랑은 아름답다는 것을’ 이 전쟁 중에 알게 된 그녀의 꿈도, 오랜 소망도 이 전쟁터에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바람일 뿐이다. 더욱이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로 이루어진 합창단이 빚어내는 소리, 그녀의 목소리로 말미암아 아름답다고 생각한 삶은, 바로 그 때문에 그녀를 더욱 비극으로 몰아간다. 게토에 사는 유태인 여성에게 이 전쟁에서 선택권은 없었으리라. 파인할스가 준 케이크가 주머니 속에서 짓이겨지고, 그럼에도 그 짓이겨진 케이크 부스러기를 입안에 넣고 그 맛을 음미하는 장면은 또 하나의 아름다움의 파괴이다. 그래서 슬프다.

여기 아름다움에 도취된 또 한 사람이 있다. 필스카이트- 그는 인생을 진지하게 보았지만 인생보다 직무를 더 진지하게 보았고 무엇보다도 예술을 가장 진지하게 여긴다. 예술, 그중에서도 음악을 가장 사랑한다. 한때 음악학도를 꿈꾸던 그는 먹고살기 위해 은행원이 되지만 그러고도 열정적인 음악애호가이다. 그의 특기는 합창으로 특히 남성 합창에 정열을 기울인다. 그리고 그는 남성 합창단의 지휘자가 된다. 음악을 애호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야망도 큰 그는 남모르게 지니고 있던 이상과 일치하는 민족 사상에 이끌려 히틀러유켄트에 가입하고 어느 지역 합창단 지도자로 곧 승진한다. 친위대와 돌격대 일도 맡아 보던 중 전쟁이 터지고 당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임명받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러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돌격대 음악교육 담당하고 일선에서 조그만 강제 수용소를 맡게 된 것이다. 1944년에 그는 헝가리의 게토 책임자가 된다. 그리고 그는 그곳 죄수들에게서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다. 그는 거기서 혼성 합창단을 만들어 이끄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한다. 죄수들을 한 명씩 불러와 자기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한다. 점수는 0에서 10점까지- 0점을 받으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다. 그리고 이 음악애호가 앞에 일로너가 선다. 그녀가 노래를 부른다. 필스카이트는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얼굴을 주목한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 0에서 10점까지- 일로너는 몇 점을 받을까? 그녀는 분명, 10점을 넘어설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쟁 중이다. 전쟁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못하며, 아름다운 것을 파괴하고 만다.

사랑과 음악처럼 명백하게 누구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만 파괴되는 것은 아니다. 수잔 부인은 격전지가 아닌 곳에 집이 있는 덕분에 전쟁 통에 돈을 벌기도 한다. 그녀가 사는 지역에도 군인이 주둔한다. 처음에는 독일군과 군용차, 기병대들이 왔다. 분명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먼지를 뒤집어쓴 군인들, 말이나 오토바이를 타고 이리저리 다니느라 피곤해 보이던 장교들, 오후 내내 간간이 이어진 전투, 이 모든 것은 거의 아름다운 그림과도 같았다. 군인들이 다리 위로 행군해 갔다. 그리고 수잔 부인은 그들을 다시 보지 못한다. 그 후로는 맥주를 마시거나, 보초를 선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거나 망원경을 들고 지붕 위에서 하릴 없이 빈둥거리는 병사들을 3년 동안이나 지켜본다. 수잔 부인이 보기에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남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또한 그럴 목적으로 아무도 모르게 다른 지방으로 끌려가는 것이 전쟁’(193쪽) 같다. 그 사이 군인들이 찾아와 파괴되었던 다리를 재건하기 시작한다. 수잔 부인은 기쁘다. 다리가 다시 생긴다. 전쟁이 끝나도 다리는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다리가 세워지면 아마도 군인들이 머물게 될 것이고, 여러 마을에서 사람들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인부들도 행복해 보인다. 다시 세워진 다리. 수잔 부인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이 다리는 과연 그녀의 생각처럼 전쟁이 끝나도 그대로 계속 존재할까? 그러나 지금은 전쟁 중이다. 아름다운 것은 여지없이 파괴되고 만다..... 뵐의 <아담, 너는 어디에 가 있었나>는 여러 사람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에 따른 일화가 9장에 걸쳐 짤막하게 소개된다. 그런데 나는 이 세 장면, 전쟁 중에도 당연히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지만 전쟁 중이기에 그 아름다움이 끝끝내 무참히 짓밟히고 마는 장면이 뇌리에서 잊히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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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18 1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잠자냥 2022-05-18 17:3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2-05-18 17: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파인할스도 파인할스지만 일로너의 그 이후의 삶이 너무 궁금하네요.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뜨거운 사랑이 분명 있었는데, 그것을 품고 어떻게 살아갈지. 이 책도 장바구니로 넣습니다.

공쟝쟝 2022-05-18 17:15   좋아요 3 | URL
그러지마요.. 그만해요.. 그만 넣어… 장바구니에 그만 넣어.. 그거 도저히 터질 생각이 없나봐요? 그거… 크기가 얼마난 바구니이길래…. 영원히 넣을 수 잇는 그런 거? (라고 말하는 나는 왜 알라딘을 켜서 페이퍼에 댓글을 달고 잇을까...?) 그것은 바로 책읽다 말고 책사러 들어왔기 때문이다 ㅋㅋㅋ

다락방 2022-05-18 17:15   좋아요 3 | URL
신축성이 지구 최고입니다. 흠흠.

공쟝쟝 2022-05-18 17:16   좋아요 1 | URL
이렇게 된김에 우리 내기할래요? ㅋㅋㅋ 다락방님 현재 장바구니에 얼마 너치 있어요? ㅋㅋㅋ 나보다 심해?

다락방 2022-05-18 17:17   좋아요 3 | URL
아뇨, 안심할걸요! 나 그제랑 오늘 일단 질렀고 나머지 다 보관함으로 이동시켰다가, 지금 다시 장바구니에 담는 중이라 ㅋㅋㅋ 쪼끔 있어요. ㅋㅋ 한 번 또 지를만큼 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5-18 17:20   좋아요 1 | URL
ㅜㅜ 흑… 저 83만원어치있어요… ㅜㅜ 나도 되게 꼼꼼히.. 아주 꼼꼼히 비웠는데 ㅜㅜ ㅜㅜㅜ 왜 이럴까요? ㅜㅜ 아.. 이건 절대 못버리지 이건 못버리지.. 하다보니 그새 또… 100만원이 ㅜㅜ
보관함에는 3천만원 어치정도 있을란가?… 설마… 1억?… (터덜터덜)

다락방 2022-05-18 17:21   좋아요 3 | URL
나는 장바구니는 13만원 있고요 보관함은 금액으로 안나오네요? 보관함에는 2,297 권 있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5-18 17:27   좋아요 1 | URL
와! 졌다! 저 1859권이요!!! 이겼어요. 다락방 완승!!!!!!!! 보관함 완승!!!!! 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2-05-18 17:31   좋아요 2 | URL
네, 저도 일로너가….. 가슴에 콕

잠자냥 2022-05-18 17:32   좋아요 2 | URL
아니
뭐야 이
길고 긴 댓글
행렬은!? 아름답다

잠자냥 2022-05-18 17:38   좋아요 2 | URL
다부장님은 보관함도 뒤메질…..

공쟝쟝 2022-05-18 17:46   좋아요 2 | URL
근데 나는 사장이고 잠자냥님은 퇴근인데 다락방님은.. 여윽시.. 부장이라서….. ㅋㅋㅋㅋㅋ 말일에 몰아서 일하려고 오후내내 농땡이 모드인가 ㅋㅋㅋㅋ 여러분… 이렇게 노동자 정체성 산다락방의 20년 노동의 진실이 밝혀졌구랴 ㅋㅋㅋ

다락방 2022-05-18 17:48   좋아요 2 | URL
나.. 월급루팡....... 그럼 이만. 이제 퇴근해야지 =3=3=3=3=3

잠자냥 2022-05-18 17:50   좋아요 2 | URL
내가 역시 정리왕! 난 800권뿐! 시간 지나서 안 읽고 싶어지는 책은 낼름낼름 삭제합니다.

공쟝쟝 2022-05-18 17:58   좋아요 2 | URL
와.. 잠자냥.. 리스펙… 저도 작년까진 그랬는데요.. 바쁘기도 하고… 그리고 삭제의 욕망이 퍼담기의 욕망보다 언제나 매우 초조할정도로 작아서.. 그냥 투항했습니다…. 알라딘 보관함 만큼은 뒤메질파인것입니다!!!!!! 근데 멋지다.. 잠자냥… 멋있어… 왜 멋있는 거지?… 하지만 다부장님은 사랑해요… 응? 두분 역시 케미가… 하아~ 잠&다 뽀에버!

다락방 2022-05-18 17:59   좋아요 3 | URL
난.. 보관함 정리 귀찮아서.. 그거 정리해주는 사람 있으면 결혼할거에요. 🙄

잠자냥 2022-05-18 18:00   좋아요 2 | URL
쟝쟝이 정리 잘하더라고요? 쟝쟝에게 넘깁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5-18 18:01   좋아요 2 | URL
잠자냥//죄송해요 전 제것만 잘해요. 저도 잠자냥님께 넘길게요. 다락방님이랑 결혼하세요.

다락방 2022-05-18 19:05   좋아요 2 | URL
왜 다 나 싫어해? 왜 다 나 거부해? 🥹

공쟝쟝 2022-05-18 17: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일로너와 파인할스의 사랑이 드디어 서로의 마음에 불꽃을 일으킨 그 장면을 잊지 못하는 까닭은 그 아름다운 순간이 끝내 전쟁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
산산이 부서지지 않았다면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라는 무의식을 추론해버리는 나!
역시 사랑은 부서지고 깨지고 이루어지지 않고 막 다 폭파되고 파괴되었을 때 미학적인 것입니까?!
그 미학 나는 찬성일세!

잠자냥 2022-05-18 17:33   좋아요 1 | URL
안 깨지는 사랑이 있슴둥?

공쟝쟝 2022-05-18 17:41   좋아요 1 | URL
있어.. 그것은 내 마음 속… 저 밑바닥 어딘가에… 소망으로… 진실한 사랑… 트루럽… 사랑의 사랑. 사랑의 이데아.. 난 그런걸 원한다… 깨지면 안돼… 나의 사랑.. 깨지면 안되므로 … 내게서 없어져버린 그것.. 사랑~ (뚜둥..)

새파랑 2022-05-18 17: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지만지 비싸서 꺼렸었는데 이 책은 재미있을거 같아요 ㅋ 하인리히 뵐이 괜히 노벨상을 탄 작가가 아니었군요 ^^

잠자냥 2022-05-18 17:36   좋아요 4 | URL
네, 비싸긴한데 도저히 안 살 수 없는 책들이 종종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서 읽거나, 이렇게 결국 소장용으로 사기도 합니다만…. 소장하기엔 넘나 파괴되기 쉬운 지만지 책 표지….. 종이 한 장 달랑… ㅠㅠ

종이달 2022-05-20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종이달 2022-05-20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 반갑습니다.
 
애나 크리스티
유진 오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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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오닐의 희곡 <애나 크리스티>에는 새로운 여성 인물이 등장한다. 물론 다른 문학 작품에 견주어 보면 그다지 새로운 캐릭터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유진 오닐의 다른 희곡에서는 볼 수 없는 당찬 여성 인물이 등장하기는 한다. 애초에 이 작품은 오닐이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었다. 그런데 개작을 거쳐 <애나 크리스티>로 브로드웨이에 올려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 작품은 <지평선 너머>(1920)에 이어 1922년, 그에게 두 번째 퓰리처상을 안겨준다.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에서 <애나 크리스티>로 제목이 달라진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 비슷한 듯, 다른 두 제목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은 늙은 선장으로 젊은 시절에는 세계 곳곳을 항해하고 다녔으나 이제는 낡은 석탄 바지선에서 ‘마티’라는 여자와 초라하게 살아가는 신세이다. 스웨덴이 고향인 그는 그곳에 아내와 딸도 있었으나 떠도는 선원의 삶이다 보니 가정에 정착할 수 없었고, 딸이 다섯 살일 때 스웨덴에서 마지막으로 본 후로는 15년 가까이 만나지 못한다. 그의 딸 이름이 바로 ‘애나 크리스토퍼슨’, 줄여서 ‘애나 크리스티’이다. 즉 유진 오닐은 이 희곡을 처음에는 아버지 크리스에 맞춰서 썼다면 개작 때는 딸인 애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다고 볼 수 있다.

어느 날, 뉴욕시 근처 ‘자니 더 프리스트’ 술집에 간 크리스는 오래전 미네소타 농장에 두고 온 딸에게서 편지가 온 것을 알게 된다. 편지를 뜯어본 그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는데, 딸이 그를 만나러 곧 이곳으로 온다는 것이다.  15년만의 재회이다. 그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은 물론 ‘마티’라는 여인과 함께 바지선에서 살아가는 것을 딸에게 숨기고만 싶지만, 한편으로는 딸을 만난다는 기쁨을 감출 수 가 없다. 이래저래 들 뜬 마음으로 일단 술을 깨러 잠시 자리를 비우는 크리스. 그 사이 딸 애나가 술집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술을 마시던 ‘마티’와 허물없이 술잔을 기울이며 신세타령을 늘어놓게 된다.

크리스의 아내, 그러니까 애나의 엄마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애나가 어릴 때 돛배의 갑판장이던 그는 1년에 집을 며칠 밖에 갈 수 없었다. 이런 상황 아래 딸을 홀로 둘 수 없었던 그는 미국으로 애나를 데려와 미네소타에서 농장을 하는 사촌의 집에 맡긴다. 차라리 사촌들이 애나를 돌보는 게 더 좋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간간이 오는 소식을 통해 애나가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자는 애나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만 보고도 그녀의 삶이 순탄치 않음을 예상할 수 있다. 아니, 부모 없이 먼 친척의 농장에서 여자아이 홀로 자라난다고 생각하면 짐작할 수 있는 온갖 불행이 그녀에게도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20세에 키가 크고 금발인 장성한 아가씨’인 애나는 ‘거구에  바이킹의 딸 풍의 미인’이지만 ‘지금은 건강이 무너지고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군에 종사한다는 모든 표시를 분명히 보이고 있다.’(26쪽)고 오닐은 묘사한다. ‘그녀의 젊은 얼굴은 메이크업 밑에 깔린 강퍅하고 냉소적인 표정을 벌써’부터 보이고 ‘시골뜨기 출신 매춘부의 값싸고 번지르르한 의상’이 그녀의 모든 고통스러운 삶을 보여준다. 크리스의 애인인 마티는 애나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그녀가 자신과 같은 부류임을 알아챈다. 마티 그녀 자신도 젊은 시절에는 애나처럼 살다 이제 늙어서는 크리스 같은 남자에게 정착해 그와 함께 바지선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으리라. 애나는 마티가 아버지의 애인인 줄도 모르고 술 한 잔에 지나간 사연을 줄줄 털어놓는다. 아버지가 믿고 맡긴 농장에서 친척에게 성폭행을 당하고는 농장을 떠나 몸을 팔며 살아가던 그녀는 모든 불행이 남자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병들고 지친 애나는 아버지에게 의지하고자 아버지를 찾아온 것이다. 평생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아버지이지만 자신이 푹 쉴 때까지 방을 하나 얻어서 먹고 지내도록 해 줄 수는 있으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에게 아주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내가 넘어졌을 때 거기다 발길질을 하죠. 남자들, 남자라면 다 미워요. 아버지라고 다른 남자들보다 나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아요.”(31쪽) 말한다. 실제로 늙은 아버지는 돈도 없고 번듯하게 머물 집도 없다. 석탄 바지선에서 살아간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기가 막힌 애나. 그럼에도 갈 곳이 없어 아버지와 함께 바지선을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삶을 시작한다.

크리스는 딸의 과거(상처)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딸이 그저 고된 노동으로 지쳤으리라 여기고는 바다 생활이 그녀를 건강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바다는 ‘사방에 물, 태양, 신선한 공기’, 애나를 ‘강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줄 좋은 음식뿐’이다. 밤에는 달빛과 증기선이 지나가는 것도, 범선이 돛을 달고 항해하는 것도 볼 수 있으며, 예쁜 건 모두 볼 수 있는 환상적인 공간이다. 처음에 애나는 이런 아버지의 말에 콧방귀를 뀌지만 피는 속일 수가 없는지, 서서히 바다 위를 떠도는 삶에 만족하며 건강을 되찾는다. 애나는 크리스에게 “배에서 사는 게 육지와 이렇게 다를 줄을 몰랐어요. 내가 남자라면 배에서 일하는 걸 너무 좋아할 것 같아요. 아빠가 왜 이제까지 선원 일을 했는지 잘 알겠어요.” 말하면서 점점 밝고 건강해진다. 그런데 크리스는 이런 딸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애나가 보는 바다의 모습은 진짜 바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애나는 그저 바다의 좋은 부분만 보고 있다.



크리스: 안개 속에서 이렇게 밖에 나와 있는 건 네게 좋지 않아.
애나: 왜요? (이상한 환희를 느끼며) 저는 이 안개가 좋아요! 정말이에요. 이건 너무 (적절한 단어를 찾으려고 머뭇거리다가) 우습고 조용해요. 마치 제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 같아요.
크리스: (역겹다는 듯이 침을 뱉으며) 안개는 바다가 부리는 가장 더러운 속임수야! (<애나 크리스티>, 50쪽)


그리던 어느 날 밤, 폭풍우가 일어나고 두 사람은 조난당한 선원들을 구출한다. 그들 중 젊고 잘생긴 맷은 처음에 애나를 크리스의 정부로 오인하지만 결국 그녀가 크리스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애나가 밝고 건강하고 정숙한 여인이라 생각한 그는 애나에게 구애하기 시작한다. 이 둘 사이가 차츰 가까워지자 크리스는 불안해하면서 ‘이번에도 바다가 못된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하며 맷이 애나와 가까워지는 것을 온갖 수를 써서 막으려고 한다. 크리스는 바다의 술수, 그러니까 맷이라는 젊은 남자가 딸을 꾀려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그리고 맷은 이 늙은이로부터 애나를 빼앗을 수 있을까? 두 남자가 애나를 놓고 바다 위에서 실랑이를 벌인다. 그런데 이 두 어리석은 남자들의 갈등을 지켜보던 애나는 참다못해 이렇게 소리 지른다.



애나: 우선, 두 사람에게 말할 게 있어, 당신들 두 사람 중 하나가 나를 소유해야 할 것처럼 말했지. 그런데 아무도 나를 소유할 수 없어. 알겠어? 나 자신 말고는, 나는 내 마음대로 할 거고, 어떤 남자도, 그게 누구든,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어! 두 사람 어느 누구에게도 나를 먹여 살리라고 부탁하지 않을 거야. 나 혼자 살아갈 수 있어. 이렇든 저렇든, 내가 내 주인이야. 그러니 허황된 꿈은 버려! 당신, 그리고 당신의 명령 같은 거! (110~111쪽)


맷을 반대하는 크리스의 모습에서는 자신의 딸(우나 오닐)이 채플린과 결혼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던 유진 오닐 그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크리스는 선원 생활을 오래했기에 맷이 어떤 생활을 했을지 눈에 뻔하다. 항구마다 여자가 있을 것이며 지금은 애나에게 반했지만 다른 항구에 가면 곧 또 다른 여자를 만날 것이다. 행여 애나와 결혼한다 한들 자신처럼 정착하지 못한 채 아내를, 자식을 외롭게 만들 것이다. 애나가 그런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랑에는 문제가 많다. 그는 왜 젊은 시절에는 딸을 방치해놓고, 딸이 육지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지 상상도 하지 못하고(그는 여전히 딸의 과거가 어떤지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다), 딸이 육지의 좋은 남자를 만나 육지에서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란다. 폭풍과 풍랑이 이는 바다의 불안정한 삶을 딸에게 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육지에서 애나는 행복했던가?

맷 또한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애나가 ‘정숙하고 건강하고 기품 있어 보여서’ 반했다. 그 또한 그녀의 과거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그가 이 항구 저 항구에서 만났던 여자들과 애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면서 애나를 칭송하고 떠받든다. 그러나 애나는 사실 그가 그토록 혐오했던 그녀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두 남자 모두 ‘안개’에 가려 삶에서, 애나에게서 자신이 보고 싶은 모습만 보는 것이다. 애나는 그런 그들을 비웃지만 한편으로는 연민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랑한다.

이 작품은 유진 오닐 희곡 중에서는 드물게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데, 과연 그 결말이 해피 엔딩일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애나의 과거를 알고 미치광이처럼 돌변하는 두 남자의 모습은 아주 가관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두 남자를 끌어안고 포용하는 애나는 “내가 내 주인!”이라 외치는 당찬 캐릭터로 그려졌을지언정, 어리석은 두 남자를 구원해주는 착한 창녀, 성스러운 창녀 신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유진 오닐이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에서 <애나 크리스티>로 개작하면서 자신의 작품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 인물을 창조하고도 한계를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애나와 크리스, 맷 이 세 인물이 보여주는 갈등과 화해의 과정은 그곳이 육지이든 바다이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인간의 모습과 닮았다. 결국 바다, 삶이라는 바다가 부리는 ‘안개’에 눈이 멀고 마는 가여운 인물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또 그 ‘안개’를 헤치고 어떻게든 나아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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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5-10 15: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주요 인물의 시점을 바꿈으로써 완전히 다른 소설을 만드는것도 괜찮은 시도인듯하네요. 두남자의 말도 안되는 소유욕에 대한 애나의 일침 맘이 드네요. ㅎㅎ

잠자냥 2022-05-10 16:31   좋아요 2 | URL
그러게 말이에요, 아버지는 그렇다치고 맷은 언제 봤다고 애나가 자기 소유인 것처럼 구는지 원!

다락방 2022-05-10 16:3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유진 오닐은 <밤으로의 긴 여로>만 읽어봤는데, 이 작품 꼭 읽어보고 싶네요. 장바구니로 넣습니다. 슝-

잠자냥 2022-05-10 18:16   좋아요 2 | URL
사악한 가격이지만 꼭 한 번 읽어보셈~~

coolcat329 2022-05-10 17: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잠자냥님 덕분에 유진 오닐에 더욱 관심이 갑니다. <밤으로의 긴 여로>로 출발해보겠습니다.

잠자냥 2022-05-10 18:17   좋아요 3 | URL
<밤으로의 긴 여로> 강추입니다~!

새파랑 2022-05-10 18: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시 희곡 작가출신 잠자냥님의 희곡이군요~!! 요새 희곡에 대한 감이 떨어졌는데 ㅋ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잠자냥 2022-05-10 21:04   좋아요 4 | URL
아이고 작가는요 무슨, ㅎㅎ 요즘 새파랑 님 희곡 좀 뜸하시던데, 이걸로 다시 발동 걸아보세요~

햇살과함께 2022-05-10 21: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찜!

mini74 2022-06-10 0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냥님! 꽃분홍이 어울리는 분 ㅎㅎ ㅎ축하드랴요 *^^*

Falstaff 2022-11-18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 우짜 이 페이퍼를 못 보고 지나갔을까요? 아하, 책 안 읽던 서너 달 동안에 쓰셨구먼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2-11-18 11:38   좋아요 0 | URL
ㅎㅎ 일찍 일어나셨군요! 지금 보셨으면 됐지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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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아주 인상 깊으면 도리어 원작을 읽을 욕망이 사라지기도 한다. <일 포스티노>로 널리 알려진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그런 책 중 하나였다. 그래도 완전히 외면은 못하고 언젠가 읽기는 읽어야 할 텐데, 영화에 관한 기억이 희미해지면 그때  읽어야지 하면서 미뤄오다가 최근 드디어 읽었다. 영화에서는 시인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마리오의 우정, 그리고 마리오의 사랑 등이 인상 깊었다면 책으로 읽을 때는 아무래도 이것이 ‘문자’의 힘인지 글쓰기의 힘, 말의 힘, 그리고 시(詩)가 지닌 위대함이 더 크게 와 닿는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어느 실패한 소설가, 아니 소설가를 꿈꾸지만 늘 소설 쓰기에 실패하고 마는 한 삼류 신문사 기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유명한 칠레의 작가들처럼 언젠가는 나도 멋진 작품으로 꼭 이름을 떨치리라! 야망은 크게 가졌지만 실제로 하는 일이라곤, 통속 극단 배우 인터뷰나 사립탐정들의 책에 관한 서평, 이웃집 자식 그 누구라도 쓸 수 있는 유랑 서커스단에 관한 기사, 그 주의 베스트셀러에 대한 터무니없는 예찬 기사 등등 그 자신이 보기에는 하나도 쓸모없는 권태로운 일 뿐이다. 그런 중에도 작가가 되고자 글을 써 보려고 애쓰지만 그런 그의  꿈은 ‘그 축축한 편집국 사무실’에서 매일 밤 사그라져 간다.

그러던 중 그는 드디어 기회를 얻는다. 칠레의 국민 시인이자, 온 세상이 칭송하는 시인 네루다를 취재하고 기사를 써 오라는 지령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취재라는 게 이름만 거창하지 실은 네루다가 살고 있는 섬에 잠입하다시피 하여 그의 화려한 여성 편력에 관한 너절한 기사를 써오라는 주문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지만 이 기회를 한껏 이용하기로 한다. 네루다를 만나 자신의 책 서문을 써달라고 하리라! 그리고 그 서문을 이용해, 그러니까 네루다의 명성을 이용해 소설가로서 화려하게 데뷔하리라! 그런데 잠깐, 그에게는 아직 책이라고 부를 만한 원고가 없는 상태이다. 그의 글쓰기는 늘 실패, 실패를 거듭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있지도 않은 자신의 책에 서문을 받을 요량으로 이슬라 네그라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사나이, 네루다의 전속 우편배달부 ‘마리오 히메네스’를 만나게 되고 그로 인해 이 책, 그러니까 이 글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는 마리오에게 일종의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다. 마리오도 네루다에게 자신의 시에 서문을! 써달라고 졸졸 따라다니던 철부지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다 이 우편배달부는 시를 쓰게 되었고, 또 어쩌다 네루다에게 서문까지 써달라고 조를 만한 사이가 되었으며, 그래서 우리의 세계적 대작가 네루다는 이 두 서문 스토커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글을 써주었을까? 그 과정이 흥미롭게, 또 때로는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의 작가인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도 네루다의 인간적이고 소박한 모습에 반했던 것 같은데, 이 작품에서도 마리오의 눈을 통해 네루다의 그러한 모습이 섬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1970년대 초 칠레의 한 어촌마을, 십대 끝자락의 소년 마리오는 종일 빈둥거리는 한량이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오직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 때문에 네루다의 전속 우편배달부가 된다. 이 마을에서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읽을 줄 안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능력을 갖춘 셈이다. 네루다에게는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편지들이 도착하고, 마리오는 큰 자루를 지고 매일 같이 그의 집을 드나든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년에게는 네루다도, 그의 시도 큰 의미가 없었다.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목을 축이러 들른 동네 술집에서 시중을 들던 베아트리스를 보고 한눈에 반한 그는 그길로 네루다에게 달려가 소녀를 위한 시를 써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한다. 어린놈도 시의 위대함이랄까, 사랑에는 달콤한 말이 필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자신이 네루다와 이토록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보여주고픈 일종의 허영, 허세도 깃들어 있다.

하지만 천하의 네루다가 알지도 못하는 여인, 단테의 베아트리체도 아닌 마리오의 베아트리체를 위해 시를 써줄 리 만무하다. 네루다는 마리오에게 ‘메타포’를 가르쳐주면서 시를 직접 써보게끔 유도한다. 시 한 줄 써본 적 없는 사람에게 ‘메타포’ 운운부터가 황당한 일일 텐데, 소박한 네루다는 ‘하늘이 울고 있다고 말하면 무슨 뜻일까?’처럼 마리오가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을 예로 들어 그가 시의 세계에 눈을 뜨도록 이끈다. 그리고 이제 이 메타포의 왕자는 사랑의 언어를 발견하고 베아트리스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한다. 네루다에게 시를 써달라고 졸라대기 이전의 마리오는 베아트리스에게 반했어도 자신의 마음을 전달한 언어가 없던 사람이다. 그런데 네루다의 시를 읽고, 메타포가 무엇인지 알고 나서는 자기의 마음을 표현할 능력, 비록 그것이 서투른 사랑의 언어일지라도 뜨거운 마음을 전할 방법을 알게 된다. 시인이 되면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할 수”(28쪽) 있으리라 외치는 마리오의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아무리 배움이 짧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거나 전달하는 능력이 서툴렀을지라도 시의 언어를 익힌 마리오는 위험하다. 그 위험을 잘 아는 사람은 이 마을에서 네루다의 시를 읽을 줄 아는 베아트리스의 엄마이다. 그는 마리오가 자신의 딸에게 시를 읊으며 추근대는 게 영 못마땅하다. “우리는 아주 위험한 상황과 맞닥뜨렸어. 처음에 말로 집적대는 남자들은 다들 나중에 손으로 한술 더 뜨는 법이야.” 이렇게 말하면서 딸과 마리오 사이를 감시하며 딸이 마리오의 수작에 넘어가지 못하도록 갖은 애를 쓴다.


“번드르르한 말처럼 사악한 마약은 없어. 촌구석 술집 년을 베네치아 공주처럼 느끼게 만들지. 그리고 나중에 진실의 순간이 오면, 즉 현실로 되돌아오면 말이란 부도수표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지. 네 미소가 나비보다 더 높이 난다는 말보다 술주정꾼이 주점에서 네 엉덩짝을 치근덕거리는 게 천만번 낫지.”
“말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야. 허공에서 사라지는 불꽃놀이일 뿐이라고.”(63쪽)


베아트리스의 엄마는 시를 읽을 줄 알기에 시의 위험성, 언어의 힘을 아는 사람이다. 그것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그 마음 때문에 사랑에 빠지게 하고, 또 때로는 위험한 일에도 기어이 몸을 던지게 만드는지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엄마가 예상했듯이 그녀의 강력한 경고에도, 감시에도 마리오가 빚어낸 사랑의 말들은 베아트리스의 마음을 활짝 열어버린다. 마치 시가 마리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어, ‘우표를 붙이는 데에만 쓰던 혀를 다른 데 사용하는 걸’ 알게 했고 어쩌면 사랑에 더 깊이 빠지게 한 것처럼..... 난생 처음 시를 읽고 멀미가 날 것 같던 한 소년은 처음에는 사랑을 얻기 위해 남의 시(네루다의 시)를 표절해 가며 시를 끼적이고, 그 언어로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얻는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려준 시인을 그리워하는 시를 직접 쓰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또 다른 시를 쓴다. 그는 이제 우체부가 아닌 시인이고, 시인의 눈으로 본 세상은 전과는 조금은 다르다. 평범했던 바닷가 소년 마리오가 위험을 무릅쓰고 네루다의 곁을 지키게 된 것은 단지 그와의 우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시가 열어준 새로운 세상을 보는 눈 때문이었을까.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이렇게 시와 말과 글, 언어의 힘을 칠레 한 어촌 마을을 배경으로 굴곡진 칠레 현대사와 엮어 따뜻하고 해학적이면서도 결코 암담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어둡지 않은 어조로 풀어나간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이야기를 ‘단지 실패로 끝난 네루다 취재 공세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자조 섞인 투로 글을 써내려간 기자는 “작가 여럿이 연이어 성공의 술잔을 들이켜고 있을 때 나는 여전히 소설을 출판하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라며 씁쓸히 말한다. 우편배달부 마리오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시를 써서 어느 대회에 내보내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다. 그러나 그들의 이 진심 어린 글쓰기를 과연 실패로만 볼 수 있을까. 적어도 네루다는 이 두 사람에게,  한 줄도 쓸 수 없었던 이 두 남자에게 자기만의 작품을 남기게 했다. “이처럼 시는 헛되이 노래하지 않았다.”는 네루다의 말은 그래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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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4-29 12:0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자냥님 리뷰도 시같아요 ㅎㅎ 전 영화도 좋더라고요 *^^* 마리오역 맡으신 분이 영화찍고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해서 너무 안타까웠어요 ㅠㅠ

잠자냥 2022-04-29 12:36   좋아요 5 | URL
언제나 과찬을 해주시는 미니님~ ㅎㅎㅎ 감사합니다.
네, 저도 영화도 좋았습니다. 그나저나 마리오 역 배우가 영화 찍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니 안타깝네요!!

새파랑 2022-04-29 13: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극찬 책이니 요책 당장 사서 읽어봐야 겠어요 ㅋ 이번주말에는 간만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읽어야 겠습니다~!!

잠자냥 2022-04-29 16:45   좋아요 3 | URL
요것 정말 금방 읽습니다요~!

미미 2022-04-29 13: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부랴부랴 영화를 검색해보니 평점이 9.09점이네요! 대략적인 줄거리는 알고 있었는데 잠자냥님의 리뷰를 보니 꼭 읽어야겠단 생각이듭니다.
˝시는 헛되이 노래하지 않았다˝마음깊이 담아갑니다~♡

잠자냥 2022-04-29 16:46   좋아요 3 | URL
영화도 책도 둘 다 보기 드물게 좋은 작품인 것 같습니다!

공쟝쟝 2022-04-29 13: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름답지만 뭔가 조금은 짜증나는 이야기! ㅋㅋㅋㅋㅋㅋ 네요! 이제 베아트리스, 너가 스스로 시를 쓰자!

잠자냥 2022-04-29 16:46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맞아요. 저 사실 이 작품에서 좀 마음에 안들던 장면도 있는데, 베아트리스 너무 성적 대상화함...... -_-

바람돌이 2022-04-29 22:47   좋아요 3 | URL
베아트리스가 성적 대상화되는 느낌이 좀 있지만 압권은 베아트리스의 엄마. 저는 이분 진짜 멋지더라구요. ㅎㅎ

잠자냥 2022-04-29 23:46   좋아요 2 | URL
엄마 욕 진짜 찰지죠. 그것도 한 편의 시입니다.

다락방 2022-04-29 13: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인용해주신 63쪽은 저도 밑줄 긋고 인용했었어요. 그러니까, 그 때가 아마도 싸이월드 시절이 아니었을지... 흠흠.

잠자냥 2022-04-29 16:46   좋아요 2 | URL
어머나 싸이월드 시절 읽은 것! ㅎㅎ 요새 싸이월드 복구되었다면서요?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05-04 06: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드물게 제가 자냥님보다 먼저 읽은 책이군요! ㅎㅎ 베아트리스 엄마가 반대하며 했던 말들이 인상적이었어요. 언어의 힘…
이 소설 저도 참 좋았는데 자냥님 리뷰가 그 기억을 섬세하게 되살려주어 넘 좋네요! 전 영화는 못 봤어요.

잠자냥 2022-05-04 09:35   좋아요 2 | URL
괭님이 저보다 먼저 읽으신 책 엄청 많을 거예요! ㅎㅎㅎ
베아트리스 엄마 정말 찰진 욕 인상 깊습니다. 그리고 다 맞는 말...ㅋㅋㅋ

새파랑 2022-05-07 0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저 이책 구매했습니다 ㅋ 휴일에 잠자기 보다는 즐겁게 여행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축하드려요 ^^

서니데이 2022-05-07 1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