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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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 라틴어가 있다면 우리에겐 한자와 한문이 있다.

한문의 함축적인 내용과 대구라는 형식미를 보면

라틴어가 생각난다.

 

신학과에 진학하려는 녀석이 이 책을 보더니

신학대학에서 '라틴어 기초'를 공부하라고 했다 한다.

아직도 신학에서는 라틴어가 필요한 모양이구나 했다.

하긴, 동양 고전을 공부하려면 한문이 필수 도구인 거나 마찬가지겠다.

 

Nolite timere.

이것이 우리반 급훈이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다.

아이들은 처음 겪는 고3이니 두려워 흔들리기 쉽다.

 

Summa cum laude란 문제집이 있었다.

숨마 쿰 라우데... 라틴어 성적 구분에서 <최우등>을 이렇게 부른단다.

그 아래가 '마그나 쿨 라우데(우수)', '쿰 라우데(우등)', '베네(굿)'

성균관의 등급은 ((((()의 5등급이었다.

'순통'은 아주 잘한 것이다.

 

'도 우트 데스'를 알아두라 한다.

Do ut Des. 네가 주기 때문에 내가 준다...는 호혜의 뜻이란다.

 

Si vales bene est, ego valeo.

씨발레스 베네 에스또, 에고 발레오. ㅋ

당신이 잘 계신다면, 잘 되엤네요. 나는 잘 지냅니다...란다.

기니깐, S.V.B.E.E.V.라고 줄여 쓴단다.

 

Tempus fugit, amor manet.

템푸스 푸지트, 아모르 마네트.

시간이 흘러도 사랑은 남는다.

 

Oboedire Veritati.

오보에디레 비리타티.

진리에 복종하라. 서강대 교훈이란다.

 

Vive hodie.

비베 호디에.

오늘을 살아라.

 

특별한 내용이란 없다.

라틴어의 간결하면서 함축적인 맛을 조금 맛볼 수 있다.

한국인이라면 한문 구절을 읊조리는 것도 좋은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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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창비세계문학 44
다자이 오사무 지음, 신현선 옮김 / 창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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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상징은 '태양'이다. 그 태양은 날마다 더욱 솟구쳐(욱일승천) 욕망의 화신이 되었으나,

패전으로 저물어 버린다. 그것이 '사양'이다.

 

다자이(太宰)라는 필명도 좀 우습다.

후쿠오카의 '다자이후'는 '학문의 신'을 모시는 텐만구와 함께 있어 '학업성취'를 빌러 가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적인 오만이랄까, 이런 것이 느껴진다.

 

'사양'에서는 망해버린 화족 집안이 등장한다.

그 딸의 비상한 의지는 소름끼친다.

 

사생아와 그 어머니.

하지만 우리는 낡은 도덕과 끝까지 싸우며 태양처럼 살아갈 작정입니다.

부디 당신도 당신의 투쟁을 계속해 주세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희생자입니다.(318)

 

전후 일본인들이 눈물을 씻으며 읽었을 법하다.

나로서는 소름끼치고 화가 날 따름이지만...

 

당신들은 내가 죽은 것을 알면 틀림없이 울겠죠.

그러나 살아있는 고통과 그 넌덜머리 나는 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내 기쁨을 생각해 본다면 당신들의 그 슬픔은 점차 사라지리라 생각해요.(307)

 

남성 화자의 목소리는 이렇다. 죽음이다.

결국 다자이는 자살하지만

시대로부터 달아나버리는 모양새다.

가해자로서의 반성은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들은 오로지 피해자일 뿐.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잖아요.

우리는 살아있기만 하면 돼요.(비용의 아내, 173)

 

이렇게 말해놓고... 무책임하다.

 

다자이는 남성 작가임에도 여성의 입장에서 글을 썼다.

다자이에게 여성은

인간으로 살아가고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한 매개.

삶의 밑바닥에서 표류하던 여성들은 생동감있게 표현되면서 남성과 동반자적 관계 형성(해설, 361)

 

모든 화자는 여성이다.

처지가 조금씩 다르지만, 여성의 목소리로 삶의 지향성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비관적인 죽음만 뇌까릴 것 같아 두려웠을지 모른다.

 

이대로 소녀인 채로 죽고싶다.

문득, 병에 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굉장히 심각한 병에 걸려 땀을 폭포처럼 흘리고 삐쩍 마르게 되면

나도 완전히 깨끗해질지 모른다.(41)

 

성인 여자의 몸을 더럽다고 여기는 풍토가 있었던 듯.

 

아름다움에 내용 따위가 있어서 되겠는가.

순수한 아름다움은 언제나 무의미이고 무도덕이다.

반드시 그렇다.

그래서 나는 로코코가 좋다.(여학생, 47)

 

당대 데카당스 문학의 영향은 유미주의, 탐미주의로 번지면서

질병과 죽음, 잔인성 등을 추구한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들의 욕망은 단 하나.

푹 자고 싶은 욕망뿐.

그 군인들이 딱하면서도 한편 부럽게 여겨졌다.

불쾌하고 번잡한 마음과 상관없이 겉도는

아무 근거가 없는 생각의 홍수와 깨끗이 결별한 채

그저 수면만을 갈망하는 상태는,

정말 깨끗하고 단순해서 생각만으로도 상쾌.(51)

 

참 나태롭다. 순수를 지향하는 생각이

기껏 군인이라니...

하긴, 요즘 청와대에 '위안부'를 청원했다는 넘들도 있더라만, 뇌가 주름이 없을지도 모른다.

 

<보꾸토오 기담>은 '화류계 여성과 문학인 남성의 교제를 그린 작품'이라 한다.

이상이 떠오른다.

 

여자에겐 하루하루가 전부인걸요.

사후도 생각하지 않아요. 사색도 하지 않고요.

순간순간 아름다움의 완성만을 바라며 살아요.

시시각각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삶의 목적입니다.(피부와 마음, 81)

 

여성의 시점으로 서술하긴 하지만,

당시의 여성관을 드러낸 남성화자의 목소리가 아닌가 싶다.

 

당초 이 전쟁은 말이 안 되는 거였어.

빙글빙글 돌다가 픽 쓰러지는 녀석들이 이길 리가 있나.(116)

남자에겐 불행만 있지. 늘 공포와 싸울 뿐이야.(168)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드러난 구절은 많다.

다만 혁명에 대하여 이런저런 말을 늘어 놓으면서도

가해자로서의 통렬한 반성은 없고, 피해자 코스프레에 열중하는 것이 짜증날 뿐이다.

 

모기장을 치고 두 아이 틈에서

川자가 아니라 小자로 잠을 잡니다.(오상, 133)

 

자신들이 그렇게 왜소해 보인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중심적이다.

원래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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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 어쩐지 의기양양 도대체 씨의 띄엄띄엄 인생 기술
도대체 지음 / 예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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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 참 좋다.

읽기도 수월하고 일단 뭐든 열심히 할 필요가 없음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이겨내는 사람들은 그저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용기를 주고 있는 것인지도.(243)

 

세상에는 열심히 빡세게 잘 살아야만 하는 이유들을 들먹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렇지만 나는 늘 우유부단하고 뒤처지고 찌질해 보인다.

 

길치는 주변의 세부 사항은 이것 저것 기억하면서도

정작 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맛없는 복숭아를 먹은 날,

기껏 복숭아가 되었으나

맛없는 복숭아도 있는 것이다.

복숭아의 삶도 그런 식이다.

사람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

저마다 힘든 시기를 견디고 살아 남아

무언가를 이루더라도 그게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모두가 대단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179)

 

이런 별것 아닌 생각들이

읽는 사람을 편하게 한다.

 

누구나 울면서 살기 시작하지만

결국엔 웃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영문도 모르고 태어나

생이 다할 때까지 살아야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틈틈이 웃을 수 있다.

그리고 웃음은 삶의 기본값이 아니기에

우리는 웃기 위해 약간의 수고를 주고받아야 한다.(211)

 

우리가 기본값이라고 여기는 것은 중요하다.

사고의 표준이 되기 때문이다.

삶의 기본값은 울음이었구나...를 아이를 통해 배우는 유연성.

인삼밭의 고구마는 그렇게 오늘도 웃는다.

고구마인 주제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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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밀리언 특별판) - 20년 연속 와튼스쿨 최고 인기 강의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지음, 김태훈 옮김 / 8.0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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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백만 부가 팔렸다는 뉴스가 신기했던 생각이 난다.

불의가 국민을 불태워 죽이고, 옥상에서 노동자를 토끼몰이하던 시절이어서, 관심을 가졌을 수도 있다.


이 책 역시 5년만에 새책이 등장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핵심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협상에 있어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훨씬 협상의 질을 높일 수 있고,

<표준>이 무엇인지를 강조하면서 상담자의 <이름>을 메모해 둔다면 좋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렇지만, 이 책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

이 책에서 너무도 많은 사례를 이야기하고 있어서,

이 이야기들은 어떤 경우에도 먹혀다는 만병통치의 술법이라도 되는 양 이해하면 안된다는 것.


상업적인 계약이나 거래에서는 먹혀들 가능성도 많을 것이고,

미국이라는 사회의 WASP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들이라 생각할 수 있다.


<와튼 스쿨 최고 인기 강의>라는 제목을 보듯,

트럼프의 모교, 그리고 안촬스의 학교인 그곳은 결코 서민의 학교는 아니다.


이 책을 흑인들이 읽는다면? 글쎄다.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을 할 수 있다고 여길는지... 의문이다.


한국의 어두운 정부와 협상 자체가 불가능했던 세월호 유가족들, 용산 유가족들, 광주 유가족들은...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인 양 수난을 받지 않았던가.


안촬스가 한국의 현대사를 생각하지 않고,

협상력을 생각하면서 줄타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 와튼스쿨 출신은 저런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트럼프가 닭그네에게 팔 수 있었던 싸드를 팔기 힘들어 졌을 때,

도대체 김정은이와 어떤 협상을 했기에 그리도 미친듯이 미사일을 쏘아댔던 것인지,

결국 문재인 정부도 싸드를 수용할 수밖에 없게 했던 것인지... 그리고 방문까지해서 핵잠수함을 판매해야 했는지...

그 와튼 스쿨의 협상력에 나는 소름이 끼친다.


약자는 대등한 감정적 교환을 나눌 수 없다.

양반 - 상놈의 괴리가 역사적으로 남아있는 이 나라에서,

갑질이라는 이름의 폭력은 협상은 '대등'한 사이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만큼 이 나라에서 협상이라는 것은 존재한 일이 없었다는 것을.


가장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선 지금조차도 트럼프가 왔을 때 반전 시위를 편파적으로 보도했으며,

노동조합의 합법적인 지위를 회복시켜 주지도 못하고 있으며,

노동조합과 사용자간의 <대등한 협상>이라는 것은 이 나라 건국 이래 있어본 일이 없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는 어떤 자는 

병상에서 일년에 수조원의 자산을 늘렸다는 나라에서,

협상에 대한 책은, 

오십 년 전에 김수영이 말한 <바람아, 모래야, 나는 얼마나 작으냐>고 말한 자괴감을 반추하게 한다.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느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시집 {거대한 뿌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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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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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은 사람이다.

평생을 그렇게 하려고 애써왔다.

정말 힘들었겠구나.

나는 공감하는 사람.

최선을 다했으면 됐다.

나는 응원하는 사람.

다 이해한다. 이해하고 말고.

나는 헤아리는 사람.

아니, 어쩌면 겁을 먹은 사람.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

뛰어들려고 하지 않는 사람. 깊이 빠지려 하지 않는 사람.

나는 입은 옷을, 내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사람.

나는 경계에 서있는 사람. 듣기 좋은 말과 보기 좋은 표정을 하고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 치는 사람.

여전히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은 걸까

며칠 동안 딸과 나 사이에는 캄캄한 침묵이 흐른다.(69)


딸을 고학력자로 만들어 두었는데, 그 딸이 떵떵거리는 사윗감은커녕 여자 아이를 데려온다.


요양보호사인 어머니는 젠이라는 노인을 간병하고 있다.


좁고 갑갑한 고독 속에서 늙어가는 사람.

젊은 날을 타인과 사회, 그런 거창한 것들에 낭비하고

이젠 모든 걸 소진한 다음 삶이 저물어 가는 것을

혼자 바라봐야 하는 딱하고 가련한 사람.(104)


딸과의 사이에 캄캄한 침묵이 흐르는 어머니는

비로소 젠의 처지가 눈에 들어오고, 제 딸 역시 그럴 것 아닌가 하면서, 생을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게 무엇이든 예민하게 알아채고, 

알게 된 것을 말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다.

뭐든 모른 척하고 침묵하는 것이 예의라고 여겨지는 이 나라에서

나는 태어나고 자라고 이렇게 늙어버렸다.(127)


아, 모른 척하고 침묵하는 것이 예의라고 여겨지는 비루한 양반의 나라.

이제는 성조기와 교회를 편들어서 침묵을 강요하는 나라.


파견 직원에 불과한 화자에게 '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


오늘날 일이란 행위는 모두 훼손되고 더렵혀졌다.

그것은 오래전에 우리 세대에게 자긍심과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던 역할을 잃은 지 오래다.

사람들은 이제 일의 주인이 아니고

그것에 종노릇을 하며 소외당하고 외면당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한다.

그리고 끝내는 일 밖으로 밀려나고 쫓겨나고 실패를 인정해야 하는 순간을 맞는다.(160)


정직원이라 해도 다를 바 없다.

그 일이 국가직이든 지방직이든, 임시 채용 강사이든 소외의 본질에서 멀지 않다.


난 내 딸이 차별받는 게 속이 상해요.

공부도 많이 하고 아는 것도 많은 그 애가

일터에서 쫓겨나고 돈 앞에서 쩔쩔매다가 가난 속에 처박히고

늙어서까지 나처럼 이런 고된 육체노동 속에 내던져질까봐 두려워요.

그건 내 딸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잖아요.

난 이 애들을 이해해 달라고 사정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이 애들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고

그만한 대우를 해주는 것,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예요.(169)


왜 그들은 무지갯빛 깃발을 그렇게 혐오하는가?

여성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혐오하는가?


훌륭한 삶요?

존경받는 인생요?

그런 건, 삶이 아주 짧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에요.

봐요.

삶은 징그럽도록 길어요.

살다 보면 다 똑같아 져요.

죽는 날만 기다리게 된다고요.(173)


남을 위해 평생을 바친 젠이나, 

이제 나이들어 삶에 벅찬 화자나, 

아직 젊은 그 딸에게나,

삶은 벅차게 길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벅차다.


소설을 쓰는 동안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해라는 말 속엔 늘 실패로 끝나는 시도만 있다고 생각한 기억도...

그럼에도 내가 아닌 누군가를 향해 가는,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설도 끈질기게 지속되는 그런 수 많은 노력 중 하나...(작가의 말 중, 199)


페미니즘은 지식인 여성들이 남녀 평등을 주장하던 시대는 갔다.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서 쓸데없는 참견과 분간없는 차별에 대하여 저항하는

모든 약자의 목소리가 이제 페미니즘과 뒤섞이는 시대가 되었다.

페미니즘과 퀴어 축제가 무슨 상관이냐고 묻고 싶다면,

사람에 대한 이해를 향한 노력이란 면에서, 

그런 수많은 노력 중 하나라고 답한다면, 이 소설의 한 구절이라도 읽은 것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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