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삶의 음악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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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설을 읽다 보면 러시아 정신을 찬양하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러시아 민중이나 귀족들의 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종종 비판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체호프도 그러했고,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서도 그렇다.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듯한 러시아인의 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비판한 작품 가운데 단연 으뜸은 이반 곤차로프의 <오블로모프>일 것이다. 안드레이 마킨의 <어느 삶의 음악>에서도 이 ‘오블로모프’에 견줄만한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이 작품의 화자는 ‘안락한 생활에 대한 타고난 무관심과 체념, 부조리한 상황에 발휘하는 끈질긴 인내심’을 가진 ‘칙칙한 삶의 집적체’ 러시아 민중을 경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뮌헨의 한 철학자가 발명한 용어인 ‘호모 소비에티쿠스’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가 이 단어를 떠올리는 공간은 눈보라에 휩싸인 우릴 지방의 어느 기차역이다. 연착으로 도무지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기차를 기다리던 화자는 자신처럼 이 기차역에서 열차가 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여러 사람들, 그 무력한 이들을 바라보며 불만족스러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은 왜 이토록 무기력한가, 기차가 몇 시간이나 연착하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불평도 터뜨리지 않고, 불만도 없이 다들 입을 꾹 다물고 기다릴 뿐이다. ‘호모 소비에티쿠스’ 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가! 동포들 사이에 묻혀서 그는 머릿속으로 그 철학자의 지혜를 찬미한다. 러시아인들, 그들은 기차가 여섯 시간 째 연착하고 있음에도 ‘여러 밤을 더 이곳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아예 여기서 발붙이고 사는 것에도 익숙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 어디 그뿐인가! ‘저렇게 바닥에 신문지를 펼치고 라디에이터에 등을 기댄 채로, 먹을 거라고는 통조림밖에 없을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운명이려니, 숙명이려니 하고 묵묵히 받아들일 인간들이다.

그는 넌더리가 난다. 대합실의 이 맥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악몽 같다고 느낀다. ‘문명 세계로부터 아득히 떨어진 이 작은 마을들에서 삶이란 기다림과 포기’ 그리고 그저 ‘신발 깊숙한 곳의 촉촉한 온기’일 따름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눈보라에 휩싸인 이 기차역은 이 나라 역사의 축소판’이며, ‘뿌리 깊은 그 본성의 축소판’이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행동하지 않는다. ‘행동에 나설 여지를 싸잡아 비웃어 버리는’ 공간이며, ‘시간을 집어삼키고 일체의 기한과 기간과 계획을 균일화하는, 차고 넘치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내일’은 그저 ‘아마도 주어질 하루’에 불과할 뿐이며, ‘이 공간과 눈(雪)과 운명이 허락하게 될 하루’를 의미할 뿐이다. ‘러시아적인 것’이 무언인지 묻는 혐오스러운 질문에 그는 ‘역사’의 외부에 자리한 나라, 5세기에 걸친 노예 상태, 스탈린 등등 온갖 부정적인 단어만을 떠올린다.

그에게 ‘호모 소비에티쿠스’는 이렇듯 저 옛날의 ‘오블로모프’,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숨만 쉬던 ‘오블로모프’처럼 주어진 삶에, 운명에 굴복하고 무기력하게 순응하고 마는 러시아적 삶의 모든 것을 뜻한다. 이 나라 사람들은 아마도 이따금 발생하는 기차 연착을 제외하고는 ‘자기들이 사는 나라는 천국’이라 여기고, ‘느닷없이 확성기에서 전쟁 발발을 알리는 냉혹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대도  몸을 털고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전쟁을 맞을 준비를 하고 고통과 희생을 감수할 것’이다. 그들은 ‘이 누추한 이 기차역, 철로 너머로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의 추위 속에서 굶주림이든 죽음이든 삶이든 그 모두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면서’(19쪽) 그 삶에 순응하고 말 것이다. ‘호모 소비에티쿠스’ 그들은 말이다.

동포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이렇듯 차갑고 냉소적이다. 연민은커녕 공감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 그 자신은 러시아인이 아닌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든다. 물론 그 또한 그 무리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인지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자신은 그들과 조금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은 그 무리를 ‘호모 소비에티쿠스’라 부를 권리, 명명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아니 그렇게 부름으로써 그들과 나를 다른 존재로 분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약한 갈대일지언정 스스로 그렇다는 걸 알기’에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는 이런 자기의 생각을 ‘인텔리겐치아의 낡고 교활한 논리’(20쪽)라고 자조하기도 한다. 이렇듯 이 작품의 화자는 러시아인이면서도 러시아인 무리와 거리를 두고 그들의 어떤 특성을 몹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이 화자는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태어나 볼가 지역에서 자라고 모스크바대학을 나왔음에도 프랑스로 망명을 선택한 작가 안드레이 마킨 그 자신을 떠올리게 한다.  

여행 중 망명을 신청했다니, 조국에 대한 염증이 얼마나 컸기에 그러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은 이미 그곳을 벗어났기에 그들과는 다르다고, 그들은 ‘호모 소비에티쿠스’라고 거리를 두면서 러시아인들의 순응적인 삶을 비판하면서 냉소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렇게 책장을 조금씩 넘기려니, 이 냉소적인 화자는 이윽고 이 숨막힐 듯한 공간에는 어울리지 않는 어떤 소리, -청명한 음악 소리를 듣고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그는 한 어두운 공간에 다다라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은 한 노인을 발견한다. 노인은 피아노를 치며 킬킬 웃고 있다. 이 노인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모스크바로 떠나는 기차가 마침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화자와 노인은 열차에 함께 오른다. 그리고 노인은 이 냉소적인 청년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 당시 난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믿었다오.” 이렇게 입을 여는 그, 노인의 이름은 ‘알렉세이 베르그’로 그는 한때 촉망받는 피아니스트였다.

<어느 삶의 음악>은 엄밀히 말하면 이 노인, 이제는 어느 간이역에서 피아노를 치며 킬킬 웃는 이 노인의 이야기이다. 피아니스트로서 전도유망했던 청년은 어쩌다가 이리 몰락한 모습으로 시골 간이역에서 자신의 신분을, 과거를 숨기듯 피아노를 치고 있는 것일까? 그의 지나간 나날을 좇다 보면 인생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님을, 특히 이 화자가 그토록 경멸했던 ‘호모 소비에티쿠스’로서의 삶은 더더욱 그렇게 되기 어렵다는 것을, 그런 강압적인 체제 아래에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밀고와 숙청으로 점철된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는 좋아하는 일을 하기는커녕 살아남는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기적일 수 있음을, 그러한 삶 자체가 누군가의 눈에는 운명에 순응한 비겁하고 무기력한 인생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런 체제 아래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숭고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화자는 더 이상 ‘호모 소비에티쿠스’를 경멸적인 단어로 쓰지는 못하리라. 그리고 지금은 러시아가 아닌 곳에서 프랑스어로 조국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작가 그 자신도 그것을 알기에 이런 작품을 쓴 것은 아닐까. 제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도 ‘저마다 자기 삶의 여린 불꽃에 조심조심 입김을 내불고 있는 듯’(21쪽) 살아간다는 것을 이 작품은 조용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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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26 16: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삶의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노인의 이야기 궁금하네요. 저도 찜해갑니다.

잠자냥 2022-09-26 20:23   좋아요 1 | URL
ㅎㅎ 받아들이기 나름인 작품 같습니다!

mini74 2022-09-26 1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심조심 그렇게 살아가는 삶은 어떤 모습인지 저도 궁금해요 ~ 몰락한 피아니스트의 사연도 궁금하고. 자냥님 글은 언제나 참 좋습니다 *^^* 부러워요 ㅎㅎ

잠자냥 2022-09-26 20:24   좋아요 2 | URL
네, 그 피아니스트의 삶이 참 기억에 남네요. 짧은 소설이라 금방 읽으실 거예요.

Falstaff 2022-09-26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이젠 잠자냥 님 리뷰가 뜨면, 윽, 혹시 또 리뷰 백일장?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깝쇼? ㅋㅋㅋㅋ

잠자냥 2022-09-26 20:27   좋아요 1 | URL
ㅎㅎ 제가 너무 잘 써서요? ㅋㅋㅋ 농담입니다. 저는 그렇게 많이 참가하는 편도 아닌데요. ㅎㅎ 이번 달도 여러 개 있는 것 같던데, 관심 없는 책이 많아서 패스합니다. <고독한 얼굴> 같은 경우는 설터 작품이라 옳다구나 하고 읽었는데 전 작품이 그닥 와닿지 않아서 그것도 참가 포기! 암튼 이 책은 리뷰 대회 대상 도서 아닙니다요~

독서괭 2022-09-27 1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기 삶의 불꽃에 조심조심 입김을 내불고 있는 듯 살아간다니.. 참 인상적인 표현이네요. 다른 사람의 삶을 한심스럽게 여기기는 쉽지만 막상 자세히 들여다보면 진짜 그럴지..^^ 망명자로서 조국에 대한 애증이 묻어나올 것 같습니다. 리뷰가 물흐르듯 읽혀서 좋아요🥰

잠자냥 2022-09-27 12:52   좋아요 2 | URL
네, 작가가 자기 나라의 어떤 부분을 참을 수 없어 망명했지만 결국 조국에 대한 애정을 고백한 작품으로 읽혔습니다. ㅎㅎ

공쟝쟝 2022-09-28 00: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토록 차분한 글이라니......... 역시.... 자기 자신이 최고일 수 밖에 없는 오만한 사람답군... 그러나 나는 잠자냥의 본질을 알고 있다... (동네 사람들...읍읍...이 사람 페x인데edp...마니아고요...)
읽으면서 이 작품 화자 좀 별로다 했는 데 ㅋㅋㅋㅋㅋ 돌려까기 했나보네요? ㅋㅋ 인생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죠. 그런 인생들을 냉소할 정도의 지성(전 냉소는 지성의 산물이라 생각하지만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보지만 나는 냉소 안하고는 못견디겠는 똑똑한 노동자인지라 ㅋㅋ...)을 갖췄으면 이 정도의 글은 써서 남겼어야죠. 음, 좋은 소설일 것 같습니다.

잠자냥 2022-09-28 10:17   좋아요 1 | URL
댓글과 달리 차분한 글을 쓰는 잠자냥은 오만을 다부장님에게 배웠어요. edo도 다부장님에게 배웠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9-28 10:27   좋아요 2 | URL
부장님… 차분한 잠자냥에게 무슨짓을 한거냐능… 사실 나도 의식의 흐름 기법 다부장한테 배웠…(쿨럭…)

mini74 2022-10-07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냥님 아까 은근슬쩍 적립금 자랑하신 댓글 봤습니다 ㅎㅎ
축하드려요 *^^* 연휴동안 고냥님들과 행복하게 보내시길 ~~

잠자냥 2022-10-07 22:16   좋아요 1 | URL
ㅋㅋㅋ 은근 슬쩍 아니고 대놓고 했습니다! ㅋㅋㅋ 미니 님도 늘 당선 축하드리고요~~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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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때였다. 그날은 어쩐지 자연스럽게 ‘죽음’이 화두로 오갔다. 나는 언젠가는 스위스에 가서 죽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한 친구와 또 다른 친구가 자못 놀라며 자신들도 그런 생각을 하노라고 고백했다. 그때까지 툭 터놓고 이야기한 적은 없었지만 그날 우린 조금 놀랐다. 아, 너도 그렇구나, 아, 역시 내 친구인가 하는 그런 기분도 조금은 들었다. 우리에게 스위스에서의 죽음은 남달랐다. 스위스는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는 나라이다. 서른을 훌쩍 넘긴, 거의 비혼 여성들인 나와 내 친구들은 하나 같이 언젠가 혼자 맞을 죽음을 생각한다. 나이 들어서도 병들지 않고 건강할 수 있고 여전히 활력 넘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인생은 그럭저럭 괜찮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노화하고 병들고 누군가에게 언젠가는 짐이 될 수 있다. 꼭 타인에게 짐이 되는 것이 아니더라도, 내가 나 자신에게 스스로 짐이 될 수도 있다. 나도, 내 친구들도 그런 순간이 오기 전에, 나의 죽음을,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선택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힌 것이다.

여섯 명이 모인 자리에서 세 사람이 존엄하게 내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고 털어놓은 것이다. 그날 그 자리에는 나의 연인도 함께 있었는데 나와 친구들보다 조금 어린 내 연인은 그런 이야기들을 놀라운 눈으로 가만히 듣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조금 우울하고 조금 섭섭하고 또 조금은 황망한 얼굴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언젠가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렇게 염세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노라고 울적해하며 이야기했다. 자신과 함께 지내는 날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그것과는 좀 다르다고, 지금 행복하고 만족할지라도 세상이, 인생이 그리 만만하지 않고 산다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 아니냐고, 그리고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고 나 스스로 정신이 또렷할 때 죽음을 선택하는 게 왜 나쁜 일인지, 누군가를 우울하게 만드는 일인지 모르겠노라고 말했다. 어쩌면 너도 얼마쯤 더 살아보면 이런 생각을 이해하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슈테판 츠바이크는 ‘자유의지와 맑은 정신으로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의무’를 다하겠노라 말하며 유서를 남겼다. 그때 그는 맑은 정신이었다. 한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이 세상을 등지기를 선택했다. 나치에 점령당한 조국을 떠나 브라질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그곳을 사랑하게 되었음에도 그에게 세상은 더 이상 삶을 지탱할 만한 곳이 아니었고, 예순이 넘은 나이에 모든 일을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또 엄청난 힘이 필요한 일이었다. 고향 없이 떠돌며 여러 해를 보내느라 그의 힘은 바닥이 난 상태였다. 그러므로 그는 ‘개인의 자유를 지상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던 사람으로서 적절한 시기에 올바른 태도로 생을 마감’하기를 선택한다. 장 아메리는 이러한 죽음을 단지 자살이라 칭하지 않고 ‘자유죽음’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 자유죽음은 ‘지극히 자연적’이며 ‘그것도 드높은, 유일하게 우리 손으로 설정한 기준, 즉 존엄성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죽음’(97쪽)이라고 역설한다.

누군가는 장 아메리의 이런 주장을 극렬히 비난할 것이다. ‘자유죽음’? ‘자살’을 예찬하다니! 칭송하다니! 이런 불온한 자가 있는가! 격분하는 이도 있으리라. 그것은 신의 섭리에, 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행동이며 사회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주장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비난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아니 전 지구적으로 자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 장 아메리가 명명한 ‘자유죽음’을 선택한 이들은 죽어서도 비난받기 일쑤이다. 그들의 동료나 가족들도 덩달아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자살은 언제나 숨겨야 할 비극적 사건이 되고 만다. 그렇게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살아가야 한다고 훈수를 놓기도 한다.  

그러나 이쯤에서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사회와 종교는 왜 한 개인에게 이 세상을 아무리 힘겹고 구차할지라도 인간이라면 태어났으니 끝까지 살아가야 한다고, 살아서 인간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렇게 인간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은 비난받아 마땅한 존재로 치부하는 것일까? 아메리가 지적하듯이 ‘개인이 사회의 소유물’인가? 인간은 과연 ‘누구에게 속하는 존재’일까? 이 사회는 한 사람을 판단할 때 그의 쓸모, 즉 ‘기능성’을 두고 판단한다. 그래서 ‘인재(人材)’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쓴다. 인재를 육성한다고, 사회의 재목(材木)이자, 재료(材料)가 되는 사람을 기른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훈육당한다. 때문에 사회에서 불필요한 인간, 즉 쓸모가 없는 사람들, 이를테면 우울증으로 종일 누워 지내며 생산에 종사하지 못하는 사람, 동성애자로서 이 사회를 유지하는 데 기본이 되는 생식 행위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더 이상 재료이길 거부하는 ‘자유죽음’ 선택자들은 모두 지탄받아 마땅한 대상이며, 사회는 언제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런 인간을 치료하고 갱생하려 든다. 그러나 나는, 과연 누구의 소유인가? 나는 누구에 속하는 존재인가?

장 아메리는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존재’라고, 그 자명한 사실을 다시금 일깨운다. 그러므로 ‘살아야만 한다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존재’(181쪽)가 또 인간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또는 그 이상으로 삶에서 도무지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애초부터 삶 그 자체가 그럴 수도 있다. ‘돌이킬 수 없이 실패하고 만’ 상태, 그것을 아메리는 ‘에셰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에셰크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이 자유죽음으로 인간은 인간성과 존엄성을 방패로 삼아 이 에셰크에 맞설 수 있다. 자유죽음은 에셰크에 대한 유일한 대답으로서 언제나 에셰크를 담고 있는 인생에 대한 저항이다. 막다른 골목에 서 있으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실패 상태로 내내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아니면 자기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유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장 아메리는 에셰크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 반자연적이기 때문에 자연적인 죽음,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자 자유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츠바이크에게는 자유 없이 나치에 지배당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그런 에셰크 상태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보다는, 자유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츠바이크처럼 이렇게 ‘스스로 손을 내려놓는 사람’은 생의 부자연스러움, 생의 압박, 생의 에셰크로부터 벗어나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자유를 선택’(159쪽)했기에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최후에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서의 ‘자유’(225쪽)를 만끽하게 된다. 쓸모, 즉 사회에 필요한 ‘기능성의 대상’에서 에셰크 상태의 인생을 자각하는 인간, 하나의 존재로 자리했다가 자유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그는 진정한 자유로운 존재, 해방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것을 과연 비겁한 도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인간 개개인에게 벅차기 짝이 없는 인생을, 그저 달콤한 생이라고, 언젠가는 이 씁쓸한 생을 참고 견디며 살아가다보면 마침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무감각한 정신으로, 이른바 ‘정신승리’하면서 단지 사회에 쓸모 있는 ‘기능성의 대상’으로 하루하루를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도피가 아닐까?

그렇다면 모두가 세상에, 이 세계의 에셰크에 저항해 죽어버리란 말인가? 자유죽음을 선택하라는 소리인가?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장 아메리는 인간이 자유롭게 자기 죽음을 선택할 권리, 즉 실존의 한 존재로서 자유죽음을 선택할 그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역설할 뿐이다. 내가 나의 죽음조차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면, 그조차도 사회의, 종교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그것은 과연 인간인가? ‘인간이 자신에게 목숨을 던져버리겠어’ 하고 말하는 순간, 그는 한없이 자유로워질 수 있고 그 체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강렬하다. 마치 품안에 사직서를 갖고 다니면서,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노동자가 그렇지 못한 노동자보다 자유로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이런 자유죽음은 ‘인생과 관련한 모든 거짓말을 회수하게 만든다’(258쪽). 자유죽음을 선택하거나 그러기를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이 달콤하다는, 지금은 씁쓸해도 언젠가는 그에 대한 보상을 반드시 받을 것이라는 사탕발림에 속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인생의 불손함, 사탕발림에 맞서는 당당함을 품고 살아갈 수 있다.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자유에 이르는 길은 결코 찾을 수 없다. ‘이런 당당함이 없다면 철조망 가까이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수용소의 포로와 마찬가지’(264쪽)이다. 생은 ‘인간다운 존엄과 자유가 없는 인생’으로부터 빠져나오라고 인간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자유죽음은 이런 인생의 모순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죽음은 곧 삶이 되며, 언제든 내가 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신감, 자부심, 당당함, 죽기로 각오하고 인생의 모순인 에셰크에 맞서는 당당함은 결국 ‘삶의 길을 열어준다. 그래서 부정이 돌연 긍정’이(264쪽) 되는 것이다. 자살할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살아가라, 가 아니라 언제든 나는 내 죽음을 한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임을 자각하고, 그 당당함으로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이 전하는 뜨거운 역설이다. 스위스에서의 죽음을 이야기하던 그날, 우리는 우울하지도 슬프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돈 모아서 같이 떠나자! 의기투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 여행이 너무 좋아서 죽기는커녕 도리어 행복하게 돌아오는 거 아니야? 하고 웃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속에 언젠가는 스위스에서의 죽음, 나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그날을 품고 살아가기에 우리는 이 생에서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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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8-22 12: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읽다가 ‘슈니츨러‘의 <구스틀 소위>가 너무 읽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런데 검색해보니 구스틀 소위란 제목으로는 책이 눈에 띄지 않았어요. <카사노바>가 실린 책을 제가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렇지만 구스틀 소위, 구스틀 소위를 읽고 싶습니다. 소위의 내적 갈등을 읽는 것은 같이 생각하며 한껏 철학적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저는 아직 나의 죽음을 내가 선택하겠다, 자유죽음을 맞이하겠다, 라고 결심하지 못하겠어요. 그런데 장 아메리의 이 책을 읽은 건 너무 좋았어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달래주는 방법을 또 하나 알게된 것 같아서요.

혹시 잠자냥 님, 구스틀 소위 읽으셨나요? (구스틀 소위에 대한 집착..)

잠자냥 2022-08-22 12:30   좋아요 2 | URL
다부장님, 전 <구스톨 소위> 읽었지롱요~ ㅋㅋㅋㅋㅋ 부럽죠? 알려줄까 말까...ㅋㅋㅋㅋㅋㅋㅋ

을유에서 나온 <라이겐>에 구스톨 소위가 있습니다요.

다락방 2022-08-22 12:31   좋아요 2 | URL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 잠자냥 님은 구스틀 소위 읽었을 줄 알았어.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아무튼 검색하러 갑니다. 슝 =3=3=3=3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잠자냥 2022-08-22 12:35   좋아요 1 | URL
저도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구스톨 소위!

독서괭 2022-08-22 12:59   좋아요 2 | URL
이렇게 다락방님은 또 한번의 책박스를 받게 되고.. 몇주뒤 뜯은 택배를 보며 라이겐?? 이걸 내가 왜 샀지? 고민하게 되는데…

다락방 2022-08-22 13:47   좋아요 5 | URL
그러면 저는 아마 알라딘에 페이퍼를 쓰겠죠. 박스에서 튀어나온 이 책을 대체 내가 왜 산것인지 모르겠다, 하고요. 잠자냥 님과 독서괭 님 둘 중 한 분은 제 페이퍼에 답을 달아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사는 걸로........(응?)

독서괭 2022-08-22 13: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의 리뷰가 넘 설득력이 있는데요?? 저도 안락사 선택이 가능하면 좋겠습니다. 죽는 날을 정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돌연사보다 훨씬 낫지요.. ㅜㅜ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살아가야 한다는 훈수는 참 주제넘은 것 같아요. 자살자를 비난할 수 있는 자격은 미성년자녀에게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삶을 사랑하는 것과 반대는 아니라고도 생각하고요! 근데, 자냥님 짝꿍님 반응이 귀여우세요 ㅎㅎㅎ

잠자냥 2022-08-22 14:09   좋아요 3 | URL
책이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 ㅎㅎㅎ
그 사람 그때 시무룩한 얼굴이 잊히지 않네요. 근데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던 제 말에도 시무룩 하던 그 사람.... 지금은 자기도 다시 태어나고 싶지는 않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늙어가는 것이죠. ㅋㅋㅋ

초란공 2022-08-22 13: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장 바라는 죽음은 일본 영화 <인생 후르츠>에 나오는 할아버지처럼 오전에 밭일하고 오후에 낮잠 자다가 죽는거에요. ‘자유죽음‘까지는 아직 용기가 안나고요. ^^;; 삶을 정리하고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 있디면 하고 바랍니다.

잠자냥 2022-08-22 14:10   좋아요 1 | URL
<인생 후르츠> 그 영화도 삶과 죽음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참 울림 깊은 영화였습니다. ㅎㅎ
저 또한 제 삶을 정리하고 또렷한 정신으로 사라질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페넬로페 2022-08-22 1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위스에서의 안락사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돈도 많이 들고 죽음을 선택할 이유가 아주 뚜렷하고 명백해야하고요.
저도 잠자냥님의 연인처럼 혼자 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옆에서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주고 싶은데~~
더 늙어서 제 몸을 주체 못하면 그때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어요^^
자유죽음에 대한 용기가 아직 없어요~~

잠자냥 2022-08-22 15:07   좋아요 2 | URL
쉽지 않겠지요, 쉽지 않아아 한다고 생각하고요-ㅎㅎ
그러다 보면 죽음을 선택할 권리도 결국 부(富)에 의해 좌우되는가 해서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안락사에 대해서 너무나 쉬운 사회라면 그것도 또 나름의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목련 2022-08-22 15: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든 책은 잠자냥으로 통한다. 알라딘에서 책에 대한 질문은 잠자냥 님께로~~
저도 구스톨 소위가 궁금했거든요.

잠자냥 2022-08-22 15:43   좋아요 1 | URL
하하, 아닙니다! 저도 모르는 책이 수두룩한데요!
오늘은 저도 집에 가서 구스톨 소위 다시 읽어야겠어요~

유부만두 2022-08-22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도 파도 끝이 없는 화수분 잠자냥님

잠자냥 2022-08-22 16:10   좋아요 1 | URL
돈이 좀 그랬으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2-08-22 17:19   좋아요 1 | URL
책 질문에 모두 답해주시잖아요. 이제 질문당 돈 받으;;;;;

바람돌이 2022-08-22 16: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에고 저는 죽으려고 스위스까지 가기는 너무 귀찮고, 그냥 저 죽을때쯤이면 우리나라도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뭐 그렇습니다. ㅎㅎ

잠자냥 2022-08-22 17:00   좋아요 3 | URL
ㅋ 저도 그렇기는 한데, 우리나라 종교 집단들 행태를 보면 그런 일에 극렬 반대하고 나서서 좀처럼 어려울 거 같습니다... ㅎㅎㅎ

2022-08-22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2 2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2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2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2-08-22 18: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쉬......... 여기서 나와 잠자냥은 통한다!! 저는 비록 이번에 네덜란드가느라 스위스 존엄사 비용을 탕진했지만, 다시 또 부지런히 모을 예정입니다ㅋㅋㅋ .... 이 책 많이 읽으면 좋겠네요. (나나 읽자) 읽지 않아도, 요 책 리뷰만 읽어도 전 이미 자유 죽음론자 일거 같긴 한데 ㅋㅋㅋ 근데 좀 부럽습니다. 제가 이런 말 하면 내 주위 사람들은 넌 참 요상한 생각을 하는 애다.... 으으, 이러는 데... 토론을 했는데 과반수 이상이 존엄사를 선택 하다니-ㅋㅋㅋ (그 술자리 참 좋은 술자리다ㅋㅋㅋ)

잠자냥 2022-08-22 22:04   좋아요 1 | URL
ㅋ 역시 쟝쟝은 그럴 줄 알았어요. 돈은 또 모으면 되는 거고! 가슴 속 사표처럼 스위스는 맘속에 품고 살면 되는 겁니다. 내 친구들 술자리가 좀 말이 통합니다. ㅎㅎ

coolcat329 2022-08-22 19: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늘 우리나라도 안락사를 허용하면 좋겠다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인데요...사실 연명 치료 중단도 굉장히 오랜 세월 논의 끝에 시행되었잖아요. 그래서 쉽지 않을 거 같지만 이 책은 꼭 읽어 보고 싶네요.
구구절절 제 생각과 맞아서 너무 반가웠어요. ㅠ

잠자냥 2022-08-22 22:06   좋아요 1 | URL
네, 오래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쿨캣 님도 꼭 한번 읽어보세요. 더 구구절절 공감하며 읽으실 거예요.

케이 2022-08-24 14: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결혼 전에는 우리 엄마 돌아가시면 좀 더 살다 늙으면 혼자 죽어야지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엄마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고 나니 늙으면 스스로 죽겠다는 말이 단 한 번도 죽음을 목전에 둔 적 없는 자로서 자만 혹은 교만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편안한 죽음이 아닌 개죽음을 맞더라도 난 우아하게 죽을 수 있는가? 자문해보니 그건 또 아니더라고요.
가끔 불행한 타인의 삶을 보면서 쉽게 저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는 말도 하는데, 죽도록 불행한 그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만약 안락사가 허용된다면, 살고 싶어도 가족들 등쌀에 마지못해 죽을 결심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예전에 신문에서 ‘인욕‘ 이란 한국 고유의 정서가 있다는 글을 봤어요. 욕됨을 인내한다는 뜻으로 한마디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단 말인데, 겸허히 죽음을 수용 혹은 선택하는 것만큼이나 삶을 유지하는 것도 숭고한 것이란 생각이 드는 오후입니다.
그런데 우리 엄마 같은 경우, 그러니까 의료진이 무슨 짓을 해도 6개월 이상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 남은 절차라곤 사지의 모든 기관이 마비되어 가는 것뿐일 경우에는 제발 편히 죽게 해줬으면 좋겠더라고요. 너무 잔인하잖아요..
처서 지나니 날씨가 확 변했어요. 언제나 건강하시고 또 좋은 글 부탁드려요!

잠자냥 2022-08-24 15:31   좋아요 1 | URL
맞아요. 늙으면 스스로 죽겠다는 말도 어쩌면 교만일지도 몰라요. 저 또한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하거든요.
죽음도 삶도 수용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어떤가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케이 님 어머니처럼 육체의 고통이 너무 클 때는 연명이 어떤 의미일까 더 고민하게 될 거 같아요.
아무튼, 날이 정말 선선해져서 깜짝 놀란 아침입니다. 케이 님도 쌍둥이들하고 건강 잘 챙겨요~

모과차 2022-10-22 0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금 전에 인스타에서 이 책에 대한 소개를 읽는데, 익숙한 이름이 있더군요. 잠자냥님의 리뷰가!ㅎㅎ 그동안 알라딘을 이용하면서 잠자냥님의 리뷰를 정말 많이 접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큰 도움이 됐어요. 이렇게 댓글을 남기는건 처음이지만요. 저는 잠자냥 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1도 없지만, 글이 참 따뜻하다는 생각은 자주 했습니다. 믿고 읽는 리뷰, 항상 감사드려요. 앞으로도 이렇게 남몰래, 조용히, 그렇게 읽겠습니다!ㅋㅋ

잠자냥 2022-10-22 01:2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모과차처럼 향기롭고 따뜻한 댓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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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참 좋아하게 된 이 말.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를 읽는 내내 이 말이 떠올랐다. 출퇴근길, 전철을 타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무언가를 보거나 듣고 있다. 조그만 스마트폰에 온 정신을 쏟아 붓느라 주변을 돌아볼 새가 없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도, 길을 걸을 때도 그 작은 화면이 전달하는 내용에 푹 빠져서 그 조그만 창을 제외하고 다른 세상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화면에 심취한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정보에 몰두하고 사용자의 취향을 분석한 스마트폰은 계속해서 비슷한 카테고리의 정보들만 실어다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정보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어떤 콘텐츠나 그것을 생산한 사람의 생각과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을 인지할 틈도 없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 정보로 자신이 무언가를 ‘알게’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그 모래알 같은 정보로 마치 이 세상의 거대한 진실을 깨우친 것 마냥 타인에게 자기의 주장이나 주의를 강화하고 강요하며 전파하는 데 이용한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는 무언가를 정녕 알게 된 것일까? 그 어느 때보다 정보는 넘쳐나고, 정보를 손에 넣기도 쉬어진 이 시대에 왜 사람들은 나날이 더 서로를, 자기와 생각이 다른 타인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일에는 인색해지는 것일까? 도리어 한줌 모래알 같은 정보로, 그 정보가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조차 하지 않은 채, 퍼 나르고, 확산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내가 오늘도 이렇게나 많은 지식을 얻었다고, 그런데 이런 정보를 모르는 바보멍텅구리들이 세상을 망치고 있다고 더 굳게 믿게 되는 것일까? 이런 때의 ‘앎’은 자기를 일깨우는 ‘상처’가 되기는커녕 타인을 해치는 앎, 또는 무지의 영역에 있을 때가 오히려 나을 수도 있을 그런 앎이 되고 만다.

벵하민 라바투트의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를 읽는 내내 저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 나를 괴롭힌다. 이 책의 여러 과학자들-아인슈타인부터, 슈바르츠실트, 프리츠 하버, 모치즈키 신이치,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슈뢰딩거, 드 브로이, 하이젠베르크 등등은 자기 나름으로, 자신이 아는 ‘정보’, 자기의 ‘창’을 이용해 세상을 알고자, 이 세계의 구조를 알고자 애쓴다. 때로 그 노력은 자기의 주장이 옳음을, 그것이 선(善)이고 유일한 진실임을 밝히기 위해 상대를 짓밟는 형태로 일그러지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세계를 이해한 그들의 방식, 그 발견이 때로는 거대한 폭풍처럼 자신의 예상과 다른 방식으로 자기를, 인류를 덮쳐버리기도 한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으로 우리에겐 너무나 아름다운 푸른색이 되어버린 프러시안 블루의 부산물인 시안화물은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사용한 독가스 치클론B의 시원이기도 하며 공기 중에서 질소를 추출해 ‘공기에서 빵을 끄집어낸 사람’이라 불렸던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인류를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켰으나, 그 재능을 지나치게 활용하는 바람에 온갖 치명적인 독가스들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이 연금술사의 지식, ‘앎’은 혁명이면서도 상처인 것이다. 이런 지식의 ‘얼룩’은 슈바르츠실트의 특이점으로 이어진다. ‘빛은 특이점에서 결코 탈출할 수 없으므로 우리의 눈은 특이점을 볼 수’ 없으며 ‘우리의 정신 또한 특이점을 이해할 수 없다.’(71쪽) ‘물질이 이런 종류의 괴물’을 낳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정신과도 상관관계가 있으며 ‘수백만 명의 정신이 하나의 정신 공간에 압축되어 하나의 목적에 동원되면 특이점에 비길 만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음을 그는 깨닫는다. 슈바르츠실트는 그런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의 조국 독일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슈바르츠실트처럼 인류의 앎이, 몇몇 특별히 뛰어난 천재들의 지식이 인류를 블랙홀로 이끌고 갈 수도 있음을 인지한 사람은 또 있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수학자로 알려진 ‘알렉산더 그로텐디크’가 바로 그이다. 그는 아버지가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하고 어머니와 프랑스 난민 수용소를 전전하는 등 나고 자란 환경 탓인지 수학 천재로서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68혁명 시기를 전후로 사회운동에 전념하며 모든 학문적 활동을 접고 은둔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 대전 중 겪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말미암아 평생 아나키즘적·평화주의적인 정치 성향을 보였던 그는 ‘과학계의 윤리’를 운운하며 크라포르드상을 거절하기도 했다. 이것은 어쩌면 슈뢰딩거와 논쟁할 수밖에 없었던 하이젠베르크의 ‘앎’-실존의 고독과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슈뢰딩거의 재주가 아무리 모든 사람을 매혹시켰더라도 이것이 막힌 길임을, 참된 이해로부터 멀어지는 막다른 골목임’(201쪽)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론의 오류를 밝히려 할수록, 증명을 위한 증명을 할수록 자신들의 찾아낸 공식의 숲에서 떠도는 허상들만 존재할 뿐, 어떤 새로운 발견을 했다는 환희와 기쁨은 잠시, 그 이후의 깊은 고독이 그로텐디크나 하이젠베르크와 같은 이들을 사로잡는다. 그들은 어쩌면 세계를 알려고(know) 애쓸수록 세상을 이해(understand)하는 것에서는 멀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인간은 이 거대한 자연 앞에서 그저 ‘불안한 확률로서 존재할 뿐’인 그런 가련한 존재라는 것을, 그 깊은 고독을 이해한 이들은 아니었을까. ‘벌목되지 않거나 가뭄, 질병, 무수한 해충, 균류, 역병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늙은 나무’는 결국 ‘열매를 너무 많이 맺는 바람에 쓰러진다.’(198쪽) 너무 많은 지식과 정보, 앎이 오히려 나무를 쓰러뜨리는 것은 아닌지 이 책은 조용히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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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하인드 스토리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2-08-22 23:35 
    과거의 나도 주장과 근거가 맞물려 있는 글을 쓸 줄 알았다. (어쩌면 그런 게 더 쓰기 쉬웠다) 그러나 서재의 달인 뺏지도 벌써 4개 째... 이제와 나의 독후감이란 갱장히 사적(?)임을 추구하고 있어서 (일기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나 일기 너무 잘쓰지 않나요? ㅋㅋㅋㅋㅋ) 잠자냥님과 같은 알찬 리뷰 기대하고 오신 분들이 제 리뷰 읽고서 얘는 왜 여따대고 이런 소리를 한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책을 소재삼아 나의 심각한 사상(?ㅋㅋㅋ
 
 
coolcat329 2022-08-16 17: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시원한 가을에 읽으려고 아껴두고 있습니다. ㅎㅎ
기대가 너무 커서 오히려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네요 ㅋ

잠자냥 2022-08-16 21:31   좋아요 2 | URL
네, 기대를 살짝 내려놓고 읽으시면 틀림없이 더 좋을 거예요.

공쟝쟝 2022-08-16 18: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크으……. 😆

잠자냥 2022-08-16 21:31   좋아요 2 | URL
캬으…

공쟝쟝 2022-08-22 23:39   좋아요 1 | URL
이 훌륭한 페이퍼에 내 페이퍼를 링크했다. 여러분, 잠자냥은 인간과 이해와 과학에 관한 이런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엔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 따위라고 생각하는 오만한 EDPS 마니아 입니다. (그는 자신의 서재는 이렇게 아름답게 관리하면서, 남의 서재에서 댓글로 EDPS를 흘립...니다......) 폭로!!!

잠자냥 2022-08-22 23:5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정곡을 찔렀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2-08-22 23:55   좋아요 1 | URL
EDPS 마니아 공자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8-22 23:57   좋아요 0 | URL
그리고 길고 긴 이야기가 필요한 39금 다락방…ㅋㅋㅋㅋ

잠자냥 2022-08-23 00:00   좋아요 0 | URL
그런 정보를 흘리면 어떡해요!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08-17 12: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읽고 싶어 사두었는데 어떤 책인지도 모르고 읽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잠자냥 님의 리뷰를 보니 도대체 이 책은 어떤 책인지 더 알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제가 읽는게 답이겠지요.
저는 이 책이 과학 에세이인줄 알고 샀는데 나중에 소설이란 걸 알게 됐거든요? 읭? 소설이라고? 했는데 잠자냥 님 리뷰를 읽으니 아니, 과학에세이인가?? 막 이렇게 되어버려가지고... 아무튼,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잠자냥 2022-08-17 13:16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이 책의 묘미가 그 아리송함에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논픽션일까요~~~? 재미나게 읽으세요. 소설 맞습니다!

자목련 2022-08-17 17: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이 넘 어려워서 읽는 일도 힘들었느데 잠자냥 님의 리뷰를 읽으며 다시 정리합니다. 어찌 이리 훌륭한 리뷰를 쓰시는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대단해요!

잠자냥 2022-08-17 22:26   좋아요 2 | URL
아이고, 아닙니다! 이 책은 읽고 글로 써보니, 확실히 더 정리가 잘 되네요. 자목련 님 리뷰도 기대하겠습니다!

그레이스 2022-08-20 12: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해하기를 멈추라는 건지, 멈추면 안된다는 건지^^ 여기서부터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

공쟝쟝 2022-08-22 23:36   좋아요 3 | URL
맞아요 ㅋㅋㅋㅋㅋㅋ 끄덕끄덕...

mini74 2022-09-08 09: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냥님 ㅎㅎ 축하축하 ~ 어여쁘신 고냥님들과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

잠자냥 2022-09-08 10:02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미니 님도 즐거운 한가위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9-08 09: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잠자냥님~~
간식은 맛있게 드셨나요?

잠자냥 2022-09-08 10:04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간식은 아직 다 못먹었습니다. ㅎ
 
세피아빛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6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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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사람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상은 다를 수 있는데, 나는 주로 예술 작품을 대할 때 ‘아름답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중에서도 문학을 읽을 때, 종종 그런 강렬한 경험을 한다. <세피아빛 초상>은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세계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의미, 그러니까, ‘예쁘고 고운’ 세계에 가까워서가 아니다. 이 작품에는 분명 기만, 배신, 증오, 미움, 질투, 폭력이 존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아름답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무언가 북받쳐 오르는 느낌, 정신적으로 고양되는 느낌을 받게 되고, 그러다 마침내 아름다움의 사전적 정의 중 하나인 ‘감탄을 느끼게 하거나 감동을 줄 만큼 훌륭하고 갸륵’한 그 무엇 때문에 끝내 ‘아, 아름답다’ 하고 중얼거리게 된다.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은 처음 읽는다.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 때문에 그의 작품도 여태껏 읽지 않았다. 후회한다. 나의 이 편견과 편식은 이렇게 나를 스스로 옭아매고 제한한다. 이 멍텅구리! 편견을 깨고 일찌감치 이 작품을 읽었다면 너는 이 아름다운 세계를 진작 알았을 테고, 그 아름다움의 바다를 유영하며 좀 더 행복했을 텐데!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다. 내가 지금에 이르러, 그러니까 그 아름다움의 세계를 풍요롭게 만끽할 수 있을 나이에 이르러 그녀의 작품을 읽게 되어서, 그리고 앞으로 만날 그 세계가 더 많이 남겨져 있으므로…. <세피아빛 초상>은 <운명의 딸>, <영혼의 집>과 함께 이사벨 아옌데의 칠레 여성상을 대변하는 삼부작 시리즈라고 한다. <운명의 딸>-<세피아빛 초상>- <영혼의 집> 순서로 읽는 게 가장 좋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작품은 반드시, 꼭, <운명의 딸>을 먼저 읽고 읽어야 하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할 것 같다. 아옌데를 처음 만났지만 <세피아빛 초상> 한 권만으로도 문학이 줄 수 있는 온갖 아름다움을 호사스럽게 누렸기 때문이다.

<세피아빛 초상>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어떤 면에서는 이 작품의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책을 읽을 다른 이의 독서의 즐거움을 얼마쯤은 빼앗는 무례한 일이 될 것이다. <세피아빛 초상>의 맨 앞장을 펼쳐보면 가계도가 나온다(미리보기로도 확인할 수 있다). 엘리사 소머스, 타오 치엔, 펠리시아노 로드리게스 데 산타 크루스, 파울리나 델 바예, 럭키, 린 소머스, 마티아스, 세베로 델 바예, 니베아, 아우로라 델 바예, 디에고 도밍게스, 도나 엘비라, 돈 세바스티안 도밍게스 등등 익숙한 듯 낯선 이름들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다. 어떤 관계는 결혼한 사이이고, 그 사이에 자식들이 이어져 이렇게 만나는구나, 한눈에 쓱 훑어볼 수 있지만 이 가계도를 보면 시작부터 조금 겁을 집어먹게 되기도 한다. 아니, 이 많은 등장인물이 얽히고설키는 거야? 엄청 복잡한 이야기인 거 아니야? 실제로 작품 초반에는 낯선 이름이 여럿 등장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의 관계를 다시 따져보느라 가계도를 여러 번 펼쳐봐야만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모든 이야기가 아아,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하면서 더는 가계도를 보지 않게 된다.

복잡한 가계도를 맨 앞장에 소개한 이유는 이 작품이 이 집안들, 그러니까 크게는 ‘델 바예’, ‘소머스’, ‘도밍게스’ 등등의 성(姓)을 쓰는 여러 집안, 그리고 그 집안 구성원 개개인의 이야기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중에는 좀 더 중요한 사람이 있고 중요도가 덜한 사람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인 ‘아우로라 델 바예는’ <세피아빛 초상>의 화자로, 작품은 ‘나는 1880년 가을 어느 화요일, 샌프란시스코의 외할아버지 댁에서 태어났다.’로 시작한다. 아우로라의 외할아버지가 ‘타오 치엔’으로 이 특이한 성(姓)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중국인이다. 타오 치엔과 ‘엘리사 소머스’ 그들의 손녀딸인 아우로라는 어쩌다가 ‘델 바예’라는 성(姓)을 쓰는 처지가 되는지, 그녀의 출생과 성장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사실 아우로라는 중국인의 피가 흐르기는 하지만 중국인이라고는 볼 수 없는 외모에 부모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생아이다(독자는 어느 지점에서 알게 된다). 게다가 어린 시절 받은 큰 충격 때문에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은 깡그리 잊고 만다. 그런 그녀가 부와 권력을 주무르는 여왕 같은 할머니 ‘파울리나 델 바예’의 집에서 자라면서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과 가계의 비밀을 퍼즐 맞추듯이 찾아가기 시작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퍼즐 맞추듯이 과거를 훑으며 한 사람의 인생을 재구성하는 흥미로운 이야기 흐름에 있다. 소설은, 문학은 문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야기의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 나에게 <세피아빛 초상>은 이야기의 힘, 플롯의 힘을 오랜만에 만끽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게다가 작가가 인물 개개인을 묘사하는 방식도 마음에 든다.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완벽하지 않다. 어느 한 부분, 또는 그 이상의 나약함과 모순, 상처를 지니고 있다. 훌륭한 사업 수완으로 델 바예 집안을 일으키다시피 한 파울리나는 오랜 외국 생활로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고, 보수적이고 위선적인 칠레 사회를 숨막혀한다. 하나뿐인 손녀에게는 그런 교육을 시키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불가지론자이고 사회주의자이며 여성 참정론자’라고 밝힌 마틸데 피네다 양을 아우로라의 가정교사로 고용한다. 그 세 가지는 칠레 사회에서 어떠한 교육 기관에도 고용되지 못할 이유로 충분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강인한 여장부임에도 아우로라의 과거에 대해선 사실대로 털어놓지 못하고 두려워한다. 성인이 된 아우로라가 지적했듯이 인습에 도전은 할 수는 있었어도 자신이 속한 계층의 편견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파울리나와 엘리사, 두 남다른 할머니의 손에 자랐고, 타오 치엔이라는 어찌 보면 이상적(理想的)인, 평범하지 않은 중국인을 외할아버지로 두고, 피네다 양처럼 깨어 있는 여성의 교육을 받고 자란 아우로라에게도 모순은 엿보인다. 보수적인 칠레에서 자란 여느 여자아이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지만 아우로라가 처음 사랑(이라 믿은)에 빠지는 모습과 그 사랑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서는 그녀가 그간 받은 교육과 환경이 충돌하면서 그녀는 끝내 전복적인 선택을 하지 못한다. 아우로라는 주저하고 망설인다. 끊임없이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하는 등 이 작품에서 여성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가장 먼저, 누구보다 강하게 드러내는 니베아는 또 어떤가. 남자들이 넓은 세상에 나아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아가는 것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녀는 사랑 안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그 사랑은 어떤 면에서는 아주 위대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계가 없던 그녀 자신에게 스스로 한계를 짓는 것이기도 하다(니베아는 왜 그렇게 많은 아이를 계속 낳았을까. 낳아야만 했을까. 그만 좀 낳으란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물론 그 아이들 중 하나가 <영혼의 집>의 주인공이 된다고는 하지만). 이 여성들이 지닌 강렬한 매력과 모순들을 지켜보노라면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고 어떤 부분에서는 결함 있는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인간이기에, 그래서 그들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는 아옌데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피네다 양은 내 태생을 모른다고 맹세한 뒤 사람의 인생이란 어디서 왔는지가 아니라 어디로 가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220쪽)
 
사진은 한 사람에 대한 증거이자 세상을 보는 방식이고, 그 방식은 정직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기술이란 현실을 왜곡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습을 본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79쪽)

“빛은 사진의 언어이고 세상의 영혼이란다. 그림자 없는 빛이 없고 고통 없는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지.” (281쪽)


자신의 과거를 알지 못하는, 그래서 혼란스럽고 때때로 악몽에 시달리는 아우로라 곁에는 훌륭한 두 선생님이 있었다. 가정교사 ‘피네다’와 사진을 가르쳐준 ‘돈 후안 리베로’가 그들이다. 그들은 보수적인 칠레 사회에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볼 줄 알았고, 그것을 자신의 제자에게 전해준다. 아우로라는 그들을 통해 그저 단순히 ‘아름다운 것들이 아니라 노력과 고통으로 단련된 얼굴들’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초상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담아내는 법을 알게 된다. 인간의 기억은 허구이기 쉽다. 대부분은 ‘부끄러운 부분은 잊어버리고 가장 밝은 부분과 가장 어두운 부분만 선택하여 인생이라는 널찍한 융단에 수를 놓는다’(430쪽) 어쩌면 아우로라의 이 기록조차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우로라는 사진과 글을 통해 불명확했던 자기 존재의 뿌리를 찾아가는 일, 그리고 그 혼돈의 과거를 밝히는 일에 기꺼이 자기를 던졌다. 그렇게 해서 직조한 자기의 초상, 집안의 초상, 그리고 자기가 속한 사회의 초상이 비록 고통과 피가 얼룩진 세피아빛 초상일지라도 그것은 정직하게 그리고자 했기에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아우로라가 앞으로 카메라에 담을 모습들은 더 현실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걸어갈 길은 더 의미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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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07-13 13: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참, 정말 잘 쓰셔..... ㅋㅋㅋ

잠자냥 2022-07-13 13:16   좋아요 3 | URL
걸드문트 님이 이 책 예전에 안 읽으셨다면, 최근에 읽고 리뷰 쓰셨을 텐데... 아쉽. ㅋ

독서괭 2022-07-13 13: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잠자냥님이 이렇게 극찬하시는 작품이라니, 정말 궁금하네요.. 저도 아직 아옌데 한권도 못 읽어봤는데.. 슬프면서 기쁘다.. <나는 고백한다> 다 읽고 나서야 3권 끝에 등장인물이 정리되어 있는 걸 알았어요 ㅋㅋ 아니 이 책 가계도처럼 앞에다 배치 좀 해주지 ㅋㅋ 참고했으면 덜 헷갈렸을 것 같은데 말이예요;;

잠자냥 2022-07-13 13:17   좋아요 3 | URL
와, 이거 정말 재미났어요. 울컥울컥하는 장면도 많고 밑줄 긋고 싶은 문장도 많고, 모든 인물이 이해가 가고 매력적입니다.
괭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꼭 읽어보세요.
그리고 아옌데 나머지 작품들 제가 먼저 읽어보겠삼=33

단발머리 2022-07-13 13: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도 물론 아름다움이 뭔지 알려주겠지만 말입니다. 잠자냥님의 이 글도 넘나 아름답네요. 문학에의 초대, 이런 부제를 붙여도 되겠어요.
저도 아예데는 한 권도 안 읽었는데 도전을 불러 일으키는(그러나 잠자냥님 추천 도서는 넘나 많은 ㅋㅋㅋ) 리뷰네요.

잠자냥 2022-07-13 14:14   좋아요 3 | URL
문학에의 초대입니다~ 쟝쟝, 보고 있는가 문학으로 오라고!
ㅎㅎㅎㅎ 단발머리 님, 아옌데 작품 읽으면 좋아하실 거예요. 분명....!

공쟝쟝 2022-07-13 16:21   좋아요 3 | URL
쟝쟝은 아직까진 산문이 좋앙... 왜냐믄.......... 잠자냥이 추천한 거를 보거나 읽으면 슬픔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거든.. 어제 새벽 세시까지 뒤척였어. 헤어질 결심 보고.... 붕괴되가지고... 사실 마음이 연약한 한떨기 꽃잎 쟝쟝은 거리두기 잘하다가 거리 조절 안되는 순간부터는 헤어나오질 못한다............. 아직까지 마음이 몰캉거린다.. 으어어... 비도 오고..

새파랑 2022-07-13 13: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극찬하시니 꼭 읽어봐야 겠네요. 복잡한 가계도 하니까 <백년의 고독>도 떠오르네요 ㅋ 님미 작품이 읽다보면 은근 그만의 매력이 있는거 같아요~!!

잠자냥 2022-07-13 14:15   좋아요 2 | URL
ㅎㅎ <백년의 고독>이 복잡한 가계도의 한 가계하죠!
전 그 작품 아직 안 읽었어요!(복잡한 가계도도 소문으로만 들었다는) 이제 읽어야겠습니다.
새파랑 님 이 책 좋아하실 거예요~

다락방 2022-07-13 14: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저 오늘 미니님 서재에서 아옌데는 에세이 읽어봤다고 댓글 달고 왔는데 여기서 또 달아야겠네요. 저는 이사벨 아옌데의 에세이만 읽었어요. 지금 검색하면 품절로 나오네요. 이 리뷰보니 이 책 읽고 싶지만 그보다는 운명의 딸을 먼저 읽어봐야겠어요. 물론 이 책 먼저 읽는다고 해도 재미를 느끼는데는 지장 없을테지만 이 책의 등장인물이 영혼의집에 나온다니 그렇다면 운명의 딸로부터도 이어지지 않겠는가 싶어서요.

잘 읽었습니다. 근데 리뷰 정말 잘 쓰셔요, 잠자냥 님. 아시겠지만.

잠자냥 2022-07-13 14:16   좋아요 3 | URL
골드문트님이 <운명>-<세피아>-<영혼의 집> 순으로 읽는 게 좋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읽는 게 연대기순이 되긴 하더라고요. 이 책도 꼭 읽으세요. 다부장님은 더 좋아하실 겁니다. ㅎㅎㅎ

아, 근데 저 이 리뷰 오랜만에 리뷰 쓰려니까 잘 안 써져서 애먹었습니다. ㅎ

단발머리 2022-07-13 14:17   좋아요 3 | URL
잠자냥님 이미 아시겠지만. 진짜 잘 쓰셔요, 잠자냥님. 이미, 잘, 넉넉히 아셔야 하는데.

독서괭 2022-07-13 15:54   좋아요 2 | URL
그것은 공지의 사실이죠!

moonnight 2022-07-13 14: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다 재미없다 아리송 이런 표현밖에 못 하는 저로서는 그저 존경♡

잠자냥 2022-07-13 14:50   좋아요 2 | URL
아이고, 감사합니다. 읽고 쓰기 계속하다보면 표현도 늘고 그렇더라고요. ㅎㅎ

책읽는나무 2022-07-13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또 한 권 추가 되나요?
침착해야지!!ㅋㅋㅋ
결함있는 인간일지라도 더 나은 모습으로 나아가려는 모습을 그린 작가!
어쩌면 우리네 모습일 수도 있겠군요?
그래서 공감이 될 수도??
미니님도 그렇고,잠냥님 덕분에 이사벨 아옌데 작가 책, 읽어 보고 싶네요^^
조만간

잠자냥 2022-07-13 16:59   좋아요 2 | URL
침착해! 침착해! ㅋㅋㅋㅋ 책은 어디로 가지 않아요~
천천히 읽어보세요~

공쟝쟝 2022-07-13 16: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편애 편파 편견 편식 잠자냥의 편중된 문학 찬양의 리뷰...* 아름다웠다...* 전 역시, 문학 작품은 역시, 읽은 것을 쓴 것을 읽는 것이 좋달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아름다움에 몰캉해지는 마음이 아니라, 그릇될 세상을 뽀각 조각낼 날카로운 산문이다!!! 페미니즘 에세이여 오라!!!!!!!!!!!!!!!!!!!!!!!!!!!!!!

잠자냥 2022-07-13 16:58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잠자냥, 그중 편식은 안하는 것으로... 안 먹는 음식이 없는 것으로 밝혀져.

공쟝쟝 2022-07-13 17:1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아이 매력쟁이 ㅋㅋㅋㅋㅋ 역시 인간은 못먹는 게 없어야함 ㅋㅋㅋㅋㅋ 저도 다 잘먹음 ㅋㅋ 누구처럼 많이 먹진 않아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2-07-13 17:2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마니 먹고 심지어 못 먹는 것도 없는 아아, 그 사람? 성은 다요, 이름은 락방이

공쟝쟝 2022-07-13 17:31   좋아요 1 | URL
오늘 한 출판사의 북펀딩에 미친 뒤매질 연대를 만들어버리신 그 꼰대부장님 맞습니다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07-13 18:01   좋아요 4 | URL
아니 이 분들은 틈만 나면 내 얘기를 하시네 ㅋㅋㅋㅋㅋㅋㅋㅋ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닷!!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2-07-13 18: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당신, 우아해요.
… 나도 이렇게 읽고 쓰고 싶은데 … 그낭 감탄만 하네요. 우와 우아 ..

잠자냥 2022-07-13 21:33   좋아요 2 | URL
아니 이런 우아까지 ㅎㅎㄹ

coolcat329 2022-07-13 18: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옌데 소설 처음 읽으신 거군요. 저도 올해는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을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리뷰가 좋으니 더욱 기대됩니다.

잠자냥 2022-07-13 21:34   좋아요 2 | URL
네, 처음인데 완전 반했습니다. 쿨캣 님도 분명 반하실 작품입니다!

그레이스 2022-07-13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술적 리얼리즘 이란 수식어가 붙은 소설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좋다고 하시니,,, ^^

잠자냥 2022-07-15 10:14   좋아요 2 | URL
네 이 책은 그런 요소가 거의~ 없습니다. ㅎㅎㅎ

mini74 2022-07-16 00: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자냥님리뷰보며 이 책 샀어요. ㅎㅎ그레서 살짝만 눈도장 찍고 갑니다 *^^*

잠자냥 2022-07-16 09:08   좋아요 2 | URL
네~~ 재미나게 읽으세요.
 
감찰관 을유세계문학전집 115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지음, 이경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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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 출두요!” 소리와 함께 산해진미를 갖춰놓고 곤드레만드레 취해있던 탐관오리들이 허둥지둥 일어나 요리조리 숨느라 정신이 없다. <춘향전> 같은 우리의 옛 고전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풍경이라 꽤 익숙한 모습이다. 고골의 <감찰관>을 읽으니 이런 장면이 절로 떠오른다. <감찰관>은 딱,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데에만 혈안이 된 탐관오리 ‘안톤 안토노비치 스크보즈니크’ 시장(市長)은 어느 날 자신이 다스리는 소도시에 감찰관이 출두할 것이라는 통지를 받고 화들짝 놀라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자기의 부정부패는 감추고 자신이 얼마나 이 도시를 잘 운영하고 있는지 보여주고자 교육감, 병원장, 판사, 경찰서장, 우체국장 등 지역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작당모의를 한다. 그러니까, 감찰관이 오면 교육은 이렇게, 아픈 환자들은 이렇게, 범죄자들은 이렇게 관리를 잘~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도록 모두가 입을 맞추는 것이다. 이 마을의 관리들은 대개 시장만큼이나 부정부패로 얼룩져있기 때문에 그의 이런 제안이 불쾌할 까닭이 없다. 불쾌하기는커녕, 자신들의 게으름과 부패를 덮을 수 있는 묘안이라며 모두가 하나가 되어 감찰관의 매의 눈을 피하고자 머리를 맞댄다. 마치 장학사가 온다는 소리에 며칠 전부터 온 학교가 때 빼고 광내느라 부산하기 짝이 없던 어린 시절의 그 교실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온다던 감찰관은 보이지 않고 마을의 두 지주 봅친스키와 돕친스키가 헐레벌떡 나타나서는 한다는 소리가, 허우대 멀쩡한 한 젊은이가 저 여관에서 떠날 줄 모르고 기거한다는데, 하는 행동이 영락없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온 높으신 나리, 관리, 그러니까 감찰관 같다는 게 아닌가. 사라토프현으로 간다고는 하는데, 떠날 생각은 하지 않고 벌써 두 주일째 그 여관에 머물면서 무엇이든 다 외상으로 먹고, 한 푼도 계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아, 이건 영락없이 감찰관이다! 돈도 내지 않고 먹고 마시면서 떠나지도 않다니! 감찰관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이때부터 마을의 시장, 경찰서장, 판사, 의사 너 나 할 것 없이 난리가 난다. 누구보다 똥줄이 타는 사람은 시장이다. 어서 감찰관을 모셔서, 그를 극진히 대접해야 한다! 그리하여 만난 사람이 바로 문제의 인물 ‘홀레스타코프’로, 스물셋의 이 새파란 청년은 사실 감찰관은커녕 하급 관리로 무위도식하면서 돈을 날리고는 고향으로 갈 돈마저 떨어져 여관에서 무작정 기거하는 중이었다. 헌데 이 마을의 시장이며 유지들이 무슨 이유인지 자기를 융숭하게 대접하면서 떠받들어주고 그것도 모자라 이 사람 저 사람 돈까지 찔러주니, 이런 행운이 어디 있나! 그는 한바탕 이 소동을 철저히 즐기기로 한다.

《감찰관》에 실린 세 편의 희곡 <감찰관>, <결혼>, <도박꾼>을 아주 재미나게 읽었다. 어떤 장면에서는 낄낄 웃음이 터지기도 했는데 읽다가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예전에도 고골이 이렇게 재미있었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가만히 책장을 보니 나, 원, 참, 이것 보게. 펭귄클래식에서 나온 《코/외투/광인일기/감찰관》이 보란 듯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 나는 몇 년 전에 펭귄클래식 버전으로 <감찰관>을 읽었다. 고골의 <코>와 <외투>는 너무나 유명해서 아직까지도 그 내용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는데 어찌하여 <감찰관>은 기억에서 깡그리 잊혔을꼬? 어처구니가 없다. 아마도 그 몇 년 전에는 내가 이 <감찰관>을 재미나게 읽지는 못했나 보다. 아니, 어쩌면 <코>와 <외투>가 너무 강렬해서 상대적으로 <감찰관>의 기억은 희미했던 게 아닐까......

아무튼 그때 그 시절 나는 고골을 단지 ‘풍자’ 작가로만 생각했다. 그러고는 풍자만 잘하는 작가의 작품은 그다지 재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고골을 더 읽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귀가 얇은 나는, 이번에 나보코프가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고골을 극찬하는 것을 보고 고골을 다시 읽어보리라 마음먹고는, 가장 먼저 눈에 띈 이 책 《감찰관》을 읽었는데, 어라라라? 정말 재미있네? 단순히 풍자만 잘하는 작가가 아니었네? 물론 풍자는 기본이지만 거기에 뭔가가 더 있네 하는 생각이 들더라. 아마도 이것은 모두 귀 얇은 독자인 나에게 나보코프 선생이 속닥속닥 “이 고골 한번 잡숴봐~절대 후회 안 해.” 속삭인 탓이 컸던 게 아닐까 싶다.
 
<감찰관>의 가장 큰 매력은 ‘홀레스타프’라는 천진한(?) 인물의 말과 행동에 있다. 그는 놀고 마시고 농땡이 부리기 좋아하는 철부지이다. 탐관오리인 시장을 비롯해 마을의 유지들을 속이는 일에 악의나 고의성은 없다. 단지 그들이 그를 감찰관이라 오해하고, 모든 판을 벌여준 것이다. 그들 스스로 잔칫상을 거하게 차려줬는데 배불리 먹고 즐기면 그만이지 누가 마다할까. 홀레스타프는 이 눈먼 환대를 마음껏 누린 뒤 이제 그만 발을 빼야 할 때라는, 영특한 하인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 난장판 무대에서 퇴장한다. 홀레스타프가 내뺀 뒤에야 그의 정체를 알게 된 그들은 그제야 한탄하면서 발을 구르지만 이미 늦었다. 설상가상, 가짜 감찰관은 떠나고 진짜 감찰관이 나타날 일만 남았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진짜 감찰관은 진짜로 진짜 감찰관일까? 조금만 눈을 뜨고 이성적으로 판단했다면 홀레스타프가 한낱 무위도식하는 청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채고도 남았을 텐데, 자기들이 욕망에 눈이 멀어 제 스스로 속고 만 그들 앞에 또 다른 ‘가짜’ 감찰관이 나타나지 않으리란 법이 있을까?

이렇게 속고 속이는 기만의 세계, 자기 욕망에 눈이 멀어 자기 스스로 제풀에 걸려 넘어지는 이야기는 <결혼>과 <도박꾼>에서도 이어진다. <결혼>도 재미가 대단한데, 이 극 안에서 펼쳐지는 결혼 또는 중매 대소동은 어찌 보면 오늘날의 결혼정보회사 듀오 매칭 시스템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요즘 흔히들 집도 마차도 약속하지만, 결혼하고 나면 깃털 이불과 요만 주니까.”(183쪽)과 같은 대사를 읽노라면  예나 지금이나 결혼이란 참, 사랑의 결실은커녕 사랑을 빙자한 자본과 자본의 교환 관계가 아닌가 씁쓸한 웃음이 절로 난다. 이 작품에서는 한 여성을 두고 다섯 명의 구애자들이 저마다 달려들어 그 여성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조건을 찾고자 안달복달하는데 그 남자들 대부분은 여성이 젊은 데다가 지참금으로 많은 재산을 갖고 오리라는 말에 혹해 불나방처럼 달려든다. 그런 중에도 자기가 꼭 바라는 조건만큼은 다들 가지각색이다. 신붓감은 꼭 프랑스어를 해야 한다느니, 교양이 넘쳐야 한다느니, 지참금이 무조건 많아야 한다느니, 외모가 어때야 한다느니…. 그런 조건에만 눈이 멀어서 마침내는 눈앞의 여성이 자기의 이상형인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고 만다. 모두가 스스로 기만당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또 재미난 인물은 ‘코치카료프’인데 그는 어떤 면에서는 <감찰관>의 ‘홀레스타코프’와 비슷하다. 기만당하기 쉬운 인물들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갖고 놀면서 낄낄 대는 유형으로, 이미 결혼한 몸인데도 친구 ‘포드콜료신’을 결혼시키려고 안달이 나서 누구보다 이 중매에 열심이다. 7등 문관인 포드콜료신은 ‘이제껏 가만있다가 결혼한다는 게 어색’하다며 몸을 사릴 정도로 어딘가 아이 같고 우유부단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잘 알지 못해 주변 사람 말에 쉽게 휘둘리는 인물인데 그러다 보니 코치카료프가 부추기는 말에 넘어가 사랑하지도 않는 여성에게 반했다고 착각하고, 그 여자가 자기에게 딱 알맞은 상대라고 확신하고 결혼하기에 이른다. 포드콜료신을 지켜보노라면 정말 그렇게 결혼해도 되는 거야? 싶을 정도로 걱정스러운데, 고골의 희곡이 조금 과장되었을 뿐, 이런 식으로 주변의 부추김에 넘어가서 남들이 다 하니까, 휩쓸리듯이 결혼이라는 중대한 일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이 지금도 얼마나 많은가. <결혼>에서 벌어지는 소동이 저 먼 나라 먼 시대에서만 일어났던 일은 아닌 것 같다. 헌데 문득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든다. 이, 코치카료프는 자기 결혼 생활이 불만스러운 것 같은데 친구를 왜 그 구렁텅이로 밀어 넣지 못해 안달일까? 과연 그의 속셈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는 자기 혼자서만 지옥에 빠져 사는 게 억울해서 남들도 그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소시민의 전형은 아닌가 싶어진다. 이런 모습도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과 닮지 않았는가. 자기 결혼 생활도 그닥 행복하지 않으면서 “결혼해라, 결혼해라.”를 입에 달고 사는 그런 이들 말이다.



정말, 생각해 보니, 몇 분 후면 결혼한 몸이 되는 거야. 정말 동화에나 나오고 말로 표현할 수도, 표현할 말을 찾을 수도 없는 그런 행복을 갑자기 맛보게 되겠지. (약간 침묵한 후) 그런데 이것에 대해 잘 생각해 보니, 왠지 무서워지는군. 평생을, 영원토록 어떻게든 자신을 얽어매고, 그다음엔 물릴 수도, 후회할 수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 모든 게 결정되고, 모든 게 끝나는 거야. (237쪽)


포드콜료신은 그렇게 이끌려 결혼식을 바로 코앞에 둔다. 그는 이대로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고 말 것인가? 바로 이때 문득 위와 같은 의혹이 떠오른다. 동화에나 나올법한 그런 행복을 갑자기 맛 볼 (수도 있겠지만.... 아니야 아니야), ‘평생을, 영원토록 어떻게든 자신을 얽어매고, 그다음엔 물릴 수도, 후회할 수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구렁텅이가 결혼이 아닐까? 아, 이거 큰일났다!  남들의 욕망을 자기의 욕망이라고 착각하고, 남들도 다 그러니까 나도 그래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제 스스로 올가미에 걸려들려는 그 순간에 그래도 잠깐 눈이 떠지는 순간이 찾아오긴 한 것이다.  포드콜료신의 최후의 선택은 어처구니없고 엉뚱하기 짝이 없지만 고골은 그래도 이렇게라도 사람들이 눈을 떠주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속고 속이는 기만의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욕망에 눈이 멀어 사기꾼에게 낚이지 말고 부디 눈을 뜨라는, 고골의 당부가 어쩐지 희미한 웃음과 함께 들려오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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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6-29 15: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거 정말이지 너무나 재미있겠는데요. 2022년 남은 날들은 책을 안살거지만 일단 장바구니엔 담아둡니다.

잠자냥 2022-06-29 15:43   좋아요 1 | URL
*동공지진* 진짜요? 앞으로 점심에 한 가지 메뉴만 먹겠다는 말보다 안 믿겨짐....!

독서괭 2022-06-29 16:18   좋아요 1 | URL
아무도 안 믿을 선언을 왜 자꾸.. ㅋㅋ

바람돌이 2022-06-29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재밌을듯요. 세상에 읽고싶은 작가들이 너무 많아서 고민입니다. 지금 다 읽으려고 하는 작가들은 뜌 언제 끝낼지..... 감찰관 쏙 넣어놓고 고골 시작 작품으로 기억하겠습니다

잠자냥 2022-06-29 15:43   좋아요 0 | URL
자매품 <외투/코>도 꼭 읽어보세요~ 전 조만간 <죽은 혼>을 만나보겠습니다.

유부만두 2022-06-29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로씨아 문학에 빠지시는 겁니까??!!

잠자냥 2022-06-29 16:12   좋아요 0 | URL
원래도 좋아했지만 더 빠져보렵니다요!

유부만두 2022-06-29 17:34   좋아요 1 | URL
우라!!!

독서괭 2022-06-29 16: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봅친스키 돕친스키 왜 이렇게 웃기죠 ㅋㅋㅋㅋㅋㅋ
전 <외투>를 쏜살문고인가.. 읽었는데 외투, 코,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여기 실린 감찰관, 결혼도 넘 재밌겠네요!

잠자냥 2022-06-29 16:46   좋아요 2 | URL
봅친스키 돕친스키 하는 짓도 웃깁니다. 연극으로 봐도 왠지 재미날 거 같아요.
<감찰관>도 감찰관이지만 전 이번에 <결혼>이라는 희곡의 발견. 이거 부제가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에 대한 2막극‘인데 이 말도 뭔가 웃겨요. ㅋㅋㅋㅋㅋ

mini74 2022-07-08 18: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냥님 이 더위에 고양님들 잘 계신지 ㅎㅎ 축하드려요 *^^*

그레이스 2022-07-08 18: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축하드려요~

새파랑 2022-07-08 19: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시 문학은 잠자냥님이죠. 축하드립니다~!! 전 감찰관만 읽어봤는데 살까말까 고민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