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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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을 읽어나가는 순서를 잘못 잡았다. 

처음에, 이 책을 읽는 안내자로서 '옮긴이의 말'을 읽어두는 것이 도움이 되겠고,
그리고, 2부의 오웰의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을 읽는 것이 낫겠고,
1부의 위건 부두 르포는 나중에 읽었어도 될 그런 것이었다. 

물론, 이 책이 엮인 동기가 1부였기 때문에 가장 중심부이긴 하지만,
80년 전의 영국의 부두노동자나 탄광 노동자의 삶이 현재의 제3세계 노동자들의 삶과 대비하여 본다면, 특별하게 비참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새로울 것이 없다.  

사회주의가 러시아에서 혁명의 불길을 일으킨 지 20년 되었던 1930년대에도 이미 독재의 흐름이 감지되었고,
많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에 대하여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않던 시기이기도 했단다. 

오웰은 '모든 억압에 반대하는 사람'을 사회주의자로 보고 있다.
그리고 '모든 피압제자는 언제나 옳으며, 모든 압제자는 그르다'는 단순한 말이 진리임은 이미 증명이 되었다.
그렇지만 사회주의의 깃발을 들었던 자들의 면면에서 존경받지 못할 구석들이 있었고, 문화적 비중을 높이치던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서 사회주의란 생경한 문화파탄자들 내지는 저질문화 옹호자들이 소외당하던 시기,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의 파탄을 예기하면서 동물농장과 1984로 이어지게 된다.  

무의미하게 정체되어 썩어들어간다는 느낌, 사람들이 지하에 갇혀 바퀴벌레처럼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기어다니며 비열한 불평불만만 늘어놓고 있다는 느낌(26)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싸구려 커피'를 노래부르는 21세기 한국의 88만원 세대나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사람들은 빈궁한 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가족 제도가 깨진 건 아니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긴축 재정을 하여, 생활 수준을 낮추면서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든 것(119)으로 바라본다.
21세기의 한국 사회보다 낫다면 낫다. 한국 사회는 빈궁하지 않으면서도 가족 제도가 깨어지고 있으므로...
긴축 재정을 하는 것보다 견디기 힘든 생활을 인정하고 자식을 낳지 않는 어두운 사회. 

옛날을 바라보는 시선은 미래를 바라보기 두렵게 만든다. 

사회주의는 반대하지 않지만, 사회주의자는 반대한다.(232)
많이 들어본 말이다.
개혁의 깃발을 든 이의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그 깃발을 든 자들의 인품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는 이런 것이 모든 운동의 한계다.
어떤 조직이든 그 조직의 일선에 나서는 이들의 많은 활동가들이 인격적으로 존경받기 어렵다는 점에서,
불평분자일 뿐인 활동가와 전심전력을 다하는 사상가 간에 분간이 가지 않아 운동의 핵심에 분열을 일으켜 왔다는 점은 80년 전에 쓴 오웰의 글이나 최근 사회운동과 진보를 논하는 글이나 다른 점보다 유사한 점이 많아 보인다. 

사회주의 문학은 따분하고 시시하고 조야하다... 이런 느낌으로 어떻게 혁명이 성공하겠는가.
그렇지만,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처음부터 고상한 것들을 모두 갖출 수는 없는 법이다. 
'클래식' 이란 말이 원래 '전쟁이 나면 배 한 척 정도 희사할 수 있는 계층'이란 말에서 나온 것이라 하니,
가진 자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것이 클래식이고 고전이고, 우아한 것이니 말이다. 

조지 오웰의 이 책을 만나면,
반드시 마지막에 덧붙인 옮긴이의 말부터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2부,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부터 읽으라고 권해주고 싶다. 

이 책은, 사회가 어떻게든 바뀌어야  할텐데... 하고 고민하면서도,
민주당 저것들은 참 한심해 죽겠고, 민노당이나 진보신당 저것들도 뭔가 수준미달이라 고민하고 있을 많은 사람들에게 읽기를 권하고 싶다. 

김규항의 'B급 좌파'의 시선보다도 더욱 형형한 눈으로 바라보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이 이 책에 가득하니 말이다.
김규항도 '잡문 모음' 말고, 제대로 된 책을 한 권 더 내주기 바란다. 예수전에 버금가는 멋진 책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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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봄을 사지만 우리는 겨울을 판다 - 성매매 피해 여성들의 글쓰기 프로젝트
(사)성매매피해여성지원센터 살림 지음 / 삼인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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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글에는 '솔직히'가 숱하게 튀어나온단다.
누구도 그들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자괴감이 밀어낸 말일지 모른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지어낸 말이 아닌 자기들의 말을, 누구에게 털어 놓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던 이들이다. 

봄을 파는 여성들.
시작은 각기 다르지만, 결말은 모두 한결같았다.
사람 사는 삶이 아니었다. 

봄을 파는 여성들도 노는 물이 다르다.
겨울을 파는 여성들도 있는 반면, 극소수지만 봄을 팔아서 한몫 챙길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곳도 있는 얄궂은 곳. 

그렇지만, 대부분은 다방으로, 집창촌으로 성매매 현장을 뛰어야 하는 '슬픈 몸'으로 살아가게 된다.
슬픈 결말. 

용기를 내서 쉼터를 찾게 되고, 재활의 의지를 갖는 여성들의 이야기인데,
한국에서 성매매 여성이 수십 만 명이 될 거라는 기사를 읽은 적 있는 걸 떠올리면, 새발의 피란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어 뛰쳐나오고 싶을 때, 큰 힘이 될 것이다. 

쓰레기통에서 핀 장미로서의 여성.
대한민국 헌법 제 1조에서 이야기하는 '주권'을 제 몸에도 행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국가는 '노예 국가'이다.
실제로 성매매 여성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빚'이란 이름의 굴레고, 그 삶은 곧 노예의 삶이 된다. 

나의 의식에 붙어 있는 몸뚱이지만 나의 의식도, 나의 몸뚱이도
나의 것이 아닌 상태로 살아온 거 같다.
난 진열장의 상품밖에 되지 못했다.
우리는 진열장의 고기처럼 진한 화장과 화려한 겉옷과 짙은 향수로
싱싱한 고기처럼 그들을 유혹한다.
우리에겐 이 세상의 남자들은 돈에 불과했다.
그 남자들에게 우리가 창녀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올 수 없었던 진흙과 같은
내가 살기 위해 나를 버리고 죽여야 하는
난 하루에 열 번, 스무 번씩 나를 죽이고 살린다. 

내가 나를 죽이지 않으면 정말로 죽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라도 살고 싶었기 때문에
그러다가 내가 나를 죽이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죽이기 위해 모여든다. 

내 삶을 찾아준 것은 당신들이지만
이 삶을 얼마나 잘 살아가느냐는 나의 책임입니다.(재수 님, '살림' 상담소에서 일함) 

부산의 남부민동, 속칭 완월동이란 곳에서 일어나는 성매매 여성들의 현실을 고발한 책이다.
달을 감상하는 동네, 玩月洞은 성매매의 대명사가 되어 동 이름도 바꾸었지만, 현실은 여전한 모양이다.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날마다 겨울을 팔 그녀들의 미래에, 따스한 햇살이 함께 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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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네 공부방, 그 사소하고 조용한 기적
최수연 지음 / 책으로여는세상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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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교육청과 시민도서관 등에서 협동하여 '원 북 원 부산 스타트'라는 독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해마다 한 권의 책을 정하고, 그 책 읽기를 홍보하는 것으로, 몇 년 전 '책을 읽자' 캠페인을 벌이던 느낌표! 에서 삘을 받은 프로그램 같아 보이는데, 해마다 가을이면 그 독후감 대회가 열린다. 

오늘 그 본선 심사가 열려서 고딩들의 독후감 170편을 읽고 덤으로 책까지 얻어서 읽게 되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만, 도서관 사서 샘들이 부탁한다고 이쁜 목소리로 전화를 하면 나는 뿌리치질 못한다. 그래서 스케줄이 허락하는 한, 시민도서관에서 부탁하는 심사는 대충 참석하는 편이다. 리뷰 읽는 즐거움도 한몫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치만 수고비도 얼마 안 주면서 가혹하게 부려먹는다는 생각도 없지 않다. ㅠㅜ)

170명의 고딩들이 쓴 독후감을 읽노라니, 읽지 않은 책의 줄거리나 세부까지 머릿속에 콕콕 박혔다.
어쩌면, 감상문들도 내 뇌리에 흐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감천동은 어렸을 적, 친척들이 살고 있어서 자주 갔던 동네다.
지금은 이쁘게 지붕을 색칠하여 원경 사진을 찍으러 전국에서 몰려드는 동네이기도 하지만,
그 동네의 살림 살이는 여전히 열악하다.

  

이런 동네의 특징은,
정상 부모는 맞벌이하느라 아이들을 돌보지 못하고,
많은 부모는 싸움 끝에 정상인 어머니는 가출하고 비정상 아버지가 아이에게 폭행을 일삼는 동네이며,
그 끝은 조손가정에서 희망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이 가득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이 동네에서 산너머 학교인 토성 중학교(현 경남 중학교)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 그 동네 사정을 잘 안다. 

책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최수연 씨는 서른이 좀 넘은 나이에 수녀가 되는 대신에 가난한 사람들의 옆에서 살기로 작정을 하고 근거지도 아닌 부산의 감천동이란 산동네에 쳐들어온다.
그래서 우여곡절끝에 험악한 동네에 일곱 평(휴, 일반 교실이 스무 평이다.) 짜리 공부방을 열었는데,
불행중 다행인지, 다행중 불행인지 아이들은 미어터지고, 아이들이 들이닥치면서 고민과 즐거움은 아우성을 친다.
물론 공부방을 통해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만 적었으리란 이해는 하지만, 글의 틈새에서 놓쳐버린 아쉬움이 가득한 최수연 님의 마음을 교사인 나는 놓칠 수 없다.
원래 재미있는 척 너스레를 떨어도,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은 느낄 수 있는 직감이란 게 있는 법이다.
아마도... 저자가 그간 놓쳐버린 아이들, 더 마음써주지 못해 마음 터지게 아픈 아이들 이야기를 생각해서 쓰기 시작하면 공부방 문 닫아야 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범위가 넓어져 동네 아줌마 아저씨, 노인들도 학생이 되는 곳, 공동체 생활의 기본이 되는 곳으로 성장한 공부방.
한방 진료도 넣고, 내킨 김에 주례도 서는 처녀 원장님. ^^
천사가 따로 없지만,
역시 천사의 존재에 필수적인 것은 <지옥도>다.
지옥이 없는 곳에 천사의 존재는 빛나지 않는 법.

아이들의 독후감을 읽으면서, 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교사가 되고 싶어하던 아이들이, 과연 이런 훌륭한 사랑을 줄 수 있는 교사가 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모습을 만났던 것인데,
나의 대학 시절, 그런 고민들로 대학원 공부를 접고 졸업 후 바로 발령을 받았던 것을 상기하게 된다.
치열하게 아이들을 정말 사랑하며,
방학 중에도 아이들 생각에 뒤척거리게 되고,
늘상 아이들에 둘러싸여 살았고,
개학하는 날이면 아이들 만날 꿈에 잠도 못 이루던 교사 시절을 시작한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의 독후감을 읽는 나는...
이제 22년차 교사가 되어가고 있는데, 과연, 얼마나 초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인지...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처음의 그 마음을 지니고 사는 일이라는데...  

집안 어렵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그렇고 그런 사정으로 맨날 지각하고, 도망가고, 사고 뭉치가 되어버린 아이들을 벌레 보듯 보고 있는 교사가 되어버린 나를 응시하는 일은 몸서리쳐지는 일이다.  

두렵다.
이런 곳에서 열심히 일하는 나를 바라보는 일이...
열심히 일하여 땀방울 흘리는 일은,
교육이란 이름으로 아이들을 가혹하게 몰아치는 일이 아닌가 하는 반성에 마음이 쓰려 술잔을 몇 잔 삼킨다. 

아이들의 편이 되지 않는 교사는 교사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게 내 초심이었는데,
과연, 나는 아이들의 편이 되는 교사 생활을 하고 있기나 한 것인지... 

내일은, 오늘 심사비 포함하여, 후원금으로 몇 푼 기부를 하고 차근차근 생각해 볼 일이다.

 

혹시 이 글 보신 분이라면,  

요기로 후원금 좀 보내주시길...
천사에게 후원금 보내주시면, 복이 돌아올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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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 법학자 김두식이 바라본 교회 속 세상 풍경
김두식 지음 / 홍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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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징가가 말한 바,
교회는 ‘생활의 모든 소요를 지배하고 모든 것을 고요와 질서로 감싸는’ 중세사회의 근간이었다. 

그러나 '모든 소요를 생활로부터 충당하고, 모든 것에 시비와 무질서를 떠메는' 현대사회의 한국 교회의 특징적 돌출에 대하여 한 마디로 정리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아니, 한국이란 사회의 현대는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없는 <문명의 모순>, <이념의 모순>, <권력의 모순>, <학자의 모순>, <경제의 모순>등이 총체적으로 총망라된 곳이기때문에, 모순의 도가니 내지는 모순의 샐러드 보울이라 할 이 사회에서,
교회란 것 하나라고 '고요와 질서'에 봉사하고, '생활의 모든 소요를 지배'하는 위치에 놓이기를 바랄 수는 없으리라.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와 아줌마가 있다는 농담도 있고,
어떤 세상엔 남자와 여자와 군바리가 있다는 농담도 있다.
세상의 교회에는 가톨릭과 개신교와 '한국 교회'가 있다는 말도 들었을 정도로 한국 교회의 발전상은 독특함이 넘친다.
은마 아파트 상가 건물 하나에 십여 개의 교회가 있었다는 전설로부터, 일요일이면 노선버스의 노선을 재획정할 정도로 인파의 흐름이 큰 '순복음 교회'같은 거대 교회들의 소식도 그렇다. 

한국 교회엔 '믿음'은 없고 '신도'만 득실거리는 건 아닐까?
'예수'는 없고 '예수 믿쓥니다'하는 환자들만 바글거리는 건 아닐까?
왜 예수님의 후예를 자처하면서, 십자가진 면류관의 자리에는 서지 않으려 하고, '돈'과 '권력'이 선 자리에는 출첵 100%를 자랑하는 것일까? 
그리고, 한국 교회를 다니는 일은 왜 그다지도 힘들어서 못다니게 하는가... 

이런 의문을 가슴에 품고 있을 수는 있어도, 그걸 입밖에 꺼내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언제 어디서 누군가가 발화자를 지목하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이런 외침을 내지를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헌법의 풍경'과 '불멸의 신성가족'같은 서적으로 유명한 법학자 김두식이 이번엔, 예수의 제자로서 바라본 '교회 속 한국'과 '한국 속 교회'를 적은 책이다.
외부자로서 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내부자로서 교회를 까발기는 것은 섶을 지고 불길로 뛰어드는 것과 같아서,
이런 책자는 10년 대한에 단비처럼 여겨진다.
내가 교회 관련 서적에 무심하여 덜 찾아본 것도 있겠지만, 한국에서 종교, 특기 기독교 교회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불경스런 일이었으므로, 더욱 신선했던 것이리라. 

김두식의 이야기는 어렵지 않은 부분과, 쉽지 않은 부분이 섞여 있다.
특히 4,5장처럼 중세의 역사를 거론하는 부분은 성경은 여러 번 읽었지만(문학 서적 독서와 유사한 것이었다.) 교회 역사에 관심이 많지 않았던 나같은 얕은 독자에겐 완독이 가능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교회라는 공동체가 한국에서 주는 '심리적 위로'와 '경제적 위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피지 못하는 나로서는 교회에 대한 섣부른 비판은 하기 쉬워도, 내막을 자세히 알기는 어려운 부분이었기에 작가의 '고해성사'와도 같은, 또는 애정으로 가득하여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걱정하는 이런 글을 읽는 일은 한 마디로 황송한 일이었다. 

더 높이 올라가야 많이 베풀 수 있다는 '한국 교회'의 모순.
20년 전 국가 권력자에게 복종하라던 교회가 '사학법', '국보법' 투쟁의 일선에 서게 된 모순.
정말 시민을 사랑하여 '서울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서'를 올리신 어느 시장님의 기도문(154)
동성애자에게 돌을 던지는 데 열성적인 한국 교회.
이런 감동의 스토리가 짬뽕되어 덕지덕지 슬러그 덩어리 진 곳이 그곳인데,
자신의 구제 사역의 업무를 <보험 회사>에 넘겨준 교회에 신도들은 모이지 않는다는데,
한국의 교회는 오늘도 번창 일로에 있으니, 진정한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는 노릇이다. 

나같은 교회 인근에 몇 번 발걸음을 떼려다 만 인간이 이런 책을 읽는 것은 소일거리지만,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님의 눈물을 아직도 어루만지며 나날을 기도하는 이에게 이런 책은 한국 교회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길을 보여주는 희망봉이 될 지도 모르겠다.
교회에서 나올 수도 없고, 주일마다 빠질 수도 없는 딜레마에서 자신을 구원하여주는 책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한기총에서 이 책을 판매금지 가처분신청을 했다는 소문을 못 들은 걸로 보아, 그 정도로는 가치없는 책일지도 모르겠다.   

외부자인 나로서야 예수님의 사랑을 알 리 없지만,
교무실 창틀 너머에서 바람타고 넘어드는 금목서의 은은한 향 속에서도 예수님 사랑하라는 목소리는 들을 수 있을 듯 하다.
공동체로서의 교회나 사찰에는 다니지 않지만,
오늘 하루도 아이들을 행복한 눈으로 바라보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는 듯 하다.
아이들을 예수로 보고, 가장 낮아보이는 넘, 가장 보기 싫은 넘을 예수님 보듯 하라던 말씀을 기억하는 일로도 나는 어느 정도 예수님의 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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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의 첫 글자를 모으면 헬라어러 물고기를 뜻하는 '익투스'가 되었더라는 이야기는 물고기가 왜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는지 보여주는 재미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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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눈물'입니다 - Tears in the Congo
정은진 글.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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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진, 포토저널리스트...
난 그에게 한 가지 사과할 것이 있다.
그의 전작이었던 '카불의 사진사'를 두고 혹평을 했던 일이있었는데, 뭐, 종이가 아깝다고 욕을 막 했더랬다. 

이 책을 읽노라니, 아프가니스탄이나 콩고나 사진을 찍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작업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작가 자신이 아프간의 사진 작업이 훨씬 쉽다고 했으니, 나의 혹평에도 수긍을 해 줄는지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카불에서 콩고로 옮겨간 그의 글들은 주제 면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고, 사진도 감정이 짙어졌다.
사진 속에서 사진가의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라이온 킹의 대륙, 아프리카.
라이온 킹의 후예들은 마치 초원위의 얼룩말들이나 국립공원 속의 동물들로 남은 지루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 대륙의 생생한 삶을 잃어버리고,
그 아름다운 원색의 옷들을 상실한 채로...
찢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르완다의 인접국, 콩고 민주공화국. 

그 여성들의 삶은 죽음만도 못한 것이었다. 

피스툴라 수술.
전쟁으로 인한 강간 뿐 아니라, 성기 훼손에 이르는
이런 무자비한 경험을 겪은 여성들의 삶에 바치는 정은진의 사진이 따뜻하다.
그들의 검은 피부 아래로 흐르는 따뜻한 피는 흰 피부의 그들과 같은 것인데,
난민들에 대한 지원 역시 부족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국제 사회란 것 순 뻥인 모양이다. 

정은진이 콩고를 통해 상도 받고, 더 깊은 사진가가 되기를 기원한다.
그렇지만, 남자들도 험해서 고개를 젓는 동네를 오가는 그에게 우선은 안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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