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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 > 번져가며 사는 삶이 아름답다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에서 그는, 시인의 삶을 지탱해주는 맑은 그리고 때로는 고독하고 슬픈 심성의 결을 심리적 상징을 통해 응축된 이미지로 변주해낸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새와 달. 바람. 별. 꽃 등의 사물들은 떠돌고 방황하는 그의 정처 없는 마음의 상징... 그의 마음은 악기와 같아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작고 하찮은 것들이 오히려 그의 마음에 닿아 음표가 되고 소리가 되며, 그래서, 그의 시는 부유하는 삶의 노래가 된다.

-살구꽃-
장석남의 시 세계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손끝으로 전해지는 예리한 감성,
그 느낌으로 이어지는 언어의 부드러움이
마치 천진난만했던 내 유년의 시절과 같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어쩌면 너무도 소박하고 평범하여 눈에 띄지 않아 그냥 스쳐보내기 십상이겠다.
하지만 그의 시를 자꾸만 읽어내려 가다보면
너무도 포근하여 그 자리에 눕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하고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하여 저절로 마음이 평온해 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특히, (살구꽃)은 색깔과 사물의 적절한 배합으로 직유를 들어
독자들로 하여금 옛 향수에 흠뻑 취하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마당에 핀 살구꽃이 밤에는 흰 돛단배가 떠 있는 것 같이 표현하는가 하면,
흰빛 또는 분홍의 색깔을 빌어 담 넘어 까지 환하게 비춰주는 가로등 역할까지 맡는다.
또한 겨울이라는 계절을 빌어 앙상한 나뭇가지 모양 자체를
<하늘이 뜯어진 채...>라고 표현한 것은 작가 고유만의 탁월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쏟아졌었다>는 과거로부터 <그 하늘을 어쩌지 못하고 지금>이라는
현재로 연결지음으로써 시간적 공간을 상상케 하는 선명한 작업인 것이다.

아울러, 장석남 시인은 모든 사물을 시각에서 머물지 않고
<살림살이의 사연>, <낮은 말소리, 발소리>등 청각적인 감각을 충분히 소화시키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어떤 언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보다는 이미지나 감각에 정열을 쏟아 놓는다.
<어스름녘 말없이 다니러 오는 누이만 같고>에서 유년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며
애써 이해를 요구하기보다는 차라리 공감과 매혹으로의 유도를 즐기고 있다고 하겠다.
각박한 삶 속에서의 인간적인 결핍과 욕망을 따뜻하면서도 포근하게 감싸안을 줄 알며
때로는 쓸쓸한 외로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적막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배를 밀며-
배를 민다는 것은 - 무언가를 힘껏 던진다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행위를 빌어 자신의 내면까지 드러내 보이고는
손끝 마지막 아슬아슬한 부분까지 모두 떨쳐 버리려는 몸부림일 것이다.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 넣는 것이다.
바닥에서 물 위로의 이동 모습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며
또 다른 미지의 세계(사랑)로 인도하는 찰나이다.
배를 밀어냄으로써 사랑에 대한 아픔과 슬픔을 잊고자 노력하는 모습,
사랑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끝내 또 다른 사랑으로 대변되는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가 색다른 느낌이다.

(배를 밀며)에서 사용되는 은유는 사랑이다.
배는 사랑을 의미하기도 하고, 인생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자의 삶이며 감당해 내야 할 키 작은 몫일 수도 있는 것이다.
소유와 집착으로부터의 탈출을 (배를 밀어보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다.
가만히 놓아주는 것으로부터 환희를 느끼고 있다.
그 환희 앞에서 시인은 공허함과 쓸쓸함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묻게 된다.
갑자기 가슴 한 쪽이 휑하니 바람이 통과하는 것만 같다.

-수묵정원 9 -
(수묵정원 9 - 번짐)은 말 그대로 '널리 퍼져나감'이다.
번짐이라는 형용사를 첫머리에 두고
목련(봄)에서 여름으로 흘러가는 동선을 그린다.
우주의 삼라만상의 근원을 '번짐'에서 찾으려 애쓰고 있으며
바깥의 '너'로 부터 내 안의 진실을 널리 알리려 하고 있다.
온갖 사물들에 대한 생명력을 부여하고 그 순리에 맞춰 호흡하려 한다.

<번져야 살지>는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고 있다.
단순한 시각적 의미가 아닌 예민한 촉수의 흔들림으로
민첩하고도 감각 있는 표현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라는 양극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까?
음악이나 그림은 모두 예술의 상징성이다.
인생 자체가 예술인만큼 듣고, 보고, 만지는 카테고리를 만든다.
반면에 삶이란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번짐으로 보면 큰 무리는 없을 듯 싶다.

어차피 인생이란 누구나 한번 태어난 후 죽음으로 가는 것은 뻔한 이치다.
그 과정 속에서의 굴곡이나 외로움, 고독, 갈등은 모두 죽음을 위한 향연일 뿐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또 다시 번져서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저녁은 번져 밤이 되고> 그 번짐으로 새벽을 열듯이 돌고 도는 것이 인생이며 사랑이다.
인생도, 사랑도 번져야 그 힘을 갖게 된다.
번지지 않는 것들은 죽어 있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음을 의미한다.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가 번짐으로 해서 <봄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온다고 말한다.
이야말로 '장석남적 풍경' 묘사의 매력이 아닐 수 없다.
회상에 의한 '환함'과 '따스함' 또는 기억의 체험 자체가 서정적인 시간의 체험이다.
단순 명료하며, 소박하고, 너무도 낯익은 일상의 풍경임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음을 느낀다.
세상 모든 것들이 작은 것에서 크게 번지는 '절제된 여백'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사 족-
시인 장석남은 내 고향 출신이다. 나이도 나와 같은 연배이다. 그러므로 그가 처음으로 시집을 내고, 문단의 주목을 받아 1991년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였을 당시에 무슨 해변시인학교 모임에 시작(詩作)활동으로 참가하였던 친구가 그의 친필 서명이 새겨진 시집 한 권을 받아들고 엄청 좋아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 친구는 그 당시 장석남을 흠모하며 그의 집 주변을 서성거리곤 했었다. 지금 친구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학원강사노릇을 하며 먹고산다.

그리고 더 이상 친구는 시를 쓰지 않는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가끔은 맨발로 걷던 원시의 말갛고 투명한 기억을 떠올렸으면 싶은 것이  나 자신이나, 친구에게 바라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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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서성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설레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서성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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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가르치노라면, 기다림의 순간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어린왕자의 여우가 떠오르고(여우 하니 여우님도 떠오른다.), 지하철 2호선 잠실역 롯데백화점 입구 분수대 앞에서 늘 기다리던 그 아가씨(그 아가씬 늘 나를 기다리게 했다. 지금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옆에 누워있는 그 아줌마.)가 떠오르고, 아주 먼 데서 천천히 오고있는 너를 기다리며 나는 너에게 가기 시작하는 그 마음을...

어린 시절 아버지가 늦게 오시는 날이면 아버지는 지금 저 멀리 어디쯤 오실거야, 이제 전봇대를 지나시고, 바위산을 지나시고, 공장 정문을 지나시고, 곧 대문을 열고 들어오실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안오시면 다시 원점에서부터 아버지는 출발하셔서 그 먼 거리를 천천히 오시고 내 마음은 다시 마중을 나가던 그 추억이 살아오른다.

우산을 들고 버스 정류소에서 내가 기다리던 버스는 왜그리도 오지 않던지... 저쪽 코너를 돌아오는 버스에 누나가 타고 있을거야. 사람들이 하나둘 내리고 나면 나중에 비를 맞으며 인상을 찌푸리고 집으로 뛰어가려고 하다가 나를 보면 반갑게 웃을거야... 하지만 사람들은 다 내리고 버스는 다시 기다려야 하고... 그날따라 누나는 학교에서 환경미화를 한다고 늦게서야 와버리던 그런 어린 시절...

대학 시절, 어둡고 괴롭던 하루하루가 지긋지긋해서 대학생이란 신분이 가장 버리고 싶던 그런 시절... 민주주의와 자유가 오기를 또 그렇게 기다렸을까. 이제 독재 시대는 끝나고 자유가 민주주의가 손 안에 든 것같은 시대가 왔지만... 우린 또 기다리는 것이다.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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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9-09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는 동안의 설렘과 약간의 불안이 좋은 것 같아요.^^

비연 2004-09-09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림이란 말. 참 많은 뜻이 내포된 단어인 것 같아요...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자유를 기다리는 것도...모든 것에 붙일 수 있는
단어는 흔치 않은데 말이죠...잘 읽었습니다^^

글샘 2004-09-10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반갑습니다. 기다리는 동안의 설렘은 곧 만날 것이란 희망 때문이겠지요.
비연님/ 많은 뜻이 내포된 만큼 마음 속에 울림도 큰 거 아닐까요.

이 시의 매력은, 하염없이 기다려도 오지 않는 너를 생각하며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
를 얼마나 간절히 사랑하면 모두 용서하고 아직도 간절히 기다릴까 하는 데서 오는 매력이랍니다.
 

서로 좋아하면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이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 마종기의 시《우화의 강1》중에서-

* 사람이 서로 좋아하면
물길도 트이고 하늘길도 파랗게 열립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함께 보는 하늘인데, 구름이 낀들 어떻고
비바람이 몰아친들 무슨 대수겠습니까.
좋아하는 마음만 변치 않는다면,
먹구름 사이에도 파란 미소가 보이고
비바람 속에서도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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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4-09-08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시입니다..퍼갈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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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09-08 0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 마음은 상대방의 노력을 볼 때 가장 기쁘고 빠르게 성장한다는 말이 오늘 아침의 편지로 제 가슴을 건드리고 가는군요...아무래도 전,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간인가 봅니다.

글샘 2004-09-10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우리 반에 학기 초에 40명 중에 35등 하던 날라리가 이번 시험에서 15등을 했습니다. 요즘은 제가 날라리라고 안 부르고 '학생'이라고 부릅니다. 노력하는 사람을 볼 때 정말 기쁜 게 사랑하는 건가봐요.
그리고 님의 서재에 그 많은 글들이 올라오는 걸 보면서 기쁜 마음으로 읽는 것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