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랑은 왜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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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랑을 가지고 시비인가... 를 한참을 생각했다.

나는 결국 김영하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시비걸 대목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이란 것이 <주제>를 구현하기 위해, 인물과 사건과 배경을 <구성>하며, 그 <배경>을 창조해야했던 과거의 소설가들에 비해, 요즘의 소설가들... 과연 소설가들이라 이름붙일 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들은 주제를 함축하기 위한 구성과 배경에는 관심이 적다. 유기적인 하나의 작품에서 '창조적 예술성 추구의 장인 정신'을 드러내기는커녕, 기존의 자료들 중 몇 가지의 정보들을 끌어모아서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하고, 그 빈 틈들에 자기의 독창성이라 착각하는 기교를 몇 가지 양념처럼 뿌린다. 마치 기존의 음식들을 몇 가지 짬뽕해 놓고 <퓨전>이란 새로운 듯한 이름을 붙이는 요리들이 유행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퓨전>은 유행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본질>은 아닌 것이다. 퓨전이 본질인 척 하는 시대가 포스트 모던의 시대지만, 결국 노래방에서 10년 뒤까지 우리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요즘 유행하는 가수들의 랩은 아닐 것이다.

아랑의 전설... 왜 아랑인가. 몇 가지 설이 있다. 그런데 구전 문학이 다 그렇듯, 그 설들에는 무수한 빈틈이 있다. 김영하는 그 빈틈을 노려서 소설 한 권을 구성한 것이다. 그나마 난 이 책이 장편이기 때문에 읽었던 것 같다. 그의 단편 <호출>도 있었지만, 그건 나중에 더 시간이 나면 읽어볼까 한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차세대 작가'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 모양인데, 글쎄다. 그 판단은 <호출>과 <검은 꽃>을 읽고 나서 내릴까 한다. <엘리베이터...>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 그리고 <아랑은 왜>까지 읽은 내 생각으로, 아직은 차세대 작가라고할 만한 어떤 것도 그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다.

조용필의 노래가 십 년을 풍미했고, 아직도 그의 콘서트는 표를 구하기 힘들다. 그 시대의 소설은 이런 것이었다. 그러다가, 서태지가 음악에 대한 편견을 박살낸 후, 알아듣지도 못하는, 심하게는 우리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들이 씨부렁거리는 영어 찌꺼기들을 노래라고 하는 곳까지 이르른 지금, 나는 그것들을 <이 시대의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기존 음악의 <해체>로서만 기능할 뿐, 새로운 무엇이 되진 못하는 것이다. 조용필 시대의 음악은 라디오의 음악이고 TV의 음악이었다. 기껏해야 삼천원짜리 테이프의 음악이었던 시대에는 음악이 상업적으로 변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서태지 이후로, 90년대 이후로 나라가 먹고살만 해지면서 청소년들이 음악을 유통하는 계층이 되고, 그러다 보니 학교 제도 비판, 영어 랩의 유포, 꽃미남(녀) 가수들의 유행, 생각있는 척하는 노래들의 상업화 등의 추세를 보여 준다. 그것 역시 <이 시대의 음악>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로지 상업성을 위해 이합집산이 반복될 뿐, 음악은 해체된 지 오래 아닌가?

핑클이 부서지고 이효리는 더이상 음악을 하지 않는다(아, 간혹 10분간 같은 노래를 하지만, 그걸 음악이라 보긴 어려운 수준이다). H.O.T가 부서지고 문희준은 '롹'을 하면서 욕을 먹고 있다. <해체>에 일조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소설도 그런 시대를 맞은 것 같다. 포스트 모던의 시대. 방향성 상실의 시대. 그 이전에는 이렇게 살자, 저렇게 하는 것이 멋지지 않은가... 등의 주제를, 모던한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던 문학이, 특히 소설이, 이 시대에 와선, 한 때의 기호에 맞기만을 구하고 있다.

이규보의 <論詩(논시)> 중 이런 구절이 있다.

<한 때의 기호에 맞기만을 구하고 있다. 인하여 화려함만 일삼는구나. 이로써 여러 사람 현혹하여서, 뜻의 궁핍한 바를 가리려 한다. 이런 버릇이 이미 습성이 되어, 문학의 정신은 땅에 떨어졌도다.>

어찌 이 시대의 한계리오, 이미 천년 전에도 이런 일들은, 떠오르고 가라 앉는 지표들은 선각자들에게 포착되었나니..... 새 시대의 문학은 어떤 것일까... 그의 경쾌함, 자유분방한 상상력 만인 소설에 몹시 불만인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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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5-01-04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근데...<호출>이랑 <검은 꽃>도 읽으실 꺼예요?

김영하 안 좋아하시면 더 안 읽으셔도 될 것 같아요.

독서는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거쟎아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또 올께요.

글샘 2005-01-05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독서는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거지요. 근데 문학 선생님은 취향이 달라도 읽어 둬야 아이들 독후감을 읽을 수 있답니다. 직업적 글읽기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다 보니 눈에 띄는대로 읽게 되고, 작가를 디립다 까는 일도 많은 거 같습니다. 호출이랑 검은 꽃도 읽어얄 것 같네요. ^^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
공선옥 지음 / 창비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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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그의 글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이 책에 수록된 곡성 역에서 만난 할아버지 이야기 말이다.

그의 글은 슬픈 빛깔이다. 시골에서 나서 도시에서 가난하게 학교를 다니고, 다시 시골로 돌아간 공선옥의 삶이, 그 바랜 빛깔이, 아니 더 풋풋해진 풀빛 삶이 되살아나 이 책에 기록되어 있다.

하긴 우리 어린 시절에 가난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나보다 3년 일찍 태어났고, 그래서 이 땅의 어느 곳에 살았건 간에 비슷한 원형질을 녹이고 살아왔던 탓인지, 그의 글은 하나하나가 내 과거를 떠올린다. 새마을 운동과 뿜빠뿜빠 하던 쓰레기차의 새마을 노래. 쓰레기가 없던 농촌을 버리고, 모든 것이 쓰레기가 되어 버린 도시의 삶까지...

그리고, 그의 고향 곡성의 목사동면... 내 스무 살 시절의 농촌활동 추억이 담긴 곳이다. 당시는 전두환 파쇼정권이 집권하고 있던 무지막지하던 시절이라, 농활 대학생들을 내쫓지 않으면 추곡수매에 불리함을 입을 지 모른다는 협박에 며칠 만에 우리는 농활을 접어야 했다. 그 때 흘렸던 눈물들은, 그의 고생에 비하면 배부른 고민이었던 것 같다. 

농촌의 어리숙함, 순진함, 순박함이 그의 글에는 질박하게 묻어있지만, 그리고 미쳐돌아가는, 너무 밝아서 오히려 그늘을 더 많이 만드는 세태에 비판적이기도 하지만, 그의 비판은 날이 죽어 있다. 날카로운 사금파리의 섬뜩한 날이 아닌 언제나 바른 것은 옳다고 할 줄 아는 여유로운 날이라 하겠다.

세상은 빨라야 남에게 앞서고, 더 높이 올라가야 하고, 남을 짓밟고서라도 골든벨을 울려야 하는 시대로 달려가고 있지만, 그의 자운영 꽃밭에는 한숨 섞인 과거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따스한 그의 글맛이 시골의 낭만과 여유, 무엇보다 사람사는 재미를 전해주는 훈훈한 책이었다. 소설가들의 수필집에서 느끼게 되는 혐오감을, 돈벌이에 대한 지겨움을 그는 오히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수필문학으로 잘 살리는 느낌이다.

 

생애의 어느 한때 한순간, 누구에게나 그 한순간이 있다.
가장 좋고 눈부신 한때.
그것은 자두나무의 유월처럼 짧을 수도 있고, 감나무의 가을처럼 조금 길 수도 있다.
짧든 길든, 그것은 그래도 누구에게나 한때, 한순간이 된다.
좋은 시절은 아무리 길어도 짧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짧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좋은 것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우리 생애의 모든 것들이 영원하다면
 어찌 좋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좋다는 개념 자체를 우리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 공선옥의 에세이집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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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5-01-05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은 책갈피가 흰 색인데, 독특했다.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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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나? 있을까? 과연 이 작가는 '나'가 어떤 존재인지 상상해 본 것일까? 따뜻한 물 속에다 몸을 담그고 혈관의 액체를 빨리 순환시킨 다음 동맥을 그으면, 나를 파괴할 수 있는 것인가? 과연 '나'란 '나'의 본질이란, 그렇게 내 이 칠십 킬로그램짜리 몸뚱아리에 한정된 것이란 말인가. 껍데기를 안고 다니는 나, 이 나의 껍질이 나라면 나는 나를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나란 말이냐.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미켈란젤로의 껍질처럼, 우리가 뼈다귀와 수분, 또는 줄이고 싶어하는 체지방과 단백질 세포들에 불과하다면 내 몸의 순환을 멈추는 일은 단순하다. 옥상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고, 깊은 물로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껍질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세대가 가벼워졌다고는 해도, 그렇지, 늘상 엘리베이터이 끼어있는 가엾은 존재로 사는 것이 나라고 해도. 그렇게 허둥거리고 산다는 것이 늘 싸구려 자판기 커피잔처럼 무가치하고 금세 식어버리는 존재라 하더라도, 그토록 쉽게 목숨을 포기하는 것은 권리하고 할 수 없다. 물론 어떤 종교인들은 신의 존재를 역설하면서, 신의 뜻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자살을 범죄라고 지껄이기도 하지만, 신의 존재 이전에, 나는 '나'란 존재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것이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늘 나의 본질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바라보는 대타적 존재로서의 '나'이지 않았던가. 나는 한 사람의 남편이고, 아이의 아빠고, 부모의 자식이고, 형제의 형제고, 사위고, 자형이고, 동서고, 제부고, 선생님이고, 동료교사고, 후배고, 선배고, 제자도 되고, 강사도 되고, 대학원생도 되고, 교통위반자도 되고, 손님도 되고, 행인도 되고, 도서관 출입자도 되고, 국민이기도 하고...

그런 것들 다 젖혀 두고, 나는 무엇인가. 그러고도 나가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면, 나는 껍질이다. 죽어도 되고,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나를 파괴할 권리를 세 편의 그림과 얽어서 역설한들, 그 권리가 긍정되지는 못 한다. 세 번의 경험 또는 실험을 통해 결론을 내린 것은, 귀납추리의 논리가 될 수 없다. 유비추리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소설이 논리적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는 제목부터 도발적으로 논리적인 양 지껄이고 있다. 아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없다. 그에게 우리는 설득당해서는 안 된다. 정말 '나'를, '나의 본질'을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이런 글을 쓰진 않을 것이다.

그는 외로워보인다. 사진 속에서도 몇몇의 행인들을 배경으로 외로워보이고, 그의 글의 편린들에서 비치는 날카로운 금속성의 함석조각같은 반짝이는 빛깔들도 차가워보인다. 개똥철학의 레고들을 조합해 놓은 듯한 글들은 간혹 매력적이긴 하지만, 그에게 결론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센(千)과 치히로(千尋)는 한 글자 차이지만, 본질을 놓쳐버린 치히로는 목욕탕 때밀이일 뿐이다. 가치로운 삶을 추구하지 못하는 치히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 전혀 예감도 기대도 할 수 없는 존재인 센. 그러나 치히로는 원래 사랑받는 딸이었고, 단란한 가정의 훈기를 느끼는 존재였다. 우리는 센이 아니다. 우리는 각자의 허상인 센을 과감히 떨치고 '자기의 치히로'를 찾아야 한다. 하쿠가 그런 말을 한다. '절대로 자기 이름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치히로를 잊고 센으로만 살아간다면... 자기를 파괴하고 싶을 것이므로... 

차라리, 황지우의 글들에서 나는 훨씬 나와 유사한 고민을 읽는다. 김영하의 술술 잘 읽히는 소설을 읽어 놓고, 다른 유사한 풍의 작가들보다 훨씬 덜 지겹게 읽어 놓고 이런 화풀이를 하는 것은 포스트 모던의 방향상실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것이다

                                                                         황 지 우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 줄 수도 없다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 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 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쌍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 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 주면서

먼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십삼 도

영하 이십 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오 도 영상 십삼 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어떤가, 김영하씨. 아름답지 아니한가. 자기를 파괴하지 않고도 흐린 날, 주점에 앉아 나무를 바라볼 만도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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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4-12-17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글을 잘 쓰시네요. 국어 교사이신가요?

특히, '본질을 놓쳐버린 치히로는 목욕탕 때밀이일 뿐이다'란 부분이 마음에 와 닿네요. 김영하 소설 그저 재미있게만 읽었었는데.... 황지우 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것이다> 처음 만났는데, 마음이 저립니다. 서재 즐겨찾기 했어요. 앞으로 자주 올께요.

글샘 2004-12-18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워요. 네. 국어교사가 직업이긴 하지만, 글을 잘 쓴다는 소린 별로 듣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낯선 말이군요. ^^ 그래도 칭찬은 들으면 기분 좋은 일이에요. 그쵸?

코마개 2005-01-03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국어선생님 이시구나. 저도 그 직업이 부러웠는데 아이들을 매우 싫어하는 관계로 생각만 해봤습니다. 김영하의 책중에 포스트잇에 보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책이 영화엔가 나오는 장면을 서술한 글이 있습니다. 읽어보셨는지? 전 한참을 깔깔대고 웃었답니다.

글샘 2005-01-04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어선생님. 참 매력적인 직업이죠? 전 그런 주제는 못 되지만... ^^ 전 김영하를 싫어했는데, 가끔은 그런 객관적이고 쿨한 글이 편할 때도 있더라구요.

2005-01-17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 동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6
이문구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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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부터 새마을운동의 뿜빠뿜빠... 새벽종이 울렸네... 하는 통에 도시화, 산업화 바람에 이지러지고 문드러진 농촌의 모습을 그린 소설들도 드물지만, 이문구의 우리 동네는 그 판세에서 농촌의 '사람'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관촌수필에서 그 이전의 피폐함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났던 민중들의 파편적인 모습들이 '우리동네 X씨'에 와서는 좀 더 사람 냄새 진하게 농촌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파행으로 치닫던 농촌의 모습을 무지렁이 농부들의 생각이 오고가는대로 종말의 반전같은 것은 기대할 것도 없이 바보스럽다면 바보스럽고 우악스럽다면 우악스럽게 살아있는 것이 우리 동네이다. 그 김씨 리씨 황씨 등의 '장삼이사'들은 소외된 농촌에서 살 수 밖에 없는 농민들, 그러나 깨어가고 있는 농민들, 정부에서 하라는 대로 해서 손해만 잔뜩 입어 볼이 부을대로 부어 있는 농민들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마치 신경림의 농무를 읽는 듯한 울분, 답답함, 처량함을 막걸리 한 사발에 꿀꺽 넘기기도 하지만, 행정편의주의, 농협 등 관청의 부조리한 개입, 한창 바쁠 때 불러내는 민방위교육의 허구성, 각종 농사 파동과 유흥업이 침투하고 있는 농촌, 투기에 빠진 사람들... 을 바라보는 냉철한 비판은 이 소설을 농민소설로 부를 수는 있게 해도, 사금파리의 날카로운 위태로움을 갖지 않은 넉넉한 입담과 여유있는 해학으로 충실하게 묘사하는 독특한 이문구의 문체는 70년대 농촌의 팍팍한 현실을 웅변하고 있다.

특히 우리동네 리씨의 이장의 아내 거짓 방송 대목에서는 농민과 관청의 대립관계, 모순을 천연덕스럽고 능청맞게 넘길 줄 아는 농민들의 지혜를 해학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우리 농촌에는 정말 이름도 모를 들풀처럼 살아갔던 숱한 엑스씨들이 있었다. 그 엑스씨들이 이장을 맡고, 구장을 맡아 왔고, 농사란 것도 지식으로써가 아닌 경험으로 짓는 것이었다. 거기엔 불필요한 사람들이 없었고 환경에 피해를 주는 물질이란 애초에 없었다. 지구상에 원래 필요하지 않은 것은 없지 않았던가. 남아도는 사람이 없었고, 남아도는 물질이 없던 농촌에서 조국 근대화, 한국적 민주주의의 횡포가 남용되면서 비효율적인 농촌의 개량, 효율적인 도시로의 유입이 강조되었던 새마을운동의 어둡던 시대.

좋아졌네, 좋아졌어... 로 시작되는 열두곡의 새마을노래는 아직도 우리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데, 그 조국 근대화의 기수들은 군대처럼 효율만이 가득한, 여유와 넉넉함, 나눔의 정서가 사라지고 주름살만이 깊이 남은 농촌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이 소설은 생생한 르포로 보여주고 있다.

이문구의 능수능란한 언변과 묘사력이 아니었다면, 생경한 민중의식을 전파하려는 소설 나부랭이로 전락할 수도 있는 소재였고, 주제였지만, 역시 이문구의 눙치는 문체는 민중의 건강한 삶의 근간을 훌륭하게 살리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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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4
윤흥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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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아홉 켤레. 권씨의 자존심은 그것 뿐이었다. 아니, 자존심이란 것을 가질 수 없게 하는 현실에 저항하며 안동 권씨라는 조선시대에는 한 끗발 했던 그걸 가지고 스스로를 좀 높게 보이려 했었다.

칠십년 대 도시 빈민의 삶. 그리고 국가 권력의 간섭과 인간의 파멸의 스토리를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희극>의 범주에 넣을 만 하다. 특히 권씨의 강도 행각에서는 사뭇 여유와 웃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희극이라고 볼 수만은 없게 하는 것은, 작품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페이소스>일 것이다.

'굿 바이 마이 프랜드'란 영화가 있었다. 병에 걸린 친구의 죽음을 친구는 신발을 바꿔 신음으로써 극복한다. 신발과 죽음. 사자밥을 차릴 때, 밥상에는 반드시 짚세기 한 켤레를 얹어 준다. 죽음과 신발. 비싼 양복도 입고 죽고, 지갑도 가지고 죽으면서 유서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는 구두 한 켤레. 죽음과 신발 사에엔 어떤 함수 관계가 놓인 걸까.

구두는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콩쥐팥쥐의 꽃신처럼 계급의 상승을 은유하기도 한다. 신발을 바꿔 신으면 계급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고무신, 그것도 다 떨어진 검정고무신이 어울릴듯한 처지의 권씨가 고집하는 반짝이는 구두는 언젠가는 나도... 하는 오기와 상승의지를 담은 은유이기도 하다.

윤흥길의 힘은 진지해서, 너무 진지해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조금 비꼬고 조금 희화화해서 이야기로 엮어 낸다는 데 있다. 통일의 염원을 말하지 못하던 시대에 공산군 아들을 둔 할머니와, 피난와있는 국군 아들이 전사한 외할머니 사이의 갈등으로 비유한 <장마>에서 그랬듯이, 이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권씨는 비록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고 있지만, 그 시대에 말할 수 없던 것을 그는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

찰스 램과 찰스 디킨즈에 대한 그의 생각도 재미있었다. 불우한 유년기, 빈민에 대한 연민을 그린 두 작가. 그러나 램은 따스한 인간이었으나 디킨즈는 유복해진 후 차가워진다. 우리는 누구나 램처럼 살고자 한다. 그러나 사실은 디킨즈의 편에 더 가까운 이기심으로 무장되지 않았던가 하는... 지식인의 반성이 묻어나는 좋은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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