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빈코프의 <창백한 말>은 좀 신기한 소설이다. 이 작품의 명성(?)만 듣고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에 나는 이 작품을 좋아할 수 없는 독자 중 한 사람이 되겠구나 싶었다. 주인공 ‘나’가 도무지 좋아할 수 없는 유형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자아도취적인 모습도 거슬렸고 어떤 면에서는 조금 실소가 나오기도 했다. 이 책을 10대나 20대에 읽었더라면 정말 좋았을 것 같은데, 지금 내 나이에 읽기엔 테러리스트이자 혁명가인 ‘나’의 뜨거움과 허무, 냉소가 공존하는 삶의 태도와 그러면서도 자기만 혼자 지나치게 비장한 모습이 종종 중2병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200쪽 남짓 이 짧은 소설을 후딱 다 읽고 나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문장을(거기에 담긴 작가의 생각을) 다시 곱씹어보고 있는 게 아닌가.
<창백한 말>은 ‘어느 테러리스트의 수기’라는 부제를 달아도 어울릴 만큼 테러리스트이자 혁명가의 삶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인 ‘나’- ‘조지 오브라이언’은 사회주의자로서 러시아 황실의 압제에 핍박받는 민중들을 해방하기 위해 테러를 행한다. 그의 이번 암살 대상은 모스크바 총독이다. 그와 함께 이 위험한 일에 뛰어든 단원들로는 ‘바냐’, ‘표도르’, ‘하인리히’, ‘에르나’가 있다. 표도르, 바냐, 하인리히는 마차의 마부들로 신분을 위장한 채 끊임없이 총독을 따라다니며 각자 관찰한 정보를 ‘나’에게 가져다준다. 에르나는 화학자로 총독을 암살할 폭탄을 만든다. 그들이 이 암살 행위에 가담한 이유는 제각각이다. 하인리히는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해, 표도르는 아내가 살해당했기에, 에르나는 사는 것이 수치스러워서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바냐의 이유는 조금 복잡하고, ‘나’는 자신이 왜 테러의 길을 가는지 알 수 없다고 읊조린다.
‘나’는 불법적인 삶에 익숙하고 고독에도 익숙하다. 미래를 알고 싶지 않으며 과거를 잊으려 애쓴다. ‘나’에게는 조국도 이름도 가족도 없다. ‘나’는 단지 노예가 되는 것을 원치 않고 사람들이 노예가 되는 것 또한 원치 않는다. 그렇기에 혁명을 원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실존적인 고민이 늘 따라다닌다. ‘사람들은 살인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장관을 죽이는 것은 괜찮고, 혁명가는 죽이면 안 된다’고 한다. 혹은 그 반대로 말하기도 한다. 나는 어째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어째서 ‘자유의 이름으로 살인하는 것은 좋고 독재 권력의 이름으로 살인하는 것은 나쁜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14쪽)
그는 테러가 아니면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안다. 그 자신이 평화로운 삶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아편을 피우지도 않고 행복한 꿈을 꾸지도 않는다. 그러나 테러가 없는 자기 인생은 상상할 수가 없다. ‘투쟁이 없다면, 세상의 법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즐거운 자각이 없다면’ 그 자신의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나’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문득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법을 어기고, 그저 투쟁하는 것, 오직 테러를 위해 테러를 자행하는 것인가? 대의명분은 그럴듯하지만 사실 그는 그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살인을 자행하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 ‘나’와 달리 ‘바냐’는 ‘사랑’을 위해 테러에 가담한 사람으로, 조지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위해, 테러를, 그러니까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에 몸을 던지다니 이 또한 모순이다 싶어지는데 바냐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봐, 만약 자네가 사랑한다면, 많이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러면 살인도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정말로 할 수 있나?”
나는 말한다.
“살인은 언제나 가능해.”
“아냐, 언제나 가능한 건 아냐. 살인은 중죄야. 그러나 기억해 둬. 타인을 위해서 자기 영혼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어. 목숨이 아니라 영혼 말이야. 이해해 봐.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결단해야 해.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랑으로, 사랑을 위해서라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다시 스메르댜코프야. 스메르댜코프를 향해 가는 길이야.”(20쪽)
여기서 스메르댜코프는 <카라마조프 형제들>에 나오는 악의 화신 같은 인물이다. 즉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그 모든 행위는 악(惡)을 향해 가는 길일뿐이라는 것이다. 바냐는 사랑하기 때문에 살인하지 않을 수 없어 살인의 길을 가고 그럼에도 그 때문에 그의 영혼은 죽음과 같은 비탄에 잠겨 있다. 이때 그의 이 사랑은 개인을 향한 사랑이 아니다. 사람들이 노예가 되는 것이 싫어 테러를 한다는 조지처럼 바냐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암살하는 일에 동참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바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과연 세상에 사랑이란 있는가?’ 반문하며 스스로 ‘나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할 수도 없고 그 방법도 모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사랑 따위는 할 가치가 없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에르나를 곁에 두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차갑게 말하면서도 그녀를 안는다(이런 모습도 싫다). 에르나를 보면서 ‘언젠가 오래전에 그녀는 마치 여왕처럼 내게 몸을 맡겼다.’고 하더니 이제 ‘그녀는 마치 거지처럼 사랑을 구걸’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에르나 앞에서 대놓고 자기는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한다(쿨병 걸린 놈). 그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엘레나’는 유부녀이다. 그는 엘레나를 1년 전에 처음 보았고,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녀 곁에 다른 남자가 있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어 괴롭다. 그런데 내가 조지, 그가 엘레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고 표현한 까닭은 그는 정말 누군가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엘레나를 향한 열정은 있지만 그 사랑이 과연 정말 사랑일까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의 그 사랑은 뜻하지 않은 결말을 불러온다. 이 작품의 재미 는 테러리스트 저마다의 생각과 그 삶을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조지와 에르나, 엘레나, 그리고 그녀의 남편 네 사람의 관계 변화를 지켜보는 데에도 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대신 멀리 있는 사람들만 사랑한다고 말하지. 주위 사람에 대한 사랑도 없는데 어떻게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나? 진흙 속에 피투성이로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거 아나, 다른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거, 사람들에게 자기 죽음을 바친다는 건 쉬워. 삶을 바치는 쪽이 더 어렵지. 매일, 매일, 일 분 일분을, 사랑으로, 살아 있는 사람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산다는 거 말야. 자기 자신에 대해 잊어버리고, 자기를 위해 혹은 멀리 있는 누군가를 위해 삶을 구출하지 않는 것.” (45쪽)
자기 가까이 있는 사람, 즉 엘레나도, 에르나도 진정으로 사랑할 줄 몰랐던 에고이스트, 조지 오브라이언- 그의 혁명은 그래서 기술적으로는 성공할지는 몰라도 사상적으로는 실패일 수밖에 없다. 그의 이런 모습은 함께 테러를 자행하다 목숨을 잃은 동료를 생각할 때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바냐는 그런 조지의 빈틈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너는 진심으로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조지의 그런 텅 빈 마음에 사랑의 중요성을 불러일으키고자 애를 쓴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말하면서….
이런 바냐와 조지의 모습은 작가 사빈코프 그 자신의 양면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사빈코프는 귀족 집안 출신이었음에도 일찌감치 사회주의를 접하고 혁명 활동에 들어섰다. 열여덟 살에 처음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고 그 이후로도 석방과 체포를 거듭하던 중 감옥에서 탈출해 제네바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활동 중이던 러시아 혁명가들을 만나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테러에 뛰어들었다. 러시아로 돌아와 1904년 재무장관 플레베 암살, 1905년 당시 모스크바 총독이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왕자 암살에 성공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이런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때문에 대의를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으면서도 늘 윤리적으로 그 행위가 정당한지 끊임없이 스스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 그의 고뇌가 <창백한 말>의 바냐와 조지의 대비를 통해 형상화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사빈코프 그 자신은 암살을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을까 늘 주저하던 ‘바냐’의 모습에 더 가까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진흙 속에 피투성이로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던 혁명가, ‘사람들에게 자기 목숨이 아닌 삶’을 바쳤던 혁명가 ‘바냐’의 모습에서 사빈코프의 모습이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